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효가 부산에 사찰을 창건한 이유
김규순의 사찰 이야기 발췌글
신라불교에서 자장, 원효, 의상 등 위대한 고승 세 분이 출현하여 한국불교의 토대를 만들었다. 원효가 창건한 절이 영남, 호남, 충청, 경기 등 전국적으로 산재해 있고, 특히 부산지역에 집중되어 있는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
미륵봉을 배경으로 건립된 미륵암. 날씨 좋은 날은 멀리 대마도에서 오는 왜구의 배를 관찰할 수 있으며 가까이는 낙동강을 거슬러 올라오는 왜선을 발견할 수 있다.
민중을 왕실 중심으로 단합하게 한 원효
김춘추(태종무열왕)가 ‘자루 빠진 도끼를 빌려달라’는 의미를 파악하고는 원효를 궁궐로 불러들이던 중 문천에 빠진다. 이에 무열왕은 원효를 요석궁으로 보내 요석공주와 사랑을 나누게 만들었다. 이는 이미 요석공주와 사전에 합의된 일이라 여겨진다. 이 당시 남편은 백제와의 전투에서 전사(655)하여 요석공주는 과부였다. 요석공주는 진골이었고 원효는 6두품이었는데, 왕실이 6두품과 혈연관계를 맺은 이유는 무엇일까?
김춘추는 진골 출신으로 최초로 왕위에 오른 인물이었다. 세상이 바뀌어 진골끼리 왕위를 두고 경쟁하는 시대가 되었다. 김춘추는 자기를 지지해줄 세력이 필요했으므로 김유신의 여동생을 부인으로 맞아들여 가야 세력을 등에 업었다. 6두품을 비롯한 토착민 세력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여 반대파 진골 세력을 정치적으로 견제하고자 했다. 그리고 6두품으로 토착민의 리더였던 원효까지 사위로 삼아 혈연으로 엮은 것은 김춘추가 선택한 신의 한수였다.
금정산 원효암은 기암괴석의 암봉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원효는 암봉이나 암릉을 일관되게 선호하였다.
원효가 활동하던 시기는 백제와의 전쟁, 고구려와의 전쟁, 당나라와의 전쟁, 왜와의 전쟁 등 전쟁으로 얼룩진 격렬한 시기였다. 원효는 삼국통일전쟁의 주역인 장인 김춘추의 명으로 총사령관 김유신을 따라 전장을 함께 누볐다. 김유신은 신라 최고의 장군이었지만 사적으로 처외삼촌이었다.
삼국전쟁에 있어서 가장 피해를 많이 입는 계층은 민중이었다. 민중은 군대의 근간이었다. 따라서 김춘추는 민중에게 정신적인 지주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이에 원효는 신라 왕실불교를 민중에게 전파하여 소위 민중불교를 통하여 민중을 왕실 중심으로 단합하게 했다.
김춘추는 전쟁을 완수하지 못하고 죽었다. 그의 뒤를 이어 아들 문무왕이 통일신라의 위업을 달성하였다. 문무왕은 원효의 처남이었다. 신라왕실의 위엄과 권한과 조직이 원효의 뒷배가 되었다.
김유신은 평양성을 공격하는 소정방에게 군량미를 지원해주고 밀서를 받았으나 당에 유학했던 군 참모도 해석하지 못했다. 원효는 뛰어난 선지식(善知識)으로 소정방의 밀서를 해독하여 김유신을 함정에서 구해내었다. 이를 기회로 원효의 선지식이 탁월함을 천하에 드러냈다.
원효가 창건한 경계역할의 암자는 대부분 암벽을 배경으로 자리잡고 있다. 산의 8부 능선에 초록빛의 대나무 숲에 가려진 곳에 척판암이 있다.
군사적 목적으로 건립된 사찰
부산에는 원효가 창건한 절이 집중되어 있다. 안적사, 장안사, 선여사, 취정사, 척판암, 선암사, 운수사, 원효암, 미륵암 등이며 그 외에 가까운 양산지역에 원효암을 중심으로 내원사, 홍룡사, 미타암 등이 집중되어 있다.
백제를 지원했던 왜구는 신라를 직접 공격했다. 이에 문무왕은 동해의 용이 되어 신라를 수호하고자 수중릉을 만들 정도였다. 왜구가 경주로 침입하는 통로를 관찰하면 사찰이 그룹화되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즉 조망권을 확보하여 경계를 서는 암자와 승병이 주둔하는 본진과 같은 절이 서로 보완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하나, 통도사 지구대는 자장과 연합하여 통도사를 본진으로 한 천성산 원효암이 경계를 서는 암자로 역할을 분담하여 상호보완하고 있다. 통도사 계곡에 도달하기 전 낙동강 하구에서 일차 저지선을 구축하였는데, 선암사와 운수사가 최전방 공격진이었으며 금정산 미륵암이 경계병 역할을 했다. 금정산 미륵암에서 날씨가 좋으면 대마도까지 관찰이 가능하다.
둘, 범어사 지구대는 범어사가 본진이고 금정산 원효암이 경계병 역할을 했다.
셋, 기장의 좌광천이나 회야강으로 침투하는 길목은 장안사를 본진으로 하고 조망이 좋은 척판암이 경계병 역할을 맡았다.
넷, 울산 동천으로 침투하는 왜구는 천성산 미타암이 경계암자였고 울산 태화사가 본진으로 왜구를 막았다.
다섯, 경주 대왕암 침투로는 감은사가 본진으로 왜구를 저지했다.
부산을 비롯한 양산지역에 원효가 창건한 절이 군사적 목적에 의해 건립되었다고 판단하는 것은 미타암, 척판암, 원효암, 미륵암 등이 탁 트인 조망권이 확보되어 왜구의 침입을 사전에 발견하여 사전에 방어전을 펼칠 수 있도록 8-9부 능선에 암자를 지었다는 점이다. 이런 암자는 사신사와 같은 풍수적 지형이 발달할 수가 없다.
천성산 미타암은 백척간두 위에 위치하고 있어서 조망권은 확실하게 확보하고 있으며 울산 앞바다까지 훤하게 관찰된다. 암벽 위에는 나무가 자라지 못하므로 조망권 확보가 용이하다.
통일신라의 영웅 원효대사
원효가 창건한 사찰이 전국적으로 산재해 있다는 것은 원효가 전국을 무대로 민중불교를 전파했다는 점이다. 그가 민중불교의 기치를 들면서 군사 목적으로 절을 지은 것은 전쟁을 피해갈 수 없다면 전쟁에서 이겨야 민중의 고통을 줄일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백제가 멸망하고 난 뒤에 백제 망국민을 위로하고 고구려 유민을 위로하는 불교 정책으로 그들을 신라의 민중으로 흡수하는데 진력을 다하였다. 또 그들과 연합하여 당나라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것은 두말 할 필요도 없다.
또한, 절 이름에서 고승의 이름을 사용하는 예는 많지 않다. 통도사 자장암과 오어사의 자장암 그리고 안정사의 의상암, 삼각산 도선사와 광주 도선사 정도이다. 이에 반해 원효사나 원효암은 전국적이며 더불어 원효봉, 원효굴, 원효대란 지명이 많다. 이는 원효의 민중불교가 성공적이었음을 말해주는 증거이다.
삼국전쟁에서 원효가 없었다면 민중의 단합을 이끌어내기도 어려웠을 것이며 통일신라는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호국불교의 탄생이 원효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원효는 김춘추와 김유신과 함께 통일신라의 영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