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국 동북 3성(東北 三省) 기행
중국 북동 3성 / 연변조선족자치주 / 옌지(延吉)의 용문교와 해란강
1. 백두산 가는 길과 연변조선족자치주(延邊朝鮮族自治州)
1990년, 내가 43세 되던 해 난생처음으로 해외여행을 했는데 홍콩-중국(백두산)-일본을 돌아보는 10박 11일짜리 여행이었다. 당시 청주에 있는 한국교원대학교에 6개월간 파견교육(음악교육 전문과정)을 갔었고, 그 과정 중에 해외여행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첫 해외 나들이라 느낀 바가 많았다.
당시는 중국이 공산국가라 홍콩을 거쳐 입국했고 정부에서 안기부(安企部) 직원을 동행시키던 시절이었다. 우리나라도 지금에 비하면 경제사정이 좋지 않았고 중국도 마찬가지였는데 특히 중국 북동 3성(요령성, 길림성, 흑룡강성)은 중국에서도 변방지역으로 경제사정이 매우 좋지 않았고 그곳에 사는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조선족(朝鮮族)들 생활 또한 열악하기 그지없던 시절이었다. 그렇지만 일본은 경제사정이 좋아 도쿄(東京) 일원을 돌아보는 국한된 일본여행이었지만 매우 부러웠던 기억이 난다.
북경 관광을 마친 후 다음 목적지는 백두산인데 먼저 요녕성(遙寧省) 심양(瀋陽)에 들렀다가 길림성(吉林省)으로 들어가 장춘(長春), 연길(延吉)을 거쳐 이도백하(二道白河)를 지나 백두산에 이르는 대장정(大長程)이다. 당시 요녕성(遙寧省), 길림성(吉林省), 흑룡강성(黑龍江省)을 묶어 북동 3성이라고 했다.
북경(北京)에서 비행기로 심양(瀋陽)까지 이동하고 거기서부터는 황량하고 끝없이 넓은 만주 벌판을 버스로 이동한다. 울퉁불퉁 비포장도로를 털털거리는 고물 관광버스로 10시간 이상 타다보면 엉덩이가 아픈 것은 말할 수도 없을뿐더러 맨 뒷좌석에 앉았던 가이드는 차가 덜컹거리는 바람에 머리를 천정에 부딪쳐 이마에 밤톨 같은 혹이 생기기도 했다.
요녕성(遙寧省) 성도(省都)인 심양(瀋陽)은 인구 500만이 넘는 대도시인데 예전에는 봉천(奉天)이라고 불리던 도시이다. 중국 간자체(簡字体)로는 심양(沈阳)이라고 쓴다. 일제 점령기 일본이 도시이름을 고쳤었는데 천황을 받드는 도시(奉天)라는 의미이다. 심양(瀋陽)에서 장춘(長春)을 거쳐 이도백하(二道白河)까지는 끝없는 만주 벌판을 달리는데, 가도 가도 인가는 별로 보이지 않고 옥수수밭의 연속이다.
결국, 달리던 중 버스 바퀴 펑크가 나서 길옆에 세워놓고 수리를 했다. 도로변은 막 모심기가 끝난 넓은 논이 있고 논두렁 옆으로 작은 돌무더기와 무너진 흙담 같은 것이 보이는데 초라한 돌비석에 붉은 한글로 ‘발해고성’이라고 씌어있다. 거기가 어디쯤인지 기억은 나지 않는데, 여기서 우리 민족이 세운 저 해동성국(海東盛國) 발해(渤海)의 흔적을 만나다니 감회가 새롭다. 우리 조선족(朝鮮族)인 대조영(大祚榮)이 세워 오래 지속되지는 못했지만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던 발해의 흔적을 이곳에서 만나다니.... 이곳 만주 벌판은 옛 고구려와 발해의 터전이었으니 엄밀히 보면 우리 땅이었던 셈이다.
이 부근에 살던 중국인(여진, 말갈족 등)들은 벼농사를 지을 줄 몰랐다는데 우리 조선족(韓民族)이 논농사를 짓기 시작하여 지금은 조선족은 물론 중국인들도 논농사를 짓는다고 한다. 이곳은 조선족이 많이 살고 있어 집 구조나 마을의 모습이 우리나라 시골의 풍경을 보는듯하여 친근감이 느껴진다.
내가 이곳을 다녀온 후 1998년부터인가 중국정부는 동북공정(東北工程)이라고 하여 고구려와 발해의 역사도 중국 역사에 포함시키는 억지 학설로 역사를 왜곡하려 하여 한-중간 외교문제로 비화되기도 했다.
중국 북동 3성 중 길림성(吉林省)은 중국 최초의 소수민족 자치주인 연변조선족자치주(延邊朝鮮族自治州)이다. 그러나 지금은 인원수도 급감하는 등 자치주로서 지위가 위태롭다고 한다.
길림성(吉林省)은 예전부터 고조선, 고구려, 발해의 땅이었으니 조선족이 많이 살았는데 일제침략기에는 일제의 억압을 피하여 많은 우리 민족이 이주해 살았던 곳이다. 특히 독립운동의 근거지이기도 했던 지역으로 지린성 인구 중 약 38%가 조선족이라고 한다.
우리나라 시골을 연상시키는 연변 시골 / 연변대학교 / 용두레우물(龍井)
연변조선족자치주인 길림성(吉林省)의 성도(省都)는 연길(延吉)인데 인구는 약 50만으로 절반 이상이 조선족이며, 따라서 옌지 시내의 상점 간판들은 모두 한글과 한자를 병기(倂記)한다.
연길(延吉)에는 우리 귀에 익숙한 곳이 많다. 가곡 ‘선구자’에 나오는 해란강(海蘭江)과 용문교(龍門橋), 용두레우물(龍井),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윤동주(尹東柱) 시인 생가(生家), 그리고 조선족이 세운 연변대학(延邊大學), 화룡현에 있는 청산리전투의 대승을 거두었던 청산리 계곡 등이다.
청산리 계곡은 1920년 김좌진 장군이 이끄는 독립군이 일본 정예군 200명을 몰살시키는 대승을 거둔 역사적인 곳인데 잡초만 무성한 황량한 골짜기는 팻말 하나 없이 쓸쓸했다. 용두레우물(龍井)은 길쭉한 표지석이 서 있고 가까운 곳에는 윤동주 시인이 다녔던 대성중학교도 있다. 우리들의 여행일정 중 연변대학 방문이 있어 연변대학 총장실에 들러 총장과 면담이 있었다. 중국 56개 소수민족 중 대학을 설립한 민족은 오직 조선족뿐으로 바로 이 연변대학이라고 한다. 그런데 아쉽게도 모든 강의는 중국어로 한다는 답변이다. 중국 학생들도 많지만, 조선족도 젊은 사람들도 한국어가 서툴러서 한국어 강의를 어려워한다고 한다. 그리고 조선족의 교육열에 대해서 총장이 재미있는 비유를 한다.
‘한국은 농경사회여서 논밭과 소를 매우 소중하게 여긴다. 그런데 자식들 교육을 위해서는 그 논밭과 소를 팔아서 자식을 학교에 보낸다. 중국의 어떤 다른 민족도 그런 민족은 없다.’
미인송 호텔(美人松宾馆) / 백두산의 관문 이도백하(二道白河) / 백두산 미인송(美人松)
백두산 관광의 관문이라 일컬어지는 이도백하(二道白河)는 자그마한 시골 마을인데 백두산에서 발원하여 중국 쪽으로 흐르는 송화강(松花江)의 원류라는 의미의 강 이름에서 따온 지명이라고 한다. 이도백하에 있는 미인송호텔(美人松賓館)에서 일박을 했는데 이곳에는 미끈하고 곧게 자란 소나무들이 많은데 미인송(美人松)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백두산 일대에서 자라는 소나무로 ‘장백미인송(長白美人松), 이도백하 미인송(二道白河美人松)’으로 분류도 한다는데 우리나라 남쪽에서는 보기 힘든 소나무로 키가 엄청나게 크고 잔가지가 없으며 곧게 자라서 무척 아름답게 보인다. 나무껍질은 아랫부분은 회갈색, 위로 올라갈수록 붉은색이다.
미인송 호텔은 말이 호텔이지 열악하기 그지없었다. 침대는 그런대로 괜찮은데 화장실 물도 잘 나오지 않고 청결상태도 좋지 않다. 이곳 호텔 프런트를 보는 순진한 조선족 아가씨는 예쁘장한데 간절한 눈빛으로 우리를 쳐다보며... ‘한국을 꼭 가고 싶은데 갈 방법이... 누가 초청해주면 갈 수 있다는데...’
초청해준다, 어쩐다... 적당히 둘러대면 뭐든지 다 할 표정이다. 당시 한국의 못된 사기꾼들이 조선족들을 속여 한국으로 데려와 팔아먹고... 그런 사기꾼들이 속여먹기에 딱 좋겠다 싶어 안타까웠다.
이도백하에서 백두산 입구까지는 버스로 약 30분 정도 걸린다.(34km)
2. 우리 민족의 영산(靈山) 백두산(白頭山)
우리 한민족이 영산(靈山)으로 부르는 백두산을 중국에서는 장백산(長白山)이라고 한다.
중국도 백두산과 정상의 천지(天池)를 신성하게 여기는데 우루무치 천산산록에도 또 다른 천지(天山天池)도 있다. 이 백두산은 우리 한민족의 성산(聖山)일뿐더러 이 지역의 소수민족인 여진족(女眞族), 말갈족(靺鞨族)들도 자기 민족의 성산이라고 한다며, 각각 개국신화(開國神話)들이 있다고 한다.
<1> 백두산 노천온천
우리를 태우고 온 버스는 장백폭포(長白瀑布) 앞 노천온천 입구에 우리를 내려놓는다. 장백폭포는 천지(天池)에서 유일하게 바깥으로 나오는 물줄기(폭포)인데 중국으로 흐르는 송화강(松花江)이 된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천지폭포(天池瀑布)라 하는데 우리나라와 중국의 국경을 흐르는 압록강과 두만강은 천지에서 물이 땅속으로 스며들어 샘으로 솟아나와 강의 원류가 된다.
6월 초인데도 백두산은 골짜기마다 눈이 덮여있고 날씨도 제법 서늘하다. 버스에서 내려 골짜기로 올라가자 갑자기 유황(硫黃) 냄새가 나며 자욱이 안개가 서리는데 가까이 가면서 보니 넓은 바위 위로 물이 흘러넘치는데 수증기를 무럭무럭 뿜어대는 노천(露天)온천이다.
백두산 노천온천 / 오리알 삶아먹기 / 송화강의 원류 장백폭포
너럭바위 위로 흘러넘치는 뜨거운 온천수가 얼마나 아까운지... 여기에다 호텔을 지으면 얼마나 좋을까?
버스에서 가이드가 봉지에 오리 알을 담아 들고 내리기에 뭘 하려나 했더니 우리에게 두 개씩 나누어주며 온천물에 넣었다가 5분쯤 후 꺼내면 반숙이 된다며 각자 해 보라고 한다. 바위 구멍에서 퐁퐁 솟아나오는 온천수는 손을 넣으니 기절할 만큼 뜨겁다. 그 속에 오리 알을 넣었다가 나중 꺼내려고 손을 넣으려니 너무 뜨거워 넣을 수가 없다. 이걸 어떻게 꺼내지?? ㅎㅎ
노천온천 조금 아래쪽에 허름한 온천욕장이 있는데 절로 헛웃음이 나온다. 입장료도 없고, 문도 없는 시멘트 건물 두 칸인데 한쪽은 남탕(男池), 한쪽은 여탕(女池)이라고 씌어있다. 그런데 두 칸 사이에 웬 창문을? 그런데 문도 달지 않아서 구멍이 휑하니 뚫려있다. 바위에서 흘러내리는 물은 남탕과 여탕으로 들어가 욕탕을 채우고는 철철 흘러넘쳐서 다시 바깥으로 하염없이 흘러나온다. 아이구 아까워라.... 장백폭포까지는 눈이 많아 가지는 못하고 멀리서 사진만 찍고 돌아섰다.
<2> 백두산(白頭山) 오르는 길
지금은 백두산 정상의 천지(天池)까지 관광버스가 올라간다지만 당시는 도로사정이 좋지 않아 버스는 올라가지 못하고 별다른 교통편도 없었다. 가이드는 산 입구에 우리를 앉혀놓고 근처 공사장에서 트럭을 빌려와 우리를 태우고 올라가며 울화통을 터뜨린다. ‘저런 돼지같이 멍청한 여진족 놈들 같으니라고... 쯧쯧’ 하며 혀를 찬다.
중국 돈 200위안에 흥정이 되었는데 외국인이 쓰는 중국 돈인 외환폐(外貨兌換券)를 주었더니 못 보던 돈이라며 내국민이 쓰는 인민폐(人民幣)를 달라고 했다고 한다. 같은 200위안이라도 외환폐가 인민폐보다 두 배는 더 가치가 있는데 무식한 사람들이다 보니 인민폐를 달라고 했던 모양이다.
눈 덮인 포장도 되지 않은 길을 중간쯤 올라가다가 차를 세우고 골짜기를 내려다볼 수 있는 곳으로 안내하는데 이곳 이름이 풍구(風口)란다. 정말 골짜기로 시원한 바람이 불어가는 통로다. 풍구에서 내려다보이는 장백폭포와 잔설(殘雪)이 쌓인 계곡의 풍경이 넋을 잃게 한다. 이곳이 2,500m 이상 되는 곳이어서 그런지 제법 숨이 가쁘다.
다시 차에 올라 눈 덮인 비탈길을 트럭은 용케도 미끄러지지 않고 덜덜거리며 올라가는데 트럭 짐칸에 앉은 우리는 추워서, 무서워서 오들거리며... 얼마쯤 올라왔는지 갑자기 눈이 병풍처럼 쌓여서 길이 반쯤 묻혀있는 곳까지 와서는 트럭 운전수는 더 이상 갈 수 없다고 주저앉는다. 가이드가 실랑이를 하더니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고 걸어가자고 한다. 눈길에 미끄러져 엉덩방아를 찧으며 10여분 걷는데 고산증세인가 숨이 턱까지 찬다. 다행히 곧바로 눈에 덮여있는 기상대가 보이고 바로 언덕 너머가 천지였다.
풍구(風口)에서 내려다보이는 장백폭포 / 백두산 입구 / 금강산 구룡폭포(1999년)
지금은 중국 쪽이나 북한 쪽에서 천지를 오르는 여러 갈래의 등산로(東坡, 南坡, 西坡, 北坡)가 있다지만 당시(1990년)에는 중국에서 오르는 주 등산로조차 공사가 겨우 끝난 후라 도로사정이 매우 좋지 않았다. 등산로 중간쯤에는 이 도로를 닦다가 순직한 인부들의 추모비(追慕碑)도 서 있다. 함께 여행을 갔던 부산에 사는 친구들이 무척 마음에 들어 가까이 지냈는데 풍구(風口)에서, 백두산(長白山) 입구에서 함께 사진을 찍었다. 중국인들은 백두산을 장백산(長白山)이라고 한다.
참고로, 나는 1999년 금강산 관광이 시작되었을 때 동해안에서 배로 금강산을 갔는데 만물상, 구룡폭포 등을 보고 온 적이 있어 사진을 올려본다.
<3> 아! 아! 천지(天池)
하늘에 구름이 좀 끼기는 했지만 제법 맑은 날씨로 백두산 전체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백두산 정상부근에 기상대(氣象臺)가 있는데 거기에서 언덕을 오르면 곧바로 천지(天池)가 조망된다. 천지를 마주하자 엄청난 장관(壯觀)에 숨이 막히고 민족의 영산(靈山)에 올랐다는 감회에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이곳 백두산은 날씨가 너무 변덕스러워 3대가 덕을 쌓지 않으면 맑은 날씨에 천지를 볼 수 없다는데 조상님들의 음덕(陰德)인지, 운이 좋아서인지, 화창한 날씨는 아니었지만 눈과 얼음으로 뒤덮인 천지와 그 둘레를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높고 낮은 눈 덮인 봉우리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하늘 호수 천지(天池)는 둘레의 길이 14km, 깊이는 평균 수심이 200m로 가장 깊은 곳의 수심은 384m 나 된다고 하는, 세계에서 가장 수심이 깊은 화산호수(칼데라호)라고 한다. 가이드는 빨리 사진이나 찍고 서둘러 내려가자고 연신 성화다. 날씨가 어떻게 변덕을 부릴지 알 수 없으니 안전을 책임질 수 없다고 한다. 그러나 얼마나 벼르고 온 민족의 성산 백두산이고, 천지(天池)인데 금방 내려가자니...
벅차오르는 감회를 억누르지 못하고 일행 중 한 명이 두 손을 번쩍 들고 ‘만세’를 외치자 가이드는 질겁하며 절대로 만세를 부르거나 태극기를 흔들면 안 된다고 한다. 이 백두산과 천지는 예전에는 모두 한국 땅이었는데 한국전쟁(6.25)이 끝난 후 김일성이 백두산을 반을 나누어 새로운 국경을 긋는 바람에 천지도 절반만 한국 땅, 절반은 중국영토가 되었다고 하고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이곳은 중국 땅이다.
우리가 서 있는 중국령 천문봉(天門峰)에서 천지 건너편으로 보이는 북한 쪽 백두산은 최고봉인 장군봉이 높이 솟아있고 조금 낮은 곳에 북한 초소(哨所)가 어렴풋이 보이는데 초소에서 천지로 내려오는 가파른 계단도 가물가물 보인다.
눈 덮인 백두산 천지(6월) / 북한 땅 장군봉
채근하는 가이드를 못 본체, 우리는 들고 온 간식 중에서 빵과 술, 과일들을 펼쳐놓고 제사를 올렸다.
일제히 재배를 올린 후 우리는 꿇어 엎드려있고 제일 연장자가 즉흥 제문(기도문?)을 읽고 다시 큰절을 올리고....
예정에 없던 즉흥적인 제사지만 모두 엄숙한 얼굴이 되었다. 백두산 아래쪽 기슭은 숲이 울창한데 특히 하얀 껍질이 일어나는 자작나무숲(白樺林)이 많은 것이 인상적이다. 천지(天池) 부근에 오면 숲은 사라지고 키 작은 관목들만 보이는데 고도가 높고 비바람이 심하고 추운 탓으로 키 큰 교목(喬木)들은 자라지 못하는 모양이다. 천지 부근의 키 작은 관목(灌木) 숲에 들어갔는데 관목조차 30cm 이상 자라지 못한다. 꽃을 보니 진달래가 틀림없는데 줄기가 모두 땅 위에 누워있다. 꽃도 조그마하고 잎도 작고... 그리고 노란 꽃을 피우고 있는, 진달래를 닮았지만 좀 색다른 처음 보는 꽃이 지천으로 피어있어 가이드에게 물었더니 백두산 노랑만병초(萬病草)라고 한다.
진달래과에 속하는 노랑만병초는 황화두견(黃花杜鵑), 석남화(石楠花), 들쭉나무라고도 부른다는데 천지 주변은 온통 노랑만병초 천국이었다. 아! 북한 술의 유명한 브랜드인 백두산 들쭉나무 술!!
나중에 들어보니 우리(음악전공 팀)보다 사흘 전에 이곳으로 왔던 미술전공 팀은 진눈깨비가 쏟아지고 바람이 몰아쳐서 중간에 도로 내려갔다고 한다. 사진을 찍으려 해도 셔터가 얼어 눌러지지 않았다고... 우리 음악전공 팀은 매우 운이 좋았던 셈이다.
<4> 백두산 녹용(鹿茸)
백두산 관광을 마치고 저녁에 쇼핑을 갔는데 가이드가 데리고 간 가게는 시골 한약방을 연상케 하는 어두컴컴한 가게인로, 백두산 산삼(山蔘), 녹용(鹿茸), 모피(毛皮), 이름 모를 한약재(韓藥材) 등을 팔고 있다.
백두산 산삼이라고 내놓은 상품은 이끼를 깔고 하얀 수염뿌리가 온전하게 보존된, 제법 통통한 산삼인데 진위(眞僞)를 알 수는 없지만 제법 귀한 약재로 보였고 우리 돈으로 20만 원쯤 한다. 그리고 젓가락같이 가느다란 산삼 뿌리를 수북이 쌓아놓고 한 뿌리에 우리 돈 천원이라며....
주인 말로는 백두산에서 캔 진짜 산삼이라지만 장뇌삼이겠지... 나중 한국에 온 후에야 그까짓 천원인데 몇 뿌리 사서 씹어 먹을 걸 후회를 했다. 나는 이곳에서 큰맘 먹고 녹용을 하나 샀는데 두 갈래로 갈라진, 보송보송 솜털이 있는 30cm 가량의 녹용인데 우리 돈으로 8만 원 정도 주고 샀다. 한국으로 입국할 때 문제가 되지 않을까 걱정하며 안기부(安企部) 직원을 쳐다보았더니 그냥 눈을 꿈적이며 고개를 끄떡인다. 그런데 이 녹용이 엄청난 효과가 있을 줄이야....
귀국 후 잘 아는 한의원에 가서 녹용을 보여주었더니 꽃사슴 뿔이라며 한국에서도 요정도면 10만 원 정도에 살 수 있다며 별로라는 표정이어서 조금 떨떠름했었다.
아들을 먹이려고 사왔으니 우선 아들 먹일 한재를 먼저 짓고 나머지는 내가 먹을 것인데 적당히 배분해서 한재를 짓던지, 몇 첩을 짓던지 하랬더니 알았다고 하며 무게를 달아보더니 아이들은 7첩이 한재이고 어른들은 20첩이 한재인데 조금 모자라겠다고 한다. 그러더니 아들과 나를 한 재씩 지어준다.
그때 아들 녀석이 중학교 1학년이었는데 어릴 때부터 잘 먹지 않아 빼빼 말랐다. 초등학교 때에는 키도 반에서 제일 작았고 혈액순환이 좋지 않아 겨울이면 입술이 새파래지고 추위를 견디지 못했다.
의사가 추울 땐 보온을 잘 해주고 바깥에 나가지 못하게 하라고 해서 겨울이면 옷을 겹겹이 껴입히고 마스크에 장갑에... 그래도 행여 동상(凍傷)에 걸릴까 항상 노심초사했었다. 그런데 이 녹용을 먹고 나서 완전히 체질이 바뀌고 건강해졌으니 기적 같은 예상외의 결과를 가져올 줄은 정말 몰랐다.
아들 녀석이 갑자기 살이 오르기 시작하고 혈색이 돌아왔음은 물론 겨울이 되면 오히려 덥다고 옷을 벗어 던지고 바깥으로 뛰어나가고.... 키도 1년에 20cm 가까이 자라고 체중도 불어났다.
완전히 체질이 바뀌었으니 보는 사람이 신기할 밖에... 대학 때 아들 녀석은 키가 180cm, 체중이 80kg이 넘었다.
나도 몇 년간 눈에 띄게 건강이 좋아져서 녹용의, 백두산 녹용의 효과를 톡톡히 본 셈이다.
◆ 이도백하에서의 에피소드
이도백하(二道白河)에서의 이른 아침, 친구와 둘이 호텔을 나서 산책을 했는데 재미있는 시간이었다.
이른 아침인데도 광장 한쪽에서는 손수레에 국수와 만두, 빵, 우유 등속을 차려놓고 장사를 하고 있고 몇몇 사람들이 둘러서서 아침 식사를 하고 있다. 중국은 어디를 가나 이렇게 아침 식사를 집에서 하지 않고 길거리에서 사 먹는 풍경을 많이 볼 수 있다.
우리는 옆에 서서 구경을 하고 있는데 30대 후반쯤, 머리는 언제 감았는지 떡처럼 굳어있고 얼굴도 땟국물이 꾀죄죄, 옷차림도 언제 세탁했는지... 그런데 갑자기 나한테 뭐라고 말을 건다.
‘노, 아이 캔트 스픽 차이니즈(No, I can’t speak Chinese/나는 중국어를 못해요...)’
그런데 또 뭐라고 중얼거리는데 가만히 들어보니 우리나라 말이다.
알고 보니 조선족으로 나보고 한국에서 왔느냐고 물어보는 거였는데 강한 북한식 사투리의, 어물거리는 말투로 물으니 꼭 중국말을 하는 것 같다. 오히려 내가 질문을 퍼붓기 시작했다.
너는 무슨 일을 하나? 벌목하는 일을 한다. 한 달 수입이 얼마냐? 200위안(30만 원)이다.
그것으로 생활이 되나? 아내가 식당에서 일하는데 월급 90위안(13만 5천원)인데 먹고 사는 데는 일없다.(넉넉하다) 집은 어떤가? 정부에서 배정해 준 집에서 산다.
북한 사정을 아는가? 묻지도 마라. 사는 게 말이 아니다.
어떻게 아나? 북한에서 식량을 구하러 이곳까지 오는데 이곳에 사는 친척들은 곡식을 보내면 국경에서 다 빼앗기니 밥을 누룽지로 만들어서 싸 보낸다. 그러면 국경에서 걸리지 않고 가지고 갈 수 있다.
<바로 이 시기가 북한의 ‘고난의 행군’이 막 시작되던 때였다.>
그리더니 이 친구 한 가지 제안을 한다. 개 한 마리를 이만 원만 내면 모두 손질해 양념까지 해서 먹게 해 주겠다. 단돈 이만 원이면 모든 일행이 포식을 하겠지만 일정이 맞지 않아 포기... 아깝다.
연변조선족자치주(延邊朝鮮族自治州)
나는 1990년 이른바 북한이 경제난에 허덕이던 ‘고난의 행군’ 시기에 백두산과 연변(沿邊) 일대를 둘러보고 난 후, 이 지역에서 보고 들은 사실들을 덧붙여 소개하고자 한다.
중국은 전체 인구의 92%를 차지하는 한족(漢族) 외에 55개 소수민족(少數民族)이 살고 있는데 오늘날까지도 티베트(吐藩)족, 위구르(維吾尔)족을 비롯하여 최근에는 홍콩(香港)까지 자치권을 요구하며 연일 시위를 벌여 세계의 시선이 집중되고 있다. 중국 인구의 8%를 차지하는 소수민족 중에서 우리 조선족은 다시 소수민족 전체의 2.6%인 190여만 명이 거주하고 있는데 중국 동북쪽의 변경으로 동북삼성(東北三省)이라고 일컫는 요녕성(遼寧省), 흑룡강성(黑龍江省), 길림성(吉林省)에 주로 살고 있다. 중국이 조선족자치주로 지정한 곳이 지린성(吉林省)에 있는 연변조선족자치주(延邊朝鮮族自治州)인데 전체 인구의 42% 정도가 조선족이라고 하며, 이곳이 바로 동간도(東間島)이다. 조선족자치주의 주도(州都)는 연길(延吉)이고 도문(图門), 돈화(敦化), 용정(龍井), 훈춘(琿春), 화룡(和龍)의 6개 시(市)와 안도(安图), 왕청(汪清) 2개 현(縣)이 있다.
연길(延吉)의 인구는 총 50만 정도인데 절반정도가 조선족인 셈으로, 시내를 다니면서 보면 간판은 한자를 쓰고 아래는 반드시 한글을 병기(倂記)하고 있다. 이곳 옌지(延吉) 인근에는 우리 귀에 너무나 익숙한 곳들이 수없이 많은데 가곡 ‘선구자’에 나오는 해란강(海蘭江)과 용문교(龍門橋), 용두레 우물(龍井),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윤동주(尹東柱) 시인 생가(生家), 가까운 곳에는 시인이 다녔던 ‘대성중학교’도 있다. 그리고 조선족이 세운 연변대학(延邊大學), 화룡현에 있는 청산리전투의 대승을 거두었던 청산리(靑山里) 계곡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귀에 익은 친근한 명칭의 명소들이 산재한다.
<가곡> 선구자(先驅者) - 윤해영 작사, 조두남 작곡
(1절) 일송정(一松亭) 푸른 솔은 늙어 늙어 갔어도 / 한줄기 해란강(海蘭江)은 천년 두고 흐른다
지난날 강가에서 말달리던 선구자 /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2절) 용두레(龍井) 우물가에 밤새 소리 들릴 때/ 사나이 굳은 마음 길이 새겨 두었네
조국을 찾겠노라 맹세하던 선구자 /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청산리 계곡은 1920년 김좌진(金佐鎭) 장군이 이끄는 독립군이 일본 정예군 200명을 몰살시키는 대승을 거둔 역사적인 곳인데 잡초만 무성한 황량한 골짜기는 팻말도 하나 없어 쓸쓸하였다.
우리의 여행일정 중 연변대학(延邊大學) 방문이 있어 연변대학 총장실에 들러 총장과 면담이 있었다.
총장 이야기로 중국 55개 소수민족 중 대학을 설립한 소수민족은 오직 조선족뿐인데 바로 이 연변대학이라고 한다. 그런데 아쉽게도 모든 강의는 중국어로 한다는 답변이다. 중국 학생들도 많지만, 조선족도 젊은 사람들은 한국어가 서툴러서 한국어 강의를 어려워한다고 한다. 그리고 조선족의 교육열에 대해서 총장이 재미있는 비유를 한다.
‘한국은 농경사회여서 논밭과 소를 매우 소중하게 여긴다. 그런데 자식들 교육을 위해서는 그 논밭과 소를 팔아서 자식을 학교에 보낸다. 중국의 어떤 다른 소수민족도 그런 민족은 없다.’
아침 일찍 호텔을 나와 아침 산책을 했는데 그곳에서 꾀죄죄한 조선족 남자를 만나서 짧은 대화를 할 수 있었다.
북한 사정을 아는가? 묻지도 마라. 사는 게 말이 아니다. 어떻게 아나? 북한에서 식량을 구하러 이곳까지 오는데 이곳에 사는 친척들은 곡식을 보내면 국경에서 다 빼앗기니 밥을 누룽지로 만들어 싸서 보낸다. 그러면 국경에서 걸리지 않고 가지고 갈 수 있다. 그 밖에 만주벌판을 버스로 달리다 우연히 길가에서 발견한 ‘발해고성’이라 쓴 작은 비석, 우리나라 시골 풍경을 연상케 하는 초가집, 조선족이 처음 시작했다는 논농사 현장, 너무나 순박한 조선족들...
우리나라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고조선(古朝鮮), 부여(夫餘) 고구려(高句麗)의 영토를 잠시 살펴보면 당시는 예상컨대 국경선이 고무줄처럼 자주 부풀어 오르고 줄어들던 때라 분명한 경계선이 없었을 것이기는 하지만 현재 중국영토인 만주지역과 요동(遼東) 반도 전역이 고구려 영토였던 것을 알 수 있다.
고구려 전성기 / 발해 / 외금강 금강문 / 외금강 삼선봉
고구려의 전성기에는 영토가 3배 정도나 커져서 중국 동북부지역은 물론 동부해안인 산동(山東)반도 대부분을 차지할 정도였지만 영토가 안정될 시기의 고구려 영토는 사진과 비슷한 영역으로 볼 수 있다.
고구려는 초대 동명성왕(東明聖王/BC 37~BC 19)으로부터 시작하여 마지막 보장왕(寶藏王/642~668)에 이르러 나당(羅唐)연합군에 의하여 멸망하기까지 700여 년간 지속되었던 강대국이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소수림왕(小獸林王/371~384) 때에 불교의 전래,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391~413)에 이르러 광대한 영토 확장 등이 우리가 학교에서 공부한 우리나라 고대사이다. 고구려가 멸망한 후 고구려 유민(流民)들이 후고구려를 세우기도 했지만 곧이어 고구려 유장(遺將) 대조영(大祚榮)이 발해(渤海)를 건국하고 확장하는데 과거 고구려 영토에 동만주(東滿洲)지역도 추가된다.
발해(渤海)는 AD 668년 고구려가 멸망한 이후 698년 대조영이 말갈족(靺鞨族)들을 거느리고 동만주지역에 나라를 세웠는데 당은 705년 발해를 인정했고 713년에는 공식적인 외교 관계도 맺었다.
초대 高王(大祚榮/698~719)부터 제15대 인선(諲譔/906~926)까지 228년간 지속되었던 발해는 5대 선왕(宣王)에 이르러 연호를 건흥(建興)이라 고치고 요하강(遼河江) 일대의 후고구려지역까지 확장하여 대국으로 성장했다. 이때 5경 15부 62주(五京 十五府 六十二州)를 설치하고 정비하여 대국의 기틀을 공고히 했으며 후세 사람들은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던 발해를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 불렀다. 이승휴(李承休)의 제왕운기(帝王韻紀)에 보면 대조영을 고구려의 유장(遺將)으로 단정하고 발해사를 고구려사(高句麗史)의 연장(延長)으로 보았는데 중국은 발해가 중국의 일부였다고 주장하지만 대부분의 학자들은 발해사(渤海史)를 한국사(韓國史)의 일부로 인정하고 있다고 한다. 이렇게 고대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중국과 우리 대한민국의 국경선이 어디까지인지가 매우 모호한데 국가 간의 합의(合意)로 국경선이 확정되어 비석으로 남은 것이 위에 언급한 ‘백두산정계비(白頭山定界碑)’이고 유일한 근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현대에 이르러 한국과 중국이 정식수교(修交)로 국가 간 조약을 한 것이 1992년에 맺은 한중수교(韓中修交)이다. 한중수교 이후 한국인들이 고구려와 발해의 유적을 답사하기 위하여 중국을 방문하게 되자 위기감을 느낀 중국은 2002년 2월, 동북공정(東北工程)이라는 프로젝트를 시작하게 된다.
2004년, 동북공정 사무처가 발표한 내용은 현재 중국의 국경 안에서 이루어진 모든 역사는 중국의 역사이므로 고구려(高句麗)와 발해(渤海)의 역사 또한 중국의 역사라고 주장하는 어처구니없는 내용을 인터넷에 공개하면서 한중간 외교 문제로 비화(飛化)되었다. 한국도 중국의 역사 왜곡에 대처하기 위해 2004년 고구려사 연구재단(硏究財團)을 발족했는데 연구내용은 아직 공식적으로 발표하지 않고 있다.
백두산(白頭山)의 역사적 배경
우리 한민족의 영산(靈山)으로 부르는 백두산은 중국에서는 장바이샨(長白山)이라고 한다. 중국에서도 이 백두산과 정상의 천지(天池)를 신성하게 여기는데 중국에는 신장위구르자치주의 우루무치(乌鲁木齐) 천산산록(天山山麓)에도 또 다른 천지(天山天池)가 있다. 이 백두산은 우리 한민족의 성산(聖山)일뿐더러 이 지역의 소수민족인 여진족(女眞族), 말갈족(靺鞨族)들도 자기 민족의 성산이라고 한다며, 각각 개국신화(開國神話)들이 있다고 한다.
백두산(白頭山)은 천지(天池)를 정점(頂點)으로 동남쪽으로는 마천령산맥(摩天嶺山脈)의 대연지봉(大臙脂峰, 2,360m), 간백산(間白山, 2,164m), 소백산(小白山, 2,174m), 북포태산(北胞胎山, 2,289m), 남포태산(南胞胎山, 2,435m), 백사봉(白沙峰, 2,099m) 등 2,000m 이상의 산들이 연봉을 이루면서 종단하고 있다. 한반도의 지붕이라 일컫는 개마고원(蓋馬高原)은 백두산 남쪽 마천령산맥(摩天嶺山脈)과 낭림산맥(狼林山脈), 부전령산맥(赴戰嶺山脈)으로 둘러싸인 분지(盆地)로 평균 해발 1,300m가 넘는다. 중국에서는 한대(漢代)에 백두산을 ‘단단대령(單單大嶺)’, 남북조의 위(魏)대에는 ‘개마대산(蓋馬大山)’이라 하였고 또는 ‘도태산(徒太山), 태백산(太白山)’이라고도 불렀다고 한다.
산해경(山海經)은 고대 중국 선진(先秦)시대(BC 200년)에 저술된 국외의 지리를 다룬 지리서인데 여기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백두산 이름은 불함산(不咸山)이었다. 따라서 백두산(白頭山)의 명칭은 불함산(不咸山)으로부터 시작하여, 단단대령(單單大嶺)-개마대산(蓋馬大山)-도태산(徒太山)-태백산(太白山)-백산(白山)-장백산(長白山)-백두산(白頭山) 등으로 불리어왔으나 한대 이후 불리기 시작한 명칭의 공통점은 백(白), 즉 희다는 뜻이다.
‘머리가 하얀 산’이란 뜻의 백두산이라는 이름은, 화산 활동으로 생성된 흰색 부석(浮石)이 온 산을 뒤덮고 있어 붙여졌다고도 하고, 1년 중 겨울이 230일 이상으로 정상에 흰 눈이 쌓여 있는 기간이 길어 붙여졌다고도 한다. 중국인들은 백두산(白頭山)을 ‘창바이산(長白山)’이라고 부르는데 그 의미는 같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조선조에 백두산을 ‘태백산(太伯山)’이라고도 했는데 백두산은 산세가 장엄하고 자원이 풍부하여 일찍이 한민족(韓民族)의 발상지로, 또 개국의 터전으로 숭배되었던 민족의 영산(靈山)이었다.
단군신화에서 하늘의 ‘환인천제(桓因天帝)께서 아들 환웅(桓雄)에게 신하 3,000명을 주어 땅으로 내려보내니 태백산으로 내려와 신단수(神檀樹)아래 신시(神市)를 베풀었다.’고 하는데 태백산이 바로 백두산을 말하는 것이다. 백두산은 우리 민족의 성산이지만 여진족, 말갈족의 개국신화에도 등장하는 그들의 성산이기도 하다. 압록강과 두만강은 백두산의 비탈진 면에서 샘으로 솟아 시작되고, 천지의 물이 폭포로 흘러나와 북쪽으로 흘러내리는 것이 송화강(松花江)의 원류이다.
1962년, 중국과 북한 정부가 영토의 경계를 나누어 백두산의 60%는 중국 땅, 40%는 북한 땅으로 확정하고 천지호(天池湖)도 절반으로 나누었다. 이전에는 백두산은 기슭을 포함하여 모두 우리 국토였으니 기가 막히는 북한의 결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