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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광주정씨 화이팅 원문보기 글쓴이: 정철중(23세)
고려·조선 시대 부(父)나 조부(祖父)가 관직생활을 했거나 국가에 공훈을 세웠을 경우에 그 자손을 과거에 의하지 않고 특별히 서용하는 제도 |
문음(文蔭)·남행(南行)·백골남행(白骨南行)·음사(蔭仕)·음직(蔭職)이라고도 한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걸쳐 관리들을 선발하는 제도로 과거제도가 있었으나, 일단 관인층을 형성한 자들은 그들의 지위를 자손대대로 계승하려는 욕구를 가지고 있었으며, 이러한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부분적으로나마 관직을 세습할 수 있도록 만든 제도였다.
997년(고려 목종 즉위)에 문무관 5품 이상관의 아들에게 음직을 주도록 하는 음서제가 최초로 생겨났으며, 1049년(문종 3)에는 전시(田柴)를 지급하는 공음전(功蔭田)의 제도가 마련되면서 고려의 문벌귀족사회를 형성하는 토대가 마련되었다. 음서의 범위는 고려시대에는 5품 이상의 관직을 지낸 관리의 자제를 그 대상으로 하였으나, 조선시대에 이르면 그 범위를 축소시키고 있다. 즉 《경국대전》의 이전(吏典) 〈음자제조(蔭子弟條)〉에 의하면 음직제수의 범위를 공신이나 2품 이상관의 자(子)·손(孫)·서(壻)·제(弟)·질(姪), 실직(實職) 3품관의 자손으로 제한하여, 실력에 의한 선발 시험인 과거의 비중을 높였다. 그러나 음서는 혈통을 중시하는 신분제사회의 속성을 띠면서, 실력을 중시하는 관료제사회의 속성을 대표하는 과거와 함께 조선 양반관료사회를 형성하는 하나의 축으로 기능하였다.
음서에 의해 선발된 관리들을 음관이라고 하는데, 원칙적으로 장자(長子)만이 받을 수 있었으나, 장자가 유고인 경우에는 장손이나 차자가 감등하여 음직을 받을 수 있었다. 음관을 제수받는 연령은 만 18세 이상으로 규정되어 있었으나 실제로는 15세를 전후하여 관직에 등용되었으며, 부와 조부의 정치적 배경에 따라 승진 속도에 차이를 보이기도 하였다. 음서제도는 혈통을 중시하는 문벌주의(門閥主義)가 여전히 명맥을 유지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음서제의 범위와 역할은 고려와 조선사회의 성격을 비교하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두산백과)
□ 음직(蔭職) 범위
ㅇ 범위 : 문과나 무과급제로 기록되지 않은 출사인 또는 음서인
ㅇ 사실의 진위가 문제되는 기록은 공적 확인과정을 거쳐 바로잡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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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운 장군은 고려사에 기록되었듯이 향후, 족보에 별편으로라도 광주정씨로 편입하여야 한다.
< 1361년(공민왕10년) 정세운 장군의 홍건적 토벌과 죽음 >
공민왕은 개경을 떠난지 20일만에 복주(福州)에 이르러 행재소(行在所)를 차리고 개경을 탈환하기 위한 본격적인 반격작전을 구상하였다. 이때 임금을 호종하던 정세운(鄭世雲)은 홍건적을 물리칠 방책을 강구하라는 공민왕의 말에 머뭇거리는 신하들의 모습을 보고 분통을 터뜨리며 임금에게 이렇게 건의하였다.
"빨리 애통교서(哀痛敎書)를 내리시어 백성의 마음을 위로하고, 사자(使者)를 보내 여러 도의 군사를 독려하여 적을 토벌하게 하소서."
공민왕은 정세운에게 애통교서와 절월(節鉞)을 주어 의병을 모집하도록 했다. 정세운은 총병관(摠兵官)으로 임명되어 각지에 흩어져 있는 군사를 모으고 벼슬아치들을 독려하여 전의를 불태웠다. 특히 흩어져 있던 서경의 군사 1만명을 개경 부근으로 불러 모았다. 이러한 노력으로 도합 20만명의 대병력이 규합되어 홍건적에 대한 반격태세를 갖추게 되었다. 1362년 정월 17일, 마침내 정세운(鄭世雲)은 안우(安祐), 이방실(李芳實), 최영(崔瑩), 김득배(金得培), 한방신(韓方信), 이여경(李餘慶) 등과 함께 20만명의 고려군을 지휘하여 경성(京城)을 완전 포위하였다. 고려군은 먼저 숭인문(崇仁門)을 공격했는데, 박강(朴强)이라는 군졸이 판자를 지고 나가 사다리를 만들어 타고 홍건적이 성 위에 만들어 놓은 채 위로 올라가 적의 감시병들을 칼로 베어 죽이자 다른 군사들이 뒤따라 쳐들어가서 채의 문을 부수었다. 이것을 신호로 고려군이 성 안으로 쳐들어가서 홍건적을 공격했다. 이때 한방신의 부장으로 참전한 이성계(李成桂)가 동계(東界)의 기병들을 거느리고 돌격하여 홍건적의 괴수 사유(沙劉)와 관선생(關先生)을 참살하는 등 눈부신 활약을 펼쳤다. 이 기세를 타고 고려군이 세찬 공격을 퍼붓자 홍건적은 맥없이 쓰러졌다.
일선에서 전투를 지휘하던 정세운이 "궁지에 몰린 쥐도 발등을 무는 수가 있다. 궁한 도둑을 모두 잡을 수는 없다."고 말하며 동쪽의 숭인문과 탄현문을 열라고 명령을 내려 적군이 도망갈 길을 열어주었다. 홍건적의 남은 무리가 열린 문으로 달아나자 고려군은 적당히 추격하다가 멈추었다. 이 전투에서 홍건적은 무려 10만명이나 되는 군사가 몰살되었으니 총병력을 20만으로 보면 반수가 죽은 셈이다.
정세운의 뛰어난 지도력과 필승의 의지로 홍건적을 격퇴시킨 고려군은 성안에서 원나라 황제의 옥새 2개를 비롯하여 수많은 보배와 인장 등을 노획하였다. 고려가 현종(顯宗) 때인 1018년 제3차 요여전쟁(遼麗戰爭)에서 강감찬(姜邯贊), 강민첨(姜民瞻) 등의 전공(戰功)으로 소배압(蕭排押)이 이끄는 요나라의 침략군 10만명을 구주대첩(龜州大捷)으로 궤멸시킨 이래 240여년 만에 외침(外侵)을 물리치는 승전(勝戰)을 거둔 것이다. 그러나 이토록 역사에 길이 남을 훌륭한 전공(戰功)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홍건적과의 전쟁에서 아무런 공로도 세우지 못해 공민왕의 눈 밖에 난 김용(金鏞)은 정세운에 대한 개인적 감정과 시기심으로 그를 제거하는 음모를 꾸몄다. 김용은 국왕의 교지를 거짓으로 꾸며 안우(安祐), 이방실(李芳實), 김득배(金得培)에게 보내 정세운이 장차 역모를 꿈꾸고 있으니 그를 죽이라고 일렀다.
안우는 김득배의 반대를 무릅쓰고 정세운을 죽이기로 결정한 후 정세운의 처소로 가서 그를 칼로 베어 죽였다. 복주를 떠나 개경으로 돌아오는 길에 상주에 머무르고 있던 공민왕은 정세운이 살해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분노하여 사자를 보내 안우를 죽이게 하였다. 그리고 김용이 국왕의 교지를 받아내 이방실과 김득배 마저 죽였다. 군부는 복잡한 내외정세를 겪으면서도 이렇게 분열상을 보였고, 공민왕은 제때에 효과적으로 수습하지 못하였다. 김용은 원나라의 기 황후를 섬기던 최유(崔濡)가 공민왕을 폐립하고 덕흥군(德興君)을 옹립하려는 음모에 가담하여 흥왕사(興王寺)에 머무르고 있던 공민왕을 습격해 죽이려고 하였으나 내관(內官) 안도치(安都峙)가 국왕을 가장해 대신 김용 일당에게 죽임을 당했으며, 김한룡(金漢龍), 홍언박(洪彦博) 등도 이때 살해되었다. 그러나 최영(崔瑩), 안우경(安遇慶), 김장수(金長壽)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달려와 반란을 진압하고 김용을 체포했다. 김용은 밀성(密城)으로 귀양갔다가 계림부(鷄林府)로 옮겨진 뒤 유배지에서 처형되었다. 강감찬(姜邯贊) 장군에 버금가는 전공(戰功)을 세웠으나 역신(逆臣) 김용(金鏞)의 음모로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일세의 영웅이자 비운의 무장인 정세운(鄭世雲) 장군은 그 비참한 최후만큼이나 후세에 남겨진 개인적 기록이 거의 없어 안타까움을 느끼게 한다.
난세에 뛰어난 능력을 지녔고 존경을 받을만한 인품과 절개를 겸비한 영웅이 나타나면 그 영웅을 시기하여 해치려고 하는 소인배가 함께 등장하는 것은 역사의 법칙인가, 세상의 이치인가? 광산 출신인 정세운 장군은 광주정씨 가문의 시조로서 무량(武略)에 뛰어났으나 문장(文章)에도 능하여 많은 유집(遺集)을 남겼다고 전하나 현재까지 전해지는 것은 없다고 한다.(이영민 2010.04.13.)
세 | 파 | 인 명(자, 호) | 이력, 주요 직책 |
- | - | 정세운(鄭世雲) ( ? ~ 1361) 무후(无后) | - 공민왕 숙위(宿衛) 원(元)나라 호종, 대호군(大護軍) 1351년(공민왕 즉위) 호종 1등 공신, 이후 군부판서(軍簿判書),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 기철(奇轍)을 처단한 공을 인정받아 1등 공신 1359년(공민왕 8년) 홍건적 침입, 서북면도순찰사(西北面都巡察使), 참지정사(參知政事, 종2품) 1361년(공민왕10년) 홍건적 재침 개경함락, 복주(안동)피난 추밀(樞密) 겸 응양군(鷹揚軍) 상장군(上將軍) 호종, 총병관(摠兵官)으로 홍건적토벌 출정 시, 중서평장사(中書平章事)로 승진(이상(二相)과 삼재(三宰)의 중간) 1361년(공민왕10년) 애통교서(哀痛敎書)와 절월(節鉞)을 받아 의병모집, 개경수복 후 김용, 안우 등에게 피살, 첨의정승(僉議政丞) 추증 예장(禮葬), 1등 공신 1362년(공민왕12년) 김용(金鏞) 처형 <자료 : 고려사> |
1 | 시조 | 정신호(鄭臣扈) ( ? ~ 1378) | 봉은사 진전직(奉恩寺 眞展直), 상호군(上護軍)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판판도사사(判版圖司事) 추증(追贈) * 1376 대사헌(大司憲), 1378년 졸(卒) <출전 여사(麗史)> |
3 | Ⅲ판서 | 정구당(鄭九塘) | 감사(監司) 증 판서(贈 判書) |
4 | Ⅱ동백 | 정지하(鄭之夏) | 태종14년(1414년) 생원, 학행(學行)으로 사헌부장령(掌令) 세조원년 좌익공신(佐翼功臣) 증 이조참의(贈 吏曹參議) |
5 | Ⅰ완백 | 정이효(鄭以孝) | 광주교수(光州敎授) * 무후(无后) |
5 | Ⅰ완백 | 정이량(鄭以良) | 감찰(監察) |
5 | Ⅱ동백 | 정조우(鄭祖禹) | 생원(生員) 용양위부사직(龍驤衛副司直) 문장으로 이름 높아 「동문선」에 실림 文章鳴世 載「東文選」 |
5 | Ⅱ동백 | 정종우(鄭祖禹) 농암(籠岩) | 생원(生員) 백천군수(白川郡守) |
5 | Ⅱ동백 | 정계우(鄭繼禹) | 진사(進士) 증 승정원좌승지(贈 承政院左承旨) |
5 | Ⅱ동백 | 정찬우(鄭纘禹) 정중(正仲) | 통훈대부 청도군수(通訓大夫 淸道郡守) 증 의정부좌찬성(贈 議政府左贊成) |
6 | Ⅰ완백 | 정철(鄭㬚) | 사재감주부(司宰監主簿) |
6 | Ⅰ완백 | 정질(鄭晊) 일지(日至) 동덕재(東德齋) (1426~1487) | 생원(生員), 1467년 참봉(參奉) 1471년 병조정랑(兵曹正郞) 아들 응종(應鍾)이 고관되어 숭록대부 의정부좌찬성에 추증되었다(贈 崇祿大夫 議政府左贊成). 문헌록에 실렸다
문장 행의가 뛰어나 사람들이 존경했다(文章行誼爲時推重) |
6 | Ⅱ동백 | 정승순(鄭承順) | 수의부위(修義副尉), 종부시주부(宗簿寺主簿) |
6 | Ⅱ동백 | 정옥(鄭沃) | 진사(進士) 예빈시부정(禮賓寺副正),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 증 이조참판 성균관제주(贈 吏曹參判 成均館祭酒) |
6 | Ⅱ동백 | 정윤공(鄭允功) | 생원(生員) 상의원판관(尙衣院判官) |
6 | Ⅱ동백 | 정윤적(鄭允績) | 증 이조참판(贈 吏曹參判) |
6 | Ⅱ동백 | 정순인(鄭純仁) 덕로(德老) | 1448년 진사(進士) 내섬시참봉(內贍寺參奉) 통훈대부 아산현감(通訓大夫 牙山縣監) 증 승정원좌승지(贈 承政院左承旨) |
6 | Ⅱ동백 | 정후인(鄭厚仁) 덕원(德元) | 도사(都事) |
6 | Ⅲ판서 | 정처함(鄭處咸) | 주부(主簿) |
6 | Ⅲ판서 | 정처인(鄭處仁) | 음 승지(蔭 承旨) |
6 | Ⅲ판서 | 정림(鄭琳) | 용안현감(龍安縣監) |
7 | Ⅰ완백 | 정참동(鄭參仝) | 용양위부사맹(龍驤衛副司猛) |
7 | Ⅰ완백 | 정응종(鄭應鍾) 자행(子行) 퇴은재(退隱齋) (1457~1523) | 경연일강관(經筵日講官),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 예조참판(禮曹參判), 예조판서(禮曹判書), 진향사(進香使)
연산정란으로 나주 흥룡동 고향집으로 물러나 자연을 벗 삼아 지냈다. 시를 짓기를 “속세 떠난 가난한 늙은이, 부귀란 뜬 구름이로구나” 「문헌록」과 「금성지」에 행적이 실렸다
燕山政亂退居于羅州興龍洞故庄 悠然自適 有詩曰 “江湖窮白首 富貴付浮雲” 見「文獻錄」及「錦城誌」
< 용진산 공의 묘지 쟁송사건>
이 묘는 심가와 여러 해 쟁송을 벌였는데 임금이 듣게 되었다. 영조께서 글로 지어 말씀하시기를 “용진산 남쪽 숲은 한줌의 흙이라도 정가네 것인데, 정가네 묘인지 심가네 묘인지 남자의 묘인지 여자의 묘인지를 알지 못한다. 심가네가 용진산 남쪽 삼불악 위의 자좌 오향의 묘를 자기네 것이라 말하는데, 용진산 남쪽의 하고 많은 묘지 중에 하필 주인 있는 묘를 자기네 것이라고 말하는가? 말이 이치가 아님에 가깝고 사안이 심히 사리에 어긋나니 ”8개 고개 9개 계곡(용진산의 한 뼘 땅이라도 비유)“의 풀 한포기 나무 한 그루도 정가가 아니면 벨 수 없다” 하였다
此墓與沈氏爭訟累年 至于天聽 英祖御製曰 “以湧珍山南麓一杯土爲鄭爲沈爲南爲女未詳孰是 鄭哥世世繼葬 沈哥以湧珍山南麓 三佛岳上子坐午向謂渠之塚 湧珍山南麓許多塚中 何必指有主塚而謂渠之塚乎 語近不理事甚駭悖 八嶝九谷一草一木 無非鄭哥禁養事 |
7 | Ⅱ동백 | 정자걸(鄭自傑) | 충순위(忠順衛) 건원릉참봉(健元陵參奉) 녹정국원종훈(錄 靖國原從勳)
* 건원릉(健元陵) : 경기도(京畿道) 구리시(九里市)에 있는 조선(朝鮮) 태조(太祖)의 능(陵). 현재(現在) 이곳에는 조선(朝鮮) 왕가(王家)의 능(陵)이 아홉 있으므로 동구릉(東九陵)이라고 부름 * 정국원종훈(靖國原從勳) : 1506년 제10대 왕 연산군을 몰아내고 이복동생인 진성대군(晉城大君:중종)을 왕으로 추대한 사건의 공신 |
7 | Ⅱ동백 | 정명덕(鄭明德) | 부사직(副司直) |
7 | Ⅱ동백 | 정달덕(鄭達德) | 생원(生員), 현감(縣監) |
7 | Ⅱ동백 | 정대덕(鄭大德) 생지(生之) | 1496년 진사(進士), 상원군수(祥原郡守) 증 승정원좌승지(贈 承政院左承旨) |
7 | Ⅱ동백 | 정준덕(鄭峻德) | 참봉(參奉) |
7 | Ⅱ동백 | 정자지(鄭自芝) 국문(國聞) | 첨정(僉正) 음악에 밝았다(曉律呂), 추강냉화에 실림(見秋江冷話)
* 추강냉화(秋江冷話) 조선 성종 때 남효온(南孝溫)이 시화(詩話)·일사(逸事) 들을 모아 엮은 한문 수필집. 66편의 이야기들로 조기종(趙起宗)·안응세(安應世)·고순(高淳)·홍유손(洪裕孫)·김시습(金時習)·김수온(金守溫)·권안(權晏)·이계기(李啓基)·김종직(金宗直)·표연말(表沿沫)·이승언(李承彦)·정창손(鄭昌孫)·신숙주(申叔舟)·이종준(李宗準)·전석(田錫)·이중균(李中鈞)·유승탄(兪承坦)·한명회(韓明澮)·강희맹(姜希孟)·신영희(辛永禧)·강희안(姜希顔)·서거정(徐居正)·정여창(鄭汝昌) 등 저자와 친분이 있던 사람들의 시와 일사기문(逸事奇聞) 등이 수록되어 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 |
7 | Ⅱ동백 | 정자형(鄭自蘅) | 생원(生員), 참봉(參奉) |
7 | Ⅱ동백 | 정자전(鄭自荃) | 진사(進士), 참봉(參奉) |
7 | Ⅱ동백 | 정천종(鄭千鍾) | 진사(進士) 청양현감(靑陽縣監), 증 호조참판(贈 戶曹參判) |
7 | Ⅱ동백 | 정유(鄭裕) | 한성판관(漢城判官) |
7 | Ⅱ동백 | 정경(鄭褧) 상지(尙之) (1489~1553) | 1513년 진사(進士), 증 이조참판(贈 吏曹參判)
소양강가에 은거하였으나 그 명성 높이 솟아 동료들의 표망이 되었다. 과거에 나가지 않고 벼슬살이에 뜻이 없었다. 외숙(모친이 진주류씨) 의정 류순정 공과 표형(외사촌, 형수가 파평윤씨) 의정 윤재가 서로 번갈아 금오랑(의금부도사)에 천거하였다. 공이 마음을 알아주지 못하는 것을 한스럽게 여겨 집에 찾아와도 만나주지 않았다. 간이 최립(崔岦)이 지은 성재공 신도비 서에 실려 있다
隱居昭陽江上 嶷嶷有立爲儕流標望 早廢擧業仕進無意 內舅柳議政順汀 表兄尹議政漑交薦 金吾郞公沈以不相唯爲恨至於及門不覿語見崔簡易所撰醒齋公神道碑序
* 류순정(柳順汀) : 1459 ~ 1512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지옹(智翁), 호는 청천(菁川). 유이(柳怡)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유자해(柳子偕)이다. 아버지는 목사 유양(柳壤)이며, 어머니는 정집(鄭楫)의 딸이다.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서 학업을 닦고 활을 잘 쏘아서 무인 중에서도 비교할 자가 드물었다. 1487년(성종 18) 진사로 별시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해 홍문관전적에 임명되었다. 연산군의 밤 사냥이 불편함을 진언했다가 임사홍의 모략으로 추국 당하였다. 1506년 이조판서로서 박원종(朴元宗)·성희안(成希顔) 등과 함께 중종반정을 모의, 거사해 그 공으로 정국공신(靖國功臣) 1등에 책록되고, 청천부원군(菁川府院君)에 봉해졌으며, 숭정대부(崇政大夫)에 올랐다. 이어 병조판서, 우의정, 좌의정을 거쳐 1510년 경오왜변이 일어나자 도체찰사가 되어 병사를 총괄했으며, 다시 도원수로서 현지에 출동해 삼포(三浦)의 난을 평정하고 군공을 인정받아 영의정에 올랐다. 2개월 후 병사하자 문정(文定)이라는 시호가 내려졌으며 이후 성렬(成烈)로 고쳐졌다. 중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
* 윤개(尹漑) : 1494 ~ 1566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여옥(汝沃), 호는 회재(晦齋)·서파(西坡). 1516년(중종 11)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승정원주서·사간원정언을 거쳐, 1519년 이조좌랑으로서 인사에 관여 사림을 힘써 등용하였다. 그러나 이 해에 기묘사화가 일어나 조광조(趙光祖)·김안국(金安國) 등이 몰려나자 외직으로 좌천되었다. 그러나 한어(漢語)에 능통해 명나라와의 외교 활동에 이바지하였다. 즉, 성절사(聖節使)·사은사(謝恩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서 명나라에 내왕하면서 명나라의 하린(夏麟)을 비롯한 내각 관원과 친교를 맺어 국위를 선양하였다. 1534년에는 명나라로부터 역청(瀝靑)·백철(白鐵)·이두석(泥豆錫)의 제조법을 배워왔고, 명나라의 조복(朝服)을 얻어와 의복 제도를 개정하게 하였다. 인종이 즉위하자 예조판서에 올랐다. 명종의 즉위로 문정왕후(文定王后)가 수렴첨정하면서 윤원형(尹元衡) 등이 을사사화를 일으켜 대윤(大尹) 일파를 제거하자, 여기에 가담해 추성위사홍제보익공신(推誠衛社弘濟保翼功臣) 2등에 책록되고 영평군(鈴平君)에 봉해졌다. 예조판서로서 오래 근무하면서 의식과 법도를 대략 정돈했고, 1546년(명종 1)에는 외방 학교의 절목(節目)을 마련해 교육 제도를 바로잡았다. 1550년 호조판서·이조판서를 거쳐 이듬해 우의정이 되었다. 8년 동안 우의정을 역임하고 1558년 좌의정에 올랐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 |
7 | Ⅱ동백 | 정기(鄭祇) (1496 ~ ?) | 생원(生員) |
7 | Ⅱ동백 | 정건(鄭褰) 시중(時仲) | 1525년 진사(進士), 도사(都事) |
7 | Ⅱ동백 | 정질(鄭質) 사화(士華) | 별좌(別坐) |
8 | Ⅱ동백 | 정성부(鄭性傅) | 목사(牧使) * 부 정욱(鄭郁) |
8 | Ⅱ동백 | 정심부(鄭心傅) (1535 ~ ?) | 1570년 생원(生員), 별좌(別坐) * 부 정욱(鄭郁) |
9 | Ⅱ동백 | 정할(鄭䦖) | 별좌(別坐) * 부 정심부(鄭心傅), 조 정욱(鄭郁) |
10 | Ⅱ동백 | 정민수(鄭民秀) | 참봉(參奉) * 부 정은(鄭誾), 조 정윤호(鄭允豪) |
10 | Ⅱ동백 | 정옥립(鄭沃立) | 판관(判官) * 부 정할(鄭䦖), 조 정심부(鄭心傅) |
7 | Ⅲ판서 | 정보(鄭寶) | 참봉(參奉) |
7 | Ⅲ판서 | 정계종(鄭繼宗) | 참봉(參奉) |
7 | Ⅲ판서 | 정광필(鄭光弼) | 진사(進士) |
7 | Ⅲ판서 | 정자전(鄭自荃) | 진사(進士), 참봉(參奉) |
8 | Ⅲ판서 | 정치조(鄭致調) | 제학(提學), * 부 정보(鄭寶), 조 정처함(鄭處咸) |
9 | Ⅲ판서 | 정신(鄭愼) | 병조판서(兵曹判書), * 부 정치조(鄭致調) 조 정보(鄭寶) |
10 | Ⅲ판서 | 정민흥(鄭民興) | 생원(生員), * 부 정신(鄭愼) 조 정치조(鄭致調) |
10 | Ⅲ판서 | 정민척(鄭民陟) | 참봉(參奉), * 부 정신(鄭愼) 조 정치조(鄭致調) |
9 | Ⅲ판서 | 정두(鄭紏) | 통덕랑(通德郞), * 부 정민척(鄭民陟) 조 정신(鄭愼) |
8 | Ⅰ-4 자의 | 정해(鄭獬) (1491 ~ ?) | 시강원자의(侍講院諮議), 학문이 깊었다(學文淵深) |
8 | Ⅰ-5 능파정 | 정휴(鄭貅) 군맹(君猛) 능파정(凌波亭) (1495~1558) | 1522년 생원(生員) 1545년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
8 | Ⅰ-5 승지 | 정표(鄭彪) (1499~1551) | 1522년 진사(進士)
학문과 덕이 뛰어나 사헌부에 천거 받았으며 좌승지에 이르렀다(南臺累遷至左承旨) |
8 | Ⅰ-7 진사 | 정사(鄭獅) 군실(君實) 후은당(後隱堂) (1514~1581) | 종사랑(從仕郞) 1534년 성균진사(成均進士)
을사사화에 성균관 동료들을 이끌고 제현을 신원하는 상소를 올리고 원흉을 탄핵했다. 말이 곧고 간절하여 선비의 의론이 옳다 하였다 乙巳禍作率館伴同僚 上疏伸救諸賢彈劾元兇 言甚直切士論韙之 |
8 | Ⅱ-1 참봉 | 정우(鄭遇) | 장사랑(將仕郞), 경기전참봉(慶基殿參奉) |
8 | Ⅱ-2 선무랑 | 정시(鄭亻思) | 선무랑(宣務郞) |
8 | Ⅱ-4 정랑 | 정기(鄭耆) 중옹(仲翁) (? ~ 1555) | 1522년 진사(進士) 공조정랑(工曹正郞), 이조정랑(吏曹正郞) |
8 | Ⅱ-6 양촌 | 정함(鄭涵) | 진사(進士), 선릉참봉(宣陵參奉) |
8 | Ⅱ-8 소강재 | 정이우(鄭以虞) 성순(聖舜) 소강재(昭江齋) | 선조(宣祖) 조에 수재(秀才)로서 진사(進士)
천성이 순수하고 부지런하였으며 학문을 좋아하고 독실하여 문명을 크게 떨쳤다. 소양강상에 머물며 낙향하여 한양에 들어오지 않으며 말하기를 “부친께서 출사치 않았는데 어찌 자식이 벼슬길에 나가랴!” 하였다 天性純勤好學篤行文名大闡 因臥昭陽江上不復入洛曰 “親隱不仕子何出仕” |
8 | Ⅱ-10 봉사 | 정이로(鄭以魯) | 장흥고봉사(長興庫奉事) |
9 | Ⅰ-1 절제사 | 정응성(鄭應星) 천장(天章) | 별천(別薦) 장사랑(將仕郞) 현릉참봉(顯陵參奉)
집에 머물며 예를 지키며 음악을 벗삼아 지냈다. 향년 4기(48세)를 넘기지 못하고 조세하니 사우들이 애석해 했다 居家處世以禮律身 享年未滿四紀士友嗟惜 |
9 | Ⅰ-3 지평 | 정인수(鄭仁壽) 유필(有必) 압촌(鴨村) (1505~1566) | 1537년 생원(生員), 1538년 참봉(參奉), 청송부사(靑松府使) |
9 | Ⅰ-3 지평 | 정인부(鄭仁富) (1509 ~ ?) | 1559년 생원(生員), 참봉(參奉) |
9 | Ⅰ-3 지평 | 정인강(鄭仁康) (1513 ~ ?) | 진사(進士) 정인강(鄭仁貴) |
9 | Ⅰ-3 지평 | 정인덕(鄭仁德) 사일(士一) (1519 ~ ?) | 1561년 생원(生員), 진사(進士) 생진구중(生進俱中)
학문으로 일찍부터 유림으로 촉망받았다(以文行早有儒望) 문행으로 천거, 장흥교수 봉렬대부(長興敎授 奉列大夫) |
9 | Ⅰ-3 지평 | 정인우(鄭仁祐) 사응(士凝) (1522~1570) | 1558년 생원(生員)
* 사마방목(司馬榜目)에는 휘(諱) 인유(仁裕) |
9 | Ⅰ-4 자의 | 정인눌(鄭仁訥) | 참봉(參奉) |
9 | Ⅰ-4 자의 | 정인성(鄭仁誠) | 진사(進士), 참봉(參奉) |
9 | Ⅰ-4 자의 | 정인근(鄭仁謹) 둔헌(遯軒) | 참봉(參奉), 덕천군수(德川郡守)
도의가 있고 문장도 뛰어나 사우들이 받들었다. 수은 강항이 만사에서 추모하기를 덕의를 크게 칭송하였다. 행적은 나주 초동의 「보산각 게판」과 「기성군지」「금성군지」에 실렸다 道義文章士友推重 睡隱姜沆 輓詞盛稱德義 行蹟載羅州草洞「寶山閣揭板」中 及「箕城錦城兩郡誌」 |
9 | Ⅰ-4 자의 | 정인심(鄭仁諶) 고옥(古玉) | 진사(進士)
행적이 나주 초동의 보산각 ‘십로회’ 게판에 실렸다 行蹟載 羅州草洞寶山閣十老會揭板中 |
9 | Ⅰ-5 능파정 | 정인량(鄭仁良) 원필(元弼) (1535 ~ ?) | 생원(生員)
수은 강항이 만사에서 추모하기를 덕의를 크게 칭송하였다 睡隱姜沆 輓詞盛稱德義 |
9 | Ⅰ-5 능파정 | 정인공(鄭仁恭) 사성(士誠) 월곡(月谷) (1545~1602) | 1564년 생원 진사 동시급제(生進俱中)
시와 글을 벗 삼아 은거하여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琴書自娛隱居不仕 |
9 | Ⅰ-6 승지 | 정인홍(鄭仁洪) 정유(正裕) 도암(道菴) (1530~1589) | 1552년 진사(進士)
학행으로 강원감사(江原監司)를 제수 받았으나 나가지 않았다 |
9 | Ⅰ-7 진사 | 정인방(鄭仁方) 선술(善述) (1562~1625) | 1588년 진사(進士) |
9 | Ⅱ-1 참봉 | 정언홍(鄭彦弘) 홍길(弘吉) | 장사랑(將仕郞), 지릉참봉(智陵參奉) |
9 | Ⅱ-2 선무랑 | 정현복(鄭玄福) | 종사랑(從仕郞) |
9 | Ⅱ-4 정랑 | 정사중(鄭思重) (? ~ 1553) | 진사(進士) |
9 | Ⅱ-4 정랑 | 정사익(鄭思益) 언겸(彦謙) (1538 ~ ?) | 1567년 생원(生員), 참봉(參奉) |
9 | Ⅱ-4 정랑 | 정사원(鄭思元) 계선(季先) 간송(癎松) (1540 ~ ?) | 1576년 진사(進士), 직장(直長) |
9 | Ⅱ-5 청백리 | 정응방(鄭應房) | 통덕랑(通德郞) |
9 | Ⅱ-6 양촌 | 정대휴(鄭大休) 회헌(悔軒) | 생원, 경기전참봉(慶基展參奉)
임진왜란 시 완산에서 순절하여 우승지에 증직되었다. 전쟁터에 나갈 때 유서를 남겨 종제 대신에게 조상봉사를 부탁하였다.
壬辰之亂 殉于完山 贈左承旨 臨行時遺書從弟大伸移住奉仕 |
9 | Ⅱ-6 양촌 | 정대신(鄭大伸) 덕서(德叙) (? ~ 1610) | 소격서참봉(昭格署參奉) * 소격서(昭格署) : 하늘, 땅, 별에 지내는 도교(道敎)의 초제(醮祭)를 맡아보던 관청(官廳) |
9 | Ⅱ-8 소강재 | 정지호(鄭志湖) | 진사(進士) |
9 | Ⅱ-10 봉사 | 정문호(鄭文湖) | 참봉(參奉) |
9 | Ⅱ-11 사간 | 정신복(鄭愼復) 중희(仲希) (1529 ~ ?) | 통덕랑(通德郞) |
9 | Ⅲ-1 통정 | 정두갑(鄭斗甲) | 첨지(僉知) |
9 | Ⅲ-2 학생 | 정유일(鄭維一) | 훈련원주부(訓練院主簿) |
10 | Ⅰ-1 절제사 | 정용(鄭溶) 여용(汝溶) | 선교랑(宣敎郞), 병절교위(秉節校尉) |
10 | Ⅰ-2 응교 | 정연(鄭演) 거원(巨源) 영사당(永思堂) (1541~1621) | 음(蔭) 용양위부사직(龍驤衛副司直) 승(陞)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수 81세 증호조판서(贈戶曹判書)
일찍 과거를 그만두고 노년에 한양성 서쪽에 은거하여 덕망 있는 선비와 덕망 있는 선비들과 ‘팔선계’와 ‘구로회’를 조직하여 사계절 연회를 베풀고 놀았다. 사람들이 “장안의 성대한 일이다.” 라고 하였다 早廢擧業晩隱城西與耆英諸公修八仙契九老會 四時燕集風流徜徉人稱洛中盛事 兩契帖藏于家
* 팔선계 계원 ① 신 벌(申 橃:1523~1616, 94세 졸) 號 友松 官同知 ② 이의건(李義健:1533~1621, 89세 졸) 號 峒隱 官直長 ③ 신 암(申 黯:1537~1616, 80세 졸) 號 不如堂 官經歷 자直孺 ④ 김극효(金克孝:1542~1618, 77세 졸) 號 四味堂 官同知 ⑤ 정 연(鄭 演:1572~1633, 62세 졸) 號 永思堂 官同知 ⑥ 심 암(沈 嵒) 官正 ⑦ 권성이(權成已) 官僉正 ⑧ 유 탁(兪 逴) 官正 |
10 | Ⅰ-3 지평 | 정지(鄭池) 징수(澄粹) 지산(芝山) (1552~1614) | 1584년 사헌부지평 겸춘추관기주관(司憲府持平 兼春秋館記注官) |
10 | Ⅰ-3 지평 | 정복(鄭復) (1550 ~ ?) | 참봉(參奉) |
10 | Ⅰ-3 지평 | 정결(鄭潔) 영숙(塋叔) | 승사랑(承仕郞) * 승사랑 : 종8품(從八品)의 문관(文官)의 품계(品階). 종사랑(從仕郞)의 위, 통사랑(通仕郞)의 아래임 |
10 | Ⅰ-3 지평 | 정옥(鄭沃) 계이(季而) 자미당(自美堂) | 통덕랑(通德郞) |
10 | Ⅰ-3 지평 | 정잠(鄭潛) | 1597년 생원(生員) |
10 | Ⅰ-3 지평 | 정식(鄭湜) 극청(克淸) (1548 ~ ?) | 1576년 생원(生員) |
10 | Ⅰ-4 자의 | 정섭(鄭涉) | 진사(進士), 직장(直長) |
10 | Ⅰ-4 자의 | 정열(鄭洌) 청원(淸元) (1576 ~ 1645) | 통덕랑(通德郞) |
10 | Ⅰ-4 자의 | 정제(鄭濟) 여즙(汝楫) | 통덕랑(通德郞) |
10 | Ⅰ-4 자의 | 정준(鄭浚) 여호(汝浩) 추원당(追遠堂) (1564 ~ 1625) | 광해군 1617년 진사(進士)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 문하(門下)에서 배웠다.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 수은(睡隱) 강항(姜沆), 둔암(遯菴) 양산해(梁山海)와 도의로서 교유하였다(爲道義交)
임진왜란에 목숨 걸고 묘를 지키므로 적병도 감탄하여 해하지 못하였다. 때마침 어지럽고 조정이 혼란한 때라 인륜이 끊어져 통렬한 상소를 올렸다. 효동사에 배향되었다. 사헌부 집의 이홍직이 봉안문과 제사축문을 지었으며 행적이 「기성지」와 「문헌록」에 4세 6효 2열이라 실렸으며, 그 살던 곳을 “효동”이라 했다
丁艱廬墓當龍蛇之變誓死守墓敵感至孝不忍加兵 時値昏朝彛倫斁絶上疏通辯 醊享孝洞祠 執義李弘稷撰奉安文輿享祀祝文 事載「箕城誌」及「文獻錄」 四世六孝二烈 誌基居曰 孝洞 |
10 | Ⅰ-6 승지 | 정융(鄭瀜) 이원(而源) (1536~1596) | 현릉참봉(顯陵參奉) |
10 | Ⅰ-6 승지 | 정약(鄭瀹) 이준(而濬) (1545 ~ ?) | 1573년 진사(進士) |
10 | Ⅰ-6 승지 | 정명(鄭溟) 우승(羽昇) (1551 ~ ?) | 1579년 진사(進士) |
10 | Ⅰ-6 승지 | 정영(鄭濚) 의서(義瑞) 벽파정(碧波亭) (1574~1653) | 1606년 생원(生員) 부모에 효성이 지극하고 형제간 우애가 깊어 마을에서 칭송하였다 孝友敦篤 鄕里稱服 |
10 | Ⅰ-6 승지 | 정화(鄭氵禾) 등숙(登叔) | 1603년 진사(進士)
수은 강항이 만사에서 덕행을 칭송하였다 睡隱 姜沆 輓詞中德行加徵 |
10 | Ⅰ-7 진사 | 정부(鄭溥) 여보(汝甫) (1593~1647) | 장사랑(將仕郞) |
10 | Ⅱ-1 참봉 | 정흥조(鄭興祖) 서흥(瑞興) | 통덕랑(通德郞) * 무과방목에 있는 ‘정흥조(鄭興祚)’와 동일 인물인지는 연구과제임 |
10 | Ⅱ-3 판서 | 정흠(鄭歆) 형백(馨伯) (1573~1637) | 음(蔭) 사직서참봉(社稷署參奉) 나가지 않음(固辭不就)
임진왜란 시 부친 병은(정사위)공이 선조임금을 호가서행 할 때, 필마로 부친을 수행하고 평안도 맹산에서 부친병환이 위중하여 밤낮으로 모시여 정성을 다하였으나 상을 당하여 고향으로 모셨으며, 3년 동안 묘를 지키며 몸이 여위도록 슬퍼함으로 거의 목숨을 잃을 지경에 이르렀다. 양주 백석에 물러나 여생을 보내셨다
壬辰病隱公扈駕西行以匹馬隨行至孟山病隱公遘癘危谹晝宵侍側百方救護殫竭誠力遭艱返葬故山廬墓三年哀毁逾禮畿至滅性. 退居于揚州白石之陽以終餘年 |
10 | Ⅱ-3 판서 | 정호(鄭頀) | 장사랑(將仕郞) |
10 | Ⅱ-7 참판 | 정후계(鄭後啓) 창경(昌卿) 운계(雲溪) (1600~ 1670) | 인조 을해(1635년) 진사(進士), 의관
효종 청나라 입반 시 백의배종 충성 호가하여 임금으로부터 은전이 두텁고 무겁다. 연이은 공로로 숭록대부 지중추부사(종1품)에 이르고, 집을 하사받았다 금요문 밖의 인정전에 공신의 현판을 걸고 현종은 여러 번 편지를 내리는 등 예우가 매우 깊었다
孝宗入潘時白衣陪從盡忠扈駕自上恩眷隆重連佩郡章至崇祿大夫知中樞府事賜第 金曜門外仁政展懸功臣板 顯宗累下手札禮遇殊深
1649년 함의(鍼醫), 전설별검(典設別檢), 어의(御醫) 1651년 세자 진료의 공 부호군(副護軍),양천현감(陽川縣監) 1652년 양천현령 정후계와 교하현감 이종룡 상환(직책교환) 1653년 가선대부, 6월 가의대부(종2품상, 嘉義大夫) 윤7월 자헌대부 승자(정2품, 加資憲) 1656년 양근군수(楊根郡守), 1659년 지사(知事) 1661년 가자(加資) 숭록대부(종1품 崇祿大夫) 1664년 남양부사(南陽府使), 이방승지는 영장(군의 진장)을 겸하는 곳이라 의관은 불가함을 상주함, 파주목사(坡州牧使) 제수로 2개월간 사간원의 개차 상주 → 결국 신료들의 반대로 부임하지 못함 1664년 지사(知事) * 종3품 관직 1665년 정후계의 자제에게 직책을 제수 사간원 반대 1670년(현종11년) 8월 16일 “입시 의관 정후계와 많은 기간 동안 약제를 논의하여 왔는데 이제 고인이 되니, 너무나 측은하고 아쉽기 그지없다. 관련 부처에 명하여 제수를 특별히 장만하여 보내도록 하라” 하였다. 入侍醫官鄭後啓, 以積年議藥之人, 今已身故, 事甚矜惻。令該曹祭需從優磨鍊題給 1670년 8월 24일 안진이 아뢰길, 호조에서 “정후계의 제수는 특별히 마련하라는 주상의 분부에 따라 물목단자를 준비하였는데, 금번 건은 상격이 있으므로 그에 맞게 명을 하달했습니다. 목면은 10필, 쌀 5석을 원 단자에 추가하고자 합니다.“ 하니 ”알았다“ 하였다. 安縝, 以戶曹言啓曰, 以鄭後啓祭需從優磨鍊題給單子判付內, 今番則兼有賞格, 加磨鍊以給可也事, 命下矣, 木綿加十疋, 米加五石, 原單子中付標以入之意, 敢啓。傳曰, 知道。 |
10 | Ⅱ-9 성재 | 정장원(鄭長源) | 지사(知事) |
10 | Ⅱ-9 성재 | 정규원(鄭奎源) 공찬(公燦) | 통덕랑(通德郞) |
10 | Ⅱ-10 봉사 | 정두하(鄭斗河) | 동몽교관(童蒙敎官) |
10 | Ⅱ-11 사간 | 정두극(鄭斗極) 백추(仲樞) (1596 ~ ?) | 1596년 선교랑(宣敎郞) |
10 | Ⅲ-3 판관 | 정지교(鄭之僑) | 1671(현종 12년) 초지만호(草芝萬戶) 1682(숙종 18년) 포윤만호(包尹萬戶) 통정대부(通政大夫) 1710(숙종 36년) 오위도총부 부장(五衛都摠府 部將) 1714(숙종 40년) 부사과(副司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