경고 시리즈
18) 양의 옷을 입은 이리 - 겉은 성도이나 속은 탈취하는 거짓 교사들
마태복음 7:15-20
15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16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17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18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19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
20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들어가는 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요즘 전화 한 통 받는 것도 조심스러운 시대가 됐습니다.
"검찰청입니다." "택배가 반송됐습니다." "자녀분이 사고를 당했습니다."
목소리는 다급하고, 말투는 공손하고, 심지어 진짜 기관 이름과 전화번호까지 뜹니다.
나중에 알고 보면 전부 가짜입니다.
그런데 신기한 건, 속는 분들이 어리석어서 속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오히려 성실하고, 남을 잘 믿고, 자녀 걱정 많은 분들이 더 잘 속습니다.
왜냐하면 그 목소리가 딱 우리가 믿고 싶은 모습으로 오기 때문입니다.
가짜 명품에 속으면 돈을 잃습니다.
보이스피싱에 속으면 평생 모은 돈을 잃기도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가짜 복음에 속으면 무엇을 잃습니까.
영혼을 잃습니다.
그것도 본인은 잃는 줄도 모르고 살다가 잃습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을 마무리하시면서 아주 무거운 말씀을 하나 던지십니다.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헬라어로 이 "삼가라"는 προσέχω, 프로세코라는 단어인데,
지금 한 번 조심하고 끝내라는 뜻이 아니라 "계속, 평생 눈을 부릅뜨고 있으라"는 현재형 명령입니다.
왜 이렇게까지 강하게 말씀하실까요. 거짓은 절대로 거짓의 얼굴로 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첫째, 거짓은 언제나 가장 선한 모습으로 옵니다 (15절)
거짓은 결코 거짓처럼 오지 않습니다.
오히려 가장 신뢰할 만한 얼굴로 옵니다.
예수님이 쓰신 단어를 하나씩 뜯어보면 이 말씀의 무게가 더 실감이 납니다.
"거짓 선지자"는 헬라어로 프슈도프로페테스인데, "프슈도"는 가짜, 위조라는 뜻입니다.
요즘 말로 하면 정확히 "짝퉁"입니다.
그리고 "양의 옷을 입고"에서 옷은 엔뒤마, 겉에 걸치는 옷을 말합니다.
당시 선지자들이나 목자들이 털옷 종류를 즐겨 입었을 가능성은 있습니다만,
이 부분은 확실한 고증이라기보다는 정황적 추정으로 봐 주시면 좋겠습니다.
중요한 건 옷 자체가 아니라, 겉모습만으로는 진짜 목자인지 가짜 목자인지 구별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거짓 선지자가 앞으로 올 것이다"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미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이건 새로운 이야기가 아닙니다.
예레미야 시대에도, 에스겔 시대에도, 미가 시대에도 거짓 선지자들은 늘 있었습니다.
그들의 공통점이 하나 있는데, 예레미야 6장에 보면 하나님은 이렇게 책망하십니다.
"평강이 없는데도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도다."
거짓은 언제나 듣기 좋은 말로 옵니다.
사람을 불편하게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위로하고, 격려하고, 눈물까지 흘려줍니다.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싸운 대상도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습니다.
갈라디아 교회에 들어온 거짓 교사들은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말했습니다.
다만 거기에 하나를 더 얹었습니다.
"예수도 믿어야 하지만 할례도 받아야 한다."
복음에 무언가를 하나 더하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복음이 아닙니다.
그래서 바울은 단호하게 말합니다.
다른 복음은 없다고. 오직 그리스도, 그것 하나입니다.
사도행전 20장에서 바울이 에베소 장로들에게 눈물로 당부한 말도 같은 맥락입니다.
그는 "사나운 이리가 여러분 가운데 들어와서 그 양 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심지어 "여러분 중에서도" 그런 사람이 일어날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바깥에서만 오는 게 아니라 안에서도 나온다는 겁니다.
고린도후서 11장에서는 더 놀라운 말씀을 하십니다.
"사탄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사탄조차 사탄의 얼굴로 오지 않는다는 겁니다.
여러분, 우리도 예외가 아닙니다.
화려한 말에 약하고, 규모가 큰 사역에 약하고, 유명한 이름 앞에서 판단력이 흐려질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기도는 "저는 속지 않습니다"가 아니라 "주님, 저는 너무 쉽게 속습니다"입니다.
자기 판단을 붙드는 사람이 아니라 말씀을 붙드는 사람이 겸손한 사람입니다.
오늘의 질문 오늘 여러분이 듣는 설교나 읽는 글을 한 가지 질문으로 점검해 보십시오.
"이 말이 나를 예수님께 더 가까이 가게 하는가, 아니면 사람이나 나 자신을 자랑하게 하는가."
이것이 분별의 출발점입니다.
둘째, 진짜와 가짜는 결국 열매로 드러납니다 (16-18절)
겉모습으로 알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열매로 보게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7:16-18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겉옷만으로 구별이 안 된다면, 무엇으로 구별합니까.
예수님은 "열매로"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 열매는 헬라어로 카르포스인데, 그냥 눈에 보이는 성과나 결과물을 뜻하는 게 아닙니다.
그 나무가 무엇인지, 그 뿌리가 어디에 있는지를 결국 드러내는 것이 열매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정말 중요한 문장이 하나 나옵니다.
18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이 순서를 놓치면 안 됩니다.
나무가 먼저이고, 열매는 그다음입니다.
가시나무가 아무리 애를 써도 포도를 낼 수 없고, 엉겅퀴가 아무리 노력해도 무화과를 낼 수 없습니다.
존재가 행위를 낳는 것이지, 행위가 존재를 만드는 게 아닙니다.
이건 저희가 얼마 전 요한복음 15장 포도나무 말씀을 나눌 때도 함께 확인했던 원리와 문법이 같습니다.
다만 오늘 본문의 초점은 조금 다릅니다.
요한복음 15장이 "내가 정말 주님 안에 붙어 있는가"를 스스로 살피는 본문이라면,
오늘 마태복음 7장은 "저 사람이 정말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인가"를 분별하는 본문입니다.
대상이 다릅니다.
하지만 원리는 똑같습니다.
열매는 만드는 게 아니라 드러나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종종 열매를 잘못 봅니다.
교회를 오래 다니다 보면 이런 경험, 다들 한 번쯤 있으실 겁니다.
처음엔 정말 화려했던 사역, 사람도 많이 모이고 말도 은혜롭던 어떤 모임이,
시간이 지나고 보니 정작 그 중심에 그리스도가 없고 사람만 있었다는 걸 뒤늦게 깨닫는 경우 말입니다.
우리는 종종 열매를 크기로, 숫자로, 화려함으로 판단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열매는 다릅니다.
그 가르침이 사람을 겸손하게 만드는가, 회개하게 만드는가, 십자가를 더 붙들게 만드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게 참 쉽지 않습니다.
우리 눈은 자꾸 화려한 것에 먼저 가니까요.
이것이 우리의 연약한 모습입니다.
정죄받을 일이 아니라, 그래서 더욱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야 할 이유입니다.
이번 주, 내가 누군가에게 신앙에 대해 이야기할 때 무엇을 자랑하는지 한번 돌아보십시오.
나의 헌신, 나의 봉사, 나의 신실함을 먼저 말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대화 중 딱 한 번이라도, 나의 행위 대신 그리스도의 은혜를 말해보십시오.
셋째, 심판은 진짜입니다.
그러나 나무를 바꾸시는 분도 계십니다 (19-20절)
마태복음 7:19-20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19절은 결코 가벼운 말씀이 아닙니다.
열매 없는 나무는 찍혀 불에 던져진다고 하십니다.
이 말씀 앞에서 혹시 마음이 덜컥하시는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열매가 있는가, 없는가." 이 질문 자체가 두렵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오해하면 안 되는 지점이 있습니다.
이건 한때 진짜 좋은 나무였다가 나중에 뽑혀나가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요한일서 2장 19절이 이 원리를 정확히 짚어줍니다.
"저희가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더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으려니와."
처음부터 그 뿌리가 그리스도께 있지 않았기에 결국 열매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진짜로 주님께 속한 이들의 견인을 흔드는 본문이 아니라, 끝까지 열매 없이 남은 거짓 나무에 대한 경고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묻게 됩니다.
나는 어떻게 좋은 나무가 될 수 있습니까.
여기가 바로 오늘 본문이 결국 우리를 데려가는 자리입니다.
18절을 다시 보십시오.
나무가 좋아야 열매가 좋습니다.
그런데 저는, 여러분은, 태어날 때부터 좋은 나무가 아니었습니다.
에스겔 36장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약속하십니다.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나무를 바꾸는 일, 그것은 우리의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입니다.
주님은 저와 여러분을, 나쁜 나무였던 자리에서 통째로 뽑아 그리스도 안에 다시 심어주셨습니다.
이게 복음입니다.
열매를 맺어서 그리스도께 속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 속했기 때문에 열매가 맺히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순서를 바꾸면 우리는 평생 열매로 나 자신을 증명하려는 피곤한 신앙을 살게 됩니다.
순서를 바로 알면, 우리는 감사함으로 열매를 맺는 자유로운 신앙을 살게 됩니다.
오늘 집에 돌아가시거든, 조용히 하나님 앞에 이 한 가지를 아뢰어 보십시오.
"제가 열매처럼 보이려고 애썼던 것 중에, 사실은 주님이 아니라 저 자신을 자랑하려던 것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그리스도께 뿌리를 내려달라고 구해보십시오.
크게 무엇을 바꾸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오늘 딱 이 한 가지 기도면 충분합니다.
나가는 말
예수님은 요한복음 10장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결국 분별의 마지막 자리는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 관계의 문제입니다.
우리가 목자의 음성을 아는 양이 될 때, 이리의 목소리도 자연히 낯설게 들리기 시작합니다.
여러분, 겉옷을 보지 마십시오.
화려함을 보지 마십시오.
그 중심이 그리스도를 향해 있는지를 보십시오.
그리고 무엇보다, 나 자신이 지금 누구의 손에 심겨진 나무인지를 먼저 확인하십시오.
저도 이 자리에서 매일 다시 확인합니다.
저는 스스로 좋은 나무가 될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저를 다시 심어주신 분이 계십니다.
여러분도 그렇습니다.
그 손을 붙들고 이번 한 주도 걸어가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