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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강론 78강
출애굽기 32:1-20
깨어진 돌판
출애굽기의 전개는 유월절 어린 양의 죽음을 통해 구원받은 이스라엘에게 하나님께서 언약을 주시고(24장), 성막에 대한 계시(25-31장) 후, 금송아지 숭배 사건(32-34장)을 다룬다. 그리고 성막의 건립 완성(35-40장)을 기록한다. 성막 계시 후에 갑자기 안식일에 대한 말씀(출 31:12-18)이 주어진 것에 대하여 창조 언약을 시내산 언약으로 말씀하고 보여주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렇다면 금송아지 숭배 사건은 단순히 우리로 하여금 우상숭배를 하지 말라고 주시는 교훈이 아니라 선악의 나무를 취한 사건과 같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져내시고 시내산에서 피의 언약을 맺으심으로 성막을 건립하도록 하신 것은 그들과 동행하며 함께 산다는 것을 나타내시기 위함이다. 하나님께서 남편으로서 이스라엘을 신부로 삼아 언약에 합당한 집을 짓도록 하신 것이었다. 그러므로 성막은 하나님께서 창조 언약을 통해 에덴동산으로 보여주고자 하신 자기 백성들과 하나 된 하나님의 집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에덴동산의 하와처럼 신부의 위치를 망각하여 음행함으로 언약을 배반하였다. 창조 언약에서 아담은 하와가 먹은 선악과를 먹음으로 둘째(마지막) 아담의 구원을 계시한 것과 마찬가지로 모세는 돌판을 깨뜨리는 위치에서 언약의 실체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계시하는 언약의 말씀이다.
“백성이 모세가 산에서 내려옴이 더딤을 보고 모여 백성이 아론에게 이르러 말하되 일어나라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 이 모세 곧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은 어찌 되었는지 알지 못함이니라”(1절). 모세는 성막의 계시를 받기 위해 40일을 산에 있었다(출 24:17-18). 40일은 산 위의 모세에게는 언약 안에 있음을 확인하는 기간이지만 산 아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시험의 기간이다.
“모세가 산에서 내려옴이 더딤을 보고” 또는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은 어찌 되었는지 알지 못함이니라”라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표현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보이는 모세를 믿었다는 것이고, 금송아지 형상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이는 하나님으로 대체한 것이다. 그러니 이스라엘 백성들은 결코 하나님을 버린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요 4:24)
하나님께 예배는 성령과 진리로 이루어진다.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육의 것으로는 예배가 될 수 없다. 한마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만이 온전한 예배가 된다는 뜻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자기 영을 자기 백성들에게 넘겨주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이스라엘은 성령과 진리와 전혀 상관이 없는 오로지 자기 자신을 위한 눈에 보이는 우상 안에 갇혀 있는 모습이었다. 그러기에 피의 언약을 맺은 야훼 하나님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었다. 이것이 죄인의 실상이다.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라고 하였는데 “신(들)”이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엘로힘’이다. 성경은 하나님에 대해서도 ‘엘로힘’으로 쓰는데 다른 것은 ‘엘로힘’을 복수로 표현하지만 다음에 따라 나오는 동사는 대부분 단수로 쓴다. 그러나 여기서는 ‘인도하다’(히, ‘얄라크’)라는 단어를 복수 동사로 썼다는 점에서 같은 엘로힘을 쓰고 있지만 ‘다른 하나님’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23절). 즉 이스라엘은 단순히 신을 만든 것이 아니라 스스로 신이 되었다. 하나님은 자기 언약을 위해 이스라엘과 동행하시겠다고 성막을 주셨으나 이스라엘은 ‘우리를 위하여 동행할 신’을 원했다.
“2 아론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의 아내와 자녀의 귀에서 금고리를 빼어 내게로 가져오라 3 모든 백성이 그 귀에서 금고리를 빼어 아론에게로 가져가매 4 아론이 그들의 손에서 금고리를 받아 부어서 조각칼로 새겨 송아지 형상을 만드니 그들이 말하되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의 신이로다 하는지라”(2-4절). “금고리”(2, 3, 4절)라는 표현이 강조된다. 자신들이 아끼는 금귀고리로 송아지 형상을 만들었다는 것은 그 신에게 자신을 종으로 예속시키는 의미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고 하지만 전혀 듣지 못하고 있었고 그저 자신의 것을 바침으로 믿음의 증거로 삼는다. 아론이 알고 있는 하나님도 백성들과 전혀 다르지 않았다. 오늘날도 우리의 것을 바쳐서 믿음의 증거로 삼고자 하는 그것이 우상숭배이다. 산 위에 하나님이 임재하신 성전과 동떨어진 산 아래 있는 죄인들의 실상이다.
“부어서 조각칼로 새겨 송아지 형상을 만드니”라는 표현은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출 20:4), “자기를 위한 새긴 우상”(신 5:8)이라는 것을 분명히 밝혀 주는 표현이다. 그러나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으로 나타내기 위해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의 신이로다”라고 말한다. 결코 애굽에서 자신들을 구원하신 하나님을 버린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송아지 형상을 만든 것은 애굽에서 황소의 신 ‘아피스’에 대하여 보고 배운 것이다. 다섯 번째 이적을 통해 애굽에 보여주신 재앙은 가축의 죽음이었다(출 9:1-7). 이때 가축은 ‘미크네’로 ‘소유물’이라는 뜻이라는 것을 이미 살펴보았었다. 즉 금송아지 형상의 신을 자기 소유물로 여기고 싶었던 것이다. 히브리어 첫 번째 스펠링 ‘알렙’(א)은 ‘황소, 하나님, 근본, 진리’라는 뜻을 담고 있는데 고대 사회에서 소는 가까이서 볼 수 있는 가장 힘센 동물이었기에 힘이 세다는 것을 진리로 여겼다. 이러한 사상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사라지지 않고 여로보암 왕을 통해서도 드러난다(왕상 12:28-29).
“5 아론이 보고 그 앞에 제단을 쌓고 이에 아론이 공포하여 이르되 내일은 여호와의 절일이니라 하니 6 이튿날에 그들이 일찍이 일어나 번제를 드리며 화목제를 드리고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놀더라”(5-6절). “여호와의 절일”(5절)의 ‘하그’는 ‘축제, 절기의 희생, 종교적인 기쁨의 날’이라는 뜻이다. 송아지 형상으로만 대체되었을 뿐 야훼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바뀐 것은 없었기에 “번제, 화목제”(6절)를 드린 것이다. 하나님과 언약을 맺을 때 그 모습을 그대로 반복하였다(출 24:5). “뛰놀더라”(6절)의 ‘차하크’는 ‘웃다, 비웃다, 희롱하다, 놀다, 농담하다, (성적) 노리개’라는 뜻이다. 창세기 26:8 이삭이 아내를 “껴안은 것”이라고 번역하였고, 창세기 39:14, 17에서는 요셉이 보디발의 아내에 대하여 ‘성적 희롱’이라는 뜻으로 번역한 것을 보면 성행위를 함축하는 표현이다. 즉 금송아지 형상을 섬긴 것이 남편 하나님을 떠난 음행이라는 의미이다(참고 왕상 18:26-27).
“7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내려가라 네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네 백성이 부패하였도다 8 그들이 내가 그들에게 명령한 길을 속히 떠나 자기를 위하여 송아지를 부어 만들고 그것을 예배하며 그것에게 제물을 드리며 말하기를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라 하였도다”(7-8절). “네 백성”(7절)이라는 표현은 이제까지 반복적으로 하나님께서 “내 백성”(출 3:7, 5:1, 7:4, 8:23, 9:1, 10:3 등)이라고 말씀하신 것과는 대조적으로 언약을 배반한 상태임을 나타내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 모세에 의해 인도되어 나온 모세의 백성이라는 의미이다. “부패하였도다”의 ‘샤하트’(멸망시키다, 파멸하다)는 노아 때 하나님께서 인간들을 어떻게 보시는가를 나타내신 표현이다.
11 그 때에 온 땅이 하나님 앞에 부패하여 포악함이 땅에 가득한지라 12 하나님이 보신즉 땅이 부패하였으니 이는 땅에서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행위가 부패함이었더라(창 6:11-12)
멸망의 대상으로서 인간이고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구원이 필요한 존재라는 것을 나타내신 것이다. 따라서 선악의 나무를 취한 것이 단순히 인간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언약을 어겼다는 것으로만 이해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죄 가운데 가두어 두신 것이었고(롬 11:32), 믿음이 계시 될 때까지 율법 아래 갇혀 있게 하신 것이었다(갈 3:23). 이런 점에서 금송아지 숭배 사건 역시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성막의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온전한 언약 성취를 통한 구원을 계시하시기 위해 이스라엘은 선악의 나무를 취하는 존재라는 것이 처절하게 폭로되어야 한다.
“9 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백성을 보니 목이 뻣뻣한 백성이로다 10 그런즉 내가 하는 대로 두라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진멸하고 너를 큰 나라가 되게 하리라”(9-10절). “목이 뻣뻣한”(9절)의 ‘카셰’는 ‘어려운, 맹렬한, 완고한, 고집 센, 굳은, 견고한’이라는 뜻인데 밭갈이하는 소가 잘 움직이지 않고 고집을 부리는 것에서 유래한 단어이다. “너를 큰 나라가 되게 하리라”(10절)라는 말씀은 단순히 모세의 나라로 만드시겠다는 것이 아니라 모세를 통해 주신 언약의 나라로 만드시겠다는 의미이다(참고 창 12:2, 18:18, 46:3). 언약의 민족으로 위대하다는 의미이다.
“11 모세가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구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어찌하여 그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주의 백성에게 진노하시나이까 12 어찌하여 애굽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가 자기의 백성을 산에서 죽이고 지면에서 진멸하려는 악한 의도로 인도해 내었다고 말하게 하시려 하나이까 주의 맹렬한 노를 그치시고 뜻을 돌이키사 주의 백성에게 이 화를 내리지 마옵소서 13 주의 종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을 기억하소서 주께서 그들을 위하여 주를 가리켜 맹세하여 이르시기를 내가 너희의 자손을 하늘의 별처럼 많게 하고 내가 허락한 이 온 땅을 너희의 자손에게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리라 하셨나이다 14 여호와께서 뜻을 돌이키사 말씀하신 화를 그 백성에게 내리지 아니하시니라”(11-14절). 모세의 간구 내용을 하나님께서 모르시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 대목은 모세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를 계시하는 말씀이다. 예수님께서 변화산에서 모세와 나눈 대화가 별세, 즉 십자가 죽음을 통한 구원이었다(눅 9:30-31). 그러나 산 아래에서는 제자들이 귀신 들린 자를 쫓아내지 못하는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를 그대로 보여주신 것과 같다(눅 9:37-43). 그러니까 모세의 중보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계시하시기 위함이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심판하시기로 결심하셨다가 모세의 간구를 듣고 마음이 바뀌어 심판하시지 않겠다는 것이 아니다.
“15 모세가 돌이켜 산에서 내려오는데 두 증거판이 그의 손에 있고 그 판의 양면 이쪽 저쪽에 글자가 있으니 16 그 판은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요 글자는 하나님이 쓰셔서 판에 새기신 것이더라 17 여호수아가 백성들의 요란한 소리를 듣고 모세에게 말하되 진중에서 싸우는 소리가 나나이다 18 모세가 이르되 이는 승전가도 아니요 패하여 부르짖는 소리도 아니라 내가 듣기에는 노래하는 소리로다 하고 19 진에 가까이 이르러 그 송아지와 그 춤추는 것들을 보고 크게 노하여 손에서 그 판들을 산 아래로 던져 깨뜨리니라”(15-19절). 모세는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뜻이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돌판을 깨뜨릴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모세를 온유하다고 하는 것이다(민 12:3). 율법의 말씀은 온전히 이루어져야 하는데 그대로 시행되면 이스라엘은 죽음 아래 있을 수밖에 없기에 돌판은 언약궤 안에 넣어져 속죄소로 덮혀져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모세가 돌판을 깨뜨린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 외에는 달리 용서가 이루어질 수 없음을 계시한다.
2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께 나아가 5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6 성경에 기록되었으되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로운 모퉁잇돌을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7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이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8 또한 부딪치는 돌과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가 되었다 하였느니라 그들이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그들을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벧전 2:4-8)
언약이 깨어짐을 증거하고 이스라엘이 배반하여 깨어진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보여준다. 이런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은 우리가 하나님의 언약을 깨뜨리는 존재라는 것을 고발한다. 우리는 그저 문자의 율법을 행동으로 지켜 구원을 원하는 존재이다. 그래서 산 돌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깨뜨려져 죽는 죽음만이 죄인을 살리시는 것이 된다.
“모세가 그들이 만든 송아지를 가져다가 불살라 부수어 가루를 만들어 물에 뿌려 이스라엘 자손에게 마시게 하니라”(20절). 이렇게 하심으로 금송아지가 이스라엘의 안에 있음을 알게 하시기 위함이다. 즉 우리 자체가 우상이라는 말씀이다(20260726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