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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강론 77
창세기 27:46-28:9
이삭의 축복(4)
이삭이 야곱에게 축복한 것으로 인해 아버지 이삭이 죽고 나면 야곱을 죽이려고 한 에서의 계획을 리브가가 알게 되어 이삭에게 에서의 결혼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면서 야곱을 도피시키고자 한다. 야곱에게 “내 아들아 내 말을 따라 일어나 하란으로 가서 내 오라버니 라반에게로 피신하여 네 형의 노가 풀리기까지 몇 날 동안 그와 함께 거주하라”(27:43-44)라고 말한다. “몇 날 동안”이라 말했던 그 기간은 장장 20년이란 세월이 소요되며, 그 후로 성경에는 야곱이 어머니 리브가와 만났다는 기록이 없다.
이 말씀을 가지고 흔히 야곱이 아버지 이삭을 속였기 때문에 그에 대한 보응으로 집을 떠나 객지에서 고생하고 다시는 어머니를 만날 수 없는 대가를 치루었다는 의미로 해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이해는 인과응보의 해석에 불과하다. 성경은 우리의 어떤 행위에 따라 보상으로 주어지는 구원이나 심판을 말씀한 적이 없다. 그렇게 본다면 하나님의 은혜는 의미 없는 것이 된다.
야곱은 집을 떠나 외로운 나그네의 길은 수단과 방법만을 의지하려는 자신의 죄성을 철저히 깨닫는 과정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언약을 알지 못하고 각지 자기 생각으로 이해한 복의 개념을 가지고 달려온 결과 이삭과 리브가, 에서와 야곱의 갈등은 피하지 못할 상황이 되었다. 이런 점에서 야곱은 하나님의 언약을 위해 선택된 존재이다. 그러기에 그는 자기 길을 버리고 하나님의 언약에 의한 부르심에 이끌려 갈 수밖에 없다.
이제 27장을 계기로 하나님의 언약이 이삭으로부터 야곱에게 상속되어 이삭은 역사의 배경으로 물러나고 야곱이 전면에 등장하게 되나 여전히 ‘이삭의 톨레도트’라는 관점에서 성경은 기록을 계속해 나가고 있다. 이제부터 우리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언약이 이삭에게 상속되고 축복을 통해 야곱에게 장자권이 이어져 이스라엘이 되기까지 어떻게 이끌어 가시는가를 보게 될 것이다.
이삭이 속았음에도 불구하고 돌이킬 수 없는 이유는 ‘생명의 넘겨줌’을 통해 하나님의 언약을 보여주는 축복이기 때문이다. 아브라함 언약은 ‘후손, 땅, 복’에 대한 것인데 핵심은 ‘후손’(씨)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때문에 장자권이라는 의미 안에는 언약의 후손(씨)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계시이다. 이런 점에서 이삭은 야곱에게 뿐만 아니라 내용적인 측면에서는 차이가 나지만 에서에게도 축복함으로 궁극적인 언약의 후손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을 누려야 할 존재임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래서 결혼을 통해 언약의 후손을 잇는 계시로 나타내신다.
“리브가가 이삭에게 이르되 내가 헷 사람의 딸들로 말미암아 내 삶이 싫어졌거늘 야곱이 만일 이 땅의 딸들 곧 그들과 같은 헷 사람의 딸들 중에서 아내를 맞이하면 내 삶이 내게 무슨 재미가 있으리이까”(27:46). “싫어졌거늘”이라는 말의 히브리어 ‘쿠츠’는 ‘몹시 싫어하다, 경멸할 정도로 싫어하다, 가증히 여기다’라는 뜻이다. 가나안 족속을 향하여서나 우상숭배에 대한 하나님의 관점을 묘사한다.
너희는 내가 너희 앞에서 쫓아내는 족속의 풍속을 따르지 말라 그들이 이 모든 일을 행하므로 내가 그들을 가증히 여기노라(레 20:23)
하나님의 언약을 보여줄 수 있는 합당한 결혼이 아니라 오히려 가증스러운 것이라는 의미이다. “이 땅의 딸들 곧 그들과 같은 헷 사람의 딸들”이라고 하였는데 26:34-35에서 “헷 족속 브에리의 딸 유딧과 헷 족속 엘론의 딸 바스맛을 아내로 맞이하였더니”라고 하였다. 이미 아브라함 언약에서 헷 족속은 심판의 대상이다(15:20). 에서는 아브라함이 헷 족속에게서 막벨라 굴과 밭을 사는 거래를 통해 교류가 있었기에 당연한 것으로 여겼는지 모른다. 그러나 “헷”이라는 말은 ‘하타트’(넘어뜨리다, 부수다, 위협하다)에서 유래한 단어로 가나안 땅에서 헷 족속은 강력한 힘을 가진 족속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에서가 이들과 결혼을 통해 유대와 연합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을 무시하고 인간의 힘을 의지하는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언약에 합당하지 않기에 리브가를 통해 가증한 것이라고 표현하였다.
“1 이삭이 야곱을 불러 그에게 축복하고 또 당부하여 이르되 너는 가나안 사람의 딸들 중에서 아내를 맞이하지 말고 2 일어나 밧단아람으로 가서 네 외조부 브두엘의 집에 이르러 거기서 네 외삼촌 라반의 딸 중에서 아내를 맞이하라”(1-2절). 장자권을 잇는 자는 야곱인데 떠나야 하는 자는 에서가 아닌 야곱이다. 왜 야곱이 떠나야 하는가? 아브라함이 종에게 “내 고향 내 족속”(24:4), “내 아버지의 집, 내 족속”(24:38), “내 족속 중 내 아버지의 집”(24:40)에서 이삭의 아내를 택하라고 하였다. 이때 내 고향, 내 족속, 내 아버지의 집이란 단순히 혈통적인 관계에 있는 존재라는 의미가 아니라 아브라함과 같이 강을 건너오는 결단의 과정을 통해 언약 안에서 동질성을 확보한다는 차원이었다. 다시 말해서 아담 언약, 노아 언약 안에서 후손이 이어지기 위해 하나 되어 집을 이루는 존재라는 것을 표현한 말이다.
그래서 “너는 가나안 사람의 딸들 중에서 아내를 맞이하지 말고 일어나 밧단아람으로 가서 네 외조부 브두엘의 집에 이르러 거기서 네 외삼촌 라반의 딸 중에서 아내를 맞이하라”라고 하였는데 27:43과 여기서 특별히 “일어나”라는 표현을 의도적으로 쓰고 있다. 히브리어 ‘쿰’은 ‘일어나다, 일으키다, 세우다’라는 뜻으로 아브라함과 리브가와 같이 강을 건너오는 언약의 동질성을 세워 이룬다는 의미이다. 결국 야곱의 도망은 결혼을 통해 언약 안에서 하나 되는 의미를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 때문에 에서가 아닌 야곱이 떠난 것이다.
“3 전능하신 하나님이 네게 복을 주시어 네가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여 네가 여러 족속을 이루게 하시고 4 아브라함에게 허락하신 복을 네게 주시되 너와 너와 함께 네 자손에게도 주사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땅 곧 네가 거류하는 땅을 네가 차지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5 이에 이삭이 야곱을 보내매 그가 밧단아람으로 가서 라반에게 이르렀으니 라반은 아람 사람 브두엘의 아들이요 야곱과 에서의 어머니 리브가의 오라비더라”(3-5절).
“전능하신 하나님”(히, ‘엘 샤다이’)은 ‘언약을 이루심에 있어서 그 능력이 무한하신 하나님’이시다. “생육”(히, ‘파라’)과 “번성”(히, ‘라바’)은 창조 때 주신 언약의 말씀(1:22, 28)이고 또한 노아에게 주신 언약의 말씀이다(8:17, 9:1, 9:7). 언약의 복이 완성될 것에 대한 표현이다. 즉 언약의 실체가 이 땅에 오셔서 진리의 말씀으로 충만하게 만드실 것이다. 그 언약이 아브라함을 통해 이어졌기에 이삭은 아브라함 언약대로 야곱에게 축복한다. 이전의 축복은 에서인 줄 알고 하였던 축복이지만 이제는 야곱에게 정당하게 축복을 하면서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복을 주시기를 간절히 구한다. 이제 야곱이 약속의 땅에 대한 분명한 상속자이기 때문이다.
“여러 족속”이란 히브리어로 ‘카할 암’인데 ‘카할’은 ‘콜’(부르다)에서 유한 단어로 ‘회중, 집회, 모임’이라는 뜻으로 후에 이스라엘을 “여호와의 총회”(민 16:3, 신 23:1-3)로 불리며 70인역에서는 ‘에클레시아’로 번역된다. 즉 언약의 성취자를 통해 교회를 이루실 것에 대한 말씀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씀하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땅 곧 네가 거류하는 땅” 역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지칭하는 하나님 왕국을 의미한다.
9 야곱이 밧단아람에서 돌아오매 하나님이 다시 야곱에게 나타나사 그에게 복을 주시고 10 하나님이 그에게 이르시되 네 이름이 야곱이지마는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르지 않겠고 이스라엘이 네 이름이 되리라 하시고 그가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부르시고 11 하나님이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생육하며 번성하라 한 백성과 백성들의 총회가 네게서 나오고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 12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준 땅을 네게 주고 내가 네 후손에게도 그 땅을 주리라 하시고 13 하나님이 그와 말씀하시던 곳에서 그를 떠나 올라가시는지라(창 35:9-13)
이를 위해 하나님께서는 이삭으로 하여금 다시 하나님의 선택적 주권을 인정하도록 만드셨다. 이삭이 아무리 자기의 계획을 가지고 자기가 원하는 사람에게 축복하려고 하지만 하나님의 계획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 결국 하나님의 계획대로 하나님의 선택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뜻대로 성취된다. 하나님의 언약은 이토록 집요하게 하나님께서 계시(말씀)하신 대로 이루어진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잠 16:9).
사실 이삭의 축복은 그의 소임을 다한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이삭의 생애를 통해 이루고자 하는 일들을 다 이루셨다. 따라서 이후 이삭의 기록에 대해서는 죽음에 대한 기록뿐이다. 이런 점에서도 본다면 분명 성경의 기록은 언약의 상속자가 누구인가에 대한 관심이며 그 상속자에 대한 하나님의 일하심을 기록하고 있는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성경의 관심사는 하나님의 언약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에서와 야곱의 어머니’가 아닌 이제 장자는 야곱이라는 의미에서 “야곱과 에서의 어머니 리브가” 라고 표현한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록자는 믿음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이끌려 언약의 성취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축복을 하였다고 선언한다.
믿음으로 이삭은 장차 있을 일에 대하여 야곱과 에서에게 축복하였으며(히 11:20)
“6 에서가 본즉 이삭이 야곱에게 축복하고 그를 밧단아람으로 보내어 거기서 아내를 맞이하게 하였고 또 그에게 축복하고 명하기를 너는 가나안 사람의 딸들 중에서 아내를 맞이하지 말라 하였고 7 또 야곱이 부모의 명을 따라 밧단아람으로 갔으며 8 에서가 또 본즉 가나안 사람의 딸들이 그의 아버지 이삭을 기쁘게 하지 못하는지라 9 이에 에서가 이스마엘에게 가서 그 본처들 외에 아브라함의 아들 이스마엘의 딸이요 느바욧의 누이인 마할랏을 아내로 맞이하였더라”(6-9절)
“에서가 본즉”(6절), “에서가 또 본즉”(8절)라고 에서가 보았다는 것을 두 번 강조한다. 즉 에서가 보고 또 보았지만 하나님의 언약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겉모습만 보고 흉내 내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에서는 여전히 자기 행위를 보고 있었다. 문자적으로 아내를 “가나안 사람의 딸 중에서” 아니면 된다고 생각하고 아브라함의 집에서 아내를 맞이하면 아버지 이삭을 기쁘게 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이스마엘에게 가서 그 본처들 외에 아브라함의 아들 이스마엘의 딸이요 느바욧의 누이인 마할랏을 아내로 맞이하였더라”라고 하였다.
할아버지 아브라함의 집안에서 취하면 야곱에게 말씀하신 복을 자기도 누리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렇게 해서라도 아버지 이삭을 기쁘게 하고 복이 자신을 향하게 하려고 하나 이는 하나님의 언약을 알지 못한 상태에서 적당히 언약의 흉내를 내는 행위에 불과하다. 에서는 하나님의 언약을 겉으로만 보았기에 이삭과 리브가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어떤 것인지 더더욱 이해할 수 없었다.
아브라함의 가문 안에 거하면 복이 주어질 것으로 생각하는 것과 같이 십자가의 의미를 알지 못하면서 교회에 다니는 것으로 복을 받는다는 착각과 다를 바 없다. 그래서 십일조, 주일성수, 기도, 전도, Q.T 열심히 하는 종교 행위에 사로 잡히는 것이다. 에서와 야곱이 쌍둥이라는 점에서 내 안에 언약 밖의 죄성과 언약 안의 은혜를 동시에 보여준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이렇게 선언한다.
16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17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18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후 4:16-18)
(20240526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