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태 잡지 <작은 것이 아름답다> 2012년 6월호는 창간 16주년을 맞이하여 특별판으로 “녹색과 인문학 산책”을 담고 있습니다. 1강 녹색+세상편에서는 이현주 목사님이 ‘다른 생각, 다른 세상’이라는 제목으로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을 벗어나기 위한 다른 세상 꿈꾸기를 권유하고 있고, 2강 녹색+철학에서는 ‘온갖 하찮은 것들을 위하여’라는 제목으로 이진경 서울대교수님이 존재론을 일상적으로 부딪치는 문제를 통하여 비교적 쉽게 풀어나가고 있더군요.
오늘은 2강 녹색+철학에서는 ‘온갖 하찮은 것들을 위하여’에 대해서 같이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졌으면 합니다. 이진경 교수는 서울과학기술대학 기초교육학부 교수로 있으며 진보적인 실천과 사유를 고민하는 연구자들의 코뮌 ‘노마디스트 수유너머N'에서 활동하고 있답니다. 그는 철학은 “삶을 바꾸는 실천이자 그 실천의 방식을 사유하는 것, 삶에 의해 형성된 통념화된 사유를 깨는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주요 저서로는 《사회구성체론과 사회과학 방법론》,《철학과 굴뚝청소부》,《수학의 몽상》,《철학의 탈주》,《맑스주의와 근대성》,《근대적 시공간의 탄생》,《근대적 주거공간의 탄생》,《노마디즘》,《불온한 것들의 존재론》등 20여편이 있습니다. 최근에는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가는 ’코뮌주의‘를 화두로 작업을 하고 있답니다.
먼저 본문에 들어가기 전에 다음과 같은 말씀이 내 시선을 사로잡았습니다.
“평화와 평온은 반대 방향에서 온다. 낯설고 불편한 것들의 만남을 기꺼이 새로운 삶의 기회로 긍정하고, 그것들의 존재 자체를 나의 존재 조건으로, 나의 평온한 삶의 전제조건으로 긍정하는 곳에서, 낯설고 불편한 것들 바깥에 서서 세상을 볼 때, 그것들과 내가 다르지 않음을 느끼고 받아들일 때, 그리하여 그 모든 것 앞에서 편안해질 때 말이다.”
- 이진경, 《불온한 것들의 존재론》354쪽
새 학교로 옮기고 1학년 한국사 수업을 맡게 되었습니다. 여기서의 수업은 그야말로 낯설고 불편한 것입니다. 수업 중 돌아다니고 떠들고 장난치며 욕하고 말대꾸하며 온통 수업을 흔들어대는 학생들과의 만남으로 역사 수업의 의미를 찾을 수 없고 내 존재감마저 무화시켜 버립니다. 1주일에도 몇 번씩 명퇴를 고민하게 됩니다만, 그것도 혼자 결정할 수도 없거니와 그 동안 까먹은 4년 반의 세월 탓에 나갈 수도 없는 지경이지요. ^&^
이런 상황에서 이 교수의 글은 매우 흥미롭게 보였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들과 타협하고 평화로운 교육이 가능할 것인지가 저의 근본 생존 화두로 떠올랐습니다.
존재와 존재자
‘존재론’에서 중요한 철학자는 독일의 하이데거(Heidegger, 1889-1976)인데, 그는 ‘존재’와 ‘존재자’를 구분하였습니다. 존재와 존재자는 다르다고 합니다. 사람, 자연, 사물은 존재자이고, 존재는 ‘있음’에 관한 물음이라네요. 우리는 흔히 밤이 어둡다고 말하는데, 사실은 밤에 어둠이 ‘있다’라는 자각이 생기게 되면서 비로소 존재에 대해 눈을 뜨게 된답니다. ‘어둡다’ → ‘어둠이 있다’ 즉, ‘남궁효’는 존재자이고 ‘남궁효가 있다’는 존재에 관한 것입니다. 어렵나요? 좀 말 장난스럽기도 하죠?
내가 있다는 것에 눈을 돌릴 때
하이데거는 무엇보다 나의 있음에 대해서 주목했답니다. 내가 존재한다. 내가 있다는 것은 대체 무엇을 뜻하는가? 존재는 어디에나 있지만 우리는 존재자에만 눈을 계속 주고 있을뿐이지요. ‘어둡다’고 하는 것에 눈을 돌릴 때에는 ‘어둠이 있다’는 사태가 눈에 보이지 않듯이, 나 혹은 너, 그 사람에 눈을 돌렸을 때 그가 있다는 것에는 주목하지 않습니다. 내가 아니고 나의 있음에 눈을 돌리게 되는 때는 언제일까요?
이진경 교수는 1980년대 반복되는 5.18 기념시위라든가, 4대강 사업의 현장 앞에서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은 무언가’를 깨달으면서 이게 바로 존재에 던지는 질문이라고 합니다. 사실 우리 초록교육연대도 4대강 현장에 갔을 때 말도 안되는 작업에 돈을 퍼붓고 자연생태계를 망치는 모습을 보고 분노, 무력감, 황당함 등을 느꼈지요. 저자는 좀 더 깊이 들어가 ‘4대강 파괴 앞에 선 준재’를 발견했습니다. 즉, 사태라든가 나라든가 하는 주-객의 관점이 아니라 ‘내가 거기에 있다’는 존재론의 발견입니다.
하이데거는 이런 사태를 ‘고향상실’ 이란 말로 표현했답니다. 근대화로 인한 고향, 공동체 파괴를 지적하고, 거기 서있는 존재자(자신)를 그냥 인간이라 부르지 않고, 존재의 의미를 질문하는 유일한 존재인 인간을 ‘다자인(Dasein)=현존재, 거기 있음' 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는 인간을 존재론의 출발점으로 삼습니다. 다시 말하면 영주댐 앞에 섰을 때 ’내가 거기 있다는게 무엇인가‘ 하고 질문을 던지는 존재인 셈이지요.
탁월한 것의 존재론과 나치즘
그런데 하이데거의 철학은 ‘탁월한 것의 존재론’이랍니다. 그는 열등하거나 부족한 이들을 이해 못하였답니다. 탁월한 것은 열등한 것, 하찮은 것과 상대적인 것이므로 항상 탁월하지 않은 것을 만들어내면서 존재하게 됩니다. 따라서 미천한 것을 멸시하게 됩니다. 혼자 탁월한 존재는 오히려 왕자병, 공주병 같은 나르시스트가 되니, 누구도 혼자 탁월할 수는 없기 때문이지요.
하이데거는 나치당에 가입하고 그 혐의로 전후에 대학에서 쫓겨납니다만, 단순히 기회주의적 선택이라기보다 자신의 철학적 신념에 따른 것이라 해요. 같은 전체주의라고 해도 스탈린주의는 국가와 비밀경찰을 이용한 폭력과 공포의 통치였지만, 나치는 열광하는 사람들의 지지를 받고 있었답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무엇이 나치즘에 미쳐 이웃 유대인이나 집시들을 색출해 구금하고 학살하게 했는가 하는 점입니다.
그게 무엇이었을까요? 나치의 기본 태도는 강력한 생태주의였고, 기본 문제의식은 산업혁명 뒤 근대산업에 의해 박살난 고향, 공동체, 자연에 대한 분노가 바탕에 깔려 있답니다. 나치는 자연보호법, 동물보호법을 제정했고, 이는 현대의 어떤 보호법보다 강력했습니다. 동물까지 철저히 보호하자면서 나치는 왜 유대인을 학살했을까요?
하이데거의 문제의식은 고향상실의 극복이었고, 근대산업문명에 의해 깨져버린 고향과 공동체의 회복이 평생의 중심 주제였다고 하네요. 그는 베를린대학 초청도 거부하고 작은 도시 프라이부르크에 머물면서 ‘우리는 왜 시골에 거주해야 하는가’를 방송 연설하였습니다. 나치당과 하이데거는 비슷한 태도를 지니고 있었다고 할 수 있지요.
공동체라는 이름으로
생태학 ‘에콜로지’라는 말을 만들었던 사람은 보수 생물학자 헤켈(E. Haeckel)입니다. ‘개체발생은 계통발생을 반복한다’는 발생진화설을 주장하였지요. 보수의 의미는 기존의 것들을 지키자는 발상이기 때문이랍니다. 보수주의는 ‘공동체 파괴의 배경’을 외부로 돌리면서 외부에서 들어온 문화를 적대시하게 됩니다. 우리 공동체가 깨져 갈 때, 외지인들 유대인이나 집시인들에게 공동체 파괴의 원인을 돌리면서 그들에 대해 분노가 폭발하게 됩니다.
우리가 단일민족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는데, 민족이란 말 1902년 황성신문에 딱 한 번 나옵니다. ‘흑인민족’. ‘백인민족’으로.. ‘단군민족’이란 말은 1907년 대한매일신보에 처음 나옵니다. 식민지로의 전락을 눈앞에 둔 긴박한 상황에서 나온 것이지요. 민족의 순혈성을 강조하다보면 배타적 민족주의로 빠지게 됩니다.
오늘날 외국인노동자를 불법체류자로 몰아 쫓아내야 한다고 말하면, 조잡한 인종주의가 됩니다. 어떤 분노를 해결해줄 약자를 찾아 공격성을 발휘할 때 나치즘이 출현하는 것이지요. 나치즘은 공동체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그런 탓인지, 서양에서는 공동체 이야기를 하면 굉장히 위험하게 생각한다네요. [하지만 우리 사회는 일제 식민지를 당했기에 방어적 민족주의가 강합니다. 나치즘의 폐해로 2차 세계대전을 겪은 유럽과 달리.. 어쨎든 귀농. 귀촌을 생각하면서 전통적 공동체의 가치에 대해 긍정적으로 보았으나 역시 과거로의 단순한 회귀는 안되겠습니다. 동서 문명이 복합된 새로운 사회로의 진화가 필요하겠지요.]
존재를 묻는 방식
나와 인간, 한민족의 탁월성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탁월한 것들과 비교해 하찮은 것들에 대해 폭력을 가할 위험이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는 절대로 (보편적) 존재에 이를 수 없다고 합니다. 존재는 나, 우리, 민족이라는 주어를 지워버렸을 때 드러납니다. 따라서 존재론이 되려면 정말 하찮고 미천한 것들에서 시작해야 하고, 스스로가 미천한 그것과 다르지 않다는 것에서 시작해야 존재에 대해 이해할 수 있답니다.
이진경 교수는 2009년 1년간 연구년으로 일본에서 살면서 장애인들을 ‘메이야쿠’(폐를 끼치는 놈들)라고 비난하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세상에 남들한테 폐를 안 끼치고 사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하는 문제의식을 발견하고, 우리들이 먹고, 마시고, 이동하고, 전화하고, 놀러가고, 생활하면서 수많은 이들의 도움으로 살아가므로 누구나 폐를 끼치면서 사는 존재들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이러한 자명한 진리를 잊고 살까요? 그 댓가로 비용을 지불하는 탓에 돈을 내는 순간 내가 끼치는 폐에 대해서 싹 잊어버린다고 하네요. 그렇지요? 타인의 노동과 서비스에 대한 댓가를 지불한다고 생각하면서 고마운 마음은 쉽게 사라지거나 느끼지도 못하게 될 것입니다.
도움과 폐는 인간에 국한되지 않고 자연 만물, 우주에까지 확대됩니다. 그 모든 곳들이 협조해 내가 여기 존재한다는 사건을 만들지요. 우리 모두는 우주 전체에 의해 떠받쳐지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내가 모든 것에 기대어 있고, 그런 것들에 의해 떠받혀 산다는 것을 드러내는 사건입니다. [여기까지 이르면 불교적 세계관과 비슷한 결과를 얻게 됩니다. ^^]
불온한 것들의 존재론
나를 존재하게 해준 것은 무엇일까요? 신(神)-최초의 존재자에 대한 물음으로 바뀐 것이 신학이다만, 신학은 존재에 도달하지 못한다고 하네요. 지금 이 순간 나를 존재하게 해준 것은 부모만이 아니라, 우주적인 존재자들의 연쇄가 나를 존재하게 해 준 것이고, 내가 존재한다는 것은 그 우주가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 모든 것을 다 잊고 삽니다. ‘존재망각’이라고 하겠습니다.
장애인이나 정상인이나 폐를 끼치는 것은 동일한데, ‘메이야꾸’(폐를 끼치는 놈들)라고 비난함은 잘못된 관념이고 행동입니다. 이러한 성찰은 우리를 불편하게 하고, 그때 느끼는 감정을 저자는 ‘불온성’이라고 합니다. 결국 미천한 것들과 더불어 이들이 낸 구멍 속으로 빨려들어가서 그 바다, 모든 존재자들이 잠겨 있는 바다 속에 침수하게 만드는 것이 진정한 존재론이라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첫댓글 새겨볼만한 좋은 물음을 던지게 하는 글이군요.
우주 만물은 혼자 존재할 수 없고, 다들 관계 속에서 존재하는데, 툭히 우리 인간은 부모만이 아니라 우주 만물에 기대어 살아가는데, 그런 존재 자체를 인식하지 못하고 사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지요.
우주 만물이 서로 기대어 존재한다는 의미를 깨닫게 된다면 우리가 다른 사람, 자연을 함부로 대할 순 없는 거겠지요.
그러나 나를 포함한 대부분 사람들은 존재론적 우위론에 사롭잡혀 '메이야꾸'를 만들어 그들을 억압하는 것으로 상대적 우위를 점하여 존재 가치를 높이려는 것이 본성인가 봅니다. 요즘 아이들의 왕따 문제도 그렇고, 거들먹거리는 졸부들도 그렇고,
권력을 지향하는 삶 자체가 그런 존재론적 우위론에 뿌리를 두고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공동체주의'를 우리는 사회적 공동 선으로 바라보고 살아왔었는데, 여기 지적에 의하면 보수주의자들의 행태가 바로 그런 것이라는 지적에 이르면 정말로 위험한 극우주의 집단의 논리로 발전하여 백색테러도 미화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하네요. 한국 사회에서 강남사람들의 선거에서 보여주는 모습, 영호남으로 나뉘어 싸우는 것도 어찌 보면 왜곡된 공동체주의의 산물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텃새'부린다는 것이 바로 이런 공동체성에서 연유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맞습니다. 저도 김 대표님과 같은 느낌을 받았기에 이진경 교수의 글을 허락도 없이 올리게 되었습니다. 양해해주시리라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