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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의 아버지의 졸업
창 49:1-33
죽음에 임박해서 자기의 자식들에게 할 수 있는 소리를 하고 죽었느냐 그런 의문부터 생깁니다. 유언입니다. 그리고 축복기도를 해줍니다. 그리고 예언적 성격도 띠고 있습니다.
1절에 보면
창 49: 1 야곱이 그 아들들을 불러 이르되 너희는 모이라 너희의 후일에 당할 일을 내가 너희에게 이르리라
이런 면에서 단순한 축복은 아닌 것 같습니다.
야곱이 르우벤과 시므온과 레위에게 마지막 유언으로 남긴 말을 보면 이럴 수가 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거의 저주에 가깝습니다.
르우벤의 경우, 아버지 야곱의 서모 빌하를 침상에 올라가서 성적으로 범합니다. 야곱은 그 일을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습니다. 정말 폐륜적인 죄악이긴 하지만 자식을 향한 어버이의 마음이라는 것은 금방 살인죄를 저지르고 현장에서 잡혀서 현장범으로 즉결심판에 넘어가서 감옥에 들어가는 아들을 보면서도 쟤가 원래 나쁜 아이가 아니라는 것이예요. 친구를 잠못 만나서 그렇고 내가 잘못 키워서 그렇지 저 놈은 원래 악한 놈은 아닌데 라고 말하는 것이 부모의 심정입니다.
지금 야곱은 세상을 떠나게 되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너무 지독한 이야기들, 예를 들어 시므온과 레위같은 경우는 아마 야곱에게 마음 속에 걸려 있던 것이 그들의 칼은 폭력의 도구로다 라는 말을 하는 것을 보면 세겜에서 디나가 강간을 당했을 때 야곱의 아들들이 세겜사람들을 칼로 쳐죽인 이야기들을 기억하고서 하는 이야기들은 아니겠는가 라는 추측을 해봅니다.
그런데 아무리 그렇게 해서 피바람을 몰고 왔다고 하더라도 지금 죽기 전에,
7절 그 노염이 혹독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요 분기가 맹렬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라. 내가 그들을 야곱 중에서 나누며 이스라엘에서 흩으리로다 하는 그런 말을 합니다.
아 정말 그럴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아요? 여러분?
영어로 가장 큰 욕이 God them입니다.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라, 지금 야곱이 자기 아들들에게 God them 하는 겁니다.
자녀를 향한 축복과 자녀가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 한 번 야곱의 이 유언과 같은 예언 이 축복의 기도를 앞에 놓고 우리가 자녀를 위해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어떤 마음인지 거울삼아 비춰 보자는 겁니다.
우리가 아버지로서 자녀들에게 축복의 기도를 합니다. 그때 우리가 항상 염두에 둘 것은 축복이라고 하는 것은 내가 주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자녀들에게 주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축복기도를 자녀들에게 해준다고 하는 것 여기서 우리가 조심해야 될 것은 공수표를 난발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자녀가 잘 되기를 바라는 인간으로서의 아버지인 나의 마음에서부터 나오는 대로 하나님이 주셔야 될 축복권을 내가 도중에서 빼앗아서 내가 복을 주는 그런 심정으로 축복을 할 수는 없습니다.
목사로서 참 힘든 얘기는 심방을 갔을 때나 아주 연세가 많이 드신 어른의 칠순 잔치라든지 아니면 그 집안 문중 예배가 있어서 드리러 갑니다. 그러면 그 대표되는 자녀를 부르면서 기도를 해야 될 때가 있어요. 결국 목사가 하는 기도라는 것은 그 사람들이 듣고 있는 가운데 축복의 기도를 해줘야 되는 것 아닙니까? 그 어르신이 계신 가운데 그 자녀들을 위해 축복 기도를 해줘야 되고 또 축복의 기도가 정말 이 세상에서 잘 되기를 바라는 세상 사람들도 다 갖고 있는 그 기준에 의해서 복을 받게 해달라는 그런 기도를 드릴 때 온 문중이 아멘 아멘 하는 소리를 들을 때가 있습니다.
기도를 해놓고도 솔직히 목사 양심상 마음이 찝찝합니다.
본문 28절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야곱이 그들 각인의 분량대로 기도를 해주었다 라는 말이 나옵니다.
목사가 심방가서 그 집안의 분량을 알아야 제대로 축복을 하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목사가 남의 집에 심방을 가서 그 집안 자녀들의 분량을 모르고 있는 것 뿐만 아니라 내 자식의 분량도 사실 알기가 쉽지 않습니다.
어쨌거나 중요한 것은 우리가 자녀들이 이 세상에서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 자체가 너무나 많은 경우에 공수표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시므온과 르우벤가 레위에게 내리는 이런 저주와 같은 예언적 축복기도는 이미 아버지됨을 포기한 상태로 볼 수가 있습니다.
이 야곱의 마지막 유언에서야 말로 하나님을 믿는 아버지들이 자녀들에게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하는 가를 너무나도 정확하게 너무나도 타협없이 우리들에게 전달해주고 있습니다.
결국 자녀들은 하나님이 그 자녀들을 보고 계시는 그 하나님의 입장에서 자녀들에게 모든 일이 임할 것이기 때문에 내가 인간적인 정을 가지고 자녀를 향해서 갖고 있는 바람과 소원과 어떤 교육적 의도같은 것들은 하나님이 그 자녀들을 보고 있는 관점과 다를 경우에는 완전히 공회전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아버지를 졸업한다는 것은 결국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믿는 사람에 한해서 누구에게나 일어나야 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 축복기도를 통해서 지금 야곱이 자녀들에게 해주고 있는 이야기는 이것입니다.
“나는 아버지로서 이제 빠진다. 하나님이 지금 너희를 보고 계시는 마음이 지금 이러한 상태다. 그러므로 이제는 너희 스스로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고 살아가라.” 이 뜻이 아니겠습니까?
아버지와 어머니처럼 세상에 중요한 일이 없는데 이렇게 중요한 신분과 위치에 올라서는데 있어서 그 자격을 묻지 않고 문제시 삼지 않는 그런 일은 세상에 또 없었을 것입니다.
조그만 중소기업에 말단 직원으로 들어가도 이력서를 내고 시험을 치고 사장과 면담을 해야 되는데 사람의 생명을 좌지우지 할 수 있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되는 일에 대해서는 누구도 자격을 묻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누구도 이 아버지와 어머님 됨에 일에 대해서는 잘잘못을 따지고 결산을 내자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자녀는 훌륭한 아버지이건 어머니이건 잘못된 아버지 어머니이건 간에 그 밑에서 태어나서 운명처럼 그 아버지 밑에서 살다가 죽는 겁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그 자식을 다 망쳐놔도 아무도 그 책임을 묻는 사람이 없습니다. 망가진 자식 그 자체를 모든 그 자식의 일을 그 자식에게 책임을 물어서 이 사회에서는 그 사람을 인격적으로 대우한다고 생각하며 살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도 내가 시험을 봐서 시험 성적이 나쁘면 내가 벌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자식을 잘못 기른 것에 대해서는 자식이 안 되서 내가 그냥 괴로운 것 뿐이지 내가 망가뜨린 자식 자체에 대한 벌은 이 세상에서는 책임을 추궁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굉장히 중요한 일입니다. 다 아버지를 졸업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르우벤과 시므온과 레위에게 이렇게 냉혹할 정도로 말하는 앞으로 당할 일을 저주로 섞어서 말을 하게 되는 야곱의 입장에 대해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은 그들의 그릇대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어갈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자녀를 볼 때 인정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녀라는 것은 이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내 자녀가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나의 자녀에 대한 사랑과는 무관하게 객관적으로 인정할 수 있을 때 오히려 진정한 아버지가 될 수 있습니다. 인간적인 정으로 내 아들, 내 딸 그런 상태의 아버지는 졸업을 하셔야 됩니다. 그래야 내가 자녀에게 할 말과 자녀를 가르칠 말과 매를 들 때와 들지 않을 때가 정확하게 구분이 될 수 있습니다.
인간적인 마음을 가지고 그냥 자녀가 잘 되기를 바란다? 도대체 잘 된다는 게 뭡니까? 아버지로서 잘 된다는 자녀들의 복, 그 복이 도대체 뭡니까? 그게 진짜 복일까? 모든 아버지들이 자녀에게 갖고 있는 지금의 복이라는 것이 자녀들에게 복이겠습니까?
제일 중요한 것은 자녀가 먼저 하나님 앞에 서 있고, 자녀가 단독자로서 아버지로부터 분리된 인격체로서 하나님과 맞서야 된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인간적인 정으로서의 아버지를 졸업하지 않는 한 그 자녀에 대해서 바른 가르침을 하나님으로부터 중계해 줄 수 없습니다.
우리 아버지 졸업하십시다. 아버지 학교라는 것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 상태, 지금 자녀를 내 자녀라고 생각하고 있는 이 상태에서 아버지 노릇 잘하며 가르치겠다고 하는 것 그것은 아닐 것입니다.
여러분 자녀를 이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손목이 있고 손이 있습니다. 손에는 손가락 다섯 개가 있습니다. 한 손목에 다섯 가지의 손가락이 있습니다. 지체입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자녀는 세상에 태어나서 자라는 과정 중에서 어쩔 수 없이 이 세상을 지배하는 어두움의 영 그들의 자식이 됩니다. 한 어두움의 영에 지배되는 자녀들로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원죄가 도사리고 있고 어둠의 자식들입니다. 내 자식이 아니라 세상을 지배하는 어두움의 자식들입니다.
이렇게 놓고 보는 겁니다.
그리고 나서 그들을 밝음의 세계, 구원의 세계로 끌어오는 것이 우리의 과제인 것입니다.
내 자식이 결코 아닙니다. 이 세상의 가치관에 찌들고, 먹혀버리고 그래서 세상 자식으로 밖에 될 수 없는 이 자식들을 그들이 인격체가 되고 독자적인 인격으로 성숙해가는 과정 중에서 그 어둠의 세계로부터 하나님의 세계로 끌어 오는 것이지 내 자식이 아닙니다.
그 아이 마음 속에는 벌써 세상이 지배하고 있는 영이 들어가 있기에 내 자식이 아닙니다. 돈을 사랑하고, 이성간의 관계, 자라가면서 음란한 풍조에 따라가고... 내 자식은 안 그런다구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그렇게 생각지 마세요.
지금 야곱이 르우벤과 시므온과 레위를 저주하는데 아버지의 심정으로 했겠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그 모양이면 그럴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인정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아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 나의 살뜰한 부친으로서 모친으로서의 정을 빼놓고 하나님 앞에서 서 있는 그 아이들의 모습은 이런 저주를 받아 마땅한 아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과제는 좋은 대학이 급한 게 아닙니다. 좋은 직장에 들어가는 것이 급한 게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대로 갈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아이들을 끄집어내야 되는 것입니다.
명심하세요. 내 아이가 아니라는 것을 말입니다. 그 속을 지배하고 있는 가치관, 신념체계들은 이미 세상에 먹혀 버린 상태입니다. 아비가 그렇게 가르치질 못했으면서도 아비된 자도 이미 세상에 먹혀서 자식을 길렀으면서도 그 아이들이 잘 되기를 바란다고요?
르우벤, 시므온, 레위는 하나님 앞에서 저주를 받을 수 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그렇게 놓고 시작을 해야 됩니다.
그리고 한 가지 생각해봅니다.
유언이고 예언이고 축복 이 형태 앞에서 우리가 한 번 기독교적인 축복이 과연 무엇인지를 생각해보기를 바랍니다.
예를 들어서,
베드로가 앞으로 당할 일을 연관해서 축복기도를 해주었다, 예언기도를 해주었다치면 어떤 예언이 나왔겠습니까?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습니다. 그러면 이것은 축복입니까, 저주입니까?
사도바울은 말합니다. 너무나 많은 환난을 당했다고 말합니다. 매를 맞고 파선을 당하고 며칠을 굶주리고 등등. 그러면 이 사람의 삶을 예언했다고 합시다. 사도바울의 이 세상에서의 삶을 사주팔자로 놓고 봤다면 이게 복입니까?
그리고 또 오늘 유다의 예언 중에 어린 사자와 같다, 움킨 것을 찢는다 그런 예언이 있습니다. 그런데 초대교회 성도들이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어떤 일을 당하지요? 사자에게 찢김을 당합니다. 그러면 그 초대교회 교인들의 삶을 예언을 했다고 합시다, 축복을 했다고 합시다.
그럼, 뭐가 맞아 들어간다고 보십니까? 사자에 찢겨 순교 당한 사람들은 저주받은 인생입니까? 사도바울처럼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온갖 환난을 다 당했어요. 그러면 이 사람의 생애는 실패한 생애입니까?
베드로는 거꾸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어요. 그 사실을 예언했다고 봅시다. 당신은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을거야. 이런 저주가 어디 있겠습니까?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받은 자라고 하는 성경 말씀대로 저주를 곱빼기로 받은 것 아닙니까?
그런데 베드로는 어떻게 생각하느냐면 주님이 십자가에 달린 그 십자가에 내가 거꾸로 달린 것이 나의 복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생각하는 복이 얼마나 개념적으로 잘못되어 있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기껏 자식에게 잘 되라고 하는데 뭐가 잘 되라고 하는 것인지 대체 모르겠습니다.
죽음 이후에 아버지 보좌 앞으로 나아가는 그 시점을 생각하지 않으면 기독교의 축복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180도 달라질 수가 있습니다.
대학에 떨어져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그 괴로움 속에서 하나님 붙잡는다면 그게 축복이지, 어떻게 멀쩡하게 대학에 들어가서 내가 이런 정도의 사람이 될거야 하며 어깨에 힘주고 다니는 자식이 어찌 축복이겠습니까? 그 속에 죄악이 살아 있는데 말입니다.
축복의 개념, 아주 혼란스럽지요?
중요한 것은 아버지 졸업하는 겁니다. 인간의 정이라고 하지만 인간의 정 아닙니다. 우리 인간의 정 속에 이 세상을 지배하는 어둠의 영들이 들어와 있고 그 영이 가르쳐주는 가치관과 신념체계를 따라서 인간의 정이라고 포장된 그 마음의 상태에 따라 아이들에게 잘 되기를 바라고 있는데 그게 어떻게 인간의 정 운운하십니까?
자식을 죽이는 게릴라를 마음 속에 담고 자식을 내보내는 겁니다.
너 좋은 대학에들어가라는 그 말 한 마디에 자식을 죽이는 게릴라를 집어넣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면 정말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떻게 대학 잘 들어갸야 되요? 천국 가야 되고, 하나님 마음에 잘 들어가야 되지요. 하나님 마음에 들어가야 됩니다. 우리가 너무나 잘못 되어 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이것은 아버지가 아닙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죄악으로 지배되고 있는 그 상태에서 아무리 잘 되라고 해봐야 오물 묻은 손으로 자식의 몸을 만지며 깨끗하라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의 십자가 붙잡고 자식 앞에서 아버지로서 죽읍시다. 그래서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서 지금 내 자식이 어떤 상태에 있는가를 객관적으로 봅시다. 그리고 어둠의 자식으로 있는 것을 인정하고 그 상태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끌어오는 선교사로서의 아버지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주신 자녀들은 사실은 영적으로 내 자식들이 지금 아닙니다. 어둠의 자식들이고 마귀의 자식들이 되었습니다. 객관적으로 내 자녀를 바라보면서 이게 내가 해야 될 일이 무엇인가를 정확하게 알 수 있도록 저희들의 마음을 일깨워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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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