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설교
[160.10]
지상설교
밥(食)과 어머니
박인준_교화관장
오늘 저는 밥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준비했습니다만,
사실은 어머니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고향에 계신 제 어머니는
올해 아흔 한 살의 고령이십니다.
제 어머니는 무슨 특별한 분은 아니고,
남들과 같이 아주 평범한 한국의 어머니이십니다.
그러면서도 우리의 어머니들이 다 그러하듯이
어딘가 어머니만의 특별함을 간직한 분이십니다.
제가 부산에서 생활하고 있을 때는,
매주 또는 격주로 노모를 뵈러 고향을 찾아갔었는데,
서울 오고부터는 한 달에 한 번도 어려워졌습니다.
어머니께서는 3남 3녀를 낳아 길러놓았지만
정작 당신은 고독하게 지내십니다.
애써 혼자 지내는 게 편하다고 하시지만,
어머니의 그 마음을 저는 잘 압니다.
본가 옆에 동생이 살고 있지만,
동생도 하는 일이 있어 제 코가 석자일 지경이니,
저는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아들이 보고 싶기는 한데, 차비 써 가며
자주 오는 것을 걱정하는 눈치셨습니다.
그런데 어쩌다 일이 있어 가지 않으면
“와 이번 시일에는 안 오는가?” 하고 전화를 하십니다.
아들이 오면 반가우면서도
비싼 기름 값, 도로비 등을 생각하면
당연히 아까우실 거고, 또 아들 밥해줄 것을 생각하면
걱정이 되시는 모양입니다.
당신 혼자 계시면 대강 해 먹어도 되지만
아들이 오면 그렇게 할 수 없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노모께서 차린 밥상을 마주하고 앉아서
식고하고 밥을 먹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반찬이 간이 맞지 않습니다.
고령이 되면
입맛을 잃기 때문이 아닐까 하고 생각합니다만,
노모는 그걸 모르시는 모양입니다.
그래서 내수도가 함께 가주면 정말 좋겠지만,
내수도도 일이 있으니
매번 같이 갈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런데 내수도가 오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아들인 내가 직접 하면 될 일입니다.
그러지도 못하면서 속으로 불평을 하고 있는
자신이 한심하기까지 합니다.
어머니 한울님이 내게 주시는 밥인데,
그 밥을 먹으면서 간이 맞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불경스러운 일이지요.
그래서 혼자 많이 자책하기도 했습니다.
고등학교 때의 친구 중에
고아원에서 학교를 다니는 친구가 한 명 있었습니다.
그는 문학 소년이었는데 나하고는 뜻이 맞아,
그 친구를 고아원에서 빼내어, 내 자치 방에서
함께 한 2년간 생활하였습니다.
그 친구가 고아가 되기까지의 사연이 기구한지라,
그 친구 이야기를
책으로 엮어볼까 하는 게 내 생각이었습니다.
‘저 하늘에도 슬픔이’라는 이윤복의 이야기가
크게 바람을 불러 일으켜서 잘하면
이 친구 이야기도 성공할 수 있겠다 싶었지요.
하지만 현실은 내가 생각했던 것처럼
그렇게 녹록하지는 않았습니다.
책 내는 일은 보기 좋게
출판사로부터 거절당하여 실패하고 말았지요.
학교를 졸업하고 그 친구와도 헤어졌습니다.
세월이 흘러 내가 대학을 나와서
경남 통영의 한 학교에 발령받아 근무하고 있는데,
그 고아 친구가 찾아왔습니다.
고등학교 졸업할 당시, 고아원장의 주선으로
부산의 어느 동사무소에
임직으로 들어갈 수 있었답니다.
몇 년 동안 월급을 부지런히 모았더니
제법 돈이 모였더랍니다. 돈이 모이자
그 친구는 동사무소를 때려치우고
여름 한철 해운대해수욕장에서
피서객을 상대로 장사를 시작했는데,
그 해 따라 여름 내내 장마가 지는 바람에
다 말아먹고 오갈 데 없어 나를 찾아온 것이었습니다.
그때 나는 하숙하는 처지인지라
친구 하숙비까지 감당할 수 없어
그 친구를 고향집 어머니께 부탁하였습니다.
고향의 어머니께서 아들의 친구인지라
한 석 달 정도 밥을 먹여 주었습니다.
그 친구 신세 지는 일이 미안해서였는지
“어머니가 해주시는 밥이 우째 이리도 맛있을까예?”
하고 너스레를 자주 떨었다고 합니다.
그는 뒷날 신학대학을 나와서 지금은
어느 교회 목사가 되었는데,
가끔 그 친구 이야기가 나오면 어머니께서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천도교 믿는 어머니가
예수교 목사를 키웠네”하고 웃으십니다.
어쩌면 그때 어머니가 지어준 그 밥이 그 친구에게는
훗날 목사에 필요한 영양분이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물론 그 친구가
예수교 재단에서 운영하던 고아원 출신이라
예수교를 외면할 수 없었겠지만,
그 친구가 곤경에 처해 있던 한 시절
내 어머니의 밥이 그를 살려주고
나아가 그를 목사로 키웠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지 싶습니다.
밥이 사람을 가리지 않듯
내 어머니 또한 사람을 가리지 않고
밥을 먹여줌으로서 밥의 덕을 베푸신
진짜 천도교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가 어떤 사람인가를 따지지 않고
그냥 밥을 먹여 준 것입니다. 한울이 선악을 따지나요?
본가엔 사람으로 치면 100 살이나 된
늙은 암캐 한 마리가 있었습니다.
시를 쓰시는 서울의 동덕 한 분께서
마음 써서 보내준 북한산 풍산개였는데,
아파트에서 한 3개월 정도 기르다가
더 이상 아파트에서는 기를 수가 없어
고향집에 데려다 놓았습니다.
개 이름이 화성이었는데, 화성이는
참으로 영특한 짐승이었습니다,
어머니는 화성이를 한 가족으로 받아들여
사랑으로 기르셨습니다.
부친이 환원하시고 나서는
어머니 혼자서 그 큰 개를 기르면서
멀리 떨어져 사는 자식을 대신해
정을 많이 주었던 모양입니다.
개를 기른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아침저녁으로 밥 챙겨주고 물 떠주고 똥 치우고
보살피는 일이 노모에게는 큰 부담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개 사료를 여러 포대 사다 놓았습니다.
노모께서 개밥 주는 일이 수월치 않을 테니
조금이라도 편하시라고 한 방법입니다.
그러나 노모는 그 사다 논 사료는 주지 않고
먹던 밥 국에 말아서 주기 일쑤였습니다.
화성이도 사료보다는 따뜻한 밥을 더 좋아해서
밥알 한 톨도 남기지 않고 깨끗이 그릇을 비웁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끼니마다
따뜻한 밥을 먹인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
그래서 한 번은 화성이를 개장수에게 팔아버릴까,
생각하고 모친께 말씀드렸더니, 펄쩍 뛰시면서
“아서라. 내가 먼저 갈지 화성이가 먼저 갈지는
모리는 일이지만 밥 주는 일이 귀찮다고
키우던 개를 남에게 팔지는 않을 기다”
우리 어머니는 진짜 천도교인이십니다.
“ 짐승이라고 뭐 사람과 다를 바 있것나.
천도교 한다는 사람이
오랫동안 한 가족으로 주인을 잘 따르고
주인의 말을 잘 들어주고 집도 잘 지켜주는데...
그런 충복을 단지 밥 주고 똥 치우는 일이 귀찮다고,
이제 늙었다고, 내 편하자고
하루아침에 개밥그릇 치우듯 내버릴 수 있겄는가.
어찌 천도교인으로서 그럴 수 있겄는가.
그러면 안 되제!”
그 말씀을 듣고 저는 부끄러웠습니다.
제 생각이 정말
어머니에 비해 한참 모자란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 뒤로 저는 화성이가 보고 싶어서도
고향집에 한 번 갈 걸 두 번 가곤 했답니다.
그렇게 15년을 애지중지 키우던 화성이가
어느 날 자리에서 일어나지를 못하는 게 아닙니까?
내가 다가가자 혼신의 힘으로 간신히 일어나더니만
다시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고 마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얼른 수의사를 불러 치료를 부탁했는데,
수의사는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더니
개가 제 명대로 다 살았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보통 개가 15년 정도 살면
사람으로 치면 100세 사는 것과 같다고 하면서
화성이는 제 수명을 다했다는 것입니다.
내가 그래도 좋은 약이라도 처방해 달라고 했더니,
그래 봤자 몇 시간 정도인데 오히려
고통만 더 안겨주게 된다면서 만류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화성이는 갔습니다,.
사실 어머니가 먼저 환원하실지, 화성이가 먼저 갈지
그게 늘 걱정이었는데, 불행 중 다행으로
화성이가 먼저 가서 마음은 놓였지만
서운하기는 이루 다 말할 수 없었습니다.
저는 화성이를 바닷가 양지 바른 곳에
고이 묻어주었습니다.
결코 화성이가 살아 있는 한은 개밥 그릇
깨지 말라는 어머니외의 약속을 지킨 셈입니다.
천도교인으로서 자기가 데리고 키우던 짐승을
늙었다는 이유로
함부로 내다버려서는 안 되는 일이지요.
마찬가지로 우리가 회사에서나 어디에서나
자기와 함께 일하던 사람을
자기 구미에 맞지 않는다고 하여
함부로 내쳐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사람을 한울님으로 모시는
천도의 윤리에 어긋나기 때문이지요.
저는 그 도리를 어머니로부터 배웠습니다.
여기 계신 모든 동덕님들이
자기 분야에서 열심히 사셨듯이, 저도 젊은 시절
나름대로 열심히 살았다고 생각합니다.
교육 일선에서 교육자로서 부족하지만
정성을 다하여 학생들을 가르쳤다고 자부합니다.
이게 다 천도교를 성심으로 믿으신
어머니의 가르침 덕택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남 탓하지 말고, 미워하지 말고,
내 잘못 용서 빌고, 용서하고, 다 내려놓고
제게 짊어지워진 일 마다않고
정성으로 살아갈 생각입니다.
저는 젊은 시절 천도교 정신을 건학이념으로 삼아 설립한 동천고등학교에 몸담으면서 내 인생을 오로지
교육과 천도교에 바치리라고 결심했었습니다.
내게 있어서 학교는 곧 천도교이고,
천도교는 곧 학교이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학교의 건학이념이
천도교 정신이었기 때문에,
학교 일을 정성으로 한다는 것은 곧 천도교 일을
정성으로 한다는 것과 같다고 생각했지요.
봉직하는 동안 모든 게 내 생각대로 된 것은 아니지만
나름 기반을 닦고 거름을 주어
토양을 만들고 성장시켰습니다.
그 덕으로 퇴직할 때까지
밥 먹고 살 수 있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사실 이제 유유자적하고 안빈낙도하면서
여생을 편안하게 보내고 싶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동안
천도교로 인하여 입은 은혜가 얼마입니까?
지난 3월, 총부에서 제가 필요하다고 불렀을 때,
저는 많이 망설였습니다. 그 때 어머니께서
“자네가 천도교의 은혜를 참 많이 입었네.
그러니 이제 그 은혜에 보답하는 일이 남았네.
그러니 아무 말 말고
서울 올라가서 봉사하는 마음으로 일하게”
저는 어머니의 그 말씀을 따라
여기 올라와서 일하고 있습니다.
얼마 동안이 될지 모르지만 오로지 봉사하는 마음으로
제게 주어진 일을 하고자 합니다.
이렇게 살아 숨 쉬고, 밥 먹을 수 있는 일이
다 한울님 은덕이고 어머니 가르침이니,
항상 감사하는 마음으로 일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는 일은 밥 먹는 일입니다. 밥 한 그릇에
우리 인생(道)이 깃들어 있는 것이지요.
「한울은 사람에 의지하고 사람은 밥에 의지하나니,
만사를 안다는 것은
밥 한 그릇을 먹는 이치를 아는데 있느니라」
(天依人 人依食이니 萬事知는 食一婉이니라
-해월신사법설 ‘천지부모’ 편)
밥은 곧 한울님이십니다. 그런고로
우리가 밥을 먹는 것은 한울로써 한울을 먹는
이천식천以天食天의 행위입니다.
나를 살게 하고, 나를 성장시키고,
나를 사람답게 만든 것이 밥인 고로
밥은 정녕 한울님이시며 어머니이십니다.
그 밥을 먹기 위해서,
그 밥을 먹고 한울의 기운을 얻어
한울사람으로 살아가기 위해서 우리는 오늘도
열심히 천도교 믿음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밥 먹는 일과, 부모님 섬기는 일과, 한울 섬기는 일,
곧 천도교 믿는 일이 한 가지로 같습니다.
이 일을 행하는 것이 우리가 살아 있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지금 퍼렇게 살아 있습니다.
오늘도 점심식사 맛있게 드시고
즐거운 오후 보내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