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ㅁ ㅜ믇=새ㅔ> ‘교과서 밖 조선 유학’ 성학집요 (栗谷 李珥) | |
성학집요 <25> 21세기, ‘왜 유교 심학 (心學)’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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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유교’ 와의 대화가 우리 사회 이끄는 힘 |
성학집요 <끝 回> 21세기, 왜 유교 심학(心學)인가
20세기 유교를 보는 시선의 전변
20세기, 유교는 잊혀졌다. 1) 망국은 유교에 원죄를 묻고, 다시는 말을 못하게 입을 봉했다. 그 절망을 단재 신채호가 대변하고 있다. “닭이나 개가 무슨 죄를 지었더냐. 사람들의 고픈 배를 위해 죽어 나가는 게지. 칼과 힘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거적때기 깔아 놓고 인의(仁義)를 읊어대기냐.” 그는 애꿎은 진시황을 불러내 ‘못다한 분서갱유(焚書坑儒)’를 원망했다. “그때 확실히 묻고 태웠어야 했는데….”
2) 그러고서 한 세대가 지났다. 식민체제의 일상화. 근대문명의 소나기가 조선인의 정체성을 위협하고 독립의지를 약화시키고 있었다. 못난 조상을 손가락질만 하고 있을 수 없었다. “조선의 유학은 한심했으되 후기, 새로운 시대를 꿈꾸고 준비해 온 선각들도 있었다.” 그리하여 ‘실학’이 발굴되고 대서특필됐다. 이 자부심으로 우리는 그 엄혹한 시절을 견뎠다. 해방이 되고서도 실학은 조선의 역사를 보는 중심의 안목이었다. 근대화 · 서구화가 시대의 정신이었기 때문이다. 1980년대, 그 프로젝트의 성공이 아이러니하게도 유교를 보는 시선에 혁명적 변화를 몰고 왔다. 잊혀진 유교가 롤백한 것이다. 소식은 해외에서 들려왔다.
3) “유교는 비서구권 아시아의 압축적 성장을 가능케 한 문화적 배경이자 정신적 동력이다!” 이런, 이게 웬 소리? 남다른 교육과 지식의 개방성, 가족에 대한 헌신, 집단 우선의 공동체의식이 이 기적을 일으켰다는 것. 이 진단은 그러나 국내 지식인들에게는 시큰둥함에 냉소를 불러일으켰고, IMF 사태가 닥치면서 “역시나 거봐” 하면서 풍선에 바람 빠지듯 잠잠해졌다.
4) 그러나 위기는 빠르게 극복했고 한국은 글로벌 강국의 반열에 들게 됐다. 이 진입이 아무려나 유교를 ‘거대담론’의 단두대에서 끌어내 자유롭게, 디테일하게, 그 자체로 접근하고 소비하게 해 줬다. 서점가는 가히 ‘조선시대’가 열풍을 일으키고 있다.
21세기 유교의 네 가지 자원
이처럼 20세기 유교를 보는 시선과 인식은 네 번의 급격한 굴절을 거쳤다. 부정, 위로, 승인, 활용으로…. 그렇지 않은가. 21세기는 네 번째 단계의 연장선에 있다. 그리하여 “억압 없이, 자유롭게, 유교와 전통을 말할 수 있는 시대”가 된 것이다. 가령 다음과 같은 시가 문득 눈에 띄었다. “이 화상, 지금 술 한 잔뿐이 안 마셨다고 둘러대고 있지만, 틀림없어, 룸살롱에 갔다 온 거야. 아니라면 어째서 찐득한 루주 자국이, 당신 와이셔츠 흰 칼라 위에 빨갛게 번져 있지 (歡言自酒家, 言自娼家. 如何汗衫上, 濃脂染作花 · 李鈺·1760~1813).”
실학의 빅브러더로부터 해방되자 다채로운 사실과 이야기들이 팝콘처럼 뛰쳐나왔다. 정리하면 네 부문이 있다. 1) 문화콘텐트 : 생활과 문화에 대한 정보와 이야기들. 영화와 드라마로 표출돼 한류 붐을 이끌고 있다. 2) 상품 개발과 디자인 : 기업이 어느 정도 성장하면 독자적 상품과 디자인으로 승부해야 한다. 국가 브랜드까지 전통과의 접맥을 떠날 수 없다. 3) 한국인의 사고 방식 : 심리와 정신의 문화적 특색을 돌아보기. 조직을 운영하고 사람 사이의 관계를 조율함에 단순한 수입은 성공도 어렵고 바람직하지 않다. 회사와 정치, 제도와 규율까지 ‘보이지 않는 유교’와의 대화가 필요하다. 4) 의미와 가치 : 경쟁과 이익 사회에 적응하고 진보와 기술의 현기증을 감당해 줄 정신의 방벽이 절실하다. 풍요의 시기, “우리는 정말 행복한가”의 물음에 어떻게 응답하고 대책을 세울 것인가.
의미와 가치를 향해 쏘는 유교의 화살
마지막의 의미와 가치는 ‘철학’과 ‘인문학’의 몫이다. 철학은 본시 삶의 훈련이고, 인문학은 “안의 혼란을 다스리고 무의미를 견디는 기술” 아닌가. 요란한 유교 부흥(?)의 소란 속에서도 정작 이 ‘지혜’로서의 유교는 미답의 영역, 빛이 닿지 않은 창고로 남아 있었다.
유교의 중심은 심학(心學)이다! 즉 마음의 개발과 도야에 관한 오래된 기술이다. 2년의 연재를 통해 그 기술의 풍경과 노하우를 짚어 봤다. 그러고 보니 이곳은 또한 조선 유학의 본령이 있는 곳이다. 이 땅의 선인들은 주자학의 방대한 학문 가운데 잡담 제하고, 이 훈련의 노하우를 목말라했다. 도설(圖說)과 집약이 유행한 것을 보라. 그 매뉴얼 가운데 세 권, 진덕수의 『심경』, 퇴계의 『자성록』, 율곡의 『성학집요』 전반을 집중 소개해 드렸다. 스타일은 서로 달라도 포인트는 내면의 훈련, 즉 수기(修己)를 향해 있다. 거친 글에 단편으로 더듬댔으나 ‘내 마음’의 실제가 더 분명해지고, 안정과 행복의 지수가 혹시 더 높아지셨는지 모르겠다.
화살 빗나가면 쏜 자신을 탓하라
수신제가치국평천하라, 이 훈련의 사회적 확장은 가정과 사회, 국가로 이어진다. 그런데 이쯤에서 아쉽지만, 사설을 접을까 한다. 1) 변명하자면, 율곡이 정가(正家) 편에서 강조하듯 가정의 화목과 번성은 순전히 “나 자신의 도덕적 규율”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수기(修己)가 있어야 할 모든 것이다. 유교는 오해(?)와는 달리 아내를 핍박하거나 자식들에게 매를 들라고 하지 않는다! 군자구저기(君子求諸己). “화살이 빗나가면 쏜 자신을 탓하리니, 가정 또한 그렇다.”
그렇다면? 더 이상의 연재는 아니해도 된다는 말이겠다. 2) 한편 미안해하자면, 나는 아직 유가의 독특한 가정 운영과 그 실제, 그리고 정치적 사고와 그 해법에 익숙하지 않다. 이 부분은 아예 다른 분들이 맡는 것이 합당하다. 그동안 난삽한 내용을 어지러이 견디느라 땀 흘린 분들에게 미안함과 고마움을 전한다. 다시 만날 때까지 다들 건강하시길
- 중앙선데이 | 제206호 | 한형조 교수 | 교과서 밖 조선 유학 : <25> 마지막 回 | 2011.0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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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자학의 ‘정치학’ 매뉴얼, 성학집요 <1> ‘철학과 정치의 균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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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등 돌리고 자기 수련만 하는 게 선비의 길인가 |
주자학의 ‘정치학’ 매뉴얼 『성학집요』<1> - 철학과 정치의 균열
성경은 말한다. “아버지의 집에는 수많은 방이 있다.” 티베트에는 승려 수만큼의 불교가 있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유학은 하나의 이름이 아니다. 조선의 유학, 그 하늘에서 수많은 개성들이 명멸했다. 겉으로 보이는 단일한 교조들, 그 얼음장 사이로 분출하는 내부의 열기와 역동은 뜨겁기 그지없다. 예컨대 퇴계가 수도사형이라면 남명 조식은 무사형이다. 정도전과 율곡, 다산이 정치적 책임과 자의식에 철저하다면 화담은 예술가의 자유로운 영혼을 가졌다. 후기의 최한기는 유학을 경영과 실용의 관점에서 접근한 예외적 인물이다.
1. 유교의 본령은 정치인데 거장들 중 비정치적인 인물이 많은데...
사대부(士大夫)라는 이름이 대변하듯 유교의 본령은 정치인데 위의 거장들 중 비정치적인 인물이 많은데 놀랄지 모르겠다. 역시 수기(修己)와 치인(治人) 사이에 틈이 있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는 『대학』의 희망일 뿐 이들은 자동 연속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조선 유학의 심리적 콤플렉스 또한 여기 있다고 일전에 언급한 바 있다.
다산은 조선의 유학이 수기(修己)에 자폐적으로 올인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터럭 끝까지 썩어 문드러진 세상에” 구원의 책임을 진 선비들은 다 어디 갔는가. 다산은 불교에 탓을 돌렸다. 주자학이라 불리는 송대의 ‘새로운 유학’이 불교를 극복하기보다 오히려 거기 동화되어 버렸다는 것. “주자학은 결국 불교다.” 놀랍지 않은가. 불교를 이단(異端)으로 단죄하고, 절간을 놀이터로 만든 것이 주자학자들인데, 이게 무슨 청천벽력인가.
다산의 과격한 발언에는 근거가 있다. 둘 다 ‘발견’을 토대로 한 기획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불교는 자기 안의 불성(佛性)을 ‘깨닫는 것’을 목표로 주시와 성찰의 훈련을 권한다. 주자학 또한 거경(居敬)과 궁리(窮理)를 통해 성즉리(性卽理), 즉 자신 내부의 초월성을 ‘파지’해 나가는 길을 제시했다. 역시나 흉보면서 배우고, 싸우면서 닮는다.
다산은 주자학이 이처럼 자기 내적 ‘발견’에 오로지 방점을 찍음으로써 공맹이 창도한 유교의 근본 정신, 즉 사회적 책임을 심각하게 훼손시켰다고 생각한다. 그는 ‘ 공맹의 학문(洙泗學)’을 다시금 ‘회복’하겠다는 캐치프레이즈 아래, 주자학의 향내적(向內的) 자기 대면의 성채를 하나하나 ‘망치로 두들겨 나갔다.’ 그 파괴의 도구는 여럿이다. 유구한 중원의 경학(經學) 전통과 실학의 선배들이 있었고, 무엇보다 서학(西學)이라는 이름의, 서양의 새로운 과학과 철학 지식이 결정적이었다. 아, 여기 일본의 유학 전통도 큰 자극이 되었다는 것을 빠뜨려서는 안 된다.
2. 그럼 주자학의 정치학은 없는가
그럼 주자학의 정치학은 없는가. 그럴 리가? 초기에 정도전이, 후기에 개혁군주 정조가 있고, 누구보다 율곡이 있다. 당시 선비들은 두 종류였다. 과거시험을 통해 입신양명을 꾀하거나, 아니면 퇴계처럼 초야에서 자기수양에 몰두하거나였다. 율곡은 이 두 위태로운 해협을 헤치고 주자학의 수기-치인의 통합 기획을 성취한 전형이라 할 만하다. 그의 과제는 성찰과 정치의 화해, 즉 관조의 삶(via contemplativa)을 행동의 삶(via activa) 위에서 구현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율곡은 한사코 물러나려는 퇴계의 소매를 붙들었다. “어째 혼자서만 편하시겠다고 남을 위한 책임을 저버리십니까.” 그는 절망적 상황에서도 나아가고자 했다. 병든 몸을 이끌고 인재를 고르기 위해 사람들을 접견했고, 죽는 날에도 북쪽 변경의 오랑캐를 제어하기 위한 방략을 입으로 불러주었다.
3. 남명은 저술을 남기지 않았다.
남명은 저술을 남기지 않았다. ‘신명사도(神明舍圖)’라는 그림 한 장이 마지못해 있을 뿐. “오직 전투적 자세로 마음을 외적 유혹과 내적 누출을 막아라.” 퇴계의 『성학십도(聖學十圖)』는 마음의 우주적 기원을 적고 자기 성찰과 종교적 수련을 경(敬) 한 글자로 관통시켰다. 남명은 전투적이고 퇴계는 종교적이나 그럼에도 공통점이 있다. 둘 다 관심을 오직 ‘마음’에, 즉 자기-자신과의 대면에 두었을 뿐, 유학의 나머지 반쪽인 사회적 관계나 정치적 기술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는 것이다.
율곡의 『성학집요』는 다르다. 이 책은 ‘그림’이 아니라 ‘언술’이다. 유학의 수기치인의 철인정치를 전체에 있어, 체계적으로 정리 편집한 책이다. 목차는 기획과 총론, 자신, 가정, 사회와 정치, 그리고 학문의 5부로 구성돼 있다. 사서삼경을 위시해 주자학의 난만 방대한 저작에 길을 헤매는 사람들에게 이 책은 구원이라 할 만하다. 조선의 주자학은 딱 이 매뉴얼 하나면 좋았다. 그 다음부터는 군더더기이거나, 없는 것이 더 나았을 사족(蛇足)이기 십상이다.
주자학의 성공과 실패는 『성학집요』에 달려 있다. 조선의 실패를 읽으려면, 혹은 거기 작은 희망이 있는지를 보려면 이 책을 벤치마킹해야 한다. 과연 수기와 치인은 연속될 수 있을까. 가능하다면 조건과 방법은 무엇일까. 실패할 수밖에 없다면, 일본의 고학(古學)파 오규우 소라이(狄生<5F82>徠·1666~1728)가 제안하듯, 수기를 너무 심각하게 생각 말고 다만 통치자의 의장으로 삼아야 할까, 아니면 현실정치가들처럼 수기 따위는 거추장스러우니 그만 떼버리는 것이 상책일까. 그렇다고 이 ‘현실적인, 너무나 현실적인’ 세태에 등을 돌리고 홀로 수기에만 올인하는 것이 길일까. 그 지나친 몰입은 혹시 현실을 도외시하고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든 고립아, 뜻은 크되 손발이 따라주지 않는 무능자, 아니면 공허한 명분으로 세상을 향해 소리만 질러대는 이념 과잉의 도덕가만 키우는 것은 아닐까.
- 중앙선데이 | 제149 | 한형조 교수 | 교과서 밖 조선 유학 : 성학집요 <1> | 2010.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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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왕의 정치는 성의를 다해 현자를 등용하는 것인데 |
주자학의 ‘정치학’ 매뉴얼 『성학집요』<2> - 중흥의 열망을 담아 쓴 책
정치는 책임이지 권력이 아니다. 그래서 정당성은 ‘하늘로부터’ 받지 않고 ‘백성들의 동의’에 기초한다. ‘천명은 움직이는 것(天命靡常)’이기에 언제나 역성혁명에 열려 있다.
1. 군주의 책임
맹자가 이 이념을 가장 분명하고 과격하게 제시하고 있다. 제(齊)의 선왕(宣王)과 나눈 대화 한 토막.
“처자를 친구에게 맡기고 먼 길을 떠난 사람이 있었습니다. 돌아와 보니 식구들이 추위와 굶주림에 떨고 있었습니다. 임금이 그 사람이라면 어쩌시렵니까.” “당장 절교해야겠지.” “판관을 하나 임명했는데 옥사를 제 멋대로 처리하고 있다면 그를 어쩌시렵니까.” “즉각 파면해야지.” 맹자는 이 대답을 듣고 나서 제 선왕에게 다시 물었다. “지금 제나라가 온통 도탄에 빠져 있는데, 임금이시라면 그 책임자를 어떡하시렵니까.” 제 선왕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좌고우면(左顧右眄), 좌우를 둘러보며 딴소리를 했다.
조선의 유학도 ‘맹자’의 압도적 영향 하에 있다. 그렇지만 생사여탈권을 쥔 임금 앞에서 누가 대놓고 옥좌를 내놓으라고 윽박지를 수 있었을까. 율곡은 좀 달랐다. 어느 날 경연(經筵)에서 이 대목을 강연한 다음 이렇게 덧붙였다. “만일 맹자가 전하를 향해 조선이 어째서 이렇게 되었느냐고 묻는다면 무어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이 발칙한 질문에 선조 또한 입을 다물고 말이 없었다. 율곡은 한 걸음 더 나갔다. “만일 스스로 생각하시기에 나라를 다스리기에 부족한 그릇이라고 생각하신다면, 상감보다 어질고 유능한 사람에게 전권을 맡기는 것이 옳습니다! (若自度才不足以治國, 則必得賢於己者而任之可也. 『經延日記』권 29)”
2. 절망의 시대
선조가 율곡을 좋아했을 리가 없다. 목숨을 부지한 것이 다행스러울 정도다. 율곡의 기록들을 종합하면 선조는 바탕은 착하지만 자존심이 세고 우유부단한 성격이었던 듯하다. 신하들의 협박과 설득에도 그는 그저 묵묵히 듣기만 할 뿐,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상하 간의 소통이 없는 시대, 임진년의 불행이 여기서 예고되었다. 당시의 정황을 잘 알려주는 예화가 있다. 어느 날 경연에서 검토관 김성일이 탄식한다. “조정의 명령이 막혀서 실행되지 않고 있습니다. 위에서 제안된 정책들은 아래로 내려가면 벌써 다른 폐단이 생기고 있습니다.”
율곡이 받는다. “명령이 시행되지 않는 이유를 오늘 이 자리만 보아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군신(君臣)간은 부자(父子)와 같아서 신뢰(交孚)가 있어야 일이 성취될 수 있습니다. 지금 저희들은 여기 지척간인데도 임금께서는 속을 열지 않으시고 마음을 닫아걸고 있으니, 천리 밖에 명령이 어떻게 소통될 것입니까.”
송응개가 말했다. “음양이 화합해야 비가 내리고 만물이 자라는 법인데, 전하께서는 그저 입을 다물고 침묵으로 일관하고 계시니 상하가 단절되는 것입니다.”
임금이 그제야 입을 열었다. “내가 무슨 말을 하겠는가. 모든 책임이 결국 나한테 있다고들 하는데, 돌아보니 나는 영 아닌 재질이라 도무지 ‘정치의 도’를 일으킬 수 없으니, 그래서 말을 않는 것이네.”이 말에 다들 “그렇지 않습니다” 하고 합창했다.
임금은 “이건 겸양이 아니야. 내가 나 자신을 어찌 모르겠는가”라고 했다. 율곡이 나섰다. “정말로 말씀하신 대로라면 모름지기 현인(賢人)을 얻어 그를 믿고 맡기시면 가히 치국(治國)할 수 있습니다!”
그런 다음 율곡은 덧붙였다. “그렇지만 임금께서 ‘나는 못 하겠다’고 하신 말씀을 저는 믿지 않습니다. 임금께서 여색(女色)을 좋아하십니까. 음악과 연회를 좋아하십니까. 술에 빠져 계십니까. 말달리고 사냥하기를 좋아하십니까. 궁중 안의 프라이버시라 실상은 잘 모르겠지만 임금께서는 위의 실덕(失德)에 스포일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도 ‘나는 못하겠다’니 무슨 말씀이십니까. 전하에게 결여된 것은 다만 ‘의욕과 비전(立志圖治)’입니다. 학문에 ‘실천’의 공이 빠져계신데, 진실로 해보겠다는 뜻을 세우면 안 될 정치가 없습니다 (但殿下所欠, 惟不立志圖治耳. 此正由學問上欠踐履之功故也. 苟能立志有爲, 則何患不治).”
3. 성학집요, 임금을 일으켜 세우기
그러나 선조는 고개를 흔들었다. “나는 어려운 날들을 만났다. 그래서 의미 있는 성취를 꿈꿀 수 없다(予無才德, 而時世適遇難治之日, 所以難於有爲也).” 그는 창업기의 군주들을 부러워했다. 유방처럼 덕성도 재주도 별로인데도 빛나는 성취를 거머쥔 사람들을….
율곡의 『성학집요』는 이 무기력과 침체를 타파하기 위해 쓴 책이다. 거기 중흥(中興)의 간절한 꿈이 담겨 있다.
말이 쉽지, 마음 한 치 돌리기는 얼마나 어려운가. 율곡은 호소한다. “제왕의 학문은 기질(氣質)을 변화시키는 것이 가장 절실한 일이며, 제왕의 정치는 성의를 다해 현자를 등용하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기질(氣質)은 기질(temperament)이 아니라 성격(character)을 가리킨다. 통념과 습속에 젖고, 무엇보다 자기 관심에 갇혀 있는 한 타인의 얼굴이 보일 리 없고 전체를 향한 책임 또한 기대할 수 없다! 무기력과 의혹 등의 불건전한 정념 또한 그 오래된 보호 본능과 협소한 방어기제의 산물이다.
율곡은 학문의 목표를 교기질(矯氣質), 즉 ‘자기 중심적 성격의 혁신’에 설정했다. 이 자리는 ‘삶과 죽음을 가르는 관문’이자, ‘인간과 허깨비를 구분하는 경계선(人鬼關)’이다. 최고 권력자인 임금이 이 관문을 타파하느냐의 여부에 일국의 흥망이 걸려 있다. 『성학집요』는 그래서 모두를 위한 책이지만 특히 군주와 통치자의 리더십을 위한 교본이다.
- 중앙선데이 | 제151 | 한형조 교수 | 교과서 밖 조선 유학 : 성학집요 <2> | 2010.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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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다한 지식에 매몰되면 진정한 제왕의 도는 멀어져” |
퇴계 그 은둔의 유학 <3> - 옛 〈실학〉의 매뉴얼 주자학의 ‘정치학’ 매뉴얼 율곡의 성학집요 <3>
없는 길을 홀로 헤쳐나가야 한다면 얼마나 막막하겠는가. 다행히 가이드가 곁에 있다. 자동차에 수리공이 있고 목공은 나무의 재질에 익숙하듯이 ‘인간’에게도 전문가가 있다. 스스로 자신을 잘 안다고? 그것은 착각이거나 오만이다. 다른 모든 지식처럼 인간에 관한 지식 또한 훈련과 통찰력의 산물이다. 성현(聖賢)들이 미리 발견한 전문적 노하우를 경전(經傳)이라 부른다.
1. ‘사서삼경(四書三經)’은 일관된 체계를 갖고 있지 않다
‘사서삼경(四書三經)’은 그러나 일관된 체계를 갖고 있지 않다. 그것들은 상황과 대상에 따라 달리 발화(發話)된 것들이다. 이들을 관통하는 일관된 중심 혹은 원리가 있을까. 있다. 『대학(大學)』이 그것이다. 인간이 이 땅에서 감당해야 할 의미와 책임의 대강(大綱)을 담고 있다. 그래서 사서(四書) 가운데 가장 먼저 읽어야 할 책으로 꼽혔다. “사람의 길은 자신의 존재(明德)를 밝히고, 남을 새롭게 하며(新民), 존재의 최상 최적의 상태에 도달하는 데 있다(至於至善).” 그를 위한 여덟 개의 조목이 따른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는 익히 들어본 말일 것이다.
선각(先覺)들의 천언만어(千言萬語)가 이 세 강령(綱領)과 여덟 항목(條目)의 프레임 안에 들어 있다. 체계를 갖춘 편집의 유혹이 없을 수 없다. 주자의 뛰어난 제자인 서산(西山) 진덕수(眞德秀·1178~1235)가 이 작업에 손을 댔다. 『대학』의 체제에 따라 경전을 다시 분류하고, 고금의 사적들을 보태 『대학의 부연된 의미(大學衍義)』라는 책을 완성했다. 율곡은 이 책이 “학문의 기초(爲學之本)와 정치화의 순서(爲治之序)를 겸전한” 것으로 가히 “제왕이 도를 구현할 나침반(帝王入道之指南)”이라고 높이 쳤다.
저자인 진덕수는 중요한 인물이다. 이 ‘정치의 책’ 외에 ‘마음의 수련’을 위한 실질적 지침을 가려 뽑아 『심경(心經)』을 만들기도 했다. 『심경』은 퇴계의 평생 반려였고, 『대학연의』는 율곡의 『성학집요』의 표본이었으니, 조선 유학의 토대에 그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퇴계·율곡만이 아니다. 일찍이 조선 건국의 주인공 삼봉 정도전은 새로운 유교적 정치제도를 구상하면서 고려를 지배하고 있던 불교의 맹점과 폐단을 신랄하게 파고든 바 있다. 그 결과가 『붓다씨를 여러 측면에서 비판함(佛氏雜辨)』이라는 책이다. 그의 논점은 신랄하고, 경험적 관찰에서 오는 설득력을 갖고 있는데, 거기 동원된 자원은 송대 유학, 특히 진덕수의 『대학연의』에 크게 빚지고 있다. 이 책은 고려 말에는 혁명의 서였고, 조선 초기 제왕학의 기본 교재이기도 했다.
2. 『대학연의』는 충분하지 않다
그럼에도 『대학연의』는 충분하지 않다. 분량이 너무 많고, 글이 산만한 탓이다. 율곡은 이 책이 “사건(紀事)의 기록에 치중하여 아쉽게도 실학(實學)의 체통을 놓쳤다”고 썼다. 여기 실학은 주의를 요한다. 우리가 조선 후기의 개혁적 사고에 붙이는 그 역사기술의 개념과 혼동하면 큰일난다. 율곡이 말하는 실학은 ‘인간성의 구현을 위한 훈련으로서의 학문’을 가리킨다. 이것이 본시 주자학이 정의한 실학(實學)이다. ‘실학’의 저작권은 아이로니컬하게도 주자학에 있음을 기억하자. ‘실(實)’이라는 이름에는 불교의 허(虛), 즉 현세 부정과 개인적 구원의 추구와는 달리, 존재하는 세계를 긍정하고 사회적 책임의 프로그램을 론칭한다는 주자학의 자부심이 담겨 있다.
지금은 그러나 누구도 이 뜻을 떠올리지 않는다. ‘실학’의 옛 의미는 잊혀지고, 그 집에 ‘실용’과 ‘근대’가 새 주인으로 자리 잡은 것이다.
3. 그런데 율곡은 왜 『대학연의』를 ‘실학’의 체통이 아니라고 했을까.
그런데 율곡은 왜 『대학연의』를 ‘실학’의 체통이 아니라고 했을까. 그의 설명은 이렇다. “학문의 폭은 당연히 넓어야지, 좁고 편향되어서는 안 된다. 그렇지만 그 전에 비전과 지향부터 갖추어야 한다. 이 토대가 없을 때 지식은 현실과 유리되고 마음의 중심 또한 흔들리게 된다. 취사(取捨)가 불분명한 상태에서 독서는 방향을 잃고 표류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 먼저 요점을 뚫고 얼개를 장악하라(先尋要路, 的開門庭)! 그런 다음에야 박학을 자유롭게 할 수 있고, 사물들의 대면이 지식의 증장으로 이어질 수 있다(博學無方, 觸類而長).”
역시 학문의 토대는, 율곡이 늘 말하는 바 ‘입지(立志)’, 뜻을 세우는 데 있다. 그리고 바른 요령을 얻는 데 있다. 더구나 군주는 만기총람(萬機總攬), 모든 일의 최종적 결정과 책임이 모여 있는 자리다. 결재하고 회의할 시간에 쫓기느라 독서하고 사색할 시간은 적다. 그래서 더욱 “핵심(綱維)을 공략하고 목표(宗旨)를 뚜렷이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저 잡다한 지식에 매몰되어, 경전을 외우는 기송(記誦)에 묶이거나, 문장의 기교인 사조(詞藻)에 치우치거나 하여 진정한 제왕의 도를 소홀히 하거나 저버릴 수 있다”고 경고했다.
제왕의 ‘실학’을 위해 율곡은 『성학집요』를 편찬했다. 체제는 역시 『대학』을 따랐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의 항목에 따라 사서삼경에 담긴 성현의 말씀과 송대 학자들의 금언들을 분류해 채워 넣었다. “절목은 빠진 것이 없이 할 것. 언사는 간략하되, 메시지가 무궁한 것(辭約理盡)을 고를 것”을 모토로 했다.
여기 부족하거나 논란이 되는 부분은 ‘자신의 의견’을 과감하게 붙여 놓았다. 퇴계가 보았다면 기겁을 했을 것이다. 나로서는 이 부분이 특히 빛난다고 생각한다. 역시 『성학집요』는 율곡의 작품이다. 그는 선조에게 당부한다. “내 재주가 좀 부족하더라도, 가려 뽑은 것은 성현의 말씀이니, 살펴주소서. 신이 가진 혼신의 정력을 여기 다하였나이다.”
이때가 1575년 선조 8년, 율곡의 나이 마흔, 지금 기준으로는 아직 젊을 때다.
- 중앙선데이 | 제153호 | 한형조 교수 | 교과서 밖 조선 유학 : 성학집요 <3> | 201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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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학집요 <4> ‘『중용』의 첫머리’, 혹은 유교 근본 기획에 대하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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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의 본성은 지식과 실천 없으면 내 것이 아니다” |
퇴계 그 은둔의 유학 <24> - 『중용』의 첫머리, 혹은 유교 근본 기획에 대하여 율곡의 성학집요 <4> - 『중용』의 첫머리, 혹은 유교의 근본 기획에 대하여
시간을 뛰어넘는 유교의 기획, 혹은 ‘궁극적 설계’가 있을까. 율곡의 『성학십도』 1장 ‘통설(統說)’은 이 물음에 대한 응답이다. 율곡은 여기 『중용』과 『대학』의 첫 장만 실어두었다. 이 둘은 서로 연관돼 있고 상호보완적이다. 『대학』이 학문의 스케일과 단계를 적고 있는 데 비해 『중용』은 이 프로젝트의 초월적 기원에서 시작한다. 『대학』은 쉬워 보이는데 『중용』은 어렵다. 주자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사서(四書) 가운데 맨 나중 읽을 책으로 밀쳐둔 데는 까닭이 있다. 그런데 왜 율곡은 이 책을 『성학집요』의 맨 앞에 두었을까.
1. 삶에는 뜻이 있다
주지하다시피 『중용』은 “천명지위성(天命之謂性)”으로 시작한다. 요컨대 인간은 ‘하늘’로부터 특별한 ‘명령’을 받았다는 것. 기독교라면 소명(召命)이라고 불렀을 법한 것이다. 그런데 이 명령은 명령이 아니다. 돌이나 경전에 새겨진 계명이 아니라, 인간의 ‘본성’에 타고났기 때문이다(혹 오해가 있을까 싶어 주자는 ‘명령처럼 본성에 주어졌다’는 노트를 적어두었다.). 『맹자』도 『중용』을 따라 “나는 모든 것을 갖추고 있다(萬物皆備於我)”고 선언했다. “밖으로부터는 아무것도 오지 않으며, 아무것도 기댈 필요가 없다(初非有待於外)”는 점에서 유교는 노장과 불교와 목소리를 같이한다.
유교는 1)근대적 통념과는 달리 인간의 본성을 욕구충족적 전망 너머에 설정하며, 그럼에도 2)기독교나 이슬람과는 달리 그것이 ‘자기 속에 미리 새겨진 무늬’라고 역설해 종교로부터 멀어졌다. 그래서 왈, 이기(理氣)론이다. 이 정식은 “모든 생명과 현상은 자신 속에 새겨진 무늬를 현현하도록 프로그램되어 있다!”로 번역할 수 있겠다. 인간의 과제는 그렇다면 자기 자신을 최고도로 발휘하는데 있겠다(率性之謂道)!” 율곡은 주자의 말을 인용한다. “사람과 사물, 현상은 각각 그 ‘본성’에 구비된 바의 자연(自然)을 따르게 마련이다. 그런 즉, 각각 ‘마땅히’ 걸어야 할 길이 있고, 그것을 우리는 도(道)라고 부른다. (人物各循其性之自然, 則其日用事物之閒, 莫不各有當行之路, 是則所謂道也.)” 그러므로 유교의 윤리는 ‘강제적’ 억압이 아니라 ‘자연적’ 발양이라 해야 한다. 유교를 근엄한 ‘잔소리’와 ‘금제’로 떠올리는 분들은 고개를 갸웃하시겠다.
2. 들리지 않는 목소리를 듣는다
그렇다면 레세페르, 생긴 대로 사는 것이 곧 도(道)란 말인가? 유교는 이 오해를 무엇보다 경계한다. 놀라겠지만 욕구가 곧 본성은 아니다. 둘 사이에 심연이 있으니 아직 ‘자신(性)’은 알려지지 않았고, 길은 여전히 덤불쑥으로 덮여 있다. 그래서 ‘지식’이 필요하고, ‘실천’이 필요하다. 사람들은 행하기가 어렵다고 하나 주자학은 천만에, “아는 것이 어렵다”고 강조한다. 『대학』의 격물치지(格物致知), 그 핵심은 아직 알려지지 않은 자신을 향한 탐구다. 지금은 청동거울처럼 희미하나 열심히 닦다 보면 뚜렷한 얼굴의 그를 대면할 날이 올 것이다. “우리는 이 보이지 않는 존재에 눈떠야 하고, 들리지 않는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한다.(是故, 君子戒愼乎其所不睹, 恐懼乎其所不聞.)”
그러자면 신독(愼獨), 즉 “나 홀로의 풍경을 주의 깊게 살펴야 한다.(故君子愼其獨也.)” 안팎의 소음에 묻혀 자기 내부에 은폐된 그 ‘은밀한’ 존재의 소리를 듣기는 얼마나 어려운가. 그 섬세한 ‘주의 깊음’은 내적 의지의 메커니즘과, 그와 짝한 의식의 실용적 활동을 비로소 캐치하게 해 줄 것이다.
율곡은 도향(道鄕) 추씨(鄒氏)의 말을 덧붙이고 있다. “여기 신독은 도(道)에 들어서기 위한 가장 긴요한 수련이다. 지금 ‘홀로’란 말은 왕래가 없는 고요한 장소만을 의미하지 않고, 자기 내부의 의지가 싹트는 자리를 가리킨다.” 율곡은 이 ‘내면 풍경의 주의 깊은 주시’가 덕성의 기초이면서, 왕도 실현의 토대라고 강조했다. 경(敬)을 공부의 중심에 놓은 점에서 율곡은 퇴계와 길을 같이하고 있다. 경은 본시 공맹 시절 경천(敬天), 경인(敬人)이란 말에서 보듯 ‘특정한 대상을 향한 겸허와 존경’을 의미했으나 주자학은 여기 상대를 지우고 거기 자신을 앉혔다. 목적어 없는 이 말은 결국 ‘자기 자신을 향한 주시와 감독, 유지’를 의미하게 됐다.
3. 심리적 · 정서적 균형과 조화를 위하여
이 주시는 무슨 효과를 가져다 주는가. 간단하다. 희로애락이 제 자리를 찾게 해준다. 『중용』은 말한다. “심리와 정서의 준비된 평정을 중(中)이라 하고, 상황에 따른 적절한 발로를 화(和)라고 한다.(喜怒哀樂之未發謂之中. 發而皆中節謂之和.)” 너무 싱거운지 모르겠다. 이 모든 것의 궁극이 ‘감정의 조화와 균형’ 정도라니…그러나 이것이 유교가 노린 모든 것이다.
모든 성취는 밖을 향하지 않고 자신의 내적 에너지의 조율로 귀착된다. 유교의 기획은 아무래도 실용과 거리가 있어 보인다. 그래서 칼과 창이 부딪치는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시대에는 ‘무력한 거적대기의 담론’이라는 질타를 받았다. 그러나 무용지용(無用之用)이라, 일을 하고 관계를 맺기 위해서, 즉 소외되지 않는 삶을 위해 이 훈련이 필수적이지 않을까. 고개를 갸우뚱하는 사람들을 위해 『중용』은 말한다 “중(中)은 천하의 대 근본이고, 화(和)는 모든 일의 소통이자 귀착처이다. (中也者, 天下之大本也. 和也者, 天下之達道也.)”
- 중앙선데이 | 제155호 | 한형조 교수 | 교과서 밖 조선 유학 : 성학집요 <4> | 201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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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학집요 <5> “너는 지금 어디에 서 있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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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자는 자신의 상황에 철저할 뿐 밖을 넘보지 않는다 |
성학집요 <5> “너는 지금 어디에 서 있는가.”
현대 번안어들이 득세하면서 옛 한자어들은 기구한 운명을 겪었다. 거의 예외 없이 의미가 달라지고, 엉뚱한 맥락에 재배치되었다. 억울하게 명예를 잃고 가치가 뒤바뀐 것들도 부지기수. 가령 ‘횡설수설(橫說竪說)’이 그 하나다.
1. 언설의 최고 가치는 ‘횡설수설’
다들 “조리도 중심도 없이 지껄이는 술 취한 소리”로 알고 있다. 사전에도 그렇게 적혀 있다. 그런데 놀라지 마시라. 원래는 이렇게 남루하거나 천덕스럽지 않았다. ‘횡설수설’은 횡설과 수설의 자유자재로서 모든 언설이 닿고자 하는 전범 혹은 최고치를 뜻했다. 율곡의 『성학집요』 총설 첫머리는 이렇게 시작한다. “성현의 설 가운데는 혹은 ‘눕히고(或橫)’ 혹은 ‘세운(或竪)’ 것이 있다. 한마디로 설계(體用)를 보여주는 것이 있는가 하면, 한 사건을 자세하게 언설한 것도 있다.” 땅에 박는 말뚝을 연상하면 좋겠다. 구체적 사례에 집중한 것이 ‘세운 말(竪說)’이라면 일반화와 정식화는 말뚝을 ‘드러눕힌 논의(橫說)’에 해당한다! 르포나 소설에서는 말을 세우고, 철학이나 수학은 말을 눕힌다. 하나를 잘 하기도 어렵지만 둘을 겸전(兼全)하기는 더욱 어렵다. 사실의 구체성에만 사로잡히면 역사의 교훈이나 법칙을 얻기 어렵고, 하늘만 쳐다보고 걷는 철학자는 도랑에 발을 헛디디기 쉽다.
대학의 로고에 가령 라틴어로 “진리는 나의 빛”이라고 걸기보다, 추상적 개념들을 나열해 놓기보다 ‘횡설수설’이라는 표어를 적어두면 어떨까 하고 홀로 웃은 적이 있다. 학문과 지식의 이념이면서 역설과 긴장의 재미도 주지 않는가. 아마 1초도 생각하지 않고 또 다른 개그콘서트로 알고 밥알을 튀길 것이 틀림없겠지만….
2. 유교와 노장, 우주 보는 시각 같아
각설, 유교의 ‘횡설’은 『중용』 첫머리에 있다. 거기서 내건 캐치프레이즈는 다음과 같다. “중화(中和)를 이룩하자. 그때 천지(天地)가 제자리를 찾고, 만물(萬物)이 생육 번성할 것이다.(致中和, 天地位焉, 萬物育焉).” 이 표어를 이해하자면 설명이 필요하다. 동아시아는 자연, 인간, 사회를 연관된 전체로 읽는다. 우주를 상호작용의 시스템으로 인지하는 점에서 유교와 노장(老莊)이 다르지 않다.
차이가 있다면 노장은 이 시스템이 ‘그 자체로’ 완전하다고 생각하는데 비해, 유교는 ‘작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을 픽스하자면 인위적인 노력이 필요하고, 개선도 점진적일 수밖에 없다. 인위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점에서 유교는 노장과 맞서고, 점진적 개선을 강조하는 점에서 불교와 결별한다. 그래서 왈, 이기(理氣)론이다. 노장은 기(氣)로 충분하다 하는데 유교는 불완전함과 긴장, 벌어진 틈새가 마음에 걸려 다시 이(理)를 호출했다.
그 간극, 혹은 타락이 원죄는 아니라는 것도 기억하자. 예외적으로 ‘완전히’ 태어나는 사람도 있는 데다, 이 틈이 은총으로 메워진다고 생각하지 않는 점에서 그렇다. 관건은 개인의 자각과 실천이다. 그래서 왈, 수기(修己), 혹은 수양(修養)이 유교의 중심에 있게 되었다.
그런데 왜 인간은 본래의 ‘고향’으로부터, ‘완전’으로부터 멀어진 것일까. 일차적 틈은 유전적 결정이다. 이차적으로는 환경과 습관, 교육과 직업 등이 간여한다. 유교는 사람들의 출발이 서로 다르다고 솔직히 인정한다. “자질과 능력은, 지적이든 도덕적이든 간에, 평등하지 않다.” 그에 따라 들여야 할 노력도 천차만별일 수밖에 없다.
3. “천지만물은 본래 나와 한몸”
사람들은 각자 조금씩 제자리에 있지 않다. 어딘가 어긋나 있으니 1)딴 데 서 있거나(偏), 2)삐딱하게 기울어져(倚) 있다. 이 상태에서 자극이 오면 1)엉뚱한 반응을 하고, 2) 충분하고 적절히 반응하지 않는다. 한마디로 ‘자연스럽지’ 않은 것이다. 이것이 문제 상황이다. 뒤틀린 마음바탕(性)을 제자리로 돌려놓고, 혹 지나치거나 모자란 성향이 예측되면 즉각 바로잡아야 한다. 그것을 중(中)이라 한다. 이 바탕이 없이 반응의 적절성, 행동의 건전성(和)은 기약할 수 없다.
주자는 말한다. “자기 주시를 통해 고요의 극점에 들어서면 치우치거나 기울어짐(偏倚)이 없는 중(中)을 얻는다. 그와 더불어 천지가 제자리를 찾는다. 의지와 정서의 반응을 세밀하게 성찰하게 되면 교제와 응접이 적절해지는데, 그 화(和)를 밀고 나가면 그와 더불어 만물이 생명과 활기를 얻는다.” 의아해하는 사람들을 향해 주자는 덧붙인다. “천지 만물은 본래 나와 한몸이다. 내 마음이 올바르면 천지의 마음도 역시 올바르고, 나의 기(氣)가 순하면 천지의 기 또한 순해진다. 학문은 이 경지를 성취하자는 것이고, 성인 또한 이 과업을 성취하신 분이다.”
4. 거창한 구호는 공염불일 뿐
내가 중심을 확보하면 천지가 제자리를 찾는다. 그 위상 하에서 관계가 풍성해지고, 주변은 번성한다. 율곡은 이 범주가 크고 작은 동심원으로 되어 있다고 말한다. “천지만물이 어디 우주적 차원의 거시를 한정한 말이겠는가. 한 가정에 부부와 자식의 위상이 제자리를 찾은 것이 한 천지이고, 거기서 우애와 공경, 사랑과 존경이 피어나는 것이 바로 한 만물이 생육하는 기상이다.” 직장, 학교에서 한 사회, 국가에 이르기까지 각각의 ‘천지 정위(天地位)’와 ‘만물 육성(育萬物)’이 있다!
율곡은 “한 가정에서 이를 성취한 적은 있으되 국가적, 나아가 지구적 차원에서의 성공은 적막하게도 없었다”고 탄식했다. 임금을 분발시키고자 한 말이니 너무 겁낼 필요는 없겠다. 각자 자신이 처한 위상과 관계망, 처리해야 할 일들에 집중해야 구체성을 잃지 않는다. 미시적 노력들의 협화(協和) 없이 세계평화 등의 거창한 구호는 공염불이거나 기만이다. 『중용』은 말한다. “군자는 다만 주어진 역할과 처한 상황에 철저할 뿐, 그 밖을 넘보지 않는다(君子素其位而行, 不願乎其外).”
- 중앙선데이 | 제157호 | 한형조 교수 | 교과서 밖 조선 유학 : 성학집요 <5> | 2010.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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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학집요 <6> 유교의 이상사회, ‘작은 평화(小康)’의 나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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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생이 피폐하면 예의법도를 강요할 수 없는 법” |
성학집요 <6> 유교의 이상사회, ‘작은 평화(小康)’의 나라
1. 현실은 강제적 제어 없이 굴러가지 못해
선비들은 입만 열만 왈, ‘요순의 세상’을 꿈꾸었다. 『예기(禮記)』예운(禮運)은 그 세상을 이렇게 그리고 있다. “천하는 공적 소유물이다. 유능하고 덕 있는 사람들이 지도자가 되어 신뢰와 상호 존중을 구축해 나가는 사회. 사람들은 제 부모만 섬기지 아니하고 자기 자식만 품고 돌지 않는다. 노인들에게는 편안한 노년을, 젊은이에게는 일을, 어린이에게는 교육을 제공한다. 의지할 데 없는 과부, 고아, 독거노인, 장애와 질환자들에게는 쉼터가 있다. 남자는 직장이 있고, 여자는 가정이 있다. 재화를 축적하되 자기 창고에만 쌓지 않고, 노동을 하되 자신을 위해서만 벌지 않는다. 사기와 술책이 사라지고 도적과 건달이 설치지 않는 세상, 대문이 있으되 잠그지 않는 그런 세상을 대동(大同)이라고 한다.”
사람들과 부닥치는 것이 괴롭고, 자잘한 계산에 스스로 한심해질 때면 우리는 이런 ‘위대한 공동체’를 꿈꾼다. 한때 그런 세상이 있었다고 하지만 그곳은 아득한 꿈이고 현실은 개인의 이해관계가 충돌하고 인위적 장치가 튼튼해야 하는 곳이다. 그리하여 유교는 차선책으로 소강(小康), 즉 ‘작은 평화의 나라’를 꿈꾸었다.
“위대한 유대와 놀이(大道)가 작동을 멈추면 천하가 일가(一家)의 소유로 세습된다. 각각 제 부모만 모시고, 제 자식만 돌본다. 재화와 노력은 오직 자신만을 위해 추구되고 발휘된다. 군주와 귀족은 세습되고 성곽과 해자가 견고히 축성되는 시대, 힘과 지식을 우대하고 공적에 따른 상급이 주어진다. 지략과 경영이 시작되고 군사와 전쟁이 흥기한다.”
이 시대의 원리는 예의(禮義)이다. 구성원들의 차이와 구분을 인정하고 각각의 책임을 통한 질서를 꾀한다. “군신간의 기강, 부자간의 은의, 형제간의 친교, 부부간의 화목을 꾀하고, 제반 제도를 만들고 경작지를 경영한다. 군주는 예(禮)를 닦아 그 의(義)를 드러내고, 그 신뢰를 구축한다. 백성들에게 인(仁)의 모범을 보이고 양보를 설득해 나간다.” “군주가 이 책임을 저버리고 길을 벗어나면 백성들의 원한을 부르고, 이윽고 다른 힘과 권위에 의해 축출·교체되었다. 이 시대를 소강(小康)이라 부른다.”
2. 위대한 공동체 ‘대동’을 꿈꾼 율곡
유교는 소강의 기획 위에 서 있다. 그런데 놀랍게도 율곡은 『율곡집』전편을 통해 ‘소강’을 언급하지 않는다. 이 사태는 놀라운데, 서강대학교의 강정인 교수가 이 지점을 짚어냈다. 정치학의 전문가다운 통찰이다. 그런데 문제는 “왜 그랬을까”이다. 나는 그 이유를 세 가지로 추측해 보았다.
1) ‘소강’이 이름 그대로 너무 작지 않을까. 율곡은 늘 대동(大同), 즉 위대한 공동체를 꿈꾸었다. 소강은 그것을 ‘양보한’ 형태라서 적극 내세우지 않았을 수 있다. 2) 왕조시대에 “실패한 통치자는 축출된다”는 언급이 아무래도 걸렸을 수도 있다. 그러나 한편, 율곡은 선조에게 대놓고, “자신이 없으시면 권력을 내놓고 유능한 재상에게 맡기시라”고 윽박지르던 사람이라 이 가설은 설득력이 좀 약하다. 나는 세 번째 이유에 기운다.
3. 소강은 질서가 잘 잡혀진 세상 의미
나는 그가 3)패도(覇道)를 용인했다고 생각한다. 대동이 아득한 꿈이듯이, 소강 또한 먼 길이었다. 소강은 이름과는 달리 문화적·제도적 장치를 통해 ‘잘 질서잡혀진 세상’을 뜻한다. 그러나 율곡은 피폐한 민력을 소생시키고 구법(舊法)의 폐단부터 고쳐나가는 일이 시급했다.
문화와 가치 이전에 정치적 안정과 물질적 번성이 있다. 패도는 ‘힘의 지배’ 아래 경제를 진작하고 정치외교적 안정을 노린다. 여기 군주의 인격이나 도덕적 의장은 고려하지 않는다. 맹자 이래 패도는 부도덕한 정치로 낙인찍혔다. 그러나 이 ‘안정’의 기본조차 없는 시대는 얼마나 곤고한가. 율곡은 예법을 논하는 서재의 도학자들과 달리 민생(民生)에 깊은 관심을 표했고 양민(養民)에게 힘을 쏟았다.
율곡은 “의식이 족해야 예절을 안다”고 강조했다. 민생을 위해서는 소강(小康)조차 양보할 생각이 있었다면 지나칠까. 그래서 그는 ‘소강(小康)’을 말하지 않고 다만 ‘소강(少康)’을 말한다. “조금 숨 쉴 정도의 평안과 안정”이 시급하다는 것, 그것을 위해서는 패도(覇道)의 정치조차 목마르다면서, 그것을 성취한 한 고조 유방이나 당 태종에게 경의를 표했다.
필요하다면 도덕적 설교조차 유보할 자세가 되어 있었다. 허엽이 향약(鄕約)의 시행을 건의하자 율곡은 반대했다. 민생이 피폐하고 민력이 고갈되었는데, 엄격한 예의 법도를 민간에 강요할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허엽이 “사람들이 착해서 향약을 시행할 수 있다”고 하자, 율곡은 웃으며 “나는 심성이 고약해서인지, 내 눈에는 착하지 않은 사람이 더 많이 보이오”라고 말했다.
물론 율곡이 힘과 이익의 현실주의에만 철저한 마키아벨리스트는 아니다. 그는 여전히 유교 이상주의자였다. 패도의 공렬(功烈)은 “어두운 밤에 잠시 빛나는 불빛 같은 것”이라서 영원의 안정과 번영을 보장하지는 못한다는 것, 그를 위해서는 더 큰 비전과 도덕적 이상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다만 그 성취는 현실의 여건을 고려해야 하고, 점진적 단계를 밟아야 실효를 기약할 수 있다는 것을 잊지 않았다.
조선 유학사에서 눈은 이상을 향하되 발은 현실에 딛고 서 있던 인물은 드물다. 후생(厚生) 위에 정덕(正德)을 세우고, 도덕(道德)과 정제(政制)를 병용하는 것이 유교 본래의 기획인 점에서 율곡은 전형적이다. 그 궤적을 따라간 인물로 정도전, 정약용, 유형원, 정조를 들 수 있다.
- 중앙선데이 | 제161호 | 한형조 교수 | 교과서 밖 조선 유학 : 성학집요 <6> | 2010.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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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학집요 <7> 삶의 기술로서의 ‘학문(學問)’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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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움이 없으면 마음은 잡초로 덮이고 세상은 캄캄” |
성학집요 <7> 삶의 기술로서의 ‘학문(學問)’ 유교는 오직 ‘일상’ 속에 있다. 여기 두 갈래의 위협이 있다. 1) 하나는 ‘자기-망각’이다. 일상의 관성에 매몰돼 있으면 세상이 부르는 대로 움직이는 자동인형이 될 것이다. 하이데거는 이를 ‘평균적 인간(das man)’이라고 불렀고, 프롬은 ‘소유’의 코드에 조종되는 ‘소외’된 삶이라고 한탄했다. 유교의 어법으로는 유속(流俗)의 삶, 인순(因循)의 쳇바퀴라고 부를 법한 것이다. 2) 이 삶이 문득 한심하고 피곤할 때 우리는 초월을 꿈꾼다. 저 너머의 종교적 위안을 찾고 이 누추한 삶을 일거에 전복시킬 혁명적 열정을 키우는 것이다. 이것이 두 번째 위협이다.
1. 일상
하나는 너무 낮고 하나는 너무 높다. 유교는 파도가 위태로운 스킬라와 카립디스의 이 두 해협 사이를 뚫고 지나간다. 이 지향을 정식화한 표준구가 있다. “이(理)는 기(氣)와 뒤섞일 수 없지만, 그렇다고 분리될 수도 없다(理氣不雜, 理氣不離).” 다른 말로 “이(理)와 기(氣)는 하나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둘도 아니다(不一而不二)”고 표현하기도 한다. 두 명제는 형식적으로는 어불성설로 보이나 활간(活看)하면 유교의 핵심 태도를 읽을 수 있다. 기(氣)는 주어진 현실로, 이(理)는 가야 할 길로 잠정 이해하자. “뒤섞이지 않는다”는 말은 현실이 곧 전부는 아니라는 말이다.
자동인형으로 살지 말라는 독려가 “하나가 아니다”라는 말 속에 들어있다. 그렇지만 그것은 또한 “둘이 아니다!” 그럼에도 이 누추한 삶을 떠나서 어디 다른 곳에 위대한 소식이, 찬란한 세계가 팔을 벌리고 있지 않다는 각오가 “서로 떨어질 수 없다”는 말에 들어있다. 그렇다면? 이 삶에 주저앉지도 말고, 그렇다고 자리를 훌쩍 뜨지도 말라는 것. 이 테이블에 앉아서 솔루션을 찾아보아야 한다는 말이다. 아, 그러고 보니 『중용(中庸)』도 이 ‘망각’과 ‘초월’에의 위험을 동시 경고한 바 있다.
“도(道)가 행해지지 않는 이유를 내 이제 알겠다. 똑똑한 사람은 저 멀리를 쳐다보고 어리석은 사람은 발 밑에 붙잡혀 있다. 도가 밝혀지지 않는 이유를 내 이제 알겠다. 현자는 훌쩍 지나쳐 가고, 못난 사람은 저만큼 뒤처져 있다. 누구나 음식을 먹지만, 그 맛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子曰, 道之不行也, 我知之矣. 知者過之, 愚者不及也. 道之不明也, 我知之矣. 賢者過之, 不肖者不及也. 人莫不飮食也, 鮮能知味也.)”
2. 학문
역시 유교는 종교가 되기는 어렵겠다. 초월에 기대지 않고, 오직 일상에서 의미를 완성하는 데 주력하자니 말이다. 그 길(道)에 필요한 지식과 기술을 습득하는 것을 ‘학문(學問)’이라고 부른다. 율곡은 “왜 학문인가”를 묻는 아이들에게 이렇게 대답했다.
“세상에 태어나 사람 노릇을 하자면 공부(學問)를 해야 한다. 공부란 무슨 남다른, 특별한 어떤 것이 아니다. 일상적 삶에서, 관계와 거래에서, 일을 적절히 처리하는 법을 배우는 것일 뿐이다. 산에서 한 소식을 하거나, 세상을 지배하는 힘을 얻자고 하는 일이 아니다. 공부를 안 하면, 마음은 잡초로 뒤덮이고, 세상은 캄캄해진다. 그래서 책을 읽고, 지식을 찾는다. 지식이 길을 밝혀줄 것이니, 오직 그때라야, 정신의 뿌리가 튼튼해지고, 활동이 중심(中)을 얻는다. (人生斯世, 非學問無以爲人, 所謂學問者, 亦非異常別件物事也. 只是爲父當慈, 爲子當孝, 爲臣當忠, 爲夫婦當別, 爲兄弟當友, 爲少者當敬長, 爲朋友當有信, 皆於日用動靜之間, 隨事各得其當而已, 非馳心玄妙, 希<89AC>奇效者也. 但不學之人, 心地茅塞, 識見茫昧, 故必須讀書窮理, 以明當行之路然後, 造詣得正而踐履得中矣.” (『격몽요결(擊蒙要訣)』 서(序))
이것이 유교가 정의하는 ‘학문’이다. 통념과는 매우 다르다. 지금 대학이 주도하고 있는 ‘학문’은 실용적 전망 하의 분과적 지식으로 낙착되었다. 자신의 삶과의 관계를 묻지 않아도 되는, 아니 않아야 하는 객관적 지식과 ‘정보’로 유통되고 있다. 서양도 원래는 그렇지 않았다고 한다. 처음 하버드 대학이 설립되었을 때는 서양 고전 강좌가 교육의 중심이었고, 학생들의 삶의 태도와 품성의 형성을 목표로 했다고 한다. (앤서니 크론먼, 『교육의 종말』) 그러던 것이 ‘종합대학(University)’이 설립되고 학문이 분화되면서 더 이상 삶의 의미와 가치를 묻는 인문적 성찰이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고 한다. 학문은 그래서 ‘연구’의 대상으로 변했고, 여기 정치적 공정성이 가치의 문제를 금기시하게 되어서 이제 ‘대학이 종말’에 들어섰다는 것이다.
3. 철학
정보는 늘어나는데 여전히 삶이 혼란스럽다면? 유교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만하다. 주자는 길을 “인간관계와 일상의 삶에서 마땅히 밟아야 할 선택들(道則人倫日用之間所當行者是也)”로 정의한 바 있다. 사람들이 이 ‘지식’의 가이드에 목말라 하고 있지 않을까. 실제 ‘철학’이 그 일을 해왔다. 철학은 정의 그대로 지혜의 지식(science of wisdom)이었다. 지혜란 다름 아닌 ‘삶의 기술(art of living)’을 의미했고, 동서양의 현자들은 공히 그 길을 인도하는 것이 쾌락이 아니라 덕성이라는 데 합의했다. 그런데 지금 철학은 먼 길을 걸어 최초의 지점을 잊어버린 듯하다.
인식의 과정에 대해서, 언어의 본질에 대해서 너무 집착한다. 만학의 여왕이었던 철학이 심리학과 언어학의 일을 대신하고 있어도 괜찮을까. 다시 고전으로 돌아갈 때가 되었다. 쇼펜하우어는 말한다. “고대 작가들에 대한 연구를 인문학이라고 부르는데, 그것은 매우 적절한 표현이다. 왜냐하면 그것을 배우는 사람은 그것을 통해 우선 다시 인간이 되기 때문이다.”
- 중앙선데이 | 제163호 | 한형조 교수 | 교과서 밖 조선 유학 : 성학집요 <7> | 2010.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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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학집요 <8> ‘입지(立志)’ 도에 뜻을 세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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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리석은 자를 현자로 바꿀 수 있는 게 心志의 힘 ” |
성학집요 <8> 입지(立志), 도에 뜻을 세우다
이 ‘학문’의 첫걸음은 무엇일까. 바로 ‘뜻’이다. 공자가 일찍이 말한다. “나는 도(道)를 삶의 목표로 설정했다(志於道).” 일상을 의미로 승화하는 것은 쉬워 보이지만 아주 먼 길이다.
1. 입지
율곡은 19세, 금강산을 내려오면서 『자경문(自警文)』을 썼다. 첫머리에서 삶의 물길을 돌리겠다는 각오가 선연하다. “우선 뜻을 크게 가지자. 성인(聖人)을 목표로 삼고, 거기 한 치라도 빠진다면 내 일은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이다.” 아동용 입문서인 『격몽요결』의 첫 장도 ‘입지(立志)’로 시작하고, 제왕을 위한 학문 『성학집요』를 열어도 곧바로 이 권고와 만난다. 견고한 의지 없이 무슨 성취를 기대하는 것은 흡사 ‘기름 위에 그림을 그리고, 얼음 위에 조각을 새기는 것(畵脂鏤氷)’과 같을 것이다.
율곡은 그렇다고 너무 겁내지는 말라고 다독거린다. 1) 성인은 까마득해 보이지만, 계시나 점지가 아니라 다만 이 학문의 길을 충실히 걸은 분일 뿐이다. 그러니 “너도 할 수 있다.” 2) 그 가능성과 조건은 누구나 예외 없이 자신의 ‘본성’ 속에 갖추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라. “누구나 이 학문을 통해 성인을 성취할 수 있다(聖人可學而至).”
2. 목표
도(道)라는 이름으로 지향하는 곳은 어디까지인가. 율곡은 북송의 장재(張載·1020~77)의 유명한 캐치프레이즈를 문 앞에 내걸었다. “천지를 위해 마음을 세우고, 생민을 위하여 도를 세운다. 앞서 간 성현들을 위해 끊어진 학문을 잇고, 만세를 위해 태평을 연다(爲天地立心, 爲生民立道, 爲去聖繼絶學, 爲萬世開大平).” 네 항목에 대해 몇 마디 노트해 본다. 1) 천지: 자연의 창조력은 햇빛처럼 무한히 베풀고 어김없이 질서를 지키는 성실(誠) 위에 서 있다. 인간도 그 태극(太極)의 공능과 빛을 통해 여기 참여할 책무를 부여 받은 ‘작은 우주’다.
2) 생민: 우주적 참여는 삶의 길을 밝히고(建明義理), 관계의 도리를 정착시키는(扶植綱常) 자리에서 피어난다. 군주의 책임은 더 무겁다. 백성들의 ‘교양(敎養)’, 즉 생활 안정과 인문 교육의 소명을 두 어깨에 걸고 있는 것이다.
3) 학문: 유교는 이 학문의 등불이 맹자 때에 끊어졌다고 생각한다. 공리주의의 득세와 신비주의의 만연에 따라 유교의 목소리는 잦아들고, 그 지식마저 단순 교양이나 공무원 시험으로 소외되었다. 그렇게 어둠 속에 묻혀버린 유교를, 그 ‘끊어진 학문’을 다시금 이어야겠다는 각오다.
4) 태평: 이는 특히 군주의 책무이다. 정자(程子)는 부언한다. “통치자의 도(道), 그 기초는 정학(正學)을 성찰하여, 결국 무엇이 최선인지를 확인하고, 진실과 거짓을 분명히 구분하는 데 있다. 그래야 어디를 향해 나아갈지를 결정할 수 있다.” 그는 덧붙인다. “갈 길이 뚜렷하지 않으면 딴소리에 그만 혹(惑)할 것이고, 의지가 확고하지 않으면 목표를 잃고 주저앉게 되고 만다.”
위의 가치를 실현하는 도정에 인(仁)이 있다. 높디 높은 이상이지만 그것을 성취하고 말고는 전적으로 자신에게 달려 있다. 공자는 말한다. “인(仁)이 어디 멀리 있겠는가. 내가 원하면 그것은 여기 있다(仁遠乎哉, 我欲仁, 斯仁至矣).” “인을 향해 나아가는 삶은 실패하지 않는다(苟志於仁矣, 無惡也).”
주저하는 사람들을 향해 주자는 격려한다. “봄의 따뜻한 기운이 뻗치면 쇠와 돌도 뚫고 들어간다. 정신일도하사불성(精神一到何事不成)이니, 정력을 집중하면 안 될 일이 없다.” (농담 한 자락. 70년대 어느 기업인은 자전적 회고에서 이 구절을, “아무리 정신을 집중해도 되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로 읽으면 왜 안 되느냐고 우겨, 밥알을 튀긴 적이 있다)
3. 격려
그런데 왜 그토록 “뜻을 세우기가 어려운가”. 율곡은 ‘입지’ 장 마지막에 자신의 의견과 충고를 첨부했다. 이유는 세 가지다.
1) 불신(不信). “믿지 않는 자(不信者)들은 성현의 가르침을 거짓 유인책으로 안다. 그들은 문장을 가지고 놀 뿐 몸으로 체화하려 하지 않는다. 그래서 읽기는 성현의 책이되, 답습하는 것은 여전히 ‘세속의 관행(世俗之行)’이다.”
2) 회피(不智). “무덤 파고 장돌뱅이 흉내를 내던 맹자도 성자의 반열(亞聖)에 올랐고, 사냥에 날 새는 줄 모르던 정자(程子)도 큰 현자(大賢)가 되었다. 그런데 저 어리석은 자들(不智)은 못난 자질을 탓하며 스스로의 삶에 책임을 지려하지 않는다. 그래서 읽는 것은 성현의 책인데, 지키는 것은 ‘조야한 성품(氣質之拘)’ 그대로다.” 3) 우유부단(不勇). “성현의 충고를 믿고, 성격의 변화에 기대를 걸기는 하나 실제 떨치고 일어나지는 않는다. ‘어제 한 일을 오늘 고치지 못하고, 오늘 좋아하는 일을 내일 바꾸기 꺼린다.’ 그래서 읽는 것은 성인의 책인데, 편안해하기는 ‘해 오던 대로의 습관(舊日之習)’이다.” 율곡은 그들을 힘껏 떼다 민다. “못생긴 얼굴을 예쁘게 고칠 수 없고, 약골을 건장하게 만들 수 없으며, 짧은 키를 억지로 늘릴 수는 없다. 그러나 심지(心志)는 다르다.
그것은 어리석음을 지혜롭게, 한심한 자를 현자로 변화시킬 수 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마음의 허령(虛靈), 즉 비어 있으면서도 신비한 특성은 유전적 제약이나 개별적 ‘기질(氣質)’의 제약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이 독립(不昧)의 가능성을 최고도로 발휘하라. 하려고 하는 의지만 분명하다면, 그리고 물러서지 않는다면 너는 마침내 길(道)을 성취할 것이다.”
- 중앙선데이 | 제165호 | 한형조 교수 | 교과서 밖 조선 유학 : 성학집요 <8> | 201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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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학집요 <9> ‘수렴(收斂)’ - 퍼질러진 몸과 마음부터 수습하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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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의 티는 없앨 수 있지만 말의 흠집은 손쓸 수 없다” |
성학집요 <9> 수렴(收斂) - 퍼질러진 몸과 마음부터 수습하라
다른 무술처럼 도(道)를 향해 길을 나설 때, 기초는 역시 자세부터 바로잡는 일이다. 흩어진 심신의 수습에 네 부문이 있다. 몸가짐, 말하기의 태도, 넘침의 제어, 그리고 정신 수렴이 그것이다.
1. 구용(九容), 아홉 가지 기본 자세
“발은 무겁게 딛고, 손은 공손하게 둔다. 눈은 단정히 뜨고, 입은 함부로 열지 않는다. 말소리는 조용히 뱉고, 머리는 꼿꼿이 두며, 호흡은 차분히 한다. 선 자세는 흩트리지 말고, 표정은 엄정을 갖춘다.” 나이가 들어야 철이 드는가. 이즈음 자유란 이 근엄과 격식을 연습한 이후에야 이와 더불어 자라는 무엇이라는 생각이 새록새록 든다. 구용(九容)의 훈련은 자신을 가다듬는 동시에 남을 존중하는 연습이다.
사람들은 다시 물을지도 모른다. ‘마음’이 중요하지, 꼭 그렇게 ‘몸의 자세(容貌)’를 다잡고, ‘말의 기세(詞氣)’까지 연습을 해야 하느냐고. 유교는 확신한다. 몸은 마음의 표현이고, 몸과 마음은 이원화되지 않는다. “쩍벌남(箕踞)의 자세로 마음이 흐트러지지 않기는 어렵지 않은가.”
제자의 머리가 약간 기울어있자 선생이 소리를 버럭 질렀다. “머리는 꼿꼿이!” 제자는 “이 꾸지람을 들은 이래 머리뿐만 아니라 마음도 곧게 다잡으려 애썼다”고 술회했다.
이런 지침도 있다. 벽에 그림이나 글자가 있으면 고개를 앞으로 빼거나 눈동자를 굴려서는 안 된다. “앉을 때는 자세를 흩트리지 마라. 굳이 보아야 한다면 일어나 글자 앞에 서서 보라.”
다음은 말하기 연습. 율곡은 『시경』을 인용했다. “옥의 티는 갈아 없앨 수 있지만 말의 흠집은 손쓸 수 없다. 생각 없이 말하지 말고 구차하게 떠들지 마라. 내 혀를 붙들어 줄 사람이 없으니 함부로 내뱉지 않도록 유의하자.”
어느 대학 여학생의 거친 말, 막가는 욕설이 인터넷을 달구는 지금 이 훈련이 더욱 절실하게 다가온다.
군주의 말은 더욱 무겁고 무섭다. “실로 뱉으면 새끼줄로 뻗어가고, 새끼줄로 읊으면 동아줄로 파급된다.” 지도자의 말은 정책적 득실에만 관계되지 않고 백성들의 사기를 좌우한다. 그것은 그야말로 ‘영욕을 가르고’ ‘천지를 격동시키는’ 것이다. 지금도 그러하다.
2. 감각의 제어
어째 너무 근엄하고 부자연스럽게 느껴질지 모르겠다. 이 모두는 ‘사물의 직접적 영향력을 제어하기(不爲事物所勝)’ 위한 고심의 전략이다. 여기가 첫걸음이다. 유교뿐만 아니라 노장, 불교, 아니 동서양의 정신적 전통들이 공히 채택하고 있는 기초 수련임을 기억하자. 불교의 비유를 빌리면 화살이 천 개가 날아와 꽂히는 이 몸의 전쟁에서 정신의 독립과 자발성을 지켜내자면 익숙한 습관부터 에포케(epoche), 괄호 치고 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몸의 자세를 가다듬고 ‘혀를 붙들어 두면’ 마음의 불순물 또한 줄어든다. 율곡은 『예기』의 한 절을 인용하고 있다. “오만이 줄어들고, 충동이 사라지며, 작은 성취에 우쭐하지 않게 되고, 육신의 즐거움에 탐닉하지 않게 된다(敖不可長, 欲不可從, 縱志不可滿, 樂不可極).” 이 모든 불순물들은 ‘나의 밖’에서 온 것들이다. 이들을 제거해야 비로소 ‘나 자신’과 대면할 길이 열린다.
3. 정신 수렴
나는 그동안 나 자신을 망각하고 살아왔다. “이 방심(放心)을 수습(收拾)하지 않으면, 공부고 실천이고 중심이 없이 지리멸렬해진다. 이는 흡사 집에 주인이 있어야 하는 것과 같다. 문 앞도 쓸고 사무도 정돈할 주인이 없으면 그곳은 다만 황폐한 건물일 뿐이다.”
그 주인을 혼란(昏亂), 즉 어둠과 산란으로부터 건져내야 한다. 놀라워라, 그 오랜 망각에도 불구하고 그 물건은 “어디 멀리 가 있지 않다. 아차 하는 순간 그것은 여기 있으니 힘들여 찾을 물건이 아닌 것이다. 주시와 대면을 통해 그것은 여기 존재한다. 이 정신의 수렴(收斂)이 제자리에 서서, 허다한 타자적 흔적에 물들지 않으면, 점차 물욕은 줄어들고 자연이 자리 잡게 된다 (所謂放心者, 不是走作向別處去, 瞬目閒便不見, <7E94>覺得便又在面前, 不是苦難收拾. 且去提<6495>, 便見得. 若收斂, 都在義理上安頓, 無許多胡思亂想, 則久久自於物欲上輕, 於義理上重).”
이 준비 없이 곧바로 책을 집어서는 안 된다. 율곡은 이렇게 충고한다. “방심을 수습하는 것, 이것은 학문의 기초입니다. 옛 사람들이 밥 먹고 말을 할 때가 되면 ‘행동에 어그러짐 없게, 사려가 규율을 벗어나지 않게’라고 가르쳤는데 이는 언제나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타고난 양심(良心)을 기르고 내적 덕성을 존중하는 방도였습니다. 지식의 탐구와 확장도 이 토대 위에서라야 탄력을 받게 됩니다. 요즘은 어려서 이 공부를 하지 않고 곧바로 지식을 탐구하고 인격을 수양하겠다고 나서니 마음속이 여전히 혼란스럽고 동요되며, 행동거지는 어긋나는 것입니다. 그 노력도 하다가 말다가 하니 제대도 성취가 있을 리 없습니다. 그래서 옛 선배들은 정좌(靜坐)부터 가르쳤고, 아울러 구용(九容)으로 지신(持身) 하게 했습니다. 이것이 배우는 자(學者)들이 최초로 힘쓸 바입니다.”
이 훈련을 무어라고 부를까. 율곡이 ‘수렴(收斂)장’이라 이름 한 것은 심신의 수습에 유의한 명명이다. 인간됨의 기초훈련이라는 뜻에서 소학(小學) 이라 하고, 이를 통해 자신 속의 에너지가 안정되고 성숙된다는 뜻에서 함양(涵養)이라 부른다. 경(敬)이란 자기와의 대면이라는 뜻인데, 이 자기 의식의 끈은 지금의 심신 수습은 물론, 나중 지식의 추구와 구체적 행동에 이르기까지 언제 어느 때나 유지되어야 할 알파요 오메가의 중심이다.
- 중앙선데이 | 제169호 | 한형조 교수 | 교과서 밖 조선 유학 : 성학집요 <9> | 2010.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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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학집요 <10> ‘격물치지(格物致知)’, 오직 ‘지식’을 통해 자유를 얻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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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천이 어렵다지만, 제대로 알기가 더 어렵다” |
성학집요 <10> 격물치지(格物致知), 오직 ‘지식’을 통해 자유를 얻는다
주자학은 ‘지식’을 핵심 브랜드로 내세웠다. 이 카드 하나로 오랜 불교의 지배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기실 정신의 ‘수렴(收斂)’, 그 노하우에서 유교는 불교와 시쳇말로 잽이 안 된다. 그 정교하고 치밀한 기술은 유교의 ‘심학(心學)’이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는 것이다. 주자학은 이를 인정한 다음 조용히 칼을 겨눈다. “그러나 마음의 정화로 충분할까, 삶의 기술로….” 그렇지 않은가. 몸과 마음을 수습하더라도 세상은 여전히 불확실성으로 우뚝 서 있다. 사물에 대한 지식이 없다면, 적절한 판단과 가치 있는 행동을 기약할 수 없다. 이것이 주자학의 기본 원리다. 그래서 왈, 이학(理學)이라 부른다.
세계는 마음 밖에 있다
주자학은 항변한다. “누가 삼계(三界)를 유식(唯識)이라 하는가. 세상은 마음이 ‘만드는 것’이 아니라, 여기 역력히 실재한다.” 율곡은 어느 승려에게 읊어 주었다. “서리 내리면 온 산이 여위고, 바람 따뜻하면 뭇 꽃이 핀다오(霜落千山瘦, 風和百卉開).” 마음은 몸의 일부이고, 몸은 자연의 산물이자 사물들의 형제로 존재한다.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이들 ‘관계와 과정(理)’의 ‘지식’이 필요하다.
주자학은 말한다. “지식은 힘이다.” 사물을 이해한다면 그는 자연스럽게 이들 계기에 튜닝하고, 행동을 선택하게 된다는 것. 그렇지 않고 불교처럼 ‘마음’의 절대성을 믿고 그 속에 유폐될 때 객관성은 저만큼 멀어지고, 저런, 거꾸로 그 마음은 병이 되어 주저앉을 것이다.
주자가 감히 『대학(大學)』을 뜯어고친 이유가 여기 있다. 격물치지(格物致知) 챕터를 보망(補亡), “새로 써 채워놓고” 맥락을 왜곡하면서까지 이 ‘지식’과 ‘탐구’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한걸음 더 나갔다. “지식이 없다면, 의지의 순수함을 기약할 수 없다!(欲誠其意者, 先致其知, 致知在格物)” “지식이 덕성을 완성시키고 심신의 안정을 공고히 할 것이다.(知識明則力量自進)”
세상은 넓고 사물은 많다
그런데 세상은 넓고 사물은 많다. 이 엄청난 사물을 다 궁구하고, 그 지식을 획득해야 하는가. 원리는 그렇다. “천도(天道) 유행(流行)하여 조화(造化) 발현하는 곳에 성색(聲色)을 갖고 천지를 가득 채우고 있는 것, 이 모두가 사물(物)이다.” 이 사물들은 자신의 근원(所以)을 갖고 있고, 그들의 필연성과 구조(當然)를 갖고 있다. 그렇다면 저 우주의 먼 천문학적 지식에서, 미시 세포 내 미토콘드리아까지 다 지적 탐구와 이해의 대상이다. 가정과 사회, 역사와 문화의 지식 또한 빠뜨릴 수 없고, 무엇보다 인간의 마음과 몸의 탐구는 그 핵심 가운데 있다. “가장 가깝고 절실하기 때문이다.” 세상의 모든 이치를 탐구하겠다는 기염에도 불구하고 주자학은 실제로는 마음의 근본과 가능성, 그리고 그 발현의 구조에 탐구의 에너지를 집중했다.
이들 ‘지식’은 어떻게 얻는가. 여러 방도가 있다. ‘독서를 통해 길(義理)을 밝히거나’ ‘고금 인물을 논하며 시비를 가리거나’ ‘주어진 사태를 적절히 처리하는 법을 배우거나’ 등이다. 이렇게도 말한다. 사물들의 탐구는 ‘드러난 사태를 고찰하거나’ 혹은 ‘마음의 움직임과 기미를 살핌으로써’ 혹은 ‘문자와 책, 토론과 강의를 통해’ 얻어지고 축적되는 것이다. 지식에 이르기 위해서는 독서와 성찰 등 마음의 기능을 통합 발휘해야 한다.
지식을 밝히고 축적하다
사물을 하나 탐구하면 지식 하나가 생길 것이다. 즉 이(理)가 하나 밝아진다. 비슷한 사물을 만나면 유추(類推)를 통해 이 지식은 더욱 분명해지고 공고해진다. 지식은 또 다른 지식과 만나 시놉시스를 만들며 전체적 그림을 향해 진급되어 갈 것이다. 어떤 ‘사물’은 너무 전문적이거나 혹은 심오해 아직 준비가 안 돼 이가 안 들어가는 것도 많다. 이 부문은 우선 밀쳐 두어서 나중을 기약하는 것이 좋겠다. 다른 지식이 쌓이다가, 혹은 시간에 따라 경험이 성숙되면, 어느 날 밀쳐두었던 이 ‘난공(難攻)’의 지식이 문득 ‘환해지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가다가 막히면 기존의 성견(成見)을 통째로 비워주어야 한다. “사실이 의문을 제기할 때 기존의 옛 지식(舊見)을 씻어 내버려야 한다. 그래야 신선한 소식이 들어설 수 있다.(義理有疑, 則濯去舊見以來新意)” 이 축적의 어느 순간, 사물의 전체적 구조와 요건들, 그리고 진행 과정이 일거에 ‘장악되는 순간’이 온다(積累多後, 自當脫然有悟處). 이것이 이른바 ‘할연관통(豁然貫通)’이다. 나머지는 이 경험과 지식을 통해 유추될 수 있는 것이다. 이 경험은 어느 한 전문 부문의 지식일 수도 있고, 세계와 역사, 문명의 거시적 통찰일 수도 있다.
삶의 기술은 자연의 길을 따르는 데 있다
다시 말하지만 사물들이 길을 밝혀줄 것이다. 다만 따라가면 된다. 하등 어렵지 않다. 문제는 마음이 뿌옇게 혼란돼 있어서 길이 보이지 않고, 사적 이해에 국집(局執)돼 있어 발걸음을 가로막는 데 있다. 사람들은 실천이 어렵다고 하나 기실은 ‘진정 알기(眞知)’가 어렵다. “이(理)가 환히 밝혀지면 힘들이지(勉强) 않고도 스스로 즐겁게 이 이(理)를 따르게 된다. 이 지식이 도착하지 않았는데 힘으로 밀어붙이면 즐거움은 사라지고 무리와 괴로움만 겪게 된다.” 놀랄지 모르겠는데, 주자학이 말하는 언필칭 ‘도덕’이나 ‘윤리’ 또한 사물의 길을, 그것이 지시하는 대로 따라가는 데 있다. 역시 과학과 도덕 사이에는 경계가 없다.
- 중앙선데이 | 제171호 | 한형조 교수 | 교과서 밖 조선 유학 : 성학집요 <10> | 2010.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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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학집요 <11> ‘독서법(讀書法)’, 옛것을 익혀 창조를 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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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비우지 않으면 책의 의미 들어설 자리 없다” |
성학집요 <11> 독서법(讀書法), 옛것을 익혀 창조를 연다
지식을 얻기 위해 독서를 한다. 그런 점에서 ‘2차적인 일(第二事)’이다. 즉 도구적 의미를 갖는다. 『성학집요』는 책 읽는 자세를 이렇게 적고 있다. “몸을 가다듬고, 자리를 잡는다. 시선을 차분하게 두고, 작게 읊조린다. 마음을 비우고, 넉넉히 유영한다. 이때 자신과의 연관을 놓치지 않고 성찰한다. 한 구절을 읽으면 이것을 어떻게 적용 실천할지를 고민한다. (朱子曰, 讀書, 須要斂身正坐, 緩視微吟, 虛心涵泳, 切己省察, 讀一句書, 須體察這一句我將來甚處用得.)”
독서의 함정① 망각과 조급함
책을 읽어도 그때뿐인 걸 어떡하나. 책이 심신의 연관을 놓친 탓이다. 그때 “책은 책, 그리고 나는 나(書自書, 我自我)”로 따로 논다. 이 ‘망각’이 첫 번째 위험이다. 두 번째는 지식을 ‘소유’하려는 탐욕이다. 마음은 조급해서 여러 책을 이것저것 사냥하듯, 섭렵(涉獵)하려 든다. 한꺼번에 여러 책을 뷔페 식으로 맛보지 말라. 주자는 유머를 섞어 이렇게 말했다. “요즘 학인들은 읽은 것도 읽지 않은 것 같고, 읽지 않은 것도 다 읽은 것 같다 (今之學者, 看了也似不曾看, 不曾看也似看了).” 기가 막힌 비유 아닌가. 읽어도 내용을 모르고, 누가 물으면 안 읽고도 아는 척 하는 지식의 스노비즘(snobbism,속물근성)을 정말 콕 집어냈다.
독서법의 핵심은 ‘집중’이다. 허심평기(虛心平氣), 숙독정사(熟讀精思), “마음을 비우고, 컨디션을 편안하게 유지하며, 입에 붙듯이 읽고 정밀하게 사유하라.” 과시를 잊고, 소유의 탐욕을 내려놓을 것. 페이지 뒷면으로 향하는 마음을 다잡아 지금 읽고 있는 책에 집중하는 것, 그것이다. “심신을 이 한 단락에 집중해서 바깥에 무슨 일이 있는지 묻지 말아야 한다.” 흩어진 전표 뭉치처럼 단락 단락, 일정한 분량들이 묶이다 보면 어느새 훌쩍 자라 있는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
독서의 함정② 자신을 비워라
아, 하나 빠트렸다. 주자가 거듭거듭 경계하는 것이 하나 있다. “자신을 비울 것.” 마음을 비우지 않으면 책의 의미가 들어설 자리가 없다. “요즘 사람들은 먼저 자신의 생각을 세운 후에 책에 접근한다. 그래서 옛사람들의 말을 온통 끌어다가 자기 생각 속으로 밀어 넣는다.” 이를테면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책을 향해 설교하고 있는 형국이라 할까. 주자는 제발 “남의 말을 다 듣고 나서 판결을 내려달라”고 호소했다. “이는 송사를 처리하는 것과 같다. 마음에 을을 지지하는 생각이 있으면 갑의 옳지 않은 점만 찾게 된다.” 책은 나서서 맞이하는 것이 아니니, 독자는 책이 다가올 수 있도록 ‘한 발 물러서서’ ‘참고 기다려야 한다.’ 이 지침을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이렇다. “마음을 열고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들을 것. 사물로서 사물을 보아야지, 네 선입견과 투영으로 사물을 보지 말라 (放寬心, 以他說看他說. 以物觀物, 無以己觀物).”
의혹들과의 한판 승부
마음을 비우고 책을 향해도 처음에는 ‘멀리서 본 꽃밭’의 풍경만 보인다. 혹은 ‘밖에서 바라본 집처럼’ 외관만 보인다. 더 가까이 꽃의 형태와 색깔을 구분해야 하고, 집 안으로 들어가 구조와 인테리어를 살펴야 한다. 문장들은 처음 막연한 인상을 보여주다가 두세 단락, 나아가 여러 단락으로 분절되어 보이게 된다. 흡사 『장자(莊子)』 소잡이(<5E96>丁)의 눈에, “처음에는 소의 외관만 보이다가” 도가 깊어지면서 “그 세부 골격과 근육이 눈을 감고도 환해지는” 것과 같다. 그러다가 한 글자 한 글자가, 저마다 있을 자리에서, 온몸으로 외치고 있는 것을 알아채게 된다.
독서가 깊어지면 이해와 더불어 의문이 같이 자란다! “의문이 없는 것이 초학자들의 공통된 병통입니다. 평일에 그저 많이 읽고 습득하기에 바빠, 자세히 읽지 못한 탓이지요.” 의문은 삶의 구체성이 제기하는 도전이다. 이 의혹이 깊어지면, “어느 것 하나 의문과 곤혹이 아닌 것이 없는 지경에 이른다.” 이 혼돈이 공부가 크게 진전될 기틀이다. 율곡은 주자의 말을 인용하고 있다. “이 과정을 한 번 거치고 나면 점점 의혹이 풀리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의혹이 다 풀려 전체가 서로 연관되고 소통되는데, 이때가 배움이 성취되는 때이다.” 개혁군주 정조는 “남들이 모두 의혹하는 지점에 고개를 끄덕이고, 아무도 의혹을 가지지 않는 곳에 질문의 칼을 들이미는 것이 공부”라고 썼다.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 정독을 가르치자
주자는 특히 머리가 좋은 사람을 경계했다. 이해가 빠르면 ‘주어진 언설’을 바로 외우고, 곧바로 ‘사용’에 들어간다. ‘문장’을 자랑하고 ‘해설’에 침을 튀기기도 한다. 교양이나 시험용으로는 좋으나 여기 치명적 함정이 있다. 골륜탄조(<9DBB><5707>呑棗), 새가 대추를 통째로 삼키면 맛을 알 수 없듯이, 교과서와 백과사전에 갇힌 지식, 구호와 이데올로기로 변질된 사상은 소화불량을 일으키고, 심하면 병원으로 실려 가게 할 수도 있다. 독서는 이를테면 양파껍질을 벗기는 것과 같고, 골수를 향해 들이미는 칼과 같다. “오늘 한 겹을 벗기고, 내일 한 겹을 더 벗길 뿐이다. 껍질을 다 벗겨야 비로소 살이 보이고, 살을 다 벗겨야 뼈가 보이며, 뼈를 깎아내야 골수가 보인다.”
우리 학문의 위기는 책을 보는 법에 철저하지 않아서가 아닐까. 생경하고 소화되지 않은 개념들이, 맥락과 배경을 알 수 없는 이론들이, 현실적 적용을 본격 고민해 보지 않은 트렌드들이 종횡무진 중구난방하는 이 어지럽고 들뜬 풍경부터 걷어내야 하지 않을까. 그러자면 원론, 기초로 돌아가서 책을 ‘자세(仔細)’히 읽는 법부터 배우고 가르칠 일이다. 웬만한 정보와 기법은 네크워크로 공개된 시절이 되었다. 창조성은 깊이 읽는 연습, 아무도 닿지 않는 심연에서 피어 오르는 것은 아닐까.
- 중앙선데이 | 제173호 | 한형조 교수 | 교과서 밖 조선 유학 : 성학집요 <11> | 2010.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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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학집요 <12> ‘주기(主氣)’, 신체는 이성을 갖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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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란한 ‘나’를 다스려라, 세계가 모습을 드러낼지니” |
성학집요 <12> 주기(主氣), 신체는 이성을 갖고 있다
궁리(窮理)장은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1)“왜 지식인가”를 설파하고, 2)독서법을 일러준 다음, 주요 텍스트인 3)『사서삼경』의 개요와 읽기 순서를 적었다. 아직 근본 의문이 남아 있다. 4)대체 이 많은 책을 통해 유학이 알리고자 하는 ‘지식’의 핵심은 무엇인가. 이 물음을 의식한 듯 율곡은 생명의 기원에 대해, 존재의 의미에 대해 그리고 성숙에 이르는 훈련에 대해서 설파하기 시작한다.
퇴계의 『성학십도』, 율곡의 『성학집요』
이곳에서 율곡의 목소리는 유독 단호하고 뚜렷하다. 기실 『성학집요』는 퇴계의 『성학십도』를 의식하고 쓴 책이다. 두 책의 차이를 보자. 1)‘형식’ 면에서 『성학십도』는 달랑 그림 열 장으로 되어 있다. 압축된 암호로 된 그림들은 흡사 선사들의 화두처럼 험준하고 미끄럽다. 선조가 강의를 요청하자 늘어선 학자-관료들이 “퇴계 평생의 온축을 저희들이 어떻게 알겠습니까”하고 뒤를 뺐을 정도다.
이에 비해 율곡의 『성학집요』는 초-중급자들을 위한 매뉴얼로, 친절하고 체계적이다. 2) 더 중요한 차이는 ‘내용’이다. 율곡과 퇴계는 전혀 다른 개성이었다. 퇴계가 수도사라면 율곡은 정치가다. 이 차이가 그들의 이기(理氣)론을 갈랐다. 이를테면 율곡은 이발(理發)에 담긴 퇴계의 신학적 발상을 거부했고, 이기호발(理氣互發)이란 이름의 영육이원론에 반발했다. 율곡이 퇴계를 비판하고 자신의 사유를 변호할 적절한 장소로 『성학집요』를 선택했다면 지나칠까.
그는 공맹의 유학과, 주자학의 언설들 가운데 자신의 설을 지지해줄 문구들을 세심하게 골랐다. 벗어나는 언구들은 활간(活看), 즉 ‘창조적 오해’를 주문했고, 그것으로는 성에 차지 않아 자신의 의견을 긴 노트에 적어 두기까지 했다.
수도사와 정치가
그 곡절을 여기 다 담을 수 없다. 개념과 담론 형식도 지금과 너무 다르다. 주장의 핵심만 간단히 정리해서 들려주기로 한다. 둘의 사유는 제일원인, 혹은 우주적 원동자의 이해에서 갈라진다. 퇴계는 ‘절대자(理)’를 축으로 사유하고, 율곡은 ‘자연의 필연성(理)’ 위에서 논의를 시작한다. 약간 억지를 쓰자면 퇴계는 기독교 신학에, 율곡은 로마의 스토아 철학에 가깝다.
율곡은 이(理)가 다만 자연의 필연성이므로 기(氣)의 물질 너머에서 초월적 지위를 가질 수 없고, 더구나 독자적 의지를 행사할 권능은 없다고 잘라 말한다. 이(理)는 오직 기(氣)를 통해서만 자신을 내보일 뿐이다. 이 점에서 그는 화담 서경덕의 통찰에 동의했다. 화담은 “이(理)란 기의 자연적 통할을 가리킬 뿐, 외부적 힘이 아니다 (氣外無理, 理者氣之宰也. 所謂宰非自外來而宰之, 指其氣之用事, 能不失所以然之正者)”라고 했던 것이다.
인간에게 원죄는 없다
이 선택은 위태롭다. 왜냐? 인간의 신체가 그렇듯이 ‘자연 그대로’는 좀 골칫덩어리인 것이다. 퇴계가 오죽하면 육신(氣發)을 제어하는 또 다른 성령(理發)의 힘을 강조했겠는가. 율곡은 그러나 이 해법에 동의하지 않았다. 율곡은 자연 안의 이성을 신뢰했다. 여기가 포인트다. “신체 안에 이미 건전한 이성이 자리 잡고 있다.” 보고 느끼는 감각, 울고 웃는 감정, 먹고 마시는 욕구는 다름아닌 우주적 산물이다. 그것은 자연의 본래 모습인 감응(感應), 그 자극과 반응의 보편 구조 위에 서 있는 것. 타인을 향한 연민이나 정의감, 도덕 감정(四端)도 이 자연성의 일부일 뿐이다. 율곡은 인간의 반응에 두 기원이 없으며, “사단은 칠정 속에 포함된다”고 잘라 말했다.
문제는 일상의 경우, 이 발현이 ‘자연스럽지’ 않다는 것이다. 요인은 다양하다. 유전적 결정에, 후천적 환경, 교육과 직업 등이 복합으로 작용한다. 그렇게 형성된 각자의 ‘성격(氣質)’으로 하여 일상적 정동은 ‘일탈’과 ‘소외’를 피할 수 없다. 그래서 적극적 ‘교정’과 ‘수리’가 필요하다.
율곡은 악을 일종의 ‘부패’ 혹은 ‘산패’로 비유했다. 빵을 오래 두면 상하고, 술도 잘못 방치하면 쉬고 파리가 끓는 것과 같다. 악이란 본래 없었다. 누구나 본래는 선이었으되, 잘못 관리되고 오용되어 악으로 ‘변질’되었을 뿐. 율곡은 이 점에서 두 가지를 경계한다. 퇴계나 기독교처럼 신체를 본시 악이라고 보는 견해도 틀렸고, 그렇다고 화담이나 자유주의처럼 신체를 낙관해서 주어진 대로 살겠다는 것은 더 큰 태만이다. 인간의 과제는 약간씩 뒤틀리고 어긋난(過不及) 상태를 정상으로 되돌려놓는 것일 뿐이다. 어디 신체만인가. 사회와 국가, 역사와 문명을 ‘합리(合理)’로 이끌 책임이 인간의 두 손에 놓여 있다.
자유는 자연의 선물
외계에 대한 일차적 반응은 ‘감정과 정서(情)’다. 호오가 곧 의지(志)를 부르고 획득의 집착(欲)으로 굳어진다. 그 성취를 위한 ‘계산과 숙고(意)’의 컴퓨터가 자동적으로 작동한다. 이 자동반응이 소외를 부른다. 본래의 자연성을 되찾기 위해서는 잠깐!이라 외치고, 멈춰 서서 생각해야 한다. “나의 반응과 숙고는 건전한가.”
이 비실용적 과제에 뜻을 두고(立志), 자신 속의 ‘혼란(昏亂)’부터 다스려 나가야 한다. 혼(昏)은 비자각적 상태를 말하고, 란(亂)은 주관적 억견과 머릿속의 어지러운 상념들을 가리킨다. 이 훈련과 더불어 세계가 비로소 자신의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세계에 관한 지식 없이 자연성은 완성되지 않는다. 율곡이 거듭 강조하는 바, 이 프로젝트에 초월적 계시나 명령은 없다. 길은 자기 속의 힘과 권능을 찾아가는 ‘회복’과 ‘발견’의 도정일 뿐이다. 기발일도(氣發一途), “넘어지는 것도 나고, 일어서는 것도 나다.”
- 중앙선데이 | 제175호 | 한형조 교수 | 교과서 밖 조선 유학 : 성학집요 <12> | 2010.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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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학집요 <13> ‘율곡이 금강산에서 하산한 이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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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두란 상념 차단하는 도구…정신의 빛을 성취하라” |
성학집요 <13> 율곡이 금강산에서 하산한 이유
1. 율곡의 입산(入山)을 옹호하는 논리는 다양했다.
“불교 또한 ‘마음의 수련(心學)’을 목표로 하고 있지 않으냐”는 온건한 변명에서부터, 우암 송시열의 허를 찌르는 역습도 있었다. “(율곡은) 10살쯤에 유교의 경서를 모두 꿰뚫고 나서는 왈, ‘성인(聖人)의 도(道)가 어째 이것뿐이냐’고 외쳤습니다. 그래서 불교와 노장, 그리고 제자백가서를 범람(泛覽)했습니다. 그중에서도 『능엄경』을 가장 좋아했는데, 안으로는 심성의 극치를 파고들고, 밖으로는 천지의 광활함을 담고 있어서였습니다. 율곡 같은 천재(高明)가 아니라면 코흘리개 나이에 어떻게 그게 가능하겠습니까.”
2. 진실은 어디 있을까.
어머니의 죽음이 준 실존적 충격이 컸던 것은 틀림없다. 그의 나이 16세, 한창 예민하고 방황할 사춘기 아닌가. 동년배 최립에게 율곡은 “도학(道學)과 출세의 갈림길에서 방황하던 중 어머니의 죽음을 만났고, 옛 사람들의 글을 끼적거리며 세월을 보냈다”고 고백했다. 나중 선조에게 올린 글은 더욱 분명하다. “자상한 어머니를 여의고, 슬픔을 주체하지 못해(以妄塞悲) 불교에 탐닉했습니다. 점차 거기 젖어 들고 미혹은 깊어져, ‘그만 본심을 잃고(因昧本心)’ 심산에 들어가 선문(禪門)에 종사하게 되었습니다.” 이를 보매 송시열의 변호와는 달리 율곡의 불교는 단순한 지적 호기심의 경도를 넘어서 있었다.
그는 실제 몇 년간 ‘화두’를 진지하게 붙들고 수련했다. “내가 어려 소싯적에 선가(禪家)의 돈오법(頓悟法)이 도에 들어서는 첩경이자 신기라고 여겨, (조주선사의) ‘만상이 하나로 돌아간다면, 그 하나는 어디로 가나’를 화두로 삼고 수년 동안 생각했지만 결국 깨달음을 얻지 못했다. 돌이켜 반성해보고서 그게 길이 아님을 알았다. (嘗語學者曰, 吾少時, 妄意禪家頓悟法, 於入道甚捷而妙, 以萬象歸一, 一歸何處爲話頭, 數年思之, 竟未得悟. 反以求之, 乃知其非眞也.)”
3. 이 각성과 더불어 그는 1년 남짓의 금강산 유력을 마치고 하산한다.
그사이에 무엇이 일어났는지 그는 본격적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몇몇 단편적 자료만 있다. 선사들과 수작한 십여 수의 시, 금강산에서 노승과 나눈 짧은 대화, 그리고 지금 『성학집요』안의 ‘이단’편이 그것이다. 율곡은 불교의 마음(心性) 훈련의 가치를 인정했다. 그것은 ‘상념(想念)의 에포케 (epoche,'판단의 보류', 판단의 정지)’라고 불릴 만한 것이다.
“산문에 들어간 뒤 견고한 계(戒)와 정(定)으로 침식을 잊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다가 홀연 이런 생각이 들었다. ‘불교는 다만 증감상(增減想)을 짓지 않도록 유의한다.’ 무슨 말인가. 그 훈련은 무슨 특별한 것이 아니라 이 마음이 달리는 길을 차단하고, 정신을 집중(凝聚)해 고요의 극치에서 스파크될 정신의 투명함과 빛(靜極虛明)을 성취하고자 할 뿐이다. (因入山門, 戒定堅固, 至忘寢食, 久之忽思, 以爲佛氏戒其徒勿作增減想者, 何意也. 蓋其學無他奇妙, 只欲其截斷此心走作之路, 凝聚精神, 以造靜極虛明之域.)” (『栗谷全書』‘行狀’)
율곡은 바로 이 목적을 위해 화두(話頭)가 만들어졌다고 말한다. 화두란 다만 상념을 차단하는 도구라는 것. 이 비밀이 미리 새 나가면, 즉 “내부에 의미를 담고 있지 않다(無意味話頭)”는 것을 알면, 김이 빠져 수련에 정진하지 않을 우려가 있어 화두의 해석이나 분석을 금하는 것이라고 했다.
4. 율곡 또한 수기(修己) 프로젝트에서
지나간 상황이 남긴 의지와 상념들의 ‘뿌연 먼지들(浮念)’을 제거하는 것의 중요성을 극구 강조한 바 있다. 그런데 율곡은 왜 굳이 불교에 이단(異端)이라는 레터르를 붙였을까. “윤회응보(輪回應報)로 사람들을 유혹 겁박해 불당(佛堂)에 공봉(供奉)을 드리게 한다”는 종교적 판단은 논외로 치자.
“불교는 심성(心性)을 치밀하게 논하는데, 이(理)를 심(心)으로 오해해 심(心)이 만법(萬法)의 근본이라고 했다. 심(心)을 또 성(性)으로 오해해 성(性)을 견문작용(見聞作用)이라고 했다. 적멸(寂滅)을 종(宗)으로 해, 천지만물(天地萬物)을 환망(幻妄)으로 알고, 출세(出世)를 도(道)로 알며, 병이인륜(秉彛人倫)을 질곡(桎梏)이라고 여겼다. (其精者則極論心性, 而認理爲心, 以心爲萬法之本, 認心爲性, 以性爲見聞作用, 以寂滅爲宗, 以天地萬物爲幻妄, 以出世爲道, 以秉<5F5D>人倫爲桎梏.)”
읽기에 영 암호 같을 것이다. 한마디로 율곡이 지적한 불교의 핵심 문제는 ‘객관성’이다. 예컨대 불교는 지금 의도적 판단과 인위적 노력을 거부하고 ‘임정직행(任情直行)’을 권장하는데, 그 ‘주관적 자유(猖狂自恣)’를 무제한 허용해도 좋은가? 삶이란 상황을 바르게 이해하고, 행동을 적절히 선택하는 과정이 아니던가.율곡의 의중을 번역하면 이렇다. “마음 내부의 불순물을 정화하는 심학(心學)은 시작이지 끝이 아닌바, 객관의 척도를 향한 이학(理學) 없이 학문은 완성되지 않는다.”
- 중앙선데이 | 제179호 | 한형조 교수 | 교과서 밖 조선 유학 : 성학집요 <13> | 201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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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학집요 <14> ‘성실 (誠實)’, “자신을 속이지 마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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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직 맡은 자, 염치와 정의 외치지만 실제 정치는 달라” |
성학집요 <14> 성실(誠實), “자신을 속이지 마라”
그동안 삶의 기술(學問)을 위한 준비로 1)뜻을 세우고(立志) 2)심신을 수습하여(收斂) 3)지식을 추구(窮理)하는 단계를 밟아왔다. 지식 이후에는 당연히 실천이 있다. 이 둘 사이에는 오래된 심연이 있다. 그래서 4)‘진실(誠實)’장이 있게 되었다.
1. 율곡은 말한다.
“지식(窮理)을 얻은 다음에는 실천(躬行)해야 하는데, 반드시 진정(實心)이 있은 다음에야 실효(實功)를 거둘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실은 실천의 근본입니다.” 그는 공자의 오랜 격언부터 인용한다. “정성(忠)과 신뢰(信)를 기본으로 해야 한다.” 이 바탕을 견지하면 “야만과 환란의 상황도 헤쳐나갈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이웃의 인정도 받지 못할 것”이다. 이 덕성을 순간순간 리마인드시키자. “일어서면 그것이 앞에 있는 듯, 수레에 타면 팔걸이에 그것이 앉아 있는 듯 의식하라. 그런 다음에 걸음을 떼고, 수레를 몰아라.”
이 의도적 자기 점검은 남의 인정을 바라거나, 명성과 이익을 노린 것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 순수하며, 내적으로 충만한 태도이다. 이 영웅적 기획을 위기지학(爲己之學), 즉 ‘나 자신을 위한 학문’이라 부른다.
2. 『대학』의 8조목은 치지(致知) 다음에 성의(誠意)를 두었다.
성의는 지식과 실천을 잇는 최초의 가교다. 원문을 읽어보자. “의지(意)를 성실하게 한다는 것은 ‘자신을 속이지 않는 것’이다. 악취를 싫어하듯, 멋진 이성에 끌리듯 하는 것인데, 이 (느낌과 행동의 일치)를 진정한 상쾌함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군자는 반드시 그 홀로(獨)를 삼간다.(所謂誠其意者, 毋自欺也. 如惡惡臭, 如好好色, 此之謂自謙. 故君子必愼其獨也.)”
문장이 어색하고 읽기에 까다로울 것이다. 고금에 논란이 된 구절이고 특히 주자학과 양명학을 가른 문제의 명구라는 것을 우선 일러둔다. “스스로를 속이지 않는다(毋自欺)”는 한마디는 퇴계의 평생을 지켜온 경구 가운데 하나다. 이 말은 지금도 쓰고 있다. ‘스스로를 속인다’고 하는 것은 떳떳하지 않은 일, 아니다 싶은 일을 눈 딱 감고, 아니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저지르는 것을 뜻한다. 주자학은 한걸음 더 나아간다. 혹 옳은 일이라 하더라도 동기가 불순하거나, 필요한 만큼의 액션을 충분히 가동하지 못하는 것도 여기 포함된다. 주자는 말한다. “9할의 공정성에 1할의 사적 동기가 끼어들어도 곧 자신을 속인 셈이 된다.” 이 1할의 사의(私意)는 잠복하고 있다가 다른 상황과 계기를 타고 다시 발호할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도 적절한 감시와 처치가 필요하다.
참, 여기서 율곡의 독자적 심성정의(心性情意)론을 소개해야겠다. 성(性)이 잠재적 에너지라면 정(情)은 자극에 대한 반응이고, 의(意)는 그 이후의 숙고(計較商量)를 가리킨다. 즉 모든 사유는 도구적이고, 변형된 의지다. 이 통찰에 대해 누군가가 “반응이 없어도 사유는 저절로 있다”고 시비하자, 율곡은 “그 또한 이전에 경험된 것들의 흔적과 반추”라고 대답했다. 성의(誠意)는 그런 점에서 지향성으로서의 사유를 다스리는 내면 훈련이다. (지금의 용법과 혼동하면 안 된다. 어째서 이 말이 “성의를 보이라”에서처럼 인정이나 뇌물을, 즉 마음을 재물화해 달라는 요구로 변질되었을까.)
그 피어남(發)은 행동 이전, 자기 속에서 우선 자기 자신에게만 알려진다는 의미에서 ‘홀로(獨)’이다. 범죄를 저지르기 전에 예방과 교화가 더 바람직하듯이 행동 이전에 이들 발단을 미리 다스리는 것이 더욱 효과적이고 안전하고 해피하다. 그래서 “네 홀로를 삼가라(<614E>其獨)”가 표어가 되었다. 이 또한 퇴계가 평생 고투한, 현판에 새긴 네 경구 가운데 하나였다.
3. 홀로를 삼갈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놀랄지 모르겠는데 지식과 실천 사이의 간격이 줄어든다! 그렇지 않은가. 우리가 아는 것은 공적인 지평(義理), 공동체적 관심하에 있고, 실제 행동은 사적 충동(私意)에 지배되지 않는가. 이 괴리가 우리로 하여금 “악취라고 하여 코를 돌리지 않게 하고, 훌륭한 장면에도 마음 놓고 손뼉 치지 못하게”하는 것이다.
이 괴리의 극복 없이 어떤 의미 있는 결과도 기대난망이다. 『중용』은 말한다. “성실(誠)은 사물의 알파요 오메가다. 성실이 없다면 사물은 없다.” 율곡은 다들 효도와 우애를 알고 있으면서도 실제 그렇게 행동하지 않는다고 탄식했다. “입으로는 부부의 ‘서로 공경(相敬)’을 말하나 제가(齊家)의 실제를 들어본 적이 없으니, 장유(長幼)와 붕우(朋友) 간에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나아가 현자를 보면 기뻐하고 좋아해야 하거늘 마음은 호색(好色)에 빠져 있고, 삿된 것을 보면 미워해야 하는데도 은근히 아부와 친밀을 즐기고 있습니다.
관직을 맡은 자 염치와 정의를 외치지만 일을 처리함에 염치도 없고 정의도 없습니다. 말로는 백성의 삶을 안정시키고 고양시킨다 하지만 실제 정치는 이를 배반하고 있습니다. 간혹 인(仁)을 강제하고 의(義)를 추동하는 자도 있으나, 캐치프레이즈만 요란할 뿐 실제 마음은 인의를 즐겨하지 않습니다. 어거지와 거짓으로는 오래가지 못합니다. 처음에는 날카롭게 시작했다가 나중에는 무디고 게을러지고 마니 이런 유들은 다 실심(實心)이 없기 때문입니다. 한 마음이 진실하지 않으면 만사가 다 거짓이니 무엇 하나 실행될 리 없고, 한 마음이 진실해야 만사가 다 진짜가 되니, 무엇을 하든 성취될 것입니다. 그래서 주염계가 왈, ‘정성(誠)이야말로 성인(聖人)의 근본’이라고 했습니다. 전하께서는 깊이 유념하소서.”
- 중앙선데이 | 제181호 | 한형조 교수 | 교과서 밖 조선 유학 : 성학집요 <14> | 201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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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학집요 <15> ‘교치기질 (矯治氣質)’ - 성질 뜯어고치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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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란 자신의 편향을 알고 부족함을 채워가는 작업” |
성학집요 <15> 교치기질 (矯治氣質) - 성질 뜯어고치기
지식은 실천을 위한 준비라고 했다. 그 실천의 목표는 ‘인격의 성숙’이다. 사회적 참여는 그 다음의 일이다. 그래서 성실(誠實) 다음에 ‘기질 바로잡기(矯氣質)’ 장이 있게 되었다.
주자는 친구 여조겸(呂祖謙·1137~81)의 사례를 들었다. “소싯적 그는 성질이 거칠어 음식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상을 엎었다. 그러다 병을 앓으며 논어 한 책을 뒤적이다가 ‘스스로에겐 엄격하고 남의 허물은 크게 탓하지 말라’ 는 소리에 홀연 깨달아 생각이 일시에 평온해졌다. 그 후로는 화를 터뜨린 적이 없다. 그의 기질은 그렇게 변화되었다.”
기질이란 ‘사물을 대하는 태도, 자극에 반응하는 방식’을 가리킨다. 이즈음 말로 심리학적 · 도덕적 의미에서의 ‘성격’에 해당한다.
1. 드센 기질은 누르고 위축된 기질은 펴라
자극에 대한 반응의 양상은 천차만별이다. 빠르고 격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둔하고 느린 사람도 있다. 이 ‘속도’만 가지고는 옳다 그르다를 논할 수 없다. “억센(剛) 기질은 과단성 있고 엄격하나, 과도한 자만에 남의 말을 듣지 않는 약점이 있다. 이에 비해 부드러운 성격은 동정적이고 수용적인 것이 장점이나 유약하고 결단력이 부족하며, 무원칙하기 쉬운 폐단이 있다.”
똑똑하고 잘난 사람들은 목소리가 크고, 자신감이 없고 존재가 약한 사람들은 위축되어 있다 (沈潛者, 沈深潛退, 不及中者也, 高明者, 高亢明爽, 過乎中者也).
드센 기질은 누르고 위축된 기질은 펴야 한다. 그것을 스스로 리마인드시키기 위해 선비들은 “허리에 부드러운 사슴 가죽이나 팽팽한 활줄을 차기도” 한다. 이 훈련이 노리는 것은 상황이 요구하는 바의 최적의 합리성, 즉 중(中)에 서기 위함이다.
둘 가운데 고르라면 차라리 ‘드센’ 기질이 더 낫다. 가령 자로는 공자를 겁박할 정도로 사나웠지만 잘못을 깨닫고는 누구보다 헌신적인 자질로 거듭났다는 것이다. 그러나 유약한 기질은 ‘떨치고 일어나기’ 어렵다고 했다. 그 말이 맞는 것 같다.
공부란 자신의 기질이 갖고 있는 ‘편향’을 알고, 부족한 부분을 채워나가는 작업이다. 각자 기질이 다르므로 흡사 의사의 처방처럼 그 교정도 서로 달라질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유교는 모든 사람이 어떤 상황에나 따라야 할 보편적 규범을 제시하지 않는다. 영원의 준칙이라는 ‘이(理)’는 퇴계의 언급대로 “언제 어디에나 있으되, 그것은 상황에 따른 적절성, 즉 시중(時中)으로 존재하는 것이라”, 늘 다른 얼굴로 온다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한다.
2. 仁은 성취 대상 아닌 돌아가야 할 고향
놀랄지 모르겠는데, 인간의 몸은 상황에 따른 반응의 적절성을 ‘이미 알고 있다.’ 그것은 학습의 과정이나 외부의 강제를 통해서가 아니라 ‘자체 내의 본성’으로서 자기 속에 존재하고 있다. 다만 내게 아직 알려지지 않았고, 그리고 무엇인가가 그 알려짐을 방해하고 있다. 이 논법을 납득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주자학 이해에 가장 큰 곤혹이 이것이다.
안연이 인(仁)을 묻자 공자는 극기복례(克己復禮), 즉 “자신을 극복하여 예로 돌아감”이라고 정의했다. 주자학은 여기 인(仁)을 인간의 ‘본성’이라고 했다. 즉 인(仁)이란 ‘성취’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돌아가야 할 ‘고향(禮是自家本有底)’ 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아, 우리의 다산 정약용이 이 독법을 너무 싫어한 나머지 독자적 유교 해석을 열었다는 점을 귀띔만 해 두고 넘어간다). 그 고향의 풍경 속에는 공감과 배려(仁)뿐만 아니라 정의감(義), 균형감과 판단력(智), 그리고 적절한 태도(禮)가 들어 있다.
문제는 사적 관심과 의지가 인간을 이 본래의 고향으로부터 추방시켰고, 인간은 어둠 속에서, 차단된 벽에 절망하며 살게 되었다. 그러니 고향에 돌아가기 위해서는 극기공부(克己工夫), 자신을 넘어서려는, 니체의 외침을 빌리면 초인(超人)의 훈련이 필요하다.
3. 귀가 얇으면 바른 길을 놓친다
예(禮)가 아니라면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행동하지도 말아야 한다. 이 예는 과장하자면 허리를 굽히는 각도, 예식장의 폐백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극기복례란 요컨대 바깥의 영향력에 흔들리지 않고, 내적 충동에 휘둘리지 않고, 사물이 요구하는 바 위에 서 있기 위한 훈련이다. 1) ‘볼 때’ 조심해야 한다. “앞에서 춤추는 사물들에게 혼을 빼주기 쉬우니(蔽交於前, 其中則遷).” 2) ‘들을 때’ 조심해야 한다. “귀가 얇아 유혹에 빠지면 바른 길을 놓칠 것이니(知誘物化, 遂亡其正)” 3) ‘말을 할 때’ 조심해야 한다. “허덕대는 소리, 자기도 모르는 소리를 그쳐야 마음이 고요하고 안정될 것이기에(發禁躁妄, 內斯靜專).” 그리고 4) 사적 충동에 따라 ‘행동하면’ 위태로우니, 다만 사물이 보여주는 길을 그저 따라갈 뿐.(順理則裕, 從欲惟危).
이 사물(四勿)의 훈련이 익어가면 사물에 달리 반응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어두운 ‘기질’은 밝아지고 약한 기질은 강해지며, 탐욕스러운 기질은 청렴하게 되고, 잔인한 성질은 자애롭게 변한다. 이것이 학문의 효과다.”
이 효과는 하루아침에 생겨나지 않는다. 중용이 가리키는 대로 학습(博學), 질문(審問), 성찰(愼思), 이해(明辨), 그리고 실천(篤行)의 먼길을 밟아야 한다. 율곡은 주저앉으려는 사람들을 이렇게 일으켜 세운다.
“이 훈련은 세간의 기예들과 마찬가지다. 타고 나면서 익히고 나온 사람은 없다. 음악을 한답시고 아이들이 처음 줄을 튕기고 소리를 지를 때, 다들 귀를 닫고 도망가고 싶을 것이다. 그러다 연습이 깊어지면 점차 음을 갖추다가 고르고 맑은 소리를 내고, 급기야는 신비로운 세계를 열어 보이기도 한다. 이 경지는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실제 가해진 노력, 그리고 그것들이 쌓이고 익어간 결과다. 모든 기예가 다 그렇다. 학문이 기질을 변화시키는 것도 이와 다를 바 없다.”
- 중앙선데이 | 제183호 | 한형조 교수 | 교과서 밖 조선 유학 : 성학집요 <15> | 201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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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학집요 <16> ‘유학이 에도 일본을 비켜 간 이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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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武家 권력은 유교의 문치적 이상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
성학집요 <16> - 유학이 에도 일본을 비켜 간 이유
10년도 더 지난 일이다. 경상대에서 열린 학술대회에서 “일본에 유교는 없다” 고 했다가, 구로즈미 마코토(黑住眞) 교수 등 일본학자들로부터 신랄한 반박을 받은 바 있다. 오늘은 내 발언의 아폴로지, 혹은 근거를 적어볼까 한다.
1. 세속화와 종교
이학(理學)은 다섯 개의 해협을 건넌 자리에 정박했다. 그중 세 가지는 세속화와 종교, 그리고 권력이다. ‘세속화’는 현실이고 근대의 일반 코드다. 일본은 특히 물질과 신체 등 기(氣)의 언어에 익숙하지만, 이(理)처럼 추상적 · 이념적 가치를 곤혹스러워한다. 그곳 학자들을 만나면 “대체 이(理)가 무엇이냐”고 묻거나, 아니면 강제된 규범이나 법적 체계로서의 노모스(nomos)로만 이해하고 있었다. 또 ‘종교적’ 충돌도 있다. 이학(理學)은 민족지적 신앙을 넘어선, 이를테면 이성 신학을 설파한다. 야마자키 안사이(山岐闇齎 · 1619~82) 등 일본의 주자학자들은 이학을 신토(神道)와 절충시키기 위해 고심했다. (※ 노모스(nomos): 자연적인 사물(피시스· physis)과 인위적인 법률 ·습관(노모스) 등을 구별하는 사고방식.)
종교와 정치는 자주 연대한다. 신토는 모토오리 노리나가(本居宣長·1730~1801) 에서처럼 일본의 ‘내셔널리즘’ 과 연관돼 있다. 이학(理學)은 그러나 민족주의를 고무하지 않는다. 보편적 휴머니티에 입각해 있기에 자주 시대착오적이고, ‘우활(迂闊 · 사리에 어둡고 세상물정 모르는 것)’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한말의 지사들은 이 이학(理學)의 탈민족적 이념을 원망했다. 단재 신채호의 울분은 절절하다. “우리 조선 사람은 매양 이해(利害) 밖에서 진리를 찾으려 함으로, 석가가 들어오면 조선의 석가가 되지 않고 석가의 조선이 되며, 공자가 들어오면 조선의 공자가 되지 않고 공자의 조선이 되며, 무슨 주의가 들어와도 조선의 주의가 되지 않고 주의의 조선이 되려 한다.”
그는 이 탈주체적 순수주의적 경향을 ‘노예의 특색’으로 질타했다. 식민의 시기 다들 이 탄식에 공감했다. 그러나 시대가 바뀌었다. 나는 조선이 일본과 달리 이학을 실용화 · 민족화하지 않은 바로 그 비적응성에서 희망을 본다. 그 영원의 철학(perennial philosophy)의 보편주의가, 21세기 글로벌시대 다원주의적 원리로, 공통가치(common value)의 기반으로 유용지구(有用之具)로 쓰일 수 있게 하는 반타석(盤陀石)의 지반이다.
2, 권력
일본은 무가(武家) 권력을 축으로 한 신분제 사회였기 때문에도 유교의 문치적 (文治的) 이상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혼고 다카모리(本鄕隆盛) 교수는 말한다. “막부권력의 사상적 합리화는 주자학자가 아니라 야마가 소코(山鹿素行·1622~85)나 오규 소라이(荻生徠·1666~1728) 등 순자나 한비자의 영향을 받은 고학파 (古學派)가 맡았다.” 에도 막부의 권력은 왕실로부터 나오지 않고 쇼군(將軍)에게서 나왔다. 유교식 발상으로 패도(覇道)와 왕도(王道) 사이는 절충하기 어렵다. 더구나 유교는 놀랄지 모르겠는데, 현실 권력에 대한 비판과 저항 위에 서 있다. 이 곤혹과 난감함으로부터 일본에서 유학은 한문학습의 교양으로, 특정한 인물들의 개인적 취미나, 지금의 대학처럼 ‘순수한 학문적 관심’으로 한정되었다고 할 수 있을까.
당연히 유학자들은 사회적 지위도 높지 않았고, 때로 경멸의 대상이었다. 일본식 개념인 ‘유자(儒者)’는 조선의 ‘선비’와는 천양지차의 뉘앙스를 가지고 있다. 이토 진사이(伊藤仁齋·1627~1705)가 의업(醫業)을 포기하고, 유학자가 되겠다고 했을 때, 온 집안이 나서서 말렸다고 한다. 지금 철학과를 가거나 인문학을 하겠다는 철없는(?) 자식을 부모들이 나무라듯이 말이다.
역시 유교는 일본을 침투할 수 없었다. 나는 에도 일본이 주자학을 ‘튕겨 냈다’ 고 본다. 더구나 이학의 독점은 상상할 수 없었다. ‘열렬한 주자학도’인 야마자키 안사이와, ‘반 주자학의 기치를 든 고학(古學)의 선두’ 이토 진사이가 교토의 호리카와 강을 사이에 두고 대치했던 것이 저간의 사태를 극명하게 보여 주고 있다.
3. 메이지유신과 유교
또 다른 아이러니인데, 일본에서 유학은 메이지유신 이후에, 즉 왕정복고(王政復古)와 더불어 본격적으로 사회정치적 동력을 얻는다. 교육칙어(敎育勅語)가 잘 보여 주듯이 국가적 통합과 이데올로기로서의 유교가 다시금 등장했다. 당연히 이때 강조된 것이 ‘충성’과 ‘복종’이다. 이 코드는 탈근대를 외치며 세계 정복에 나섰던 군국주의 시기 내내 설득되고 강요되었다.
이 시기는 조선의 식민지배 기간이기도 하다. 나는 현금 한국인들이 유교에 대해 갖고 있는 부정적 인상 가운데 상당수가 조선조의 실패라기보다, 일본 군국주의 시대에 형성된 동원과 반발의 흔적이요 그림자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 ‘충효(忠孝)’와 ‘명분(名分)’ 등으로 고착된 이미지들이 ‘내가 말하는 유교’를 잘 알아듣지 못하게 하고, 나를 시대착오적 유교 옹호론자로 보이게 한다.
일본은 유교에서 희망과 가치를 발견하지 않는다. 한국의 유교 학술회의에서 도포자락의 할아버지들이 참석하는 것을 보고는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그리고 한국의 학자들이 ‘유교의 미래’를 말하는 것이 도무지 납득이 되지 않는다는 표정이다. 그 근본 이유는 일본에서 유교가 전통 속에 깊이 동화되지 않은 데다, 정치적 도구로 변질된 역사적 경험 탓이 아닐까 싶다. 마루야마 마사오의 『일본정치사상사연구』를 보라. 그는 일본이 유교를 타자화하고, 주자학을 배제하면서 근대의 길을 돌파해나갔다고 썼다.
나는 이 논란을 보며, 그가 왜 구원을 ‘유교’에서 찾지 않았을까 하는 엉뚱한 의문을 제기하곤 한다. 왜 그는 유교, 특히 주자학을 리고리즘, 즉 ‘엄격한 외재적 강제’로만 보았을까, 거기 유교의 이상인 고전적 의미의 ‘합리(合理)’의 지평을 읽어내지 못했을까.
- 중앙선데이 | 제185호 | 한형조 교수 | 교과서 밖 조선 유학 : 성학집요 <16> | 201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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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학집요 <17> ‘양기(養氣)’), 건강의 진짜 비결, 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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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신의 건강 원한다면 내 안의 양심을 건강케 하라” |
성학집요 <17> - 미발(未發)의 아타락시아(中)
기(氣)는 스파르타식 훈련의 대상이 아니다. 객기(客氣)는 다스려야 하지만 정기(正氣)는 ‘보존’하고 ‘성장’시켜야 하는 것. 그래서 교기질(矯氣質) 다음에 양기(養氣) 장이 있게 되었다.
누가 저 산을 벌거벗게 했는가다
사람들은 육신의 기(氣)를 잘 믿지 않는다. 일탈과 공격성, 탐욕과 이기의 위태로운 물건으로만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다. 율곡은 심신의 기를 통해 드러나는 도덕성, 혹은 기 자체에서 발현되는 우주적 특성을 특필하기 시작한다. 율곡의 기(氣)일원론, “오직 기발(氣發)만 있다”는 주장은 이 ‘기(氣)의 낙관’ 위에 자리 잡고 있다. 여기가 퇴계와 갈라지는 분기점이다.
원군은 맹자다. 맹자는 주지하다시피 인간 본성의 선함을 춘추전국의 전란, 그 살육의 한복판에서 설파했던 사람이었다. 그는 환경론자들과 달리 “인간에게는 고유한 성장의 방향과 목표가 있다”고 했고, 유전론자들을 향해서는 “타고나는 바의 실제는 근본적으로 선하다”고 역설했다.
그는 이런 비유를 들었다. 저 우산(牛山)을 보라. 지금 벌건 민둥산이다. 사람들은 저 산이 울창한 숲으로 덮여 있던 시절을 기억하지 못한다. 한때는 짐승들이 뛰놀던 아름다운 산이었으나, 인간들이 집을 짓고 땔감을 대느라 날마다 도끼질이니 견뎌낼 재간이 있었겠는가. 밤의 이슬과 휴식이 새싹을 틔우려 해도 도끼질은 그치지 않고 소나 양이 뜯어먹으니 지금 저렇게 황폐한 산이 되고 말았다.
인간의 정황도 그와 같다. 주자는 여기 덧붙인다. “밤은 사물과 접하기 이전의 시간이다. 그때 인간의 (심신의) 기는 청명(淸明)하다. 이 양심의 기는 은미한데 낮의 소음과 작태로 하여 도끼질당하고 손상당하게 된다. 그리하여 밤의 (휴식으로 인한 선한) 기운은 점점 엷어지다가 그만 더 이상 싹을 틔우지 않는 지경에 이른다. 저 산의 나무나 인간 속의 ‘어진 마음(仁心)’이 마찬가지 운명이다.”
호연지기 (浩然之氣)를 기른다
인간이 타고난 기는 본시 그렇게 쪼잔하거나 혼탁하지 않았다. 우주적 활력과 연대의 산물 아닌가. “이 지대지강(至大至剛)의 호연지기(浩然之氣)를 더 이상 다치지 않게 하고, 잘 보존해서 기르자!”
거듭 강조컨대 이 기는 ‘자신의 특성상’ 도덕적이다. 현대 윤리학은 이 라인 위에 서 있지 않다. 도덕을 늘 자연에 반하는 강제와 의무에서들 논하는데, 그래서는 실효성은 물론, 인간성의 실현을 운위하기 어렵다. 주자학은 본래의 본성을 회복하는 것, 그 자연을 최고도로 실현하는 것을 윤리요, 삶의 책무라고 본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행복한 길이다.
이 기의 양성은 안팎이 협력한다. 안으로는 자기 내부의 도덕적 태도를 유지 보존(志氣)해야 하고, 밖으로는 외부의 유혹과 자극에 의해 혈기(血氣)가 동요되지 않아야 한다. 밖의 유혹은 여러 가지가 있다. 논어는 “젊을 때는 색(色)을, 장년에는 (명예 등) 투쟁을, 늙어서는 탐욕을 경계해야 한다”고 한 바 있다. 일상적으로 절제해야 할 것은 ‘언어’와 ‘음식’이다. 바깥의 경계와 절제는 안의 기를 안정시키고 성장시키는 계기가 된다.
식스팩과 다이어트 열풍은 안전한가
벤 버냉키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도 지난번 어느 대학 졸업식장에서 갈파했듯, 그렇다. 자신의 삶을 통제하지 않고 행복은 오지 않는다. 아울러 도덕적 태도의 지탱 없이 이 기(氣)는 발양될 수 없다. 건강하고 싶은 자, 헬스와 다이어트에 목맬 일이 아니라고 주자학은 조언한다. 퇴계는 오로지 몸짱 식스팩만의 지향이 마침내 ‘본성을 다치는 지경(賤性)’에 이를 것이라고 탄식한 바 있다.
건강한 심신을 가지고 싶은 자는 주자의 선배 정이(程頤, 호는 伊川,1033~1107)의 사례를 깊이 참고해야 한다. “내 나이 지금 72세다. 근골은 한창때 못지않다.” 앞에 선 사람이 물었다. “타고나기를 약골이셨으면서 어떻게 그처럼 익장(益壯) 하십니까.”
이천(伊川)은 잠시 뜸을 들인 다음에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생명을 잊고 욕망을 추구하는 것(忘生徇欲)을 수치로 여긴다네.” 『서명(西銘)』을 쓴 장재(張載, 호는 橫渠, 1020~77)가 부연 설명을 해주었다. “그저 건강(康)에 연연하고 헬스(强)를 다녀 되는 일이 아니다. 양생은 천리(天理)를 따라야 한다.” 한번은 이천의 용모 안색이 전과 훌쩍 다른 것을 보고 제자들이 비결이 무엇이냐고 묻자, “학문의 힘이다!”라고 했다.
인간은 우주적 창조의 협력자
율곡(栗谷 李珥)은 이 소식을 종합하여 말한다. “천지의 기화(氣化), 그 우주적 창조력은 무한하고 한순간도 쉬지 않습니다. 사람의 기는 이 천지와 통해 있기에, ‘도덕적 마음(良心)’과 ‘생명력(眞氣)’ 또한 그와 더불어 자랍니다. 다만 이 기운을 다치게 하는 요소가 많기에 생장하는 힘이 꺾는 힘을 당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도 찍어대니 마음은 금수로 떨어지고, 생명력은 고갈되는 것이니, 두렵지 않습니까. 양심을 해치는 것은 감각적 욕망들 입니다. 눈, 코, 귀, 입의 경도가 오장(五臟)을 상하게 하고, 안일에의 욕구가 근골을 녹입니다. 그리하여 행동이 절도를 잃게 하고, 희로(喜怒)가 균형을 흩트리게 합니다. 이래서야 이 땅에 선 책무와 삶을 어떻게 완성하겠습니까.”
율곡은 이어 자기 삶의 길을 이렇게 정위했다. “그런 즉 양심(良心)과 양기(養氣)는 결국 같은 것입니다. 양심이 날마다 자라고 해치는 바 없다면, 그리하여 그 폐단을 다 제거한다면 호연지기가 성대(盛大) 유행(流行)하여 마침내 천지와 더불어 그 역할(體)을 같이하게 될 것입니다. 살고 죽음에 비록 운명이 있다 하나, 내게 주어진 도(道)는 결국 다하는 셈이니, 떳떳하고 흔쾌하지 않겠습니까. 전하는 유념하소서.”
- 중앙선데이 | 제187호 | 한형조 교수 | 교과서 밖 조선 유학 : 성학집요 <17> | 2010.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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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학집요 <18> 미발(未發)의 ‘아타락시아’ (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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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 듣고도 생각이 일어나지 않는 순간을 소중히 하라” |
성학집요 <18> - 미발(未發)의 아타락시아(中)
1. 사태가 벌어진 뒤 반성은 너무 늦다
우리는 대체로 감정과 행동을 문제 삼는다. 집이나 학교에서 회초리 · 사탕이 난무하고, 사회 정치적으로 포상과 형벌이 제도화되어 있다. 유교의 체용론(體用論)은 좀 달리 접근한다. “이 모든 일의 관건은 감정과 욕구 ‘이전’에 있다!”는 것. 누가 문화적 습속이나 에티켓의 훈계에서 유교를 찾는가. 주자(朱子)는 말한다. “일어난 사태를 따라 반성하고 추국하는 것은 너무 늦다. 나는 지난날 ‘이미 일어난(已發)’ 것들을 열심히 쫓아다녔다. 끄트머리의 반성과 성찰(察識端倪)을 기본 공부로 삼았던 것이다. 그랬더니 가슴속이 여전히 흔들려 안정감을 찾을 수 없었다. 말을 할 때나 일을 처리할 때 늘 급박하고 붕 떠서 차분하고 두터운 느낌이 없었다. 이것이 실수였다. 잘못 생각한 폐단이 이처럼 크다. 깊이 살펴야 한다.” 이 각성이 주자의 학문적 전환을 갖고 왔다. 그 이전을 구설(舊說), 그 이후를 신설(新說)이라고 부른다. 대체 감정과 욕구가 고개 내밀기 ‘이전(未發)’은 어디이고, 거기 어떻게 손을 쓴단 말인가.
2. 미발은 감정·반성 의식 없는 상태
중용』의 표준구는 말한다. “희로애락의 감정이 발로하기 이전(의 균형)을 중(中)이라고 한다 (喜怒哀樂之未發謂之中).” 이 선언에서 보듯 ‘미발(未發)’은 우선 1) 외계의 자극에 대해 ‘감정’적으로 반응하기 이전을 가리킨다. 주자는 여기에 2) ‘사려미맹(思慮未萌)’을 보탰다. 즉 감정뿐만 아니라 반성적 의식조차 없는 상태를 가리킨다는 말이다. 이곳을 눈여겨보아야 한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는데, 유교는 반성적 의식에 궁극적 가치를 두지 않는다. 이를테면 데카르트의 유명한 선언,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에 고개를 갸웃할 것이다. 반성은 다만 2차적이고 도구적일 뿐이다. 삶이 자연스럽다면, 평소의 인사말처럼 “별 일이 없다”면, 반성은 돌발되지 않는다. 그렇지 않은가. 의도적 활동은 ‘마지 못해(?) 걸쳐 놓는’ 사다리에 불과하다. 설사 덕성이나 선을 위한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인위적 설정’이거나 ‘외부적 표준’인 한, 아직 충분히 목표에 도달하지 못한 것이고, 자칫 위태롭기까지 하다. 이 점에서 유교와 노장은 하이파이브, 손바닥을 짝 하고 부딪친다.
3. 반성의 순간 없어지는 얼굴
그러하기에 미발의 중(中)을 ‘추구’해서는 안 된다(求中不可)! 그것은 “다만 ‘보존(存)’하고 ‘양성(養)’할 물건이지, 반성이나 획득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 율곡은 정이천의 이 경고가 ‘미발의 세계(未發界)’에 대한 남다르게 정밀한, 매우 섬세한 이해라고 극찬했다. 요컨대 이 미발처(未發處)는 반성의 순간 흩어지는 얼굴이고, 의도하는 순간 다치고 마는 물건이다. 그럼 이 미발에 어떻게 닿을 것인가. 어렵지 않고 단순하다. ‘주시’ 혹은 ‘환기’면 된다. “삼가고 두려워하라는 권고는 너무 무겁다. 다만 이 마음을 불러 제자리에 있는지 확인하면 그만이다.” 이 훈련을 한 마디로 경(敬)이라고 부른다.
율곡의 정리를 들어보자. “신이 생각컨대 미발의 시절이란 이 마음이 고요(寂然)하여 한 터럭의 사려(思慮)도 없는 것을 말합니다. 다만 이 고요의 한가운데에서도 지각(知覺)은 불매(不昧), 즉 의식의 끈은 환하게 유지됩니다. 이곳은 극히 캐치하기 어렵습니다. 다만 ‘자각의 지속적 유지(敬)’를 통해 이 마음을 지키고, 함양(涵養)이 오래 쌓이면 스스로 확신이 올 것입니다. 자각을 통한 함양은 다른 기술이 아니고, 단지 고요(寂寂)히 사념을 잠재우고, 성성(惺惺)히 혼매에 빠지지 않는 일입니다.” 불교에 익숙한 사람은 이 말을 듣고나서 데자뷔, 어디선가 본 듯한 느낌이 들 것이다.
4. 의식의 스위치는 켜있는 미발
오해 하나는 짚어두어야 한다. ‘생각(思慮)’이 끼어들 수 없다고 했더니, 혹시 아무런 ‘의식’이 없는 상태냐고 되묻는다. 그렇지 않다. 유가는 지금 돌덩이가 되라고 권하는 것이 아니다. 주자는 재미있는 비유를 들었다. “자는 사람을 흔들어 깨워서 어리바리 잠깐 정신 못 차릴 때, 그때를 미발이라 할 것이냐?”미발에서 의식의 스위치는 켜져 있다. 나아가 사물에 대한 지각도 열려 있다! “미발시(未發時)에도 보고 듣느냐”는 물음에 율곡은 이렇게 답했다. “보고 듣되 이에 따라 ‘염려(念慮)’가 일어난다면 미발을 흩트리게 됩니다. 눈 앞을 지나가는 사물을 보고도 ‘보고 있다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고, 들으면서도 ‘듣고 있다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을 때가 미발입니다. 이처럼 견문(見聞)은 있되, 사유(思惟)를 짓지(作) 않으면, 미발을 다치지 않습니다.”
위의 언설을 종합하면 미발이란 “의식도 있고, 지각도 열어놓아 견문이 이루어지되, 거기에 대한 감정적 반응이나 계산적 염려가 아직 발호하지 않는 경지”다. 두 가지 설명을 보태고자 한다. 1) 왜 이곳이 그토록 중요한가. 유교 또한 불교처럼 평정(ataraxia)을 추구하며, 사물의 영향력을 벗어나 ‘자유하기’를 갈망하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 ‘자유(自由)’라는 말을 주자학 본래의 용법에서 쓰고 있다. 거기서 자유란 권력이나 압제로부터가 아니라 이를테면 “자기 자신의 소외된 감정과 욕구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의미했음을 기억하자.
2) 마음(心)은 기(氣)의 컨트롤 타워다. 이 뜻이 ‘심통성정(心統性情)’이란 표준구에 담겨 있다. 마음이란 배의 조타수 같은 것. 마음은 세상을 만드는 입법자(三界唯識)가 아니며, 더구나 여기 숨겨진 비밀의 또 다른 마음은 없다. 불교는 언필칭 ‘깨달음’을 외치는데, “마음으로 마음 보기(觀心)”는 아뿔싸, 길을 잘못 들었다고 비판해 마지 않는다.
- 중앙선데이 | 제189호 | 한형조 교수 | 교과서 밖 조선 유학 : 성학집요 <18> | 2010.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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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학집요 <19> ‘정심 (正心)’, 마음을 세탁하는 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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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뜬 생각이 일어날 땐 그대로 있어라, 고요히 물러가도록” |
성학집요 <20> 정심(正心), 마음을 세탁하는 법
놀라겠지만 유학은 도덕(道德)을 고취하지 않는다. 즉 “공자왈” 등으로 사람을 압박하거나 자잘한 에티켓에 목매지 않는다. 선(善)은 외적 규범이나 강제가 아니라 흡사 뿌리에서 가지가 뻗고 잎이 자라는 것처럼, 인간 ‘고유(固有)’의 성장이고 표현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여담인데, 이 무위(無爲)가 바로 ‘도덕(道德)’의 원래 의미였다. 『노자』를 『도덕경』이라 부르는 것은 익히 알 터이다. 도(道)는 여기 우주적 과정을 가리키고, 덕(德)은 개별 사물들이 분유한 우주적 공능과 참여를 가리켰다. ‘트로이의 목마’처럼 옛적 용어들은 현대적 서구 번안어로 채용되면서 자신의 고유한 의미를 잃고 거의 황야로 내몰렸다. 옛 지혜에 이르자면 그 지점부터 자세히 살피고 또 살피는 고고학적 탐사를 거쳐야 한다.
1. 기대도 희망도 없이
이상적인 마음은 명경지수(明鏡止水). 먼지 없는 잘 닦인 거울처럼 깨끗하고, 물결 없는 시내처럼 고요하다. 이 안에는 선한 의도(著意)나 행위에의 강박(按排)이 없다. 그 ‘빈자리’에서 사물들은 생긴 대로 놀고, 나 또한 본래 ‘예비된 자연(性)’을 표출할 것이다. 자극에 대한 반응은 이처럼 “무(無)로부터 솟아나와야 한다(從無處發出)!” 이 점에서 유교, 특히 주자학은 노장 불교와 같은 생각을 갖고 있다.
대체 마음속에 어떤 찌끼가 살고 있을까. 수도 없지만 주자는 세 가지 범주를 들었다. 1)‘기대(期待之心)’가 있다. 육조 혜능이 『금강경구결(金剛經口訣)』에서 ‘희망심(希望心)’이라 부르는 것이 이것이다. “무슨 좋은 일이 있겠지”라는 막연한 낙관에서부터, 특정 행동을 통해 무엇인가를 얻겠다는 취득적 동기가 여기 포함된다. 이것이 첫 번째 잡동사니(?)다. 2)다음에 일이 끝난 다음에도 마음속에 남아 있는 ‘흔적들’이다. 불교는 이를 훈습(薰習)이고 종자(種子)라 부르는데, 다음의 생각과 행동은 이 ‘과거’로부터 연변(演變) 이숙(異熟)될 것이다. 일은 ‘그 자리에서’ 태워야 할 일이지, 남겨두어서는 안 된다!
주자학은 도덕적 행동은 물론, 후회나 자책조차 너무 오래, 깊이 해서는 안 된다(罪己責躬不可無, 然亦不當長留在心胸爲悔)고 했다. 이는 즉 ‘현재에, 사태와 더불어 머물라’는 권고다. “첫걸음을 디딜 때는 첫걸음에, 두 번째 걸음에는 두 번째 걸음, 그곳에 의식의 전부가 집중되고 깨어있어야 한다!” 모든 일이 그렇다. 주일무적(主一無適), 오직 ‘하나’에 집중할 뿐, 어디 다른데 콩 밭에 가 있지 말라! 이 노력을 경(敬) 혹은 거경(居敬)이라 부른다. 이 훈련의 깊이는 꿈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꿈자리가 뒤숭숭한 것은 심지(心志)가 든든치 못한 탓이다. 착한 일이 꿈에 보이는 것도 권할 일이 아니다. 그 또한 마음이 어딘가에 붙들려 있는 탓 아닌가. 일의 전조나 예기처럼 오는 ‘신비’ 외에는 다 마음의 군더더기라는 것이다.
2. 마음속 편견과 편향
마음속에 있는 또 다른 잡동사니로 3)‘편견’과 ‘편향’이 있다. 『대학』은 ‘정심(正心)장에서 말한다. “마음속에 분노가 있다면, 공포가 있다면, 특정한 선호가 있다면, 혹은 걱정에 쌓여 있다면 그 바름을 얻지 못한다.” ‘마음’이 무엇인가에 미리 점유되어 있다면 사물을 인지할 수 없음은 물론, 거기 적절히 반응할 수 없다. 다시 『대학』은 말한다. “마음이 (다른 것에 점유되어) ‘현재’를 놓치면,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고, 음식을 먹어도 무슨 맛인지 모른다(心不在焉, 視而不見, 聽而不聞, 食而不知其味).”
역시 마음은 “완전히 비워야(心不可有一事)”하는 물건이다. 그런데 그게 어디 쉬운가. 마음속의 찌끼 가운데 율곡이 가장 경계하는 것이 있다. 4) 바로 ‘뜬 생각(浮念)’이다. 머릿속을 오가는 수많은 벌떼 같은 상념들. 율곡은 차라리 ‘악념(惡念)’은 다루기 쉽다고 말한다. 도덕적 갈등이 자각을 불러 일으키고 제어의 브레이크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뜬 생각들은 선도 악도 아닌 모호한 성격으로 하여 실제로는 도(道)에 가장 위협적이라고 했다. 이들 “부념은 별 일이 없을 때, 문득 일어나고 사라져서 ‘자유’를 얻지 못하게 한다.(惟)” “비록 착한 생각이라도 적절한 때가 아닌 것은 부념(或雖善念, 而非其時者, 則此是浮念也)”이다.
3. 뜬 생각을 다스리는 법
율곡은 이 생각을 그러나 ‘눌러 다스리려’ 해서는 안 된다고 천만 경계한다. 이 점에서 지눌이 『수심결(修心訣)』에서 준 처방과 다르지 않다. “부념이 일어날 때 이를 혐오하면 더욱 더 분란이 일어납니다. 혐오하는 이 마음이 또한 부념임을 잊지 마십시오. 부념임을 ‘캐치’한 후에는 그것이 가볍게 물러가도록 두십시오. 단지 마음의 각성을 일으켜, 부념에 휘둘리지 않으면, 일어났던 마음이 곧 그칠 것입니다. (다만 절대로 여기 끌려다녀서는 안됩니다.) 이런 노력을 날마다 쉬지 않고 하시되, 하루아침에 효과를 볼 생각을 마시고, 작파해서도 안됩니다.
기량이 자리 잡히기까지는 답답하고 한심한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다시금 정신을 가다듬고, 마음바탕을 청소하여, 마음속에 ‘한 생각’도 없게 해서, 청화한 기상을 유지하시기 바랍니다. 구구순숙(久久純熟), 오랜 훈련이 중심을 잡으면 이 마음이 우뚝 튼튼히 서 있는 것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때 더 이상 사물에 휘둘리지 않고 ‘자신에 속한 것이 자신의 뜻대로’ 발휘되고, 내 속 본체(本體)의 밝음이 가려지지 않고 빛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지식의 밝은 렌즈에 사물의 실제가 어김없이 드러날 것입니다. (久久純熟, 至於凝定, 則常覺此心卓然有立, 不爲事物所牽累, 由我所使, 無不如志, 而本體之明, 無所掩蔽, 睿智所照, 權度不差矣)”
- 중앙선데이 | 제191호 | 한형조 교수 | 교과서 밖 조선 유학 : 성학집요 <19> | 2010.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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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학집요 <20> 몸가짐을 단속하는 ‘검신 (檢身)’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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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모습과 행동만 꾸미는 자들은 모두 도둑과 같다” |
성학집요 <20> 몸가짐을 단속하는 검신(檢身)
안을 다스린 뒤에는 밖을 점검해야 한다. 그래서 정심(正心) 이후 몸가짐 단속(檢身)이 있게 됐다. 율곡은 말한다. “이 둘은 실상은 하나입니다. 오늘은 마음을, 내일은 몸을 다잡는 것이 아닙니다.” 결국 효과는 이어져 있되 공부, 즉 훈련의 영역은 아무래도 안팎이 구분된다는 뜻이겠다.
1. 왜 몸인가
율곡은 “왜 몸인가”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몸’은 경건히 아껴야 할 물건이다. 누가 준 것이관대? 유교는 이 몸이 자연의 분지이면서 오랜 조상으로부터 이어진 기(氣)의 연속체라고 생각한다. 몸을 함부로 하면 “어버이를 다치게 하는 것이고, 그 근본을 상하게 하는 것이다. 근본이 상하면, 당연히 가지며 잎이 망한다.” 그럼, 이 몸을 어떻게 건사해야 하는가. 관건은 바깥의 소리와 색에 휘둘리지 않는 데 있다. “마음이 화락하지 않으면 비루한 정념이 끼어들고, 행동이 의젓하지 않으면 태만한 기운이 스며들 것이다.” 그 ‘주의경보’하에서 반응과 행동은 적절한 법도를 유지하며, 이때 몸은 ‘본래’ 주어진 역할을 자연스레 하게 될 것이다. 요컨대 몸을 통해 인간의 가능성이 발휘되고, 소명은 완성된다. 율곡은 말한다. “이 훈련의 목표는 용모(容貌), 시청(視聽), 언어(言語), 위의(威儀)가 천칙(天則)을 따르도록 하는 것, 그것 하나다.”
2. 몇 가지 지침들
『논어』는 세 가지 몸의 ‘표현’을 강조하고 있다. 1) 몸의 자세(動容貌)는 거칠거나 오만하지 않도록 하고 2) 얼굴빛(正<984F>色)은 신뢰와 친밀감을 얻도록 하며 3) 말하는 투(出辭氣) 또한 천박하고 꼬여 있어서는 안 된다. 이 원칙하에서 유교 전통은 ‘몸’의 자세와 움직임에 대한 세세한 행동지침을 갖고 있다. 그를 예의(禮義)라고 한다. 율곡이 인용한 사례는 의외로 소략하다. 몇 가지 적어 본다.
-“앉을 때는 시동(尸童)처럼, 설 때는 제사에 참여한 것처럼 해야 한다.” 시동은 옛적 조상을 제사 지낼 때 돌아가신 분을 대신해 앉혀 둔 어린아이다. 근엄하고 엄숙한 자세를 주문했다. -시선 처리도 빠지지 않았다. “머리 위로 쳐들면 거만하고, 허리띠 아래로 내려가면 근심에 빠져 있다. 삐딱한 시선은 엉뚱한, 사악한 생각을 품고 있는 증거다.” -공자는 “음식도 똑바로 썬 것이 아니면 먹지 않았고, 자리가 바르지 않으면 앉지 않았다(割不正不食, 席不正不坐)”고 한다. 이 말에 여인네들의 부엌 고생이 심해졌다고 한탄하는데, 그렇지 않고 아무 데나 앉고 무엇이든 먹어대는 인간의 탐욕을 경계한 말이라고 알아주셔야 한다.
자세와 행동을 바로잡기 위해 선비들은 옥(玉)을 차고 다녔다. 움직일 때마다 그 소리들이 나태와 오버에 빠지지 않도록 경각심을 일깨운 것이다. 16세기 지리산 천왕봉 아래의 선비 남명 조식은 아예 작은 칼을 차고 다녔다. 옥보다 더한 결연한 의지를 읽을 수 있다. “내 속에 먼지와 때가 낀다면 칼로 배를 갈라 씻어 내리라”고 읊던 사람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오만 혹은 도덕적 자의식을 경계했다. 선비들의 치명적 약점 가운데 하나가 이것이다. 도덕적 이상이 높거나 종교적 열정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시속(時俗)을 우습게 보고, 남을 인정치 않는 경향이 있다. 군주는 자신의 권력으로 하여 더욱 그런 폐단에 빠지기 쉽다. 율곡은 『서경』의 한 구절을 인용했다. “덕(德)이 그득한 군주는 남을 업신여기지 않습니다. 군자 선비들을 우습게 여기면 그들이 마음을 다해 도와주지 않을 것이며, 평민들을 업신여기면 힘을 다해 헌신하지 않을 것입니다.”
3. 예의(禮義), 쉽고 평탄한 길
이 노력들을 정말 열심히 해 나가야 한다. “밤이나 낮이나 부지런히 노력해야 합니다. 작은 행동거지를 놓치지 않아야 하는데, 소홀히 하다가는 큰 덕에 누가 될 수 있습니다. 아홉 길을 쌓았다고 하더라도 공은 한 삼태기로 무너질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 범절 절도가 어렵고 힘들다고 생각한다. 유교는 여기 생각이 다르다. “그것은 편안하고, 쾌적한(?) 길이다(人有禮則安, 無禮則危).” 누가 예를 열심히 닦고 있는 노인을 위로했다. “평생을 그러고 사셨으니, 얼마나 힘드셨겠습니까.” 대답이 이랬다. “나는 날마다 편안한 길을 걸어왔는데, 무슨 수고며 괴로움이 있겠소. 다른 사람들이 위태로운 길을 날마다 걸었으니, 수고로웠겠지.”
율곡은 ‘몸’의 단속을 우습게 여기는 두 부류의 사람들을 경계했다. 1) 겉모습(威儀)과 행동만 그럴듯하게 꾸미는 자들. 이들은 ‘도둑’이나 마찬가지라고 질타했다. 2) ‘본시 욕심이 없고 소탈해서’ 법 없이도 살 사람인데, 이들은 마음만 바르면 되지 구구히 행동이나 처신에 신경 쓰지 않는 부류다. 율곡은 이들 ‘마을의 호인(俗中好人)’들도 도(道)에 들어서기는 어렵다고 했다. 왜냐. ‘인간으로서, 사회인으로서’ 해야 할 일이 아직 무겁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렇게 ‘외면’을 무시하다가는 그나마 지키고 있던, ‘방탕에 흐르지 않던 자산’마저 흩트리고 까먹기 쉽다는 것이다. 율곡은 여기서 위트 하나를 잊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잠깐, 이들의 착각 혹은 오해 또한 ‘마음이 바르지 않은 탓’이니 결국 모든 것이 마음에 달려 있는 셈이네.”
- 중앙선데이 | 제194호 | 한형조 교수 | 교과서 밖 조선 유학 : 성학집요 <20> | 2010.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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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학집요 <21> ‘회덕량’, 더러운 강물 받아들이는 큰 바다의 포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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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자잘하면 온갖 것이 병, 마음이 커야 두루 통한다” |
성학집요 <21> 회덕량(懷德量), 더러운 강물을 받아들이는 큰 바다의 포용
수기(修己)의 아홉 조목이 끝났다. 율곡은 아직 할 이야기가 남아 있다. 리더십의 핵심이 ‘국량(局量 · 남의 잘못을 이해하고 감싸 주며 일을 능히 처리하는 힘)’이라고 생각해서 ‘덕량 넓히기(懷德量)’의 챕터를 따로 세웠다. 현대어로는 ‘스케일’이나 ‘포용력’, 나아가 ‘비전’이나 ‘미션’에 해당하겠다.
1. 평정심
사람의 국량은 들쭉날쭉하다. 되나 말들이 국량이 있고, 가마니 크기의 국량이 있는가 하면, 더 크게 강하(江河)의 국량에서 천하(天下)의 국량까지 있다. 위(魏)나라의 등애(鄧艾·?~264)는 칠십 원로의 나이, 삼공의 지위에도 평정을 유지했다. 그런데 촉을 멸망시키는 데 공적을 세우고는 마음이 ‘움직이는 바’가 있었다. 동진(東晋)의 사안(謝安·320~385)은 바둑을 두고 있었는데, 조카가 (전진왕) 부견을 깼다는 소식을 듣고도 기쁜 빛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렇지만 집에 돌아가는 길에, 신발 굽을 부러뜨렸다 한다. 역시 ‘마음’이 흔들리지 않기란 쉽지 않다. 왜 하필 왈, 국량인가. 횡거는 말한다. “마음이 크면 백물(百物)이 두루 통하고, 마음이 자잘하면 온갖 것이 다 병이다 (張子曰, 心大則百物皆通, 心小則百物皆病).” 율곡은 말한다. “협량한 자는 포용하지 못한다. 모든 병통은 마음의 협애함으로 부터 온다 (量狹者, 不能容物, 從狹隘上, 生萬般病痛).” 그러므로 ‘두터운 포용력, 자연스럽고 광대한 기상(渾厚包涵從容廣大之氣象)’을 길러야 한다.
2. 겸양
국량을 넓히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관건은 자의식을 내려놓는 것. 『예기』에서 공자는 말한다. “공적은 다른 사람에게 돌리고, 잘못은 자신이 받는다(善則稱人, 過則稱己).” “군자는 자신의 유능함으로 타인을 깎아내리지 않고, 타인의 무능을 부끄럽게 만들지 않는다.” 이처럼 겸양은 자신의 장점을 자랑하거나 우쭐하지 않는 것이다. 다음 『상서』의 말은 어딘지 『노자』의 공성신퇴(功成身退)를 닮았다. “선(善)을 소유하려 들면, 결국 읽고 만다. 유능함을 자랑하면 그 공적을 말아먹을 것이다(有其善, 喪厥善, 矜其能, 喪厥功).”
논쟁에서 자기주장을 우기는 것도 협소한 국량의 결과다. 식견이 아직 얕아 그렇다. 잘난 척 말고(不矜), 자랑하지 말랬더니(不伐), 겸양을 가장하는 사람이 생겼다. “술에 취하면 더욱 삼가고 조심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 또한 마음이 ‘움직인’ 것이다. 물론, 취해 소리 지르거나 주사를 부리는 사람보다야 낫겠지만…. 또 지위가 높아지면 더욱 몸을 낮추는 사람이 있다. 권력에 취해 함부로 교격(矯激)해지는 사람보다야 낫겠지만, 그 역시 억지라 귀한 것이 못 된다.”
3. 관용과 포용
국량은 어려움과 난관을 참고 인내하는 힘이다. “받아들이라. 참아야, 일을 성취할 수 있다.” 공자는 말한다. “작은 것을 참지 못하면 큰 플랜을 그르친다 (孔子曰, 小不忍, 亂大謀, 必有所忍, 而後能有所濟).” 국량은 또한 포용력이고, 밖으로 타인에 대한 관용의 힘이다. “다른 사람의 완고함에 분통하지 마라. 또한 완전한 인격과 능력을 갖추라고 윽박지르지도 말고(無忿疾于頑, 無求備于一夫).” 포용과 관용은 ‘빛’이 아니라 ‘흐릿함(晦)’의 덕성이다. 언제나 ‘밝음(明)’을 말하던 유교는 여기서 정반대의 덕성을 충고하고 있다. 『주역』은 여명의 괘(明夷)에서 말한다. “군자가 백성을 대함에, ‘어둠’을 씀으로써 오히려 밝아진다.”
유교의 주문은 노장의 목소리와 다르지 않다. 정자는 부연한다. “지나치게 살피고 따지면 포용과 화해를 다친다. 사람들의 의심은 커지고 불안이 자랄 것이다 (若自任其明, 無所不察, 則無寬厚含容之德, 適所以爲不明也).” 도덕을 강요하고 책임을 촉구하는 하늘(天)의 덕성 못지않게, 무한히 베풀고 포용하는 ‘대지(地)의 덕’이 필요하다. 『주역』은 말한다. “땅의 형세가 어머니(坤)이다. 군자는 이를 닮아 두터운 덕으로 사물을 싣는다(易曰, 地勢坤, 君子以, 厚德載物).” 그 덕은 “사물에 생명을 주고 번성시킨다(含弘光大, 品物咸亨).”
4. 학문이 국량을 넓힌다
율곡은 ‘작은 국량’의 병폐를 이렇게 경계했다. “국량이 작은 자들에게는 세 가지 병통이 있습니다. 하나는 ‘편협(偏曲)’, 둘은 ‘자만(自矜)’, 셋은 ‘호전(好勝)’입니다. 편협한 자는 자기 관심에 갇혀 공적 마인드로 사태를 바라보지 못하고, 자만은 작은 성취에 만족하여 더 큰 덕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합니다. 호전의 비대한 에고는 잘못을 꾸미고, 자신을 비워 다른 사람을 쫓지 못하게 막습니다.” 이 세 병통은 결국 ‘사적 에고(私)’로 집약된다. 한 뿌리에서 나온 세 아들인 셈이다.
그럼, 이 사적 에고를 어떻게 다스려 나갈 것인가. ‘학문(學)’이다. “학문이 진전되면 덕량도 확대됩니다. 타고난 자질의 미오(美惡)는 상관없습니다(治私之術, 惟學而已, 學進則量進, 天資之美惡, 非所論也).” 그 노력의 끝에 사적 에고가 완전히 탈각하면, “요순처럼 천하를 얻고도 자기 것인 줄 모르고, 문왕처럼 도를 성취하고도 아직 길이 멀었다고 생각하기”에 이른다는 것.
율곡은 선조에게 제발 ‘덕량’을 넓혀주기를 간절히 염원했다. 나라의 안녕과 번영이 거기 달려 있다는 것. 탕평(蕩平)의 위대한 공정성도 사적 호오(好惡)를 넘어서는 이 바탕 위에서 자랄 것이었다. 니체의 말이 생각난다. “인간은 더러운 강물이다. 스스로 더럽혀지지 않으려면, 그는 바다가 되어야 한다.”
- 중앙선데이 | 제196호 | 한형조 교수 | 교과서 밖 조선 유학 : 성학집요 <21> | 2010.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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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학집요 <22> ‘보덕(輔德)’ - 리더가 '학습' 을 통해 성장하려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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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주가 자존심 접고 귀를 열 때, 위대한 통치가 시작된다 |
성학집요 <22> 보덕 (輔德)
포용력과 비전의 기초 위에 율곡은 리더의 ‘학습’을 주문했다. 그래서 ‘회덕량’ 다음에 ‘보덕(輔德)’장을 세웠다. 열린 학습은 세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1)좋은 친구와 조력자, 스승이 필요하겠지. 그리고 2)권력과 자존심을 내려놓는 ‘비움(無我)’의 겸허, 3)그 ‘가르침’을 통한 성장, 혹은 구체적 자기 변화가 그것이다.
1. 군주를 둘러싼 삼엄한 경고장치
정치의 관건은 군주의 인품과 자질이다(天下之治亂, 繫乎人君之仁與不仁耳). 그리고 그 리더십은 “아직 미성숙이고, 학습과 교정의 대상(人君之心, 惟在所養)”이다. 이 자각하에 옛적 현명한 군주들은 주변에 ‘덕의 조언자’들을 삼엄하게 배치해 두었다고 한다. 가령 “무당(巫)은 귀신의 경고를 일깨우고, 사관(史)은 옛적의 경험을 들려주며, 예언가(卜)는 점괘에 나타난 길흉으로, 눈먼 악사들은 시를 읊고 노래를 부르며 제왕을 경계했다”는 것이다. “수레에 올라타면 여분(旅賁)의 칼과 창이, 관청에는 법전이, 지팡이와 목욕탕에는 경고 문구가 새겨져 있고, 침소에는 시종 들이 읊는 잠언이 들려왔으며, 일을 처리할 때는 눈먼 사관들의 도(道)가, 그리고 연회에서조차 바른 정치를 위한 노래를 불렀다”는 것. 이 전통이 사라지면서 정치는 문란해졌다. 이 회고는 퇴계의 『성학십도』 서문에도 자세히 언급되어 있다.
2. 좋은 친구들을 가까이
그럼, 무엇부터 해야 할까. 주변 ‘환경’부터 정비해야 한다. 내시 환관들, 그리고 궁중의 여인네들과는 거리를 둘 것. 그래야 일상과 측근에 매몰되지 않는다. 율곡은 말한다. “현명한 사대부들과 친하는 시간이 많고, 부시(婦侍) 궁녀들과 만나는 시간이 적어야 자연히 기질(氣質)이 변화되고, 덕기 (德器)가 성취됩니다.” 그렇지만 군주 또한 사람인지라 “현명한 자들을 부담스러워한다(賢人易疎, 小人易親).” 하여 군주의 뜻에 맞고 순종적인 부류들이 주변에 번성한다. 그 아부와 친압(親狎)에 취해 군주는 “내가 이미 성군(自聖)!”이라는 함정에 빠진다. 역사의 교훈은 미숙한 식견에 앞뒤 없는 결정이 ‘권력’의 이름으로 행사될 때 나라가 흔들린다는 것을 되풀이해 보여준다.
3. 유학은 독단 아닌 공론의 정치 추구
율곡은 『주역』의 경계를 인용해 놓았다. “과감한 결정, 비록 올바르다 하더라도 위태롭다).” 옛날의 성인은 그렇지 않았으니, “권위에, 통찰력, 그리고 결단력을 갖추더라도, 그리고 사세가 전권을 주더라도, 그는 천하의 의논을 다 거친 다음에 결행했다” 는 것. 유학은 독단이 아닌 공론(公論)의 정치를 추구했다. 그렇지만 낯선 지식은 군주의 열등감을 유발하며, 자신을 향한 충고와 비판은 더욱 견디기 어렵다. 이 심리적 장벽을 넘어설 수 있을까. 무릇 “약이 눈을 아찔하게 하지 않으면 병이 낫지 않는 법.”이다. 군주가 자존심을 접고 귀를 열 때 위대한 통치가 시작된다. 틀림없다.
개인의 성숙을 위해서나 정치적 리더십을 위해 필요한 이 덕성은 ‘자기를 비워야’ 비로소 열릴 터다. 율곡은『주역』의 함괘(咸卦)를 인용했다. “산 위에 연못이 있다. 교감(咸)의 상이다. 군자는 비움으로써 다른 이를 수용한다(山上有澤, 咸, 君子以虛受人).” 이렇게 ‘귀가 순해지면(耳順)’, 말을 뒤집어 듣게 된다. “어떤 말이 혹 ‘거슬린다면’, 혹 그것이 도(道)일지 모른다고 살피고, 반대로 ‘흡족하다면’ 아차 싶어 그 도 아님(非道)을 의심해 보아야 한다.” 이 점에서 유교나 불교의 지혜가 한 치도 다르지 않다. 정자는 자신의 『역전 (易傳)』에서 이렇게 말했다. “‘마음을 비운다, 이는 곧 무아(無我)를 말한다.”
4. 허물 있어도 고치지 않는게 진짜 허물
아직 갈 길이 더 남았다. 겸허와 수용만으로는 아직 완전하지 않으니 1) 비판과 충고는 자기 변화로 이어져야 하고, 2) 타인으로부터 배운 새 지식은 과감한 적용으로 나아가야 한다! 1) 공자는 말한다. “허물이 있으면서, 고치지 않는 것, 이것이 진짜 허물이다.” 실수는 용납된다. 죄도 한 번은 괜찮다. “잘못이 너무 멀리 나가지 않고, 결국 돌아오는 것(不遠復), 그리하여 막바지 후회에 이르지 않도록 하는 것이 길하다.”
문제는 사람들이 고치기보다 ‘변명’이나 ‘덮기’에 급급해한다는 것. 공자의 괄괄한 제자 자로(子路)는 “남들이 자기 잘못을 알려주면 고맙다고 기뻐했다”고 한다. 공자가 인정한 유일한 제자 안연(顔淵)은 “불선(不善)이 있으면 그것을 하나도 놓치지 않았고, 그것을 다시는 반복하지 않았다”고 한다. 여기 포인트는 “다시 행하지 않았다”가 아니라, “남김 없이 알았다”에 있다. 알려진다면 다시 반복될 가능성이 작지 않겠는가. 그래서 간단(間斷) 없는 자기-주시(敬)가 수양의 핵심으로 자리 잡았다. 불교의 어법에 의하면 “알고 저지르는 죄가 더 무거우니, 왜냐. 뜨거운 쇠 젓가락을 모르고 쥘 때가 더 많이 델 것이기 때문에….”
2)율곡은 현자들을 ‘장식용으로’ 부르고 그 ‘지혜’를 사장시키는 군주의 태만을 더욱 높이 질타했다. “현자를 등용한다는 이름만 취하고, 그들을 좌우에 두되, 간언이 있어도 따르지 않고, 잘못을 지적당해도 고치지 않는다면, 현자들이 허례(虛禮)에 붙잡혀 자신의 지키는 바 절조를 잃으려 하겠습니까. 기회를 보아 물러나서 고반(考槃), 은자의 삶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그럼, 주변에 남는 사람은 총애받고 아부하는 인물들뿐일 것이니, 이러고도 나라가 위망(危亡)에 빠지지 않은 경우는 없었습니다.”
- 중앙선데이 | 제200호 | 한형조 교수 | 성학집요 <22> | 2011.0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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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학집요 <23> ‘돈독 (敦篤)’ - 짐은 무겁고 길은 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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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하지 마라, 날마다 걷다 보면 도착해 있을 테니” |
성학집요 <23> 돈독(敦篤), 짐은 무겁고 길은 멀다
이로써 수기(修己)의 조목은 다 설파됐다. 이 지침을 따라가면 ‘인간의 삶’이 완성될 것이다. 그렇지만 스피노자가 『에티카』에서 적고 있듯, “무릇 위대한 것은 성취하기 어렵다.” 율곡은 중도에 그만 주저앉을 사람들이 걱정돼 돈독(敦篤)장을 덧붙였다. “『시경』이 말했지. 시작은 다들 거창하나 끝을 보는 사람은 드물다 (詩曰, 靡不有初, 鮮克有終)”고.
仁은 인간의 책무를 향한 도정
『논어』는 말한다. “짐은 무겁고 갈 길은 멀다. 인(仁)을 어깨에 매었으니 무겁지 않을 쏘냐, 죽은 이후에야 내려놓을 것이니 먼 길이 아닌가 (任重而道遠. 仁以爲己任, 不亦重乎. 死而後已, 不亦遠乎).” 이를 감당하자면 “선비는 담대(弘)하고 강인해야(毅) 한다.” 대체 인(仁)이 무엇일까. 사람들은 이 물음에 아득해진다. 그 안에 고립과 소외, 이기를 넘어 ‘더불어’의 유대와 배려가 있다. 그 공감의 기초 위에서 사회적 정의, 정치적 질서가 구축될 것이다. 이 모든 일은 크게 ‘자연’이 시킨 일이며, 인(仁)의 책무는 우주적 힘의 공능에 동참하는 것이다. 『주역』은 말한다. “하늘의 운행은 꿋꿋하다. 군자 또한 스스로의 강함으로 쉬지 않고 노력한다(天行健, 君子以, 自强不息).”
군자(君子)는 이 순례의 길 위에 선 자다. 그는 “낮에는 수고롭게 일을 하고 저녁에는 삼가고 반성한다 (君子終日乾乾, 夕若, 無咎).” “위대한 선왕께서는 어둑할 때 일어나 환한 마음으로 앉아 새벽을 기다렸다.” 흡사 거울을 닦고 옷의 먼지를 털 듯 마음, 그 ‘신의 거소(神明之舍)’에 쌓이는 더러운 찌끼를 날마다 씻고 정화해야 한다.
이 ‘날마다의 새로움(日新)’으로 덕(德)이 유지되고, 인(仁)이 숙성된다. 그때 정신의 빛은 밝게 사물을 비추고, 몸은 본래 갖춘 힘으로 사태에 부응할 것이다. 공자는 말한다. “군자는 밥 한 그릇의 시간에도 인(仁)을 어겨서는 안 된다. 급박한 사세를 당해도, 그리고 좌절과 절망의 시간에도 이 가치를 지켜야 한다 (子曰. 君子無終食之間違仁, 造次必於是, 顚沛必於是).” 이 노력이 깊어질 때 그의 삶이 곧 모범이고 교훈이 된다. 북송대 주자의 선배 장재는 그 성장과 감화를 이렇게 간명하게 정리했다. “말은 가르침이 되고, 행동은 곧 표준이 된다. 낮에는 적극적 성취를, 밤에는 통찰을 얻는다. 호흡의 순간에도 성장하며, 눈 깜빡이는 시간에도 자신의 본성과 대면한다 (言有敎, 動有法, 晝有爲, 宵有得, 息有養, 瞬有存).”
태만한 자, 주저앉는 자들에게 그러나 이 자강불식(自强不息)이 쉽겠는가. 대체로는 ‘믿음’이 없어 걸음조차 떼지 않으려 한다. 제자 재여가 낮잠에 배꼽을 내놓고 코를 골았던 모양이다. 공자는 이렇게 혀를 찼다. “쯧, 썩은 나무는 글자를 새기지 못하고, 문드러지는 흙으로는 벽을 바를 수 없다. 내가 널 나무란들 무엇 하리(宰予晝寢, 子曰. 朽木, 不可雕也, 糞土之墻, 不可<6747>也, 於予與, 何誅).” 재여는 인간의 길에 대한 공자의 기획에 별 관심이 없었나 보다.
길을 나서더라도, 우리는 그 힘들고 먼 도정에 그만 주저앉고 말기 십상이다. 공자는 말한다. “싹이 나고도 꽃이 피지 않은 것도 있고, 꽃이 피고도 열매를 맺지 못한 것도 있다 (子曰. 苗而不秀者有矣夫, 秀而不實者有矣夫).” 맹자는 “제대로 여물지 못한 곡식은 피나 가라지만도 못하다 (孟子曰. 五穀者, 種之美者也, 苟爲不熟, 不如荑稗. 夫仁亦在乎熟之而已矣)”고 안타까워했다. 역시 인(仁)의 관건은 숙성(熟)에 있다. 정신의 밭은 경작되어야 한다! 그것은 팽개쳐 버려두어서도 안 되는 데, 그렇다고 송나라의 어리석은 농부처럼, “조장(助長)이라, 억지로 싹을 뽑아 올려서도 안 된다.”
두 번째 위험에 대해 율곡은 이렇게 충고한다. “공자는 선난후획(先難後獲)이라고 했습니다. 노력이 있으면 당연히 효과가 나타나는 법인데, 그것을 미리 기대하다니요. 지금 학인들의 병폐는 선획(先獲), 즉 미리 결과에 안달하는 데 있습니다. 기대만 잔뜩 할 뿐, 실지 노력은 아니 하기에, 착수도 하기 전에 싫증(厭倦)이 납니다. 이것이 학자들의 통폐입니다.”
먼길은 한걸음에 닿을 수 없고, 높은 고지를 한 달음에 뛰어올라갈 수 없다. “길을 따라 면면히 걷다 보면, 날마다 걷고 올라 물러서지 않는다면” 어느새 그곳에 도달해 있는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 요컨대 ‘기대(期待)’는 금물이다. 불교 또한 ‘희망(希望)’을 내려놓으라고 충고하지 않던가.
‘인문’ 의 도정 방해하는 세 가지 습관
율곡은 이어 ‘인문’의 도정을 방해하는 세 가지 심리적 습관을 열거했다. (1)감각적 즐거움(聲色), (2)물질과 탐욕(貨利), (3)편견과 편향(偏私)이 그것이다. 이들을 대적하여 뿌리를 뽑기는 쉽지 않다. 그렇지만 가야 할 길이다. 율곡은 격려 또한 잊지 않는다. “이 폐단을 향해 용감하게 후퇴 없이, 간난신고로 헤쳐나갈 때”, 그때 다음과 같은 ‘지식’의 변화가 찾아오고, 삶이 바뀌는 소리를 듣는다.
“처음에는 험난하던 것이 차츰 길이 뚫리고, 처음에는 뒤엉켜 있던 것이 점차 가닥을 잡고 정리됩니다. 처음 난삽하던 것들도 점차 시원히 이해가 됩니다. 그리고 처음에는 덤덤한 것들이 점차 맛이 깊어지고 의미가 살아납니다.” 이 넷은 실제로 ‘학문’을 걸은 사람의 체험담이 틀림없다. 그의 마지막 말은 놀랍다. “이렇게 공부가 즐거워지면 온 천하의 물건 가운데 이보다 더 즐거운 것이 없게 됩니다. 외부의 것에 연연해 여기에 소홀 태만할 겨를이 없습니다. 이것이 안자(顔子)가 말한, ‘그만 둘려도 그럴 수 없었다’는 것의 실체입니다.”
- 중앙선데이 | 제202호 | 한형조 교수 | 교과서 밖 조선 유학 : 성학집요 <23> | 2011.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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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인의 경지 찬탄하며 왜 그 길을 따라나서지 않나” |
성학집요 <24> - 수기공효(修己功效)
아직 수기(修己)편은 끝나지 않았다. 대체 이 남다른 수련의 진행 ‘과정’과 그를 통해 얻어질 ‘효과’는 무엇일까. ‘수기공효(修己功效)’는 이 궁금증에 대한 응답이다. 유학은 그런 점에서 ‘실용주의적’ 전망 위에 서 있다.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거기에 이르도록 ‘도와주지’ 않는다면 그것은 진정한 삶의 기술, 즉 지혜라 할 수 없다.
지식이 행동을 부르고, 행동이 지식을 심화시킨다
“어디로 가야 하나?” 만해의 말대로 우리는 해 진 저녁 갈 길을 잃고 헤매는 어린 양들인지 모른다. 유학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묻기 전에 “우리는 누구인가”부터 묻는다. 『대학』은 이렇게 읊고 있다. “갈 곳을 안 이후에 정향이 있다. 정향이 있은 이후에 정신의 고요가 있고, 외부의 유혹에 흔들리지 않아야 정신이 안정을 얻는다. 정신의 안정이 있어야 비로소 건전한 ‘생각’이 가능하고, 이윽고 ‘얻는 바’가 있을 것이다.” 율곡이 금강산을 내려와 퇴계에게 던진 첫 번째 질문이 이것이었다. 그는 길을 찾고 있었던 것이다.
방향이 서야 걸음을 떼놓을 수 있지만, 이 ‘지식’은 내딛는 걸음으로 하여 뚜렷해지고 강화된다. 맹자는 말했다. “스스로 돌이켜보아 부끄러움이 없을 때, 그보다 큰 즐거움은 없다.” 이 즐거움은 다양한 관계와 일에 표출된다. 그 도정의 어느 순간, 이 삶이 궁극적으로 하나의 이(理)를 구현하고 있다는 자각에 이른다. 공자는 그 확신을 이렇게 읊었다. “증삼아, 내 도(道)는 하나로 꿰어 있다.” 이쯤에서 주자학은 불교에 대한 일침도 잊지 않는다. “일상적 구슬들을 하나하나 준비해 축적하지 않고, 실 한 줄만 들고 꿰겠다고 나서서는 곤란하지 않을까?”
내면의 정신은 밖으로 표출된다
내면의 빛과 힘은 곧 밖으로 표출된다. 그의 몸피는 편안해 보이고, 마음은 여유 있고 관대하다. 『대학』은 말한다. “부(富)는 집을 빛내고 덕(德)은 몸을 빛낸다. 그래서 군자는 반드시 자신의 내적 의지를 가다듬는다.” 맹자 또한 그 효과를 이렇게 찬탄했다. “인의예지(仁義禮智)는 내면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것이 밖으로 드러남에, 얼굴에는 광채를, 등줄기를 넉넉하게 하며, 나아가 온몸에 퍼진다. 몸은 말을 안 해도 모든 것을 알려준다.” 유학의 프로그램에서 안의 충실을 기하는 것을 악(樂), 밖의 충실을 기하는 범절을 예(禮)라고 부른다. 이 둘은 서로 연동돼 있고 상호 협력한다. 내면의 이상은 화해(和)이고, 외면의 이상은 튜닝(順)이다.
선한 사람은 안팎의 삶에서 모범
이처럼 ‘지식(知識)’은 삶과 더불어 있다. 평면적 지식은 없다. 정보로서의 지식을 어디 쓸 것인가. ‘지식’은 삶을 이해하는 깨달음이자 그 변화를 이끄는 가이드다. 이 용어의 저작권을 갖고 있는 주자학의 기본 의미와 용법이 그러했다. ‘지식’이 어떻게 ‘체화’되고 깊이를 더해가는지에 대해 맹자는 다음과 같은 보고를 하고 있다.
1) ‘선한 사람(善人)’은 안팎의 삶에서 모범을 보인다. 2) 그러나 아직 멀었다. “혹 그 타고난 자질이 아름답거나, 혹은 그것을 연모하는 마음이 일더라도 아직 진정한 지식과 실천은 아니다. 실제 ‘점유’는 오랜 노력을 통해 비로소 얻어진다. 한 치의 허위도 없어야 비로소 ‘진정 그렇다(信)’는 경지에 이를 것이다.” 3) 이 ‘책임(信)’의 노력이 “더 깊고 단단히 유지될 때” 그는 ‘아름다운 사람(美人)’이 된다. 그의 ‘체화’는 깊이와 충실을 얻는다. “마음의 은미한 곡절, 섬세한 사이에도 맑고 순수함이 흘러 불선의 잡티가 섞이지 않는다.” 4) 이 아름다움은 온몸에 아우라를, 그리하여 사업과 일에 전방위로 발휘된다. 이로써 그는 ‘위대한 사람(大人)’이 된다. 5) 그의 덕업은 성대해지고 인(仁)은 더욱 성숙해진다.
이 자기 성숙은 급기야 타인을 감화시키고, ‘문명(文明)’을 일으키기에 이른다. 여기가 성스러움(聖)의 경지이고, 그 경지는 누구도 엿볼 수 없다는 뜻에서 ‘신비(神)’라고 부른다. ‘위대한 사람’까지는 인위적 노력이 남아 있으나 여기 ‘성스러운 신비(聖神)’의 경지에서는 “아무런 흔적도, 의도적 자의식도 남아 있지 않다.”
“공자는 위엄 있으되 사납지 않으셨다”
거기 자아는 소멸한다. 『논어』는 공자의 삶을 증거하고 있다. 즉 “공자께서는 네 가지가 끊겼다(子絶四). 의지(意)가 끊겼고, 고집(必)이 끊겼으며, 고착(固)이 끊겼고, 그리고 사적 자아(我)가 소멸했다.” 여기가 이르러야 할 곳이다. 이 점에서 유교의 성자는 다른 종교에서의 성자와 닮았다. 다르다면 그는 일상으로는 너무 평범하고, 무엇보다 사회적 공간을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의 삶은 하등 특별한 것이 없다. 율곡은 다음과 같은 공자의 덤덤한 모습을 적어놓았다. “공자께서는 따뜻하되 엄숙하셨고, 위엄이 있으되 사납지는 않으셨다. 공손한 태도를 지녔으되 너무나 편안하셨다.” 이로써 그는 자연이 예비해 준 “음양(陰陽)의 덕을, 중화(中和)의 기운”을 최적으로 발휘할 수 있게 되었다.
유학은 이처럼 ‘학문’을 통해 자연과 자유에 이르는 도정이다. 율곡은 이 순례의 실제 ‘답사’를 간곡히 종용했다. “사람들이 정명도의 자유(渾然天成)와 주자의 경지(海闊天高)를 찬탄하면서도, 그들의 발자국을 따라 길을 나서고 걸음을 디딜 생각을 하지 않는다. 울타리를 거쳐 그 깊이에 닿지 못하고, 그가 남긴 언사나 취해 구이(口耳)에 올리는 거리로 삼고 있을 뿐. 길이 목전에 있는데도 종내 ‘훌륭한 학자(善學者)’가 나지 않는 까닭이 여기 있다.”
- 중앙선데이 | 제204호 | 한형조 교수 | 교과서 밖 조선 유학 : 성학집요 <24> | 2011.0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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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퇴계 이황 退溪 李滉 (왼쪽)과 율곡 이이 栗谷 李珥 (오른쪽). 현실 정치를 가능한 떠나려 했던 퇴계와 타계할 때까지 정치 현장을 떠나지 않았던 율곡은 여러 모로 대비되는 삶을 살았다. |
한형조 교수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고전한학과 철학을 가르치고 있으며 『주희에서 정약용으로』『조선유학의 거장들』 등을 썼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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