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본성에 대한 입장이 정말 다양하다. 성삼품설, 성유선유악설, 성무선무악설, 성기호설, 성악설, 성선설이 있다. 특히 성선설과 성악설은 흑과 백처럼 상반되는 입장이다. 성선설을 먼저 살펴보면 성선설은 성유선유악설이 흡수가 된 입장이다.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지려는 상황을 보았을 때 어린아이를 안타깝게, 불쌍하게 여기는 마음을 측은지심이라고 한다. 측은지심은 인간의 사덕 인의예지 중 인의 단서이자 인간의 근원적 정서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측은지심을 인간이라면 예외 없이 본래부터, 원래부터 갖추어서 태어난다는 입장이 성선설이다. 사단이 선하므로 인간의 본성은 선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인간에게는 악이 나타난다. 맹자에 따르면 인간의 악은 칠정 ‘희노애구애오욕’으로부터 나온다. 사단과 달리 칠정은 유선 유악이기 때문에 선한 것도 있고 악한 것도 있을 수 있다. 인간 본성은 순수하게 선하지만, 인간의 칠정 중에는 악한 것이 있으므로 칠정은 악의 근거가 된다. 따라서 맹자의 최종적인 목표는 인간의 본래 안에 갖추어진 본성의 선함을 드러내고 확충해서 세상을 평화롭게 만드는 것이다. 인간의 본성은 변화시켜야 하는 것이 아닌 회복해야 하는 도덕적인 것이다.
성무선무악설이 흡수한 순자는 맹자의 성선설에 대한 비판을 시도한다. 사단에 대한 깨달음이 있다면 깨달음이 곧장 행동으로 나와야 하는데 현실에서는 행동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으므로 맹자의 입장이 설득력이 없다는 것이다. 순자에 따르면 인간의 본성은 이익을 좋아하는 호리, 질투하고 미워하는 질오이다. 인간은 이익을 좋아하는 본성을 타고났으므로 선한 행동이 불가능할 것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순자는 인간의 선한 행동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본래 이익을 좋아하는 게 인간의 본성이지만 다양한 교육이나 환경적인 변화로 인간이 자신의 본성을 극복한다면 도덕심의 발현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순자는 인간의 본성 그 자체를 악이라고 본 것이 아니다. 다만, 이익을 쫓는 인간의 본성이 방치될 경우 본성이 방치된 결과가 악이라는 것이다. 결국 인간의 본성을 건드리지 않고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한 맹자와 달리 순자는 인간의 본성을 인위적으로 변화시켜 인위적인 노력으로 이치를 바르게 하여 다스림이 평화로운 정립평치한 사회를 이룰 것을 강조한다.
현대사회는 전쟁, 테러, 묻지마 범죄, 폭력 등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으며 혼란스러운 분위기가 만연하다. 학교도 마찬가지이다. 학생들은 선한 행동을 하더라도 선한 행동을 했을 때 자신에게 뭐가 좋을지, 어떤 이득이 있는지 먼저 따지고 묻는다. 대가 없는 선한 행동, 선한 마음에서 우러나는 모범적인 행동을 하는 학생들은 갈수록 줄어드는 느낌이다. 자기 잘못에 관해서 물을 경우 “왜요? 그렇게 하면 왜 안 되는데요?”라는 대답이 돌아오는 경우가 다반사이며, 자식이 저지른 잘못에 대한 미안한 마음보다는 어떻게 하면 피해를 조금만 보는지를 먼저 묻는 학부모도 있다. 개인주의, 이기주의가 팽배한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아이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밖에 모르는, 나만 아니면 된다는 사고를 당연하다고 여기게 될 것이다. 따라서 나는 과거에는 성선설을 지지했으나 지금은 성악설을 더 지지한다. 이익을 추구하는 행동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나쁜 학생, 악한 학생이 되지 않도록 순자가 강조한 본성의 변화처럼 인성교육을 강조하고 인성과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도덕교육에 힘을 두어야 한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