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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도와 청나라의 입장 간도는 우리꺼야 / ◐찾고 지킬 역사◑
2004. 06. 30. 22:57 | https://blog.naver.com/yhkimsir/100003691659
[배경]
청나라 태조는 장백산을 여진족의 발상지로 여겨 장백산 일대를 그들의 성역(聖域)으로 삼았다. 청나라 태종은 병자호란 뒤에 백두산과 북쪽 간도 일대를 봉금지역으로 선포하고, 장책(長柵)의 변장(邊墻)을 설치해 동북 지역으로의 입주를 엄금하였다.
그 뒤 청나라 성조는 봉금지역의 남방 한계를 명백히 하기 위해 조선과의 국경선 획정을 위한 교섭을 전개해 마침내 백두산정계비를 건립하게 되었다.
즉, 1712년(숙종 38)에 청나라의 요청에 의해 그들의 대표인 오랄총관(烏喇摠官) 목극등(穆克登)과 우리측 대표 접반사(接伴使) 박권(朴權)과 이선부(李善溥)가 양국 경계의 공동 조사를 위해 혜산진에서 회동하였다.
목극등의 제안으로 백두산 일대를 실지 답사해 국경을 작정하기로 하고, 목극등 일행과 조선측 군관(軍官) 이의복(李義復)·조태상(趙台相) 일행이 백두산에 올라 현지 조사 끝에 이른바 백두산정계비(중국측 지도에는 穆碑로 표시)를 건립하였다.
비문에는 동으로는 압록강, 서로는 토문강(土門江)의 분수령에 세운 것으로 명기되어 있다. 그러나 여기에 뒷날 간도 귀속 문제가 발생할 소지가 있었다. 목극등이 합의한 토문강이 실상 두만강의 상류가 아니라 만주 내륙의 송화강 상류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계비는 두만강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으며, 간도 지방은 곧 토문강과 송화강의 동쪽 지역으로, 이미 우리 영토로 확정해 놓았던 것이다.
목극등의 주장에 의해 비석을 세우게 되었을 때 우리 역관(譯官)이 백두산 도면 한장을 요청하자, 그는 서슴없이 “대국산천(大國山川)은 다 줄 수 없지만, 백두산은 너희 나라이니 어찌 주기가 어렵겠느냐” 하고 건네주었으니, 백두산이 조선의 것임을 인정한 언동이 아닐 수 없다.
정계비가 건립된 뒤 160여 년간은 간도 귀속 문제가 논의된 바 없이 지내 왔으나, 19세기 중엽에 들어 청나라의 봉금과 조선의 월경 금지가 소홀해지고 함경도민들의 두만강 월경 농사가 시작되면서 문제가 야기되었다.
월경 농경을 하는 조선 농민은 주거를 두만강 이남 함경도에 두고 두만강을 넘어 내왕하면서 농사를 지었다. 그러나, 농촌 경제의 악화와 지방관의 탐학이 날로 심해지면서 아예 두만강 너머로 주거를 옮기게 되었고, 조선 관료의 권한이 미치지 않는 간도 깊숙이 들어가서 생활 터전을 마련한 것이다.
특히, 1869년과 1870년 함경도에 큰 흉년이 들면서 많은 사람들이 간도로 옮겨갔다. 조선 조정에서는 이들의 쇄환(刷還)을 위해 노력하였으나, 생활 근거를 잡은 주민들이 이에 응하지 않았고, 오히려 간도 이주민은 날로 늘어갔다.
1881년부터 청나라가 봉금을 해제하고 청국인의 간도 이주와 개간·농경을 장려하는 정책을 취하게 되자, 먼저 이주한 우리 농민과 새로 입주하게 되는 청나라 사람들의 문제로 간도의 정치적 영유권의 문제가 발생되었다.
[발단]
1881년 10월 청나라 길림장군(吉林將軍) 명안(銘安)은 간도 지방을 개간하고자 이 지방을 답사하였다. 그는 이미 우리 동포들이 많은 농토를 개간하고 있음을 보고 본국 정부에 이 사실을 보고하는 한편, 각 현에 개황서(開荒署)를 설치하게 하였다.
이러한 보고를 받은 청나라 정부는 1882년 초에 우리 정부에 대해 월경사간(越境私墾)을 엄금하도록 요구해 왔다. 그러나 길림장군 명안과 독판영고탑등처사(督辦寧古塔等處事) 오대징(吳大徵) 등 만주 지역의 청나라 관리들은 기왕 이주한 조선인들의 입주를 기정 사실화 하되, 조세의 징수, 호적의 정리, 그리고 범죄자를 청나라가 직접 다스릴 것임을 통보해 왔다.
그런데 1883년 4월 길림혼춘초간국사무(吉林琿春招墾國事務) 진영(秦瑛)은 9월 수확 후, 태도를 급히 바꿔 간도의 우리 농민을 모두 쇄환하도록 요구해 왔다. 이유는 1882년 임오군란에 개입해 군대를 서울에 주둔시키고 조선 정부에 대한 정치적 압력을 강화하게 된 데 따른 것이었다.
청나라의 현지 관료들의 태도가 이처럼 경화되자 당황함을 금할 수 없었던 간도의 우리 나라 사람들은 토문강과 두만강이 다름을 그들에게 해명하는 한편, 백두산에 가서 정계비 부근과 토문강 원류 일대를 실지 답사하고, 그 자료를 가지고 종성 부사(鐘城府使) 이정래(李正來)에게 백두산 정계의 사실을 밝히며 대책을 호소해 왔다.
이러한 소식이 때마침 경원부(慶源府)를 순시 중이던 서북경략사 어윤중(魚允中)에게 알려졌다. 어윤중은 보다 신중을 기하고자 종성 사람 김우식(金禹軾)을 두 차례나 백두산에 파견해 현지를 재 답사시키고 정계비의 탁본을 떠오도록 조처하였다.
어윤중은 이보다 앞서 1882년 10월 청나라와 통상 장정(通商章程)의 타결과 서북 각읍의 암행 및 서북 국경의 답사, 감계(勘界)의 사명을 받고 서북경략사로 두만강 유역 열읍(列邑)을 순시 중에 있었다.
어윤중은 김우식의 답사 결과를 토대로 하여 여러 가지 자료를 제시하면서 토문강은 송화강상류로 간도 지방은 우리 영토임을 주장했고, 백두산정계비와 토문강 발원지에 대한 공동 조사에 의해 국경을 획정할 것을 청나라의 현지 관료에게 제기하였다.
한편, 어윤중의 보고와 건의에 따라 우리 정부도 청나라 정부에 같은 일을 자문하였으나 청나라 측의 무성의한 태도로 시일만 지연되었다. 1885년 4월에 청나라의 혼춘 당국이 함경도안무사 조병직(趙秉稷)에게 월경 조선 경작자들을 무력으로 축출할 것임을 통고하고 일부 지방에서 주민을 강제로 추방하였다.
이에 우리 정부는 청나라에 대해 토문감계(土門勘界)를 다시금 요청했다. 이 요청에 청나라가 응하게 되니, 이제 간도 문제는 현지 관료들의 행정적 문제에서 정치적 문제로 발전되어 간도 귀속 문제는 양국간의 새로운 외교 문제로 등장하게 되었다.
[을유·정해감계회담]
간도 문제 해결을 위한 조선과 청나라 사이의 회담인 제1차 을유감계회담은 우리 정부의 제안에 청나라가 응해 온 것으로, 1885년 11월 함경도 회령에서 회동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이보다 앞서 7월 우리 정부는 안변부사(安邊府使) 이중하(李重夏)를 토문감계사(土門勘界使)로 임명하였고, 1월에 청나라 측 대표인 변무교섭승판처사무(邊務交涉承辦處事務) 덕옥(德玉), 호리초간변황사무(護理招墾邊荒事務) 가원계(賈元桂), 독리상무위(督理商務委) 진영과 회동하게 하였다.
이때 이중하는 정계비를 먼저 사감(査勘)하고 강의 발원을 조사하자고 주장했다. 하지만 청나라는 강원(江源)을 먼저 조사해야 하며 정계비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 주장하였다.
그것은 청나라가 두만강 상류를 도문강(圖們江)으로 보고 정계비의 토문강이 곧 도문강을 가리키는 것이라는 전제하에서 자기들 주장대로 우리측을 승복시키기 위한 강변이었다.
회령 제2차 회합에서는 강원을 조사하기로 합의하고 백두산으로 현지 답사를 실시, 강원 지역과 정계비를 답사하고 무산에 내려와 의견 조정을 꾀하였다.
그러나 정계비의 표지가 송화강 상류인 토문강임을 확인하고서도 양국의 경계가 원래 도문강이고, 또한 본국 정부로부터 도문강의 사감만을 지시 받았다는 청나라 측의 강변과 비문의 토문은 문자대로 토문강이니 간도는 우리의 것일 수밖에 없다는 우리측 주장이 맞서 끝내 타결되지 못하고 해산할 수밖에 없었다.
그 뒤 청나라는 서울 주재의 위안스카이(袁世凱)를 앞세워 토문감계문제에 정치적 압력을 가해 왔다. 조선이 토문강과 두만강을 별개의 강이라고 내세워 영토 확장의 야심을 드러냈다고 강변하며 다시금 감계할 것을 요구해 왔다. 이에 우리 정부에서는 이중하를 다시금 토문감계사로 기용해 현지로 출발하게 하였다.
토문감계의 제2차 토문현지회담인 정해감계회담은 1887년 4월에 회령에서 시작되었다. 청나라측 대표인 독리길림조선회 판변방영무처(督理吉林朝鮮會辦邊防營務處) 진영, 혼춘승판처 덕옥, 총리혼춘흑정자등처둔간변방영무처(總理琿春黑頂子等處屯墾邊防營務處) 방랑(方郎) 등과 회담한 이중하는 도문과 두만이 같은 강임에는 동의하였으나, 토문과 두만은 별개의 것임을 내세워 한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현지 답사에 나선 청나라는 홍단수(紅丹水)를 가지고 국경으로 할 것을 강요하며 군대로 위협을 가하였으나, 이중하는 “내 머리는 잘라 갈 수 있을 것이나 우리 국토를 잘라갈 수는 없을 것”이라고 단호히 그 요구를 거부하였다. 쌍방간의 대립은 매우 심각해 국경선 전체를 획정 지을 수가 없었다.
홍토수(紅土水)와 석을수(石乙水)가 합류하는 지점 이하로 경계를 가결정하려는 노력을 폈으나, 결국 회담은 아무런 합의를 보지 못한 채 결렬되고 말았다. 1888년 정초에 청나라 측이 다시금 감계 재개를 제의해 오자 조선 정부는 이중하를 제3차 감계사로 임명하였다.
이중하는 현지답사 때의 청나라측 협박에 의한 협상의 전례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양국 정부의 사전 조정이 필요하다고 믿고 본국 정부로 하여금 홍단수를 경계로 하자는 제의를 공사 위안스카이에게 타진하게 하였다.
이에 청나라 측이 현지 회담보다도 앞으로는 양국 정부의 직접 교섭에 의한 문제 해결을 바라게 되어 토문감계의 교섭은 자연 중단되었다.
[대한제국의 적극 대책]
청일전쟁 후 독립협회의 자주적 근대국가 건설 운동이 활발해지고, 1897년에는 대한제국의 발족을 보았다. 이러한 일련의 자주 국가에로의 움직임에 따라 청나라와의 새로운 관계를 모색하게 되었고, 간도 문제에 있어서도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게 되었다.
1897년 간도 문제 해결을 위한 보다 구체적인 현황 파악을 위해 함경북도 관찰사 조존우(趙存禹)에게 백두산정계비와 그 일대의 분수령의 강수(江水)에 관해 조사, 보고하도록 지시하였다. 이에 조존우는 현지 지세를 답사해 도본(圖本)과 대요 설명서인 담판오조(談判五條)를 제출하였다.
이듬해 1898년에도 함경북도 관찰사 이종관(李鍾觀)에게 재차 현지 조사를 시달하였다. 이종관은 경원 군수 박일헌(朴逸憲)과 관찰 부사 김응룡(金應龍)을 파견해 철저하게 현지를 답사, 보고하게 하였다.
두 차례의 상세한 현지답사를 통해 우리 정부는 토문강 상류로부터 하류를 거쳐 바다에 들어가는 강줄기의 동쪽에 위치한 땅인 간도와 더 나아가 청나라가 1860년 러시아 제국에 할양한 연해주(沿海州) 땅까지 우리의 국토임을 확신하였다.
이런 확신을 토대로 1901년 회령에 변계경무서(邊界警務署)를 설치해 간도에 대한 행정권을 펴기 위한 태세를 갖추었고, 1902년에 이범윤(李範允)을 간도시찰원에 임명해 간도의 실태를 조사하게 하였다.
이범윤의 적극 대책의 건의를 받아 의정부 참정 김규홍(金奎弘)의 “간도주민보호관의 파견이 필요하다.”라는 건의가 있자, 정부는 이범윤을 북변간도관리사(北邊間島管理使)로 임명해 간도 주민에 대한 직접적인 관할권을 행사하도록 조처하였다.
이범윤은 간도 주민을 보호함에는 무력으로 할 수밖에 없다고 판단하고, 본국의 군대가 출동하면 국제분쟁이 야기될 염려가 있다고 보고, 사병(私兵)을 모아 병영(兵營)을 이루어 실력으로 간도의 우리 주민들을 보호하기에 힘썼다.
이로 말미암아 청나라 측과 자주 충돌 사건이 일어났다. 이에 청나라가 우리 정부에 대해 이범윤을 소환할 것을 거듭 요구해 오므로, 조선 정부는 분쟁의 확대를 꺼려 1904년에 이범윤을 소환하였다.
그러면서 양국 관계 관들이 국경 문제의 정식 해결에 앞서 잠정적인 선을 정하기로 하여, 선후장정(善後章程)이라는 잠정적 문서로 합의하였다.
내용은 두 나라의 경계는 백두산정계비에 증빙될 만한 것이 있다 하더라도 양국 대표의 감계를 기다려야 하고, 그 이전에는 예대로 도문강을 격해 각자의 영지로 삼고 불법 월경해 경작하지 않는다는 약정이었다.
이는 어디까지나 분쟁 야기를 피하기 위한 임시 조처요, 양국 감계에 의한 국경 획정까지의 잠정 협정이었다. 이해에 러일전쟁이 일어나 한반도와 만주가 전쟁에 휩싸이게 되자 주청일본공사(駐淸日本公使)가 청나라에 대해 전쟁 기간에 감계문제를 들고 나와 조선과 분쟁을 야기함이 좋지 않으니, 감계교섭의 재개 중지를 종용하였으므로, 양국이 이 종용에 따름으로써 감계 문제는 중단되었다.
[통감부 간도 출장소와 간도협약의 모순]
러일전쟁에 승리한 일본은 조선 문제로부터 러시아를 밀어내는 데 성공하였다. 제국주의 국가의 세계 분할 정책을 이용해 영국과 미국에게 일본의 한반도에서의 정치적 우월권을 인정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무력을 배경으로 을사조약을 강요하고, 대한제국에 통감부를 설치해 이른바 보호 정치를 실시하게 되었다.
대한제국으로부터 외교권을 박탈한 일본은 청나라와의 간도 문제 처리를 위해 그들의 무력을 배경으로 간도의 실질적 확보를 위해 노력하게 되었다. 1906년에 참정 대신 박제순(朴齊純)이 통감부에 간도 거주 우리 나라 사람을 보호해 주도록 요청하자, 통감부는 1907년 간도에 조선 통감부 간도 파출소를 설치하였다.
간도 출장소의 설치는 일본 정부가 간도 문제에 있어 종래 조선 정부가 취해 온 입장을 시인한 뒤의 조처였다. 물론, 그것은 일본 나름대로 대륙 침략의 세밀한 계산에서 나온 조처였으나, 어쨌든 간도가 한국의 영토임을 승인하고 난 뒤의 행정 조처였다.
간도 파출소가 편찬한 〈한청국경문제의 연혁〉이라는 문서를 통해 일본은 토문강은 송화강상류로서 두만강과 관계가 없으며, 두만강이 결코 천연의 국경선일 수 없다고 여러 조항에 걸쳐 논증하고 있다.
또한, 간도 출장소에 소장으로 취임한 일본 육군 중좌 사이토(齋藤季次郎)는 “간도는 한국 영토라 간주하고 행동할 것임”을 성명했다. 조선 통감부는 1909년에 청나라의 변무독판(邊務督辦) 오녹정(吳綠貞)에게 간도는 한국 영토의 일부임을 통첩하고, 간도 거주 한국인은 청나라 정부에 대한 납세의 의무가 없음을 성명하였다.
비록, 일본이 간도의 우리 나라 영유를 인정하였다 하더라도 목적은 서로 달랐다. 즉, 그들은 그들의 지배권이 미치는 땅을 보다 넓게 확보하려는 데 목적이 있었고, 한반도를 거점으로 만주에 세력을 침투시키는 첫 단계로 대륙 침략의 일환으로 추진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간도가 분명히 우리의 영토라고 조선 통감부가 성명하였고, 청나라에 통첩한 일제가 1909년 9월 7일 돌연 청나라와 간도 협약을 체결하였다. 이 협약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두만강을 양국의 국경으로 하고, 상류는 정계비를 지점으로 하여 석을수로 국경을 삼는다. 둘째, 용정촌·국자가(局子街)·두도구(頭道溝)·면초구(面草溝) 등 네 곳에 영사관이나 영사관 분관을 설치한다. 셋째, 청나라는 간도 지방에 한민족의 거주를 승준(承准)한다. 넷째, 간도 지방에 거주하는 한민족은 청나라의 법권(法權) 관할 하에 두며, 납세와 행정상 처분도 청국인과 같이 취급한다.
다섯째, 간도 거주 한국인의 재산은 청국인과 같이 보호되며, 선정된 장소를 통해 두만강을 출입할 수 있다. 여섯째, 일본은 길회선(吉會線 : 延吉에서 會寧間 철도)의 부설권을 가진다. 일곱째, 가급적 속히 통감부 간도 파출소와 관계 관원을 철수하고 영사관을 설치한다.
간도 협약에 의해 일제는 안봉철도(安奉鐵道)의 개설 문제, 무순(撫順)·연대(煙臺)의 탄광 문제, 영구지선(營口支線)의 철수 문제, 관외철도(關外鐵道)의 법고문(法庫門) 연장 문제 등 만주에서의 몇 가지를 교환하는 조건으로 중국에 간도를 할양하였던 것이다.
그것은 일제의 침략 야심에서 본다면 만주 지배를 위해 군사력을 만주 깊숙이 진주시켜, 마침내 만주를 무력 점령하였을 때, 간도 지방도 다시 지배하에 넣을 수 있다는 계산 아래 취해진 예정된 조처였다.
그러므로 간도 협약은 우리 정부가 간여하지 않은 가운데 취해진 불법적인 우리 영토의 할양이었고, 이 협약은 일본 제국주의의 불법행위를 입증하는 국제 문서인 것이다. 협약에 의해 1881년부터 야기되었던 간도 문제는 28년만에 일제에 의한 불법적 할양으로 중국의 영토로 편입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절차를 가지고 간도 귀속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었다고 볼 수 없을 것이다.
<이원순>
출전 : [디지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방미디어, 2001
[출처] 간도와 청나라의 입장|작성자 yhkimsir
러시아 역사 이야기-네르친스크 조약 | 엽기사진실
메르스 | 2017.11.23. 23:03 | http://cafe.daum.net/ssaumjil/LnOm/1880688
이 글의 출처는 로자노프 공작의 대궁정 로자노프 님의 글입니다.
<폭풍전야>
1660년 청나라는 러시아 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둔다. 하지만 1661년 순치제의 죽음, 오배의 집권, 삼번의 존재 등으로 청나라 내부가 어수선했던 까닭에 러시아는 이 패배에 아랑곳하지 않고 세력을 키울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결과 1667년 다우르족 족장 간티무르가 300명의 부족원들 및 가족들과 함께 청나라를 버리고 러시아에 투항하고, 정교회로 개종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러시아가 아무르강 일대에서 우위를 점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같은 해 오배를 제압하고 친정을 하게 된 17세의 소년 황제 아이신기오로 히오완예이 즉 강희제는 결코 만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 "짐과 짐의 나라를 우습게 보는 자들은 모두 각오해야 할 것이니라!" -
강희제는 당연히 이 일을 가지고 러시아에 항의했다. 계속 사절단을 보내 간티무르의 송환을 요구했던 것이다. 하지만 러시아는 이를 거부하다가 1670년 밀라바노프를 단장으로 한 사절단을 보냈다. 청나라는 이들이 간티무르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온 줄 알았다. 하지만 이들이 가지고 온 국서는 기절초풍할만한 것이었다.
"너희들은 중국의 칸에게 이렇게 설명하라. 여러 국가의 군주와 국왕은 이미 그 신민을 이끌고 우리 대군주에 귀순했다. 러시아 황제 폐하 최고 통치 아래 너 중국의 칸 역시 우리 대군주에게 도움을 구하라! 러시아 황제 폐하의 은혜는 우리 러시아 황제 폐하 최고 통치 아래에 귀의하여 영원히 변치 않고, 우리 대군주에게 공납을 바치고, 우리 대군주가 윤허하여 러시아 황제 폐하의 신민은 너희 나라 신민과 쌍방 국경 안에서 자유롭게 통상하라."
- "어이. 중국. 좋은 말 할 때 나보고 주인님이라고 해봐! ㅋㅋㅋ" -
청나라 입장으로서는 어처구니 없는 국서였다. 이게 제대로 번역됐다면 밀라바노프 등의 사절단은 베이징 한복판에서 능지처참된 후 효수당하고, 자금성에서는 방자한 러시아를 어떻게 정복할 것인가를 논의했을 것이었다. 번역. 그렇다. 제대로 번역이 된다면 말이다.
- "저것들이 뭐라고 하는 건지 아는 사람 있냐? 뭐라고 나불나불대는 거냐?" -
사신단 입장에서는 다행스럽게도 당시 자금성에는 러시아어를 만주어로 제대로 번역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따라서 강희제와 청의 신료들은 국서가 얼마나 오만방자한지 알지 못했다. 강희제는 이들을 융숭히 대접하고는 간티무르를 송환해야 한다고 말했을 뿐이었다. 이는 만주어에서 몽고어로 통역된 후 다시 러시아어로 전달되었다.
사신단은 그렇게 돌아갔다가 6년 후에 다시 돌아와서는 청나라 황제의 친서를 제대로 통역할 사람이 없다고 했다. 여전히 이들은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이 때 당시 베이징에 와 있던 예수회 선교사 페르비스트가 이들을 만나서는 간티무르를 송환하지 않으면 청과 러시아가 곧 충돌할 거라고 이야기해주었다. 그러나 러시아는 이를 무시했다. 오히려 알바진 반군을 사면하고 정식으로 편입시키는 등 아무르강 일대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려고만 했다.
- "이제 오랜 골칫거리인 남방은 정리됐다! 이제 저 북방의 허연 놈들에게 본때를 보여주자!"
그러나 당장 전쟁이 터질 일은 없었다. 당시 청나라는 오삼계가 일으킨 삼번의 난을 진압하느라 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1681년 청나라 군대는 마지막까지 저항하던 윈난성까지 평정하고, 모든 번국들을 철폐시켰다. 삼번의 난이 진압된 것이다. 이제 청나라는 그 동안 간지러웠던 북방 문제를 확실하게 매듭짓기로 결정했다.
<알바진 전투>
1681년 강희제는 명애와 액이세란 관리를 알바진으로 보냈다. 이들은 알바진 사령관에게 알바진을 철거하고 철수하라는 강희제의 명을 전달하는 한편 알바진을 정탐했다.
그리고 이듬해에 강희제는 사냥 명목으로 길림 일대까지 가서는 상황을 직접 확인했다. 그는 보급기지가 영고탑에 있는 현 상황에서 자체 농경지가 근처에 있는 알바진을 치는 것은 보급이 어렵고, 향후 유지도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아예 흑룡강 일대에 병사들을 영구 주둔시킬 방안을 마련할 것을 지시했다.
1683년 대만의 정씨 일가마저 제압되면서 이 작업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헤이룽장성이 창설되고, 3천명에 가까운 현지 다우르족 병력이 배치되어 둔전을 일구고, 수심 조사 후에 군함을 건조하고, 대포를 현지에서 주조하고, 베이징까지 역참을 설치했다.
- 1685년경의 알바진 포위전을 묘사한 그림 -
이런 작업이 완료되자 1685년 3천 명의 병력이 알바진으로 진격했다. 6월에 이들 군대는 알바진을 포위했다. 알바진을 구원하기 위한 병력이 배를 타고 왔지만, 구원군은 청군 등패수들이 등나무 방패를 머리 위에 올리고 수중전을 벌이며 공격해오자 격퇴되었다. 결국 알바진을 지키던 톨부진은 청나라에 항복했다. 이들은 가족들을 데리고 약간의 물품만을 가진 채 철수했다.
그러나 알바진을 버리고 철수하던 그들은 뒤늦게 출발했던 바이든의 지원병력을 만나게 되었다. 더군다나 네르친스크의 관리인 블라소프는 청군이 알바진 요새를 불태웠지만 농작물은 건드리지도 않고, 척후도 설치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톨부진에게 다시 알바진을 재건하라고 명령했다. 강희제는 이 지역에 척후를 두어야 한다고 지시했지만, 어찌 됐는지 청나라 장수들이 따르지 않아서 생긴 일이었다.
이듬해 그 사실을 안 강희제는 다시 2천명의 병력을 보내 알바진을 공격했다. 이번에 청군은 함부로 공격하지 않고 포위망을 굳히는 작업에만 골몰했다. 러시아 측은 포위망을 돌파하려고 했지만 매번 실패했고, 그 과정에서 톨부진이 전사하기도 했다. 알바진은 굶주렸고, 질병이 돌았고, 수비 병력도 팍 줄어 겨우 100여명 만이 남아있었다. 모스크바는 이 사실을 알고 알바진 포위를 풀어줄 것을 청나라에 요청했다. 하지만 그 편지가 도착하기 전에 알바진은 끝장날 것 같았다. 하지만 몽골 초원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그들을 구해주었다.
- "나는 준가르의 대칸 가르단이다! 날 무시하지 말거라!" -
이 무렵 몽골초원에서는 준가르 부의 수장 가르단의 세력이 강성했다. 강희제는 이 가르단을 오래 전부터 신경쓰고 있어왔다. 그러는 와중에 할하 몽골의 분쟁이 커지자 강희제는 1686년 10월 몽골의 칸들을 어르고 위협하여 평화조약을 맺게 했다. 문제는 이때 몽골 불교 내에서 지위가 꽤 높은 젭종단바 쿠툭투가 참석했는데, 그가 달라이 라마의 사절단과 동급의 위치에 있었다는 것이었다. 달라이 라마의 신봉자인 가르단은 이게 마음에 들지 않았었다. 그는 이 조약에 불만을 품고 있던 자신과 친한 자삭투 칸의 추종자들을 소환했다.
더군다나 이 평화조약도 금방 깨지고 말았다. 자삭투 칸의 행보를 불안하게 여기던 투시예투 칸이란 자가 자삭투 칸을 공격한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가르단의 동생이 살해되었다. 당연히 가르단은 분노했고, 대규모 병력을 할하 몽골로 보내 몽골 초원을 휩쓸기 시작했다. 1688년 투시예투 칸은 가르단에게 대패해버렸고, 엄청난 수의 난민들이 발생했으며, 그 과정에서 할하 몽골의 정세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이제 강희제는 러시아와 준가르가 동맹을 맺어버리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러시아와 준가르의 사이는 충돌이 가끔 있기는 했지만, 금광 탐사 등을 이유로 상당히 좋았던 편이었기 때문에 더더욱 우려스러운 상황이었다.
- "지금은 러시아가 문제가 아니다. 준가르와 러시아의 연합은 반드시 저지해야 한다!" -
그래서 강희제는 알바진 포위를 풀어달라는 친서가 도착하자 포위를 풀어주고, 1687년에는 병력을 후퇴시켜주기까지 했다. 러시아를 달래기 시작한 것이다. 이 무렵 러시아도 골로빈을 단장으로 한 사절단을 보내놓은 상태였다. 1687년 9월에 셀렌긴스크에 도착한 골로빈은 1688년 청나라와 셀렌긴스크에서 회담하기로 했지만 회담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가르단의 위협도 강한 편이었던데다가 가르단을 피해 도주한 몽골인들이 셀렌긴스크를 공격한 것이었다. 골로빈은 이들을 격퇴한 후 일부는 귀순시켰다. 나머지는 다시 사방으로 흩어졌다.
이 와중에 마침 하미 지역에서 가르단의 부하 체왕 랍탄이 반란을 일으켰다. 가르단은 몽골을 공격하다 말고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후퇴해야 했다. 이 틈에 러시아와 청나라는 가르단의 영향권에서 먼 네르친스크에서 회담하기로 했다. 청나라 대표는 색니의 아들 색액도였고 러시아측 대표는 골로빈이었다.
<네르친스크 조약>
- "반갑습니다. 자 이야기를 나눠보죠. 평등하게 말입니다." "좋습니다. 아주~ 평등하게 말이죠." -
회담에 앞서 이들은 제반 조건들에 대한 협의를 시작했다. 러시아와 청은 서로 평등하게 하기 위해 서로의 언어를 쓰지 않기로 했다. 그럼 회담장에 어떤 언어를 쓰는가가 문제가 됐는데, 양쪽 모두 잘 알고 있던 몽골어가 유력해보였지만, 몽골어 통역관들의 수준이 의심스럽다는 주장에 따라 청나라쪽 사신단을 따라온 예수회 선교사들이 알고 있는 라틴어를 쓰기로 합의했다. 그 외에도 회담장 안에는 각자 칼과 도끼만을 든 300명의 호위대를 배치하고, 회담장 밖에는 500명의 병력을 두기로 합의했다.
- "최대한 우리가 가진 것을 모두 지켜야 한다. 하지만... 그게 가능할 것 같지는 않다..." -
당시 양쪽 모두 상황이 급박했다. 청나라는 가르단의 준동을 제어하는 게 급선무가 돼버렸고, 러시아는 크림 칸국 공격이 실패로 끝나버린 상태였다. 다만 러시아 쪽 상황이 더 좋지 못했다. 안 그래도 불안정했던 러시아의 내부 정치 상황이 크림 칸국 원정 실패로 더 심해졌던데다가 아무르강 일대 정세도 청나라가 유리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골로빈은 당시 모스크바에서 되도록 아무르강을 유지하되 별 수 없으면 알바진은 포기하고, 최악의 경우 네르친스크까지 청나라에 넘겨줘도 된다는 훈령을 받은 상태였다.
하지만 골로빈은 일단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청나라가 자신들의 영역을 침범했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색액도는 바로 러시아가 원주민들에게 행한 악행들을 열거하면서 그 쪽이 먼저 침략했다고 맞받아쳤다. 시작부터 만만치가 않았다.
- 아무르강과 만주, 시베리아 일대의 지도. 이 일대의 영유권을 두고 청과 러시아는 네르친스크에서 협상을 하며 치열하게 대립했다. -
이후 회담은 더 치열했다. 러시아는 아무르강 일대가 자신들이 개척한 영토라고 주장하자, 색액도는 원나라 시절부터 이 지역은 중국에 조공을 바쳤다며 바이칼호까지 전부 원나라의 후신인 청나라의 영토라고 주장했다. 이 와중에 통역을 맡은 예수회 선교사들은 청나라 편을 서면서 중간에서 말장난까지 치기 시작했다. 첫 날 회담은 아무 성과 없이 끝났다.
- "말장난을 치면 우리에게 이득이거든. 청나라 입장에서도 나쁘지 않고. 러시아 놈들 엿이나 먹으라고! ㅋㅋㅋ" -
이튿날 러시아 쪽은 예수회 쪽에서 말장난을 친다며 몽골어로 대화하자고 제안했지만 거부되었다. 색액도는 이제 실카강에서 아무르강을 잇는 선을 국경으로 하자고까지 주장했다. 이 선에는 러시아의 요새인 아르군스크와 그들이 확보한 염호, 광산이 들어가 있었다. 골로빈은 당연히 반발했다. 그러자 협상은 일시적으로 결렬되었고, 색액도는 네르친스크를 1만 2천명의 병력에 부리야트족, 다우르족까지 추가로 포함시킨 후에 그 병력으로 네르친스크를 포위했다. 골로빈도 병력을 증강시켰지만 겨우 1500명 정도였다. 청나라가 대놓고 군사적으로 위협을 가하고 있는데 이에 맞서면 사실상 질 수 밖에 없는 싸움이었다.
- 네르친스크 조약으로 확정된 청,러시아 간 국경선. 아이훈 조약 때까지 이 국경선은 계속 유지되었다. -
결국 골로빈은 예수회 선교사들에게 시베리아 선교에 편의를 제공할테니 좀 도와달라고 사정하면서 알바진을 포기하겠다고 해야 했다.(5) 하지만 염호와 광산까지 포기할 수는 없었다. 청나라도 그 부분은 인정했다. 결국 스타노보이 산맥을 따라 국경선이 획정되었다. 아르군스크 요새는 국경 북쪽으로 옮겨졌고, 염호와 광산들의 소유권은 그대로 인정됬다. 그리고 국경지대에서 러시아와 청은 상호간에 자유롭게 통상을 할 수 있기로 하였다. 조약문은 중국어, 만주어, 러시아어, 몽골어, 라틴어로 작성되었고 한자, 만주 문자, 라틴 문자, 키릴 문자로 된 비석이 국경지역에 세워졌다.
청나라는 이 조약을 통해 가르단과 러시아의 동맹을 방지하고 만주 지역 국경을 확정지었다. 또한 러시아의 확장도 막았으니 청나라는 이득을 본 셈이었다. 러시아는 시베리아로의 세력 확장에 타격을 받았고, 시베리아로의 영토 확장이 상당 부분 정체되었다. 그러나 그 대신 중국과 국경 지대에서 자유롭게 교역할 수 있는 권리를 얻었다. 몇 번의 교역에서 러시아는 가죽을 중국에 팔면 큰 이득이 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이것만으로도 러시아 입장에서는 나름 이득이라면 이득이었다.
- "으아아아아아! 청과 러시아가 조약을 맺다니! 이건 안 될 일이야! 저 청나라 놈들을 나 혼자서는 이길 수 없다고!" -
그러나 이 조약으로 인한 가장 큰 피해자는 가르단이었다. 러시아는 이전까지 준가르 영토에 금광이 있다는 소문만을 듣고, 금광을 확보할 목적으로 준가르와 친하게 지내고 있었다. 하지만 금광은 불확실한 소문의 영역이었고, 중국과의 교역은 확실한 노다지였다. 따라서 러시아는 네르친스크 조약을 맺은 후 준가르에 냉담하게 나왔고 가르단의 지원 요청을 외면했다. 결국 가르단은 강희제의 군사에 쫓겨 도주하다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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