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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5월 5일 아산 UBF 주일메시지_특강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말씀 / 요한복음 4:1-26
요절 / 요한복음 4:14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오늘 말씀은 우리의 대화 스타일을 돌아보고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대화하시는지 배울 수 있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양들과 나누는 것은 주로 대화입니다. 우리의 대화가 한 영혼을 예수님께 인도할 수 있는 대화가 되고 예수님의 은혜를 드러내는 대화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4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갈릴리로 가셨습니다. 이 때 사마리아 통과하는 길을 잡으셨습니다. 유대 사람들은 이 길로 가지 않았습니다. 5,6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수가라는 동네에 이르렀습니다. 제자들은 먹을 것을 구하러 동네에 갔고 예수님께서는 우물가에 혼자 계셨습니다. 7절을 보십시오. 이 때 물 길러 오는 여인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여인에게 “물을 좀 달라” 하셨습니다. 이 지역은 물 길러 오는 사람들이 두레박을 가지고 다녔기 때문에 물 뜨러 오는 사람이라면 두레박을 소지하였을 것이라 보고 예수님께서 물 달라 하신 것은 합당한 부탁이긴 합니다.
그렇지만 9절을 보십시오. “사마리아 여자가 가로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치 아니함 이러라” 두레박 가진 사람에게 물 좀 달라 할 수 있지만, 사회적으로 이것은 문제가 있는 것이었습니다. 여자 입장에서 유대남자가 사마리아 여자한테 왜 대화하는가? 분명 비정상이었습니다. 당시는 남자들이 길에서 여자와 대화하지 않았습니다. 부인과 외출 나갔을 경우에도 부부끼리 대화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다고 합니다. 게다가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은 서로 마주치려 하지도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대단히 파격적인 대화를 먼저 시작하신 것입니다.
10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예수님의 대화는 대화의 내용이 매우 달랐습니다. “네가....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예수님의 대화는 이 여인을 기준으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네가 받을 수 있는 선물’, ‘네가 반갑게 구하였을 것’, ‘네가 얻을 수 있는 생수’ 예수님의 대화는 여자를 중심에 두고 여자를 기준으로 여자가 좋아할 것이라는 내용입니다. 예수님의 대화는 여자의 존재를 깊이 존중하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대화는 여자로 하여금 자신이 배려의 대상이라 느끼게 해주는 대화입니다. 이런 대화가 닫혀 있는 사람의 마음과 입을 부드럽게 하는 것입니다.
11,12절을 보십시오. “여자가 가로되 주여 물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을 깊은데 어디서 이 생수를 얻겠삽나이까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었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먹었으니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 예수님의 대화가 여자를 기준으로 여자 편에서 좋은 것을 제시하는 내용이 가득하자 쏘아붙이던 자세가 누그러졌습니다. 대화에 참여하고 대화를 이어갑니다. 그녀는 ‘생수’에 대한 자기 생각을 예수님 앞에 열심히 말하였습니다. 여자는 얼마나 훌륭하시기에 이 우물물보다 더 나은 물을 주시겠다고 하시는지 예수님에 대하여 질문합니다. 예수님의 배려가득한 대화로 인하여 여자는 예수님께 자신의 인식과 자신의 지식을 거침없이 내놓은 것입니다. 예수님과 사마리아의 여자의 대화가 성사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성공적인 대화는 나의 열정을 상대방으로 하여금 받아들이도록 압박 하는 것이 아니어야 합니다. 기본적으로 상대방이 대화 이슈에 열정적으로 참여하도록 만드는 것이 성공적인 대화의 시작이며 기본입니다. 요즘, 대화는 능력입니다. 상대방이 열정을 가지고 나오도록 대화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인으로 하여금 자기의 생각을 거침없이 이야기하도록 이끌어내셨습니다.
13,14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또 다시 예수님께서 얼마나 여인중심으로 말씀하십니까? 물을 마시는 사람, 다시 목마르게 될 사람, 예수님께서 주시는 물을 마셔야 할 사람, 그랬을 때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혜택을 볼 사람 모두 사마리아 여인을 염두에 둔 것입니다. 사마리아 여자는 이렇게 자기를 염두에 두고 자기를 배려하며 자기를 중심에 둔 대화는 실로 처음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를 중심에 놓고 말하였습니다. 자기가 아는 도덕과 율법을 제시하며 사마리아 여자로 하여금 아무 말도 할 수 없게 만들려는 대화가 많았습니다. 그런 대화가 아니라면 사마리아 여자의 외모를 보고 자기 욕심을 채우려고 서두르며 유혹하고 덤벼드는 남성중심의 대화 뿐 이었습니다. 사마리아 여자는 처음부터 자신을 중심으로 대화 해주는 것을 겪어보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대화는 배려와 인격적인 존중으로 가득한 대화였습니다.
15절을 보십시오. “여자가 가로되 주여 이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여자는 예수님께서 자기를 위한 대화를 해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이제 알았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모두 자기를 중심에 두고 하시는 말씀이니 반문할 이유를 느끼지 못하였습니다. 사마리아 여자는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기 시작하였습니다. “주여 이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여자는 오랜 마음의 소원을 이야기하였습니다. 예수님과의 대화를 통하여 그녀가 체험한 것은 자기를 존중해주고 자기를 배려해 주시는 예수님의 인격입니다. 대화는 대화자에 대한 배려와 존중을 느끼게 해주는 것이어야 합니다. 대화의 기술에 문제의식을 느끼거나 대화 기법에 관심 갖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문제는 대화의 기술과 기법에 좋다하더라도 그의 생각이 자기중심, 자기 드러낼 욕심, 자기유익이나 명예, 정욕을 추구하는 것이라면 그의 대화는 그의 자기중심적 가치관과 품은 욕심을 드러내는 것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정누가 목자님이 우리 센터에 참여한 후부터 제가 의학용어를 많이 배웁니다. ‘나르시즘’ ‘나르시스틱 인격장애’라는 용어도 알았습니다. 대화를 통하여 끊임없이 자기중심의 안목이 드러나는 사람을 ‘나르시스트’라 구분할 수 있습니다. 나르시스트는 사물이나 사건을 자기중심으로 보고 해석합니다. 누가 웃는 것을 보면 자기를 비웃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항상 자기 기준으로 판단하는 실수를 반복합니다. 나르시즘을 가진 사람은 대화를 통하여 자기중심적 생각, 자기 주장과 욕심으로 대화 상대방을 괴롭힙니다. 그렇지만 그 자신은 이 사실을 모릅니다. 말로써 타인에게 부담을 준다는 사실과 대화를 더 이어가고 싶지 않게 만든다는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나르시스틱 인격장애’는 ‘나르시스트’에서 더 나아간 극단적인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나르시스틱 인격장애’까지는 아닐 것입니다. 다만, 우리가 그런 속성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조심하여야 합니다. 우리가 ‘나르시스트’가 아니라면 우리는 대화를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대화를 통하여 다른 사람의 관점을 이해하고 내 마음에 있는 다른 사람에 대한 존중을 나타낼 수 있는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전지적인 능력을 가지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다 아십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자와 대화를 시작하실 때 이미 여자의 과거와 여자의 인생을 이미 다 아셨습니다. 혹시, 우리가 예수님처럼 이 여인에 대해서 이미 알고 있는 것이 많았다면 ‘다 알고 있으니 남편 여러 사람 갈아치운 것 회개하시오’ 하였거나, 빨리 여자에게 회개를 촉구하고 싶어 하였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먼저 ‘물을 좀 달라’ 겸손하게 낮아지셨습니다. 여자의 관심사를 따라 대화하였으며 여자의 입장에서 대화하셨습니다. 지금 우리는 모릅니다. 다른 사람의 생각을 모릅니다. 다른 사람의 경험세계를 모릅니다. 그의 복잡하고 다난한 속사정을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대화를 상대방을 알고자 하는 노력의 방편으로 삼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복음 전하는 사명 감당하는 것을 가장 중요한 일로 여긴다면, 대화를 다른 사람의 마음을 얻는 기회요 다른 사람을 존중하고 귀하게 여긴다는 마음을 전하는 채널로 삼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예전에 누가 만나자 해서 나가서 대화 하였는데, 모든 대화가 저에 대한 모독과 모욕으로 가득 찬 경우를 경험한 적이 있습니다. 나중에 주변 사람들에게 ‘왜 나를 만나고 모욕스러워 하고 대화하기 싫어하는지 모르겠다’고 하더랍니다. 참 안타깝지요? 끊임없이 상대방에게 모욕감을 주는 대화를 일상적으로 하는 분들 중에 복음 전하는 일을 하겠다는 경우가 있으니 안타깝습니다.
16절을 보십시오. “가서 네 남편을 불러오라” 여자의 인생을 다 알고 계신 예수님께서 이제야 여자의 핵심을 말씀하십니다.
17절 전반절을 보십시오. “여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여인이 남편이 없다는 말은 사실 솔직한 대답이 아닙니다. 17절 후반절과 18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예수님께서 그녀에게 지금 법적 남편이 없으므로 그녀의 대답이 맞다 해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자가 한 말에 대하여 시비를 가리자, 따지지 않으십니다. “네 말이 참되도다” 이것이 예수님의 인격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대화입니다. 사람에게 상처 많고 사람들의 따돌림을 받아온 여인에게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네 말이 참되도다” 해주십니다.
19절을 보십시오. “여자가 가로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여인은 놀랐습니다. 여자의 놀라움은 감탄과 감동이 포함된 것입니다. 자기의 과거 삶을 다 아시는 것만 놀라운 것이 아닙니다. 과거 자기 삶을 다 아시면서도 대화를 통하여 배려해주시고 인정해주시고 여자를 기준으로 여자를 위하여 대화해 주신 것까지 다 놀라운 것입니다. 여자는 마음에 깊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20절을 보십시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이제 여인은 영적인 이야기를 합니다. 그의 영혼의 소원, 영혼의 고민을 드러내어 말합니다. 사실 사마리아 여자는 그동안 간절한 소원을 가지고 하나님께 마음을 드러내놓고 기도하며 진실한 예배드리기를 원했었습니다. 하지만, 사마리아는 예배에 대하여 혼란이 있어왔습니다. 정치적 목적 때문에 백성들이 예루살렘에 내려가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긴 북이스라엘 지도자들이 예루살렘 아니라 그리심산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 옳다고 백성들에게 가르쳤습니다. 그에 대하여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의 이론이 비성경적임을 지적하고 사마리아의 성전을 적대시하였습니다. BC128년, 유대인들은 직접 쳐들어가 그리심산 성전을 파괴하였습니다. 그 후로도 유대와 사마리아의 분쟁으로 인하여 목마른 영혼들은 예배드리고자 하여도 장소문제로 인한 혼란을 겪어야 하였습니다.
21-24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여인의 예배에 대한 혼란을 풀어주시고 그의 영적인 문제에 대해서 답을 주십니다. 올바른 예배는 예배의 대상이 올바른 예배여야 합니다. 하나님께 예배 드려야 합니다. 장소가 진정한 예배를 만들어주는 것이 아닙니다. 둘째, 영과 진리로 드려야 합니다. 예배의 내용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영적인 예배가 되어야 하고 진리의 말씀을 기초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25절을 보십시오. “여자가 가로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고하시리이다” 예배의 혼란을 해결해주셔서 답을 얻은 사마리아 여자는 영적 소원으로 마음이 밝아지고 드디어 메시야에 대한 소망으로 가득하여 졌습니다. 그녀는 인생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실 분은 메시야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동안 사람들이 외면하고 따돌림 주고 있던 사마리아 여자가 예수님과 대화를 통하여 본연의 영성을 회복한 것입니다.
26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로라” 예수님께서 여인이 소망하던 그 메시야이심을 말씀하여 주십니다. 사마리아 여자는 드디어 메시야를 만났습니다. 여기에 이르기까지 예수님께서 해주신 것은 대화입니다. 사마리아 여자는 병 고치는 권능이나 바람과 바다를 잔잔하게 하는 능력을 보고 메시야를 만난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대화하며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메시아를 만났습니다.
오늘날 기독교 전도가 막혔다는 말도 하고 캠퍼스 선교역사도 침체기라는 말들을 많이 듣습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오늘 요한복음 말씀에 비추어보면 우리 기독교인들, 그중에서 예수님의 제자로 살기를 표방하는 우리들은 어떤 대화를 하고 있는지 생각해보아야 한다고 이것이 이슈가 될 수 있다고 봅니다. 저는 1986년 예수님을 영접하였고 1987년부터 캠퍼스에서 예수님의 양들을 초청하고 돌보는 사명에 부르심을 받아 활동을 시작하였습니다. 1992년, 1993년 오렌지족이라는 말을 처음 들었습니다. 1995년 이후 X세대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당시 저는 대전에 있었는데 학사목자들 중에 제일 선배이신 분이 매주 소감 때마마다 X세대의 특징을 강조하고 그로 인하여 캠퍼스 목자로 살기 어렵다는 내용을 발표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 시점부터 캠퍼스 선교가 80년대의 성장과 다른 양상을 보인 것으로 압니다. 매년 주일예배 통계를 보면 참석자가 해마다 두 배씩 성장하던 시대가 있었습니다. 그런 성장과 성공의 경험이 혹시 우리의 대화 방식, 학생들을 만나고 인격적인 교류하는 방식을 고정시킨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가끔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대화를 하지 않는데, 일방적이고 고압적인 대화를 하는데 학생들이 많이 왔다는 기억이 우리의 대화방식이 예수님처럼 배려하고 존중하는 것이 아님에도 ‘우리는 문제없다. 다만 시대가 문제다’ ‘우리는 오류가 없다 그저 시대가 달라져서 그렇다’는 단정을 내리고 있지나 않은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저의 처제가 가정사로 마음 아픈 경험이 있습니다. 처제가 아픔을 경험한 시댁 어른들이 교회문제로 처제에게 부담을 준 일 있습니다. 처제 근무하는 곳이 종로 5가 이니까 제가 본부 가는 길에 처제회사 근처에서 식사 하는 일이 있으면 불러서 같이 식사한 때가 1년에 한 두 번 있었습니다. 이름대면 잘 아는 유명하고 인자한 분과 같이 있는 자리였는데, 우리 처제를 보자마다 단 번에 ‘교회 다니지요? 안 나가세요? 안 나가시면 빨리 나가셔야 해요’ 앞뒤 가르지 않고 보자마자 열심히 전도 하셨습니다.
우리센터 자매 목자님이 결혼과 함께 파송 받은 경기도의 어느 센터는 모든 목자님들이 모든 면에서 겸손과 존중과 배려로 가득하다고 그 센터 스탭목자님께서 자부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과연 그 센터에는 지금도 학생들이 즐겁게 말씀공부 해달라고 하며 성경말씀 받는 일이 있습니다. 캠퍼스에서 학생들이 기꺼이 참여하는 그룹 바이블 스터디를 섬기는 목자님이 저도 누구인지 아는데 그 분 정말 말부터가 겸손으로 가득한 분입니다.
시대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이 세대의 문제가 아니라고 강조하고자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잘 배운다면 얼마든지 예수님을 모르는 청년들이 즐겁고 기꺼이 예수님께로 오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우리에게 성경을 가르쳐 주세요’ ‘우리에게 왜 성경을 더 가르쳐주시지 않나요’ 이런 일이 겸손한 마음으로 배려와 존중의 말을 하는 목자 주변에서 지금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인격을 배우면 쓰임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배워서 듣는 사람을 귀하게 여기고 앞에 있는 사람을 배려하며 말하고 존중하는 마음으로 대화하는 목자를 성령께서는 지금도 얼마든지 생명역사에 사용하여 써주십니다. 대화하는 마음 중심이 중요하고 오늘 성경 말씀을 보면 대화하는 내용의 순서가 중요합니다.
결론을 맺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성육신 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 영광을 버리고 이 땅에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희생의 메시야, 겸손의 주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죄 없으신 분이 죄인이 되셨습니다. 나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매달려 죄인이라 정죄 받으시고 죽으셨습니다. 이 겸손의 예수님께서 사마리아로 굳이 가셨습니다. 유대인들은 더러운 땅, 저주받은 땅이라 여기는 사마리아에 가신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 동족들로부터도 무시당하고 따돌림 받던 한 여인과 대화하셨습니다. 그녀를 무시하지 않으셨습니다. 결론부터 말씀하지 않으셨고 배려하고 존중하며 대화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대화는 성육신 하신 겸손의 주님께서 하시는 대화였습니다. 예수님의 대화는 죄인들을 살리시려 대신 자기 목숨을 버리신 주께서 죄 많은 여자를 오히려 인정해주시고 존중해주시는 대화였습니다. 겸손하게 대화해주시고 여자 편에서 대화를 풀어 주시는 예수님과의 대화를 통해서 사마리아 여자는 메시야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예수님께서 본을 보여주신 이런 대화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의 겸손과 희생을 배우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능력을 풍성하게 체험하시기를 기도합니다. 기도하고 마치겠습니다.
아산 UBF
아산 UB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