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재밌는 대구 이야기 1 ♧
대구의 옛 지명은 '달구벌' 입니다.
여기서 '달구'란 '닭'의 경상도 방언으로서
예전 부족국가 시대에는
동물을 숭상하는 '토테미즘' 사상에 의해
옛 대구의 조상들께서는
'닭'을 숭상했으리라 추측됩니다.
신라의 김알지 왕이 닭의 알에서 태어난
탄생 설화처럼.
여기의 닭을 요즘의 식용닭으로
생각해서는 큰 오산입니다.
옛 우리 조상들이 숭상하는
전설 속의 동물 중에
'봉황' 이란 조류가 있습니다.
'봉'은 수컷을 '황'은 암컷을 이릅니다.
꼬리가 오색으로 길다랗게 늘어져 있고
벼슬이 왕관처럼 거만하게 서 있는 모습.
그 모습을 상상해야 할 것입니다.
다시한번
봉황의 나래를 기대합니다~~~^^
♡ 대구의 재밌는 이야기 2 ♡
경주의 옛 지명 서라벌이
어원의 변천과정을 거치면서
'서울'로 된 것은 모두 알고 계시지요. (서라벌>셔블>서울)
서울에 가면 서라벌고등학교가 있잖아요.
그런데 서기 689년, 신문왕 9년에
신라의 수도를 서라벌에서
대구로 천도하려고 했었습니다.
하지만 일부 진골세력의 반발에 부딪혀
무산되고 말았는데요.
[삼국사기]를 보면
'경주 서쪽에서 닭 우는 소리가 들려 그 곳에 가보니 금궤짝과 흰닭이 울고 있더라' 라고 적혀 있습니다.
금궤짝 안의 알에서
김알지 왕이 탄생했습니다.
정확한 사료는 없으나
그 서쪽이 요즘 대구와 경산일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그래서 대구의 옛 지명 '달구벌'이나
경산 지방의 옛 소국가인 '압독' '압량'이
모두 닭과 연관된 지명들입니다.
대구의 달성토성과
서라벌 경주의 월성토성이 거의 흡사합니다.
천마총에서 발견된 금관과
대구 비산동 제37호 고분군에서
발견된 금동관이 出자 모양으로
거의 흡사합니다.
옛날 원시국가를 거쳐 부족국가 시대에는
서라벌 보다도 달구벌이 더 큰
도시였을 것입니다.
그 증거 사료는 제 3편에서...~~~^^
♧ 대구의 재밌는 이야기 3 ♧
대구는 금호강과 그 지류인 신천으로 둘러싸여
기름진 들판을 중심으로
일찍부터 살기좋은 자연적 조건을 갖추고
구석기시대부터 문화의 꽃을 피웠습니다.
특히, 청동기시대의 유물인 지석묘(고인돌)와
고대 부족국가시대의 고분군이 많이 형성되어 있는데
이러한 사실은 옛날부터 존재한
이 지역의 상당히 큰 정치세력들과
생활상을 알려줍니다.
현존하는 전 세계 고인돌 6만 여기 중,
82.5%인 4만 9510기가
한반도에 치중해서 있고(대구는 숫자에서 제외)
대구에도 약 3,000여 기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의 정원석과
근대개발에 의해서 모두 사라지고
현재는 100여 기 정도만 남아 있을 뿐입니다.
모두 현존한다면
유네스코에 등재되어 있는
전남 고창과 화순지방 보다도 더욱 유명한
거석문화의 도시, 고인돌의 도시였을 것입니다.
또 구암동, 대명동(교대, 영남이공대), 비산동, 내당동,
두산동, 앞산정상, 불로동 등이
토착지배세력의 고분군 지역이거나
고분이 현존하고 있는 곳입니다.
이 고분군 역시
일제강점기부터 근대 개발사에서 거의 사라지고
불로동 지역에만 수백기가 있을 뿐입니다.
만약에, 일제의 수탈을 피하고
자연 친화적인 발전을 이루었다면
대구는
스톤헨지와 로마가 부럽지 않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공존하는
멋진 역사문화 도시가 되어 있지 않았을까요?~~~^^
♧ 대구의 재밌는 이야기 4 ♧
대구는 풍수지리학적으로
한반도를 호랑이에 비교했을 때
비슬산과 팔공산에 둘러싸여
움푹 들어간 아늑하고 따뜻한
자궁자리입니다.
그래서
옛날부터 인물이 많이 탄생 했었고
(대통령이 무려 다섯 분)
내란, 외환, 우환이 적었으며
6.25 때도 마지노선을 지켰고
이 나라가 위태로울 때 마다
국채보상운동이라든지 각종 학생운동,
IMF 때도 금 모으기 운동을
최초로 시작한 곳입니다.
또 미녀도 많은 도시죠.
물론,
한민족이 아플 때 마다 어루만져 주다보니
옛날부터 약령도시가 발달하였고
최근에는 세계적인 의료도시로서
각광받고 있지요.
이러한 특성은 옛날옛적부터
이 지역이 산과 물이 맑아
사람이 살기 좋은 터 였다는
명백한 증거입니다.
대한민국 근대에는
부패한 여당과 맞서는
대단한 진보도시였기에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된
2.28 학생운동이 시작된 곳입니다.
♡ 대구의 재밌는 이야기 5 ♡
대구 모노레일 3호선을 타다보면 건들바위(대구입암)역이 있습니다.
건들바위라는 이름의 유래는 잘 알 수 없으나
예로부터 그 모양이 갓 쓴 노인같다고 해서
삿갓바위라고도 불리었습니다.
200년 전에는 이 바위 앞으로
맑고 깊은 신천이 흘러
많은 시인들이 이곳에서 낚시를 하며
풍류를 즐겼던 경치 좋은 명소의 하나였으며,
서거정 선생이 노래한 대구 10경 중
입암조어의 장소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조선 정조 때 시가지 일대의 하천 범람을 막기 위하여 제방을 만들고 물줄기를 다른 곳으로 돌리면서
더이상 이곳으로 물이 흐르지 않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 바위는 조선시대는 말할 것도 없고
근대에 이르기까지 무당이나 점쟁이들이 몰려와 치성을 드렸는데,
특히 아기를 갖지 못하는 부인들이 치성을 드리러 많이 찾아왔다고 합니다.
현재는 바위 앞으로 도로가 설치되어 당시의 모습을 찾아 볼 수 없게 되었는데, 주변을 아름답게 꾸며 시민들에게 휴식의 공간을 제공하고, 특히 물이 흐르던 옛 모습을 재현해 두어 옛 정취를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도록 배려 하고 있습니다.
♧ 대구의 재밌는 이야기 6 ♧
청라언덕과 동무생각
대구 출신 작곡가 박태준선생이
마산 창신학교 교사 시절,
노산 이은상 선생과 교분을 쌓게 되었으며,
박태준 선생이 1911~1916년까지
계성학교에 다녔던
자신의 집(현 섬유회관 인근) 앞을 지나던
한 여고생을 잊지 못했던 짝사랑이
작곡의 동기가 됐다는 것이다.
동산은 그가 현재의 제일교회 옆
3·1운동 계단을 지나 등교하던 길이었다.
그 여학생은 한 송이 흰 백합 같은
절세의 미인이었지만
박태준 선생은 내성적인 성격 탓에
말 한마디 붙여보지 못했으며,
그녀는 졸업 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버렸다고 한다.
이은상 선생이 이 사연을 듣고
‘노랫말을 써 줄 테니 곡을 붙여보라’고
박태준 선생에게 권유함으로 탄생한 것이 ‘동무생각’이다.
'동무생각'에 등장하는 ‘청라언덕’은
푸를 청(靑), 담쟁이 라(蘿)를 쓰고 있는데,
이 ‘청라’가 지금도 푸른 담쟁이로 뒤덮은
동산병원 내 선교사 사택 일대의
언덕을 말한다고 한다.
‘동무생각’이 청년 박태준의 로맨스를 담고 있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후 그 여고생이 당시의 신명여자학교(현 신명고) 학생이냐, 대구공립여자보통학교(현 경북여고) 학생이냐 하는 논란도 한동안 호사가들의 입에 오르내리기도 하였으나 공교롭게도 경북여고 교화가 백합이었고, 경북여고 개교는 1926년인데 비해 신명여고 개교는 1907년으로 ‘동무생각’ 작곡 시기(1922년)보다 빠르기 때문에 신명여자학교가 맞다는 것이다.
또한 당시 박태준 선생의 집과
신명여자학교의 등굣길은 일치한다는 점도
이런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다.
또 ‘동무생각’ 3절에 나오는 가사
‘서리바람 부는 낙엽동산 속 꽃 진 연당에서…’의 연못은 동산에 물을 대주던 ‘선황당 못’이라는 것도 이번에 밝혀졌다. 이 연못은 1923년 서문시장 확장과 함께 메워졌다.
♧ 대구의 재밌는 이야기 7 ♧
#서문시장
조선시대 3대 시장은
평양시장, 강경시장, 서문시장입니다.
서문시장은 영남권 최대 전통시장으로서
옛이름인 '대구시장'은
원래 대구 북문 밖에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1923년 일제에 의해서
지금의 위치로 왔는데요.
본래 지금의 서문시장 자리에는
'천황당'이라는 못이 있었습니다.
비산동, 내당동에 있던
88개의 고분을 헐어서
그 흙으로 못을 매립하여
지금의 서문시장이 서게 된 것입니다.
이 천황당 못에는
처녀귀신의 전설이 전해 내려옵니다.
옛날, 천왕당못에는 선남선녀들이 즐겨 찾았고
봄 가을이면 근처의 여자들이 모여
놀이를 하곤 했었답니다.
그러던 어느날 어떤 처녀가
이곳의 남자에게 희롱을 당한 뒤
처녀는 비관하여 이 곳 '천황당 못'에 빠져 죽고 말았다고 합니다.
그 뒤 이 못은 매립되고 서문시장이 들어 섰는데
그때 죽은 처녀귀신이
자신의 한서린 죽음을 기억하기 위하여
서문시장에 자주 불을 일으킨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시장의 상인들은
잦은 화재가 처녀귀신의
억울한 한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원혼을 달래주는 굿을 올려 주기도 했습니다.
♡ 대구의 재밌는 이야기 8 ♡
#왕건과 관련된 대구의 지명유래1
신라 경애왕 때
당시 신라의 땅이던 팔공산에
후백제의 견훤이 쳐들어 옵니다.
당시 힘이 없던 신라의 경애왕은
고려 태조 왕건에게 도움을 청하게 되고
이에 왕건과 견훤은 팔공산 전투를 벌이게 됩니다.
하지만 왕건은 팔공산 전투에서
크게 패하게 되고
왕건과 외모와 체격이 비슷한
신숭겸 장군의 지략으로
장군이 대신 죽음을 맞이하면서
왕건은 무사히 동쪽으로 도망을 가게 됩니다.
팔공산전투에서 왕건의 군사가 크게 패하였다고하여
깨질 파破, 군사 군軍
'파군재'라는 지명이 유래 되었습니다.
당시 '공산'으로 불리던 팔공산도
왕건의 여덟 장수를 잃었다고 하여
'팔공산'으로 유래 되었다는 설도 있습니다.
파군재 삼거리에는
목 없는 시체로 돌아온 신숭겸 장군의
동상과 가묘가 보존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신숭겸 장군의 진짜 묘는
춘천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고려 태조 왕건이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자기의 명당 묘자리로 봐둔 춘천 땅에
목 없는 시체로 돌아온
신숭겸 장군을 기리기 위하여
황금으로 두상을 만들어서
이곳 묘자리를 하사하게 됩니다.
지금 춘천 신숭겸 장군의 묘는
황금두상의 도난을 우려해
가짜 봉분 두 개를 포함해서
총 세 개의 봉분을 갖추고 있으며
평산 신씨 후손들이 계속해서
관리해 오고 있습니다.
[출처] 재밌는 대구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