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탁영선생문집(濯纓先生文集)
제6권(卷之 六) 시(詩) 4)成宗 四十八詠 1/2
敬附成宗大王宸章
삼가 성종대왕의 시를 붙임
此四十八篇卽成廟御製次匪懈堂安平大君瑢四十八詠示湖當諸學士求和者依上魯陵子規詞例謹附之於此
이 48편은 비해당 안평대군 이용(李瑢)의 48영에 차운한 성종의 어제시이다. 성종이 이를 호당의 여러 학사들에게 보이고 화운(和韻)하도록 한 것인데, 단종의 <자규사>를 실은 예에 따라 삼가 여기에 붙인다.
1.梅窓素月(매창소월)
매화창에 비친 하얀 달
一樹漢梅傍碧莎 푸른 사초 옆에 선 한 그루의 겨울 매화가
小窓晴夜映屛紗 맑은 밤이면 작은 창으로 비단 병풍에 비친다
幽香淡淡春如早 붐은 이른데 그윽한 향기 담담하고
疎影離離月欲斜 달이 기우니 성긴 그림자가 길게 드리우네
姑射精神來水佛 고야[1]의 정령이 수불에 온 듯
太眞嬌態嗅詩魔 양귀비의 교태가 내 시심(詩心)을 냄새 맡는 듯
拈吹玉笛聲高處 옥피리 소리 높이 부는 곳에서
愁斷何人啜雪茶 시름이 사라지는데 누가 작설차 마시겠나
[1]고야(姑射) : 전설상의 산으로 막고야산(藐姑射山)이라고도 하며, 신인(神人)이 살고 있는데 살갗이 빙설같은 정숙한 처자 같았다 한다.
2.竹逕淸風(죽경청풍)
대밭 길의 맑은 바람
幽逕陰陰竹掩皐 오솔길은 어둑하고 대나무는 언덕을 가렸는데
蕭森叢影映秋交 쓸쓸한 숲빛이 다가오는 가을을 반영한다
輝輝淨日翻湘淚 번쩍이는 맑은 햇빛에 소상의 눈물[1]이 번득이고
颯颯淸風寄楚騷 설렁거리는 청풍은 초나라의 <이소>[2]에 붙였네
製律粲然韶盡美 순 임금의 음률처럼 바람 소리 선명하고 고운데
聽梅凄也韻孤高 처량한 <매화락>[3]을 듣는 듯 그 운치 고고하다
歲寒祗賞氷霜氣 세한에 마침 빙설 같은 기상 볼 수 있으니
何用區區六七號 무엇 하려 구구하게 육칠언시까지 부르겠나
[1] 소상(瀟湘)의 눈물 : 순(舜)임금이 죽은 뒤 두 비인 아황(娥皇)과 여영(女英)이 눈물을 흘리며 통곡하다가 소상강에 빠져 죽었는데 아황은 상군(湘君)이 되고 여영은 상부인(湘夫人)이 되었다. 이때 흘린 눈물이 대나무에 얼룩져 반죽(斑竹)이 되었다 한다.
[2] 이소(離騷) : 전국 시대 초나라의 충신 굴원이 참소를 당하여 궁정에서 쫓겨난 몸으로 연군(戀君)의 정을 읊은 일종의 서정시이다.
[3] 매화락(梅花落) : 한 대(漢代)의 악부(樂府) 횡취곡(橫吹曲)의 이름이다.
3. 日本躑躅(일본척촉)
일본 철쭉
曉霞奇艶出天東 새벽노을처럼 고운 꽃이 동쪽에서 들어와서
活態淸香笑翠籠 생생한 모습 맑은 향기로 푸른 잎 속에서 웃고 있네
夢斷蠻風王化近 오랑캐 풍속의 꿈을 접고 임금의 교화에 친근해져
色隨春日故園同 빛깔은 봄날을 따라 옛 동산에서와 같구나
映堦蜀錦凝眸絢 촉나라 비단이 섬돌에 비친듯 눈이 부시고
向檻吳姝倩臉紅 난간에 다가선 오나라 미인이 붉고 예쁜 뺨 같네
幾惜花神糚巧態 화신이 얼마나 아끼기에 교묘한 모습으로 단장하여
對人如在玉華宮 보는 사람이 마치 선경에 온 듯하게 만드는가
4. 海南琅玕(해남랑간)
해남의 옥돌
滄溟鐵索繫雲根 푸른 바다 속의 바위에 쇠줄 묶고
鉤出蒼然玉樹痕 갈고리로 건져내니 옥수 흔적 창연하다
苔蘚磷磷魚甲動 이끼 모습은 반들반들 고기비늘 움직이는 듯
輝光燭燭水紋奔 광채가 번득이니 물결무늬 달리는 듯
斸珍也得心機巧 깍아서 보배를 얻는다 하니 마음이 묘해지는데
玩物寧遺德業尊 완물에 빠져 어찌 높은 덕업 버리랴
但取鏗鏘金玉韻 다만 쟁쟁한 금옥 소리만을 취하여
欲方君子付兒孫 군자에 견주고 자손에게 주고 싶네
5. 翻階芍藥(번계작약)
섬돌에 너울거리는 작약
傍砌翻紅媚日夭 섬돌 옆 번득이는 꽃이 해를 보고 아양 떠는 듯
靜看霞碎赤城標 잠자코 보노라니 궁성 깃발에 노을이 엉긴 듯하네
葉藏翡翠層層嫰 잎사귀는 비취를 간직한 채 층층이 여리고
蘂襲臙脂箇箇妖 꽃술엔 연지가 스민 듯 낱낱이 아리땁네
曉露精神題白管 새벽이슬의 정령은 백관에 쓰고
暮烟情態寄溱橋 저녁연기 정겨운 모습은 진교에 부친다
領春蜂蝶閒喧處 봄을 차지한 벌 나비가 한가로이 노니는 곳에
不耐軟芳倚檻橋 난간에 기댄 여린 꽃 교태로워 견딜 수 없네
6. 滿架薔薇(만가장미)
시렁에 가득한 장미
重重疊疊影相依 겹겹이 쌓인 꽃 모습이 서로 어울려
滿架濃陰羃檻扉 시렁에 가득하니 짙은 그늘이 우리 문짝을 가렸네
砢綠抹條構翠幄 잎은 포개고 가지는 구부려 푸른 장막 만들고
雌黃點蘂照春衣 자황으로 꽃술에 점을 찍어 봄옷에 비춘다
風吹猩血鶯聲老 바람은 선홍빛 꽃에 불고 꾀꼬리 소리 쇠잔해지니
花送臍香蝶意肥 꽃은 사향 향기 보내어 나비 날개 살찌운다
手折若無拚處刺 손으로 꺾을 때 찌르는 가시만 없다면야
肯敎秋菊泛瓊巵 어찌 가을 국화만 술잔에 띄우게 했으랴
7. 雪中冬柏(설중동백)
눈 속의 동백
不隨桃李占春風 복숭아 오얏 따라 봄바람을 차지하지 않고
稟性常數歲暮中 타고난 성질이 늘 세모 중에 무성하구나
臘氣凝朱烘日色 섣달의 기운이 엉긴 붉은 색은 햇볕에 그을리고
寒心膩玉保天功 차가운 꽃심의 살찐 옥은 하늘의 힘이 보호하네
玲瓏硬葉含霜綠 영롱한 굳은 잎은 서리 속에서도 푸르고
爛熳腴花映雪紅 활짝 핀 살찐 꽃은 눈 위에 붉은 빛 비춘다
料得羣芳無伯仲 알겠거니 뭇 꽃들에겐 서로 우열이 없는데
東皇先許寓靑瞳 봄의 신이 동백에겐 먼저 푸른 꽃눈 붙여 주었네
8. 春後牧丹(춘후목단)
봄이 지난 뒤의 모란꽃
眞宰無私化萬般 하늘은 공평무사하게 만물을 화육(化育)하는데
憐渠華譽擅人間 세사에서 꽃의 명예를 독차지한 네가 어여쁘다
春風艶麗饒嬌態 봄바람에 곱게 피어 교태가 넘쳐나고
晴日冲融燦醉顔 갠 날씨 화창하니 술에 취한 붉은 얼굴 빛난다
傾國哲王先已遠 나라 망친 명철한 임금도 이미 멀어졌으니
含花野鹿豈能干 꽃을 문 들사슴을 어찌 간섭할 수 있으랴
羣紅落盡增明媚 뭇 꽃들이 다 지자 아리따움을 한층 더 뽐내니
更似西施押禁班 서시가 다시 궁중에서 아양을 부리는 듯하네
9. 墻頭紅杏(장두홍행)
담 위의 붉은 살구꽃
一株團雪糝靑枝 한 그루 푸른 가지에 눈이 덩어리져 붙었은데
脣倩晴霞雨後時 비 온 뒤 노을 같은 붉은 꽃이 입술을 열었네
紅襯短墻當午醉 붉은 꽃이 낮은 담 위에서 한낮에 취한 듯하고
艶烘春日帶風披 고운 모습은 봄볕 쬐며 바람곁에 나부낀다
花間粉蝶高輕翼 꽃 사이 흰나비는 가벼운 날개로 높이 날고
葉底黃鸝護落兒 잎 속의 꾀꼬리는 새끼 떨어질까 보호하네
試遣仙姝糚映燭 선녀를 보내어 고운 단장을 비처 보려는 듯
月中嬌婉捧金巵 달 속 선녀의 고운 손이 금술잔을 받든 듯
10. 屋角梨花(옥각이화)
집 모퉁이에서 핀 배꽃
多情春日叶淸和 다정한 봄날이 알맞게 맑고 화창하니
屋角梨開白雪花 집 모퉁이의 배나무가 백설 같은 꽃을 피웠네
院落溶溶藏皓月 안 뜰에 맑고 밝은 달을 감쳐둔 듯
亭欄艶艶醉仙娥 정자 난간에서 곱디고운 달빛에 취하네
濃薰透骨荀爐煖 짙은 향기는 순로[1]의 향기가 뼈속에 스미는 듯
淡影披風越襪斜 맑은 그림자가 바람에 쏠리니 월말이 비긴 듯하다
玉貌天然司手妙 옥 같은 천연의 꽃 모습은 조물주의 교묘한 솜씨인데
子規淸哢記年華 두견새의 맑은 소리 봄의 좋은 시절 기억하리라
[1]순로(荀爐) : 전설상의 향초인 순초를 피운 향로이다. 순향(荀香)은 순령향(荀令香)이라고도 하는데, 후한 때 순령군(荀令君) 순욱(荀彧)이 앉았던 특이한 향기가 3일이나 났다는 고사에서 유래하여 특이한 향기를 말한다.
11. 熟睡海棠(숙수해당)
깊이 잠든 해당화
東風裊裊海棠花 봄바람에 능청거리는 해당화가
開遍春階手可挐 봄 뜰에 질펀하게 피어 손에 잡힐 듯하네
繞燭照糚元不俗 촛불 밝혀 화장한 모습 비춰 보니 원래 속되지 않고
與梅爲聘奈無家 매화와 짝이 되려 하나 집이 없어 어쩌나
玉眞嬌足沈香睡 양귀비의 아양에 만족하여 침향정[1]에서 잠든 듯
金谷香開綉閣嘉 금곡[2]의 술 향기가 아름다운 여인의 방에 풍기는 듯
欲識此紅淸絶處 이 꽃의 청절한 점을 알려거든
影搖斜月半樽遮 비낀 달 그림자가 반쯤 술통에 흔들릴 때를 보게
[1] 침향정(沈香亭) : 당나라 현종(玄宗) 때 양국충(楊國忠)이 침향나무로 지었다는 정자로, 현종과 양귀비가 놀던 곳으로 유명하다.
[2] 금곡(金谷) : 금곡주(金谷酒), 즉 호사스러운 술잔치를 말한다. 옛날 진(晉)의 석숭(石崇)이 금곡에 금곡원(金谷園)을 짓고 호사스러운 술잔치를 벌이며 시를 못 지으면 벌주 석 잔을 들게 한 고사에서 금곡주수(金谷酒數)란 말이 생겼다.
12. 半開山茶(반개산다)
반쯤 핀 동백꽃
少媛淸孤久著稱 젊은 여인처럼 맑고 우아하기로 이름난 지 오래인데
澟然高趣挾霜矜 늠름하고 고상한 정취를 서리 속에서 자랑한다
馨多此日春先最 향기 많은 이날이 봄의 맨 앞인데
吟苦何人句續曾 수고로이 읊은 이 시에 누가 이어 읊겠는가
點綴紅英栽錦綻 여기저기 붉은 꽃이 비단을 마른 듯 피었는데
扶疎靑葉間烟凝 무성한 푸른 잎 사이엔 연기가 엉기었네
歲寒一種風流艶 한겨울에 피는 일종의 운치 있는 이 꽃을
須畔高樓耀九層 높은 누각 옆에 두어 아홉 층을 빛내 주길 바라네
13. 爛漫紫薇(란만자미)
활짝 핀 백일홍
幾抱穠條向玉堂 몇 아름의 무성한 가지가 옥당을 향해 섰는데
蘇仙淸玩洗詩腸 소동파 완상하며 시심을 씻었다네
風標雅合詞臣對 우아한 풍채는 사신들의 상대로서 알맞고
細艶偏宜禁省芳 섬세하고 아리따움은 궁중의 꽃으로 적당하리
雨着纖臙摸彩畫 비에 젖은 가냘픈 꽃은 채색화를 그린 듯한데
影搖新月轉長廊 달빛에 흔들리는 그림자가 긴 회랑에 옮겨가네
丰茸紫綬栽何密 자수같이 무성한 꽃 어찌 그리도 조밀하게 재단했나
疑是仙娥巧手忙 아마도 기교 있는 선녀의 손이 바빴으리라
14. 輕盈玉梅(경영옥매)
산뜻한 옥매화
漠漠輕寒好雨經 쌀쌀한 날씨에 아득히 단비가 지나가자
紛然糝雪占春榮 어지러히 눈송이 같은 꽃이 봄의 영광 차지했네
軟枝無力攲風煖 여린 가지는 힘없이 따스한 바람에 기울고
素蘂多情照日香 흰 꽃은 다정하게 햇빛을 받아 향기롭다
淸韻渾隨明月見 맑은 운치는 밝은 달이 뜨면 볼 수 있고
冰姿宜向禁園生 얼음 같은 자태는 의당 금원을 위해 생겼으리
隔欄鬪巧看何厭 난간 너머에서 기교를 겨루니 어찌 싫증이 나겠는가
欲秉銀燈細訪名 등불 밝혀 자세히 그 이름 알아보련다
15. 忘憂萱草(망우훤초)
근심을 잊게 하는 원추리
融吹南薰解慍時 훈훈한 남풍이 불어 백성의 마음이 풀릴 때에도
微花自發故遲遲 작은 이 꽃은 일부러 더디 피네
可憐但作堂中樂 가련하다 단지 북당의 즐거움만 가져다 주니
焉得能銷世上思 세상의 근심일랑 언제나 없앨 수 있겠나
淸馥度窻閨女笑 맑은 향기가 창문을 넘어가면 규방의 여인은 웃는데
朱華映日戌人悲 붉은 꽃이 햇빛에 비치면 수자리의 아들은 슬퍼하리
纖蕤眞是忘憂號 섬세하고 평온한 모습은 진정 망우초라 부를 만하니
樹背應先孝子持 집 뒤에 심어 응당 효자가 먼저 가져야 하겠네
16. 向日葵花(향일규화)
해를 향하여 피는 해바라기
已資天賦古靑春 천부의 자질로 이미 봄을 차지하여 누리고
立輒憑垣照日垠 조용히 담장에 기대어 서서 솟은 해를 비추네
衛足自驚趨利汚 위족[1]이라 제 이익만 좇는 잘못에 스스로 놀라고
傾暉能勸事君親 해를 향함은 임금과 어버이 섬김을 권장하네
幽香最入詩人腹 그윽한 향기는 시인의 뱃속에 가장 많이 들어가고
濃態還輕歌女脣 짙은 자태는 되려 노래하는 여인의 입술인양 가볍네
開向小軒忠節著 소헌을 향해 꽃을 피워 충절을 드러내는데
陰山一朶噉名人 음산의 한 떨기가 이름난 사람 꾀네
[1] 위족(衛足) : 해바라기가 태양을 잎으로 가리어 뿌리(足)를 보호한다는 데서 ‘스스로 자신의 이익만을 지키는 소인배’의 행동을 비유한다.
17. 門前楊柳(문전양류)
문 앞의 버드나무
靑嫋腰肢春日摐 푸르고 여린 가지가 봄날을 두드리며
含烟含雨映朱龐 연기와 비를 머금고 화려한 전각에 비치네
莫敎飛雪留三月 흩날리는 눈보라 삼월에는 머물지 않게 하여 다오
幾別遊人困一邦 나그네가 한 곳에서 얼마나 곤경을 겪겠는가
高出亞營憑壯氣 아영[1]에 높이 솟아 장한 기운 과시하고
纖抵陶宅壓愁腔 섬세한 가지는 도택[2]에 드리워 수심을 누르네
黃鶯微鳥何先識 꾀꼬리는 미물인데 어찌 오는 봄을 먼저 알고서
長送嬌音伴綠窓 여인의 방 가까이에서 예쁜 소리 늘 보내나
[1] 아영(亞營) : 한(漢)나라 문제 때의 장수 부아부(周亞夫)의 군영(軍營)을 말하는데 전의되어 ‘군율이 삼엄한 군영’을 이른다. 군영 안에 버드나무가 많아 ‘세류영(細柳營)’이라고도 하였다.
[2] 도택(陶宅) : 진(晉)나라 때 <귀거래사>로 유명한 시인 도연명(陶淵明)의 집으로, 그의 집 앞에 다섯 그루의 버드나무가 있어 도연명을 오류선생(五柳先生)이라 불렀다. 여기서는 버드나무가 있는 집을 말한다.
18. 檻外芭蕉(함외파초)
난간 밖의 파초
攪醉醒眠滴雨疎 후두두 떨어지는 빗소리에 취한 잠을 깨어 보니
階風鳴玉翠旗舒 섬돌에 부는 바람 옥을 울리고 푸른 깃발 펼쳤네
蠟靑高揷無烟燭 푸른 밀초를 높이 꽂았으나 연기 없는 촛불이요
緘綠斜開沒字書 녹색 봉함 비스듬히 열었건만 글자 없는 편지로다
淸性有根看葉茂 맑은 성질의 뿌리에 무성한 잎 보겠고
嫰姿爲幹愛心虛 부드러운 줄기지만 마음속 비운 게 사랑스럽다
繞身羅扇眞蕭灑 몸을 두른 비단 부채 참으로 산뜻하니
霽月梧桐却不如 개인 달밤의 오동도 이만은 못하리라
19. 籠烟翠檜(롱연취회)
연무에 싸인 푸른 전나무
凌轢霜雲與雪兮 상운과 눈 죄다 무시하고 능멸한 채로
亭亭獨立榦無齊 정정하게 우뚝 선 가지 가리런 하지 않네
烈風吹櫛驚靑鶴 맹렬한 바람이 불어오면 청학도 놀라고
凍雨凝凘掛碧猊 진눈깨비 엉기면 푸른 무지개 걸어놓은 듯
根到九泉人不識 뿌리가 구천에 이르러도 사람은 알지 못하고
葉深千尺烏難棲 잎은 천 척이나 깊어서 새가 깃들기 어렵도다
參天黛色看無厭 하늘 높이 솟은 짙푸른 빛 보고 보아도 물리지 않으니
此賞期無抵死迷 이런 감상 죽을 때까지 흐트러짐 없길 바라네
20. 映日丹楓(영일단풍)
햇빛에 비친 단풍
曉來寒氣砭山隅 새벽이 되자 찬 기운이 산 속을 파고드니
一樹楓林變綠膚 단풍숲의 나무마다 푸르던 살갗 변하였네
千點紫霞籠翠壁 천 점 붉은 노을이 푸른 벼랑을 에운 듯하고
數重紅錦羃靑株 몇 겹의 붉은 비단을 푸른 밑둥치에 덮은 듯하네
明翻落日驚秋色 지는 햇빛에 번득이는 가을 경색 놀랍고
絳勝荊人利木奴 진흥빛은 남방 사람들이 감귤 탐하는 것보다 낫네
堪歎奇姿眞有異 기이한 자태는 참으로 감탄할 만하니
莫言霜岸詎施朱 서리 내린 언덕을 어찌 붉게 물들일까 말하지 말게
21. 凌霜菊(릉상국)
서리를 능멸하는 국화
誰題黃菊勸躊躇 황국 보고 한 수 읊자 권하기를 그 누가 주저하랴
喜對淸風數起予 반갑게 맞은 맑은 바람까지도 자꾸 나를 꼬드기네
日泛金英搖露際 황금꽃 위에 해가 떠서 이슬이 흔들릴 때면
香標朱檻叫鴻初 붉은 난간에 향기 오르고 기러기가 비로소 운다
亭臺霜冷情無限 정자에 서리 차가워도 기상은 꺾이지 않고
籬落秋深態有餘 울타리에 가을이 깊어도 그 자태 여유롭네
盈把龍山吹帽日 용산에서 모자 날린 날[1] 한 움큼의 꽃을 따서
幾巡浮酒上瓊廬 여산에 올라 술잔에 띄워 몇 순배나 돌렸던고
[1] 용산에서 모자 날린 날 : 용산낙모(龍山落帽)의 고사를 인용한 것으로, 진(晉) 맹가(孟嘉)가 음력 9월 9일인 중양절(重陽節)에 동료들과 용산에 올라 노는데 술에 취하여 모자를 떨어뜨리고 놀림을 받았으나 태연히 그에 답하는 시를 지어 좌중을 탄복시켰다 한다.
22. 傲雪蘭(오설란)
눈을 업신여기는 난초
依依雪逕映晴軒 희미한 눈길이 맑은 들창에서 보이는데
日照疎花淺碧繁 해는 연푸른색 짙은 난초꽃을 비추네
顔色旣嫌桃李徑 안색은 복숭아꽃 오얏꽃 핀 길을 싫어하는데
性情那欲艾蓬原 그 성정이 어찌 쑥대 언덕을 좋아하리오
睛童耀影翻成竹 눈에 비치는 그림자는 대나무가 번득이는 듯하고
鼻觀通芳擬掩蓀 코에 스미는 향기는 짙은 창포 향기를 능가하네
琴操淸風江谷振 거문고 가락 청풍에 실어 골짜기 진동해도
春林不禁鳥相喧 봄 숲에서 지저귀는 새소리 막을 수 없네
23. 萬年松
만년송
偃蓋長松鎖翠雲 누운 일산 같은 장송이 푸른 구름에 잠겼는데
欝然蒼瘦復胎芬 무성한 잎 수척한 몸엔 향기마져 배어 있네
妙靈龜窟靑蟠地 신묘한 복령은 거북이 굴속에 숨듯 땅속에 서려 있고
剝落龍鱗紫綴文 용의 비늘 벗겨진 곳엔 붉은 무늬 지었네
逃斧幾年能合抱 도끼를 피한 지 몇 년 만에 아름드리 되었나
遇風淸夜自鳴壎 맑은 밤 바람이 불면 질나발 소리 울린다
亭亭更闘巖巒力 정정하게 솟아 바위산과 겨루는 힘으로
欲制頹齡鎭歲曛 늙어가는 나이 막아 보려고 저무는 해를 누르네
24. 四季花
사계화
誰肯安排稟一團 하늘이 내린 품성을 누가 어찌 안배했기에
嫰紅嬌態四時安 여린 꽃 예쁜 자태를 사철에 즐기게 했나
也知眞宰無私手 하늘의 조화는 사사로움이 없음을 알건마는
却恨昭材有灼瘢 밝은 바탕에다 불에 덴 자국 남겨 한이 되네
酒色上肌飛燕醉 술기운이 살갗에 올라 비연[1]이 취한 듯
芳心溢面綠珠看 꽃다운 마음이 얼굴에 넘치니 녹주[2]를 보는 듯
高標逈與羣英絶 고상한 모습은 어러 다른 꽃을 멀리 제치고
好對淸霜賞未殘 맑은 서리 속에서도 시들지 않음을 보겠네
[1] 비연(飛燕) : 한(漢)나라 성제(成帝)의 비인 조 황후(趙皇后)로, 노래와 춤을 잘했다고 한다.
[2] 녹주(綠珠) : 진(晉)나라 석숭(石崇)의 애첩으로 피리를 잘 불었다. 미인의 대명사로 통한다.
출전 : 탁영선생문집 중간본, 역주본
편집 : 2015.01.09. 죽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