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명 높은 중국 관리 ‘도필리’
(출처: 유광종의 차이나 별곡 332, 조선일보2025.1.31.A27)
칼과 붓이 함께 등장하는 도필(刀筆)이라는 말이 있다.
종이가 없어 죽간(竹簡) 등에 글자를 썼던 시절의 이야기다.
붓으로 죽간에 글을 쓰다 틀리면 그를 긁어내서 다시 써야 했으므로 칼과 붓은 늘 함께 따라다녔다고 한다.
그러나 나중에 이 단어는 공무 집행하는 사람을 가리켰다. 도필리(刀筆吏)라고 하는 명칭이다. 이는 과거 왕조시대 공식 관원(官員)을 돕는 하위 공무 종사자를 지칭하는 말이었다. 흔히 아전(衙前)이라 했던 사람들이다.
지금과 다르지만, 과거에는 우리도 ‘벼슬아치’와 ‘구실아치’를 구분했다. 앞은 공식 선발 과정을 거쳐 뽑은 고위직, 뒤는 그 절차 없이 지방 관아에 발을 들인 하위직 공무원이다. 여기서 ‘구실’은 백성이 내는 세납(稅納)을 가리킨다.
지방 공무 체계의 바탕인 이들 아전은 보통 향리(鄕吏) 또는 서리(胥吏), 이속(吏屬) 등으로도 부른다. 그러나 ‘도필리’는 아전 중에서도 문자(文字)를 취급하는 쪽이다. 따라서 서리(書吏), 부사(府史)라고도 불렸다.
중국에서는 이 ‘도필리’의 명성이 아주 좋지 않다. 이들은 주로 형벌(刑罰)과 소송(訴訟)을 다루면서 권력을 보좌했던 참모 그룹이다. 옛 형명(刑名)을 다루는 일이니 지금으로 치면 사법(司法) 종사자를 일컫는 말이다.
청(淸)대에 이들은 각종 송사(訟事)를 주무르며 글자 하나로 사람 생명도 해치고, 막대한 이권을 삼키는 일로도 유명했다. 옳고 그름의 시비(是非)를 뒤흔들고, 책임을 남에게 떠넘기며, 증거를 날조하는 행위로 특히 악명을 떨쳤다.
작은 정부든 큰 정부이든 사법체계에서는 이 ‘도필리’의 부활을 경계해야 한다.
아차하는 순간 아주 음험했던 옛 ‘도필리’들이 환생한다.
~~~
<본 카페지기의 추기(追記)>
본인의 고조부(高祖父)는 향리이었다. 성함은 이언기(李彦基)이다. 하동에 아전으로 일을 때 섬진강을 넘어 전라도의 동학꾼들이 들이 닥쳤다. 서울에서 온 사또도 도망가고 하동읍성이 무방비로 바로 무너졌다. 고조부는 이방으로 곡식창고의 책임자이었다. 중과부적(衆寡不敵)이니 같이 피하자는 사또를 따라 갈 수도 있었지만, 맡고 있던 책임이 너무 중해 갈 수가 없었다. 동학꾼들이 잠긴 성문의 담을 타고 넘어왔다. 포졸 몇과 성(城)을 지키다가 성 마루에서 포박을 당한 채 우두머리에게로 안내되어 갔다. 곧 곳간열쇠도 빼앗켰다. 창고책임관리로 곳간의 쌀을 지키기 위해 남은 것이다. 열쇠를 숨기거나 들고 그냥 사라지면 당일로 자물쇠는 파괴되고 곳간의 모든 식량은 순식간에 다 사라진다.
그러면 하동 백성들의 삶은 피탄해진다. 수급을 최대한 바르게 조절해야 한다. 그리고 다가오는 농사철을 위하여 별도로 특별히 보관한 볍씨들은 창고에 그대로 잘 보존해 놓아야 한다. 평소 곡식과 식량과 농사를 총 책임지는 지방관리의 생명적 과업이다. 혹시 하동읍성이 불타더라도 식량창고만은 그대로 잘 지켜야 한다. 특히 볍씨들은 근종(根種)으로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한다.
며칠 후, 하동을 접수한 동학꾼들의 상당수가 창과 칼, 조총과 활 등으로 무장을 하고 말을 타고 고조부님의 고향 집성촌으로 몰려 왔다. 대략 300명 정도가 달포 머물러다가 대접을 잘 받고 갔다. 올 때도 그렇고 갈 때도 긴 행렬로 피리를 불고, 마을주민들의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징과 북을 치고 깃발을 나부끼며 갔다.
오는 모습도 장관이었지만 가는 모습도 장관이었다고 한다. 말을 타고 오는 긴 행렬로 피리와 징과 북으로 다가 왔으며, 저녁마다 마을의 동네 큰 마당에서 햇불을 놓아 판소리나 잡가 등의 창(唱)을 농악대로 소리꾼이나 단체로 불러 인근의 읍내주민들이 대거 몰려, 보려 올 정도이었다. 낮에는 달포 내내 마을을 위하여 농사일도 같이 해 주어, 머무른 밥값을 다 하고 간 셈이다. 갈 때도 동네 마을 주민들의 전송을 받으며 온 마을을 울려 퍼지는 피리와 징소리와 함께 사라졌다. 특이한 것은 집성촌이다 보니 이들의 주둔경비를 십시일반으로 먼저 상부상조했으며, 일이 끝나고 난 후 나의 고고조부님께서 집집마다 상계를 다 해 주었다. 이들이 있는 동안 아무런 사고도 없었다고 한다. 그리곤 흔적도 없이 세월과 함께 전설만 일부 남기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올 때 지리산이나 산청에서 생산되는 도라지, 산삼, 녹용 등의 진귀한 약초도 말등에 많이 싣고 와, 일부는 읍내 등에 팔고 일부는 나의 고고조부님께 마을의 답례로 주고 갔다. 전라도 동학꾼들은 전쟁도 하고 장사도 하고 봉사도 하는 특이한 풍속의 영리한 무리들이었다.
절차상으로 물론 올 때 나의 조부님이 쓰신 편지를 들고 왔다. 미리 연락도 받았고, 그 편지를 본 나의 고고조부님께서 흔쾌히 그들을 맞아들여, 달포 내내 술과 음식과 잔치를 베풀어 주어 보내주었다. 갈 때는 여비(旅費)도 병사하나하나까지 다 챙겨 주었다. 영창리 시냇가의 물이 항시 졸졸 흐르는 강양(江陽) 서산의 나의 고향땅에서 있었던 일이다.
당시 너른 전답의 대부분이 나의 7대 조부님의 땅이었다. 세월이 흐르고 흘려 나의 7대 조부님의 묘소가 계시는 지번의 소유주가 바로 본 카페지기가 되었다. 다닥다닥 다 붙여 있지만 크고 작은 세 필지로 1500평이 넘는다. 무덤이 많은지 용도가 공동묘지인 채로 나에게로 전해져 넘어 온 것이다. 토지대장의 분기된 항목을 보니 소유주가 모두 생면부지의 종친들이다.
2018년 12월까지 전혀 몰랐는데 부친별세 후 해당면사무소의 상속절차 통지서를 받아 보고서야 알았다. 그 후 고향에 터를 잡고 계시는 당숙이 나에게 전화로 걸어와 잘 설명해 주었다. 몇 대에 걸친 상속과 토지개혁 등으로 이리저리 다 갈라지고 그 묘소가 있는 터가 또 다른 인근의 125평의 전답과 함께 나에게 전해 넘어 온 것이다.
전답은 토지세가 있다. 매년 납부하면서 서류상으로만 확인을 하고 있다. 고향에 아는 친지도 별로 없다보니 일부러 가기도 힘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