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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재 지: 전라북도 정읍시 상평동 378 ❏문화재지정: 고암서원 묘정비 -전라북도문화재자료 제 81호(1984.04.01지정) ❏배향인물: 송시열(宋時烈) 권상하(權尙夏) ❏창건연도: 1695년(숙종 21) ❏사액연도: 1695년(숙종 21) ❏향 사 일: 음 9월 초정 |
조선조 1689년(숙종 15)에 송시열(宋時烈)이 정읍에서 수명(受命)한 후 6년 뒤 무고함이 밝혀져 나주 유생 나세기(羅世器) 등 팔백여명의 상소로 1695년(숙종 21)년 6월에 창건하고 그해 9월에 고암(考巖)이라 사액하였다. 그리고 1785년(정조 9) 10월에는 민치겸(閔致謙) 등 유림들의 상소로 송시열의 수제자인 권상하(權尙夏)를 배향하였다. 당시 이 두 분의 영정이 봉안(奉安)되었다. 당시의 서원에는 장의(掌議) 1명, 재임(齋任) 2명, 원생(院生)이 내외 60여명이었다. 1870년(고종 7)에 정부의 령(令)에 의하여 헐리웠는데 그 전날 밤에는 동네의 닭들이 초저녁부터 울어대고 마을의 샘물이 말랐다고 한다. 그 때에 건립한 묘정비(廟庭碑)가 남아있다.
1)주벽-송시열(宋時烈, 1607~1689)
조선후기의 학자·명신으로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영보(英甫), 호는 우암(尤庵)·화양동주(華陽洞主),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송갑조의 아들이며 사계 김장생과 신독재 김집으로부터 사사(師事)받았다. 27세에 생원시에 장원으로 합격하고 1635년에는 봉림대군의 사부가 되어 훗날 효종과 깊은 유대를 맺는 계기가 되었다. 병자호란 이후에는 일체의 관직을 사양하고 향리에 낙향하여 10년간 학문에만 몰두하던 중 1649년에 효종이 즉위하자 기용되어 북벌 계획의 핵심인물이 되었다. 이후 송시열의 정치 생활은 북벌·예송과 관련하여 부침(浮沈)을 계속하였다.
조정에 나아가기보다는 향리에 은거한 기간이 대부분이었으나 사림의 중망 때문에 서인의 거두로, 혹은 노론의 영수로 막대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1689년의 기사환국으로 서인이 축출되고 남인이 재집권하면서 유배와 사약을 받은 이후, 송시열의 행적에 대해서는 당파 간의 칭송과 비방이 무성하였다. 그러나 1716년의 병신처분과 1744년의 문묘 배향으로 그의 학문적 권위와 정치적 정당성은 공인되었고 영조 및 정조대에 노론의 일당 전제가 이루어지면서 그의 역사적 지위는 더욱 견고하게 확립되고 존중되었다.
송시열의 서원 제향은 1694년 갑술환국으로 서인이 다시 정권을 잡자 대대적으로 추진되어 청주의 화양서원을 비롯, 수원 매곡서원, 영동의 초강서원, 제주의 귤림서원, 강릉의 오봉서원, 경주의 인산서원 등 전국적으로 약70여개 소에 이르며 사액(賜額) 서원만도 37개소가 된다. 저서로는 주자대전차의 주자어류소분 이정서분류 논맹문의통고 경례의의 심경석의 찬정소학언해 주문초선 계녀서등이 있고, 문집으로는 우암집(167권)·송자대전(215권) 송서습유(9권) 속습유(1권) 등이 간행되었다.
2)권상하(權尙夏, 1641∼1721)
조선 후기의 학자.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치도(致道), 호는 수암(遂菴)·한수재(寒水齋). 서울 출신. 아버지는 집의 격(格)이며, 우참찬 상유(尙游)의 형이다. 송준길(宋浚吉)·송시열(宋時烈)의 문인이다.
1660년(현종 1)에 진사가 되고, 성균관에 들어가 수학 중, 1668년에 스승 송시열이 좌의정 허적(許積)과의 불화로 우의정을 사직하자 유임시킬 것을 상소하였다. 1674년(숙종 즉위년)에는 앞서 1659년(효종 10) 효종의 승하 시에 있었던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제 문제가 다시 발생해, 송시열은 관작을 박탈당하고 덕원(德源)에 유배되는 불운을 당하게 되었다. 이때 그는 남인의 정권에서는 관계에 진출하는 것을 단념하고 청풍의 산중에 은거해 학문과 교육에 전념할 것을 결심하였다. 1689년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득세하게 되어 송시열은 다시 제주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고, 이어서 사약(賜藥)을 받게 되자, 유배지에 달려가 스승의 임종을 지키고 의복과 서적 등 유품을 가지고 돌아왔다. 송시열이 죽음에 임해 남긴 유언에 따라 괴산 화양동(華陽洞)에 만동묘(萬東廟)와 대보단(大報壇)을 세워 명나라 신종(神宗: 임진왜란 때 군대를 파견하였음)과 의종(毅宗:나라가 망하자 자살함)을 제향하였다.
숙종 재위 중에 1680년 경신환국으로 서인이 집권하고, 그 뒤 1689년에는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집권, 1694년에 갑술환국으로 서인이 득세하는 등 서인과 남인 간에 당쟁이 치열했지만, 그는 당쟁에 초연한 태도로 학문과 교육에만 전념하였다. 1703년 찬선, 이듬해 호조참판에 이어 1716년까지 13년간 해마다 대사헌에 임명되었으며, 그 밖에도 1705년 이조참판, 찬선, 1712년에 판윤, 이조판서, 1717년 좌찬성, 우의정·좌의정, 1721년(경종 1) 판중추부사에 임명되었으나, 사직소를 올리고 나가지 않았다.
송시열의 제자 가운데 김창협(金昌協)·윤증(尹拯) 등 출중한 인물이 많았으나, 권상하는 스승의 학문과 학통을 계승해 뒤에 ‘사문지적전(師門之嫡傳)’으로 불릴 정도로 송시열의 수제자가 되었다.
이와 같은 학파적인 위치로 인하여 정쟁의 소용돌이에 관련되기도 하였다. 1715년 ≪가례원류≫의 저작권을 둘러싸고 윤선거(尹宣擧)와 유계(兪棨)의 후손 사이에 분쟁이 일어나자, 그 서문에서 유계의 저술임을 밝혀 소론의 영수 윤증으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또한, 송시열이 화를 당한 것은 “윤증이 윤휴의 무리와 함께 조작한 것”이라고 송시열의 비문에 기록해 유생 유규(柳奎) 등 8백여 명과 대사간 이관명(李觀命), 수찬 어유구(魚有龜) 등 소론측으로부터 비문을 수정하라는 항의를 받기도 하였다.
당쟁기에 살면서도 정치 현실에 관심을 갖기보다는 서경덕(徐敬德)·이황(李滉)·기대승(奇大升)·이이(李珥)·성혼(成渾) 등 선유(先儒)들로부터 제기된 조선시대 성리학적 기본 문제에 대하여 규명하려는데 많은 힘을 기울였다.
그 는 16세기에 정립된 이황·이이의 이론 중 이이·송시열로 이어지는 기호학파의 학통을 계승하고, 그의 문인들에 의해 전개되는 이른바 호락논변(湖洛論辨)이라는 학술토론 문화를 일으키는 계기를 주었다.
이단하(李端夏)·박세채(朴世采)·김창협 등과 교유했으며, 문하에서 배출된 뛰어난 제자로는 한원진·이간·윤봉구(尹鳳九)·채지홍(蔡之洪)·이이근(李頣根)·현상벽(玄尙璧)·최징후(崔徵厚)·성만징(成晩徵) 등 이른바 ‘강문팔학사(江門八學士)’가 있다.
글씨에 능해 <기백이태연표 箕伯李泰淵表>·<형참권극화표 刑參權克和表>·<부사과이숙표 副司果李塾表>등의 작품이 전한다.
청풍의 황강서원(黃岡書院) 등 10여 곳에 제향 되었다. 저서로는 ≪한수재집≫·≪삼서집의 三書輯疑≫ 등이 있는데 ≪한수재집≫은 1979년 양장으로 영인, 간행되었으며, 가전되던 영정을 영인본에 수록하고 있다. 시호는 문순(文純)이다.
경내의 건물로는 사우 1동(맞배지붕 동향), 강당 1동(맞배지붕 동향), 내삼문 1동(맞배지붕 동향)이 있다. 1868년(고종 5)에 훼철된 것을 1991년에 사우를 신축하고 1992년에는 강당을 신축하였으며 1993년도에는 삼외문 등이 건립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1)고암서원 묘정비-전라북도문화재자료 제 81호(1984.04.01지정)
고암서원은 송시열이 정읍에서 사약을 받은 후, 그 무고함이 밝혀져 숙종 21년(1695) 사액이 내려 세워졌으나, 고종 8년(1871) 철거되었다. 그 유허에 비를 세웠는데 높이 195cm, 너비 78cm, 두께 19cm이다. 영조 24년(1747)에 이재(李縡)가 썼으며 현재 비각 안에 보호되어 있다.
참고-정읍시사, 2003.
전북문화재대관(1997)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전북향교사우대관, 1994.
전주한옥마을 http://hanok.jeonju.g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