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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여름집회
천국과 하나님 나라
2. 배(교회) 안에서 계시됨
<마태복음 13장 1절~2절>
“1 그 날에 예수께서 집에서 나가사 바닷가에 앉으시매 2 큰 무리가 그에게로 모여 들거늘 예수께서 배에 올라가 앉으시고 온 무리는 해변에 섰더니”
오늘은 두 번째 말씀이다. 어제 하나님 나라와 천국의 개념이 어떻게 변천해 왔는지에 대해 말씀 드렸다. 역사적으로 그런 사정이 있었기 때문에 개념의 변천이 있었지만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과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은 변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원래 천지를 창조하시고 사람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 나라를 목표로 창조하셨다. 하나님 그분이 다스리는 그분의 영역에 속하는 나라를 위하여 얻기 위해서 창조한 것이다. 인간 세계는 하나님 나라를 위해 지어졌다. 우리가 왜 지어졌는가? 하나님 나라를 위해 지어졌다. 그런데 사람이 잘못되어서 아직까지 그 나라가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의 목표는 아담을 지어서 생명나무를 먹게 함으로써 하나님과 생명적 관계 안에 유기적으로 연합하면 사람은 사람이지만 성분은 하나님 성품을 갖는 사람이 되게 될 것이다. 그런 사람으로 하여금 땅을 지배하도록, 그것이 곧 하나님이 땅을 다스리는 것이 된다. 그래서 사람을 그렇게 하시려고 창조하신 것인데 그것을 알고 사탄이 사람에게 선악과를 먹여 하나님과 생명 관계를 끊어버린 것이다. 생명관계가 끊어지니까 남은 것이 무엇인가? 가르치는 관계만 남게 되었다. 그래서 율법이 주어진 것이다. 율법으로 백성을 가르쳐서 하나님 마음과 같은 마음을 갖고 하려고 한 것인데 사람 자체가 안 되는 것이다. 개에게 아무리 말을 가르쳐도 안 되듯이 빗나간 사람에게 하나님의 마음을 아무리 가르쳐 보았자 시행할 수가 없다. 그래서 율법이 실패했다. 대리 권위자인 왕을 세워서 하나님 대신에 내 백성을 다스리라고 내놓았지만 그 왕 역시 빗나간 사람이기 때문에 하나님 같이 백성을 다스릴 수 없어 결국 이스라엘은 망하고 만다. 그 속에서 하나님의 왕국에 대한 이상이 희미해지고 결국 영적 세계이고 현실 안에서는 불가능한 세계라는 결론에 도달하는 것이 16세기 중간 시대이다. 그리고 그런 시대에 예수님이 오셨다.
예수님은 무엇을 하러 왔는가? 패배주의적인 그런 것을 다시 세우려고 오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을 회복하려고 왔다. 땅위에서 하나님 사람, 하나님과 하나가 된 사람들을 통해서 땅이 지배되는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 오셨다. 예수님이 오셨을 당시는 땅위에 하나님 나라가 없었던 것이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실 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했다. 하나님이 땅에는 계시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 다음에 “나라이 임하옵시며”라는 말은 그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그 나라가 땅위에 이루어지기 원하는 기도이다. 예수님이 오셨을 때 땅위에는 하나님 나라가 없었다.
그래서 예수님이 씨를 뿌리신 것이다. 새로운 왕국을 위해서 씨를 뿌렸다. 그 씨를 천국이라고 부른다. 세례 요한은 말하기를 예수님이 오신 것을 가리켜 천국이 가까웠다고 한다. 천국이 여기 와있다. 씨가 와 있다는 뜻이다. 하나님 나라의 씨인 천국이 여기에 와있다. 씨가 와있다는 뜻이다. 하나님 나라의 씨인 천국이 와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씨다. 그분 자신은 그 씨를 전파하려고 오셨는데 역시 이런 말로도 저런 말로도 이적으로도 여러 가지 방법으로 그 씨를 전파하려고 하셨지만 사람의 운명을 건드리지 못한다. 그래서 마지막에 죽음으로 가신 것이다. 그 죽음 안에 우리의 운명과 접촉이 되었다. 모든 인간의 운명과 접촉이 되었다. 씨가 어디에 떨어져서 발아가 되면 자라게 될 것이다. 어떤 씨는 아무데나 뿌려도 되겠지만 어떤 씨는 특정한 조건에서만 발아가 되는 것이 있다. 예를 들면 고산 식물 같은 것이나 주목 같은 것은 씨들은 보통 땅에 그냥 해서는 안 난다. 왜냐하면 찬 곳에서 자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겨울 동안 얼었다가 봄에 터지면서 발아가 된다. 지금은 냉동을 시켰다가 인공 발아를 시킨다. 이것은 추운 곳에서 한 번 얼었다가 터져서 발아가 되는 종자에 속한다.
마찬가지로 천국의 씨인 이 씨도 어떤 데서는 발아가 되지만 어떤 데서는 발아가 잘 안될 것이다. 그래서 좋은 밭이 필요하게 되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필요하게 되고 믿음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래서 이 모든 것을 다 극복하고 모든 인간에게 누구에게나 접촉될 수 있는 발아법이 나왔는데 그 법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다. 죽음을 통해서만 우리 모든 사람과 하나가 될 수 있다. 접촉이 가능하다. 한 운명으로 접합이 되었다. 하나가 되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우리가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살았다고 말한다. 침례는 왜 받는가? 그분과 함께 죽은 것을 나타내려고 받는 것이다. 그분과 함께 우리가 침례를 받고 죽었다면 우리는 또한 그와 함께 살 것이다. 이것은 한 생명, 한 운명이 되었다는 것을 말한다.
예수님께서 궁극적으로 씨를 뿌린 것은 자기 자신을 뿌린 것이다. 자기 자신을 뿌려서 우리 안에 그분 자신이 뿌려져서 우리 안에 그분이 자라기 때문에 바울은 내가 지금 살지만 내가 산 것이 아니고 내 안에서 자라난 그리스도가 살고 있다고 말했다. 그 말은 뿌려진 씨가 자라나서 그리스도가 살고 있는 것이다. 표면적으로는 내가 살고 있지만 실제적으로는 그분이 살고 있는 것이라고 말하게 되었다. 이런 사람들이 합해지면 하나님 나라가 되게 된다. 지금 우리는 그 씨를 뿌려서 이런 사람들을 모아서 하나님 나라가 되게 하려고 땅위에 교회가 세워져 있는 것이다.
교회는 지금 땅위에서 하나님 나라이다. 현재적으로 하나님 나라이다. 비록 아직 미숙하다 할지라도 덜 익었다 할지라도. 감이 아직 익지 않았지만 감은 감이다. 아직 떫고 맛이 없지만 역시 감은 감이다. 마찬가지로 지금 교회가 문제가 있지만 미성숙함으로 인해서 문제가 있지만 역시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 나라이다. 이것을 우리가 꼭 명심하고 있어야 된다. 우리는 사사로운 일로 주님 앞에 부름 받은 것이 아니고, 그분의 영원한 목적 때문에 부름을 받았다. 교회는 내 사사로운 문제를 해결하는 곳이 아니고, 하나님의 영원한 문제를 해결하는 곳이다. 군대를 가는 것은 내 사사로운 문제 때문에 군대를 가는 것이 아니고, 나라 때문에 군대를 가는 것이다. 오늘 교회로 부름 받은 것은 내 사사로운 문제로 부름 받은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 때문에 부름 받았다. 그래서 군인 정신을 가져야 된다. 훈련소에서 왜 훈련을 하는가? 군인 정신을 갖게 하려고. 왜 앞으로 가, 뒤로 가, 좌로 가, 우로 가를 매일 하는가? 군인 정신을 갖게 하려고. 사관학교를 다니던 친구가 있었는데 4년 동안 무엇을 하느냐고 물어보았다. 1학년 여름 방학에 한번 군사 훈련이 있다고 한다. 그리고 나면 군사 훈련이라는 것은 없다고 한다. 공부만 한다고 한다. 공부만 하는데 어떻게 군인이 되느냐고 했더니 그 공부하는 것이 전부 군인이 되는 공부라고 한다. 4년 동안 졸업하고 나면 군인이 된다고 한다. 군인 의식을 갖게 된다.
오늘 우리도 교회 안에 오면 나는 없고 오직 하나님의 군대로 하나님 나라로 우리 의식이 바꾸어져야 한다. 아무리 시간이 가도 바꾸어지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가 될 수 없다. 시간이 가면 마치 사관학교 1학년에 들어가서 4학년 졸업하면 군인이 되듯이 교회 생활을 통해서 나는 하나님 나라가 되는 것이다. 나는 내 개인이 아니라 하나님 목적 안에 있는 하나님 나라이다. 내가 커지는 길은 이것이다. 내가 확대되는 일은 이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항상 나 혼자 생존하다가 가는 것이다. 이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자기 혼자 살다가 간 것이기 때문에 고양이 한 마리가 살다가 가나 개 한 마리가 살다가 가나 인간이 살다가나 똑같은 것이다. 다를 바가 아무것도 없다.
지혜를 발휘하고 능력을 발휘하고 여러 가지 발휘를 한다. 다 살기 위해서 발휘한 것이다. 우리 집에 고양이 두 마리가 거의 상주하다시피 한다. 도둑 고양이로 주인이 없다. 그런데 우리가 밥 먹고 나서 생선 찌꺼기를 주니까 주변에서 뱅뱅 돌고 때가 되면 와서 기다리고 있다. 왜 우리는 그 고양이를 키우는가 하면 쥐가 없다. 그러니까 공짜가 아니다. 우리는 뼈다귀를 주고 고양이는 쥐를 쫓아주는 것이다. 사로 상부상조하는 것이다. 그 고양이는 그렇게라도 우리에게 필요하다. 우리 집에 쥐가 오지 않도록 하는 역할을 하니까 밥을 준다. 그런데 우리가 나 잘 먹고 나 잘산다면 하나님이 무엇을 주겠는가? 고양이가 밥을 주었는데 쥐가 돌아다녀도 가만히 보고만 있다면 밥을 안 준다. 배부르니까 쥐를 봐도 그냥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사명이라는 것이 다른 것이 아니다. 뭔지 할 일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아무것도 할 일이 없는 사람은 부끄러운 사람이다.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하나님 나라이다. 군인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전투를 해야 될 것이다. 사극을 보면 군인들은 전쟁에 나가지 않으면 불평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전쟁이 없으면 좀이 쑤셔서 못 견디는 것이다. 왜 우리를 가만히 두는가, 이렇게 두면 사기가 떨어지고 힘이 빠지는데 그냥 두는가? 이 사람들은 매일 싸우자는 것이다. 전쟁을 하자는 것이다. 왜? 그 사람들은 군인이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 나라라면 하나님 나라 아닌 것은 모두 심심하다. 하나님 나라만이 우리의 목표가 되니까. 군인은 화살이 날아들고 칼이 날아드는데 싸우자는 것이다. 싸울 때만 군인의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 인생도 어디에 의미가 있는가? 나 잘 먹고 나 잘사는 것이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다른 동물도 다 하는 것이다. 사람이 사람이라는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사명이 있기 때문에 다르다. 다른 것은 모두 생존을 위한 것이다. 나라든지 사회이든지 모두 우리 생존을 위한 것이지 우리의 진정한 사명은 아니다. 사회가 변천이 되면 사람이 할 일은 그만큼 많아진다. 그것은 사회 때문에 그런 것이다. 우리가 사회에 살려니까 옛날 시대에는 필요 없는 일들이 많다. 그렇다고 해서 인간이 발전한 것이 아니다. 인간은 똑같다. 밥만 먹고 살다가 우유를 먹으려니까 소를 키워야 한다. 젖소를 키웠다고 해서 옛날에 젖소를 키우지 않던 인간과 다른가? 다른 것이 하나도 없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문명을 발전시키고 과학을 하고 모든 것을 한다고 하더라도 모두 우리의 생존을 위한 것이지 진정한 사명은 아니다. 인간의 사명은 무엇인가? 나를 지으신 이를 나타내는 것이다. 나를 지으신 이는 나를 통해서 나타나야지 내 계획을 통해서 나타나는 것은 지극히 제한되어 있다. 내 개인으로서는 아주 작다. 예수님 같은 분이라 하더라도 땅위에 왔을 때 천국의 씨밖에 안 되었다. 나라가 아직 안 되기 때문이다. 왜 그는 십자가에서 죽었는가? 나라가 없기 때문이다. 그는 죽을 때까지 나라를 보지 못했다. 그래서 사도들은 그분의 소원을 성취하기 위해서 이 땅위에 그 나라를 선포하고 나라가 되기를 원해서 자기 일생을 바쳤던 것이다. 우리 주님이 나라가 없어서 죽었구나. 나라가 없어서 배척 받았구나. 나라가 없어서 버림받았구나. 이렇게 생각했기 때문에 그분이 다시 영광을 받으려면 나라가 있어야 되겠다.
요한계시록은 그분이 최종적인 승리자가 되어서 완전한 영광을 받으신 것을 극적으로 묘사한 것이다. 사도들의 유일한 소원은 배척 받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분이 이 역사의 완전한 승리자가 되어 땅위에서 가장 영광스러운 자가 될 것이라는 것이 사도들의 소망이다. 이것은 동시에 인간이 하나님을 표현할 것이라는 말이다. 인간이 하나님을 표현하는 것이 인간의 사명이다. 다른 것은 다 생존하기 위한 것이다. 밥은 왜 먹는가? 하나님을 표현하기 위해서. 잠은 왜 자는가? 하나님을 표현하기 위해서. 휴식은 왜 하는가? 하나님을 표현하기 위해서. 그 이외 것은 다 나를 위한 것이다. 아무것도 누구를 위한 일이 없다. 공짜가 없다. 내가 고양이에게 생선을 주더라도 공짜는 아니다. 그것은 나를 위한 것이다. 우리 집이 나무 집이니까 쥐가 구멍을 파면 안 된다. 고양이에게 밥을 주어야 쥐가 못하게 한다. 자선 사업이 아니고 내 유익을 위해 주는 것이다. 이 사회 전체는 모두 자기 유익을 위해 살고 있는 것이다. 뭐니뭐니 해도 국가를 위해서 사회를 위해서라고 해도 전부 자기의 유익을 위해서다. 하나도 자기 이외, 다른 사람도 사실 자기인데, 자기 이외의 사명을 갖고 있는 것은 없다. 전부 자기를 위한 것이다. 우리가 자기를 위해 살다가 자기를 위해 죽으면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 자기를 지으신 이를 위해 살다가 우리를 지으신 자를 위해서 죽는 것은 당연하다. 그래야 사람이 가치가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바로 이 나라를 세우기 위해 씨를 뿌리러 왔다.
오늘 읽을 말씀은 마태복음 13장 1절 2절 말씀이다. “그 날에 예수께서 집에서 나가사 바닷가에 앉으시매 큰 무리가 그에게로 모여 들거늘 예수께서 배에 올라가 앉으시고 온 무리는 해변에 섰더니”라고 시작했다. 지금 천국 비밀을 말하려고 이런 서두가 생기게 되었다. 그 다음을 보면 배에서 말씀 하셨다고 한다. 배에서 말씀 하셨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마태복음 12장 마지막 부분을 보면 예수님께서 유태인들에게 배척 받으시는 사건이 생기게 된다. 집에서 떠났다는 것은 유태인의 집에서 떠났다는 뜻이다. 이스라엘의 집은 유태인이다. 예수님의 집은 유태인이다. 집에서 나가셨다는 말은 유태인을 떠났다는 말이다. 그전까지는 유태인을 상대로 그 집안에서 말씀 하셨다. 그런데 가는 곳마다 배척을 한다. 그래서 결국 그 집을 나오게 된 것이다. 집이라는 것은 유대민족이다.
마태복음 10장 6절에 보면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는 말이 나온다. 이스라엘 집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예수님의 집이다. 바로 그 사람들의 집인 것이다. 그 집을 떠났다는 말이다. 이스라엘 집을 떠났다. 유대 민족을 떠났다. 혈족 관계를 떠났다. 역사 관계를 떠났다. 유태 종교를 떠났다. 집에서 떠났다는 말은 이런 뜻이다. 마태복음 12장 38절에 보면 집에서 배척받으신 모습을 보게 된다. 율법사들이 와서 우리에게 표적을 보여 달라고 한다. 예수님은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여준 적이 없다고 하시면서 이 악한 세대라고 한다. 이 악한 세대가 표적을 요구하지만 나는 너에게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다고 말한다. 이 악한 세대는 유대 종교적 세계를 말한다. 자기를 거부하는 그 세계를 말한다. 요나의 기적은 무엇인가? 죽었다가 산 표적이다. 죽고 다시 산 표적이 요나의 표적이다. 고래 뱃속에 들어갔다가 사흘 만에 다시 나왔다. 그래서 니누에 성에 회개의 복음을 전했다는 것이 옛날의 고사이다. 이 고사를 인용하여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여줄 표적이 없다. 죽고 다시 산 것 이외에는 내가 보여줄 표적이 없다고 말씀 하셨다.
회개하지 않은 유태인들이 하는 말이 니누에 사람들은 요나가 나와서 다시 말씀을 전할 때 요나의 권고를 듣고 회개했다. 남방 여왕은 솔로몬의 지혜를 듣고 싶어서 땅 끝에서부터 왔다. 그런데 너희는 귀를 막고 도무지 듣지를 않는다. 이런 상태를 무엇이라고 표현했는가? 더러운 영이 더러운 집과 같다고 표현했다. 비유를 어떤 귀신이 그 집에 살고 있다가 밖으로 나갔더니 집주인이 와서 집을 더 좋게 수리해놓았다. 귀신이 와서 보니까 전보다 집이 좋으니까 일곱 친구를 더 데리고 왔다. 그랬더니 이 집의 형편이 옛날보다 더 못하게 되었다는 이 비유를 들었다.
이것은 더러운 영이 들어온 유태교를 말한다. 그 영은 헌집에 들어갔다가 수리되니까 더 많이 데리고 왔다는 것이다. 어떻게 수리했는가? 율법으로 수리했다. 종교로 수리했다. 그러니까 다른 민족들보다 훨씬 낫다. 다른 민족은 율법이 없고 종교가 없기 때문에 야만적인데 유태인들은 율법이 있어 야만족이 아니다. 유태 민족들은 아주 잘 수리된 집과 마찬가지다. 그런데 귀신들이 와서 보니까 잘 수리해서 더 좋다고 들어왔다는 것이다. 우리 생각으로는 율법으로 수리되었으면 그렇지 않을 것 같은데 율법으로 잘 수리되니까 살기가 더 좋다고 한다. 이것은 오늘날 종교에 대해서 큰 경종을 주는 일이다. 유대인들은 선지자들을 거부하고 집만 수리하고 있었다. 하나님이 보낸 사람은 다 거부하고 자기 집만 계속 수리한다. 자기만 닦는다. 율법을 통해 자기만 닦는다. 자기만 수양한다. 그렇게 하고 나면 무엇이 되는가? 아무것도 없는 집을 누구도 살 수 없는 집을 만들었다. 너무나 집을 좋게 만들어놓고 보니까 어떤 사람이 와도 마음이 맞지 않는다. 내가 셋집을 주려고 집을 잘 수리해놓았는데 전세를 얻으러 온 사람이 구질구질하면 주기가 싫다. 내 집을 버리겠다는 생각이 든다. 또 어떤 사람이 왔는데 이 사람은 좀 거칠게 생겨 집을 다 망치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 사람을 봐도 마음에 들지 않고 저 사람을 봐도 마음에 안 든다는 것이다. 왜? 집이 허름하면 아무에게 줄 텐데. 시골에 가면 공짜로 살 집이 많다. 왜냐하면 다 무너져가는 집이 있다. 그런 집은 주인에게 좀 살자고 하면 얼씨구 좋다하고 내놓는다. 왜? 집이라는 것은 사람이 살아야 된다. 안 살면 금방 허물어져 버린다. 집이 허술하면 사람을 받아들이기가 쉬울 텐데 집을 너무 좋게 해놓고 보니까 돈을 준다고 해도 가려서 받는다. 여러분이 호화주택에 가서 방 한 칸 세를 들자고 하면 신분 다 조사하고 어떻게 생겼는지 조사하고 받지 그냥 받지 않는다.
유태인들은 참 좋은 종교, 가장 높은 도덕, 가장 고상한 율법으로 아주 세련되게 잘 수리된 집과 같다. 종교 생활하는 사람을 보면, 오랜 동안 종교적 수양을 하게 되면 아주 신사적이 된다. 서양 사람들이 원래 야만적이었는데 기독교가 들어가서 신사적인 나라가 되었다는 말을 많이 한다. 기독교가 그런 면에서는 좋은 일을 참 많이 했다. 무식한 사람들에게 공부를 가르쳐서 개명된 나라들을 만들었다. 문화도 발전시켜 주고 좋은 일을 많이 했다. 학교를 세워주고 병원을 세워주었다. 이런 일들을 많이 했으므로 기독교가 가는 곳은 문명이 발전하게 되었다. 물론 나쁜 짓도 많이 했지만. 집은 잘 수리되었지만 아무나 들어오지 못한다는 것이다. 우리 자매들이 아이들 키우면서 이야기 하는 것이 다른 집 아이들이 우리 집에 와서는 노는데, 우리 집 아이가 다른 집에 가려면 받아주지 않다는 것이다. 다른 집은 깔끔하게 청소하고 정돈을 해놓아서 아이들이 가면 아수라장이 되어 버리므로 남의 아이들은 못 오게 하는 것이다. 자기 아이들은 남의 집에 가서 놀게 한다. 왜? 우리 자매들 집은 허술하게 해놓게 사니까 뛰어 놀아도 상관이 없다. 우리 자매들은 자기 아이들과 놀아 주어도 좋으니까 뛰어도 놓아두지만 다른 사람들은 정리해놓고 카페트 깔아놓았는데 아이들이 와서 놀아버리면 난장판이 되므로 못 오게 하는 것이다.
집이 너무 깨끗하게 되면 사람 들이기가 어렵다. 좋은 집을 지었으면 사람도 잘 받아들이면 좋은데 내 집이 너무 좋으면 다른 사람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내가 너무 수양을 많이 해놓으면 다른 사람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이런 묘한 것이 있다. 내가 너무 고고한 사람이 되면 사람을 아무나 접촉할 수가 없다. 이상하다. 내가 너무 잘난 사람이 되면 아무나하고 대화하기가 싫다. 그만한 수준을 찾아 가게 된다. 골프하는 사람은 골프하는 사람들끼리 노는 식으로 수준을 찾아가게 되지 아무렇게나 놀 수가 없다.
유태인들은 마치 그런 사람들과 같다는 뜻이다. 너무나 세련되어서 너무나 잘 정리가 되어서 율법으로 빈틈없이 훈련이 되어서 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율법의 교육을 받으면서 살기 때문에 그 시대에 그 세대에서 유대인만큼 세련된 사람이 있었겠는가? 그러니까 이 사람들은 수리를 잘해놓은 집과 같다. 그런데 귀신들은 그런 집을 더 좋아한다는 것이다. 아무것도 없는 집, 주인이 없는 집을 만들어놓았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오늘날 현대인과 비슷하다. 오늘날 현대인은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다 거부하고 아무것도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생각한다. 오로지 자기만의 생각을 갖고 살려고 한다. 아무것도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한다. 스님이 와서 불도를 공부하라고 하면 싫다고 하고, 목사가 와서 복음을 전해도 싫다고 한다. 왜? 그런 것에 매이기 싫다는 것이다. 더 세련된 사람일수록 매이기 싫어한다. 매이기 싫고 내 자유로 빈 집으로 살고 싶다는 것이다. 집이나 잘 수리해놓고 자기 감상을 해가면서 내가 어떤 사람인가, 어떤 수준의 사람인가를 감상해 가면서 살고 싶지 이것 받아들이고 저것 받아들이면서 살기 싫다는 것이다. 미국에서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직장에서 절대로 금지해야 될 이야기가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종교에 대해서 절대로 이야기하면 안 된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런 것에 매이기 싫다는 것이다. 물론 오랜 역사를 통해서 여러 가지 싸움 등이 많이 있었기 때문에 그렇다고 할 수도 있지만 그런 것을 빙자하여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싶다고 한다. 요즘 학생들을 접촉해보면 벌써 그렇다. 자기의식만 갖고 살고 싶다. 빈 집으로 살고 싶다. 주인을 모시고 싶지 않다는 이야기이다. 내 집에 누가 들어와서 주인 노릇 하는 것이 싫다. 나 혼자 빈집으로 99칸 중 한 칸만 쓰고 98칸은 빈 집으로 두고 싶지 방 주인 주인을 두기 싫다는 것이다. 내 인생을 누가 관리하는 것이 싫다. 내가 다 관리하겠다는 것이다. 현대인과 아주 비슷하다. 왜? 현대인은 배운 것도 많다. 지식이 높을수록 더 그렇다. 지식이 높아져서 요즘은 복음 전하기가 더 어렵다. 옛날에는 아이들에게 노트만 주어도 교회에 나왔다. 연필 한 자루만 주어도 교회에 나왔다. 그런데 요즘은 어림도 없다. 주일학교 아이들도 서울의 큰 교회를 보니까 여름 수련회를 하면 선물이 대단하다. 막대한 돈을 써야 한다. 왜냐하면 집안에서도 좋은 것이 많으니까 교회에서 그보다 더 좋은 것을 주지 않으면 선물로 생각하지도 않는다. 메이커 없는 것을 가지고 있던 아이들은 메이커 있는 것을 주면 좋아하겠지만 세계 일류 브랜드로 옷 입고 신발 신었는데 교회에서 메이커도 없는 것을 주면 안 받는다. 지식이 높아지고 경제수준 높아지고 다 높아지면 아무것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자기만 잘 치장하면 된다. 그것이 바로 현대인들이다.
당시의 유태인들은 바로 그런 사람들이다. 그 시대에서 가장 세련된 사람들이었다. 그러니까 어떤 선지자가 와도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다. 너무나 율법적으로 세련되었기 때문에 이 선지지가 오면 이런 흠이 있고 저 선지자가 오면 저런 흠이 있고, 선지자마다 오면 간섭을 했다. 너희가 하나님을 이렇게 섬겨야 되고 저렇게 섬겨야 되고 왜 안식일을 지키지 않느냐고 간섭을 한다. 그러니까 싫은 것이다. 요즘 아이들이 제일 싫어하는 것이 간섭하는 것이다. 나대로 놔두라는 것이다. 그러니 선지자를 받아들이겠는가? 안 받아들인다.
문제는 악한 귀신들은 그런 집을 더 좋아한다. 사람이 지혜롭고 지식도 많은 것 같은데 왜 속는가? 자기에게 속아 산다. 다른 사람은 오지 못한다. 자기가 자기 주인이 되다 보니까 자기가 자기에게 속아서 산다. 악한 귀신들은 빈 집을 더욱 좋아한다. 일곱 귀신을 데리고 와서 사니까 이전 형편 보다 훨씬 못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예수를 배척한 시대가 바로 그런 세대라는 뜻이다.
그래서 그 다음에 밖에서 누가 와서 어머니와 동생들이 만나러 와 있다, 친척들이 찾아왔다고 말하니까 누가 내 형제냐,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아버지 뜻대로 행하는 사람이라야 나의 형제이고 자매이고 어머니이다. 이 말은 그냥 나온 것이 아니고, 지금 잔뜩 배척을 받고 있는 판인데 바로 육신의 관계, 종교적 관계, 역사적 관계, 혈통의 관계 속에서 배척을 받고 있는 판인데 밖에 어머니와 동생들이 와있다고 하면 신경질이 나지 않겠는가? 화가 나서 말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맥락에서 이런 말이 나왔다.
이것을 통해서 친척들까지도 떠나신 분이 되었다. 유대 종교가 배척하기 때문에 유대를 떠나게 되었고 이스라엘 집을 떠나야 했다. 그것은 다 어디에서 왔는가? 육신으로 말미암아 오는 것이다. 그래서 친척들까지 떠나게 되었다.
천국의 씨인 그리스도는 유대인을 떠나서 유대 집을 떠나서 이스라엘 집을 떠나서 이방인에게로 뿌리러 간 것이다. 육체, 역사, 전통, 종교, 이런 것들이 모두 하나로 어우러져서 아주 세련된 사회가 이스라엘 사회이다. 이 사회를 떠나서 참된 인격 안으로 세련되고 안 세련된 것이 있기 전의 세계로 영 안의 세계로 참 인격의 세계로 예수님께서는 들어갈 수밖에 없게 되었고, 필연적으로 이 씨는 그런 세계 안에 떨어질 수밖에 없는 씨라는 것이다. 오늘 우리가 말씀을 전해보면 누가 듣는가? 누가 깨닫는가? 누가 받아들이는가? 자세히 살펴보면 바로 이런 경로와 관계되어 있다. 무엇인가로 아주 세련되어 있으면 잘 수리된 집 같아서 눈에 보이지 않는 귀신은 들어갈 수 있는데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들어가지 않는다. 오랜 동안 혈통으로 굳어지고 역사로 굳어지고 전통으로 굳어지고 나면 천국의 씨는 들어갈 수 없게 된다. 그래서 조금만 달라도 자기의 기득권이 상실하게 될까봐 불안하게 생각한다.
우리 교회를 보고 이러고 저러고 하는 사람들을 자세히 보면 별것도 아닌데 대단히 불안하게 생각한다. 우리가 세상을 어떻게 할 줄로 생각하고 있다. 우리는 사실 그럴 능력도 없고 열심도 없는데 대 교단을 상대하겠는가? 어림도 없다. 자기들은 수백만명이고 우리는 겨우 2천명인데 그것을 갖고 신경을 쓰고 있다. 가만히 놔두면 커져서 자기들의 담을 넘어오겠지 하고 생각한다.
예수님 한 사람이 세상에 왔는데 온 유대 전체 사회가 난리가 난 것이다. 큰일 났다. 저 사람을 가만히 놔두면 난리가 나겠다고 하여 소동이 난 것이다. 사도 바울 한 사람이 가는데 구라파가 들썩들썩 한다. 이상한 사람이 왔다. 우리 기존의 어떤 것을 파괴시킨다. 우리 기득권을 말살시키려고 한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잘 먹고 잘살던 사람들, 율법사니 제사장이니 하는 사람들은 아주 기득권이 확고한 사람들이다. 확고한 기득권을 뺏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고 그것이 파괴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에 불안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를 쫓아다니면서 흠 잡을 것이 없나하고 쫓아다닌 것이다. 우리 교회도 뒤로 흠 잡을 것이 없나 하고 쫓아다닌다. 말 한마디만 어떻게 해도 꼬투리를 잡아 이단이라고 대서특필을 써놓아 나는 유명해지는 것이 싫은데 우리가 갑자기 유명해졌다. 좋지 않게 유명해졌지만 좌우간 유명해졌다.
이 사람들은 뭔가로 확고하게 자리를 만들어서 조금도 침해받지 않으려고 한다. 지식이 많은 사람들을 보면 조금도 침해받지 않으려고 한다. 돈이 많은 사람도 조금도 침해받지 않으려고 한다. 자기 잘난 사람을 보면 조금도 침해받지 않으려고 한다. 깨끗하게 집을 수리해놓았으니까 누구도 함부로 들일 수가 없다. 자기 마음에 맞는 사람이 없다. 자기가 갖고 있는 것을 고수하려고 생각한다. 우리가 젊은 학생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하는 것이 시급한 것은 지위도 있고 재산도 있는 사람들은 거기서 조금도 흔들리려고 생각한다. 뒤집어 볼 생각을 못한다. 그래도 학생들은 아직은 젊으니까 한 판 뒤집어 봐도 된다는 학생도 있다. 젊은 사람들은 진리가 있다면 가보자고 할 수가 있다. 그런데 나이가 든 기성세대들은 난리가 나도 안 간다. 지금 잘 먹고 잘 사는데 새로 할 것이 뭐 있느냐고 생각하고 아예 들으려고도 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어떤 종교에서 열심이 있고 장로도 되면 새로운 것을 아예 들어보지 않으려고 한다. 새로운 것에 잘못 들어가 장로를 뺏기면 어떡하겠는가? 안 된다. 새로운 것이 잘못 들어왔다가 목사 사표를 내야 되면 어떡하겠는가? 안 들으려고 한다. 집을 너무 잘 수리하면 안 된다.
우리가 항상 나그네로 살아야 되고 초막절로 살아야 되는 이유가 그것이다. 집을 견고하게 지어놓으면 하나님의 구름 기둥이 뜰 때 뜰 수가 없다. 구름 기둥이 앉을 때 앉을 수가 없다. 내 집이 너무 견고하니까 움직일 수가 없다. 천막을 짓고 사는 사람은 가자고 하면 얼른 갈 수가 있는데 너무 견고하게 지어놓은 사람은 설사 좋다고 해도 갈 수가 없다. 초막을 짓고 살던 사람은 10%만 되면 좋다고 갈 수가 있는데, 궁궐을 짓고 사는 사람은 100%가 되어도 못 간다. 비교해 보아야 되니까. 내 궁궐과 저것과 비교하여 어느 것이 나은가 하고 생각하니까 못 가는 것이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광야에서 40년 동안 천막을 짓는 생활을 훈련하였다. 이것을 기념하는 것이 초막절이다. 대대로 기념한다. 우리는 바로 그 정신을 대대로 기념해야 된다. 인생은 결국 초막절이구나. 언제 구름이 뜰지 언제 구름이 앉을지 모르는 것이구나. 하나님이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는 것이구나. 내가 아무리 견고하게 벽돌로 지어놓았더라도 오늘 밤에 내 영혼을 부르시면 가야 되는구나. 이런 마음으로 살아야 된다. 그렇다고 염세주의가 된다는 말이 아니다. 나는 늘 그런 마음을 갖고 살았지만 한 번도 염세주의에 걸린 적이 없다. 나는 30여년 동안 마음속으로 완전히 보따리를 풀어놓고 산 적이 없다. 처음부터 그랬지만 대구에 이렇게 30년간을 살 줄 생각지도 못했다. 잠시 잠시 한 것이 30년이 되었다. 지금도 그 마음이 마찬가지이다. 잠시 한 것이 30년이 되었다. 제주에 간지가 벌써 어느 사이 10년이 되었다. 10년을 있으려고 생각하지 않았다. 박영호 형제가 오라고 하니까 잠시 있는다고 생각했는데 10년이 되었다. 내 인생은 잠시가 연속되어 이렇게 왔다. 그렇다고 내가 염세주의인가? 그렇지 않다.
인생은 나그네 길이다. 아브라함이 나그네 길을 살았고, 이삭이 나그네 길을 살았고, 야곱이 나그네 길을 살았다. 바로 앞에 섰을 때 야곱은 내 나이 130세라, 내가 나그네 길을 걸어왔다고 이야기한다. 하나님이 어떻게 나를 부르실지, 어떻게 쓰실지, 어디서 무엇을 할지를 어떻게 아느냐는 것이다. 항상 내가 부르면 떠날 수 있도록 보따리를 싸놓고 있는 것이다. 짐을 가볍게 하고 살자.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 너무 많으면 출발을 못한다. 빈손으로 있어야만 오라 하면 금방 갈 수가 있다. 젊은 아이들은 그래도 아직은 빈손이다. 개똥 지식이 많이 들어갔지만 그래도 아직은 덜하다. 나이가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짐이 많아진다. 트럭 하나에 실어도 될 것이 트럭 2개에 실어야 되고 3개에 실어야 되고 4개에 실어야 되면 이사 비용이 더 많아서 못 가게 된다. 이것이 모두 굳어지는 일이다. 사람이 고정되고 굳어지면, 살아계신 하나님을 우리가 따를 수가 없고 그분의 말씀을 청중 할 수 없게 되는 원인이 된다. 우리가 복음을 전해보면 금방 알 수 있다. 특별히 종교적으로 굳어진 사람은 참 어려운 것이 그 종교적인 기득권을 상실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두 번째는 배에서 말씀 하셨다. 바닷가에 계셨더니 사람들이 모두 바닷가로 몰려왔다. 그래서 예수님은 배 위에 올라가서 거기에 있는 사람들에게 말씀 하셨다고 되어있다. 이 바다는 무엇인가? 이방 세계를 가리켜 말한다. 유대 땅에서의 바다는 이방 세계이다. 다니엘서 7장과 계시록 17장에 보면 ‘나라와 백성과 방언과~’라는 말이 나온다. 전부 바다와 관계가 있다. 큰 음녀가 알아있는 물도 바다이다. 어떻게 말하면 세상이고 유대인적으로 말하면 세상이고 우리가 지금 말하면 열강, 모든 나라들이다. 유대 나라를 제외한 모든 나라들이다.
이 바닷가에 가셨다. 이스라엘 집에서 쫓겨나니까 배척받으니까 예수님도 이스라엘 집을 떠나셨다. 굳이 배척하는데서 있지 않고 배척하니까 떠나서 어디로 가는가? 이방 세계로 갔다. 기독교가 유대 나라에서 박해를 하니까 소아시아 지방으로 가게 된 것이다. 박해를 피해서 간 것이 세계화가 된 것이다. 만일 죽기를 각오하고 예루살렘이 있었더라면 충성은 되었을지 모르지만 그 자리밖에 안됐을 것이다. 그런데 박해 때문에 멀리멀리 퍼지게 되었다. 더 커지게 되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로 유대인이 말을 잘 들었더라면 유대인만 구원하고 갔을지도 모르겠지만 유대인이 배척했기 때문에 이방 세계로 걸음을 옮기게 된 것이다.
배는 무엇인가? 물위에 있다. 세상에 있는 것이다. 세상에 있지만 배는 물에 속한 것이 아니고 물위에 항상 떠있는 것이 배다. 방주는 떠 있었다. 방주만 있다면 물이 많더라도 상관이 없다. 물이 많으면 많은 대로 뜨고 물이 적으면 적은 대로 뜬다. 방주가 없으니까 큰물이 들어오니까 사람이 죽는 것이지 방주만 있다면 물이 많으면 많은 대로 적으면 적은 대로 오히려 물이 많으면 더 좋을 수도 있다. 세상에 있으면서도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이 무엇이겠는가? 바로 방주이고 교회이다. 교회는 배와 같다. 물위에 떠있지만 물은 아니다. 교회이다.
하나님 나라는 유대 민족과 유대 종교를 떠나서 그때 이미 옛날에 하나님의 계획이 있었고 관심이 있었던 나라가 유대 나라이다. 그렇지만 이제는 그들이 하나님 나라를 배척하니까 하나님 나라는 바다 위에 떠있는 배처럼 세상 가운데 들어가 있지만 세상이 아니 것으로 존재하고 있다. 지금 우리 교회는 세상 속에 떠있는 방주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다 바다에 있다. 물위에 있다. 그런데 우리는 물이 아니고 바다가 아니고 배다. 여기에 교회의 비밀이 있다. 세상에 속하지 않으면서 세상 가운데 있다. 우리는 세상에 속하지 않고 세상에 있는 사람들이다. 내가 세상에 있으면서 세상에 속하지 않은 사람이다. 물위에 떠있지만 물이 아다. 그것이 우리를 구원하는 길이다. 배가 없으면 다 물에 빠져 죽는다. 홍수가 나면 다 죽는다. 수영장에 가면 수영 잘하는 사람이 많다. 그래도 육지가 있으니까 그렇게 하지 만일 육지가 없이 물만 있다면 1m 가는 사람이나 5km 가는 사람이나 똑같다. 수영장에서 25m 가는 사람과 50m 가는 사람이 실력 차이가 있다. 그리고 낮은 데서 하는 사람과 깊은 데서 하는 사람이 다 차이가 있다. 그렇지만 육지가 있으니까 하는 말이지 육지가 없이 물만 있다고 생각하면 홍수가 나서 온 세상이 물이 되었다면 3km 가는 사람이나 10km 가는 사람이나 1m 가는 사람이나 다 마찬가지이다. 배가 없으면 마찬가지이다.
수영은 못해도 배만 있으면 산다. 아무리 수영을 잘하는 사람도 배만 있으면 산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것이다. 내가 수영을 잘해서 사는 것이 아니고 배가 있으면 산다. 교회가 있으면 산다. 세상과 구별되는 무엇이 있으면 산다. 세상과 구별된, 세상에 있으면서도 세상과 구별된 그 무엇이 나를 건진다. 세상이 나를 살릴 것도 아니다. 물이 맑은 물도 있고 흐린 물도 짠물도 있고 담백한 물도 있다. 담백한 물이 나를 살리는 것도 아니고 짠물이 나를 살리는 것도 아니다. 물을 먹어보면 짠물을 먹을 때는 짜서 못 먹겠다. 바다에 가서 파도가 와서 물을 먹으면 얼마나 짠지 모른다. 강변에 가서 수영을 했더라면 안 그럴 텐데, 강변에 가서 물 먹으면 처음에 한 모금 마실 때는 맛있겠지만 계속 마시면 못 먹는다. 짠물이나 단물이나 매 한가지다. 어차피 물속에 있으면 죽기 마련이다. 배가 있어야 산다. 물위에 뜰 수 있는 배가 있어야 산다. 세상에 있지만 세상과 구별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배가 있어야 된다.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그 배와 마찬가지이다. 세상에서 죽임을 당한 것 같다. 그렇지만 세상을 이긴 사람이다. 그를 죽인 사람들은 이름도 없이 다 사라지고 말았다. 그를 미워하고 배척하던 사람들은 어디로 갔는지 간 곳이 없다. 그런데 죽임을 당한 그 사람은 지금까지도 영원히 살아있다. 앞으로도 영원히 살아 있을 것이고 이 사람은 세상을 이긴 사람이다. 이 사람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다. 내가 구원받을 사람은 이 사람이다. 이 사람만이 살아남을 수 있게 된다.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말씀 하셨다. 천국의 비밀은 교회에 계시된다. 세상에서는 계시되지 않는다. 천국의 비밀은 교회 안에서만 계시된다. 어떤 사람이 예수를 믿지 않는데도 죽어서 어디를 갔다 왔다고 한다. 가보니까 기화요초가 만발하고 어느 방에는 누가 있고 어떤 곳은 혓바닥만 잘라서 걸어놓은 곳이 있고 어떤 곳은 눈만 빼놓은 곳이 있다고 한다. 요즘 교회에서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이 자기가 천국에 갔다 왔다고 하는데 유명한 사람이 그렇게 말한다. 가서 뭘 보고 왔는지 모르겠는데 뭘 보고 왔다고 한다. 다 허깨비다. 어떤 사람은 죽었다가 며칠 만에 살아났는데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잠깐 까무라치고 왔는데 굉장한 것을 보고 왔다는 사람이 있다. 다 허깨비다.
천국은 그것이 아니다. 천국은 교회 안에서 계시되는 실제적인 씨다. 실제적인 성분이다. 하나님 나라를 만들 수 있는 요소이다. 하나님 나라가 될 수 있는 씨다. 성질이다. 우리는 그 성질을 보면서 천국을 느껴야 되고 천국 안으로 들어가야 된다. 지금 우리는 어제 저녁부터 천국 안으로 들어가고 있다. 지금 천국으로 들어가는 길이다. 어디로? 속리산으로? 아니다. 천국으로 지금 들어오는 길이다. 천국은 이렇게 가는 것이다. 지금 가고 있다. 어제 저녁부터 시작해서 천국 여행을 하고 있다. 유태인의 천국부터 시작해서 천국 여행을 하고 있는 중이다. 우리는 천국으로 들어가고 있는 중이다. 점점점점 더 비경이 있는 곳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구경거리가 더 많은 곳으로 들어간다. 죽으면 가는 곳이 아니고 우리가 지금 천국 안으로 들어가고 있다.
우리 속에 천국의 개념이 자꾸자꾸 생겨난다. 왜? 천국을 보니까 천국이 생각나고 천국을 보니까 천국의 개념이 생각난다. 이것이 천국이구나. 금강산을 가면 이것이 바로 그리운 금강산이구나. 그렇게 보는 것이다. 미국에 가보니까 이것이 말하던 미국이구나 하는 것이다. 천국도 마찬가지다. 이것이 천국이구나. 보니까 이것이구나. 그러면 우리가 천국을 가는 것이다. 안 갔으면 못 본다. 천국을 가니까 보는 것이다. 금강산을 가니까 금강산이구나 하는 것이지 금강산에 가지 않으면서 이것이 금강산이구나 하겠는가?
천국으로 들어가고 있다. 며칠 동안 다 들어갈지는 모르지만 하여간 들어간다. 천국의 비밀은 교회 안에서 계시된다. 바깥에 나가면 없다. 세상에는 천국이라는 것이 없다. 교회 안에서만 계시되는 세계이다. 눈을 똑똑히 뜨고 보아야 된다. 구석구석 보아야 된다. 금강산도 주마간산 식으로 보고 오지 말고 구석구석 비로봉도 보고 어느 골짜기에는 무엇이 있는지 자세히 봐야 된다. 여러분도 정신 차리고 자세히 보라. 천국에 들어가면서도 자세히 못 보면 금강산에 갔다 오나마나 마찬가지다. 차라리 그림보고 있는 것이 낫지 돈 주고 뭘 하러 거기까지 가겠는가. 요즘 TV를 보면 설교가 많이 나오는데 집안에 가만히 앉아서 선풍기 돌려놓고 설교나 듣고 있지 무엇 하러 속리산까지 오겠는가? 자세히 천국에 들어가 보려고 온 것이다. 우리가 정신을 바짝 차리고 이것이 천국이구나. 천국이 다른 곳에 있는 것이 아니고 지금 우리가 천국을 구경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기를 바란다.
천국의 비밀은 이렇게 교회 안에서 계시되고 있다. 예수님은 천국의 씨다. 이 천국의 씨가 여행을 하고 있다. 우리가 그분을 따라 가고 있다. 그분이 배척당한 곳도 가보고, 그분이 바다로 간 곳도 가보고, 그분이 배에서 말씀하신 곳도 가보고, 우리는 지금 천국을 구경하고 있다. 상상력이 풍부해야 된다. 너무 수학적이면 안 되고 시적이고 상상력이 풍부해야 된다. 대구에 앉아계신 주님하면 상상력이 있어야 된다. 바닷가에 앉아 있는 사람들 하면 상상력이 있어야 된다. 속리산 유스타운에 앉아 있는 사람들 하면 상상력이 있어야 되지 수학적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
성경은 수학자들이 쓴 책이 아니다. 논문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을 볼 때 다르게 생각해야 된다. 성경은 시적이다. 논문식이 아니고 시적이다. 그 말속에 내포되고 있는 의미가 무궁무진하게 있다. 그런데 그것을 1+1은 2로 해석하면 안 된다. 서양 사람들이 성경을 보면서 그런 사고방식으로 성경을 보았기 때문에 성경이 표면적인 것이 되고 말았다. 서양 사람들은 잘 모를 것 같다. 우리 한국 사람은 보기가 좋은 것이 우리는 상상력이 풍부하다. 그래서 미지근하다고 하면 몇 도라고 이야기하지 않아도 다 안다. 그런데 서양 사람들은 미지근하다고 하면 알아들을 수가 없다. 30도 물을 갖고 오라고 해야 되지 미지근한 물 갖고 오라고 하면 안 된다. 성경은 그런 식으로 봐서는 도저히 안 된다. 30도냐 40도냐고 해서는 안 된다. 미지근하다고 하면 감으로 알아들어야 된다. 이래서 우리 한국 사람은 탁월하다. 우리가 성경을 이해하기에는 참 좋은 백성이다. 과학을 하기에는 좀 불편하지만 성경을 이해하기에는 아주 좋은 백성이다. 우리가 성경을 옳게 보아서 저 딱딱한 사람들, 1+1은 2밖에 모르는 사람들에게 우리가 어떤 풍성한 양식을 제공해야 된다. 우리가 어렸을 때는 그 사람들이 우리에게 와서 뭘 주었지만 우리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 우리가 오히려 그 사람들에게 뭘 주어야 된다. 그 사람들의 사고방식은 그것밖에 나오지 않는다. 신약이 그것밖에 안 된다. 왜냐하면 사고방식 자체가 아주 과학적이기 때문에 성경을 보기에는 아주 어려운 사람들이다. 깊이를 알기에는 너무 어려운 사람들이고 우리가 아주 좋다. 여러분이 아주 탁월한 사람들이다. 서양의 천재보다 여러분의 둔재가 더 낫다. 왜냐하면 서양의 천재도 미지근하다고 하면 모른다. 그런데 우리는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도 미지근하다고 해도 다 안다. 그러니까 우리는 천재이다.
배에서 말씀 하시더라. 그러면 서양 사람들은 배밖에 모른다. 그렇지만 우리는 배가 아니고 우리가 지금 앉아 있는 이것이 배구나. 속리산 유스타운 2층이 배구나. 그렇게 감이 와야 된다.
[ 기 도 ]
감사하신 아버지 하나님! 비유로 말씀 하셔서 들을 귀 있는 자가 듣도록 말씀 하신 것을 감사합니다. 세상에는 이런 말씀이 없기 때문에 교회 안에서 말씀 하시고 교회가 아니면 이 말씀을 알아들을 수가 없기 때문에 또 교회에 말씀 하신 것을 감사하고 우리를 교회 안으로 부르시고 교회가 되게 하시고 교회 안에서 이 말씀을 듣게 하신 것을 감사합니다. 눈과 귀를 열어주시고 마음을 열어주셔서 주께서 하신 말씀을 깊이 알도록 당신이 보여주신 세계를 깊이 알도록 축복하여 주시기를 원하옵니다.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