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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추억의 팝송.가요 원문보기 글쓴이: 제니
When I was just a little girl,
I asked my mother, "What will I be?
Will I be pretty? Will I be rich?"
Here's what she said to me:
Que sera, sera,
Whatever will be, will be.
무엇이든지 될 수 있지.
The future's not ours to see,
미래는 우리가 지금 볼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Que sera, sera, [Whatever will be, will be.]
(네가 진정으로 원하기만 한다면)무엇이든 될 수 있단다.
When I was just a child in school,
I asked my teacher, "What shall I try?
Should I paint pictures?
Should I sing songs?"
This was her wise reply:
Que sera, sera,
Whatever will be, will be.
The future's not ours to see,
Que sera, sera, [Whatever will be, will be.]
When I grew up and fell in love,
I asked my lover, "What lies ahead?[/what will I be?]
Will we have rainbows day after day?"
Here's what my lover said:
Que sera, sera,
Whatever will be, will be.
The future's not ours to see,
Que sera, sera,
[[Whatever will be, will be.
Now I have children of my own,
They ask their mother, "What will I be?
Will I be pretty? Will I be rich?"
I tell them tenderly:]]
Que sera, sera,
Whatever will be, will be.
The future's not ours to see,
Que sera, sera, [Whatever will be, will be.]
The future's not ours to see,
Que sera, sera, [Whatever will be, will be.]
그 여자는 젊을 때,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잘 몰랐다.
십대에는 연식정구 선수를 했는데, 어찌어찌하다 선수생활을 했으나
전국대회에서 준우승 한번 한 것이 최고의 전적이었다.
애초부터 자신이 선택한 길도 아니었다.'우연'히 라켓을 잡았다가
감독선생의 눈에 띄어 중고등학생 시절 6년을,교실에서보다
정구 코트에서 대부분 보내고 만 것이었다.
대학 갈 일이 막막했다.
연식 정구가 신식 테니스에 밀려 시들해질 무렵이었고,
그 여자 자신도 그것에 목을 맬 만큼 재미를 붙이진 못했으니
대학 진학을 해야 할텐데, 희망대로 가기엔 공부가 턱없이 부족했다.
아니 공부만 부족한 것이 아니었다. 그 여자는 진실로 자신에게 어떤 재능이 있는지,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그것을 여전히 잘 모르고 있었다.
그 여자는 이래저래 꾸물대다가 고향에 있는 대학의 국문학과에 진학했다.
그 여자가 국문과를 선택한 것도 '선택'이라기보다 어찌어찌하다 그리 되었으므로
따져보면 '우연'에 불과했다.그 여자는 그것 땜에 앙갚음을 받았다.
시를 쓰고 학술발표대회에 나가 상을 받기도 하고,
그런대로 과에선 남에 비해 모자라지 않은 대학생활을 하고 있었지만,
날이면 날마다 사실은 두통에 시달렸던 것이었다.
쓰고 싶은 것에 대한 막연한 이미지는 수시로 솟구쳤지만,
써놓고 보면 그 시에 담긴 이미지가 자신이 애초 생각했던 이미지들과
다르거나 모자라기 일쑤였다.그 여자는 그래서 머리가 죽을만큼 아팠다.
그 때 한 남자가 나타났다.
그 여자가 시 쓰는 일이 자신에게 잘 맞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어렴풋이 눈치챌 때쯤 나타난 그 남자는 문학청년이었는데,
그 여자와 달리 일찍부터 ‘그것을 하지 않으면 죽을 것 같아서’
쓰는 일을 '필연적'으로 선택한 사람이었다.
그 여자는 자신의 마음속에 솟구치는 이미지들을 자기 자신보다
그 남자가 더욱 정확히 표현해내는 것에 처음엔 당황했고, 그 다음엔 절망했고,
마지막으론 저 남자야말로 나의 분신이구나, 아전인수로 생각했다.
그 여잔 그래서 시를 버리고 연애에 돌입했다.
생전 처음으로 ‘하지 않으면 죽을 것 같아서’ 시작한 사랑이었다.
그 여자는 자신의 참된 정체성을 그 남자로부터 마침내 찾았고 느꼈으며,
그 사랑에 자신의 남은 인생 모두를 걸어도 후회하지 않으리라고 단정했다.
매우 위험한 생각이었으나,사랑 속에 빠져 있어서 그 여자는 자기생각의 오류를
그때는 잘 알지못했다.그 여자는 그래서 현실적으로는 별로 희망도 없어 보이는
그 남자와 순진하게도 고속으로 결혼했고, 줄줄이 아이를 낳았다.
가난해서 고통스러웠으나 그 남자를 위해 그 여자는 기꺼이 헌신했다.
아이들은 그 남자에 대한 사랑의 의미를 더욱더 충만되게 해주었다.
그 남자는 때로 가난 때문에 술에 취해 울었지만 그 여자는 울지 않았다.
그 여자는 세계의 전부라 할 만한 그 남자와 세 아이에 대해 계속
헌신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헌신은 가난의 고통 속에서도
그 여자의 삶을 오히려 의미있게 해주었다.
어떤 날 남자의 소설이 베스트셀러가 됐다.
그 남자는 작가로서 유명해졌고, 가난을 극복할 만큼 돈이 들어왔고,
그래서 그 여자는 희희낙락 더 큰집으로 이사했고,
녹슨 장롱과 손바닥만한 텔레비전과 남루한 양은그릇들을 버리고 당연히 새것으로 바꾸었다.
그 여자는 잠시 행복했고 충만해졌다.
그 남자는 더욱 더 바빠져서 집에 와 있을 땐 오직 썼고, 쓰지 않으면 밖으로 나갔다.
'유명작가'가 되고도 그 남자는 별로 행복해지지 않는 것 같았다.
자주 술에 취해 들어왔고,연락도 없이 며칠씩 안 들어올 때도 자주 있었다.
그 여자는 때로 속이 상했지만 유명 작가의 아내로서 행여 품위를 잃을까 노심초사,
적어도 겉으로는 자기 자신을 잘 추스르고 견뎠다.
그 대신 그 여자에게 만성두통이 다시 찾아왔다.
어느 땐 두통이 너무 심해 부엌일을 하기 어려울 때도 있었다.
그 남자와 아이들 셋은 쌀통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잘 몰랐고
밥솥을 사용할 줄도 몰랐다.그 여자가 지금껏 모든 집안일을 그들에게 맡기지 않고
한사코 혼자 해온 맹목적 헌신의 결과였다.
‘정신과 상담을 받아보시지요’ 내과 의사는 권했다.
그 여자는 내키지 않았지만 너무 두통이 신해서 정신과 상담을 받으러 갔는데,
정신과 의사를 그 여자에게 수십 문항의 질문이 인쇄된 설문지를 먼저 주었다.
그 여자는 집에 돌아와 연필을 찾아들고 그 설문지를 들여다보았다.
'부부관계는 한 달에 몇 번 하십니까.' '최근 부부싸움은 언제 하셨습니까.'
'부부관계 뒤엔 행복하십니까.' 그 여자는 그 문항들을 읽다가 울면서 설문지를 찢어버렸다.
확실한 것은 알 수 없었으나 자신의 두통이 그런 것들과 별 관계가 없다는 걸
그 여자는 알고 있었다. 다행히 아이들은 가끔 속을 썩였지만 큰 탈 없이 컸고,
그 남자 역시 전보다 더 유명해지고 더 바빠졌지만, 표절이나 마약따위는 물론,
다른 데에서 애를 낳아 데리고 들어오거나 하는 큰 불상사를 일으키진 않았다.
겉으로 보아선 가난하던 시절보다 훨씬 낫다고 해야 할 참이었다.
그 여자는 그래서 누구에게 호소도 못하고, 두통을 참고 참으면서,
에어로빅도 하러 다녔고, 서예도 배우러 다녔고, 아이들 학교의 학부모회도 열심히 나갔고,
그 남자를 찾아오는 많은 사람들에게 찻상, 술상도 계속 차려냈다.
그러나 만성두통은 끈질기게 이어졌다.
그 여자는 날이 갈수록 자기의 어떤 중심이 비어 있다고 느꼈다.
뭔지 알 수 없었지만, 그 여자는 자주 세상천지에 자기 자신만 버려져 있다고 생각했으며,
그래서 나무나 고독했고, 그래서 또한 자주 울었다.
아이들 밥을 하다가도 눈물이 나왔고, 그 남자 서재를 치우다가도 눈물이 나왔다.
에어로빅은 즐거웠지만 금방 지루해졌고, 서예는 재미가 없었다.
먼 곳으로 떠나고 싶은 날이 많았으나 아이들과 그 남자 때문에 떠날 수도 없었다.
그 남자는 여전히 뭐에 홀린 듯 미친듯이 썼고,미친듯이 떠돌아다녔고,
집에 오면 겨우 새우처럼 몸을 구부리고 쓰러져 잘뿐이었다.
그 여자가 한나절만 집을 비워도 집안은 엉망진창이 됐다.
그 여자는 두통 때문에 때로 비명을 지르면서, 화분에 물을 주었고,
아이들 밥을 했고, 그 남자 속옷을 빨았다.
예전엔 힘이 들지언정 집안일이 즐거웠었는데,이제는 힘만 들뿐 하나도 즐겁지 않았다.
두통은 그렇게 오래오래 계속되었다.
그 여자는 어떤 날, 우연히 어떤 공연을 보러갔다.
판소리와 살풀이춤과 진도씻김굿 등의 백미 한 대목씩을,
인간문화재로 지정된 장인들이 무대 위에서 보여주는 공연이었다.
진도씻김굿을 볼 때 그 여자는 전율했다. 판소리를 들을 땐 울었고
살풀이춤을 볼 땐 애간장이 다 녹았다.
그 여자는 충격을 받았으며,그래서 일단 판소리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 여자의 헌신을 기다리는 아이들 셋이 다 대학을 들어간 후의 일이었다.
그 여자는 판소리를 배우면서 한편으로 장구, 북, 꽹과리 치는 법도 배웠다.
진도북춤을 일 년 이상 그 분야 최고의 달인에게 사사받은 적도 있었다.
집을 하루만 비워도 큰일 날 것처럼 생각하고 살아온 그 여자가
여름풍물학교나 동계판소리연수에 가느라 열흘씩 보름씩 집을 비우는 놀라운 일도 있었다.
만성두통이 말끔히 사라졌다.
그 여자는 비로소 행복해졌다.
다행히 그 남자와 아이들은 그 여자의 새로운 지향을 전반적으로 지지했다.
여름풍물학교에 가 있는 먼 산골로 그 남자가 아이들을 데리고 면회를 오는 일도 있었다.
곰국을 끓이고 새 반찬을 해서 냉장고에 잔뜩 넣어주고 왔지만,
까칠한 얼굴로 그 남자가 면회올 때, 행여 자신이 누구의 아내로서,
누구의 어머니로서 잘 못하고 있지는 않은가, 그 여자는 물론 때로 자책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장구를 메고 나는 듯이 돌면서 장구채 높이 들었다가 내려칠 때,
그 여자는 충만감으로 자지러질 것 같았다. 그 여자는 그래서 최대한으로 시간을 쪼개 썼다.
누구의 아내, 누구의 어머니 노릇을 잘 못하는 것도 참을 수 없었기 때문에,
그 여자는 ‘하지 않으면 죽을 것 같은 것’을 하기 위해, 때론 달음박질을 하기도 하고
때론 잠을 기꺼이 포기하기도 했다.
장구라면 웬만한 아마추어들은 능히 가르칠 정도로 실력을 쌓았을 때,
그 여자는 이미 쉰을 넘고 있었다.
그 때부터 새로운 고통이 시작됐다.
육체의 유연성과 역동성은 나이를 완전히 뛰어넘을 수 없었다.
그 여자는 그 여자 또래의 어떤 여자보다 잘할 수 있었으나,
서른 살이나 스물 몇 살의 재능 있는 젊은 사람에게 당해 낼 수는 없었다.
진도북춤의 장인이라 널리 알려진 스승에게 사사받는 일군의 제자들은 모두 젊었고,
대학에서 무용이나 기타 그것과 관련 깊은 걸 전공했으며,
이미 사회적으로 자기 분야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재원들이었다.
그 여자는 함께 배우는 그들을 뛰어 넘을 수가 없었다.
스승 또한 장래가 촉망되는 그들에게 더 많은 정성을 쏟았다.
그 여자는 쉰 살이 넘은 중년여자로서, 배워봤자 취미생활이 될 뿐이라는 식으로
스승이 생각하는 눈치를 보일 때, 그 여자는 깊은 상처를 받았다.
그 여자는 이번엔 바로 그런 상처들 때문에 때로 그 남자를 재운 뒤,
주방에서 수도꼭지를 틀어놓고 울었다.
너무도 늦게, 그 여자 자신의 중심을 만난 것이 천추의 한이었다.
그 남자까지 남의 속도 모르고 대충 하라고,
그냥 취미로 하면 되지 그 나이에 당신이 인간문화재 되겠느냐고,
냉정히 말할 때, 그 여자는 정말 뜨겁게 뜨겁게 울었다.
포기할까 생각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포기하고 나면 더욱더 ‘죽을 것 같아서’ 포기할 수도 없었다.
참된 의미에서, 그 여자는, 자신의 정체성이라고 불러도 좋을 전통예인의 길,
이를테면 풍물, 전통무용, 판소리 따위를 만나기 전까지 사십 몇 년 동안의 삶은,
‘우연’에 의존한 셈이었다. 좀더 일찍 자기 길을 발견하지 못한 것에 대해
그 여자는 쉰이 넘어 앙갚음을 톡톡히 받고 있었다.
누구의 아내, 누구의 어머니로서 삶이 의미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그 여자, 고유명사로서의 그리운 길을 너무도 늦게 찾은 그 앙갚음.
그 여자는 오십대 중반에 비로소 '판소리대학'에 들어갔다.
정식으로 대학과정 판소리 학교로 가라고 먼저 권한 것은, 그 남자였다.
그 여자는 때로 그 남자를 재워놓고 공부를 하고,
때로 학교 공강 시간에 들어와 그 남자의 밥을 해놓고 나갔다.
욕망과 현실 사이를 어느 정도 조율했으므로, 수돗물 틀어놓고 더 이상 혼자 우는 일도 없었다.
그 남자의 말처럼, 늦고, 빠르고, 그것이 뭐 그리 대수이겠는가.
죽을 때까지 자신이 원하는 게 뭔지 모르고,
오로지 ‘우연’에 의존해 사는 사람이 부지기수인 데 비하면,
그 여자는 자신이 그래도 행복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더 비싼 옷, 더 큰 자동차를 사지 않아도 쓸쓸하지 않고,
화려한 실내장식의 레스토랑에 가서 온갖 수다를 떨지 않아도 고독하지 않으며,
속으로 세속적 경쟁의식에 매여 있으면서 겉으로 이 모임 저 모임,
명분 좇아 분주하게 사교계를 왕래하지 않아도 불안하지 않을 인생을,
그 여자는 마침내 찾았기 때문에.
'겨우' 쉰여섯에,나아갈 그리운 길 찾아서,제 몫몫 나아가고자 애쓰고 있으니,
누가 그 여자를 쓸쓸한,상투적인 중년 여자,혹은 '아줌마'라고 하겠는가.
그 여자의 중심은 요즘 꽉 차있다.
좋은 남자 다시 만나면 열명의 아이라도 낳을 것처럼 생산적 창조력이 넘쳐 보인다.
바야흐로 그 남자보다 더 많은 밤들을 창조적 생산력으로 지새우고 있다.
옳거니,이제부턴 그 남자가 쓸쓸해질 차례이다.
어쩌면 앞으론 곰국조차 끓여놓지 않고
그 여자가 그리운 제 열망의 길을 찾아 훌쩍 가버릴는지도 모르니까 ...
<2004년, 여성조선 7월호 기고>
----어젠 그 여자 생일이었다.
그 여자는 인간문화재인 스승과 함께 출연할 어떤 프로그램 녹화를 하러 간다 했다.
그 여자의 눈빛은 황홀하게 빛나고 있었다.
"떨지 마.그리고 모니터 보지말고 그냥 즐긴다는 마음으로 하라구" 내가 훈수를 했다.
"연습을 너무 많이 해서 목소리가 나올런지 모르겠네.
근데 모니터 보지말라니,그게 무슨 말이야?" 그 여자가 콧노래 부르듯 화답했다.
어제는 하루 종일 비가 왔다.
나는 그 여자를 생일을 위해 비를 맞고 나가 꽃바구니 하나를 사왔다.
그 여자는 다음 세상에 태어나면 틀림없이 판소리나
북춤이나 사물놀이에서 '인간문화재'가 될 것이다.
더 이상 '우연'에 자기 삶을 맡겨놓지 않는 그 여자 생일 꽃바구니 축하 리본에 나는 이렇게 썼다.
"당신은 지금까지 아주 잘- 살아왔어.앞으로도 그럴거야^^"
나와 내 아내의 불가사의한 30년 결혼 생활에 대한 고찰
윤회를 믿는 불가(佛家)에서는, 이승에서 부부의 연(緣)으로 맺어지기란
상상을 뛰어넘는 오랜 기간 동안 상상하기 힘든 인연이 있어야만
가능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가 하면 어떤 이들은 말한다.
“결혼제도는 이미 용도 폐기되어야할 대상”이 되었노라고
부부로 산다는 일에 대한 작가 박범신의 단상이다.
아주 오래 전 아내와 연애할 때, 아내는 내가 좋아하는 음식이 오뎅인 줄 알았고,
나는 아내가 좋아하는 음식이 찐빵인 줄 알았다.
우리들은 그래서 주로 오뎅 백반집 아니면 찐빵집에 들러 식사를 하곤 했다.
우리가 단골로 드나들던 오뎅백반 집과 찐빵집은 값이 쌌으나
실내 인테리어가 매우 아늑하고 깔끔하게 되어 있었다.
나는 물론 가난한 청년이었다.
사랑은 뜨거워도 호주머니는 늘 비어있다시피 했기 때문에
데이트 비용도 부담이 될 수밖에 없었다.
젊은 애인이었던 아내는 내 형편을 환히 아는지라 행여 내 자존심이라도
다치게 할까 짐짓 자신은 찐빵을 참 좋아한다고 말하곤 했고, 나 역시 마찬가지.
그 만한 싼값으로 그만큼 우아하고 깔끔한 식당에서 식사를 하려면
오뎅백반 집밖에 없었으므로 오뎅 백반을 좋아한다고 짐짓 말하곤 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사실은 오뎅을 싫어하는 편이었다. 결혼한 다음,
젊은 아내는 걸핏하면 오뎅국을 밥상에 올리곤 했는데, 난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별 수 없이 오뎅국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실토하고 크게 웃었던 적이 있다.
연애시절은 은폐가 가능했다. 그러나 결혼은 다르다.
한솥밥을 먹고 한 지붕 아래서 매일 함께 자면서 누구의 며느리나 사위가 되고
또 누구의 어머니나 아버지로 살아가야 하는 결혼이란 철저히 리얼리즘적인 요소가
강하기 때문에 은폐나 추상이 깃들 수 없다.
모든 건 잔인할 정도로 낱낱이 드러나고 대비된다.
그런 점에서 결혼 생활이란 피차 상대편의 은폐된 것, 미화된 것,
추상화된 것들이 낱낱이 까발려지는 날의 연속이다.
어떤 땐 이 여자가 내가 연애했던 처녀 적의 그 여자가 맞나 하고
고개를 갸웃거릴 때도 있고,
어떤 땐 너무도 낯선 얼굴에 충격을 받고 할 수만 있다면
결혼을 되 물리고 싶어질 때도 있다. 물론 그 점은 여자 쪽도 그럴 것이다.
아내와 결혼한 지 어언 30여 년. 30여 년의 긴 세월,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누며 살아온 끝에 얻은 확실한 결론이 하나는
“우리 부부는 대부분 서로 안 맞는다는 것”이다. 작은 일이든 큰일이든 마찬가지다.
이렇게 서로 맞지 않으면서 지난 30여 년을 도대체 어떻게 함께 살아왔을까 하고
생각할 때도 많다. 앞으로도 살면 살수록 안 맞는 부분은 점점 늘어날 것이다.
함께 사는 일이란 마치 서로 맞지 않는 것들을 하나씩 둘씩 찾아내고
쌓아가는 일인 것 같다. 열거하자면 한이 없다.
30여 년이나 함께 살면서 찾아낸 ‘안 맞는 것’이 어디 한둘이겠는가.
1)아내는 붉은색 옷을 좋아하는데 나는 아주 싫어하고
2)아내는 아기자기한 꽃무늬 커튼을 좋아하는데 그 역시 나는 아주 싫어한다.
아니 싫어하는 정도가 아니라 혐오할 정도다. 그렇다면 지난 30여 년
우리가 거쳐 온 수많은 밤들의 벽지와 커튼은 어떠했던가.
벽지와 커튼을 고를 때
마다 우리 부부는 서로 싸웠거나, 겉으로 싸우지 않았다면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포기했거나, 그래서 상처받았을 것이다. 음식도 그렇다. 아내는 예컨대
3)국수나 만두 같은 것들도 좋아하지만 내게 밀가루 음식은 주식일 수 없다.
4)아내는 튀김류를 좋아하고 나는 담백한 나물류만 찾으며
5)아내는 음식을 먹는 시간이 행복하지만 나는 그냥 할 수 없이 통과해야 되는
의례적인 시간에 불과하다.
6)아내는 과일을 한없이 먹을 수 있는데 나는 과일을 좋아하지 않을 뿐 아니라
7)아내는 국건더기 때문에 국을 먹지만 나는 건더기엔 관심 없고 국물 때문에
국을 먹는다.
8)배추김치나 총각김치도 쭉쭉 찢어서 거드럭거드럭하게 먹어야 아내는
제 맛이 난다하고 나는 칼로 정갈하고 깡똥하게 잘라 놓아야 먹는다.
어디 음식뿐이겠는가. 얼마 전에 침대를 바꾸면서 몇 차례나 말다툼을 했고
급기야는 들여놓은 침대 매트를 바꾸는 소동까지 치러야했다.
디자인이야 뭐 기호가 서로 달라도 그럭저럭 맞춰간다 할망정
몸의 구조와 매트가 서로 맞지 않는 점은 심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9)이를테면 푹신한 매트에서 자야 아내는 아침에 몸이 상쾌하다 했고
나는 푹신한 매트에서 자고 나면 허리가 아팠다. 그러므로 제 몫몫 편하게 하려면
침대도 둘, 침실도 둘로 나누어 써야 할 참이다.
10)아내는 걸핏하면 덥다면서 얇은 이불을 찾고 나는 여름에도 두툼한 이불이 좋으며
11)아내는 까글까글한 침대 시트를 좋아하는데
나는 까글까글한 질감의 시트는 아주 질색이다.
12)아내는 독주(毒酒)를 선호하고 나는 기피한다.
13)아내는 러브스토리를 좋아하지만 나는 영화든 연극이든 러브스토리를 극도로
싫어하므로, 우린 함께 공연이나 영화구경을 하기 어렵고 또 술 마시기도 어렵다.
어떤 땐 영화관 앞까지 가서 각각 다른 영화를 보고 나오기도 한다
14)아내는 운동을 좋아하고 몸이 유연하여 춤도 잘 추는데
나는 운동을 아주 싫어하고 춤추기는 젬병이다.
15)아내는 또 초저녁잠이 많고 나는 새벽잠이 많으며
16)아내는 늘 변비를 하고 나는 늘 설사를 한다. 아이들을 다룰 때도 그렇다.
17)아내는 스무 살이 넘은 아이들의 할 일까지 가로맡아 해주어야 직성이 풀리는데
나는 한사코 아이들에게 맡기라는 주장이고,
18)아내는 아이들의 장점을 먼저 보고 나는 아이들의 단점을 먼저 본다.
아이들 문제로 싸우는 일은 평생 반복된다.
19)나는 일반적으로 먼저 화를 내고 아내는 일반적으로 사과를 먼저 한다.
부부 싸움 끝에 화해의 차 한 잔을 마실 때조차
20)아내는 클래식한 꽃무늬 찻잔을 꺼내고 나는 한사코 담백하고 모던한 현대식
찻잔을 꺼내든다. 무엇보다 속도의 문제는 심각하다.
21)가령 내가 밥을 다 먹고 숟가락을 놓을 때
아내는 식사의 반도 하지 못한 경우가 허다하며
22)내가 살 물건을 결정하고 지갑을 꺼낼 때
아내는 그 옆의 다른 물건값을 물어보고 있고
23)내가 외출 준비를 끝내고 나와, 차의 시동을 켤 때 아내는 느릿느릿 화장실로
가고 있다. 변비인 아내가 화장실에서 나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만 해도 내겐
고통스럽기 그지없다. 매사가 다 그러하다.
삶을 살아내는 개인적인 속도감에 있어 아내와 나는 너무도 맞지 않는다.
예컨대 아내는 매사에 이번이 아니면 다음이 있다는 식이고,
나는 매사에서 다음 차가 설령 있다하더라도 이번 타야할 차가 막차라는 식이다.
24)설거지조차도 아내는 설거지 감을 쌓아두고 쉬었다 할 요량을 곧잘 하지만
나는 도시 그 끝을 보지 못한다. 좋아하는 옷, 좋아하는 장신구, 좋아하는 가구
스타일도 맞는 게 하나도 없다.
25)아내는 자유분방해 뵈는 집시풍의 의상을 좋아하는데
나는 아내가 정장 스타일의 옷을 입기 바라고
26)아내는 크고 뉘앙스가 강해 뵈는 장신구를 선호하지만
나는 아기자기하고 섬세한 스타일이 좋다.
27)아내는 고전적인 가구를 좋아하지만 나는 가구만은 모던한 것을 갖고 싶어 한다.
다음날에도 화해도 할 겸 드라이브나 나가자고 했더니
28)아내는 냉큼 물가를 따라서 가자고 했고 나는 숲 깊은 곳으로 가고 싶어 했다.
얼마 전에 새로 들여 놓은 식탁 의자 때문에 또 한바탕 말싸움을 했다.
29)아내는 여태껏 내가 예쁘다고 말하는 여배우가 예쁘다고 동의해준 적이
한번도 없을 뿐만 아니라,
30)내가 극도로 싫어하는 남자 연기자를 일반적으로 좋아하는 편이다.
31)차를 타면 음악을 듣는 게 좋은데 아내는 한사코 오디오를 끄라고 야단이다.
한도 끝도 없다 . 우리 부부의 경우, 서로 안 맞는 걸로 말하자면 100까지 가는
건 물론 200까지 가는 것도 식은 죽 먹기처럼 쉽다.
30여 년 동안 찾아서 쌓아온 것이니 얼마나 많겠는가.
그 대신 맞는 건 참 적다.
적다고 말하기조차 민망할 정도로 적으니, 이러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아내가 좋아하는 백일홍을 나도 좋아한다는 것,
■남편 바람 피우던 과거지사를 자랑스럽게 떠벌리곤 하는
여배우 아무개 씨를 내가 싫어하고 아내 역시 싫어한다는 것 정도.
그렇다면 이게 뭔가
백 번 다시 생각해봐도 아내와 나는 헤어져야 옳다. 헤어지지 않고 함께,
그것도 수십 년씩 산다는 것은 지옥에서의 삶이나 다름없다.
그렇게도 맞는 건 없고 서로 맞자 않는 건 지천이니
어떻게 하루인들 함께 살 수 있겠는가. 그런데도 참 이상하다.
30여 년간 살아온, 잔인한 만큼 서로 잘 맞지 않는 아내하고
앞으로도 30여 년은 더 살아야지 하고 나는 생각한다.
가급적 함께 죽었으면 하고 생각할 때도 있다.
어떤 순간은 싸우고 어떤 순간은 억지로 맞추면서 살아온
지난 세월이 아주 행복했었는지 어쨌는지 잘 모르겠다. 그러나 후회하지 않는다.
지옥 같은 나날이었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아직껏 서로 맞지 않으나 좋은 친구로 넉넉하게 살아낼 자신이 있으니
그 또한 이상한 일이다. 그렇다고 앞으로는 아내와 내가 잘 맞을 거라고
희망을 품고 사는 것도 아니다. 짐작하건대 죽을 때까지, 여전히,
아내는 변비를 자주, 나는 설사를 자주 할 터이다.
그렇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깊은 이해와 연민이지 스타일에 꼭 맞아야 되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오래 시간의 시험을 통과해내고 오래오래 함께 걸어가는데 필요한 것은
함께 살면 서로 안 맞는 건 오히려 많아지지만 안 맞는다는
그것 때문에 불행해지지 않는다.
이 가을을 넉넉하고 향기롭게 보내고 싶다.
아내는 세상에서 가장 확고하게 믿을 수 있는 여자
살 오르는 투명한 햇살과 쪽빛 하늘, 삽상한 바람이 가득 내려앉아 수런거리는 가을 캠퍼스. 밖엔 불안하고도 변화무쌍한 바람이 부는데 풀잎같은 여리디 여린 감성을 가진 작가는 혹 이렇듯 시절 좋은 캠퍼스 한 구석에서 퀭한 눈을 하고 쓸쓸하게 서성이고 있지는 않을까. 그러나 연구실에서 만난 그는 전에 없이 도회적인 젠틀한 모습으로 여유있게 담배를 피워 물고 있었다.
‘어머니’는 영원한 텍스트
“담배 아직 피우시네요?”
”허어, 내내 피우던 걸 어떻게 끊누…”
질리도록 해오고 들어온 문학얘긴 접기로 했다.
“요즘 엄마 신드롬으로 문학계가 떠들썩 한데 남자들이 더더욱 쓸쓸하게 생겼습니다.”(2005년도에 내놓은 그의 산문집 <남자들, 쓸쓸하다>에 빗댄 말이다)
그는 그렇지 않다며 정색을 했다.
“어머니는 예나 지금이나 영원한 텍스트지.”
누구나가 그렇겠지만 볼것 없는 시골에서 나고 자라 소설가의 길을 걸어온 그에게 어머니는 유난히도 각별한 존재였다고 했다. 그 어머니를 생각할 때가 있느냐고 물었다.
“나이 들고 늙어가면서 어머니 생각이 많이 나. 나는 누나 넷을 위로 둔 외아들이었는데, 장돌뱅이로 떠돌던 아버지와는 아랑곳 없이 어머니가 내가 문학을 하는데 큰 자양분이 되었던 것 같아. 워낙에 강하면서도 예민하고 한없이 따뜻하고 뜨거운 분이었는데, 그러한 것들이 내게 예술적 자아와 감각에 눈을 뜨게 해 줬던 것 같아. 그야말로 세계는 불화로 가득 싸여 있는 것인데, 내 어릴적 우리 집이 그렇듯 가족간의 불화가 잦았지. 가난과 생활고 때문이었어. 그때 참 힘들었지만 그것을 숙명처럼 등에 걸머지고 그 불화 속을 헤쳐가신 그 어머니의 감수성과 뜨거운 사랑이 나의 문학을 있게 해 준 거라고 확신하고 있지.”
그 어머니가 자신이 인기작가로 올라서서 신문이며 방송 등 온 장안에 이름을 도배하다시피 하기 직전인 77년에 작고해 가슴이 아리다고 했다. 그의 어머니의 모습은 훗날 중앙일간지에 연재돼 낙양의 지가를 올렸던 그의 장편 <불의 나라>에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고향에는 가시나요?”
“이따금 독자들과 문학기행길에 찾아가곤 하는데 다 무너졌어. ‘소설가 박범신 생가’라는 표지판만 덩그러니 서 있지.”
그는 창가를 바라보며 씁쓰레하게 웃었다.
결혼, 리얼리즘 단계 잘 거쳐야
197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여름의 잔해>가 당선되어 등단한 그는 70년대에 그 특유의 감성이 녹아 있는 문체로 소외된 계층의 이야기를 주로 다루며 미학적 감동을 안겨 주었는데, 그의 소설미학을 한층 윤기나게 한 여성, 결혼, 아내는 그에게 어떤 것인가.
“오늘날을 사는 아내의 역할, 결혼생활에 대한 생각을 듣고 싶습니다. 이혼율도 높고 황혼이혼도 전에 없이 쉽게 이루어지고 있는 세태이기도 한데…”
그는 거침없이, 그러면서도 논리정연하게 첫째 둘째 셋째 식으로 얘기를 풀어놨다.
“나는 결혼생활을 세단계로 나누는데, 그 첫번째 단계가 낭만주의 단계인 신혼시기지. 이때는 꽃한송이를 가지고도 사랑으로 화해를 할 수 있는 단계야.
그 다음은 리얼리즘 단계인데, 이 10~20년간이 가장 길고도 혹독한 시기이지. 싸움도 많이 하고… 서로가 책임을 다하면서 이 단계를 잘 견디고 살아내면 아름다운 노년을 보낼 수 있는 인간주의 단계로 넘어가게 돼. 이 때는 서로 적정선에서 양보하게 되고 때로는 상실감을 잘 견디게도 되지.”
“본인은 어떻다고 생각하시나요? 혹 세속적이긴 하지만 그럴싸한 사랑을 생각해 본 적은 없으신가요?”
“나…?! 아내가 옛 사랑이자 영원한 사랑이지. 낸들 왜 사랑을 생각해 보지 않겠나. 특히 나같은 자유인이 말야. 영원한 애틋한 사랑을 꿈꾸지. 그러한 아름다운 욕망은 곧 나같은 소설가에게는 커다란 창조적 에너지와 같은 거거든. 그렇지만 난 지금 행복해. 20대 때 생각하고 맹세했던 일- 죽을 때까지 소설 쓰겠다는 것과, 이 여자와 평생 연애하며 살겠다는 것을 지난 30여년 간 잘 지켜왔거든. 별 외도 않고 작가로 글 쓰기만 했고 작가의 길을 잘 지켜가고 있다고 자신 해. 그러니 행복한 거지.”
서로 확고한 믿음 가져야
“요즘 60~70대의 황혼이혼이 많습니다. 젊은 층의 이혼율도 증가하고 있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황혼이혼은 앞에서 얘기한 세 단계 중에 두번째인 리얼리즘 단계를 잘못 산 데서 비롯된 것이라고 봐. 이혼이 늘어가는 것은 자본주의가 만든 세속적 욕망이 남편과 아내 둘 사이를 유린하기 때문이지. 믿음이 있어야 해. 나는 내 아내라는 여자 자체를 믿어. 세상에서 가장 확고하게 믿을 수 있는 여자라고 생각하고 있지.”
“그런 상황에서는 오래 살고 싶은 욕망이 강할 수 있는데…”
“나이를 이겨내려면 생노병사의 욕망을 자연스럽게 뛰어넘어야 해. 난 꼭 오래 살아야 겠다는 생각은 없고, 죽음 자체가 두렵지는 않지만 죽음에 이르는 고통스런 과정이 있을까봐 겁나. 졸지에 치매나 오고 주위 가족에게 씻기 어려운 고통을 안겨준다는 사실을 생각만 해도 끔찍해.”
그러면서도 이순(耳順)을 훌쩍 넘어선 그의 표정은 한없이 편안해 보였다. 2년 뒤의 정년퇴직도 그에겐 아무런 의미가 없는 물리적 외적 상황일 뿐이라고 했다. 더 이상의 큰 욕심이나 미련도 없다고 했다. 퇴직 후에도 평생을 변함없는 맹세처럼 지켜 온 글쓰기란 일이 있잖느냐고 오히려 반문 했다. 그렇잖아도 오는 10월부터는 온라인 매체에 노시인의 연애를 그린 소설을 연재할 예정이라고 귀띔했다.
그리고 그는 이 시대의 여성들에게 들려준 남자의 얘기를 담은 산문집 <남자들, 쓸쓸하다>에서처럼 오늘 아침도 이런 희망 메시지를 띄운다.
- 필요한 것은 남자와 여자가 더불어 함께 사는 것이다. 인간이라는 동류항으로 묶이면 서로 이해 못할 것이 없다. 남자와 여자의 관계든, 남편과 아내의 관계든 간에 최종적으로 우리가 만나야 할 지점은 인간의 자리이다. ‘거울 앞에 돌아온 내 누님같은 꽃’이 되어 만날 때, 그 눈물겹고도 따뜻한 자리에서 만날 때, 최종적으로 붙들어야 되는 이름은 인간 뿐이다. - 인간의 얼굴로 뒷받침 되지 않으면 사랑도 다 소용없다.
그가 자리를 털고 일어서며 기자에게 귀엣말처럼 한 마디 던졌다.
“박형, 꼬리 바짝 내려. 더 늙어서 마누라에게 밥이라도 얻어먹으려면…ㅋㅋ”
■소설가 박범신(朴範信)은…
1946년 충남 논산에서 태어나 원광대와 고려대 대학원을 나왔고,
지금은 명지대 문예창작과 교수, 서울시문화재단 이사장으로 있다.
197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여름의 잔해>가 당선돼 등단한 이래 소설집 <토끼와 잠수함> <흰 소가 끄는 수레> <향기로운 우물이야기>와 장편소설<죽음보다 깊은 잠> <풀잎처럼 눕다> <불의 나라> <물의 나라> <침묵의 집> <더러운 책상> <외등> <나마스테> <촐라체> <고산자> 등을 펴냈다. 대한민국문학상(1981)·김동리문학상(2001)·만해문학상(2003) 등을 수상하기도 했다.
(옮긴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