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까마귀와 비둘기[창 8:6-12]
지난시간
물의 심판 불의 심판이라는 제목으로 말씀드림.
오늘은 까마귀와 비둘기라는 제목으로 노아 홍수 후의 방주에서의 짧은 생활의 모습을 함께 나누면서 주님 준비하신 은혜에 참여하려 함.
홍수가 며칠 동안 있었다고 했는가? 40일동안
창 7:17에 “홍수가 땅에 사십 일을 있었는지라”기록하고 있습니다.
홍수의 모습은 어떠하다고 기록하고 있는가?
창 7:11
“노아 육백 세 되던 해 이월 곧 그 달 십칠일이라 그 날에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지며 하늘의 창들이 열려”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지고 하늘의 창이 열렸다.
땅속의 물들이 다 나왔고 하늘의 창들이 열린 것처럼 하늘의 물이 다 쏟아잔 곳초롬 기록함.
저는 천연동굴에 들어가 볼 때마다 아 이것이 깊음의 샘들이 터졌다는 말씀의 현장이구나 라고 생각하였음.
더욱이 고수동굴에 들어갔을 때 흐르는 물소리를 듣고 아 땅속에도 이런 강 같은 것이 있는 모양이구나 이런 물이 다 밖으로 나왔구나 생각하였음.
땅속의 물이 다 밖으로 나와도 땅이 모두 물에 잠기면 그 물들은 다시 다 들어가게 될텐데 왜 이런 표현을 하였나 하는 생각도 말씀을 읽으면서 들기도 하였음.
그러나 물과 물을 나누신 하나님께서 땅속의 물이 나오게 하시고 들어가지 못하도록도 하실 수 있는 분이심. 그러나 그렇게 했을 것이라는 말씀은 아님.
우리가 상상 못하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 것을 많이 봄.
땅속에는 물도 있고 불도 있음.
아마도 노아의 날 물이 아닌 불로 세상이 멸망 하였드라면 지금 화산폭발과 같은 것이 없을지도 모름.
그러나 어떤 분들은 불보다 물이 더 위험하다고 하시는 분들도 있었음.
어쨌던 성경은 땅의 깊음의 샘이 터져나 와 홍수를 이루는데 한 몫 하였음을 말하고 있음.
하늘의 창문이 열렸다는 말씀을 저는 하늘을 두르고 있었던 지구 위의 물들이 다 쏟아 졌다고 생각함.
창세기 1장에 있는 이 말씀들 다 기억하시죠?
창 1:7
“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매 그대로 되니라”
원래 지구는 물로 덮여 있었는데 그 물을 하늘위의 물과 하늘 아래의 물로 나누었다는 말씀입니다.
그 하늘의 물이 다 쏟아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무슨 상태로 돌아갔습니까?
창세기 1:2절에 무슨 말씀이 있습니까?
창 1: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이 모습은 지구의 원래의 모습입니다.
하나님께서 태양계를 창조하시고 지구에 사람이 살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시기 전에는 물로 덮여 있었던 것으로 이해됩니다.
이제 비가 오고 땅속에 감추어 두셨던 물이 터져 나와 지구는 원래의 상태로 돌아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기 전 상태 물이 지구를 둘어싸고 있던 그 상태로 돌아갔다는 말슴입니다.
하나 다른 것은 창세기 1장에는 성령이 수면에 운행하셨고 창세기8장에는 성령을 상징하는 바람이 불고 있었고 또 하나 다른 것은 8명을 태운 방주가 떠다니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배 선자 한자 의 의미를 말씀 드리겠습니다.
船이 게 배선 자입니다.
이 글자를 분해하면 배를 가리키는 배주 舟와 여덞을 의미하는 八그리고 사람의 입을 가리키는 입 구 口 이렇게 모와져서 배 선자가 된 것이죠.
이것을 풀이하면 입을 가진 8명이 배를 타고 있다라는 의미가 배선자 입니다.
40일 동안 퍼붓던 비가 그쳤습니다.
방주가 물위에 얼마나 떠 있었다고 하였나요?
창 8:3-4
“물이 땅에서 물러가고 점점 물러가서 일백오십일 후에 감하고 칠월 곧 그 달 십칠일에 방주가 아라랏 산에 머물렀으며”
일백 오십일이라면 몇 달입니까?
다섯 달...다섯 달 동안 방주 안에서 생활한다는 것 답답할까요?
여러분들은 그래도 답답하게 사시는 것이 낫습니까?
시원한 물에 목욕하고 죽는 것이 낫습니까?
제가 무슨 말씀을 드리는지 이해가 됩니까?
방주 안에서 사는 것이 낫는지 방주 밖에서 죽는 것이 낫는지 어느 것이 낫는지 물은 것입니다.
예수 안에서 남 하는 것 다 못한다고 먹고 싶은 것 다 못 먹는다고 보고 싶은 것 다 못 본다고 가고 싶은 곳 다 가지 못한다고 답답해 하시지 말자는 것입니다.
우리 찬미가 462장에 이런 찬미가 있습니다.
3절입니다.
“천국에 가는 길 험 하여도 생명길 되나니 은혜로다”.
저는 인력 사무실에 나가 장로님 일을 도우면서 일하러 나노시는 분들을 볼 때 마음이 짠할 때가 참 많습니다.
40도가 오르내리는 기온에서도 일을 나가시는 분들을 볼 때 마음이 그랬습니다.
세상에 한평생 좀 수월하게 평안하게 행복하게 살려고 하니 돈을 벌어야 하고 이렇게 뜨거운 열기에도 일을 나가야 하는구나 하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돈 외국 여행할 때는 필요할지 모르지만 천국행 비행기를 탈 수 있도록 해주지 못합니다.
표는 공짜로 믿음을 가진 자들에게 다 주어졌지만 천국 가는 열차 승강장까지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가야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생명의 길이랍니다.
그러나 그 생명길 천국가는 길이 때로는 험하다고 느껴지지만 무슨 길이 되니까 합니까? 생명길 되나니 은혜로다.
우리 성도님들 이 생명 길에서 한분도 이탈하지 말길 소원합니다.
성경에 의하면 노아 육백 세 되던 해 이월 곧 그 달 십칠일에 비가 내렸고 그리고 배가 떠올랐고 그 다음 말씀을 보면
창 8:4-5
“칠월 곧 그 달 십칠일에 방주가 아라랏 산에 머물렀으며 물이 점점 감하여 시월 곧 그 달 일일에 산들의 봉우리가 보였더라”
참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죠.
창 7:11절에 의하면 “노아 육백 세 되던 해 이월 곧 그 달 십칠일”에 비가 내렸고요. 며칠동안요. 40일 동안 비가 내렸고요.
7월 17일까지 다섯달 동안 배가 떠 다녔고 7.17일에 방주가 아랏랏산에 머물렀고요.
다시 그로 73일 후인 10월 일일에 산봉우리가 보였더라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말씀을 보면 배가 아라랐산 꼭대기 부분에 멈춘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니 처음엔 산 봉우리가 보이지 않다가 산봉우리가 보였더라는 말씀을 볼 수가 있으니 말입니다.
다음기록은 이렇게 하고 있습니다.
창 8:5-7
“물이 점점 감하여 시월 곧 그 달 일일에 산들의 봉우리가 보였더라 사십 일을 지나서 노아가 그 방주에 지은 창을 열고 까마귀를 내어 놓으매 까마귀가 물이 땅에서 마르기까지 날아 왕래하였더라”
무슨 마음인지는 몰라도 노아는 방주 창문을 열고 까마귀를 날려보냈습니다.
그러니 성경은 무엇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까?
물이 마를때까지 날아다녔다.
그래서 노아는 다시 비둘기를 내어 보내는 모습을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창 8:7-9
“그가 또 비둘기를 내어 놓아 지면에 물이 감한 여부를 알고자 하매 온 지면에 물이 있으므로 비둘기가 접족할 곳을 찾지 못하고 방주로 돌아와 그에게로 오는지라 그가 손을 내밀어 방주 속 자기에게로 받아들이고”
성경은 물이 감한지 궁금하여 비둘기를 내어 보냈다고 기록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되었습니까?
까마귀는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비둘기는요 앉을 자리가 없기 때문에 돌아왔습니다.
똑 같은 날짐승인데 그리고 크기도 거의 비슷한데 왜 한 마리는 돌아오고 다른 한 마리는 돌아오지 않았을까요.
한 마리는 까마귀이기 때문에 돌아오지 않았고요.
한 마리는 비둘기이기 때문에 돌아왔습니다.
아마도 홍수의 격변 중에 많은 짐승과 사람들을 땅 속 깊은 곳에 매장 되었을 것이지만 뭍이지 못한 많은 시체들이 떠 다녔을 것입니다.
까마귀의 눈에 그것들이 무엇으로 보였을까요?
굶주린 사자의 먹이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비둘기는 그렇지 못하였습니다.
그들 위에 앉을 수가 없었습니다.
내어보낸 주인에게 앉을 자리가 없다는 것을 알려주어야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이시여 우리를 나게 하신 하나님의 선한 목적을 헤아리시는 하나님의 실실한 비둘기들로 살아가시길 소망합니다.
주님 오늘도 세상에 나가 보았지만 앉을 자리가 없습니다. 썩은 냄세나는곳 뿐입니다
라는 보고를 드릴 수 있는 생활 말입니다.
그리고 다시 일주일이 지나서 다시 비둘기를 내어 보내었을 땐 무엇을 가지고 돌아왔나요?
창 8:10-11
“또 칠 일을 기다려 다시 비둘기를 방주에서 내어 놓으매 저녁때에 비둘기가 그에게로 돌아왔는데 그 입에 감람 새 잎사귀가 있는지라 이에 노아가 땅에 물이 감한 줄 알았으며”
무엇을 가지고 돌아왔다고 하나요?
감람 새 잎사귀를 물고 왔다고 하죠.
아담과 함께 집을 떠난 아담의 수많은 가족들 중에 주님오시어서 에덴으로 들어가는 문을 활짝 열어 놓으셨을 때 까마귀들도 있을 것이고 비둘기들이 있을 것입니다.
세상에 뭍여 영원히 돌아오지 못하는 이들은 까마귀가 상징하는 사람들이고요.
주님 말씀을 따라 살면서 주님의 섭리가 무엇인지 희미하게 나마 이해하고 그 말씀에 순응하는 사람들은 다 비둘기들이라고 저는 이해를 합니다.
여러분들은 어디에 서길 원하십니까?
살아있는 희망의 잎사귀를 물고 새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는 비둘기들이 다 되길 소원합니다.
저는 창세기 노아 방주와 관련된 비둘기를 볼 때마다 생각나는 한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그는 일곱 귀신이 들렸다가 예수님께서 고쳐주셨고요.
시몬의 꾀임에 빠져 간음의 현장에서 잡혀서 예수께로 끌려나왔고요.
이런 주님의 은혜가 너무 고마워 예수님의 발에 나드향을 붓고 눈물로 그 발을 닦았던 여인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수 많은 사람들 중 가장 비천했고 가장 연약했고 가장 볼 품 없었던 사람입니다.
그러가 그가 예수님의 부활을 제일 먼저 목격한 첫 번째 증인이 되었고요.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한 최초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예수님을 위해 일하는 것은 신분의 차이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학식의 차이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나이의 차이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노아는 독수리를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빠른 매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나약하게 보였던 비둘기를 사용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의 최초의 증인을 똑똑한 제자들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활동력이 있는 사람들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비천하고 보잘 것 없고 내 세울 것이 없었던 마리아를 사용하셨습니다.
비둘기와 마리아의 특징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그들을 사용하신 주님께서 오늘 똑똑하지도 못하고 자랑거리도 없고 연약한 우리 군위교회 성도들도 사용하시리라 믿습니다.
우리 모두 들어 쓰시는 주님손에 들려진 그릇들 되어 쓰임 받는 사랑의 전달자 비둘기들로 살아가게 되길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