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유식론 제7권
5.2. 유식의 뜻이 성립되는 경전과 바른 논리
[문] 어떠한 성스러운 가르침과 바른 논리에 의거해서 유식의 뜻이 성립되는가?227)
[답] 어찌 이미 말하지 않았던가?
[문] 말하긴 했지만 알지 못하겠다.
다른 교의(敎義)를 논파함으로써 문득 자신의 교의가 성립되는 것은 아니다.
다시 분명하게 이것(유식)을 성취하는 성스러운 가르침과 바른 논리를 말해야 한다.
경전228)에서 말씀한 바와 같이 3계는 오직 마음뿐이라고 한다.
또한 인식대상[所緣]은 오직 식이 현현한 것이라고 말씀한다.229)
또한 『능가경』에서 일체법은 모두 마음에서 떠나지 않는다고 말씀한다.
또한 유정은 마음에 따라서 잡염되거나 청정하다고 말씀한다.230)
또한 네 가지 지혜를 성취한 보살이 능히 따라서, 오직 식뿐이고 식과 독립적인 외부대상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치를 깨달아 들어간다고 말씀한다.231)
첫째는 서로 다른 식의 양상을 아는 지혜[相違識相智]이니,
한 장소에 대해서 아귀ㆍ사람ㆍ천인(天人) 등이 업의 차이에 따라 보는 것이 각기 다른 것을 말한다.232)
대상이 만일 참으로 존재한다면 이런 일이 어떻게 있을 수 있겠는가?
둘째는 존재하지 않는 것을 인식대상으로 하는 식을 아는 지혜[無所緣識智]이다.
과거와 미래ㆍ꿈속의 대상ㆍ영상 등 실유(實有)가 아닌 대상을 반연할 때, 식은 현재에 있을 수 있고, 그 대상은 이미 존재하지 않으며, 다른 것도 역시 마땅히 그러해야 한다.233)
셋째는 스스로 전도되지 않아야 함을 아는 지혜[自應無倒智]이다.
어리석은 범부의 지혜가 만약 실제의 대상을 얻는다면, 그는 자연히 전도되지 않아야 하고, 작용[功用]에 의하지 않고 해탈을 얻어야 한다.234)
넷째는 다음 세 가지 지혜에 따라 바뀌는 것을 아는 지혜[隨三智轉智]이다.235)
하나는 자재자의 지혜에 따라 바뀌는 것을 아는 지혜[隨自在者智轉智]이다.
이미 마음의 자재함을 증득한 자236)가 욕구에 따라 땅 등을 변화시켜 모두 이룬다.237)
대상이 만약 실유라면 어떻게 전변할 수 있겠는가?
다른 하나는 관찰자의 지혜에 따라서 전전하는 지혜[隨觀察者智轉智]이다.
뛰어난 선정을 증득해서 법관(法觀)을 닦는 자가 따라서 하나의 대상을 관찰할 때에 갖가지 모습이 현전한다.238) 대상이 만약 참되다면 어찌 마음에 따라서 전전하겠는가?
마지막 하나는 무분별지혜에 따라서 전전하는 지혜[隨無分別智轉智]이다.
진실을 증득한 무분별지혜를 일으킬 때에는 모든 대상의 모습이 다 현전하지 않는다. 대상이 만약 참되다면 어찌 현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보살의 이 네 가지 지혜를 성취한 자는 유식의 도리에 대해서 결정적으로 깨달아 들어간다.
또한 게송(『후엄경』)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한다.
심(心)ㆍ의(意)ㆍ식(識)의 인식대상은
모두 자성에서 떠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나는 일체가
오직 식만이 존재하고 다른 것은 없다고 말한다.
이들 성스러운 가르침의 진실한 증거 문장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공통적으로 인정되는[極成] 안식 등239)은 5식의 하나를 따르는 것[隨一]이기 때문에,
나머지240)와 같이 직접 자신에서 떠나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색경(色境) 등을 반연하지 않아야 한다.241) 나머지 식도 식이기 때문에,
안식 등처럼 역시 직접 자신을 떠나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일체법을 반연하지 않아야 한다.242)
이것의 친소연(親所緣)은 반드시 이것에서 떠나는 것이 아니어야 한다.
그것의 능연과 같이, 두 가지243)의 하나를 따르는 것[隨一]이기 때문이다.244)
소연(所緣)의 법이기 때문에, 상응법처럼 결정적으로 심왕과 심소에서 떠나지 않아야 한다.245)
이들 바른 논리의 진실한 증거 문장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따라서 유식의 도리에 대해서 깊이 믿어 받아들여야 한다.
자아와 법은 실재[有]가 아니고 공(空)과 식은 비실재[無]가 아니며, 실재를 떠나고 비실재를 떠나기 때문에 중도에 계합한다.246)
미륵보살이 이에 의거해서 다음과 같은 두 게송을 말씀하셨다.247)
허망분별248)은 실재[有]이다.
이것에 있어서 두 가지249)는 모두 비실재[無]이다.
이것(허망분별) 중에서는 오직 공이 있고
그것(공성)에 있어서도 역시 이것(허망분별)이 있다.
그러므로 일체법은
공도 아니고250) 불공(不空)도 아니라고251) 말한다.
가유(假有)252)와 비실재[無]253) 및 실재[有]254)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곧 중도에 계합한다고 말한다.255)
이 게송은 또한 잡염분의 의타기성에 의거해서 말한 것이다. 진실로써 말하면 역시 청정분의 의타기성에도 있다.
227)
이하 아홉 가지 문답으로써 만유유식(萬有唯識)의 도리를 자세히 해설한다[九難義].
228)
『십지경(十地經)』 제8권 등.
229)
『해심밀경』 제3권, 『유가사지론』 제77권. 능연(能緣)의 견분과 소연(所緣)의 상분은 모두 자체분이 현현된 것임을 나타냄으로써 만법유식(萬法唯識)ㆍ심외무법(心外無法)의 취지를 서술한다.
230)
『설무구칭경(說無垢稱經)』 제2권(『고려대장경』 9, p.1044下:『대정장』 14, p.563中).
231)
『아비달마경』에 나오는 문장이다. 무성(無性)의 『섭대승론석』 제4권에 인용되어 있다.
232)
같은 사물에 대해서도 그것을 인식하는 주체가 다르면, 그 사물은 다른 모습으로 인식된다는 것을 아는 지혜를 말한다. 예를 들면 같은 물[水]에 대해서도 아귀는 고름이나 피가 가득한 강으로 보고, 물고기는 살아가는 장소나 통로로 본다. 천인(天人)은 보석으로 장식한 땅으로 보고, 인간은 깨끗한 물 또는 파도로 보는 등 제각기 다르게 인식한다.
233)
실재하지 않는 사물을 대상으로 하는 인식이 현실적으로 있음을 아는 지혜를 말한다. 예를 들면 과거나 미래의 일, 꿈속의 대상, 물이나 거울에 비친 영상 등은 어느 것도 실재하지 않는데, 그것을 대상으로 인식한다.
234)
공용(功用), 즉 수행하지 않고서 오류가 없는 무전도(無顚倒)의 지혜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은 잘못임을 아는 지혜이다. 만약 인식대상이 인식되는 것처럼 실재한다면 범부도 진실을 인식하게 되고, 노력 정진하지 않고도 자연히 해탈을 이루게 될 것이다.
235)
만약 인식대상이 실재한다면 다음 세 가지와 같은 일은 있을 수 없는데, 현실적으로 이들 세 가지 사실이 일어나므로 인식대상은 실재하지 않음을 논증한다.
236)
8지(地) 이상의 보살이다.
237)
마음이 자재함을 얻은 보살은 하고자 하는 대로, 예를 들면 땅을 물로, 또는 모래를 금으로 변화시킬 수 있음을 말한다.
238)
지관(止觀)을 닦는 요가 수행자가 부처님의 교법을 관찰해서 사색할 때, 어떤 대상이 사색하는 대로 갖가지 형상으로 나타나는 것을 말한다.
239)
공통적으로 인정되는[極成] 안식 등이란, 공통적으로 인정되지 않는[不極成] 유법(有法)을 가려내기[簡] 위해서 붙인 것이다. 즉 대승의 다른 학파에서 주장하는 부처님의 안식 등, 소승에서 말하는 부처님의 비무루(非無漏)의 안식 등과 최후신(最後身)의 보살의 불선(不善)의 안식 등을 가려낸다. 그것들은 자타가 공통적으로 인정하는 것[自他極成]이 아니기 때문이다.
240)
5식 중에서 안식을 제외한 나머지 4식을 말한다.
241)
이상 6경(經)을 인용하여 증명했다. 다음에 바른 논리[正理]로써 만법유식(萬法唯識)의 뜻을 논증한다. 네 가지 입량(立量)을 열거하는데, 먼저 첫 번째 비량(比量)을 삼지작법(三支作法)으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宗) 공통적으로 인정되는[極成] 안식 등은 직접 자신에게서 떠나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색경 등을 반연하지 않아야 한다.
(因) 5식 중의 하나를 따르는[隨一] 데 포함되기 때문이다.
(喩) 나머지 4식과 같이.
242)
두 번째 비량(比量)을 삼지작법으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宗) 공통적으로 인정되는 나머지 식도 역시 직접 자신에게서 떠나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법을 반연하지 않아야 한다.
(因) 이것은 식(識)이기 때문이다.
(喩) 안식 등과 같이.
243)
견분과 상분을 말한다.
244)
세 번째 비량을 삼지작법으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宗) 6식의 친소연(親所緣)은 반드시 6식을 떠나지 않아야 한다.
(因) 견분과 상분 중의 하나를 따르는 것[隨一]에 포함되기 때문이다.
(喩) 그 능연(能緣)의 견분 등과 같이.
245)
네 번째 비량을 삼지작법으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宗) 6식의 친소연은 반드시 자신의 능연(能緣)인 심왕과 심소를 떠나지 않아야 한다.
(因) 이것은 인식대상[所緣]의 법이기 때문이다.
(喩) 상응법과 같이.
246)
다음에 총체적인 결론으로서 위에서 밝힌 것을 논증한다. 먼저 바른 논리로써 증명하는데, 자아와 법은 변계소집성이고, 공(空)은 원성실성이며, 식(識)은 의타기성이다. 따라서 이것은 삼성대망(三性對望)하여 중도의 뜻을 나타낸다.
247)
다음에 성스러운 가르침[聖敎]으로써 증명한다. 아래 게송은 『변중변론(辯中邊論)』 제1권에서 미륵보살이 말씀한 것이다.
248)
3계의 의타기성의 허망분별심을 말한다.
249)
소취(所取)와 능취(能取) 또는 자아와 법을 말한다.
250)
공성(空性)과 허망한 마음[妄心]이 있으므로 공空이 아니다.
251)
능취와 소취 또는 자아와 법이 없기 때문에 불공(不空)도 아니다.
252)
허망분별, 즉 의타기성의 가유(假有)를 말한다.
253)
2취(取), 즉 변계소집성의 실무(實無)를 가리킨다.
254)
원성실성의 실재[實有]를 말한다. 또는 허망분별 중에서 공성이 있고[妄中有空], 공성에 대해서 허망분별이 있음[空中有妄]을 나타낸다.
255)
따라서 오로지 공(空)만을 주장하는 중관학파의 청변(淸辯) 등과 같지 않고, 또한 오로지 실유(實有)를 말하는 소승과 같지 않으며, 참으로 중도에 계합함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