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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1945러셀17서양철최III1
현대편(Mordern Philosophy) in 서양 철학사(A History of Western Philosophy 1945)(러셀, 최민홍, 집문당, 1996(원, 1945), I 722, II 489.) .
- 러셀(Bertrand Arthur William Russell, 1872-1970) 영국 수학자, 논리학자, 철학자...
러셀이 현대라고 부르는 시기의 앞부분은 근세 또는 근대라고 부른다. 근대의 시작은 르네상스이지만 성립은 19세기에 나폴레옹 이후에 유럽에서 근대 국가형태들이 갖추어지면서이다. 제1부는 1장에서, 나의 표현으로는, 표면의 이중성의 시대이다. 러셀은 주관주의의 광증과 기술의 비대에서 광증이라는 표현했는데, 내가 보기에 둘 다 표면에서 상층으로 가는 관점이다. 예외가 있다면, 스피노자와 루소이다. 이들은 심층의 자연에서부터 표면에로 의지를 표출하는 과정을 문제 삼았다. (50PLI)
*** 현대편(Mordern Philosophy) 하권
제1부 르네상스에서 흄에 이르기까지 11-269
제2부 루소에서 현대까지 271-487
제1장 일반적인 특징 13-18
역사에서 “현대”(modern, 요즘 근대)라고 말하는 시기는 여러 가지 점에서 중세기와 판이한 정신적인 특징을 갖고 있으며, 이 가운데서 중요한 것이 두 가지 있다. 그것은 쇠퇴해 가는 교회의 권위와 강대해 가는 과학의 권위이다. .. (13)
현대[근대] 문화는 교회적이라기보다 오히려 세속적이다. .. 국가의 권력과 이 권력이 차지하는 여러 가지 기능은 점점 강대하여 갔으나, 국가는 대체로 중세기에 교회가 끼친 영향만큼 철학자들의 견해에 영향을 끼치지는 못하였다. (13)
현대적인 민주주의는 미국과 프랑스 혁명을 거친 후에야 비로소 중요한 정치세력이 되었다. 현대에 와서 민주주의[개인주의]와 대립되는 사회주의는 1917년에 처음으로 그 통치권을 얻게 되었다. .. 우리가 “자유주의적”[상품자유주의 le liberalisme]이라고 부르는 것, 즉 구체적으로는 상업과 관련되어 있다. 여기에 몇 가지 예외가 있다. 일례로 독일의 피히테(Fichte)와 헤겔(Hegel)의 경우를 들 수 있다. 이들은 외관상 상업과는 전혀 관계없는 것처럼 보이며, 이런 예외는 그 시대의 일반적 특징이 아니라, 그야말로 하나의 예외에 지나지 않는다. [피히테와 헤겔이 상업자유주의가 아니라는 인성자유주의에 가깝다. 그럼에도 개인이 국가에 복속되어야 하는 쪽이다. 국가가 부를 늘이는 작업 속에서 개인은 상업자유주의에 종속되게 된다. 그보다 들뢰즈 식으로 국가권력에 종속되는 개인의 부속물화를 초래한다. (50PMI)] [맑스의 경철 수고(1844)에서 소외라고 부를 것이다. (50QKI)]]
이탈리아의 르네상스에 있어서 과학의 역할이 별로 크지 않았다. 교회의 권위에 반기를 들고 일어난 것은 과학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 고대(古代)와 관련되어 있다. (14) [당연히 다시 태어남(르네상스)는 고대 그리스 철학과 문화의 재탄생이다. 과학의 발달은 다음이고 그리고 곁다리로 의식의 발전에서 종교개혁이 일어난 것이다. (50PMI)]
인간의 마음속에 과학이 심각하게 문제되기 시작한 것은 1543년 코페르니쿠스(Nicolaus Copernicus 1473-1543)의 학설이 발표된 후의 일이었다. 그러나 이 주장도 17세기에 와서 케플러(Johannes Kepler 1571-1630)나 갈릴레이(Galileo Galilei 1564-1642)가 그것을 계승하여 발전시키기까지는 그 영향력이 별로 크지 않았다. ..(14) [코페르니쿠스를 통해 달 나라 다음 세계를 알았던 브루노(Giordano Bruno 1548-1600)는 로마 교황청에서 산채로 화형 당했다. 어찌 영향이 있겠는가! 그럼에도 갈릴레이를 1632년 종교재판에 회부하기까지 한다]
위에서 주로 이론과학에 대하여 서술했지만, 응용과학도 처음부터 중요한 비중을 갖고 등장한다. .. 갈릴레이나 레오나르도(da Vinci, 1452-1519)는 포병 기술이나 방어술 개선을 위한 사업을 정부에 건의하여 그 청부를 맡게 되었는데, 이때부터 전쟁에 있어서 과학자의 역할은 점점 커지기 시작하였다. 기계에 의한 생산을 발전시키는 데 있어서 그들의 역할이나 대중들의 증기나 전기 같은 것을 사용할 수 있게 하는 역할은 훨씬 나중의 일이며, 19세기 말에 와서 비로소 정치적인 영향을 주게 되었다. (15) [서구 문명에서 이슬람을 거쳐 종이의 도입 르네상스에서 화약의 도입은 문서의 우위와 약탈의 정복으로 방향을 잡는다. 속도가 붙은 것은 증기기관과 모터이고, 장시간 노동 수탈을 가능하게 한 것은 전기였다. (50PMI)] [기술문화에서 가장 중요한 “1444 <구텐베르크(Johannes Gutenberg 1397-1468)가 마인츠를 떠나서 스트라스부르에 있을 때 인쇄술을 발명하다.>”을 보태야 할 것이다.]
[교회 권위 쇠퇴]
교회 권위에서 해방은 개인주의를 대두하게 하였다. 이러한 경향이 극도에 이를 경우에 무정부주의로 떨어지게 되는 것이다. .. 그러므로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교권으로부터 해방은 도덕과 정치에서의 해방을 의미하는 것이다. (15) [러셀의 관점에서 무정부주의는 도덕과 정치가 해방되는 것을 의미하는가? 도덕과 정치를 인민 주권에서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모호하다.]
스콜라학자의 아리스토텔레스 논리학은, 편협한 것이기는 하였으나 일종의 정확성의 훈련은 되었다. .. 17세기가 되기까지 철학에는 중요하게 생각할 만한 것이 별로 없었다. 15세기 이탈리아의 도덕적, 정치적 무정부주의는 극도에 이르렀으며. 마침내 마키아벨리(Machiavelli 1469-1527)의 이론이 나왔다.(16) [군주론(Il Principe, 1513)(집필 1513, 1516년 마침, 출판 1531)]
종교개혁과 반(反)종교개혁(Counter Reformation)은 스페인에의 복종과 관련되어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장단점이 무엇인지를 뚜렷이 드러냈다. .. 그러나 [근대]현대철학은 대부분 개인주의적이고 주관주의적인 경향을 띠게 되었다. 이러한 경향은 특히 데카르트(Descartes, 1596-1650)에게 두드러져 보인다. (16) [주관주의의 등장은 인민의 자의식의 발현 중의 하나이다. 심층이 표면으로 나오려고 한다.]
이와 같은 주관적인 경향은 스피노자(Spinoza, 1632-1677)에게는 뚜렷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은 라이프니츠(Leibniz, 1646-1716)의 “창 없는 모나드”(Windowless monads)에서 다시 나타나게 된다. 로크(Locke, 1632-1704)는 부득이 주관주의적 학설을 세워 지식은 관념들의 합치와 불합치로 이루어진다고 하였다. / 버클리(Berkeley, 1685-1753)는 물질을 폐기한 후 신을 이용하여 완전한 주관주의에서 벗어날 수 있었지만 후세의 대부분의 철학자들이 이와 같이 신을 이용하는 것을 부당하게 여기고 있다. / 흄(Hume, 1711-1776)의 경험 철학은 일종의 회의주의에 종지부를 찍게 되는데, 이것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고 또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칸트(Kant, 1724-1804)와 피히테(Fichte, 1762-1814)는 그 기질이나 학설에 있어서 모두 주관주의적이다. 헤겔(Hegel, 1770-1831)은 스피노자의 영향으로 구출을 받고 있다. 루소(Rousseau, 1712-1778)나 낭만주의 운동은 인식론에서 윤리, 정치에 이르기까지 주관성을 확대시키고 있으며, 드디어 바쿠닌(Bakunin, 1814-1876)[프루동(Proudhon, 1809-1865)]과 같은 무정부주의자 출현하게 되었다. 이러한 극단적인 주관주의는 일종의 광적(狂的)인 형태라고 하겠다. (17) [럿셀의 근세 철학 관점인데, 주관주의의 대두에서 주관주의 광적이 형태까지 하는데, 철학적으로 보편성에서 일반성으로 그리고 구체성으로 나간다. // 주관주의에 두 갈래 있다. 하나는 파라노이아이고 다른 하나는 스키조이다. 전자는 기술에 의존하고 후자는 특이성에 연관있다.] [maladie maniaco-dépressive, 참조]
[과학의 발전] - [기술에서 쿠텐베르크]
그러나 기술이 준 힘은 사회적인 것이지 개인적인 것은 아니다. 무인도에 고립되면 17세기 사람보다 현대인이 어려움을 더 겼을 것이다. 그것은 현대인이 17세기 사람보다도 사회적인 힘에 더 많이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과학 기술은 많은 사람들이 단일한 지휘계통의 통솔을 받고 조직적으로 협력할 것을 요구한다. 그러므로 이런 경향은 무정부주의나 개인주의와 상반되는 것이다. (17) [공장제 기계 공업과 생산과정의 미분화에 따른 공정의 길이가 길어지는데서 온다. 그럼에도 교육과 의료, 학문과 예술은 공장제 과정과는 다른 세분화의 길을 간다. (50PMI)]
과학 기술의 영향을 받은 철학은 힘의 철학이 되어 모든 비인간적인 것은 다 가공되어야 할 원료로서 간주했다. 목적은 이미 고려되지 않고 오직 과정의 기술만이 가치를 인정받게 되었다. 이것은 역시 주관주의와 마찬가지로 현재적 광증의 한 형태라고 하겠다. 오늘날 이것은 가장 위험한 현상으로 이에 대한 유일한 해독제는 오직 건전한 철학이 나오는 것 뿐이다. (17-18) [일차대전 이후 나찌의 기술, 일제의 철강, 미국의 공황대처, 소련의 계획경제 등은 모두 기술에 의존하고 있다. 즉 주지주의가 넘쳐나는 시대에 프로이트의 강박관념과 신경증 그리고 정신병에 대한 분석이 유행하게 된다. / 주체의 광증은 스키조에 가깝고, 주지주의 광증은 파라노이아에 가깝다. 1차대전과 2차대전 사이의 국가주의는 파라노이아의 확장이며 자본주의든 사회주의든 국가 권력의 미세정치로 가는 과정이었다. 인간은 미분화된 절단된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 새로운 철학은 특이성이 제대로 실현될 수 있는 문화의 다양체로 나갈 것이다. 그리고 리좀의 확장으로 갈 것이다. (50PMI)
고대 세계의 무정부 상태는 [알렉산드리아를 거쳐서] 로마 제국의 건설로 인하여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그러나 로마 제국은 실질적인 힘을 소유하고 있었을 뿐 어떤 이념은 갖고 있지 않았다. 가톨릭사회는 교회 활동을 통하여 무정부 상태에서 벗어나려고 하였다. 이 교회는 한 이념 집단이기는 하였지만 충분히 사실로 구체화 되지 못했다. (18) [동로마 제국의 국가권력을 거의 무시하고 있다. 유럽이 아닌 것 같이 서술하고 있다.] -[노마드 세력이 황제권력보다 셀 경우이다]
사회질서는 단지 힘에 의해 이루어지고 이 힘도 일반 대중이 원한다기보다 힘의 의지를 대표하고 있는 것 같다. 만족할 만한 지속적인 사회 질서를 이루려면 오직 로마 제국의 견고성에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론의 이상주의를 결합하는 데서 이루어질 것이다. 이 일을 위해서는 하나의 새로운 철학이 필요할 것이다. (18) [러셀도 주지주의적 입장에서 상층의 성립에 무게를 두고 있다. 크리스트교에 대한 비판적 사고를 한다고 하지만 그래도 그가 크리스트교인임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러셀이 불교를 맛보았어야 할 것인데 말이다. (50PMI)] (3:35 50QLA)
제2장 이탈리아의 문예부흥 19
[[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시기에 도시국가들는 민주제를 실행한 것이 아니라 금권정치의 과두제를 시행하였다. 일부 학식과 재력있는 평민들의 옹호로 민주적인 것 같지만, 그런 경우는 그리스적 표현으로 과두제 또는 요즘표현으로 관료제에 가까울 것 같다. 십자군 이후로 초기 자본주의의 발달로 신흥 부르주아의 형성기가 아닌가, 그럼에도 각 공국에는 부유한 가문들이 지배한 점에서 금권정치 이다. 특별한 것은 이 가문들 중에 학문적으로 고전을 숭상하여 그리스 인문학이 다시 태어난다는 점이다. (50QLE)]]
중세기와 다른 현대는 이탈리아에서 일어난 르네상스(Renaissance) 운동을 통해서 시작되었다. 이 움직임은 처음에는 페트라르카(Petrarca, 1304-1374)를 비롯한 몇몇 개인에 한정되어 있었지만 ... /.. 레오나르도(da Vinci, 1452-1519)를 비롯한 몇 사람을 제외하면 대체로 과학을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19)
이탈리아의 르네상스를 이해하려면 먼저 이탈리아의 정치 정체를 간단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1250년에 프리드리히2세(Friedrich II. 1194-1250)가 죽은 후 이탈리아는 1494년에 프랑스 왕 샤를 8세(Charles VIII, 1470-1498)가 쳐들어오기까지는 외국의 건섭을 받지 않았다. 이탈리아에는 중요한 나라가 다섯 있었다. 밀라노, 베니스, 플로렌스, 교황령, 나폴리가 그것이다. .. 제노아는 1378년 이르기까지 상업과 해상 세력에 있어서 베니스와 동등하였다. 그러나 제노아는 1378년 이후에 밀라노 영주에게 예속되었다. (19-20)
밀라노는 ... 비스콘티 가문(Visconti)의 권세에 들어가게 되었다. 비스콘티 가문의 세력은 봉건적인 것이 아니고 금권에 의한 것이었다. 그들을 1277년부터 1447년에 이르는 170년 동안 통치했다. (20)
그 후 3년 동안 공화주의 정부가 들어선 후에 다시 새로운 스포르자 가문(the Sforza, fr. La famiglia Sforza)이 정부를 차지하게 되었으며 ... 밀라노는 1494년부터 1535년에 이르는 동안 프랑스와 스페인 사람들 사이의 싸움터가 되었다. .. 1535년에 밀라노는 [신성로마] 황제 찰스 5세(Charles de Habsbourg dit Charles Quint, 1500-1558)에 의해 병합되었다. (20)
베니스 공화국은 어느 정도 이탈리아 통치에서 벗어나 있었다. 특히 초기의 전성기 몇 세기 동안이 그러하다. 베니스는 야만인들의 침입도 받지 않았다. .. 이러한 상태는 1545년 트렌트 회의(le concile de Trente, Concilium Tridentinum, 1545-1563) 때까지 계속되었다. 파올로 사르피(Paolo Sarpi, 1552-1623)라는 베니스인은 이 회의에 대하여 교황과 대립되는 입장에서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20)
우리는 제4차 십자군 원정[IV, 1202-1204] 때에 베니스가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을 볼 수 있었다. 이 콘스탄티노플 점령은 베니스인들의 통상을 개선시켜 주었지만[상권을 차지했지만], 1453년에 터키인의 콘스탄티노플 정복으로 말미암아 큰 타격을 입었다. .. [베니스는] 1509년에 본토의 강국들 사이에 캄브라이(Cambrai)동맹을 맺는다. 이 때문에 베니스는 패배하게 되었다. (20-21) [눈앞의 이익을 추구하다 더 큰 손실을 입었다. 소탐대실(小貪大失). 그보다 중요한 것은 오스만제국의 이스탄불 점령으로 회교권이 동서 무역에서 무역권의 중심으로 떠올랐다. 크리스트교인은 다른 길을 찾아 나설 수밖에 없다. 그것이 대서양 항로 개척이다. / 벩송은 이 사건(1453)으로 향신료(특히 생강)의 소통이 막혔다고 했다. 인민은 흐른다. (50QKD)]
베니스의 헌법은 본래는 민주주의적인 것이었지만, 점차 비민주주의적으로 변하였으며, 1297년 이후는 거의 과두정치가 되었다. ... 행정권은 대의회에서 선출하는 10인 회의에 일임되어 있었다. 이 나라의 의전장인 도지(Doge) 가문은 종신직이 되었다. .. 외교는 빈틈이 없었다. 베니스의 대사들의 보고서는 랑케(Ranke, 1795–1886)이후 역사들에게 중요한 자료의 근원이 되어 왔다. (21)
플로렌스(Firenze, fr. Florence, en Florence)는 세계에서 가장 개화된 도시이며 르네상스의 중요한 본거지였다. 예술에 있어서 위대한 이름들은 초기나 후기를 막론하고 모두 플로렌스와 관련되어 있다. (21)
정치면[에서] .. 13세기에 플로렌스에는 서로 투쟁을 일삼는 세 계급이 있었다. 하나는 귀족 계급이요, 다른 하나는 부유한 상인이며, 또 하나는 평민계급이다. 귀족들은 주로 기벨린(Ghibelline)당이었으며, 그밖의 두 계급은 겔프(Guelf)이었다. 기벨린당은 1266년[프랑스의 점령으로] 패배들 당하여 14세기 동안은 평민당이 부호 상인을 압도하게 되었다. ... 메디치 가문 .. 코시모 데이 메디치(Cocimo dei Medici, 1389-1464) ... 손자 로렌초 마그니피센트(Lorenzo the magnificent, 1449-1492)가 그의 뒤를 이어 1469년부터 1492년까지 권력을 잡았다. 그들 모두 금력으로 그 지위를 얻게 되었으며, ... (21-22)
로렌초의 아들 피에트로(Pietro)는 아버지의 장점을 갖고 있지 못하였으므로 1494년에 추방당하였다. 그 후 4년 동안 사보나롤라(Savonarola, 1452-1498)의 치하에서 일종의 청교도적인 부흥 운동이 일어났다. .. 끝내는 .. 적이 승리를 거두었으며 사보나롤라는 화형 당했다(1498). 플로렌스 공화국은 그 제도에 있어서는 민주주의를 지향하였지만, 실재에 있어서는 금권정치에 지나지 않았다. 이 공화국은 1512년까지 존속되었으며, 메디치 가문이 정권을 회복하였다. .. 메디치 가문은 투스카나의 대공이라는 칭호로 1737년까지 플로렌스를 통치하였다. (22)
교황의 세속적인 권력은 「콘스탄티누스의 증여」라고 불리는 위조문서에 그 기원을 두는데, 이것은 문예부흥의 시기 동안에 더욱 증대되었다. .. 총회에서 교회의 주권을 잡으려는 운동은 교황 유게니우스 4세(Eugenius IV, 1383-1447, 재위: 1431-1447)와 바젤 회의 사이에 알력을 일으키게 되는데 .. (23) [교황권과 왕권을 중국 고대 춘추 전국시대와 비교해보면 교권은 천자를 꿈꾸는 것 같고 왕권은 중원의 패권을 실질적으로 가지고자 하는 것 같다. (50QLE)]
니콜라우스 5세(Nicolas V, 1398-1455)(1447-1455)는 첫째 인문주의 교황이었으며, .. 에피쿠로스 학파의 학도인 로렌초 발라(Lorenzo Valla, 1407–1457)는 「콘스탄티누스의 증여」가 위조문서임을 증명한 자로서 .. 교황의 고문이 되었다. (23) [이 두 이야기는 제2부 스콜라 철학, 제7장 암흑시대의 교황권(p. 585)에서 나온 이야기이다]
알렉산더 6세(Alexandre VI, 1431-1503)(재위 1492-1503)는 교황으로서 자신과 그의 가족을 강대하게 만드는데 전력을 기울였다. 그에게 두 아들, 즉 간디아 공(Duke of Gandia, 1474/1476–1497)와 카이사르 보르기아(Caesar Borgia, 1475/1476-1507) .. 간디아 공은 암살당하고 말았다. 아마도 그의 동생이 암살했을 것이다. (23)
알렉산더 6세의 후임으로는 율리우스 2세(Jules II, en lat. Julius II, 1443-1513, 재위: 1503-1513)가 들어서게 되는데 그도 경건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전 교황보다는 추문이 적었다. ...그의 후계자인 레오 10세(lat. Leo X, 1475-1521, 재위: 1513-1521) 때에 일어난 종교 개혁은 르네상스 때의 교황들의 이단 정책에서 비롯되는 필연적인 결과이다. (24) [러셀은 왜 면죄부 판매에 대한 이야기를 빼고, 그냥 경건하지 못하였다고 했을까? 베드로 성당 기금 마련 정도로만 생각했을까? (50QKD)]
이탈리아의 남단에는 나폴리 왕국이 자리 잡고 있었다. 시실리는 이 왕국에 연합되어 있었다. 나폴리와 시실리는 [신성로마] 황제 프레데릭 2세(Friedrich II. 1194-1250)의 특별한 개인적인 왕국이었다. .. 1250년 그가 죽은 후 그의 아들인 만프레드((Manfred, 1232–1266, 시실리왕 1258-1266)에게 상속되었다. .. 1266년에 프랑스에게 점령당했다. / 프랑스 인들은 그곳에서 전혀 인기를 얻지 못하였다. 1282년에 그들은 시실리의 대학살 사건 때 전멸되었으며, 그 후 이 왕국은 아라곤의 피터 3세(the King of Aragon, as Peter III, 1239–1285)와 그의 상속자들의 손에 들어가게 되었다. ... 복잡한 과정을 거쳐 .. 알폰소(Alfonso the Magnanimous, 1396–1458)가 1443년에 통일하였다. (24)
1495년 이후에 프랑스의 세 왕은 대대로 나폴리를 정복하려고 하였지만, 1502년 결국 이 왕국은 아라곤의 페르디난드(Ferdinand II, esp. Fernando II, 1452–1516)의 손에 정복되었다. 프랑스의 샤를 8세(Charles VIII, 1470–1498, 재위 1483-1498), 루이 12세(Louis XII, 1462-1515, 재위 1498-1515), 프랑수와 1세(François 1er, 1494-1547, 재위 1515-1547) 등 프랑스 왕들은 모두 부당하게 밀라노와 나폴리를 요구하였으며 이탈리아를 침략하였다. .. 클레멘트 7세(Clement VII, 1478-1534, 재위 1523-1534)는 반종교개혁운동에 장애가 되었으며, 또한 프랑스의 친구이며 한편 메디치 가문의 한 사람인 카를로스 5세(Charles V, esp. Carlos V, 1500–1558)는 1527년 신교의 군대로 하여금 대규모로 로마에 침입하게 하였다. .../ 이탈리아에 있어 권력 정치의 게임(game)은 상상 외로 복잡하였다. (25)
1494년에 프랑스[샤를 8세]가 침략해 들어오기 전까지는 거의 피를 흘리지 않은 싸움이었다. 왜냐하면 군인들은 용병(傭兵)이었으며... / .. 프랑스가 침입해 들어오자 .. 프랑스 군대가 전쟁에서 사람을 죽이는 것을 보고 몹시 놀랐다. .. [게다가] 그들의 내분(內分)에 프랑스와 스페인의 군대를 끌어들여 더욱 비참하게 되고... 그리하여 이탈리아는 더욱 황폐해졌다. (25-26)
[소결론]
르네상스는 철학에 있어서 일대 비약을 한 시기라고 볼 수는 없지만 17세기의 위대한 업적을 남기기 위한 전초적인 역할을 하였다. 첫째로 르네상스는 낡은 스콜라철학의 체계를 무너뜨렸다. ... / .. 그리고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종래와는 달리 지적인 활동을 즐거운 사회적인 모험으로 보게 된 것이다. .. 수도원 안에서 명상을 지적활동으로 보았지만 문예부흥기에 들어와서는 이것은 사회적인 활동과 분리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26)
스콜라 철학에서 플라톤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위치에 들어설 수 있도록 특별한 자극을 준 것은 비잔티움 학자들이었다. 동서 교회를 형식적으로나마 통합시킨 페라라 공의회(le Concile de Ferrare 1438) 때, 이미 비잔티움인들은 플라톤이 아리스토텔레스보다 더 중요하다는 논쟁을 벌인 일이 있었다. 동부 정통파[오르소독스]의 한 대표이며 열렬한 그리스의 플라톤주의자인 플레톤(Georges Gémiste, dit Pléthon, Γεώργιος Γεμιστός, Πλήθων, 1355 /1360경-1452)은 이탈리아에서 플라톤주의를 발전시키는 데 특히 많은 공헌을 하였다. 주교이며 그리스인인 베사리온(Bessarion, 1403-1472)도 플레톤과 함께 많은 공헌을 하였다. 코시모(Cosimo)와 로렌초 데이 메디치(Lorenzo dei Medici)는 플라톤 연구에 열중 하였으며, (26) [돈오(頓悟)가 일반인에게 점수(漸修)보다 매력이다. 그러나 리좀에겐 점수가 더 중요하다. 과정을 거치면서 실천과 사색을 통해 확장되고, 새로운 되기(생성)이 있다.(50QKI) ]
르네상스는 결코 대중적인 운동은 아니었다. ... 메디치 가문이나 휴머니스트 교황들의 후원을 받아 더욱 활발하게 진행된 것이다. ... / 14세기 보카치오(Boccaccio, 1313-1375)도 정신적으로는 문예부흥에 속하였지만, 그 시대의 정치적 조건으로 말미암아 15세기 휴머니스트들보다 직접적인 영향을 그다지 많이 주지 못하였다. (27) [이탈리아 르네상스에서 인민은 심층으로서 잠수 중이다]
르네상스기의 교회에 대한 학자들의 태도를 단순하게 묘사하기는 어렵다. 그들 중에는 공공연하게 자유사상가로 자처하는 자들도 있었다. .. 1529년 역사가인 기치아르디니(Francesco Guicciardini, 1483-1540)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 “성직자들의 야심이나 탐욕이나 방종에 대해 나는 혐오를 느낀다. .. 더구나 그들이 행하는 여러 가지 악이 부당하기 짝이 없은데 한 사람이 그처럼 교묘하게 여러 가지 악을 행하고 있는 것을 볼 때 증오심이 치밀어 오른다. 그러나 이와 같은 모순 속에서도 교황들 앞에서의 나의 지위 때문에 단지 나 자신의 이익 때문에 그들이 더욱 강대해지기를 나는 바라고 있는 것이 이런 이유만 없다면 나는 마르틴 루터(1483-1546)[1517, 95개 조항을 걸다]를 오히려 나 자신처럼 사랑하였을 것이다. ..”
도덕분야를 제외 하면 르네상스가 가져다준 공적은 적지 않다. 건축과 회화 그리고 시(詩) 등 여러 분야 ... 레오나르도(Leonardo da Vinci, 1452-1519), 미켈란젤로(Michelangelo, 1475-1564), 마키아벨리(Niccolo Machiavelli 1469-1527) 등 .. 중세의 편협한 문화의 사슬에서 해방시켜 주었다. (29)
문예부흥기의 정치적 상황은 개인적인 발전은 가능했지만 비교적 불안정한 상태였다. 이와 같은 불안정과 개인주의는 언제나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고대 그리스에서도 문화적인 업적이 이와같은 혼란기에 많이 산출되었다. 안정된 사회질서는 언제나 필요하지만, 오늘날까지 그 양자(兩者)가 함께 존립하는 사회는 보지 못하였다. 사회적인 안정이 유지될 때에 흔히 개인의 자유나 예술적이고 지적인 발전이 억압된다. (30) [신민(le sujet, 신하)이 예속에서 벗어나 스스로 자의식을 갖는 주체(le sujet)가 되기위해서는 르네상스에서 고전 문헌에 대한 습득이외에, 종교개혁도 필요하고,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과학의 발달로 천동설에서 지동설로 이행이 필요하다. 이 이행에서 철학의 순교자 브루노가 등장할 것이다.(50QKD)]
(9:9, 50QKD) (9:12, 50QLA) (9:24, QLE)
*** 참조:
1407 로렌쪼 발라(Lorenzo Valla, Laurentius Valla, fr. Laurent Valla, 1407–1457) 이탈리아 휴머니스트, 문헌학자, 논쟁가. 「콘스탄티누스의 증여(Donation de Constantin」에 이의제기. 자유의지에 관하여(Du libre arbitre 1439
14?? 피에르안젤로 만졸리(Pier-Angelo Manzolli, Marcellus Palingenius Stellatus, 15세기) 르네상스 시대의 의사, 시인, 철학자. 삶의 12궁(Der Zodiacus des Lebens, 원: Zodiacus Vitae)
1433 피치노/ 피생(Marsilio Ficino, fr. Marsile Ficin, en latin Marsilius Ficinus, en italien, 1433- 1499) 이탈리아 시인 철학자.
1449 로렌쪼(Lorenzo di Piero de'Medici, 1449-1492; Laurent de Médici) 정치가. 그는 1469년 오르시니(Clarisse Orsini)와 결혼하여 8명을 낳았고 그 중에 첫째 류크레스(Lucrece de Medicis 1470-1553), 셋째 (Pierre II de Medicis 1472 1503 Seigneur de Florence), 다섯째는 교황(Jean de Medicis 1475 1521 Cardinal, puis pape Leon X)이 되었고, 여덟째(Julien de Medicis 1479 1516 Duc de Nemours)가 있다.
1452 지롤라모 사보나롤라(Girolamo Savonarola, 1452-1498) 이탈리아의 도미니크회의 수도사이자 종교 개혁가이다. 민주정치와 신재정치(神裁政治)를 혼합한 헌법으로 피렌체를 통치하려 했으나 교회 내부개혁에 과격한 방법을 취함으로써 크게 반감을 샀다.
1453 5월 29일 동로마제국의 멸망.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술탄 메메드 2세(Mehmed II : 재위 1444~1446, 1451~1481)에 의해 콘스탄티노플이 점령당한 시점이라는 견해가 가장 우세하다.
1463 피코 델라 미란돌라(Jean Pic de la Mirandole, Giovanni Pico Della Mirandola 1463-1494) 피코 델라 미란돌라는 이탈리아 사상가이다.
1469 마키아벨리(Nicolas Machiavel, it Niccolo Machiavelli 1469-1527) 르네상스기 이탈리아의 작가․정치가․정치이론가. 군주론(Il principe)은 목적만 정당하다면 수단은 아무래도 상관이 없다는 권모술수주의로 인식되어 오랫동안 비난을 받아왔으나 정․교 분리의 주장과 함께 권력현실에 대한 객관적인 분석이 행해지고 있는 점에서 근대 정치학의 초석으로 평가되고 있다. (→ 〈군주론〉)
1471 메디치가의 피에르2세(Pierre II de Medicis 1471-1503) 로렌쪼(Laurent de Médicis, dit le Magnifique 1449-1492)와 오르시니(Clarisse Orsini)의 아들, 교황 레오 10세(pape Léon X 1475-1521, Leo X 재위1513-1521)의 형이다.
1473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 (Nicolaus Copernicus 1473-1543) 폴란드의 천문학자. 학력파도바대학교 의학과, 경력1520년 프라우엔부르크 대교구장, 1516년 알렌슈타인교회 평의원, 1516년 엘름란드교구 회계감사역
1475 세자르 보르지아(César Borgia, dit Le Valentinois, it. Il Valentino, 1475-1507) 그는 교황 알렉산드르 6세(Alexandre VI, d'origine espagnole, 1431-1503, 재위 1492-1503)의 아들이며, 류크레스 보르지아(Lucrèce Borgia, 1480-1519)의 오빠이다. ,
1476 죠반니 보르지아(Giovanni Borgia, Juan Borgia, 1476-1497) 세자르 동생이지만 적자이다. 암살당하다.
1483 기치아르디니(Francesco Guicciardini, fr. François Guichardin, 1483-1540) 이탈리아 역사가, 철학자, 16세기 플로랑스의 외교관.. Storie fiorentine (de 1378 à 1509), Considerazioni sui Discorsi del Machiavelli, (1527 - 15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