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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촌수필 _ 이문구
일락서산(日落西山)
시골을 다녀오되 성묘가 목적이기는 근년으로 드문 일이었다. 더욱이 양력 정초에 몸소 그런 예모를 찾고 스스로 치름은 낳고 첫 겪음이기도 했다. 물론 귀성 열차를 끊어 앉고부터 “숭헌…… 뉘라 양력슬두 슬이라 이른다더냐, 상것들이나 왜놈 세력(歲曆)을 아는 벱여…….” 세모가 되면 한두 군데서 들어오던 세찬을 놓고 으레껀 꾸중이시던 할아버지 말씀이 자주 되살아나 마음 한켠이 결리지 않은 바도 아니었지만, 시절이 이러매 신정 연휴를 빌미할 수밖에 없음을 달리 어쩌랴 하며 견딘 거였다. 그러나 할아버지한테 결례(불효)를 저지르고 있다는 느낌을 나 자신에게까지 속일 수는 없었다. 아주 어려서부터 이렇게 되기까지, 우리 가문을 지킨 모든 선인 조상들의 심상은 오로지 단 한 분, 할아버지 그분의 인상밖에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내가 그리워해 온 선대인은 어머니나 아버지, 그리고 동기간들이 아니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고색창연한 이조인(李朝人)이었던 할아버지, 오직 그분 한 분만이 진실로 육친이요 조상의 얼이란 느낌을 지워 버릴 수 없은 거였고, 또 앞으로도 길래 그럴 것같이 여겨진다는 것이다. 받은 사랑이며 가는 정으로야 어찌 어머니 위에 다시 있다 감히 장담할 수 있을까마는, 그럼에도 삼가 할아버지 한 분만으로 조상의 넋을 가늠하되, 당신 생전에 받은 가르침이야말로 진실로 받들고 싶도록 값지게 여겨지는 터임에, 거듭 할아버지의 존재와 추억의 조각들을 모든 것의 으뜸으로 믿을 수밖에 없던 것이다.
초사흗날, 기중 붐비지 않을 듯싶던 열차로 가려 탄 것이 불찰이라 하게 피곤하고도 고달픈 고향길이었다. 한내읍에 닿았을 때는 이미 3시도 겨워 머잖아 해거름을 만나게 될 그런 어름이었다. 열차가 한내읍 머리맡이기도 한 갈머리[冠村部落] 모퉁이를 돌아설 즈음엔 차창에 빗방울까지 그어지고 있었다. 예년에 없던 푹한 날씨기에 눈을 비로 뿌리던 모양이었다. 겨울비를 맞으며 고향을 찾아보기도 난생 처음인데다 정 두고 떠났던 옛 산천들이 돌아보이자, 나는 설레이기 시작한 가슴을 부접할 길이 없었다.
나는 한동안 두 눈을 지릅뜨고 빗발무늬가 잦아 가던 창가에 서서, 뒷동산 부엉재를 감싸며 돌아가는 갈머리 부락을 지켜 보고 있었다. 마음이 들뜬 것과는 별도로 정말 썰렁하고 울적한 기분이었다. 내 살과 뼈가 여문 마을이었건만, 옛모습을 제대로 지키고 있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던 것이다. 옛 모습으로 남아난 것이 저토록 귀할 수 있을까.
그 중에서도 맨 먼저 가슴을 후려친 것은 왕소나무가 사라져 버린 사실이었다. 분명 왕소나무가 서 있던 자리엔 외양간만한 슬레이트 지붕의 구멍가게 굴뚝만이 꼴불견으로 뻗질러 서 있던 것이다.
|생략 부분 줄거리| 고향을 뜨고 13년 만이니 그럴 만도 하겠다 싶었으나 참을 수 없이 화가 솟아올랐다. 할아버지는 왕소나무가 토정 할아버지[李之菡]가 꽂아 놓은 지팡이가 자란 것이라고 하셨다. 군내에서는 겨룰 데 없던 백수(百樹)의 우두머리였던 그 나무는 이제 자취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이젠 완전히 타락한 동네구나──나는 은연중 그렇게 중얼거리고 있음을 스스로 깨달았다. 마을의 주인(왕소나무)이 세상을 뜬 지 오래라니 오죽해졌으랴 싶기도 했다. 하루에도 몇 차례씩, 더욱이 피서지로 한몫해 온 탓에, 해수욕장이 개장된 여름이면 밤낮 기적 소리가 잘 틈 없던 철로가에 서서, 그 숱한 소음과 매연을 마시다 지쳐, 영물(靈物)의 예우도 내던지고 고사(枯死)해 버린 왕소나무의 운명은, 되새기면 되새길수록 가슴이 쓰리고 아파 견딜 수가 없었다. 물론 왕소나무의 비운에 대한 조상(吊喪)만으로 비감에 젖어 있었다고는 말할 수 없겠지만──
사실이 그랬다. 내가 살았던 옛집의 추레한 주제꼴에 한결 더 가슴이 미어지는 비감으로 뼈저려하고 있었으니까. 비록 얼핏 지나치는 차창 너머로 눈결에 온 것이긴 했지만, 간살이 넉넉한 열다섯 칸짜리 꽂패집의 풍채는커녕, 읍내 어디서라도 갈머리 쪽을 바라볼 적마다 온 마을의 종가(宗家)나 되는 양 한눈에 알겠던 집이 그렇게 변모할 수 있을까 싶던 것이다.
그것은 왕소나무의 비운 버금으로 가슴을 저미는 아픔이었다. 이젠 가로세로 들쑹날쑹, 꼴값하러 난봉난 집들이 들어서며 마을을 어질러 놓아, 겨우 초가 안채 용마루만이 그럴듯할 뿐이었으며, 좌우에서 하늘자락을 치켜들며 함석지붕 날개와 담장을 뒤덮었던 담쟁이덩굴, 사철 푸르게 밭마당의 방풍림으로 늘어섰던 들충나무의 가지런한 맵시 따위는 찾아볼 염두도 못 내게 구차스런 동네로 변해 버렸던 것이다.
실향민. 나는 어느덧 실향민이 돼 버리고 말았다는 느낌을 덜어 버릴 수가 없었다. 고향이랬자 무덤[墓]들밖에 남겨둔 게 없던 터라 무심하게 여겨온 셈이긴 했지만, 막상 퇴락해 버린 고향 풍경을 대하니, 나 자신이 그토록 처연하고 헙헙하며 외로울 수가 없던 것이다.
|생략 부분 줄거리| 마을 동구에 있던 초가 세 채는 사라지거나 모습이 변해 있고, 추억이 묻어 있는 옛길은 서울 교외의 외진 동네와 다르지 않은 느낌이었다. 할아버지의 헛묘가 있던 칠성바위만이 예전 모습 그대로 있다. 나는 칠성바위 근처에서 들나물을 뜯곤 하던 옹점이를 떠올렸다. 옹점이는 마음씨가 너그럽고 착한 아이였는데, 맨처음 그녀에게 안팎 범절과 행실을 가르친 이도 할아버지였다.
본디 사람 보는 눈이 달랐던 할아버지는 그녀를 보자 대뜸 싹이 있겠다고 판단하여 나이부터 물었었다.
“그래 너는 몇 살이나 되었다더냐?”
그러자 그녀는 아무 어렴성 없이 아는 대로 대꾸했다.
“지 에미가 그러는디 제년이 작년까장은 제우 여섯 살이었대유. 그런디 시방은 잘 몰르겄슈.”
“늬가 늬 나이를 모른다 허느냐?”
“예. 위떤 이는 하나 늘어서 일곱 살이라구 허던디 또 누구는 하나 먹었응께 다섯 살이라구 허거던유.”
“페엥―그래 늬 에민가 작것인가는 요새두 더러 보이더냐?”
“접때 달밭 대감댁(외가)에 왔는디 봉께, 유똥치마를 입구, 머리는 힛사시까미를 허구, 근사헌 우데마끼두 차구…… 여간 하이카라가 아니던디유.”
“그래 그것은 시방두 장(늘) 술고래라더냐?”
“그리기 접때두 취해서 즤 애비허구 다투다가 고쟁이 바람으루 쬧겨났었슈.”
“페엥―숭헌…….”
할아버지는 그 이상 묻지 않았다고 한다. 그것은 철부지하고 이러니저러니 하기 싱거워서가 아니었다. 굴지의 지주였던 탓에 온갖 잡기와 유흥에만 몰두했던 나의 외숙한테 ‘대감’이라는 칭호를 썼기 때문이었다. 그녀로서는 어쩔 수 없을 말버릇이었지만 할아버지 앞에서는 무엄한 말이었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잘 참았다.
“그래 늬 이릠은 무엇이라 부르더냐?”
“먼젓것인디유.”
“먼젓것이라…… 아직 이릠이 웂더란 말이렷다.”
“…….”
“늬 에미가 너를 즘촌(店村:질그릇 굽는 마을) 옹기 틈목에서 풀었다더구나…… 오날버텀 이릠을 옹젬(甕點)이라 허거라. 옹젬이가 무던허겄구나.”
할아버지는 그렇게 즉흥적인 작명을 했는데, 호적부에도 그대로 올라갔음은 두말할 나위 없는 일이었다.
|생략 부분 줄거리| 동산 등성이로 오르자 내가 십팔 년 동안을 살았던 옛집의 전모가 조금씩 드러나 보인다. 나는 어머니가 돌아간 직후 갑자기 죽어 버린 감나무를 떠올렸다. 그 나무를 그저 두고 떠날 수 없어 나무를 베던 날 솟아나는 눈물을 걷잡지 못해 했었던 일이 있었다.
마을에는 아직 오랫동안 이웃해 살았던 낯익은 사람들도 여럿 남아 있을 터였다. 하지만 그네들을 방문하기는 그리 간단하지 않았다. 그전에도 장정이 되어 장가들을 들고 일가를 이뤘던, 맏형 또래나 그 위아래한테도 으레껀 옛 버릇을 못 버려 ‘허우’ ‘허소’ 또는 시종 반말로만 대한 터라, 그네들과 자리를 같이하게 되면 그네들을 지칭할 명칭의 마땅찮음 때문이었다. 갑자기 무슨 명칭으로 바꿔 부르며 대꾸해야 십상일 것인가. 결국 나는 마을을 돌지 않기로 작정했다. 아니 되도록이면 알 만한 사람과 마주쳐도 얼굴을 돌리고 싶었다. 그리고 그렇게 하리라 작정하고 발걸음을 놓기 시작했던 것이다.
마을을 아주 떠나던 날까지도 일가 손윗사람이 아닌 이에게는 무슨 경어나 존칭을 써 본 적이 없었다. 할아버지의 지시였고 곁에서 배운 버릇이었다. 나이가 직수굿한 어른들한테는 으레껀, 김 서방, 최 서방 하며 성 밑에 서방이란 명칭을 붙여 불렀고, 어지간한 청년들한테는 덮어놓고 아무개아무개 하며 이름을 부르곤 했었다. 그것은 동네 아낙네들한테도 마찬가지였었다. 아무개 어머니 아무개 아줌마니 하고, 그 집 아이의 이름을 빌려 썼던 것이다. 요즘 같으면 그처럼 되지 못한 수작이 어디 있을까. 그러나 그 때는 그것이 제격인 듯했고, 하는 편이나 듣는 쪽에서나 예사로이 여겼던 줄로 안다. 안팎 동네 사람의 거지반이 행랑이나 아전붙이였으므로 하대(下待)해야 마땅하다는 것이 할아버지의 지론이요 고집이었던 것이다. 그 결과는 안팎 삼동네를 다 뒤져도 친구랄 만한 친구가 있을 수 없었던 고적한 소년 시절이 비롯된 씁쓸한 것이었지만. 정말 친구가 생기지 않았다. 친구삼아 놀려고 애써도 아이들이 어울려 주지 않았던 것이다. 갈머리만 해도 한두 살 아래위나 동갑내기가 여남은이 넘었지만, 아이들은 또 저희들 부모가 어려워하던 것에 못잖게 할아버지를 두려워했던 것이다. 할아버지의 걱정을 무릅쓰고 몰래 숨어 다니며 썰매타기와 자치기를 하고, 가오리연도 만들며 팽이를 깎아 쥐고 아이들 뒤를 열심히 뒤쫓아다녔지만, 마을의 아이들은 여간해서 속을 터놓으려고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도 그런 기미를 할아버지에게 들킨 날은 밥맛을 잃고 밤잠마저 설치게 마련이었다. 할아버지가 손수 회초리를 든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페엥―못된 것. 내 애비한테 일러 매를 들게 하고 말리라…….”
이 말이 그토록 두려울 수 없는 공갈이었던 것이다. 매우 꾸짖도록 아버지한테 지시한 적이 없으면서도 그랬다. 외려 그런 것을 곧잘 고자질하던 것은 나와 다시없이 잘 지내 온 옹점이였다.
내가 할아버지 앞으로 불려가 꿇어앉아 안절부절못하며 학질 떼는 구경을 그녀는 무엇보다도 재미있어 했으니까.
“숭헌, 그런 상것 아이들허구 븟해 놀었더란 말이냐? 그리 그짓말을 허려면 글은 뭣허러 배웠더란 말이냐?”
“…….”
“그저 틈만 있으먼 밖으루 내달으니 한심한 일이로고. 색거한처(索居閒處)요, 산려소요(散慮逍遙)라고 배웠으면 배운 만침 알 만두 허련마는…….”
“애덜이 대이구 놀자구 오넌디 워칙 헌대유.”
“그런 잡인 애덜허구 동무해 놀먼 사람 베리는 벱이여. 다 저더러 사람 되라고 이른 소리거늘, 페에엥―.”
나는 부러 둘러댄 거짓말에 가책을 받았고, 그것은 또한 나를 무척 우울하고 소심하게 만드는 괴로운 일이었지만, 거짓말을 하지 않고는 못 배길 착잡한 형편이었다.
나하고 놀고자 한 아이는 내가 중학을 졸업하고, 아니 그 이듬해 서울로 이사해 오기까지도 단 한 사람이 없었다. 피차가 어렸을 때는 아이들 부모가 할아버지 성미를 훤히 알고 있어 애써 함께 어울리지 않도록 자기네 아이들을 타일러 단속한 탓이었는데, 그것은 국민 학교에 들어간 뒤로도 이어져, 아이들은 학교 운동장에서나 다른 애들과 함께 어울려 주든가, 상하학길에 우연히 만나 마지못해 동행을 허락했을 따름이었다. 우리 집안의 엄한 어른들이 세상을 떠난 이후로는 줄곧 피차 그럴 까닭이 없었음에도 그런 어색스럽고 부드럽지 못한 관계는 풀리지 않았다. 언제나 아래윗물 돌 듯하니 답답하고도 쑥스러운 일이었다. 피차 굳어져 버린 습관을 스스로 깨어 버리지 못한 탓이었다.
|생략 부분 줄거리| 6·25가 난 해에 우리 집은 망했다. 그러나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어도 동네 아이들은 나와 접촉하기를 꺼렸었다. 등성이를 내려오면서 나는 집을 짓던 모양새며, 이 집을 잘 가꾸라던 할아버지의 이야기, 그리고 할아버지가 사랑 벽장에서 먹을 것들을 꺼내 주시곤 하던 일을 떠올렸다. 할아버지는 임종하시면서도 족보를 잘 간수하라는 단 한마디만을 남기셨다.
할아버지의 자(字)는 긍우(肯宇), 호를 능하(陵河)라 했으며, 병오(丙午)생으로 상주 목사(尙州牧使)의 아들이요, 강릉 부사[江陵大都護府使]의 손자로 태어났다. 그러나 과거(科擧)는 스스로 포기했다고 했다. 그 즈음엔 이미 선조들이 모두 벼슬살이를 반납하고 낙향해 버린 뒤였고, 공부를 중단해야 할 만큼 의기(意氣)와 가산이 침체돼 그럭저럭 실기(失期)해 버리고 만 것이라 했다. 애초에 벼슬자리에 못 오른 건 시국 탓으로 돌렸고, 자신의 불운(不運)함을 한탄했으며, 그러한 한(恨)이랄까 전조(前朝)에의 향수랄까, 하여간 그런 감상이 지나쳐, 종중에서 한창 명성을 떨쳤던 두 항렬 손위인 월남[李商在]의 개명(開明)마저 늘 못마땅하게 여길 지경이었던 것이다. 그러고 보면 할아버지의 처신은 월남(月南)의 처세와 정반대였던 것으로 볼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할아버지의 직함은 사액 서원인 화암 서원(花巖書院)의 도유사이며 보령 향교(保寧鄕校)의 직원(直員)이었다.
내가 태어났을 때만 해도 할아버지는 이미 팔순에 이르러 있었으므로 옛일은 자세히 알 수 없지만, 춘추시향 때면 교군꾼들이 가마를 메고 와서 서원으로 모셔 가던 것은 몇 차례나 본 기억을 가지고 있다.
|생략 부분 줄거리| 아버지는 사대부가의 후예임을 조금도 대견해하지 않는 것 같았다. 해방을 전후해서 아버지는 사회주의 사상에 경도되었고, 이 때문에 할아버지와의 사이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벌어졌다. 아버지는 예비 검속으로 감옥 생활을 하는 날이 잦았고, 이따금 순사나 형사들이 불시에 가택 수색을 하기도 했다. 그런 가운데서 할아버지는 나와 동갑내기 둘에게 글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며칠 후, 셋은 나란히『동몽선습』으로 교재를 바꿨고 눈감고 읊는 할아버지의 구술에 따라 그 억양과 율조를 흉내내어 제법 의젓하고 청승맞은 목소리로 수월하게 읽어 내기 시작했다.
“天地之間 萬物之中에 唯人이 最貴하니…….” 할아버지는 우리 수준에 알맞도록 문구를 풀어, 비근한 사례를 들어 가며 구수한 강의를 해 주었고, 우리는 우리들대로 무작정 암송만으로 끝내 버렸던 천자문 시절보다 한결 흥미를 갖고 배우게 되었다. 그러던 중 나는 차츰 어서 바삐 어른이 되고 싶은 성년기에 대한 막연스런 동경과 충동을 받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지금 생각해 봐도 나이 탓이 아니었던가 한다. 원인은 할아버지가 언행 일체(言行一體)를 주장하며 실천에 옮기지 않을 수 없도록 강요했기 까닭이다. 배운 것은 실행해야 한다는 게 할아버지의 절대적인 교육 방침이었던 것이다. 천자를 떼자마자 할아버지는 내 하루의 일과를 짜 놓았던 건데 그 일과표에서 도저히 헤어날 수 없는 자신임을 잘 알고 있는 게 불행한 일이었던 것이다. 나의 일과는 일 년이 하루같이, 마치 절대 불변을 원칙으로 하여 짜여진 것 같았다. 춘하추동의 절후를 물을 것 없이 나는 새벽 네 시에 잠에서 깨어야 하고, 짜여진 일과에 따라 언행을 구속받기 시작한 거였다.
새벽 네 시, 눈곱을 비벼 가며 냉수에(어려서부터 더운물을 사용하면 기개가 준다 하여 반드시 냉수를 사용토록 했다.) 세수하고 사랑에 나간다. 할아버지께 문안을 드리고자 함이다. 나는 큰절을 하고 무릎 꿇고 앉아 밤사이 무고하신가를 여쭙는다.
“오냐, 탈 없이 잘 잤더냐.”
이것은 할아버지의 한결같은 첫마디였다. 이윽고 해야 할 일은 놋요강과 놋타구를 가시는 일이었다. 내가 그것을 시작하고부터 옹점이는 내게 더욱 친절히 굴었고 어려워했는데, 그것은 그녀가 가장 귀찮아하고 꺼리던 일에 내가 대신 들어섰기 까닭이었다. 요강을 부시는 일은 그리 어려울 것이 없었다. 그러나 가래가 가득 담겨져 있는 타구를 쏟고 수세미질하여 닦는 일은, 조금만 비위가 약했더라도 해내지 못했으리만큼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사랑방을 말끔히 걸레질하고 나면 먼동이 갠다. 이젠 해가 솟아오를 때까지, 무릎을 꿇고 앉아 전날 배운 것을 외워 내야 했다. 그 시간은 사랑 아래윗방에서 묵은 손님이 몇이었든 나는 그네들 좌중 한가운데에 꿇어앉아 막히지 않게 외워 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좌중은 숨소리뿐이었고 나는 흉을 잡히지 않도록 기껏 조심하고 또한 곧잘 치러 내곤 하였다.
“어떤가?” 할아버지는 일쑤 손님들한테 물어 손님들의 “싹이 있네유.” 하는 칭찬을 기다렸다. 이제 생각해 봐도 우스운 일은 음식에 대하는 자세를 훈계받고 실행했던 일이다. 그것은 천자를 배울 때부터 이미 실천했던 일이기도 했다. 할아버지는 채중개강(菜重芥薑)을 설명하면서,
“흔히들 소채 반찬일수록 생각 웂이 만들고 맛 모른 채 먹느니라. 그러허나 긤생려수허고 옥출곤강인 법, 이전버텀 군자는 푸성귀일수록이 가려먹으랬어. 부디 채즁개강이란 말을 닞지 말 것이니, 푸성귀 속에 게자와 새양이 안 들어가면 상것들 음석으루 예겨라.”
“예.”
나는 덮어놓고 대답부터 하도록 배웠으매 저절로 나온 응답이었다.
“이후 워디를 가 혹 음석을 먹는 일이 있더래두 게자 새양이 안 든 음식일랑은 절대 입에 대지두 말으야 쓰느니라.”
그로부터 나는 사오 년 동안이나 남의 집 김치며 나물 따위를 먹지 않으려고 무척이나 애썼던 것이다. 요즘도 이따금 채중개강이 문득문득 생각킬 정도로 애써 실행했던 것이다. 음식에 대한 할아버지의 자세는 그만큼 철저한 것이었다. 그 무렵만해도 관촌 부락에서는 대사가 자주 있었다. 어느 해 늦가을엔 처녀총각 해서 무려 다섯이나 혼인한 적도 있었다. 잔칫집에서는 으레 큰상을 차려오게 마련이었다. 마을의 어른에 대한 인사치레로서 그네들 스스로가 그렇게 해야 되는 것으로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음식상은 물론 맨 먼저 사랑마루에 놓여졌다.
“뉘 집서 가져 온 게라느냐?”
할아버지는 우선 상을 들고 온 사람더러 그렇게 물었는데, 대답은 언제나 그 곁에 서서 군침을 삼키고 있던 옹점이의 일이었다.
“저 근너 짐 약국 망내딸이 시집 간대유.”
“이렇게 갖춰 보내느라고 애썼다 이르거라.”
“예.”
하고 대답하며 물러가던 것은 상을 들고 온 사람이었다. 옹점이가 상보를 걷으면 할아버지는 무엇무엇이 올랐는가를 옹점이한테 물었고,
옹점이는
“두텁떡, 수정과, 송화다식…….”
하며 남김없이 주워섬겼다.
“오죽허겠느냐…….”
그러면서 할아버지는 대개 수정과나 식헤 그릇을 들어 한 모금 입가심해 보았고, 언제나 예외 없이,
“폐에엥─이것도 음석이라 가져왔다더냐. 네나 먹고 그릇 내어 주거라.”
하며 매번 외면하기를 주저않는 거였다. 언제나 입이 함지박만해지던 것은 옹점이와 우리들이었다. 할아버지는 본래부터 일가집에서 온 음식이 아니면 일체 맛보기조차 꺼려했던 것이다.
|생략 부분 줄거리| 아버지는 할아버지처럼 가리고 찾는 게 없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자식들을 훈육하는 데는 언제나 준엄하고도 분명했고, 나는 그런 아버지를 늘 어려워하고 있었다. 언젠가 아버지는 내가 붓글씨 쓰는 것을 보고 생일(막일)이나 할 손이라고 타박하였고, 그 때문에 나는 수치와 모멸을 만회하기 위해 몇날 며칠을 거듭거듭 연습했다.
나는 읍내로 나가는 과수원 탱자나무 울타리 곱은탱이를 돌 어름, 잠시 발걸음을 멈춰 다시 한 번 옛집을 돌아다보았다. 어느덧 하루의 피곤이 짙게 물든 해는 용마루 위 서산마루로 드러눕는 중이었고, 굴뚝마다 쏟아져 나와 황혼을 드리웠던 저녁 연기들은, 젖어드는 땅거미와 어울려 처마끝으로만 맴돌고 있었다. 나는 이어 칠성바위 앞으로 눈을 보냈는데 정작 기대했던 그 할아버지의 환상은 얼핏하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할아버지의 넋만은 벌써 남의 땅이 되어 버린 칠성바위 언저리에 아직도 묵고 있을 것만 같았음은 웬 까닭이었는지 몰랐다. 잘 있어라 옛집, 마지막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며 다시 한 번 옛집을 되돌아보았을 때, 그 너머 서산마루에는 해가 지고 있었다. 지는 해가 있었다.
이문구(李文求, 1941~2003)
충남 보령 출생. 1966년 <현대문학>에 「백결」이 추천되어 문단에 등단하였다.
농촌과 어촌, 소외 지대인 도시 변두리 사람들의 삶을 통해 산업화·도시화로 인한 삶의 변화와 농촌의 해체 등을 사실적으로 그려 내었다.
주요 작품으로『관촌수필』 연작과『우리 동네』 연작, 「매월당 김시습」 등이 있다.
작품 투시도
포인트 1 옛 마을의 고풍과 근대화로 인한 마을의 대조
포인트 2 산업화가 진행되던 당대에 대한 비판적 시각
작품 해설
8편의 단편이 이어진 연작 소설
『관촌수필』은, 작가의 전기적 체험을 바탕으로 씌어진 연작 소설로 총 8편의 단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일락서산(日落西山)」은 그 중 첫 번째 작품에 해당한다. 제목에 ‘수필’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데서 짐작할 수 있듯이, 회고적인 어조로 고향 ‘관촌’과 관련해 떠오르는 인물과 사건들에 대해 그리고 있다.
고풍스럽고 향토적인 문체
작가는 충청도의 방언과 지방 고유의 일상적 소재를 통해 향토적 정서가 잘 드러나는 문체를 구사하고 있다. 또한, 제목 등에서 보이는 한문투의 어투는 이 작품의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잘 드러낸다. 관촌수필』이 일인칭 독백체로 서술함으로써 서술자가 자신의 체험을 직접 이야기하는 형태를 취하여, 마치 수필과 같은 느낌을 준다.
변해 가는 고향의 모습을 통한 당대 현실에 대한 비판
「일락서산」에서 주인공은 오랜 만에 고향에 돌아와서 어렸을 적의 모습을 추억하며 그리워한다. 과거의 마을 풍경과는 사뭇 달라져 버린 현재의 모습이 대조되면서, 사라져 버린 옛것에 대한 향수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이는 근대화의 과정에서 사라져 가는 농촌 공동체의 모습에 대한 안타까움을 표현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핵심 정리
갈래연작 소설
배경시간 - 1940~1970년대
공간 - 충청 남도 보령 관촌 마을
시점일인칭 주인공 시점
주제근대화 과정에서 사라진 전통적인 농촌 공동체에 대한 회고와 아쉬움
작품 내용
성묘를 위한 귀향 |
•‘나’는 양력 정월 초사흗날에 성묘를 위해 고향을 찾아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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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소나무와 옛집에 대한 회상 |
•사라진 왕소나무와 추레해진 옛집의 모습에서 어린 시절의 추억을 떠올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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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점이에 대한 회상 |
•‘나’는 옛 기억을 더듬으며 갈머리를 찾아보기로 함. •옹점이에 관한 기억을 떠올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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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와 아버지에 대한 회상 |
•등성이를 내려오며 할아버지에게 글을 배우던 것, 음식에 엄격하셨던 것을 회상함. •할아버지와 대립했으며 자식들에게 엄했던 아버지를 떠올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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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는 해를 바라봄 |
•읍내로 나오면서 ‘서산마루에 지고 있는 해’를 바라봄. | |
인물 소개
나
서술자. 도시에서 살고 있으나 근대화·산업화로 인해 사라져 가는 농촌의 옛 모습을 안타까운 시선으로 바라봄.
할아버지
‘나’의 할아버지. 사대부가의 후예임을 자랑스러워하며, 봉건적이고 완고한 태도로 가족들과 마을 사람들에게 일정한 거리를 두면서도 한편으로는 자상한 인물
아버지
봉건적인 할아버지와는 달리 근대적인 사상을 받아들이려 하는 인물. 사회주의 운동에 투신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