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자유
어쩔 수가 없다. 삶이 왜 이렇게 변해가는가. 오늘도 사회관계망을 통해 죽음, 결혼, 탄생, 모임 소식이 전해진다. 대부분 학교나 직장 생활에서 만들어진 인연으로부터 연유한 것이다. 개중에는 만나서 갚아야 할 빚이나 외면하기 어려운 은공도 있다. 가끔은 의리와 관계 지속 필요성에서 갈등한다.
예전에는 장례식과 경조사를 챙기는 것이 당연한 도리처럼 여겼다. 몸이 힘들어도 가고, 마음이 불편해도 얼굴은 비췄다. 하지만 요즘 장 노년 사이에서는 분위기가 많이 달라졌다. 오래된 인연이라도 억지로 이어가지 않으려는 사람이 늘고 있다.
심지어 장례식조차 가지 않는 경우도 많아졌다. 단순히 정이 없어서가 아니다. 살아보니 무엇이 사람을 가장 지치게 만드는지 알게 된 것이다. 젊었던 한때, 의리에 살고 의리에 죽는 것이 그렇게 멋져 보일 때가 있었다.
의리. 좋은 말이다. 의리는 미래가 있을 때만 마음속에서 작동되는 비정한 단어일 수도 있다. 하기야 그럴 때의 의리는 이미 의리의 의미를 잃어버린 것이긴 하지만. 결국 나이가 들수록 인간관계의 기준은 의리보다 평온함으로 바뀐다. 그러면 나이가 들수록 점점 인간관계가 멀어지는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
사람 만나는 것 자체가 점점 버겁다. 세상 만물 중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나이를 먹으면서 절실히 느끼는 것이 체력의 저하다. 봄꽃이 아니라 가을 낙엽이다. 화려하고 당당한 것도 한때다. 가을꽃이 추레하고 맥없어 보이는 것과 같은 이치다.
푸르름이 너절하게 변해가는 뜨락, 오상고절(傲霜孤節)이 굳센 의지처럼 보이나 실상 돌담에 내린 찬서리 덕에 조금 강건해 보일 뿐이다. 서리 내린 아침의 메뚜기나 사마귀 같다고나 할까. 예전처럼 긴 시간 대화를 이어가는 것도 쉽지 않다. 반복되는 이야기와 눈치 보는 분위기 속에서 금방 피곤해진다.
이런저런 사람들과의 모임, 특히 경조사는 감정보다 의무감으로 가는 경우가 많다. 사람을 만나서 나누는 이야기도 뻔하다. 미래에 대한 것들이 아니라 지나온 것들을 회상하며 자신이 처한 상황만 더 명백하게 읊조리게 된다. 희망이 아니라 낙망, 절망을 넘어 소멸로 가는 열차에 탄 자신을 굳이 가슴에 담는 시간을 가질 필요는 없다.
그래서 다녀오면 반가움보다 체력 소모와 허무함이 더 크게 남는다. 결국 나이가 들수록 사람은 관계보다 에너지를 먼저 생각하게 된다.
형식만 남은 관계가 허무하다. 마음에 없는 행동은 무의미함을 넘어 허무 그 자체다. 오래 알았다는 이유만으로 이어지는 관계들이 있다. 떠나지 않으면 같은 곳에서 같이 썩어갈 뿐이다. 꽃이 필 때는 대체로 같은 시기, 같은 이유로 무리 지어 핀다. 그러다 꽃이 지고 열매가 되면 각자 가는 곳도 가야 할 곳도 달라지기 마련이다.
자연이나 사람이나 마찬가지다. 화려함은 같이 할 수 있지만 쓸쓸함은 다르게 느끼는 것이 자연의 이치다. 더구나 고뇌하는 갈대인 사람인 경우야 말할 것도 없다. 만나서 화려했던 시절을 회상하고 마음을 나누면서 행복한 시간을 가질 수 있겠다는 생각으로 모임에 참석한다. 하지만 막상 만나보면 진짜 마음을 나누기보다 의례적인 대화만 반복된다. 그나마 삶 이후의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 것만으로 다행일 수 있다. 자신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자식들의 이야기가 나오게 마련이다.
자랑과 시기의 마음이 대화를 힘들게 한다. 게다가 누가 아프다, 자식은 어떻다 같은 이야기만 오간다. 결국 관계의 깊이보다 형식만 남는다. 그래서 점점 굳이 꼭 가야 하냐는 생각이 커진다. 대화보다 경청이 편한 나이다. 신앙을 가지고 종교에 탐닉하는 이유도 조금은 이해가 된다.
남 눈치 보다 내 마음이 더 중요해졌다. 우리 세대는 관계 교육을 많이 받았다. 학교는 물론이고 아주 어릴 때부터 밥상머리에서 사회 구성원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부모들은 가르쳤다. 가끔은 침묵으로, 때로는 꾸지람으로, 어떨 때는 솔선수범으로. 남의 손가락질과 다른 이들의 눈총을 받으면 안 된다는 가르침이 공자왈 맹자왈이 되었다. 사회적 질서와 사람 간 관계 속에서 어떤 언행이 바른지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
자신이 아니라 남을 위해 또는 지역사회나 국가를 위해서만 존재해야 의미가 있는 것으로 알았다. 군자(君子)가 어떻고 인자(仁者)가 어떠며 나라 사랑이 어떠해야 하는 것인지가 금과옥조였다. 몇 달구지도 넘을 만큼 도덕경을 마음에 넣고 살았다. 젊을 때는 그렇게 하는 것이 당연한 줄 알았다.
자신과 가족, 집안의 체면 때문에 이런 모든 것을 참고 살았다. 웃음과 울음의 구분도 자신의 감정이 아니라 사회적 체면에 따라 연기한 적도 많았다. 하지만 어느 나이 대를 넘기면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몸으로 느끼게 된다. 불편한 사람들 사이에서 억지로 웃고 있는 시간이 아깝게 느껴진다.
이제는 그런 것이 전부가 아닌 것을 안다. 북적이는 관계 속보다 차라리 혼자 조용히 보내는 시간을 더 편하게 생각한다. 결국 인간관계를 줄이는 건 냉정해져서가 아니라, 자기 마음을 지키기 위한 선택에 가깝다. 나를 위한 시간, 내 마음이 가는 대로 사는 것이 진정한 인간의 삶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함께 있어도 외로운 관계에 지쳤다. 사람이 많다고 외롭지 않은 건 아니다. 오히려 진짜 마음은 나누지 못한 채 형식만 남은 관계 속에서 더 큰 허무함을 느끼기도 한다. 학교나 사회적 관계 속에서 만난 인연은 마음을 나누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생존과 투쟁을 위해 인위적으로 만들거나 생겨난 관계다.
그나마 한마을에서 같은 시대에 태어나고 자라 자연발생적으로 맺어진 인연은 특정 이익이 배제된 순수한 감정의 관계망이다. 여름날 냇물에서 같이 풍덩이고 밤하늘 별들을 같이 쳐다보았다. 죽마고우를 만나면 부모님이나 형제자매와 같이 있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물론 그러지 못한 경우도 많지만.
가을 햇살은 잔약하고 낮은 짧다. 굳이 만나서 편하지 않은 사람을 만나 자신의 감정을 소모할 필요는 없다. 좋은 사람을 만나기에도 남은 시간이 빠듯하다. 이제는 많은 사람보다 편안한 몇 사람이 더 중요해진다. 결국 나이가 들수록 사람은 관계의 숫자보다 마음의 안정감을 더 찾게 된다.
요즘 은퇴한 장년이나 노년들이 인간관계를 끊는 이유는 단순하지 않다. 건강도 건강이지만 살아보니 의무감으로 이어지는 관계가 삶을 더 지치게 만든다는 걸 알게 된 것이다. 결국 인생 후반부에는 많은 사람보다, 함께 있을 때 마음이 편안한 관계 몇 개만으로 충분하다.
과거가 현재는 물론 미래의 삶을 만드는 것은 확실하다. 휘둘리며 살아왔으니 앞으로 휘두르며 살 것이라는 착각에서 벗어나야 하지 않을까. 지금 할 수 있는 것은 얼마 남지 않았다. 사회적 관계망을 재정비하고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이 그나마 종착역을 향해 가고 있는 헛헛한 마음을 채우는 일이다.
체면이나 의리라는 허울 좋은 과거는 잊고 질박하고 의미 있는 시간을 위해 살아야 한다. 마음에도 없는 말과 눈치 보는 처신을 벗어나 자신의 삶을 만들어야 한다. 한 번 왔다 가는 인생 아닌가.
남에게 비난받거나 사회적 지탄이 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자신의 자유와 정신적 욕구에 충실한 삶이 필요하다. 이제 곧 겨울이 온다. 땅으로 스며들었다가 푸른 하늘 아래 또 다른 부활을 꿈꾸는 것은 자유다. 이 무한한 우주는 자연발생적 자유의 덩어리 그 자체일지도 모르니까.
첫댓글 맞아요 함께 있을때 편안한 관계!!
딱, 그거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ᆢ
예전에 한 선배도 일흔쯤 되더니 전화번호를 지워가면서 정리하더라구요
자주 볼수있는 이름만 남기고
소용없는 연락처
가지치기였지요ᆢ한번 해봐야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