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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볕에 스며든 정조대왕의 孝心을 存仰하며
항상 그랫듯이 우리 서남지부 모임날은 날씨가 늘 계절맛을 더해 주는 듯 했다. 오늘은 모이는 장소가 수원이다. 부지런히 아침을 챙기고 구로역에서 서동탄을 가는 국철을 타고 수원으로 향했다. 오전 9시35분에 수원역에 도착하여 集札口를 나가니 저만치서 이지수 회장이 나를 반긴다. 오늘은 누가 오려니, 누가 온다고 했는데 못 오려니 소식을 전해 준다. 지수가 전화를 받는다. 이항무가 벌써 집결장소에 도착했다는 것이다. 발길을 옮겨 수원역 8번 출구로 나갔다. 셋이는 반가운 악수와 함께 그간의 소식을 주고 받았다. 얼마간 지났을까 이경모가 도착하고 뒤를이어 김래현, 김종현, 오진환, 이규덕이 도착하여 8명이 구성되었다. 이지수 회장이 오늘 트레킹의 내용을 오리엔테이션 한다. 약 3시간이 소요되는 코스이다.
오늘 들러 볼 수원화성은 성곽의 꽃이라고 할 정도로 잘 보존되어 있고 역사성이 깊은 곳이다. 史蹟 3호인 수원화성은 아버지 장헌세자(사도세자)에 대한 효심으로 부친의 원침을 수원 화산으로 옮긴 조선 제22대 정조대왕이 1794년 1월에 착공하여 2년 9개월 만인 1796년 9월에 완공한 城이다. 둘레가 약 5.7km, 城廓의 높이가 4~6m로 실학자인 유형원과 정약용이 설계하였고, 석재와 벽돌의 倂用, 화살과 창검, 총포를 방어하는 근대적 城廓 구조를 가졌다. 또한, 用材를 규격화하고 擧重機 등의 新 機材를 이용하여 과학적이고 실용적으로 축조해 ‘건축史상 독보적인 건축물’로 평가받고 있다. 이후 200여년 동안 성곽과 시설물이 무너지기도 하고, 특히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크게 파손되었다. 그러나 축조 상황을 기록해 놓은 「화성성역의궤」에 의거 1975년부터 보수, 복원하여 1997년 12월 이태리 나폴리에서 열린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 제21차 총회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일행은 경기도청을 왼켠으로 西將臺로 오르는 팔달산 길목에 當到하였다. 동문 여러분께서도 周知하시는 바와같이 이곳 수원화성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곳이라 일체의 음식물, 주류 반입이 통제되고 있는 곳이었다. 하여 길목 입구의 조그마한 휴게소에서 래현이가 준비해 온 아메리칸 커피와 직접 自耕한 구운 고구마를 療飢하는 것으로 starting meeting을 가졌다. 수원을 찿은 손님 대접이 어찌그리 고마운지 그저 감사할 따름이었다.
흩부려진 아침 햇살을 받으며 숲길을 걷기 시작했다. 지수가 일러준다. 사방에서 피톤치트가 우리를 마중하고 있다고 말이다. 모두는 숲속 滋養分을 한껏 만끽하며 길섶을 걷는다.
문득 청설모 한 마리가 봄 나들이 나왔다가 우리 눈에 띄었다. 글쎄 보기엔 쥐와 비슷한 동물이긴 한데 썩 그리 有益한 동물은 아닌 듯 싶었다. 숲 언덕을 오르니 성곽길이 시작되는 지점에 도착했다. 수원화성을 찿은 방문객들이 이곳 저곳에서 우리와 발길을 교차한다.
잠시를 걸으니 西舖樓가 보인다. 포루는 성곽을 바깥으로 튀어나오게 만든 雉城 위에 지은 목조건물이며 군사들이 망을 보면서 대기하는 곳이다. 서포류는 화성의 5개 포루 중 하나로 1796년(정조 20) 8월 18일 완공되었다. 이 포루는 군수물자를 몰래 조달하는 통로인 서암문이 적에게 발각되어 공격받는 것에 대비하여 설치되었다.
어디선가 打鐘소리가 들리기에 눈길을 돌려 보니 오르는 길목에 ‘孝園의 鐘’이 설치되어 있었다. 이 종은 팔달산 정상에 위치하여 孝의 도시 수원의 상징적 이미지를 보여주는 종으로, 관광객이 스스로 타종하면서 부모와 가족, 개인의 소원을 빌 수 있다고 한다. 비록 타종은 하지 못하였지만 나름대로 각자의 소원을 鐘을 보면서 빌었다. 그 옆으로 수원의 상징물 표시판이 있었다. 수원시의 나무는 ‘소나무’이고, 수원시의 꽃은 ‘진달래’, 수원시의 새는 ‘백로’라고 표기되어 있다.
왼쪽으로 높게 보이는 樓閣이 威容을 자랑한다. 西將臺라고 한다. 장대란 성곽 일대를 한눈에 바라보며 화성에 주둔했던 장용외영 군사들을 지휘하던 지휘소이다. 화성에는 서장대와 동장대 두 곳이 있다. 서장대는 팔달산 정상에 있으며 ‘華城將臺’란 扁額은 정조가 친히 쓴 것이다. 1794년(정조 18) 8월 11일 공사를 시작하여 9월 29일 완성되었다. 정조는1795년(정조 19)윤 2월 12일 현륭원(융릉) 參拜를 마치고 서장대에 올라 城을 수비하고 공격하는 주간훈련과 야간훈련을 직접 지휘하였다.
팔달산 정상에서 수원화성 全景을 一覽하면서 사전답사를 했던 지수의 얘기를 傾聽하고 있다. 東西로 창룡문과 화서문이, 南北으로 팔달문과 장안문이 건축되어 수원화성을 지키고 있고 화성열차를 이용하여 동장대로 이동하여 동측의 성곽을 트레킹하는 코스라고 얘기해 준다.
이제 서장대에서 남쪽으로 20분을 내려가 화성열차를 타는 곳으로 이동한다. 누구는 열차를 타지 말고 계속 트레킹을 고집하는 친우들이 있는가 하면 열차를 타자는 의견도 많았다. 결국 계획한 대로 열차를 타기로 했다. 나무계단 형태의 회전길을 내려가 화성열차 타는 곳에 도착했다. 11시 35분 출발 편의 승차권을 지수가 단체 구입한다. 아니 그런데 누구는 국가유공자 우대증이 있고 누구는 65세 이상 경로우대증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월남전에서 공을 세운 前歷이 있다 한다. 이항무에게는 恪別한 국가의 配慮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누구는 훨씬 젊어 보이는데 벌써 경로우대증을 가지고 다닌다. 우리 나이가 이제는 萬萬치 않은 것 같았다. 화성열차는 엔진쪽은 龍의 머리를 형상화 했고, 客車는 임금님 御駕를 형상화했다고 지수가 설명해 준다. 열차는 예정된 시각에 정시에 출발하여 정조대왕銅像을 오른쪽으로 走行하여 화서문을 지나 수원시가지를 거쳐 장안문에 이르러 교통신호에 대기하고 수원천을 灌漑하는 화홍문을 지나 동장대가 위치한 연무대에 도착했다. 25분여를 승차한 12시를 가리키는 시각이었다.
일행은 모두 열차에서 내려 잠시 휴식을 취했다. 사방을 둘러보니 樓와 城郭이 사방을 병풍처럼 두르고 있다. 한 걸음, 두 걸음 걸으면서 성곽길을 걷기 시작했다. 東將臺가 보인다. 동장대는 1795년(정조 19) 7월 15일 공사를 시작하여 8월 25일 완공되었다. 武藝를 修練하는 공간이었기에 鍊武臺라고 하였다. 이곳의 지형은 높지 않지만 사방이 트여 있고 등성이가 솟아 있어서 화성의 동쪽에서 城 안을 살펴 보기에 가장 좋은 곳이다.
성곽길을 계속 걷고 있다. 東北空心墩을 지나고 있다. 공심돈은 동북공심돈과 서북공심돈으로 두곳이 있는데 공심돈은 군사가 안으로 들어가서 敵을 살필 수 있게 만든 望樓의 일종이다. 이중 동북공심돈은 수원화성에서 가장 특이한 건물 가운데 하나로 알려져 있다.
조금을 걸으니 東北弩臺가 있다. 노대는 城 가운데에서 다연발 활인 쇠뇌를 쏘기 위하여 높게 지은 것으로써 화성에는 서노대와 동북노대 두 곳이 있으며 담장모양이 반달모양인 것이 특색이다.
동북노대를 지나 다가온 城門이 나타난다. 蒼龍門이다. 창룡문은 화성의 4대문 중 동쪽 문으로 1795년(정조 19)5월 8일 공사를 시작하여 10월 17일 마쳤다고 한다. 창룡은 곧 청룡으로 풍수지리상 좌청룡이며 동쪽을 의미한다. 성문을 보호하기 위한 饔城을 반달모양으로 쌓았는데 장안문, 팔달문과 달리 한쪽을 열어 놓았다.
계속 걷는 성곽길에 東一舖樓가 있다. 군사들의 대기 및 휴식 장소이자 유사시엔 감시와 공격을 위해 쓰이기도 한 누각이다. 이곳에 모두 5개의 舖樓가 있다고 한다.
다음 陣地가 東一雉이다. ‘치’란 일정한 거리마다 성곽에서 바깥으로 튀어나오게 만든시설이다. 성벽 가까이에 접근하는 적군을 윕게 공격하고 성벽을 보호하기 위한 것으로 화성에는 모두 10개의 ‘치’가 있다. ‘雉’는 꿩을 의미하는데 꿩이 자기 몸은 잘 숨기고 밖을 엿보기를 잘하기 때문에 그 모양을 본따서 ‘치성’이라고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다음이 東砲樓이다. 砲樓는 적이 성벽에 접근하는 것을 막기 위해 火砲를 쓸 수 있도록 만들었으며 성벽의 일부를 바깥으로 튀어나오게 만든 치성의 발전된 형태이다.
치성인 東二雉를 지난다. 東一雉와 똑같은 성격을 지니고 있다.
조그마한 언덕을 내려가니 烽墩이 자리하고 있다. 봉돈은 비상상태를 알리는 역할을 하는 통신시설이다. 성벽 일부를 돌출시켜 벽돌을 쌓고 그 위에 5개의 화두를 쌓았으며, 성벽에 銃眼을 두어 적을 감시하거나 공격할 수 있도록 하였다. 안으로 들어가니 좌측에 무기고, 우측에 온돌방이 위치하고 있었다. 종현이가 봉수대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한다. 烽燧는 밤에는 횃불, 낮에는 연기로 전하는 군사신호 체계라고 말하면서 연기를 낼 때에는 싸리나무와 여우배설물을 태워 노란 연기로 신호를 보낸다고 한다. 다섯 개의 횃불구멍을 통해 상황을 전달하는데 남쪽 첫 번째 횃불구멍부터 평상시에는 밤낮으로 봉수 1개, 적이 국경근처에 나타나면 봉수 2개, 국경선에 도달하면 봉수 3개, 국경선을 침범하면 봉수 4개, 적과 아군 사이에 전투가 벌어지면 봉수 5개를 올렸다고 설명한다.
계속 성곽을 걸으니 東二舖樓, 東三雉가 있고 동측 성곽 마지막 진지로 東南角樓가 있었다. 각루는 군사적 요새지에 건물을 세워 주변을 감시하기도 하고 때로 휴식을 즐길 수 있도록 한 곳으로 이곳에는 총 4개소가 설치되어 있다.
성곽 트레킹을 다 끝내고 좌우를 둘러보니 우측으로 ‘大衆院’이라는 寺刹의 금동불상이 높게 시설되어 멀리에서도 금빛을 발하고 있었고, 좌측으로는 ‘수원제일교회’가 西洋 中世風의 건축양식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建築美가 아주 돋보이는 교회 건물이 눈길을 끌고 있었다.
성곽길을 내려와 도심으로 향하고 있었다. 이제 점심을 먹어야 할 시간인 것 같았다. 수원천을 따라 음식점이 위치한 곳으로 발길을 옮겼다. 이곳 저곳 의논한 끝에 ‘흑돼지찌개삼겹구이’집으로 정했다. 음식점에 들어가 旅裝을 푼 우리들은 음식을 주문하고 난 뒤, 잠시 여가를 활용하여 이지수 회장의 서남지부 운영실적과 상반기 계획을 소개하였다. 우리가 생각하지도 못했던 꽤많은 殘高가 있다 한다. 그간의 勞苦에 共同善으로 고마움을 표했다. 상반기 계획은 아마도 카페 서남지부방에 자세히 소개가 되리라고 본다.
식사와 함께 처음 참석한 오진환 친구의 參加所感과 더불어 멤버로써의 歡迎 乾拜를 모든 참석자 同一聲으로 축하해 주었다. 참으로 고맙고 정겨운 모습들이었다.
점심을 마친 우리들은 오후 일정의 白眉인 화성행궁을 관람하고자 발길을 옮겨갔다.
史蹟 제478호인 화성행궁은 1789년(정조 13) 수원 신읍치 건설 후 팔달산 동쪽 기슭에 건립되었다. 수원부 관아와 행궁으로 사용되다가 1794년부터 96년(정조 18년~20년)에 걸쳐 진행된 화성축성 기간에 화성행궁을 확대하여 최종 완성되었다. 효성이 지극하여 부친 장헌세자(사도세자)의 원침인 현류원(현재의 융릉)을 13차례나 찿았던 정조는 참배기간 내 화성행궁에서 留宿하엿다. 건립 당시에는 600여칸으로 正宮형태를 이루며 가장 규모가 크고 아름다운 행궁이었으나, 일제강점기 대 낙남헌을 제외한 시설이 일제의 민족문화와 역사 말살 정책으로 사라졌다. 1980년대 말, 뜻있는 지역 시민들이 복원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꾸준하고 적극적인 복원운동을 펼친 결과 1996년 복원공사가 시작되어 마침내 화성행궁 1단계 복원이 완료되어 2003년 10월 일반에게 공개하게 되었다고 한다.
新豊樓가 보이기 시작한다. 신풍루는 화성행궁의 정문으로써 신풍이란 ‘국왕의 새로운 고향’이란 뜻으로 정조대왕의 수원사랑을 보여준다. 안으로 발길을 옮기고 있는데 異邦人 커플이 두리번 거리며 무언가 알고 싶어하는 모양새이다. 우리 멤버 중에 英語하면 斷然 규덕이가 아닌가. 자연스레 환영인사와 함께 有昌한 語調로 대화를 시작했다. 얼핏 미국 애리조나에서 온 친구들인 것 같았다. 아마도 戀人사이인 듯 싶었다. 두 연인들은 규덕이가 소개해 주는 이곳의 情景과 史蹟에 欣快히 만족하고 감사한 분위기였다. 잠시나마 民間 外交使節로써의 所任을 다한 규덕이가 매우 자랑스러워 보였다. 우리 서남지부 通譯官으로써의 役割을 톡톡히 한 셈이었다.
신풍루를 지나 좌익문, 중앙문을 거쳐 맨 안쪽의 ‘奉壽堂’에 도착했다. 봉수당은 임금 행차시 正殿으로 쓰인 건물로 중심 4칸을 왕권을 상징하는 便殿공간으로 연출하였다. 을모원행시 이곳은 혜경궁 홍씨의 珍饌宴이 열린 공간으로 이때 정조는 ‘萬年의 壽를 받들어 빈다’는 의미의 ‘봉수당’이라는 堂號를 지어 조윤형으로 하여금 현판을 쓰게하면서부터 이 건물이 봉수당이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시각이 오후 3시가 가까워 오고 있다. 境內 放送을 통해 3시부터 武藝 公演이 열린다고 알리고 있다. 일행들은 모두 신풍루 앞에 모였다. 武藝 24技 공연이 시작되었다. 무예24기는 정조의 명을 받은 실학자 이덕무, 박제가와 무예의 달인 백동수가 조선 전통의 무예와 중국, 일본의 우수한 무예를 적극 수용하여 만든 「무예도보통지」에 수록된 무예로, 화성에 주둔했던 정조대왕 시대 조선의 최정예부대인 장용영 외영군사들이 익혔던 24가지의 실전 무예라고 한다.
공연관람을 마친 뒤 언덕길을 올라 휴게소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우리들은 편백나무와 벚나무가 櫛比한 도로를 따라 아침의 출발지였던 팔달산 기슭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리고 경기도청앞을 지나 아침에 집결하였던 곳으로 다시 모였다. 오후 3시 5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수원역 근처에서 항무가 sponsor한 after를 가지면서 서남지부 모임의 좀더 발전적인 방안을 논의하고 상반기 계획의 구체적인 의논도 함께 하였다.
8명 모두의 얼굴에서 싹 틔우는 목련의 향기와 정조대왕의 효심을 읽은 尊仰心을 헤아리면서 다가오는 봄을 오롯하게 맞이하고 있었다.
2014년 3월 8일 서남지부 리포터 석대식이가
첫댓글 맛갈나게 잘써갔네 ㅡ 행궁에서 젊은 미국 커플 남자는 텍사스 여자는 아리조나 에서 왔다고 한다 궁금한게 한 없이많을 것같아 말을 걷네 든이 기다렸다는듯 질문공세가
시작된다 , 지수가 설명하기 시작한다 - 옆에서 듣는 나도 감탄이 나온다 역시 좋은 고등학교에 장교 출신답게 정리를 잘해가며 설명한다 - 질의답변 양놈에게 열심히설명한 지수에게 민간 외교관으로 임명함니다
대식이 리포터에 요 장면은 안나타나 좀 서운 한데
역시!! 석 주필은 우리의 보물일세~~~
한 펀의 영화 보는거랑 똑 같으이~~~
정말 일세...안가도 간듯...
석 대식 주필과 동행했는데도 기행문은 날 잠시 200년 전으로 돌아가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