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전산책]『신심명』⑨ 허공의 꽃을 어이 붙잡으려 하는가 미혹하기 때문에 고요함과 어지러움이 생기고 깨달으면 좋고 싫음이 없다. (迷生寂亂 悟無好惡) (一切二邊 浪自斟酌)
(夢幻虛華 何勞把捉) (得失是非 一時放却)
공화(空華)는 허화(虛華)라고 하는데 이는 대승경전에 실상에 대한 이해를 위해 이 말을 자주 쓰고 있다. 공화는 눈병이 걸린 사람이 공중에 꽃이 있는 것처럼 보일 때를 말한다. 이처럼 ‘몽환공화’는 눈에는 보이는 것 같지만 실체가 없는 것에 대한 비유이다.
『수능엄경』에 “눈이 침침한 자가 공중에 꽃을 보는 것과 같이, 침침한 병이 나으면 꽃은 허공에서 사라진다.”고 하였다. ‘일체이변(一切二邊)’ 즉 ‘이원대립’은 모두 공한 것이며 그래서 ‘비실재’(무자성)라고 하는 것이다. 이는 우리자신이 일으킨 공화에 자신 스스로가 이에 치우치고 집착하는 헛된 수고를 하는 것이다. 선과 악, 깨달음과 미혹함, 모두를 일시에 내려놓아라! 그것이 깨달음으로 향하는 절대 조건임을 강조한다.
(眼若不睡 諸夢自除) (心若不異 萬法一如)
양변은 이변과 같이 이원상대의 분별의 세계로서 우두법융의 『심명』에도 보인다. “득실의 양변, 좋고 싫음을 누가 논하리오”라고. 일여는 ‘한가지로서 같은 것’이라는 뜻. ‘심심불이 만법일여’는 임제록에도 나온다. ‘안약불타 제몽자제’는 노자에 ‘옛날 참된 사람은 잠을 자도 꿈이 없고 깨어 있어도 근심이 없다.’는 말이 있고, 참선자도 마찬가지로 ‘잠을 자도 꿈이 없다’라고 한다.
선가에서는 공부를 잘 하는 선자는 절대 꿈이 없다고 전해지고 있다. 꿈이 많은 자를 시시한 업보가 많아서 그렇다고. ‘몽중서래의(夢中西來意)’라는 공안이 있다. 이에 대해 어느 선자는 “깊은 잠으로 산중에 비가 내리는 것을 알지 못했는데 깨어나 보니 누각이 시원하구나”라고 그 견해를 보였다. ‘몽중서래의’는 다만 ‘깊은 잠’뿐으로 그 밖의 어떤 ‘서래의’가 있을까라고 하는 것이다. 다르지 않는 순일한 마음이 그대로 ‘서래의’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혜원 스님(동국대 선학과 교수) [출처 : 법보신문]
|
첫댓글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