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Ⅸ. 성경, 전승들의 편집물
성경은 역사의 흐름 속에서 작은 전승들이 점점 성장하고 확대되면서 새롭게 구성된 편집물이다. 예를 들어 모세를 보면 성경이 전하는 모세의 눈부신 신앙과 업적은 모세에 대하여 구전된 내용들을 후대 저자들이 동시대의 현안들에 대한 신학적이고 지성적인 대안으로 재구성하여 내놓은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오늘은 성경 제작의 가장 대표적 속성인 ‘편집적 성격’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1. 편집, 성경 제작의 제 1속성
(1) 여러 지층으로 완성된 성경
사실 예전에는 성경은 그냥 하늘에서 주어졌거나 아니면 하느님이 불러주시는 대로 특정한 필사자가 글자 하나하나를 받아 적어 생긴 책이라고 생각했었다. 인쇄술이 발명되기 전, 평생토록 책이라는 것은 단 한 번도 구경하지 못하던 시대의 민중들이 그러했고, 성경을 전문적으로 공부하기 전의 신자들이 그러했다. 성경을 직접 대하지 못했으니 그 안에 들어 있는 여러 전승층을 발견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인쇄술이 발명되고 성경이 대중들에게 보급되면서 이러한 단순한 이해는 붕괴되기 시작하였다. 그 안에 노출된 여러 내용상의 충돌들을 발견하게 되었고, 그 결과 이러한 문제점들을 연구하는 학자들과 연구물들이 대거 등장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의 빛나는 업적은 성경이 한 사람에 의해 ‘질서 정연하게 저술된 책’이 아니라 여러 시대, 여러 저자에 의해 기록되고 수정되면서 완성된 ‘종합적 편집물’임을 밝혀냈다.
보통 ‘천년의’라는 수식어가 붙으면, 거의 현실성 없는 신비와 관련된 무언가를 연상하게 된다. 천년의 사랑, 천년왕국, 천년의 고독과 같은 단어를 생각해보면 알 수 있다. 지칭하는 대상들의 영원성에 주목하고 그러한 초자연적 속성을 강조하기 위해 ‘천년의’라는 수식어를 사용하는 것이다.
그런데 제작 과정만 꼬박 천년이 넘게 걸린 대작(代作)이 있으니 바로 성경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문자로 기록되어 전수된 과정이 천년이지, 구전되던 시기까지 합한다면 실은 이천 년 또는 삼천 년에 달하는 제작과정을 거쳤다고 해야 맞는다.
사실 구전의 과정은 성경 형성의 핵심 요소이자 성경의 역사에서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과정인데, 성경의 기원이 되는 이야기들이 바로 구전을 통해 부족들 안에 회자되면서 형성되고 발전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기들의 삶 안에서 체험되고 그 체험을 기반으로 고백하던 하느님 이야기를 혹시라도 잊어버릴까 봐 토씨 하나 빠뜨리지 않고 외우고 외우며 후대에 전했고, 이러한 눈물겨운 과정을 통해 이룩된 신앙적·문학적 산물이 바로 성경인 것이다.
이제 우리는 성경의 복잡한 제작 과정을 전체적으로 조감해 볼 필요가 있다. 물론 실제로는 더 복잡한 지층들이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여기서는 대략적인 지층만을 보도록 한다.
그런데 이렇게 복잡한 과정이 성경을 구성하는 각 권들에 개별적으로 적용되고 이루어졌음을 기억한다면 그 복수성과 다층적 특징은 몇 배로 커지게 된다. 곧 창세기, 탈출기, 레위기 등의 성경 각 권들과 그 책들을 구성하는 각각의 본문들을 다음의 편집 단계들을 개별적으로 거치며 성장하고 완성되어 지금의 성경으로 만들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2) 역사 비평적 방법론의 공헌
성경이 복잡한 지층들의 연합이라는 것이 밝혀지자 이를 역사적으로 재구성하기 위한 학자들의 노력이 수행되었다. 이러한 학술적 노력을 통해 등장하기 시작한 연구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역사 비평적 방법론’이다. 이 방법론은 성경 해석의 방법론들 중에서 가장 전통적이면서 고전적인 것으로, 성경이 제작된 역사적 배경(그 시대를 아우르는 시대정신과 정치·사회·문화적 배경 등)과 그 단계적 상황을 파악해야 성경 본문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는 취지에서 등장한 방법론이다.
예를 들면 초등학교 시절 “국민 교육 헌장”이라는 거창한 이름의 문헌을 달달 외워 시험을 보았다. 그 시대만 해도 반공 이데올로기를 어린이들에게 강하게 주입시키고, 새마을 운동이라는 신경제 체제를 뼛속까지 체화시키는 교육이 주류를 이루던 때였다.
따라서 이 문헌은 당시의 그러한 사회적 풍토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면 결코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글이다. 특히 요즘같이 소통과 통합의 시대를 살고 있는 청소년들이나 젊은이들에게 이 문헌을 소개하고자 한다면, 당시의 역사적 배경은 필수적으로 선(先)이해로 제공되어야만 한다.
3·1운동 때 낭독된 “독립선언문”이 그렇고, 황사영을 죽음으로 몰고 간 “황사영 백서”도 그렇다. 모든 문헌은 그것이 공식적 문서든, 기도문이든, 노래 가사든 상관없이 당시의 시대정신과 그 시대의 정신적 지평을 감안할 때 비로소 제대로 이해될 수 있다.
성경도 마찬가지다. 성경을 읽다 보면 아무리 긍정적으로 보려 해도 현대인들의 의식으로는 도무지 받아들이기 어려운 내용들을 발견하게 된다. 문제가 되는 본문들에 대한 진정한 이해는 각각의 본문들이 문서화되던 당시의 역사적 상황을 제대로 파악해야만 가능하다.
21세기의 윤리관과는 맞지 않는 찜찜한 내용들, 예를 들어 아버지나 시아버지와 동침하는 내용들, 피도 눈물도 없는 전멸을 정당화하는 전쟁에 대한 본문들, 여성을 폄하하는 원시적 여성관등에 대한 본문들은 그 시대의 역사 속으로 직접 들어가서 그 시대의 윤리관과 세계관, 인간관을 제대로 이해해야만 납득할 수 있는 내용들인 것이다.
성경에 대한 이러한 불편한 혐의를 벗어나기 위해 19세기 말부터 제안되고 발전한 학문적 해결 방법이 ‘역사 비평적 방법론’이다.
현재 우리는 역사 비평적 방법론의 학술적 결과들을 통해 성경의 발전 단계뿐 아니라 상당히 세부적인 제작 과정까지도 재구성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1960년대 이후부터 학계에 대두된 여러 접근법(정경비평, 구조주의적 비평, 언어·문법적 분석 등)은 성경의 문학적 발전과 편집층의 재구성에 새로운 지평을 열어준다.
2. 문헌의 최종 편집에 주목하기
(1) 한 가지 사건, 다수의 보도
성경이 여러 시대, 여러 사람에 의해 형성된 편집물이다 보니, 결과적으로 등장하게 된 어려움 중의 하나는 성경이 한 가지 사건을 일관되게 보도하지 않고 서로 다르게 보도하기도 한다는 점이다. 하나의 사건에 대한 여러 보도가 서로 충돌하면서 병존하는 것이다.
우선 모세 오경에 등장하는 예만 보더라도 창조 이야기 두 번(창세 1,1-2,4ㄱ; 2,4ㄴ-3,24), 아담의 족보 두 번(창세 4장; 5장), 노아가 배에 들어간 사건 두 번(창세 7,7; 7,13), 홍수의 기간 두 번(창세 7,17 40일; 창세 7,24 150일), 아내를 누이라고 속인 사건 세 번(창세 12,10-20; 20,1-7 아브라함이 두 번; 창세 26,1-11 이사악이 한 번), 므리바에서의 기적 두 번(탈출 17,5-7; 민수 20,13), 십계명 두 번(탈출 20,2-17; 신명 5,6-21)이 등장한다. 그 밖에도 하느님 이름에 대한 충돌(야훼, 엘로힘, 그 밖의 이름), 하나의 산이나 지명에 대한 다른 이름(호렙, 시나이), 모세의 장인 이름(탈출 2,16 르우엘; 탈출 3,1 이트로, 판관 4,11 호밥)등 일일이 열거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많다.
이러한 현상은 앞서 언급했듯이 성경 안에 여러 전승이 구전으로 내려왔고 각기 다른 삶의 터전에서 재해석되고 정리되면서 발생하게 된 결과이다. 문자의 보급이 아직 완전하게 이루어지지 못하고 교통이나 통신도 원활하지 못하던 고대 시대에는, 지리적 조건(큰 산맥, 강, 바다 등)이 전승을 한정하고 개별적으로 성장하게 하는 주된 요인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2) 작중 배경과 실제 제작 배경 사이의 간극
우리가 주목해야 할 또 다른 중요한 관점은 전승이 하나의 ‘기록물로 고정된 시기’와 그 전승이 묘사하는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시기’가 언제나 일치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곧 모세나 다윗, 그 밖의 여러 성경 인물들의 일화가 실제로 기록된 시기는 그들이 살아서 활동했던 시기와 전혀 상관없는 시기일 수 있다.
즉 모세나 여호수아, 또는 성경에 등장하는 여러 영웅들의 이야기는 그 시대의 사건들을 재구성하여 객관적으로 보도하는 것에 목적이 있었던 것이 아니다. 그들의 이야기는 그들이 활약했던 시대와 매우 동떨어진 시대의 작가들이 과거 영웅들의 모습을 소재로 선택함으로써 당대에 부각되던 사회·정치적 현안들에 살아 있는 해법을 제시하기 위해 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여호수아기에 자주 등장하는 “힘과 용기를 내어라”(여호 1,6.7.9.18; 10,25등)라는 말은 여호수아기의 자체적 관점에서 본다면 이집트를 탈출하여 40년 동안의 광야 생활을 마치고 가나안에 들어가 전쟁을 치르던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말이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본다면 그 문헌이 제작되던 바로 그 시대(이집트 탈출 시대보다 훨씬 후대)의 독자들에게 저자가 전한 힘찬 권고이자 간곡한 격려였다.
이렇게 성경의 보도들은 이야기가 전하는 시대에 대한 역사적 기록을 전수하려고 제작된 것이 아니라 그 문헌이 ‘제작된 시대’의 현안들을 해결하고자 완성된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한 가지 더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 있다. 성경 저자들은 성경을 제작할 때 그가 몸담고 있던 공동체의 신학적 전망에 가치를 부여하고 도움을 주는 전승만 선별하여 내용을 구성하였다는 점이다. 결국 성경이 제시하는 여러 일화들은 그 사건에 대한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보도라기보다 그 문헌이 제작된 공동체의 신앙적 관점을 통과한 해석이라 할 수 있다.
3. 성경, 하느님의 말씀이 아니라는 말인가?
(1) 성경 영감설
지금까지의 설명에 따르면, 성경은 각 시대의 요청에 따라 그 시대의 뛰어난 지식인이 재구성한, 그것도 각 저자들이 속한 그룹의 신학적 전망에 맞추어 조정된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점을 수용한다면 우리는 도대체 그런 ‘제작된’ 책을 왜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믿어야 하는 것일까? 성경이 소개하는 하느님의 모습이 성경 저자들에 의해 해석된 하느님이라면 그러한 분을 어떻게 절대적 진리요, 오류가 없는 계시라고 단정할 수 있겠는가?
일반적으로 성경 저자들의 저작 활동을 언급할 때 교회가 사용하는 이론은 ‘성경 영감설’이다. 곧 성경의 본문들은 하늘에서 어느 날 갑자기 뚝 떨어지거나 신비적 시공간 속에서 물리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인간 저자들에 의해 기록되어 전해졌다는 것이다.
이때 저자들은 자신의 주관적 생각과 의지로 내용을 작성한 것이 아니라, 그의 머리에 떠오르는 ‘영감(inspiration)’에 따라 그 영감의 지시에 순명하여 내용을 기술하게 된다. 결국 하느님의 영이 그들 의식 안에 들어가 그들의 의식을 조종하시어 성경이 기록되었다는 것이고, 인간 저자들은 성령에 의해 지시받은 바를 기록하는 도구 역할을 했다는 이론이다.
inspiration이라는 말은 전치사 in과 명사 Spirit이 합성된 말로 영(Spirit)이 들어옴(in)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성경 저자들은 본문을 제작하는 과정에서 하느님의 영(Spirit)이 들어옴(in)을 체험하였고, 그 하느님의 영(Spirit)이 지시하는 대로 기록하여 현재와 같은 성경이 최종적으로 완성되었다는 것이 성경 영감설의 핵심 내용이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계시하시기 위해 인간 저자들을 도구로 사용하셨고 그들 각자의 의식 안에 당신의 지혜를 ‘주입’ 시키시어 당신을 더 잘 알 수 있도록, 다시 말해 당신에 대한 계시에 틀린 내용이 소개되지 않도록 섬세하게 인도해주셨다. 그리고 이러한 영감 속에 완성된 소중한 책이 성경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하느님의 지혜와 영감은 성경을 최종적으로 완성한 사람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니라 그 내용을 구전으로 발설하기 시작한 사람에게도, 그리고 그 구전을 전달할 때 각 공동체의 신학적 전망에 맞추어 재해석한 사람에게도, 또 해석된 구전과 이미 문서화된 문서 전승을 연합하면서 이를 재구성한 저자에게도 모두 효과적으로 적용되었다는 점이다.
곧 성령의 감도는 본문이 완성되는 순간까지 이 모든 과정에 참여한 익명의 저자들에게 똑같이 적용된 것이고, 결국 이러한 맥락에서 정리한다면 성경 본문의 재구성은 인간의 의식에 따른 작업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도하신 작업이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2) 「계시 헌장」이 언급하는 성경 영감설
특별히 이러한 내용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가운데 하나인 「계시 헌장」 제3장 ‘성경의 영감과 그 해석’에 매우 잘 표현되어 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특징은 ‘더욱 사목적이고 더욱 성경적인 시각’이 강조되었다는 점이다. 지금까지의 그 어떤 공의회보다 성경의 중요성을 부각시키고 성경을 상세하게 다룬다.
특별히 성경에 대한 공의회의 입장을 밝힌 「계시 헌장」은 비교적 짧은 문헌이지만 「교회 헌장」과 더불어 가장 중요한 문헌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이유로 「계시 헌장」은 단순히 교령이나 선언으로 규정되지 않고 ‘교의 헌장’으로 규정된다.
성경 영감설에 대한 교회의 입장을 밝히는 「계시 헌장」의 몇 문장을 인용하면,
성경을 저술하는 데에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선택하시고 자기의 능력과 역량을 이용하는 사람들을 활용하신다. 하느님께서 몸소 그들 안에 또 그들을 통하여 활동하시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모든 것을, 또 원하시는 것만을 그들이 참 저자로서 기록하여 전달하도록 하셨다. 그러므로 영감 받은 저자들, 또는 성경 저자들이 주장하는 모든 것은 성령께서 주장하신 것으로 여겨야 한다.(11항)
하느님께서는 성경에서 인간을 통하여 인간의 방식으로 말씀하셨기에 성경 해석자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전달하고자 하신 것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 성경 저자들이 정말로 뜻하고자 한 것이 무엇이며, 하느님께서 그들의 말을 통하여 나타내고자 하신 것이 무엇인지를 주의 깊게 연구해야 한다.
성경 저자들의 진술 의도를 알아내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것들 중에서 ‘문학 유형’들도 고려해야 한다.
왜냐하면 진리는 본문에서 역사적, 예언적, 시적 양식 또는 다른 화법 등 여러 양식으로 각각 다르게 제시되고 표현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경 해석자들은 성경 저자가 제한된 상황에서 그 시대와 문화의 여러 조건들에 따라 당시의 일반적인 문학 유형들을 이용하여 표현하려 하였고 또 표현한 그 뜻을 연구해야 한다. 성경 저자가 글로써 주장하고자 한 것을 옳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에 널리 쓰이던 그 지방의 고유의 사고방식, 언어방식, 설명방식 그리고 사람들이 상호 교류에서 관습적으로 사용하던 방식들을 면밀히 고려해야 한다.(12항)
(3) 「교회 안의 성경 해석」에서 언급된 근본주의에 대한 경고
가톨릭교회의 중심 노선은 근본주의자들의 완고한 시선을 과잉되고 위험한 경향으로 간주하고 경고한다. 성경 해석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은 50년을 주기로 선포되었다. 1893년 11월 18일 레오 13세가 「섭리의 하느님」을 발표하였고, 50년 뒤 1943년 9월 30일에는 비오 12세가 「성령의 영감」을 반포하였다. 그리고 50년이 지난 1993년에 새로운 회칙 하나가 선포되었는데 바로 「교회 안의 성경 해석」이다. 이 문헌은 현대의 성경 해석에 절대적 준거로 적용되고 있다.
특별히 이 문헌에서는 성경을 글자 그대로 해석하기를 주장하는 근본주의자들에 대하여 분명한 경고를 표하는데, 몇 문장을 발췌하여 인용하면,
“이(근본주의) 해석은 ‘자구적 해석’이라는 말을 고지식하게 축자적 해석으로 이해한다. 이를테면, 성경을 이해하기 위하여 그 역사적 기원과 발전을 고려하는 어떤 노력도 배제한다. 따라서 성경 해석을 위하여 사용하는 역사 비평 방법과 다른 모든 학문적 방법을 반대한다.”
“‘근본주의’라는 말은 1895년 뉴욕 주 나이아가라에서 열린 미국성서대회와 직결된다. 이 모임에서 보수적 프로테스탄트 주석가들은 ‘근본주의 5대 요점’을 이렇게 정의하였다. 곧 성경의 축어적 무류성, 그리스도의 신성, 그분의 동정 잉태, 대속 교리, 그리스도 재림 때의 육신 부활이다. … 이런 종류의 해석은 각종 종교 집단과 신흥종교들 안에서, 심지어는 가톨릭 신자들 사이에서도 갈수록 더 많은 추종자들을 확보해 가고 있다. …그러나 이 진리들을 제시하는 방식은 그 대표자들이 무엇이라고 말하든, 성경적이 아닌 이데올로기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근본주의는 완고한 교리적 입장의 철저한 고수를 요구하고, 그리스도인 생활과 구원에 대한 가르침의 유일한 원천으로서, 모든 질문과 비판적 탐구를 거부하는 성경 독서만을 강요한다.
이러한 근본주의 해석의 근본 문제는 성경 계시의 역사적 특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으며 강생의 진리 자체를 온전히 받아들일 능력이 없다는 것이다. 하느님과 맺는 관계에서도, 근본주의는 신적인 면과 인간적인 면의 긴밀한 관계를 다 회피하려고 한다. 근본주의는 하느님의 말씀이 영감을 받아 인간의 언어로 표현되었고 제한된 능력과 자료를 지닌 인간 저자들이 하느님의 영감 아래서 그 말씀을 기록하였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이러한 이유로 근본주의는 성경 본문을 성령께서 말씀 한마디 한마디를 불러주시는 대로 받아 적은 기록처럼 다루려고 하며, 하느님 말씀이 다양한 시대에 속한 언어와 표현으로 형성되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근본주의는 성경 본문에 나오는 세부 사항들의 무류성을 부당하게 주장하는데, 특히 역사 사건들이나 과학 진리와 관련된 사항에 대해서도 그러하다. 근본주의는 흔히 역사성을 내세울 수 없는 자료를 역사화시킨다. 근본주의는 과거시제의 동사로 보고되거나 기록된 모든 것을 역사적인 것으로 간주하며, 상징적 또는 표상적 의미의 가능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근본주의는 흔히 히브리 말, 아람 말, 그리스 말로 된 성경 본문에 제기된 문제들을 무시하거나 부정하려는 경향을 나타낸다. …근본주의는 성경 자체 안에 있는 일부 구절의 ‘재해석’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복음서들과 관련하여, 근본주의는 복음 전승의 발전을 고려하지 않고, 고지식하게도 (복음사가들이 기록한) 이 전승의 마지막 단계를 (역사의 예수님의 언행인) 첫 단계와 혼동한다. 동시에 근본주의는 최초의 그리스도교 공동체들이 나자렛 예수님과 그분의 메시지가 가져다준 충격을 자기네 방식대로 이해했다는 중요한 사실을 간과한다.”
“근본주의는 또한 매우 좁은 안목으로 사물을 보려 한다. 그래서 단순히 성경에 표현되어 있다는 사실만으로 낡은 옛 우주관을 실제로 받아들인다.”
(4) 절대 진리에 이르는 여정
아마도 성경의 복잡한 편집 과정은,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하느님께 다가가기 위한 필연적 과정이었을지도 모른다. 인간의 지혜가 단박에 하느님을 알아볼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면, 성경도 단 한 번의 제작 과정을 통해 완성되었겠지만, 보아야 믿고 들어야 이해하는 한계적 동물인 인간에게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하느님을 계시하기 위해서는 여러 방법, 여러 노력이 동원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사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다. 하느님에 대한 앎이 태어나자마자 단박에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삶의 우여곡절 속에서 조금씩 진행되며 완성된다. 철이 들면서 ‘아, 이제는 하느님을 좀 알 것 같다. 그분에 대한 믿음이 강해진 것 같다’라고 생각하지만, 그건 상대적이고 불완전한 착각일뿐, 또 한 차례의 고통과 슬픔을 통해 좀 더 깊은 하느님 체험을 하게 된 뒤에야 그분에 대한 앎이 더욱 성숙해지고 명료해짐을 느낀다.
결국 인간은 일생을 통해 하느님을 알아가면서 그분에 대한 자신의 이해가 조금씩 수정됨을 느끼게 되고 그러한 배움의 과정은 죽을 때까지 지속된다. 사실 그분을 완벽하게 파악하는 때는 죽어서 그분을 직접 뵙게 될 때만 가능하다.
내가 가지고 있던 신관(神觀, 하느님에 대한 이해)의 변화는 하느님이 바뀌셔서가 아니라 내가 불완전한 존재이기에 생겨난다. 따라서 하느님에 대한 이해의 변화는 ‘수정’이라는 말보다 ‘이해의 성숙’이라는 말로 표현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
그런데 이와 비슷한 변화가 성경 제작 과정에서도 발생하였다. 절대 진리이신 하느님을 알아가는 과정 속에서 인간 의식의 불완전한 한계는 성경 본문들을 조금씩 수정하고 재구성하는 직접적인 원인으로 작용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관점으로 성경을 이해할 때 우리는 성경 안에서 자주 마주하게 되는 사건의 실제 역사성과 신학적으로 해석된 사건 사이의 간극을 이해하게 되며, 그러한 차이점이 우리에게 그다지 큰 갈등의 원인이 되지 않음을 발견하게 된다.
이는 마치 단군왕검 신화에 등장하는 ‘곰과 호랑이 이야기’의 사실 여부가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흔들 만큼 커다란 의미를 지니지 않는 것과 유사하다. 그 신화에서 중요한 것은 인간에 대한 사랑을 드러낸 하늘의 뜻과 그렇게 소중한 사랑과 관심 속에 탄생하게 된 것이 우리 민족이라는 자부심이지, 곰과 호랑이가 핵심은 아니기 때문이다. 곰과 호랑이는 이야기의 내용을 좀 더 신비하고 초현실적인 것으로 재구성하게 하는 신화적 소재일 뿐이며, 현대인들보다 동물들과 친밀하게 지내던 당시 인간들의 삶의 배경을 반영한 것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