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리의 다솔사 시절(4)
최범술 주지는 1937년 다솔사의 재정으로 원전(봉개리)에다 광명학원을 개설했다.
동리의 광명학원 제자 김명석이 간직하고 있는 1937년 다솔사 세입 세출 예산서를 보면 원전의 학원 신축비가 1400원이 책정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원전의 공동묘지였던 언덕에 이 광명학원이 세워졌는데 함석지붕에 시멘트 벽,그리고 나무 바닥으로 된 건물이었다.
이 학원의 교사로 불림을 받았던 동리는 정성을 다해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주말이면 3키로쯤 떨어져 있는 맏형 범부가 있는 다솔사로 가서 가족간의 사랑을 맛보며 지냈다. 이때는 이미 어머니를 비롯한 맏형의 가족들이 모두 다솔사 부근 마을로 이사를 오고난 뒤였다.
동리는 친구들이 찾아오면 집으로 데려가곤 했는데 동리의 어머니는 문학한다고 하면서 동네 막걸리집에 다니고 하는 것을 안좋게 보았던 듯하다. 그런데 동리의 형수는 몰래 닭을 삶아 대접을 해주곤 했다. 이 무렵의 사정을 동리의 조카 김주홍(범부의 셋째아들, 화영기획사장)은 다음같이 증언했다.
"미당선생이든지 누구든지 친구들이 오면 선친(범부)앞에 꿇어 앉아서 담론으로 시간 가는 줄 모르곤 했는데 그때의 젊은이들은 마음에 번민과 한(恨)이 많고 궁금한 것도 많아 선친에게 많은 것을 상의하곤 했다. 선친은 낙관론자이셨다. 조그만치의 비관도 없었으며 상대방이 누구든 그 사람에게 맞게 대화를 나누셨고 특히 젊은이들을 무척 좋아하셨는데 저녁무렵에 젊은이들을 데리고 아랫마을에 내려가면 누구든 범부선생이라면 술을 내주고 공경하곤 했다. 그중에 '궁골 할머니' 라고 계셨는데 그분이 막걸리를 아주 맛있게 익혀서 나눠주시곤 했다."는 것이었다.
장수마을 신산부락의 이봉구는 당시 김동리가 달리기를 잘하여 사천군 대표선수였다는 것과 동리가 얼마나 빨랐던지 곤양에서 비를 만나 다솔사 갈 때까지 비를 '한번도 안맞고 퍼뜩 가버릴 정도' 였다고 기억해냈다.
동리는 광명학원의 낮수업이 끝나면 밤에 야학을 열어 동네 사람들의 문맹퇴치에 심혈을 기울였다. 당시의 야학에서 하는 일이란 아직 우리글을 모르고 있는 어린이나 어른들에게 글을 깨우쳐주는것이었다. 동리는 주로 국어(조선어)를 가르쳤고 동료 이상권은 산수와 서예 등을 가르쳤다.
동리는 또 시간 나는 대로 아이들에게 '뻐꾹새' '반달' 과 같은 우리 민족의 비애를 나타내는 동요를 가르쳤으며 고전동요도 가르쳤는데 이 점은 동리의 반일감정에 맥이 닿아 있었다. 동리는 동네 주민들을 초청하여 학예회를 열기도 했다. <자장가>라는 연극이 발표되었는데 동리 자신이 대본을 썼다. 연극에는 지현과 소영이 남녀 주인공이었는데 당시 여주인공을 맡았던 김소영(범부의 5녀, 부산시 서구)은 연극의 대사 일부를 기억하고 있었다.
"우리 엄마는 꿈에 오신단다/흰 신 신고, 흰 옷 입고 , 흰 수건 쓰고/꿈길 밟고 오신단다"그러면서 남자 아이가 퇴장하고 조명이 꺼지면 "자장아 자장자장 우리 아가야 / 우지마 울지말고 어서 자거라 / 산위에 까마귀가 우지지는데 / 우지마 울지말고 어서 자거라 " 하는 자장가가 나왔다. 그다음에 언니 학생이 흰옷을 입고 흰수건쓰고 나타났다가 주인공인 소영이 깨어나면 그 엄마가 사라져갔다. 소영은 눈을 뜨면서 "어머니, 어머니, 우리어머니" 하면서 연기를 하면 시골 할머니들이 그것을 보고 엉엉 소리내어 울었다는것이다.
광명학원 학예회는 그야말로 곤명면의 잔치날이었다. 연극을 보면서 함께 울고 함께 민족의식을 깨우치곤 했던 것이다.
*보도의뢰
강희근 교수 등 한국문협 이사로 참여
한국문인협회는 3월부터 제24대 김년균 이사장 체제로 들어서면서 기구와 조직을 정비하고 새로운 임원을 확정했다. 경남지역에서는 무투표 당선된 정목일 수필분과위원장(창원)을 비롯하여 강희근(진주), 고동주(통영), 김교한(마산), 유재상(거창) 등의 이사와 최은애(진주) 시인이 감사로 선임되어 한국문학 발전을 위한 견인차 역할을 하게 되었다.
지난 3월 2일 제1차 이사회에서는 절차상 명백한 하자를 안고 진행되었던 제23대 7,8차 이사회 결의사항인 성기조 회원 제명 결의를 무효화하고 성기조 회원을 명예 이사장으로 추대했다.
한편 지역문학 세미나 등에서 한국문인협회 폐지를 주장했던 강희근 시인이 임원으로 참여하는 것이 의외로 받아들여지고 있는데, 강 시인은 참여의 변을 참여 속에서 개혁해 나가는 것이 필요한 일이었다고 다음과 같이 피력했다.
"제1차 이사회에서 이미 주장했지만 한국문인협회는 숫자상으로는 한국문단을 대표하고 있을지는 몰라도 질적인 면에서는 절대 그렇지 못한 것이 현실입니다.이를 개선하기 위해 문협이 범문단적 노력을 통한 초기의 통합된 위상으로 가도록 힘을 다해 볼 것입니다."라고 힘 주어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