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달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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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디다르마(타밀어: போதிதர்மன் 포디타루만, 산스크리트어: बोधिधर्म, 생몰년 미상) 또는 보리달마(菩提達磨, 중국어 정체자: 菩提達摩, 병음: Pútídámó),
달마(중국어 정체자: 達摩, 병음: Dámó)는 남인도 출신의 타밀인 승려로, 선종의 창시자인 동시에 초대 조사이자 인도 불교의 제28대 조사이다. 남인도의 팔라바국 왕자로 태어나 왕족의 허울을 벗어던져버리고 북위의 불제자로 귀화하였으며,[1] 160세까지 살았다는 전설이 있으나 자세한 생몰년은 기록이 없다. 무예를 한 승려라는 전설도 있다.
중국 선종 1대조이기도 하며, 제자인 혜가에게 법을 전해 혜가는 2대 조사가 되었다. [2]
[전설에 나오는 생애]
천축향지국 왕의 셋째 아들로 남인도 팔라바국(타밀어: பல்லவர்)에서 태어났다.
470년 무렵 남중국에 와서 선종을 포교했다. 반야다라에게서 배우고 40년간 수도했다. 불심 깊던 양 무제와 선문답을 주고 받았다는 전설이 있다.[3]
520년 전후에 북위의 도읍 뤄양에 갔다가 그 후 허난성 숭산 소림사에서 좌선수행(坐禪修行)에 정진하고, 그 선법(禪法)을 혜가 등에게 전수하였다.
달마의 전기에는 분명치 않은 점이 많다.
오늘날 우리가 익히 아는 염화미소나 보리달마를 다룬 여러 이야기는 후대에 첨삭된 것으로 보여진다.
염화미소 전설과 서역 28조의 전법설(傳法說)은 인도의 어떤 문헌에도 기록이 없고 중국 대륙 선종 초기 문헌에도 기록이 없다.
보리달마도 남북조시대에 서역에서 온 보리달마라는 이름의 중을 다룬 기록이 있지만, 그 사람은 낙양의 아름다운 불탑을 보고 경탄해마지않는 매우 경건한 중이거나,
불경인 『릉가경(楞伽經)』 중에서 무척 까다로운 경전에 통달하고 논리에 맞고 체계 있는 수련법이라고 주장하는 이입사행(二入四行)을 강조한 승려로서,
선종 조사인 보리달마와는 그 성격이나 행적이 판이하다.
당송 시대 선종의 발전과 더불어 보리달마의 전기가 추가되고 여러 가지 허구를 이용한 전설이 보완되어 선종의 제1대 조사로서 달마상(達磨像)이 사실(史實)과 무관하게 허구로서 확립되었다.
양 무제와의 선문답을 다룬 이야기, 혜가가 눈 속에서 팔을 자르고 법을 전수받았다는 이야기, 서역에서 서방으로 돌아가는 보리달마를 만났다다는 이야기 등이 그것이다.
그가 좌선 수행 중에 졸음이 몰려와서 자신의 눈꺼풀을 떼어 던져버렸더니 그 자리에서 최초의 차 나무가 자라났다는 전설도 있다.[4]
그러나 보리달마는 『사권릉가경(四卷楞伽經)』을 중시하고 이입(二入)[5]·4행(四行)[6]을 교시하고, 북위 말기 귀족성을 띤 가람불교와 수행한 체험을 도외시한 강설불교(講說佛敎)를 날카로운 비판한 일, 중생의 동일진성(同一眞性)을 믿고 선을 실천하고 수행하는 노력 등은 사실로 인정된다.
제자에는 혜가·도육·승부·담림 등이 있다.
[역사상 사실]
대한민국의 국적을 가진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진, 달마를 다룬 여러 내용은 불교에서 지대하게 영향받아 중국에서 발흥한 종교인 선종이 중국에서 대단히 번성하자 종교상 권위의 원천인, 함부로 가까이할 수 없을 만큼 거룩하고 고결한 분위기와 심상을 연출하려고 후대에 꾸며진 이야기이므로 믿어서 근거나 증거로 삼을 수 있는 정도나 성질은 전혀 없다.
서역 이십팔조 傳法說이나 염화미소를 비롯한 전설은 인도의 어떤 문헌에서도 기록이 전무하고 중국 선종의 초기 문헌에서도 전혀 보이지 않듯이 달마도 마찬가지다.
보리달마라는 이름이 최초로 등장하는 문헌인, 5세기 東魏의 楊衒之가 쓴 『洛陽伽藍記』를 보면 남북조시대 때 서역에서 온 보리달마라는 이름의 승려를 다룬 기록이 있다.
"西域에서 온 보리달마라는 沙門이 있다. 페르시아 태생의 胡人이다. 멀리 변경 지역에서 중국에 막 도착하여 탑의 金盤이 햇빛을 받아 빛나고 光明이 구름을 뚫고 쏟아지며, 寶鐸이 바람에 울려 허공에 메아리치는 情景을 보면서 그자는 聖歌를 읊조려 찬탄하고 신의 조화가 분명하다고 칭송했다. 일백오십 세인 그자는 많은 나라를 돌아다녀 가보지 않은 곳이 없지만, 이토록 훌륭한 사찰은 이 지상에서 존재하지 않고 佛國을 찾아도 이만한 곳은 아닐 듯하다고 말한 뒤 '南無南無'(namunamu ; 歸依)를 부르면서 며칠이나 계속하여 合掌했다."[7]
하지만, 이 기록 내용에서의 보리달마는 洛陽의 아름다운 불탑을 보고 敬歎해마지않는 매우 敬虔한 승려이거나,
불경인 『楞伽經』 중에 매끄럽지 못하면서 어렵고 무척 까다로운 四卷本『楞伽經』에 통달하고 二入四行[주 1]이라는, 논리에 부합하고 체계 있는 수련법을 강조한 승려로서,
선종의 보리달마와는 그 성격이나 행적이 아주 다르다.
근 90%가 11세기 이후에 작성되거나 인쇄된 방대한 둔황문헌[주 2] 중에 보이는 몇몇 기록에서의 보리달마도 인도 불교에 지대히 영향받아 중국에서 발흥한 종교인 선종에서 추존하는 보리달마와는 사상과 수행하는 방법과 이론·논리 구조가 전혀 다르다.
보리달마가 소림사 일대인 허난성 송루어에 머문 문헌상 시점은 북위 시대 초 孝文帝 즉위 10년인 486년에서 孝文帝 즉위 19년인 495년이지만 당시 허난성 송루어에는 소림사라는 사찰은 있지도 않았으므로[8] 보리달마는 소림사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듯이 보리달마를 다룬 이야기는 후대 선종이 득세하면서 보리달마를, 선종을 상징하는 인재로 追尊하고자 꾸며낸 여러 가지 전설 중의 하나에 불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