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 대문/윤석호
변두리 골목 안으로 이사를 갔다
러닝셔츠 바람의 아버지가 어깨를
벌겋게 태우며 대문을 달았다
덫에 걸린 짐승처럼 철 대문은 퍼덕거렸고
망치로 얻어맞을 때마다 카랑카랑 소리를 질렀다
대문은 완강했고 나는 어렸다
대문 안쪽에 시간이 쌓여 갔다
마당에서 대추나무 가지가 꾸불꾸불 자랐고
철 대문에 대추빛 꽃이 만발했다
붉게 녹물을 토해내던 장마철 지나
아버지는 꽃을 벗겨내고 페인트로 눈물 자국을 지웠지만
시간은 조금씩 새 나가고 있었다
대문은 중년처럼 무거워 보였고
나는 고개를 숙인 채 들락거렸다
철 대문 꽃핀 자리마다 버짐이 번졌다
버짐이 두툼하게 속에서 차오르는 동안
아버지는 몇 번 덧칠을 했지만
대문은 아랑곳하지 않고 늙어갔다
대추나무 엉클어진 머리 사이로 바람이 불었고
동생이 시집을 갔고 어머니가 세상을 버렸다
아버지가 욱여넣었던 시간이 모두 빠져나갔다
나도 이민을 갔다
아버지가 대문을 나와 아파트로 이사갔다
애들 데리고 아파트에 살아보는 게 꿈이었던 어머니가
아버지를 따라와 식탁 위에서 웃고 있다
어머니 뒤로 덧칠이 벗겨진 철 대문이 보이고
사진 찍던 내 그림자가 어머니 품에 안겨있다
밥을 먹는 아버지 얼굴이 철 대문 같다
눈시울이 대추빛으로 붉다
시집, 4인칭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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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호
철 대문
윤석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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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2.09 2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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