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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사(Histoire de la philosophie, 1926-1932)[3권 합본 1938]
브레이어(Emile Bréhier, 1876—1952)
제7권, 1850년후 19세기, 20세기,788-1021
첫째 시대 1850-1890 789 / 둘째 시대 1890-1930 889 (초고완 45SKD)
제7장 프레데릭 니체 - Frédéric Nietzsche 880-888
니체(Friedrich Nietzsche, 1844-1900)는 1864년에서 1869년 사이에 영혼: 그리스인들의 영혼 숭배와 불멸신앙(Psyche. Seleenkult und Unsterblichkeitsglaube der Griechen, 2권 1890–1894)을 쓸 로데(Erwin Rohde, 1845-1898)와 함께 본대학과 라이프찌히 대학에 다녔다. 그 당시에 그가 연구했던 문헌학은 그의 방법과 결과물들에 의해서 독일 문화의 본질적인 측면으로서 간주되었다. 그는 사물과 인간들에 대한 분명하고 직접적인 시각으로 쇼펜하우어(Schopenhauer, 1788-1860)의 작품에 대해 내밀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그의 이런 인식은 일찍이 쇼펜하우어를 싫어하게 되었다. “어떤 과학자는 철학자로 결코 변형될 수 없다. ... 용어들에게, 견해에게, 과거의 사정들에게, 책들에게 그 자신과 대상들 사이에 그것들 스스로를 자리 차지하게 허락하는 자, 보다 넓은 의미에서 역사를 위해 태어난 자, 그는 결코 첫째로서는 대상들을 결코 보지 못할 것이고, 그 자신 스스로 처음으로 보여진 대상이 결코 될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은 헤겔 철학에 속하는 것으로, 그는 이 철학을 “속물들의 문화”(culture des philistins)의 근원으로 취급한다. 니체가 보기에 슈트라우스(David Strauss, 1808-1874)가 그 대표적인 전형이다. 그리고 헤겔은 그 시대의 종말이 도달했다고 선언했다. 그런데 “일반인이란 뒤늦게 온 존재(un être trad-venu)라는 신념은 진실로 무력화시키고 또 언짢은 기분을 불러일으키기에 알맞다. 그러나 그러한 신념이 어떤 과감하게 전복에 의해서 지금까지 일어났던 모든 것의 의미와 목표를 신격화하기 시작했을 때, - 마치 박학다식하지만 그 신념의 비참함이 보편사의 실현에 동등한 가치가 있었던 것이나 한 듯이 - 그러면 그 신념은 무섭고 파괴적인 것으로 나타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그리스에 관해 성찰하도록 이른 것은 문헌학적 연구들에서 이이다. 그리스에서 그는 “반역사적 문화의 실재성을 발견한다. 반문화적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 이유 때문에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풍부하고 풍요로운 문화의 실재성을 발견한다”(214쪽). 쇼펜하우어의 철학에 의해 이 문화에 관한 그의 반성들로부터, 또 나중에 그의 친구가 된 와그너(Richard Wagner 1813-1883)의 서정적인 드라마들로부터 비극의 탄생(Die Geburt der Tragödie aus dem Geiste der Musik, La Naissance de la tragédie, 1872)이 나온다. 이 책은 1870년 전쟁이 일어나기 바로 전에 쓰기 시작하여, 1872년(프랑스어 번역본 1901년)에 출판되었다. 1886년판에서는 부제로서 “헬레니즘과 비관주의”라는 이름이 붙는다. 빈켈만(Winckelmann, 1717-1768)에까지 거슬러 올라 갈 수 있는 그 고전 비판은 그리스 예술의 측면만을, 즉 조형예술, 형식의 신인 아폴론의 예술만을 인식하게 한다. 그것은 힘의 균형의 예술, 척도의 예술, 인식의 예술, 자기 지배의 예술이다. 이 예술에게 고통의 세계 가운데에서 무감동하고 고용한 관조가 응답한다. “실재적 세계는 너울로 덮혀있고, 보다 분명하고 보다 지적인 새로운 세계는, 그럼에도 더욱 유령같은 세계는 우리들 눈앞세서 태어나고 끊임없이 변형된다”. 아폴론식 관조는 디오니소스식 황홀경에 대립된다. 이 후자는 의지의 통일에 대한 인식이며,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사물들에 대한 비관적 시각이다. 그리스 비극에서 합창단은 디오니소스의 동반자로 표현된다. “합창단은 영웅을 괴롭히는 불행들에 대한 생각에 전율을 떤다. 그리고 합창단은 이로부터 가장 고귀하고, 더욱더 무한하게 권능있는 환희를 표현한다.” 합창단이 전율을 떠는 이유는 불행들의 과도함이 그들에게 아폴론적인 관조를 금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과도함 자체는 합창단에게 삶의 의지 속에서 그것의 원인을 파악하도록, 그리고 삶의 의지를 부인하면서 평화롭게 되도록, 인도 한다. 이것이 바로 와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Tristan und Isolde 1856–1859)(1865 공연)의 사상이다. 니체에 따르면 그 작품의 서정적 비극은 그리스 비극의 르네상스이라 한다. 드라마는 “그것은 세계를 현상으로부터 극한들까지 끌어간다. 이 극한들에서 세계는 스스로 창조되며, 또 되돌려져서 진실하고 유일한 실재성 한 가운데로 은신하고자 원한다.”
제1절 우등 가치들에 대한 비판 La Critique des valeurs supérieur 881
흐릿하고 절망적인 이 형이상은 기속되지 못한다. 그는 생명적 본능의 축소와 약화에서 삶-의지를 부정하는 심리학적이고 생리학적인 이유들을 찾는다. 비관주의는 퇴화의 징후(symptôme)이다. 니체는 바그너와 불화를 일으킨다. 그는 쇼펜하우어처럼, 라로슈푸꼬(François de La Rochefoucauld, 1613-1680), 빠스칼(Blaise Pascal, 1623-1662), 18세기 모든 작가들 등 프랑스 도덕론자들의 글을 읽는 독자가 된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Menschliches, Allzumenschliches, Humain, trop humain, 1878)(제1권)(불어번역, 1909)과 여행자와 그의 그림(Der Wanderer und sein Schatten, 1880: Le Voyageur et son ombre)(제2권)(불어번역 1902)에서 그는 어떻게 인간에게서 본질적 도덕 감정들, 즉 연민, 자기경멸, 이타주의 등이 행동들과 감정들에 대하여 반과학적 거짓 설명들로부터 태어났는지를 제시한다. 도덕은 하나의 “자치”이다. 만일 군인이 전장에서 쓰러지기를 바란다면, 그 이유는 “자신의 어떤 다른 사정을 위하기보다 관용, 욕망, 창조 같은 자신의 어떤 사정(quelque chose de soi)을 위해 더 많은 사랑을 가지고 때문이다. 따라서 그가 자신의 존재를 자르고 한 부분으로 다른 부분에게 희생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1878)(I, § 57). 그런데 오류는 자기로부터 벗어나온다고 믿는다는 것이다.
1879년에 니체는 병 때문에 바젤대학의 문헌학 교수직을 포기한다. 그는 로마, 제네바, 니스, 엔가딘느에 있는 실스-마리아 등을 옮겨다녔다. 이런 방랑은 여전히 그를 더욱 외로게 했고, 1889년에 전신마비의 발명으로 중단된다. [방랑의 시기] 10년동에, 그는 정열적으로 저술들을 써냈다. 이 저술들에서 그의 사상은 체계적인 발전을 벗어나서, 대부분의 시간을 경구들에 집중되기도 하고, 또한 가끔은 낭만적 예언자의 방식으로 솟아오르는 이미지를 담아 논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Also sprach Zarathustra, 1883-1885)에 흩어져 있다. 그가 전념한 유일한 문제, 그것은 근대 문화의 문제이다. 하나의 문화란 가치들의 신념들로 산다. 그런데 그 가치들이 근대 인간을 살게 한다. 크리스트교, 비관주의, 과학, 합리주의, 의무도덕, 민주주의, 사회주의 등은 빈약해지고 꺼져가는 생명의 징후들, 즉 퇴폐문화의 징후들 전체이다. 니체의 전작품은 [그 시대] 추세를 거꾸로(전도)하기 위한 노력이다. 즉 실재적 근원으로 올라가면서 가치의 목록들을 즉 삶을 피곤하게 하는 것을 부셔버리는 것, 권능의 의지를 첫째 도식으로 마련해 놓음으로서 가치들의 전환을 작동하게 하는 것, 이 모든 것은 명랑함과 충만 속에서 삶을 주장하는 것인데, 그러한 것이 그의 두 가지 임무이다. 대이 작품에서 가장이해하기 편안한 부분은 쉬운 부분은 그가 격렬하게 비판한 부분이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1878)에서 보여 지듯이, 이 비판은 18세기 철학의 경계들를 넘어서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비판이 본성상 변하는 것은 니체가 범위를 넓혀가면서 권능의 의지(Der Wille zur Macht, 1884-1886)에서 유럽 허무주의라 불렀던 악을 파악했을 때이다. 도덕의 기원을 이기주의에서 보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깊은 생리학적 기초에서 공통의 태도의 기원을 보는 것이 중요하다. 여기서 공통태도란 종교적 인간에서 연민, 과학자에서는 객관성, 사회주의자에서는 평등주의로 번역된다. 여명(Morgenröte, 1881)(불어 번역, 1901)에서 그는 루소(Rousseau, 1712-1778)의 역설(paradoxe 파라독스)에 대립한다. “이 한탄스런 문명은 우리의 나쁜 도덕성 때문이다”는 루소에 대해 그의 역설은 “우리의 선한 도덕성은 이 한탄스런 문명 때문이다. 선과 악에 대해 사회적으로 약화되고 여성화된 우리들의 개념작업들, 신체와 영혼에 관해 개념작업들의 굉장한 우월성 등이 모든 신체들과 모든 영혼들을 끝내 약화시키고 또 편견 없이 독립적이고 자치적이며 인간들, 그리고 강한 문명의 진실한 받침대를, 끝내 부셔버린다”(여명, 181쪽) 즐거운 지식(Die fröhliche Wissenschaft, 1882-1885)(Le Gai savoir) 속에는, 일반적으로 니체의 실용주의라 불릴 수 있는 것이 나타나고, 즉 진실한 것으로부터 우리 인식이 세운 생명적 오류들에 대한 생각이 대상들과 물체들을 믿는 신앙처럼 나타난다. 게다가 “마치 닮은 사물들이 동일하기나 한 것처럼 그 사물들을 취급하는 경향”으로부터 나온 우리의 논리도 나타난다. 또한 원인과 결과의 범주도 나타난다. 결국에는 “원인과 결과를, 우리의 방식에 따라 임의적 분할처럼 보는 것이 아니라 연속성처럼 보았던 예지(un intellect)는 원인과 결과의 관념도 모든 조건성도 부인했을 것이다” 즐거운 지식, (169쪽).
특히 선과 악을 넘어서: 미래 철학의 서곡(Jenseits von Gut und Böse: Vorspiel einer Philosophie der Zukunft, 1886(tr.fr. Par-delà le bien et le mal: Prélude d'une philosophie de l'avenir, tr.fr.)에서, 사람들은 그의 신랄함에서 가치들의 비판을 발견한다. 철학자, 자유정신의 소유자, 종교적 인간, 과학자, 애국자, 고상한 자[귀족] 등에 대한 분석은, 모든 경우에서 상승하거나 또는 하강하는 생명성을 규정하는 데로, 그를 이끌었다. 그 생명성은, 각자가 실재적인 것에 위에서 지니는 판단들의 실체이다. 그런데 예를 들어, 잔인성이란 감정은 모든 고급문화의 저변에 있다. 그 감정이 비극의 고통스런 탐욕을 생산한다. 이는 마치 파스칼에서 이성의 희생처럼, “잔인성자체의 방향을 반대로 돌린 자신의 고유한 잔인성에 의해서 비밀스럽게 매료된 그 희생이다”(선과 악을 넘어서, 233쪽). 도덕론의 계보(Zur Genealogie der Moral, 1887)(tr. fr. La Généalogie de la morale, 1900)는 특히 금욕주의에 문제를 다룬다. 금욕주의는 극단적인 한 형식으로 간주되며, 도덕과 과학은 자주 그 극단적 형식의 한 측면일 뿐이다. “모든 건강, 모든 권능, 거칠고 야만적이고 광적인 모든 것 등을 경멸하는 자, [즉], 그가 증오하기보다 훨씬 쉽게 경멸하는 미묘한 존재[인간], 그런 존재를 향하여 맹금 동물들에게 전쟁을 거는 필연성이, 또 폭력적이라기보다 (정신적으로) 간교한 전쟁을 거는 필연성이, 영향을 준다”(도덕론의 계보, 218쪽) 그러한 것이 금욕주의자의 정의(définition)이다. 금욕주의자에게서 사람들은 과학과 도덕의 정신성이 태어나는 것을 본다.
따라서 사람들은 연속적인 경구들 속에서 기본적 용어들의 비판으로 방향을 잡은 니체를 본다. 이 비판은 과학들의 비판 운동과 실용주의 속에서 전개될 것이다. 다른 한편, 사람들은 니체에게서 도덕론자들의 심리학적 비판을 발견하고, 이리하여 과학자들에 관하여 이런 구절에서도 발견한다. “오늘날 과학은 모든 종류의 불만족, 불신, 회한, 자기경멸, 불량한 양심 등의 은신처이다. 과학은 이상(idéal, 理想)의 결핍에서 오는 불안이며, 크나큰 사랑의 부재에서 오는 고통이며, 강요된 기질에서 오는 불만족이다. ... 우리들 중에 보다 특출한 과학자들의 능력, 그 과학자들의 지칠 줄 모르는 적용, 밤낮으로 자신들의 작업의 우월성 자체를 밀고나가는 그들의 두뇌, 이러한 모든 것이 진실한 대상으로 삼은 것은 몇몇 사물들의 명증성에 관해 얼마나 의지적으로 눈을 멀게 했는가”(도덕론의 계보, 259쪽). [신칸트학파의 주지주의를 비판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니체는 과학적 인식들의 획득에 의해서만 이 두 비판[도덕과 과학]을 전개하고 또 정확히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느꼈다. 이 과학적 인식들은 기원을 찾는 이 문헌학자[니체]에게 요구되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그의 유고 작품, 즉 초고의 글들을 모아놓은 권능의 의지(Der Wille zur Macht, 1884-1886)(불어판으로는 1901년, 1903년, 1935년이 있다) 속에서 체계화된 이 작업의 초기 결과물들을 본다. 이 저술에 대하여 1882년에 발상을 가지고 있었고, 체계화된 작업에서 황혼의 우상(Götzendämmerung, 1888)(tr.fr. Crépuscule des idoles, 1902)에서 간단하게 지적된 생각들이 많이 전개되었다. 그는 이 시기에 스펜서와 다윈의 거대한 정신적 종합들에 대해 적대적이었고, 또 이들이 숙명적이고 기계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제시한다. 생존경쟁은 “불행하게도 다윈학파가 바랐던 방식과는 반대 방식으로, 또 사람들이 그 학파와 더불어 감히 바랐던 방식과는 반대방식으로 끝난다. 나는 강한 자들, 특권 자들, 행복한 예외들을 개의치 않고서 말하고자 한다. 이 종들은 완전함으로 증가하지 않는다. 약한 자들은 항상 강한 자들의 주인이 되는 것으로 항상 끝난다. 왜냐하면 이들은 수가 많기 때문에, 이들은 또한 보다 간교하다”(황혼의 우상) 184쪽) 이제, “유럽의 허무주의”같은 이런 정식을 통하여, 그는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에서 시작했던 퇴폐를 지적하고 또 인류의 “근본적 본능들로부터 우회되어 나타나는 인류의 보편적 편차(cette aberration)를 지적한다”. 이 모든 상위 판단들, 인류의 주인으로 되게 했던 판단들은 생리학적으로 다 써버린 존재들의 판단으로 귀착되었다(권능의 의지, I, 126-127쪽). 현존 속에 있지도 않는 모든 종말의 알림은, 즉 모든 이상은 생명성의 쇠락을 증거 하는 현존을 단죄하는 것이다. (46SKD)
제2절 가치들의 전환: 극복자 La transmutation des valeurs: le surhumain
그의 저술들 전체가 니체에게서는 회복을 위한 단계들처럼 보인다. “일종의 기억으로서, 제일 인칭을 사용함이 없이 절대적으로 인격적이 되는 것” 그러한 것들은 그자신이 부여한 좌우명들(les maxime)이다(권능의 의지, I, 19쪽). 가치들의 전환이 기원으로 삼는 것은 결국 반성과 분석이 아니고, 오히려 권능의 단순한 긍정이다. 이 권능의 긍정은 단지 정당화되어야 함이 없이 있다. 여성적 도덕성이 빠진 [남성적]덕목(virtu)을 갖춘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의 남자들, 또는 나폴레옹, 거기에 길들여지지 않은 인류의 전형들이 있다. 칼라일(Carlyle, 1795-1881)과 에머슨(Emerson 1803-1882)은 이들을 관념의 대표자들로서 정당화하고자는 잘못을 범했다. 또한 이 전환은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Also sprach Zarathustra, 1부와 2부, 1883-1884, 4부 1891)(tr.fr. Ainsi parlait Zaratustra, 1901과 1936)에서 또는 유작품인 이 사람을 보라(Ecce Homo, 1888)(1906년 발간, tr.fr. 1909)에서 자연히 예언적 알림의 형식을 취한다. 짜라투스트라가 예언하는 초인은 인간전형의 성취가 아니다. [완전한 이데아와 동일시되는 그런 인간 전형이 아니다.] 니체는 약간은 꾸르노(Cournot, 1801-1877)의 방식으로 최후의 인간을 본다. 그 인간은 모든 위험들을 피하도록 완전히 유기체화 되었고 결정적으로는 평탄한 행복에 만족한다. 그러나 “인간은 극복되어야 할 어떤 것이며, 인간은 다리(un pont)이지 목표가 아니다”(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286쪽). 위협과 위험을 사랑하는 것, 그러한 것이 초인(Surhumain, 극복자)의 특징이다. 권능의 의지는 살아있는 의지[생의 의지]의 진실한 이름이다. 왜냐하면 생명은 오직 자기 환경에 따르면서 만이 피어나기 때문이다.[자연 속에서 자연(본성)의 발휘] 만일 영웅들이 처한 위협들의 이야기로서가 아니라면, 짜라투스트라의 시 일체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이 위협들이란 우리의 문명이 막 태어나는 초인[극복자]에게 감당하게 하는 위협들이고, 문명의 관대함이란 그에게는 더욱 위험스러운 것일 진데, 결국에는 그는 그 위협들을 극복해야한다는 것이다. 우선 그것은 영겁회귀의 신화, 사건들의 동일한 순환의 무한정한 회귀의 신화이다. 이런 순환의 생각은 쇼펜하우어에 의해 비관주의를 정당화해야 했던 공포의 대상으로서 이미 제기되었다. 비관주의, 삶의 혐오란 사람들이 똑같은 삶을 다시 살아야 하는 두려움을 갖는 것이다. 그래서 짜라투스트라는 처음에는 이 혐오를 예감하고, 그리고 나서 그는 그 신화를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그것을 자기의 것으로 만든다. 영원회귀가 종말의 예속으로부터 해방이 아니겠는가? 또 이 긍정 자체만을 정당화하는 현존의 무한히 즐거운 긍정이 아니겠는가? 결국에는 권능의 표현자체인 한정되고 제한된 형식에 현존[인간실존]이 복종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 영겁회귀는 가치들의 전환의 전형이다. '그래'라는 긍정은 '아니오'라는 부정에 대립된다. 다른 하나의 유혹이 있다. 그것은 우등한 인간들의 유혹인데, 이들에 대해 하층민이 말한다; “우등한 인간들이여, 우리는 모두 .. 신 앞에서 평등하다. 우등한 인간은 없다” 우등한 인간들이여, 그들은 다음과 같이 가르치는 매우 권태로운 포고자이다. “모든 것은 동등하다. 아무것에도 수고할 가치가 없다.”[엔트로피의 증가] (위 책, 347쪽), 그런데, “정신적으로 양심적인 사람”은 절반보다 많이 아는 것보다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것을 더 좋아한다. 그에게는 “진실한 학문 속에는 큰 것도 작은 것도 전혀 없다”(위책 361). “정신적으로 속죄하는 사람”, 즉 (바그너 그 자신과 같이) 매료된 자, 그는 사랑과 고통을 찾는다(위 책, 368쪽). “인간들 중에서 가장 추한 자”는 자신을 위해 동정하는 신속에서 자신이 복수하고자 애쓰는 증인을 본다(위 책, 381). 의지적 걸인은 “부를 위한 강제노역자”를 싫어한다. “이 강제노역자들은 배설물들 각각의 덩어리로부터, 황금빛으로 가장된 천민으로부터 이익을 끌어낼 줄 안다.” “짜라투스트라의 그림자” 즉 그 제자는 속 좁은 신앙이 자신을 사로잡지 못하게 스스로 방어해야 한다(위 책 398). 그런데 이만큼 많은 우등한 인간들의 전형들, 그들 중의 고상한 자(귀족)는 이들이 인간들과 자신들에서 겪었던 혐오 속에 있다. 게다가 비관주의자, 문헌학자, 과학자, 예술가, 부를 경멸하는 자 등, 그들 중의 어느 누구도 자신에 만 있는 혐오(싫증)를 극복할 수 없다. 초인은 그들의 임무를 이어가는 위해 나온 것이 아니다. “당신들, 즉 우등한 인간들, 당신들은 내가 당신들이 잘 못 행했던 것을 다시 잘 고치기 위해서 거기에 있다고 믿는가? ... 그는 당신들 종들 중에서 항상 더 많이 그리고 항상 더 좋은 자들을 그것으로부터 사라지게 해야 한다. ... 이리하여 단지 그 인간은 더 높이를 향하여 커간다.”(위책 419)
이렇게 니체는 그 귀족이 많은 퇴폐의 흔적들을 포함하고 있던 지적 귀족주의를 내보냈다. 권능의 의지가 민주적이고 사회적인 이상에 아직 더 대립적이었다고 할지라도, 그에게서 권능의 의지는 단순히 거칠고 파괴적인 힘을 지칭 한다고 하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니체의 말년의 명상들은, 반대로 생의 풍부함이 어떤 선택에서 표출되는 것을 또한 생이 지배하는 요소들의 정확하고 엄격한 어떤 질서에서 드러난다는 것을, 보여준다. “취향의 순화과정은 [인간]전형의 강화과정의 귀결일 수 있고” 힘의 과잉의 결과 자체일 수 있다. “ 일 수 있다. ”우리에게는 종합적인 위대한 인간이 없다. 그 인간에게서 서로 다른 힘들이 같은 멍에 아래 예속되어 있다. 우리가 지닌 그것은 다양한 인간, 즉 연약하며 다양한 인간이다.“(권능의 의지, II, 243). 이러한 것들이 아마도 존재와 생명의 개념작업에 길을 연 그의 말년의 사상들이다. 20세기 초기에 세속화하는 니체주의자들이 수많았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사상의 중요성에 낌새를 알아채지 못했다. 이들은 니체 속에서 개인주의만을 보았지, 자기 지배와 강건한 인간을 만드는 금욕주의를 보지 못했다.
제3절 쟝-마리 기요 Jean-Marie Guyau 887
쟝-마리 기요(Jean-Marie Guyau, 1854-1888)는 어떤 의미에서는 니체처럼 비도덕론자(immoraliste)이다. 그에 따르면, 도덕론자들의 커다란 오류는 무의식(l'inconscient)을 무시했다는 것이다. 인간은 무엇보다도 쾌락이나 다른 것들에서 오는 어떤 반성적 동기에 의해서 보다, 자기 존재의 모호한 심층(깊이)에서 발산하는 생명적 충력에 의해서 훨씬 더 많이 행동한다. 사실상, 행동이 의식 속에 들어간다. 그런데 그 때, 분석의 위험이 생겨난다. 그는 강요도 없고 상벌없는 도덕론(Esquisse d’une morale sans obligation ni sanction, 1885)(245쪽)에서 이렇게 쓴다. “의식은 길이에 따라 길게 반작용할 수 있고, 그리고 의식은 분석의 명석함에 의해 유전의 모호한 종합이 축적해 놓은 것을 점진적으로 파손할 수 있다. 의식은 분해하는 어떤 힘이다.” 도덕의 목적은, 심층에 있는 자발성을 정당화하면서, 반성과 자발성 사이에 조화를 다시 확립하는 것이다. 도덕이 자발성을 정당화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가장 강도있고 가장 외연적인 삶은 이기주의와 이타주의가 통합된 것이기 때문이다. 니체의 방식에 완전히 따르는 기요는 생명이 과잉(prodigalité 풍부)이며, 지출(dépense)이라 보았다. 그리고 이기주의는 생명의 절단(une mutilation)이라 보았다. 따라서 우리의 의무를 측정하는 것은 우리의 힘이고 우리의 생명적 힘이다.
도덕론처럼 감성론은 생명 안에서 생명의 원리들을 발견한다. 그에게 있어서 아름다움은 우리의 생명력이 증가하는 것이다. 따라서 미학적 정서(l'émotion esthétique)가 사회적 정서이다. 왜냐하면 예술은 개인적 삶을 보편적 삶과 일치시키기 위하여 개인적 삶을 성장하게 한다(사회학적 관점에서 예술(L'Art au point de vue sociologique, 1889)). 도덕적 감정과 미학적 감정은 삶에서 초월적 규칙을 요구하기 때문에 소멸하지 않는 것처럼, 독단이 사라지고 난 뒤에도 존속하는 종교적 감정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왜냐하면 종교적 감정은 우주를 마주 대하여 신체적, 도덕적, 사회적 의존의 감정이며, 우주 속에 펼펴지는 삶의 근원의 감정이다(미래의 무종교: 사회학적 연구(L'Irréligion de l'avenir, étude sociologique, 1886).
참조: 동일한 저자의 작품으로, 한 철학자의 운문(Vers d'un philosophie, 1881), 교육과 유전: 사회학적 연구(Éducation et Hérédité: étude sociologique. 1889) 시간의 관념의 발생(La genèse de l'idée de temps, 1890) 등이 있다
# 참고문헌 Bibilographie 888
F. Nietzsche, Werke, éd. K. Schlechta, 3vol., Munich, 1954-1956; Werke und Brief, Munich, 9 vol., 1933-1942.; 비극의 탄생(Die Geburt der Tragödie aus dem Geiste der Musik, 1872)(La Naissance de la tragédie, trad. Geneviève Bianquis 1951; 그리스인들의 고대비극에서 철학(Die Philosophie im tragischen Zeitalter der Griechen, 1873)(La naissance à l'époque de la tragédie grecque, tr. G. Bianquis, 1951; 즐거운 지식(Die fröhliche Wissenschaft, 1882-1885)(Le Gai savoir, tr. A. Vialatte, 1950.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Also sprach Zarathustra, 1883-1885)(Ainsi parlait Zaratustra, tr. G. Bianquis, 1946), 권능의 의지(Der Wille zur Macht, 1884-1886)(La Volonté de puissance, tr. G. Bianquis, 2 vol., 1947-1948), 선과 악을 넘어서(Jenseits von Gut und Böse, 1886)(Par-delà le bien et le mal, tr G. Bianquis, 1951), 이 사람을 보라(Ecce Homo, 1888, 1906년 발간)(tr, A.Vialatte, 4e éd, 1942), 도덕론의 계보(Zur Genealogie der Moral, 1887)(La Généalogie de la morale, tr. H. Albert, 1946), 유고전집(Oeuvres posthumes)(tr. J. Bolle, 1934), 서신(Correspondance)(1900-1905)
H. W. Reichert et K. Schlechta, International Nietzsche Bibliographie, University of North California, 19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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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 Andler, Nietzsche, sa vie, sa pensée, 6 vol., 1920-1921, nouv.ed., 3vol., 1950. [앙들레(Charles Andler 1866-1933) 프랑스인 독일연구자.]
Th. Mann, Nietzsches Philosophie im Lichte unserer Erfahrung(우리 경험에 비춰 본 니체의 철학), Berlin, 1948. [토마스 만(Paul Thomas Mann, 1875-1955) 독일작가]
K. Jaspers, Nietzsche, introduction à sa philosophie, 발(J. Wahl)의 서문, 1950. [야스퍼스(Karl Jaspers, 1883-1969) 독일철학자. 정신과 의사. 실존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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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Granier, Le problème de la vérité dans la philosophie de Nietzsche, 1966. [그라니에(Jean Granier, 1933-) 프랑스 철학자. ]
Nietzsche, centenaire de sa naissance, Genève, 1944.
Nietzsche, Cahiers de Royaumont, 1967.
III
J. M. Guyau, 강요도 없고 상벌 없는 도덕론(Esquisse d’une morale sans obligation ni sanction, 1885), 시간의 관념의 발생(La genèse de l'idée de temps, avec une introd. par Alfred Fouillée, 1890)
P. Archambault, J. M. Guyau, 1911. [아르샹보(Paul Archambault, 1883-1950), 수필가, 프랑스 철학자.]
(46SKE)
{책브레이2409철7권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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