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수목원내 강변 정자, 창연정 앞에 쓰여진 시 .
금강수목원 창연정 앞 시비
題江石(제강석)
-강가 돌을 짓다
洪裕孫(홍유손)
濯足淸江臥白沙(탁족청강와백사) 강물에 발 씻으며 모래 위에 누웠으니
心神潛寂入無何(심신잠적입무하) 마음은 고요하며 청정무구 경지로세
天敎風浪長喧耳(천교풍랑장훤이) 귓가에는 오직 바람에 물결소리
不聞人間萬事多(불문인간만사다) 번잡한 속세의 일은 들리지 않는다네
*홍유손 洪裕孫(1431-1529) ; 조선초기 문인. 자는 餘慶(여경). 호는 篠叢(소총), 狂眞子(광진자). 본관은 南陽(남양)이다.
문장에 능하여 부역을 면죄받고, 金宗直(김종직)의 문인으로 지냈다. 세조의 단종 퇴위후 왕을 이어가자 세속적 영화를
버리고, 시와 술(詩酒)로 세월을 보냈다. 1482년 南孝溫(남효온), 李摠(이총) 등과 함께 竹林七賢(죽림칠현)을
자처하고, 老莊(노장)의 학문을 논하여 淸談派(청담파)로 불렸다.
1498년 戊午士禍(무오사화)에 연루되어 제주도에 노예로 유배되었다. 1506년 中宗反正(중종반정)으로 풀려났으며
중종 24년(1529)에 사망하였다. 76세에 처음으로 처를 맞아들여 아들 하나를 얻어 지성(至誠)이라 이름하였으며,
99세까지 장수하여 조선시대 역사 인물 중 가장 오래 산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저서로는 <소총유고篠叢遺稿>가 있다.
조선 시대의 세시 풍속을 기록한 <동국세시기> 유월조六月條에, “삼청동 남북 계곡에서 발 씻기 놀이를 한다”는
기록이 있다. 당시의 풍속을 기록한 문헌이라는 점에 비추어 탁족濯足놀이가 일부 특수 계층의 전유물이 아니라
일반인들 사이에 널리 유행했던 여름 풍속 가운데 하나로 선비들도 관념 속에서가 아니라 실제로 강과 계곡에서
탁족濯足의 풍류를 즐겼다.
이는 중국 고전인 <초사楚辭>의 내용과 관련이 깊다. <초사> ‘어부편漁父篇’을 보면 어부와 굴원屈原 사이의 문답을
서술한 마지막 부분에, “창랑의 물이 맑으면 내 갓끈을 씻을 것이요, 창랑의 물이 흐리면 내 발을 씻으리
[창랑지수청혜滄浪之水淸兮 가이탁오영可以濯吾纓 창랑지수탁혜滄浪之水濁兮 가이탁오족可以濯吾足]”라는
구절이 있다. 후세 사람들은 이 부분을 특별히 〈어부가漁父歌〉, 또는 〈창랑가滄浪歌〉라 이름 지어 불렀는데,
이 노래에 나오는 ‘탁족濯足’과 ‘탁영濯纓’이라는 말을 특별한 의미로 새겼다.
시인도 세상의 부귀영화에 얽매임이 없이 자연에 순응하면서 맑고 초연하게 살아가고 있음을 읊었다.
사실 창랑의 물이 본래대로 맑을 때에는 사람들이 갓끈을 담가 씻고, 더러워지면 또 더러워진 대로 발을 담가
씻으니, 물이 맑거나 흐리거나 다 씻을 것이 있게 마련이라는 뜻이다.
<맹자孟子> ‘이루離婁’편에서는 창랑가滄浪歌의 의미를 행복이나 불행은 남이 그렇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의 처신 방법과 인격 수양 여부에 달려 있다는 뜻으로 풀이하기도 하였다. 즉 세속을 초월하는 것보다
인격수양 쪽에 방점을 크게 찍었다. 그런데 후세인들은 세속을 초월해 살아간다는 뜻으로 의미가 확대되었고
시인 또한 어지럽고 복잡한 세속에서 벗어난 삶을 읊었다.
일부 참고:1. 금강수목원 창연정 앞 돌에 새긴 제석강 시
2. 홍유손洪裕孫의 제강석題江石 - 강가 돌에 한 수 적다.|작성자 향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