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효의 오도송이 가치는 불교사상적 의미는 ?
원효와 의상은 2차로 서기 661년에 다시 지적 호기심이 강하여 유학 시도하여 화성의 당항성의 남양만 앞에 있는 당은포로 추정이 되는 곳에서 첫날 밤에는 땅막이어서 들어가서 편안히 잠을 잔다. 근데 밤에 비가 칠흑같이 내리고 낮에도 역시 비가 내리기 때문에 길을 떠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던 두 사람은 다시 그 속에서 하루를 더 자게 되는데, 그날밤 갈증을 느꼈던 원효가 무덤 속에 있는 바가지를 찾아서 물을 마시게 된다. 그러다가 일심의 발견이 이뤄지게 된다. 나중에 날이 새자 땅막이 아니라 무덤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자신이 마셨던 바가지가 바로 해골바가지였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 여기서 커다란 인식의 전환이 일어나게 되여 '어젯밤 잠자리는 땅막이어서 매우 편안했지만, 오늘밤 잠자리는 무덤이어서 매우 뒤숭숭하구나.' '마음이 일어나므로 갖가지 현상이 일어나고, 마음이 사라지므로 갖가지 현상이 사라짐을 알겠도다'하는 이 오도송을 펼치게 된다.
어젯밤 잠자리는 매우 피곤해서 눕자마자 잠이 들어서 달콤한, 극락과 같은 잠을 잤지만, 오늘밤 잠자리는 바로 무덤이라는 사실을 알고 매우 공포와 두려움, 으스스한 그런 느낌이 들었다는 것. 뒤숭숭한 느낌. 그런데 어젯밤과 오늘밤이라고 하는 이 시간에 차이에 지나지 않는데, 공간은 동일한 곳인데 왜 이런 차이가 날까? 결국은 내 마음에 현상이 생겨난다는 것. 그래서 그가 읽었던 대승기신론에 '심생즉종종법생하고 심멸즉종종법멸'이라는 이 핵심 구절을 놀랍게 자리바꿈해서 '심생고로 종종법생'하고 '심멸고로 감분불이'라 하는, 이렇게 패러디해서 '땅막과 무덤이 둘이 아니다' 이런 구절로 자리바꿈하게 된다. 그래서 그는 바로 여기에서 깨달음을 얻게 된다.
바로 '삼계유심 만법유식'하는 '삼계는 오직 마음이 만들어 내고, 모든 현상은 하나로 돌아가네' 이 부분이다. 삼계란 욕계, 색계, 무색계는 오직 내 마음이 만들어 내고, 존재하는 모든 현상은 인식으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이 구절이 불교의 핵심 구절, 불교 사상사를 총괄하는 구절이라고 볼 수 있다.
다시말해서 마음이 움직일 때 마다 갖가지 현상이 생기고, 마음이 움직임 을 그치면 붓다를 모신 탑이나 해골이 잠든 무덤이 서로 다르지 않다. 세계의 모든 것이 마음에 달려 있고 모든 앎 또한 마음에 의지한다. 마음 밖에 아무 것도 없으니 무엇을 따로 구하랴. 원효가 그토록 찿아 헤매이던 것이 바로 마 음이라는 사실을 깨우친 것다. 진리는 마음에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길이고 진리이며 생명이었다. 문제는 마음이었던 것이다. 마음이란 몸을 나라고 인식 하는 관념이다. 몸을 나라고 믿기 때문에 몸이 원하는 것을 위하여 평생을 바 친다. 돈과 권력 그리고 명예를 얻기 위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얻 기도 하고 잃기도 하지만 모든 것은 영원하지 않다. 무상하다. 그렇게 신기루 같은 것을 얻고자 분투한다. 잠시 행복했다가도 불행해진다.
마음이 무상한 관념일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몸은 내가 아니기 때문이다. 몸은 인연따라 왔다가 인연이 다하면 사라지는 구름과 같이 무상한 것이라는 진실을 아는 것이다. 몸이 내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나면 무엇이 남을까? 이 때 남는 것은 ‘순수의식’이다. 물질이나 현상으로는‘존재 그 자체’이다. 내가 없으므로 ‘순수의식’이고 내가 없으므로 나와 너의 구별 이 사라지는 ‘절대’의 경지가 열리게 되는 것이다. 불교 사상적 의미로써 이런 일차적인 앎을 견성 또는 깨우침이라 부른다. 그래서 깨우침이란 진리에 대한 지적 이해라고 할 수 있다. 그럼 그 다음에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 지적인 이해가 우리 삶 속에 녹아들어 앎과 내가 하나가 되는 것, 그것이 부 처가 되는 유일한 길이다. 그리고 그런 모든 노력을 점수라 한다. 이것이 원효 의 오도송이으로 당시 깨달음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