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년 37세. 올해 초부터 심하게 서른일곱앓이를 하고 있다. 서른일곱은 30대보다 멀고 40대보다 매우 가까워진 나이로, 국가시책 청년복지 사업에서 제외되는 연령이기도 하다. 동갑내기 친구들은 대부분 직장생활10년차를 넘기고 있었다. 유난히 작년 연말부터 승진하는 애들이 많았다. 다들 차를 바꿨고, 더 넓은 평수로 이사를 갔다.
이에 비해 나는 돈보다는 가치와 자아실현을 추구하며 살아왔던 터라, 지금 이 순간에도 여리여리한 저축통장을 동아줄처럼 움켜잡은 채 중고 소형차 구매를 두고 발을 동동 굴리며 고민만 해대는 신세다. 이렇게 살다가는 이 상태 그대로 혹은 더 나빠진 상태로 마흔을 맞이할 것 같았다. 다가올 마흔이 너무도 두려워졌다. 날이 갈수록 점점 더 쇠약해지는 부모님이 떠올랐고, 세상에 혼자 남겨져 초라해진 내 모습이 하루에도 수십 번 넘게 그려졌다. 그럴 때마다 내 마음은 모든 감각과 신경을 끊어버릴 기세로 비명을 질러댔다. 꿈에서 가위에 눌리는 게 끔찍한 일이듯 마음 속 비명에 눌린 일상도 끔찍했다.
모든 감각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특히 잠자는 것과 먹는 것이 제일 심했다. 이 시기의 잠은 수면이 아닌 충격에 정신을 잃어 쓰러지는 것처럼 가혹한 불안과 두려움에 지쳐 잠시 너부러지는 꼴이었다. 술을 마시면 머리가 깨질 듯 아팠고, 기름지고 간이 센 음식을 먹을 경우 뿌리를 드러낸 잇몸처럼 아랫배가 시렸다. 그 좋아했던 커피마저 조금만 삼켜도 엘리베이터에서 농구공을 튕기는 것처럼 심장이 요동치고 쿵쿵 울려댔다.
한 달이 지나도록 증상이 나아질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이러다가는 되돌리기 힘들 정도로 일상생활이 붕괴할 것 같았다. 이에 친분이 있는 스포츠심리 전문가에게 도움을 구했다. 20여 분간 울먹거리는 내 음성을 다정하게 받아준 그는 전화를 마칠 무렵 내게 소설읽기와 땀을 배출할 강도의 운동을 권해주었다.
귀한조언이었지만 당시 나는 소설을 볼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다. 이를테면 1시간 이상 앉아 있지 못했다. 몸을 움직이기 않으면 심장이 점점 부풀어 목을 뚫고 올라와 얼굴전체를 뒤덮을 거 같았다. 일하다가도 수시로 화장실을 들락거렸고, 심장을 누르기 위해 하루에 2만보는 기본, 많으면 4만보까지 걸었다. 빵빵하게 공기를 불어넣은 대형 튜브의 바람을 빼듯 틈만 나면 몸집을 불리는 심장을 발로 꾹꾹 눌러댄 것이다.
내게 남은 선택지는 땀 흘리는 운동 밖에 없었다. 걷기로는 땀 흘리기가 불가능한, 동장군도 마스크를 쓰는 1월이었기에 헬스장 런닝머신에서 뛰는 방법을 택했다. 초반에는 20분 달리기도 힘들었지만 두주 정도 지나자 30분도 거뜬했다. 그렇게 보름 연속 30분을 달렸던 날이었다. 런닝머신에서 내려오자마자 털썩 주저앉을 정도로 왼쪽 무릎이 아팠다. 무릎이 원망스러웠다. 땀나도록 운동을 하고, 뛸 수 있을 때 실컷 뛰라는 말에 신나게 뛰었는데, 내 무릎의 달리기 사용기한은 열흘짜리 유통기한의 종이팩 우유와 동급이었다.
다행스럽게도 무릎의 통증은 삼주일 만에 사라졌다. 나는 다시 뛰었다. 대신 전처럼 점차 속도와 거리를 증가시키는 희망의 달리기라 아닌 늘 똑같은 주법으로 뛰는 덧없음의 달리기였다. 달릴 때마다 무릎이 버텨주는 날도 길어야 10년도 채 되지 못할 거라는 비관을 상기하며 가쁜 숨 대신 한숨을 뿜어댔다.
이런 상태로 지난 4월말 신일본 스포츠연맹(New Sports Federation)의 가나가와 현 지부의 국제 평화 스포츠교류 사업일환으로 초청받은 마라톤 행사에 참여하게 되었다. 나는 체육시민연대 소속으로 4월 28일 가와사키 월례 마라톤 5km구간, 4월 29일 요코하마 역전 마라톤 5km구간을 뛰었다. 뭔가 드라마틱한 변화를 말하는 것 같아 몹시 쑥스럽지만 나는 일본 대회 참가를 통해 달리기와 살아가는 방법을 배웠다. 일본에서 돌아온 뒤 적어도 일주일에 3일은 러너를 꿈꾸며 달리고 있다.
신일본 스포츠연맹은 1965년에 창립된 비영리단체이다. 값비싼 민간 스포츠클럽에 부담을 느껴 스포츠 활동이 어려운 사람들에게 스포츠 활동을 지원하고 이들의 참가를 확대하는 데 목적을 둔, 말하자면 노동자, 서민을 대상으로 한 스포츠 권리증진을 추구하고 도모하는 단체이다. 현재 이 단체가 일본 전국 각지에서 운영하는 스포츠클럽 수는 4000개에 달하고 회원 수는 5만 9천명에 이른다. 가장 인원이 많은 종목은 등산이고 뒤이어 탁구, 스키, 축구, 수영, 배구, 배드민턴 순으로 총 13개 종목으로 구성되어있다. 나를 초대해준 가나가와 현 지부만 해도 회원수가 4000명이다.
이 단체는 2010년부터 한국과 프랑스의 시민사회단체를 일본으로 초청하여 국제 스포츠평화 교류를 진행해왔다. 올해 4월 26일부터 5월1일까지 진행된 국제 교류에는 김덕진 체육시민연대 공동대표, 박혜숙 전 체육시민연대 사무국장, 그리고 현재 사무국장인 나, 이렇게 세 사람이 참가했다.
나는 가나가와 현 달리기 센터와 걷기 클럽 소속에 50여명의 회원들이 마리톤 대회 자원봉사를 하는 모습을 보고 덧없는 달리기의 늪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분량 상 첫 참가대회였던 가와사키 월례 마라톤 대회에서 받은 감동과 귀감을 추려내어 설명해보겠다.
이 대회 자원봉사자들의 연배는 대부분 60,70대였다. 그들은 시종일관 온화한 풍모로 대회 준비와 당일 대회운영 그리고 정리까지 빈틈없이 완수했다. 텐트치기, 구간 정비와 안내, 신청자 접수확인, 음료 및 각종 매대 운영, 기록 확인 등등 어느 하나 자원봉사의 손이 닿지 않는 것이 없었다. 특히 오후 1시 무렵 대회가 정리를 모두 마친 다음의 모습이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자원봉사자들은 모든 짐을 차에 싣고 아름다울 정도로 완벽하게 쓰레기 처리와 분리수거를 마쳤다. 그런 다음 커다랗게 큰 원으로 대열을 갖추고 다 같이 작별의 인사를 나누었다. 주최 측에서 마련해준 도시락을 먹으며 이 광경을 지켜보던 나는 문득 이들이 점심 먹을 시간 없이 일을 했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됐다. 자원봉사자들에게 식사대접도 없이 이대로 끝나는 건가 싶어 마음이 조마조마했었다. 이러한 감정도 잠시였다. 인사를 마친 후 자원봉사자들이 일렬로 줄을 서기 시작했다. 무슨 줄인가 하면 상자에 담긴 1인분 분량의 메밀 볶음 소바와 맥주 한 캔이 담겨진 하얀 비닐봉투를 받기 위한 줄이었다. 봉투를 받고 나서 누구는 세워둔 자전거 앞 바구니에 봉투를 넣고 바퀴에 달린 자물쇠를 풀었고, 누구는 에코백에 봉투를 넣고 발걸음을 돌렸다. 그 자리에서 봉지를 풀고 식사하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 다들 각자의 길을 떠났다.
자원봉사자 중 마라톤 풀코스는 물론 울트라마라톤을 완주한 사람들이 꽤 된다고 한다. 나는 이들을 보면서 위안을 받았다. 마라톤 대회를 완주하는 것만큼 이렇게 자원봉사를 하며 마라톤 대회를 완성시키는 것도 분명 심장을 뛰게 하는 일이라는 사실에. 내게도 언젠가는 분명 달리고 싶어도 달리지 못하는 날이 올 것이다. 그렇지만 늘 그래왔듯 이 세계는, 아니 내가 사는 동네도 언제나 많은 사람들이 달리기를 할 것이다.
마라톤 애호가로 잘 알려진 소설가 김연수는 러너를 “달리고 싶지 않을 때 달리지 않고, 달리고 싶을 때 달릴 수 있는 사람”이라 말했다. 나는 가와사키 월례 마라톤의 자원봉사자들을 보며 나만의 러너를 정의해봤다. “달릴 수 있을 때 달리고, 달릴 수 없을 때 달리기를 만들어주는 사람”더 이상 달릴 수 없는 상황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러너를 꿈꾸게 됐다. 달리기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진 자리가 러너를 향한 출발점이 된 셈이다. 어제 새벽에 8km를 달렸다. 달리는 동안 줄곧 삶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진 자리에는 어떤 출발점이 생길지, 그 자리에 대해 생각하곤 했다.
이경렬(체육시민연대 사무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