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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면에 3개의 싸리나무 두리기둥을 세운 안채. | 실용적이고 자연스러운 사랑채와는 달리 안채는 위엄을 갖추고 있다. 사랑채보다 한 단을 높여 배치 한 안채는 1고주 5량집으로 안방 4칸, 안대청 4칸으로 구성되었다. 안대청을 넓게 낸 것은 종가집이 라 제사를 많이 치르기 때문이다.
안대청은 연등천장으로 공들여 마름질한 들보와 대공이 시원스럽다. 안방 문창은 상인방을 낮게 걸 어 1m 남짓되게 낸 것이 특징이다. 안채 전면의 기둥 3개는 싸리나무 두리기둥으로 집의 품격을 높 여 주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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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다락으로 짓고 익공으로 포를 짠 별당 쌍수당. | 안방과 부엌 가운데에는 독립된 8모 기둥이 서 있고 그 기둥머리를 간단한 공포형태로 가공한 점이 볼만하다. ‘ㅁ’ 자의 왼쪽 채에는 공부방과 곳간, 문간, 부엌이 배치되고 오른쪽 채에는 문간, 곳 간, 다용도실, 방이 놓였다.
본채 옆에는 후대에 지은 별당 쌍수당이 있다. 누다락으로 지었고 정면 3칸×측면 2칸 규모다. 오른 쪽 두칸은 온돌방이고 나머지는 대청으로 이루어져 있다. 대청 사방은 판문을 달아 폐쇄했지만 여닫 이 문짝을 열면 사방을 개방할 수 있다. 쌍수당은 익공양식으로 포를 짠 건물로 사대부가의 건축양식 이 고스란히 살아있는 건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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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면에서 바라본 이남규 고택의 사랑채 모습. | 이 집이 이구 고택이 아닌 이남규 고택으로 불리는 것은 이남규 선생이 널리 알려졌기 때문이다. 이 남규 선생은 고종때 참판 벼슬을 지냈고 을사조약 후 청토적서(請討賊書)를 올리는 등 위정척사 운동 의 선봉에 섰던 분이다. 칠래봉을 안대(案臺)로 삼고 들어선 이남규 고택은 현재 30여 칸이 남아 있 는데 한창 번성했을 때는 90여 칸을 헤아렸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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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채 툇마루. 안채로 가는 샛문이 연결되어 있다. | 가까운 곳에 있는 추사고택과는 달리 호방한 공간 배치를 보여주고 있는 대저택이다.
‘ㅁ’자 형태의 영남지방의 가옥배치와는 달리 사랑채가 독립적으로 배치되어 있고 옆 에 안채와 문간채가 튼 ‘ㅁ’자 형태로 놓여 있다.
한창 때는 지금의 문간채 마당 앞으로 여러 칸의 행랑채가 들어가 있었고 안채 옆으로는 곳간과 잿간 등이 에워싸고 있었다고 한다.
사랑채는 전면 6칸에 측면 2칸의 12칸 집으 로 겹집형태를 보이고 있다. 기단은 자연석을 쌓아 다졌으나 주추는 다듬 어진 돌을 사용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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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ㄷ자형의 전형적인 사대부가 안채. 양 날개채에 부엌을 둔 6칸 대청의 몸채로 이루어져 있다. | 사랑채의 구성은 대청 4칸, 방 6칸, 부엌 2칸으로 되어 있다. 5량 가구로 지으면서 2칸의 겹집 평면 을 뽑아내기 위해 방을 최대한 바깥으로 밀어냈다. 사랑대청은 단차를 두어 2단으로 만들었는데 한 단 높은 대청은 샛문을 막아 방으로도 이용할 수 있게 했다. 부엌과 대청 사이에는 4칸 방을 두어 아버지와 아들이 같이 사용할 수 있다. 난방을 고려해 방 앞쪽으로 툇마루 바깥에 덧문을 달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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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판장문, 띠살문, 살창이 어울려 조화를 이룬다. | 사랑채와 안채가 별도의 건물로 되어 있지만 툇마 루에서 안채 쪽으로 곧장 나가면 내외담 사이의 샛 문을 통해 안채로 들어갈 수 있다.
안채는 우진각 지붕을 한 문간채 안쪽에 있다. 요즘은 문간채를 통해 드 나들지만 예전에는 오른 쪽으로 돌아 들어가게 되 어 있다.
문간채는 칸살이 좁은 7칸 으로 되어 있다. 문간 왼쪽에는 하인이 거 주하는 방을, 오른쪽에는 곡간 겸 창고를 두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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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치형으로 만들어진 문간채의 문얼굴은 대갓집의 위엄보다는 친근함을 전해 준다. | 이 집의 포인트는 문간채의 부드러운 아치형 문얼굴이다. 대저택의 위용을 자랑하면서도 친근감을 잃 지 않는 것은 모두 문간채의 아치형 대문 덕분이다. 문간채를 들어가면 ‘ㄷ’자 모양의 안채가 나온 다. 문간채가 ‘ㄷ’자의 터진 앞쪽을 막았기 때문에 전체적으로는 튼 ‘ㅁ’자 형태를 보이고 있다.
안채의 몸채는 5량 가구의 팔작지붕으로 지었고 양 날개채는 3량 가구로 되어 있는데 한쪽은 팔작지 붕으로, 다른 한쪽은 맞배 지붕으로 지었다. 몸채의 전면은 5칸으로 되어 있는데 가운데 3칸이 안대 청이다. 안대청은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6칸 대청이다. 안대청을 넓게 낸 것은 제례를 많이 치러 야 하는 실용적인 이유도 있지만 난방의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한 이유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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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등천장이 시원해 보이는 6칸 안대청. | 몸채의 오른쪽 칸은 2칸짜 리 안방이다. 왼쪽 칸은 조상의 신주를 모셔 놓은 방과 다용도로 쓸 수 있게 만들어 놓은 마루방으로 되어 있는데 이 마루방을 통해 사랑채 와 교통했다.
양쪽 날개채에는 모두 부 엌이 있는데 안방옆에 오 른쪽 부엌이 밥을 지어먹 는 곳이고 왼쪽이 허드렛 일을 하는 보조부엌이다. 양쪽 부엌에는 다락을 두 어 세간을 보관할 수 있게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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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거창군 위천면 정온 선생 종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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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온 선생 종택은 반듯하고 단정한 집이다. 사뭇 완고해 보이기까지 해 발걸음을 주저케 만든다. 그러나 마당 한켠의 화단과 장식미가 뛰어난 누마루를 대하고 나면 이런 긴장감은 한 순간 사라진다. 내륙 깊숙한 곳에 숨은 활달하고 강건한 집. |
‘꺾이지 않는 반듯함’ 올곧은 선비의 집 하루에는 밤낮이 있고 한해에는 춘하추동이 있듯이 인생에도 굴곡이 있고 가문에도 부침이 있기 마련 이다. 거창 초계(草溪) 정온(鄭蘊) 선생 때 명문가의 반열에 올랐지만 그의 현손(玄孫) 정희량(鄭希 亮)의 정변으로 말미암아 멸문 직전까지 가기도 했다.
정온(1569~1641)선생은 선조·광해군·인조 때 학자로 남명 조식의 학풍을 계승한 대표적인 인물이 다. 정온은 광해군의 인목대비 폐출에 맞섰다가 10여 년 동안 제주도에서 귀양을 살았고, 병자호란 때에는 오랑캐에게 무릎 꿇는 것을 끝까지 반대했다. 이런 기개로 말미암아 그는 조선조 유학자들의 사표가 되었으며 정조 임금은 그의 충정을 기리는 칠언절구(七言絶句) 한 수를 하사하고 영의정으로 추종했다.
동계의 현손인 정희량(~1728)도 주목할만한 인물. 그는 영조 4년 무신란(戊申亂, 1728)을 일으켜 정 씨 집안을 존폐의 위기로 몰아넣었다. 무신란은 이인좌(李麟佐)의 난이라고도 하는데 경종의 독살 설, 영조의 왕통문제, 남인들의 소외 등이 원인이 되어 일어났다.
이 사건으로 정씨 가문은 30여 명이 연루되어 죽는 등 멸문 직전까지 갔다. 불행 중 다행으로 멸문 의 화를 면한 것은 ‘동계와 같은 충신의 제사가 끊겨서는 안 된다’는 유림들의 구명 덕분이었다. 정씨 가문을 다시 일으킨 이는 영양현감을 지낸 양옹 정기필(1800~1860년)로 이 때에 이르러 종택이 중건(1820년)되고 흐트러졌던 문중이 제 모습을 찾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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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채는 궁궐에 버금갈 정도로 장대하다. 동쪽 끝의 칸 구성이 마치 사랑채의 누마루 같다. | 위엄과 격식 갖춘 호방한 집
초계 정씨가 거창 용산, 안음 서마리 등지에서 이 곳으로 들어온 것은 정온 선생의 조부인 승지공 때 부터이다. 금원산(金猿山)이 바라다 보이고 작은 동산을 배경으로 들어선 이 집은 솟을대문, 사랑 채, 안채, 사당이 남향으로 늘어서 있다.
솟을대문에는 선생의 충절을 기리는 붉은 글씨의 현판이 걸려 있고 사랑채에는 모와(某窩)라는 작은 편액이 걸려있다. 1909년 의친왕 이강 공이 사랑채에 머물다 가면서 쓴 글이라 한다. 이강 공은 이 집의 종손이었던 정태균(鄭泰均)과 친분이 두터웠다.
정온 종택의 집채들은 그 단정함과 엄격함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ㄱ’자형 사랑채와 ‘ㅡ’자 형 안채는 그 규모가 각각 정면 6칸, 정면 8칸으로 궁궐에 버금가는 크기이며 기단과 지붕 또한 웬 만한 건물의 1.5배 높이여서 웅장한 느낌마저 준다. 기둥의 굵기, 문창의 문양, 주춧돌의 생김새들 은 자로 잰 듯 정확하고 칸의 구성, 집채의 배치는 군더더기가 없어 옷매무새를 고쳐야 할 것 같은 느낌을 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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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문간 옆에 붙인 작은 사랑채. | 집 뒤편은 대나무와 소나 무로 울을 조성했는데, 이는 집안의 기운을 북돋 우고, 집으로 들어 온 기 운을 보듬는다는 이른바 장풍(藏風) 풍수의 모습 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이 집의 사랑채는 큰 사 랑채와 작은 사랑채로 이 루어져 있다.
큰 사랑채는 전면 6칸에 누마루를 달아낸 구조로 아궁이 칸을 들인 점이 독특하다.
누마루에 눈썹지붕을 달아낸 것도 특징 중의 하나. 부연(이중 처마) 대신 눈썹지붕을 덧달아낸 것은 장식적인 효과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4평 남짓한 누마루는 문창과 난간 디자인이 뛰어나 작은 조형 예술품을 연상케 한다. 안채는 남부지방의 일반적인 평면인 ‘ㅡ’자형이지만 규모(정면 8칸, 측면 3 칸 반으로 총 28칸 집이다)는 궁궐처럼 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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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위와 위엄이 살아있는 사랑채. | ‘ㅡ’자 형 평면이 가지는 활달하고 개방적인 면모는 안동지방 ‘ㅁ’자 집에서는 맛볼 수 없는 또 다른 멋이 아닐 수 없다.
안채의 구성은 서쪽에서부 터 각각 부엌, 방, 대청, 마루+방으로 되어 있다. 동쪽 끝은 방 하나와 대청 마루로 구성해 안채에서도 사랑채의 누마루와 같은 공간을 경험할 수 있다.
정온 선생 종택은 요즘 14 대 종부인 최희씨의 음식 솜씨로 다시 세인들의 관 심을 끌고 있다.
최희씨의 친정은 한국 최고의 부잣집이자 12대 만석꾼을 지낸 경주 최부잣집. 그는 한국 상류층의 전 통 요리법을 많이 알고 있으며 육포와 장맛을 전문가들도 혀를 내두를 정도라 한다. 정온 선생 종택 을 빼고 종택의 맛과 멋을 말하는 것은 ‘장님 코끼리 만지는 격’이 아닐까 생각된다 | | 그러나 이런 엄격함 속에 사랑마당의 석가산과 안마 당의 화단 등 풍류의 공간 이 있어 숨통을 틔운다.
사랑 마당 복판과 누마루 앞, 서쪽 담 쪽에는 이끼 낀 괴석으로 석가산을 만 들고 모란, 작약, 주목, 국화 등속을 심어 단장했 으며 담벼락 밑에는 매화, 꽃사과, 감나무를 심었다.
안마당에는 장독대 주위로 키 작은 화초류를 심었는 데 수국, 접시꽃, 작약 등 이 제철을 맞아 앞다퉈 꽃 을 피워내고 있다 | | | |
첫댓글 수고하셨습니다,,.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