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삼도수군통제사 김영수(金永綬) 장군.
김영수(金永綬) 장군은 1716(숙종 42) ~ 1786(정조10) 安東人(구안동)이며 초휘는 영적(永績), 字는 중약(仲若)이다. 갑자무과(甲子武科)와 병인중시(丙寅重試)를 거쳐 가선대부(嘉善大夫 )에 올랐다
김영수 장군은 신라 경순왕(敬順王)의 후손으로 중시조는 고려시대 일본의 대마도를 정벌한 고려명장 충렬공(忠烈公) 김 방경(諱 方慶)이고, 파조는 포은(圃隱) 정몽주,목은(牧隱) 이색과 동문수학한 군사공(郡事公) 김칠양( 金七陽)이다.
조선후기 문신이며 예조판서,성균관사,홍문관 대제학,오위도총부 도총관에 추증된 청백리로 유명했던 김두남(金斗南)의 손자이며 중직대부(中直大夫) 의영고직장을 지낸 김홍석(金弘錫)의 아들로 , 충청감영중군,홍충도병마절도사,전라수군절도사,제주목사,삼도수군통제사를 역임하였다. 보령현감,함양부사를 지낸 김낙풍(金樂豊)이 장군의 장자이다.
장군의 묘역은 파주시 광탄면 방축리 산37번지 통제사공 종중산에 조성 되어져 있으며 장군 사후 종손가를 비롯한 후손들은 주로 충남 보령지역에 세거지를 두고 생활해왔다.
장군은 부임지마다 선정을 베풀어 이와 관련된 많은 문헌기록과 유물들이 발견되기 시작하고있다.또한 안동김씨군사공파의 소종중으로 김영수장군의 후손들로 구성되어진 통제사공(휘 영수)종중회가 설립되어 장군을 현양하기 시작하였으며 2009년도에는 제주도에서 발행되는 제주도지에 제주목사 김영수편으로 장군이 자세히 소개되기도하였다.
아버님(김성회)이 김영수장군의 7대 종손이신 관계로 장군에 관하여 많은 이야기를 집안 어르신들로 부터 접할 기회가 있었지만 여러 자료들을 직접 대면하고 보니 후손으로서 그 기쁨은 더욱 대단한것 같다.다음은 근래들어 종친들과 향토사학자분들이 발굴해내기 시작한 김영수 장군의 일부자료들이다.
1.제승당(制勝堂) 친필현판.
▲제승당. 제승당은 조선시대 삼도 수군(三道水軍)의 본영으로 국난을 극복한 이순신(李舜臣) 장군의 한산대첩으로 유서깊은 사적지이다.
▲안동김문(安東金門) 종친이신 백범 김구(金九)선생이 김영수장군 제승당 친필 현판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있다.
2.김영수 삼도수군통제사 타루비(墮淚碑).
▲통제영지(統制營址)에 서있는 삼도수군통제사 김영수 타루비.
김영수 타루비문.
육삭(六朔)동안 영에 계시면서 (六朔 여섯달)
일심(一心)으로 보은(報恩)을 도모했네.
몸에는 겸의(兼衣)가 없고 (兼衣 두벌옷)
말씀에는 사(私)에 미치지 않으셨네
구획(區劃)에 아직 반이 되지 못했는데, (區劃 통제사의 임기)
공께서는 어찌하여 갑자기 버렸을까?
부로(父老)는 모두가 슬퍼하고 (父老 나이 많은이)
사졸(士卒)들은 서로서로 조문했네. (士卒 사관과 사졸)
▲김영수 타루비 후면.
▲통제영지(統制營址)에 서있는 역대 통제사들의 선정비(善政碑) 및 타루비.
▲안동김문 선조님이신 35대 통제사 김응해(金應海) 장군이 중수(重修)한 수군 최고 지휘관의 의전(儀典) 건물인 세병관(洗兵館).
삼도수군통제사로 부임하신 김영수 장군은 임지인 한산도 통제영에서 71세를 일기로 서거하셨다.사후 두차례나 청백리로 추천 될정도로 추앙(推仰)받는 선정관(善政官)이자 군부의 원로이신 노장군께서 운명하시자 통영읍민들은 물론이고 정조대왕 또한 슬퍼하였다.
그런 까닭에 선정비(善政碑)라는 의례적인 문구가 새겨져 있는 비석대신 "타루비(墮淚碑 ,공을 생각하면 눈물이 흐른다는 의미)"라 새겨진 비석이 세워졌다고 전해진다.
3.제주목사청덕비(淸德碑),관덕정(觀德亭)탐라형승(耽羅形勝)친필현판,방선문(訪仙門)의 김영수마애시.
▲제주도 관덕정의 제주목사 시절 김영수 장군이 쓴 탐라형승 친필현판.
▲관덕정. 보물제32호.관덕정은 제주목(濟州牧) 관아의 건물로 조선후기의 건물로 1448년 신숙청(辛淑淸) 목사가 군사들의 훈련청(訓練廳)으로 창건하였다.
덕행과 학문으로 당시대 선비들의 추앙을 받던 김영수 장군은 친필현판 뿐만 아니라 시문도 여러편 남기셨다. 흥해(지금의 포항)의 권무당기의 필적도 뛰어나고, 특히 사람 키를 넘기는 대자쓰기에 능하셨다고 전해진다. 이충무공의 유사의 필적과 통제영(統制營)의 운주당(運籌堂) 현판 글씨는 기록은 있으나 아쉽게 현존하지는 않는다.
▲제주시 북제주군 조천면에 김영수 목사 청덕비
▲북제주군 조천면 비석거리(사진/안동김씨사이버연구회).
김영수 장군은 제주목사 재임시절 제주민들에게 선정을 베푼것은 물론이고 왜적의 침입에 대비하여 제주성을 증개축 하였으며, 제주지역에 남아 있는 유물로는 청덕비,방선문의 김영수 마애시,관덕정의 친필현판등이 전해지고 있다.
▲제주목사시절 남긴 제주 방선문(訪仙門)의 김영수 마애시.
龍淵 (先韻 五言律詩) ( 제주 익수(제) 번역, 제공)
鬲名何太古 오지병 모양 어찌 예부터 이름 불렸는가
雲鎖九龍淵 구름 걷힌 구룡연못,
居五須居九 구오(九五)는 비룡재천(飛龍在天)이거늘
出天悔在田 하늘로 솟아오르다 재전(在田)이라 후회되네.
行藏得中成 움직임 감추어 중정(中正)을 얻으니
權頭體方圓 머리와 몸체 균형 잡혀 모나고 둥그네
一理明無昧 하나의 이치 밝힘에도 몽매하니
物然我亦愁 만물 그러하니 나 또한 수심에 잠기네.
偸閑肩輿過 한가한 틈타 가마 타고 지나노라니
特地遠人烟 별천지 인가와 멀리 떨어지고
海濶千年國 바다가 펼쳐진 천년 된 고장
龍藏九曲淵 용은 아홉 굽이진 연못에 잠겼네
古名眞有意 옛 이름 진정 의미가 있어
今賞豈非緣 오늘의 구경 어찌 인연이 아니랴.
雲雨急不返 운우는 급히 돌아오지 않고
朝日已西天 아침 해는 벌써 서쪽 하늘에 있네
東韻 五言絶句
龍湫回九轉 용못<龍湫>은 아홉굽이 돌고 돌다가
不幸海相通 불행히 바다와 서로 통하네
莫遣秋花水 가을꽃 물에 떠보내지 마라
恐牽世客蓬 떠도는 나그네 속세에 얽힐지 모르니....
金永綬 醉題于
庚子春(1780년 봄) 子 樂圓
주: 九五... 周易의 重天卦에 九五자리는‘飛龍在天 利見大人’이라 했고
在田... 九二자리는 ‘見龍在田 利見大人’이라 하여 九二는 九五와 상응하는 괘로 용이 땅에 있다 는 뜻임.
龍湫... 제주시 용담동에 있는 龍淵을 龍湫, 翠屛潭이라 옛날부터 불려왔다.
4.여수 호좌수영수성창설사적비(湖左水營守城創設事蹟碑).
▲여수 호좌수영수성창설사적비.전라좌도수군절도사 재직시 업적을 기리고자 세위진 김영수 공덕비(功德碑)이다.
▲ 호좌수영수성창설사적비 전면 .
▲ 호좌수영수성창설사적비 후면
▲김영수 장군의 애국충절(愛國忠節)을 전하기 위해 비각을 세우고 문화재로 지정하여 나라사랑의 산교육장으로 이용되고 있다.
나라에 충성한 용장(勇將) 김영수(金永綬)장군
충신 좌수영 절도사 김영수(金永綬)는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의협심이 강해 약한 사람을 돕고 의리를 중히 여기며 자랐다.
집에서는 부모 모시기를 정성을 다하여 섬겼으며 동네 어르신을 뵈올때 마다 자기 부모 뵙듯 예의에 어긋남이 없었고 사귀는 벗마다 그의 말씨와 행동에 눌러 그의 뜻을 어긴 사람이 없었다.
불쌍한 이웃이나 가난한 친구들에게는 곡식을 나누어 주고 어려운 살림을 헤쳐 나갈 수 있는 인내와 정성을 깨우쳐 주었으며 항상 웃사람을 공경하고 받들었다.
시간이 있을 때마다 뒷동산에 올라 무예를 익히고 밤이면 책을 읽었으며 심신(心身)을 단련하고 학문을 익혀 과거시험(武科)에 급제하여 벼슬에 올랐다.
영조49년(1773)에 김해 부사로 계시다가 좌수영 절도사로 오셨는데 그 때 부패한 탐관오리를 정리하고 억울한 사람을 풀어주는등 선정을 베풀어 백성마다 칭찬을 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으며 심지어는 다른 고을에서도 이사온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왜적이 출몰하여 백성을 괴롭힌다는 전갈을 받고 바다에서 배로 외적을 무찌르니 육지에서는 백성들이 합세를 하여 왜적의 머리를 수없이 베고 붙잡았으며 사람 마다 충신 김영수휘하로 들어왔다.
또한 공은 평상시의 애국 충절을 안 스님들이 3백 여석의 식량을 가져오고 죽기를 결심하여 나라를 지킬 것을 다짐했다.
그뒤 다시 왜적을 쳐부수니 왜적은 도망가기에 바빴다.
군명으로 돌아와 또 한번 합세하여 식량을 되찾아 주인에게 돌려주고 빼앗은 전리품을 가난한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또한 유비무환(有備無患)의 정신으로 병사들이 훈련에 힘쓰고 비가 올때는 책을 가까이 하도록 하여 나라없는 백성이 되어는 안되겠다는 신념(信念)을 갖도록 깨우치기에 힘썼으며 글을 모르는 사람에게 글을 가르쳐주어 누구든 배워야 큰일을 할수 있는 것을 스스로 알도록 힘쓰다가 돌아가시니 의승(義僧)들이 모여 충신 김영수의 애국충절을 길이 후손에게 전하기위해 비각을 세우고 제사를 모시니 후손들이 해마다 모여 공의 정신을 본 받고 나라사랑의 교육을 후손에게 시키고 있어 충신 김영수의 우국충정은 오늘도 숨쉬고 있다고 하겠다. 출전: 여수시 발행 ‘내고장여수’에서 옮김.
5.청덕사(淸德祠),흥해구제기적비(興海九堤紀績碑),권무정(勸武亭),권무당기(勸武堂記).
청덕사 입구의 흥해구제기적비와 비석들.(맨 오른편비석)
▲흥해군수(興海郡守)시절 업적과 지역민들에게 선정(善政)을 베풀었던 내용이 기록된 김영수 흥해구제기적비(興海九堤紀績碑).김영수 장군은 흥해군수시절 치수사업을 통해 지역민들의 삶을 풍요롭게 하였다 기록으로 전해진다.
흥해구제기적비(興海九堤紀績碑).
興海九隄紀功碑
生民之本在農。農之本在漑。故利民之政。莫善於廣漑。興海傍海而邑。澤農多而漑源少。邑民病焉。英宗壬午。今統制使金公永綬以郡守至。乃築十有一堤。曰太平。曰松洞。曰柿木。曰都沱。曰德城。曰余峴。曰予美。曰城谷。曰小長生。曰大谷。而南星則因前人之績。公之視役。便衣菲屨雜跡畚鍤。寄宿近堤之閭。晨出昏息。手桴鼓以倡作。懸錢布以賞勤。具牛酒以餉勞。一如治軍之法。衆皆樂趍。役必先期。用民之隙。一歲十一堤成。太平之趾。捐粟百斛。購受漑之田。按使金尙喆亦助之粟百斛。歲收租數十斛。屬之民帑。以當公費。其惠不止漑也。小長生,大谷二堤今廢。而九堤沄沄。民饜其惠。久益頌之。公安東人。以武擧歷守州閫。所至盡力民國。輒有成績。時議以戎垣待之。不幸罹重獄置對。如高允之直。上始以其罪罪之。未幾宥還。置年格而除郡。旋擢之湖閫。不踰期。授統制使。盖賞其不欺也。聖上之勵世如此。爲臣下者孰不願爲之死哉。惜乎。公則老矣。興海之績。直公之末也。然亦可謂識農之本而勤民也。宜民頌之久不衰也。郡民舊嘗治碑。圖紀公績而文未具。後二十餘年。大中適守是郡。因衆請而記之。辭不必侈。特書公之受知於聖上者。以告興人。
출전: 靑城集(昌寧 成大中의 문집)
생민지본(生民之本)은 농업에 있고 농사의 근본은 관계에 있으므로 백성을 위한 정사(政事)는 농사짓는데 이로운 보(洑)를 막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은 없을 것이다. 흥해 고을은 바닷가에 있어 읍이 윤택하고 농사는 많이 짓고 있으나 수원(水源)이 딸려 읍민들이 걱정하고 있었다. 영조 임오년(1762) 통제사 김영수(金永綬)公이 흥해군수로 부임한 후11개의 보를 막으니 太平, (?)洞, 枾木, 都, 德城, (?)재, 예(?), 城谷, 小長生, 大谷, 南(?)등이다.
군수 김 공이 보를 막을 때에 본인이 직접 현장에 나가 일을 시키면서 입을 옷과 신고 다니는 신발까지도 현장 가까운 곳에 가져다놓고 기숙하면서 새벽 일찍 공사장에 나갔다가 저녁 늦게 돌아오며, 일하는 자 가운데 부지런한 사람에게는 현전(縣錢)으로 상을 주며 쇠고기와 술대접을 해가면서 노고를 치하함에 마치 군대를 통솔하는 것 같이 하였고, 때로는 백성들이 여가를 가지도록 해가면서 일년에 보 11개소를 막았다. 농사를 다 지은 후에는 태평들에서 수세100석을 거두어 살기 어려운 김상철(金尙喆)등을 도와주고 10석은 민폐를 끼친 자에게 혜택을 주는 등 골고루 백성들에게 은혜를 미치게 하니 그의 공적은 보를 막는 데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지금은 소장생보와 대곡보가 없어졌으나 당시 공적은 백성들이 칭송했었다. 공은 본디 안동사람으로 무과 급제하여 여러 고을 수령으로 다니면서 백성과 나라를 위해 진력한 기록이 뚜렷이 남아 있다. 그러다가 죄가 있다고 옥살이를 하게 되었으나 얼마 후 임금께 죄를 용서받아 통제사(統制使)를 제수 받았다고 한다.
그것은 곧 남을 속이지 않았으므로 임금에게 죄를 용서받을 수 있었으리라, 이런 사실을 들어본 사람은 누구나 죽음으로 나라에 보답하기를 원하지 않으리요. 애석하게도 당시 보를 막은 김공은 벌써 늙어버렸으니 흥해군수로 재직 당시 보를 막은 업적은 거의 기록이 없어졌다. 그로부터 20년후에 백성들의 간청에 의하면 공적을 특서(特書)하여 성상(聖上)에게도 알리고 흥해 백성들에게도 고하는 도다.
正祖10年(1786)丙午 五月
郡守 昌寧 成大中 謹記
築堤監官 閑良 金信得
竪石都監 折衝 崔奎炯.
▲포항 흥해(興海)의 청덕사에 배향되어 평상시에는 흥해읍장이 특별한 경우에는 포항시장이 초헌관(初獻官)을 맡아 매년 지역 유림(儒林)들이 중구일(重九日)에 향사(享祀)를 모시고 있다.
▲김영수 장군의 고유제(告由祭)를 진행하는 종친님들과 흥해 유림님들.
▲권무정(勸武亭)을 창건하여 왜적의 침입에 대비하여 훈련토록하는등 선정(善政)을 베푼 흔적들이 기록과 유물로 남아 있다.궁도협회의 기원이 여기에서 시작되었다한다.
▲권무당기(勸武堂記), 김영수 장군이 흥해군수 재임시 권무정을 창건하고 2년뒤 짓고 쓰신 친필 현판이다.
6.김영수 삼도수군통제사 묘역.
▲김영수 장군 묘역,파주시 광탄 방축리 산37번지 종중산에 위치.
▲김영수 장군 묘역. 중앙은 통제사공 7대 종손이신 아버님(성회) 오른쪽은 통제사공종중회장(경회),왼편은 부회장님(승남).
김영수 삼도수군통제사의 7대 종손이며 김낙풍 함양부사의 6대 종손이기도하신 아버님의 삶을 생각하면 아타까운 마음뿐이다.아버님이 9세 되던해(1949년) 고향마을에 전염병이 돌아 할아버지님이 돌아가시고 졸지에 9세 가장에 종손이 되어 무거운 짐을 지고 사신 지난 삶을 돌이켜보면 가슴이 저려온다.
70년대 넉넉치 않은 살림에 고향 시골마을에 없었던 마을회관을 지어내시고 마을일에 앞장을 서시던 아버님의 마음쓰심의 연원이 어디에서 나오게 되었는지을 이제서야 알 수가 있을 것같다.
통제사공 묘역 뒤쪽 인근 협곡쪽에는 김영수 삼도수군통제사의 장자이신 김낙풍 함양부사의 묘역이 조성되어져있다.
▲조선왕조실록 김영수 장군 기록 |
이시수(李時秀)를 이조 참의로, 유진항(柳鎭恒)을 삼도 수군 통제사로, 임흘(任屹)을 경상좌도 수군 절도사로 삼았다. 임금이 유진항에게 말하기를, “그전 장수의 칭찬이 구중 궁궐에까지 들리었으므로 내가 실제로 남녁의 걱정을 잊고 있었는데, 애석하게도 중간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경은 반드시 마음을 써서 앞 사람이 진작시킨 정사가 허사가 되지 않게끔 하라.” 하였는데, 옛날 장수는 김영수(金永綬)였다. 정조 22권, 10년(1786 병오 / 청 건륭(乾隆) 51년) 7월 7일(무신).
|
7.김영수 장군 교지,유서,교서 소개.(사진/김태영,김발용)
(1) 교지1
어모장군(禦侮將軍) 행(行) 훈련원주부(訓鍊院主簿) 교지(敎旨)
(가로 : 76cm, 세로 : 56cm)
(2) 교지2
건륭 11년 (서기 1746년. 영조 22) 9월
어모장군(禦侮將軍) 행(行) 훈련원판관(訓鍊院判官) 교지(敎旨)
(가로 : 76cm, 세로 : 56cm)
(3) 교지3
건륭 12년 (서기 1747년. 영조 23) 10월
어모장군(禦侮將軍) 행(行) 용양위부호군(龍驤衛副護軍) 교지(敎旨)
(가로 : 27cm, 세로 : 47cm)
(4) 교지4
건륭 13년 (서기 1748년. 영조 24) 4월 16일
어모장군(禦侮將軍) 행(行) 훈련원부정(訓鍊院副正) 교지(敎旨)
(가로 : 72cm, 세로 : 53cm)
(5) 교지5
건륭 13년 (서기 1748년. 영조 24) 6월 21일
통훈대부(通訓大夫) 행(行) 함종도호부사(咸從都護府使) 교지(敎旨)
(가로 : 76cm, 세로 : 56cm)
(6) 교지6
건륭 16년 (서기 1751년. 영조 27) 정월
절충장군(折衝將軍) 함경북도병마우후(咸鏡北道兵馬虞候) 교지(敎旨)
(가로 : 75cm, 세로 : 55cm)
(7) 교지 7
건륭 18년 (서기 1753년. 영조 29) 5월
절충장군(折衝將軍) 행(行) 용양위부호군(龍驤衛副護軍) 겸 우림위장(羽林衛將) 교지(敎旨)
(가로 : 75cm, 세로 : 50cm)
(8) 교지8
건륭 19년 (서기 1754년. 영조 30) 12월 28일
통정대부(通政大夫) 행(行) 갑산도호부사(甲山都護府使) 교지(敎旨)
(가로 : 74cm, 세로 : 56cm)
(9) 교지9
건륭 24년 (서기 1759년. 영조 35) 3월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교지(敎旨)
(가로 : 77cm, 세로 : 57cm)
(10) 교지10
건륭 24년 (서기 1759년. 영조 35) 7월
가선대부(嘉善大夫) 행(行) 안흥양진수군첨절제사(安興梁鎭水軍僉節制使) 교지(敎旨)
(가로 : 75cm, 세로 : 55cm)
(11) 교지 11
건륭 29년 (서기 1764년. 영조 40) 3월
가선대부(嘉善大夫) 충청감영중군(忠淸監營中軍) 교지(敎旨)
(가로 : 75cm, 세로 : 55cm)
(12) 교지12
건륭 36년 (서기 1771년. 영조 47) 4월
가선대부(嘉善大夫) 행(行) 전라우도수군절도사(全羅右道水軍節度使) 교지(敎旨)
(가로 : 80cm, 세로 : 57cm)
조선왕조실록
영조 116권 47년 4월 3일 (계유) / 강윤·여선형·민범수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강윤(姜潤)을 집의(執義)로, 여선형(呂善亨)을 필선(弼善)으로, 민범수(閔範洙)를 전라도 좌수사(全羅道左水使)로, 김영수(金永綬)를 전라도 우수사(右水使)로,이성묵(李性默)을 황해 수사(黃海水使)로 삼았다.
【원전】 44 집 376 면
【분류】 *인사-임면(任免)
(13)교지13
건륭 37년 (서기 1772년. 영조 48) 2월
가선대부(嘉善大夫) 행(行) 용양위부호군(龍驤衛副護軍) 겸(兼) 오위장(五衛將) 교지(敎旨)
(가로 : 75cm, 세로 : 60cm)
(14)교지14
건륭 38년 (서기 1773년. 영조 49) 3월
가선대부(嘉善大夫) 행(行) 전라좌도수군절도사(全羅左道水軍節度使) 교지(敎旨)
(가로 : 83cm, 세로 : 62cm)
(15)교지15
건륭 39년 (서기 1774년. 영조 50) 12월
가선대부(嘉善大夫) 행(行) 전라좌도수군절도사(全羅左道水軍節度使) 교지(敎旨)
(16) 교지16
건륭 39년 (서기 1774년. 영조 50) 12월
가선대부(嘉善大夫) 행(行) 제주목사(濟州牧使) 교지(敎旨)
(17)교지17
김영수 교지 (함경남도병마수군절도사)
건륭43년(서기1778년. 정조2) 정월
(가로80cm * 세로55cm)
조선왕조실록
정조 5권, 2년(1778 무술 / 청 건륭(乾隆) 43년) 1월 11일(임신) 1번째기사
김영수를 함경남도 병마 절도사로, 백동준을 경상좌도 병마 절도사로 삼다
【분류】 *인사-임면(任免).
|
건륭 43년 (서기 1778년. 정조 2) 9월
가선대부(嘉善大夫) 행(行) 제주목사(濟州牧使) 교지(敎旨)
<국역일성록>
정조 2년 무술(1778, 건륭 43)
9월 5일(신묘)
○ 서유린(徐有隣)을 대사헌으로, 홍병찬(洪秉纘)을 대사간으로, 고익경(高益擎)을 장령으로, 윤행원(尹行元)ㆍ정연순(鄭淵淳)을 지평으로, 엄사헌(嚴思獻)ㆍ안정현(安廷玹)을 정언으로, 홍명호(洪明浩)를 부교리로, 김영수(金永綬)를 제주 목사(濟州牧使)로, 유익성(柳翼星)을 용인 현령(龍仁縣令)으로, 홍영영(洪永泳)을 무안 현감으로 삼았다.
(19)교지19
건륭 43 년 (서기 1778년. 정조 2) 9월
전라도수군방어사(全羅道水軍防禦使) 교지(敎旨)
(가로 : 80cm, 세로 : 60cm)
건륭 43년 9월 제주목사 임명과 함께 전라도 수군방어사의 겸직을 임명 받은신 것 같습니다
(20)교지 20
건륭 46년 (서기 1781년. 정조 5) 윤5월
가선대부(嘉善大夫) 행(行) 용양위부호군겸분오위도총부부총관(龍驤衛副護軍兼分五衛都摠府副摠管) 교지(敎旨)
(가로 : 75cm, 세로 : 60cm)
(21)교지21
건륭 46 년 (서기 1781년. 정조 2) 6월
가선대부(嘉善大夫) 행(行) 충무위부호군(忠武衛副護軍) 교지(敎旨)
(가로 : 72cm, 세로 : 53cm)
(22)교지22
건륭 50년 (서기 1785년. 정조 9) 초6월
유서(諭書)
(가로 : 77cm, 세로 : 65cm)
▲교지외 종손家 소장목록
(1)김영수 유서 (경상좌도병마절도사)
건륭41년(서기1776년. 영조52) 8월 19일
(가로170cm * 세로 60cm) 諭書之寶 5개소
(2)김영수 유서 (가선대부홍충도병마절도사)
건륭50년(서기1785년.정조9)7월초8일
(가로240cm * 세로60cm) 諭書之寶 9개소
(3)김영수 통제사 교서통
전체길이 (길이127cm * 직경11.5cm)
뚜껑길이 (길이45cm * 직경12.5cm).
(4)정조가 통제사공에게 내린 교서.
----------------------------------------------------
(1) 김영수 유서(경상좌도병마절도사).
건륭41년(서기1776년. 영조52) 8월 19일 (가로170cm * 세로 60cm) 諭書之寶5개소
원문
諭慶尙左道兵馬節度使金永綬
卿受委一方體任 非輕凡發兵應機 安民制敵一應常事自有舊章 慮或有予與卿獨斷處置事 非密符莫可施爲 且意外奸謀不可不預防 如有非常之命合符 無疑然後當就命 故賜押第十五符卿其受之故諭 乾隆四十一年 八月十九日
번역문
○ 경상좌도 병마절도사(慶尙左道兵馬 節度使) 김영수(金永綬)에게 내리는 유서(諭書)
경(卿)은 한 지방의 체임(體任)을 위임 받았으니 가볍게 군사를 내지 말고 임기응변하여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 적을 제어하여 한결같이 상사(常事)에 응해야 하는 것은 스스로 구장(舊章)이 있다. 생각건대 혹 나와 경이 독단으로 처치할 일이 있을 때 밀부(密符)가 아니면 시행하지 말고, 또 의외의 간모(奸謀)는 예방하지 않을 수 없으며, 만일 비상(非常)의 명령이 있을 때는 부절을 합하여 의심이 없은 연후에 마땅히 명에 따라야 한다. 고로 압(押) 제15부(符)를 내려 경에게 받게 하므로 이에 유서한다.
(2) 김영수 유서(가선대부홍충도병마절도사).
건륭50년(서기1785년. 정조9) 7월 초8일 (가로240cm * 세로60cm) 諭書之寶 9개소
조선왕조실록
정조 20권, 9년(1785 을사 / 청 건륭(乾隆) 50년) 7월 6일(계축) 1번째기사
김영수이연필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김영수(金永綬)를 홍충도 병마 절도사(洪忠道兵馬節度使)로, 이연필(李延弼)을 홍충도 수군 절도사(洪忠道水軍節度使)로 삼았다.
원문
諭嘉善大夫洪忠道兵馬節度使金永綬
卿受委一方體任 非輕凡發兵應機 安民制敵一應常事自有舊章 慮或有予與卿獨斷處置事 非密符莫可施爲 且意外奸謀不可不預防 如有非常之命合符 無疑然後當就命 故賜押第十八符卿其受之故諭 乾隆五十年 七月 初八日
번역문
○ 가선대부 홍충도 병마절도사(慶尙左道兵馬 節度使) 김영수(金永綬)에게 내리는 유서(諭書)
경(卿)은 한 지방의 체임(體任)을 위임 받았으니 가볍게 군사를 내지 말고 임기응변하여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 적을 제어하여 한결같이 상사(常事)에 응해야 하는 것은 스스로 구장(舊章)이 있다. 생각건대 혹 나와 경이 독단으로 처치할 일이 있을 때 밀부(密符)가 아니면 시행하지 말고, 또 의외의 간모(奸謀)는 예방하지 않을 수 없으며, 만일 비상(非常)의 명령이 있을 때는 부절을 합하여 의심이 없은 연후에 마땅히 명에 따라야 한다. 고로 압(押) 제18 부(符)를 내려 경에게 받게 하므로 이에 유서한다.
*주 - 유서(諭書) : 왕이 각 지방으로 부임하는 관찰사・절도사・방어사・유수 등에게 왕과 해당 관원만이 아는 밀부(密符)를 해당 관원에게 내리는 명령서이다. 부(符)는 제1부에서 제45부까지 있어서 비상한 명령이 있으면 부를 합해 보아 의심할 바가 없을 때에 명령대로 거행하도록 하는 것이다.
길이127cm * 직경11.5cm
<뚜껑부분>
뚜껑 길이 45cm * 뚜껑 직경 12.5cm
교서(敎書)라고 쓴 철판을 붙였다.
4)정조가 통제사공에게 내린 교서.
조선왕조실록
정조 20권, 9년(1785 을사 / 청 건륭(乾隆) 50년) 11월 21일(정묘) 1번째기사
김영수를 삼도 수군 통제사로 삼다
김영수(金永綬)를 삼도 수군 통제사로 삼았으니, 홍충병영(洪忠兵營)의 성첩(城堞)을 보수한 공로로써 특별히 차의(差擬)하도록 명한 것이다.
원문
敎 三道統制使兼慶尙右道水軍節度使 金永綬 書
王若曰
西原擁旄 未半載 而勞예克著 南困移節 統三路 而委寄斯隆 廟剡旣完 宸簡非偶睠
彼環海巨鎭 實是有國重防 摠水陸節制之權 營開細柳 振湖嶺要衝之地 波接扶桑 臺隍列 襟帶之形 控馭殆數千里 樓櫓壯 衣여之備 措置餘幾百年
夫何保障之雄蕃 只見弊막之蝟集 昇平巳久 戎政一任其疎虞 易相仍 營務未暇於修擧 錢穀之虛簿徒擁 寧不寒心 舟楫之繕補 多愆在所 釐革 嗟凋채之 若是緊 倚毗之屬 誰 惟卿 投筆初齡裹 革壯志 去就不苟下邑之紱 遽投威望 頗優北門之鑰 久掌豹鞱 略施於嶺困 奚但氷蘗之播譽 雉堞改觀於湖營 殆類旌旗之變彩 顧才猷 歷試於外內 惟誠勤 周篤於後前
玆授卿以三道統制使兼慶尙右道水軍節度使 卿其祗服非常之恩 益勵報效之道 運籌釐 殫綢繆於未陰 繕甲峙糧 備警急於不日 염嬉久而成習 거忽振刷之方 宿弊從以多端 宜先矯捄之策 自餘臨機措劃 亦在隨便弛張
於戱 特授之意有存 何拘資歷 酬報之義 自異勉殫 忱誠 閑山壁留 忍說龍蛇之 長海波偃 庶籍熊虎之姿 故玆敎示 想宜知悉
乾隆五十年 十二月 初三日
번역문
삼도수군통제사겸경상우도수군절도사
김영수에게 교하는 서(교서)
임금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청주(충청도병영)를 지휘하라는 임금의 절모(지휘권을 알리는 신표.병부.깃대)를 지닌지 반년이 안 되는데 힘쓴 수고가 능히 들어나서 남쪽 절도영으로 절모를 옮겨서 충청, 전라, 경상 세 길을 통어하게 하니 맡겨 부탁함이 이에 융숭하다. 정부 결단이 이미 잘되었으니 임금의 편지가 우연한 은혜가 아니다.
그 곳은 바다에 있는 큰 진영이요 실로 나라의 무거운 관방임이 분명하다. 바다와 육지의 절제권을 모두 가지니 병영에는 가지가 가는 버드나무가 만개하고 호남과 영남의 요충지를 진무하니 파도는 동쪽 해 뜨는 곳에 접한다.
돈대와 물 없는 해자가 늘어서 있으니 요해처는 거의 수천리를 제어하여 다스렸다. 성의 망루가 견고하니 의복 준비는 수 백년 넘게 쌓인다.
“대저 어떻게 나라와 백성을 보호하여 위해를 막는 큰 군영인데 단지 폐단이 고슴도치 털처럼 많이 몰려있음만이 보이는가
평화로움이 오래 계속되니 군정은 소홀히 다루는 잘못에 오로지 맡겨졌고 바뀌고 교체함이 잇따르니 군영 업무는 행사를 깨끗이 치르느라 여가가 없어 곡식과 돈의 거짓장부는 다만 겨드랑이에 낄 뿐이니 어찌 한심하지 않으랴 전함을 고치고 보충하자니 많은 허물이 그곳에 있고 개혁하자니 기력이 쇠하여 앓음을 탄식한다. 이와 같이 긴급하니 의지하고 맡길 사람은 누구인가.”
바로 경이 젊은 나이에 붓을 던져버리고 장한 뜻을 싸거나 펼치니 물러가고 나아감은 가장 하읍의 고위직에 구애받지 않았다. 위세와 명망을 던져버리니 북방의 방비가 아주 좋아졌다.
오랫동안 맡은 용맹한 병법의 비결을 이제 영남지방 병영에서 다스려 실시하니 어찌 싹을 뿌렸다는 칭찬을 헛되이 식혀 버리겠는냐? 성벽(城壁)이 남쪽 군영에서 다시 고쳐져 보여질 테니 거의 깃발 색깔이 다르게 바뀌는 것과 같을 것이다.
재주를 돌아보면 지방과 중앙에 두루 쓰였고 정성스러운 노력을 생각하면 뒷자리와 앞자리를 가리지 않고 두루 전일 하였다.
이에 경에게 삼도통제사 겸 경상우도수군절도사를 제수하니 경은 그 비상한 은혜를 받들어 보답하여 나타낼 방도에 더욱 힘쓰라.
계책을 짜서 폐단을 이정하는 일은 촌음을 아껴 얽어매는데 힘을 다하고 갑옷을 수리하고 군량을 쌓아두는 일은 하루가 멀다 하고 놀라듯 서둘러서 준비하라.
직무를 게을리함이 오래되어 습관이 되었으니 어찌 구태를 일소하는 방도를 소홀히 하겠는가. 오래된 폐단이 이에 따라서 아주 많아지니 마땅히 고쳐 구할 방책을 먼저 하라. 그 나머지 시간에 그때그때 형편에 따라 조치하는 것 또한 편한대로 느슨하게 하든지 당기든지 하라.
아아. 특별하게 제수하는 뜻이 존재하고 있으니 어찌 자급과 경력에 구애 받겠는가 보답하는 뜻이 힘써 빠짐없이 함과는 스스로 다르다. 한산도 벽에 남긴 뜻을 정성스럽게 하여 임진왜란의 치욕을 견디며 말하라. 큰 바다에는 파도가 누우니 바라건대 곰과 호랑이의 용맹한 자태를 밟으라.
그래서 이에 교시하니 생각하여 마땅히 자세히 알라.
건륭 50년(1785년 정조9) 12월 3일 .
종손가에서 보관 중인 통제사공 교지는 무려 20여 점으로서 훈련원 주부(訓鍊院主簿)에서부터 용양위 부호군 겸 분오위도총부 부총관을 거쳐 제주목사, 충무위부호군(忠武衛副護軍) 등에 이르기까지 한 분의 교지가 이처럼 온전하게 대거 소장된 사례도 찾아보기 드물다.
하지만 이 중에서도 으뜸인 교서로서 1785년(정조 9년)에 정조대왕께서 통제사공에게 내린 교서(敎 三道統制使兼慶尙右道水軍節度使 金永綬書)는 촬영할 수가 없었다. 이 교서는 12년 전 천안에 거주하는 종인 ◇◇씨 등 여러 명이 있는 자리에서 ◇◇씨의 아버지에게서 종인 ○○씨가 복사를 하고 돌려주겠다며 빌려간 것인데, 아직 회수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이 교서 사진은 우리 홈에 1장이 있다. 교서를 빌려간 ○○씨가 찍어서 보내 온 것이다. 그러나 통제사공 현양사업의 일환으로 각종 자료를 수집, 책자 발간을 계획 중이라 사진 상태가 나빠 재촬영이 절실한 형편인데 촬영 협조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훗날을 위해 이 교서는 종손가에 대대로 전해진 유품임을 종손 등 관계자의 증언에 의해 기록한다. 아울러 2007년 2월 13일 현재까지 교서의 정밀 촬영이 이루어지지 않아 교서의 내용을 같이 기록해 사진에 대신한다(안동김씨대종회)
1歲 1716年[肅宗42 丙申]
父 義盈庫直長 弘錫과 母 貞夫人全州李氏와의 三男二女중 三男으로 태어나다.
29歲 1744年[英祖20 甲子]
武科에 及第하다.
31歲 1746年[英祖22 丙寅]
重試를 거쳐 閏3月에 禦侮將軍 行 訓鍊院主簿를 역임하고
9月에 禦侮將軍 行訓鍊院判官이되다
32歲 1747年[英祖23 丁卯]
10月에 禦侮將軍 行龍驤衛副護軍이 되다.
33歲 1748年[英祖24 戊辰]
4月16日에 禦侮將軍 行訓鍊院副正이 되다.
6月21日에 通訓大夫 行咸從都護府使가 되다.
36歲 1751年[英祖27 辛未]
正月에 折衝將軍 咸鏡北道兵馬虞候가 되다.
38歲 1753年[英祖29 癸酉]
5月에 折衝將軍 行 龍驤衛副護軍 羽林衛將이 되다.
39歲 1754年[英祖30 甲戌]
12月28日에 通政大夫 行 甲山都護府使가 되다.
44歲 1759年[英祖35 己卯]
3月에 嘉善大夫 同知中樞府事가 되다.
7月에 嘉善大夫 行 安興梁鎭水軍僉節制使가 되다.
46歲 1761年[英祖37 辛巳]
興海郡守에 부임하다.
49歲 1764年[英祖40 甲申]
3月에 嘉善大夫 忠淸監營 中軍이 되다.
56歲 1771年[英祖47 辛卯]
4月 3日에 嘉善大夫 行 全羅右道水軍節度使가 되다.
59歲 1774年[英祖50 甲午]
12月에 嘉善大夫 行 全羅左道水軍節度使兼 濟州牧使가 되다.
61歲 1776年[正祖1 丙申]
11月에 慶尙左道兵馬節度使가 되다.
63歲 1778年[正祖2 戊戌]
1月11日에 咸鏡南道 兵馬水軍節度使가 되다.
9月5日에 嘉善大夫 行 全羅道水軍防禦使兼 濟州牧使가 되다.
66歲 1781年[正祖5 辛丑]
閏5月에 龍驤衛副護軍兼分五衛都摠府副摠管이 되다.
6月28日에 陋名으로 金甲島로 移配되다.
6月에 嘉善大夫 行 忠武衛副護軍이 되다.
70歲 1785年[正祖9乙巳]
7月6日 洪忠道兵馬節度使로 삼다.
청주성을 수축하였는데 둘레가 1천 4백여보 였다. 구세적(具世勣)병마절도사때 완성 하다.
11月21日 三道水軍統制使로 삼다.
12月 初3日에 正祖大王으로부터 敎書를 받다.
71歲 1786年[正祖10 丙午]
7月1日 統制營 任所에서 殉職하다
1796年[正祖20 丙辰]嘉慶1年
4月 18日에 우참찬 이치중(李致中)과 호군 이한풍(李漢豊)이 청백리에 추천하여 올렸으나 결국 의정부에서 에서 추천하지 않았다.
당시 많은 인원을 청백리에 천거하다 보니 도리어 그 천거가 가볍게 되니 신중하고 어렵게 대처해야 할것이며 감히 쉽사리 천거에 응할수 없는 것이다. 하였다.
1821年[純祖22 辛巳]
청백리 천거에 이조판서 서기순(徐箕淳), 훈장(訓將)이유수(李維秀)와, 판서 임성고(任聖皐)가 추천하였으나 청백리 제도의 폐단이 일어 천거되지 못했다.
父: 홍석(弘錫) 자(字)희백(禧伯) 중직대부(中直大夫) 의영고직장(義盈庫直長)
祖: 두남(斗南) 號 탁청헌(濯淸軒) 丁卯文科 贈 弘文館,藝文館大提學, 淸白吏
配: 함종어씨(咸從魚氏)
配: 간성최씨(杆城崔氏).
■참고자료;조선왕조실록,여수시 발행"내고장여수",成大中문집"靑城集",안동김씨대종회 ,통제사공(휘 영수)종중회자료.
출처 김영수(金永綬) 삼도수군통제사 유물,유적 및 소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