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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새해인사에 담긴 저주>의 줄거리:
설날입니다. 어른들에게는 새배를 드리고 아래 사람들에게는 덕담을 건네며 새해 인사를 합니다. 새해인사의 핵심 내용은 언제나 오복이고 형통이고 성공입니다. 그런데 무심코 주고 받는 이 새해인사 속에 사실은 끔직한 저주가 들어있습니다. 저주가 미화 되어있고 저주가 찬양되고 있습니다. 또한 이같은 저주찬양의 앞잡이가 바로 거짓 그리스도요 거짓 선지자들입니다
새해인사에 담긴 저주
(마24:1-14)
1. 예수께서 성전에서 나와서 가실 때에 제자들이 성전 건물들을 가리켜 보이려고 나아오니
2.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보지 못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3. ○예수께서 감람 산 위에 앉으셨을 때에 제자들이 조용히 와서 이르되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또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5.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하리라
6.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하지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아직 끝은 아니니라
7.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곳곳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8. 이 모든 것은 재난의 시작이니라
9. 그 때에 사람들이 너희를 환난에 넘겨 주겠으며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가 내 이름 때문에 모든 민족에게 미움을 받으리라
10. 그 때에 많은 사람이 실족하게 되어 서로 잡아 주고 서로 미워하겠으며
11.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겠으며
12.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13.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14.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 중심으로 <새해인사에 담긴 저주>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오늘이 마침 설날입니다.
설날을 맞이해서 아랫사람들이 윗분들께 세배를 통해서 인사를 합니다.
그리고 세배를 받은 어른들은 아랫사람들에게 미혼의 자녀들에게는 세뱃돈을 주고 덕담을 건네주면서 새해인사를 나누게 됩니다.
그런데 이렇게 아름답고 훈훈한 새해인사 속에 참으로 끔찍한 저주가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보존되어 있다고 하는 표현을 쓰는 이유는 태초에 아담과 하와가 타락했을 때, 하나님께서 그들을 유혹한 뱀으로 상징된 사탄에게 내렸던 저주가,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설날에 드리는 세배와 나누는 덕담 가운데에 그대로 들어있기 때문이에요.
그 저주가 어떤 내용인가 하면,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이런 겁니다.
김혜자 씨가 쓴 책 중에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는 책이 있어요.
월드비젼의 대사로 임명받아 일하시면서 난민들이 많이 있는 가난한 나라를 돌아다니면서 보고 들은 것을 그대로 적은 책입니다.
2004년엔가 나온 책인데, 오래 돼서 기억이 잘 안 납니다만…
아프리카의 어느 지역에 가면 어린아이들이 너무 배가 고파서 어떤 풀을 뜯어먹습니다.
그런데 그 풀을 먹게 되면 입술부터 해서 온몸에 푸른빛이 돌게 되고, 이 풀을 먹게 되면 심장과 위에 치명적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너무 배가 고프니까 몸이 새파랗게 되고 심장과 위에 치명적일 수 있고, 심지어 실명까지도 할 수 있다는 이 풀을 아이들이 뜯어먹습니다.
또한 배가 고파서 잠을 잘 수가 없어서 허기진 배 위에다 무게가 꽤 나가는 돌을 구해 얹고 잡니다, 배를 눌러주어야 허기를 덜 느끼고 잠이 온다고 해서 그렇답니다.
이건 뭐 완전히 굶주림과의 싸움이지요.
그런데 먹을 것이 없는 상태에서 몸에 해로운 독초를 뜯어서 먹는 것과 같은 그런 형국이 새해인사 속에 그대로 담겨져 있다는 것입니다.
굶주림 속에서 독초를 뜯어먹는 것과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 바로 이 세상 삶이고, 그 삶에서 우리가 원하는 것이 새해인사 속에 담겨져 있지 않습니까?
우리의 소원을 새해인사 속에 담아서 서로에게 나누어줍니다.
자, 무슨 내용인데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일까요?
오늘 본문은 세계종말에 대한 예언이 담겨져 있는 유명한 마태복음 24장의 시작부분입니다.
그런데 그 종말의 특징이 뭐냐 하면, 전쟁과 지진과 기근, 이것이 종말이 시작하는 싸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영적인 특징이 있다면 거짓 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가 출현한다는 것이에요.
그러면 이 모든 일들이 세계종말과 관계되어 어떻게 연관되기 때문에 새해인사 속에 저주가 담겨있다는 말을 우리가 도출해낼 수 있는 것인가, 세계종말이라는 게 갖는 의미가 무엇이냐 라는 겁니다.
마태복음의 작은 묵시록이라는 별명이 붙은 이 종말에 관한 이야기가 쓰여 진 지 벌써 2천년이 지났습니다.
그러나 종말이 당장에 온 것은 아닙니다, 계속 시작만 하고 있는 것 같아요.
전쟁과 기근과 지진이 재난의 시작이라고 그랬는데, 2천년 동안 전쟁이 없던 날이 없습니다.
짧게 지난 백 년 동안만 해도 14일만 전쟁이 없었다고 그럽니다.
전쟁이 없었던 때가 없고, 기근이 없었던 때가 없고, 지진이 없었던 때가 없습니다.
지진, 말할 것도 없어요, 일본에서도 얼마 전에 지진과 쓰나미가 있었고, 중국에서, 터키에서, 곳곳에서 지진이 2천년 역사 속에 계속 일어나고 있습니다.
제일 잘 산다는 미국에서 3천만 명이 비만인 상황에서 300만 명이 절대기근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아프리카나 아시아지역뿐만 아니라 미국 안에서도.
이게 종말의 싸인이라는 것이에요.
그런데 2천년 동안 이 싸인만 있어왔고 시작의 모양만 있어왔습니다.
종말은 없었어요.
그러면 기독교에서 그렇게 반복해서 얘기하고 있는 종말의 의미가 도대체 무엇입니까?
또, 영적인 표징이 무엇으로 나타나느냐? 거짓 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라는 겁니다.
이 종말이 갖는 의미, 우리 마태복음에 이어져가는 맥락 안에서 생각을 해봅니다.
종말에 대한 신학적인 이해, 이런 것 말고, 마태복음 안에서 이해를 해보면 그 실마리가 어디에 숨겨져 있는가 하면 23장 33절에 있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향하여 주님께서 외식하는 자들이라고 일곱 가지 화와 저주를 말씀하시면서 그들을 뭐라고 부르시는가 하면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어떻게 너희가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라고 말씀하십니다.
거짓 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가 외식한다고 예수님의 눈에 비쳐진, 그래서 지옥의 판결이 불가피하게 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과 무관하지 않다고 봅니다, 즉 한 통속이라는 거예요.
거짓 선지자나 거짓 그리스도가 종말의 영적인 싸인인데, 이들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어떤 자들이냐 하면 뱀이요 독사의 새끼들이라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사탄의 자식들이라는 얘깁니다.
근데 사탄의 자식들이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뭐냐 하면 사탄에게 내려진 저주가 그대로 유전자가 옮겨진 것처럼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속에 보존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그들 속에서 사탄의 저주가 활성화 되고 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거짓 선지자와 거짓 그리스도와 한 통속이라는 것은 그들 속에서 사탄에게 주어진 저주가 활성화되어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죠.
그러면 그들에게 내려진 저주가 뭡니까?
창세기 3장 말씀을 우리가 계속해서 반복하며 얘기하고 있어요.
그들에게 내려진 저주는 다름 아닌 ‘너희가 살아있는 동안에 배로 기어 다닐 것이요, 살아있는 동안에 흙을 먹으리라’는 간단한 말입니다.
그런데 ‘더욱 저주를 받아 너희가 배로 기어 다닐 것이요 살아있는 동안에 흙을 먹으리라’
이 말씀이 뭐라고요?
사탄에게 내린 저주는 뭐냐 하면 배로 기어 다니는 겁니다, 그리고 흙을 먹는 겁니다.
이것이 뜻하는 바는 사탄도 기쁨을 원하는 모양입니다.
다시 말해 사탄도 욕구가 있습니다.
빈 마음의 배를 채워야 됩니다.
그런데 그에게 내린 저주는 ‘너는 너의 기쁨과 행복을 위하여 너의 배를 채울 때, 그 배가 땅에 붙어있으면서 땅에 있는 흙을 먹어서 너의 배를 채우라’, 이게 저주의 내용이라는 겁니다.
쉽게 말하면 ‘이 세상에서 네 배를 채울 기쁨을 찾아라’, 이게 저주라는 거예요.
그런데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라고 한 것과 마찬가지로 거짓 선지자와 거짓 그리스도가 그런 저주를 받은 뱀의 자식들이 되었다는 겁니다.
그러면 거짓 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에게 나타나는 이 뱀의 저주가 활성화된 모습은 어떻습니까?
바로 이 땅 위에서 이 세상 안에서 내 마음의 배를 채울 수 있는 기쁨의 대상들을 찾아내는 것, 그래서 이 세상에서 그 기쁨거리들을 먹고 채우려고 하는 것, 이게 바로 저주라는 겁니다.
마치 굶주린 아프리카의 아이들이 나를 죽이는 독초를 먹어서 배를 채우려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렇게 이 세상에 있는 것들로 만족해서 기쁨을 얻으려고 하는 것이 사탄에게 내린 저주인데 이 저주가 유전자로 사람에게 옮겨져서 사람이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가지고 기뻐하려고 합니다.
이게 바로 저주라는 거예요, 저주.
새해인사 속에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그 복은 당연히 오복을 말합니다.
그래서 이 복이라는 게 구체적이지 않고 피부에 와 닿지 않으니까 이제는 아주 쌈빡하게 인사를 바꿉니다.
‘새해 돈 많이 버세요!’, 분명합니다, 확실합니다, 듣는 사람도 기분이 좋습니다.
복이라고 하면 뭔가 막연하게 느껴지는데…
또, 나이가 많으신 분들께는 ‘오래오래 건강하게 사세요!’ 그러면 어른들은 덕담을 어떻게 건네주십니까?
‘올해는 꼭 합격해라, 올해는 꼭 승진해라, 꼭 결혼해서 아들딸 많이 낳고 잘살아라!’ 덕담을 건네줍니다.
이 모든 게 다 저주라는 겁니다.
이 세상에 있는 것들로 배를 채워야 될 것이라는 뱀에게 내린 저주가 그대로 옮겨졌고 거짓 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들은 바로 이 저주를 축복으로 미화하는 자들이라는 겁니다.
‘이 세상에 있는 것들로 배를 채워라, 독초를 먹어서 허기진 배를 달래라, 이 독초가 아름다운 것이다’라고 저주를 미화해서 사람들에게 가르치고 인도하는 자들, ‘예수 잘 믿으면 이 세상에서 형통할 것이다’ 이 한 마디가 그를 거짓 그리스도요, 거짓 선지자로 만드는 내용입니다.
아니, 거짓 선지자이기 때문에 독사에게 내린 저주를 그대로 반복하고 활성화시키면서 사람들을 인도하는 겁니다.
그러면 저주가 아닌 복은 무엇입니까?
변화산에서 베드로가 경험한 것을 우리가 상상해 보면 복이 무엇인지, 왜 세상에 있는 것들로 배를 채워서 기뻐하려 하는 것이 저주인가를 알 수가 있어요.
베드로가 변화산에서 영원한 천국에서 아버지와 함께 있을 때의 예수님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빛의 덩어리이신 예수님을 봅니다.
그때 그 예수님을 보면서 베드로의 기쁨이 터져나갑니다.
그 빈 마음의 뱃속이 예수그리스도의 영화로운 모습으로 채워지면서 ‘여기가 좋다’고 말하고 세상과 모든 걸 다 잊어버리고 그 예수님이 보이시는 거기서 영원히 살자고 소원을 발동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하나님 되신 그 모습을 볼 때 채워지는 배, 이것이 바로 축복이라는 거예요.
그리고 사람의 마음은 원래 이렇게 그 하나님으로만 채워질 수 있게끔 만들어진 것인데, 거역하면서 내려진 뱀의 저주가 옮겨지면서 그렇게 영화로운 하나님으로 채워져서 기쁘고 만족해야 될 사람이 이 땅에서 보이는 사람, 보이는 일, 보이는 대상, 보이는 물건, 이런 것들로 채워서 기뻐지지 못해 안달하게 되는 이것이 바로 저주의 활성화라는 거예요.
뱀에게 내려진 저주가 주어진 것이라는 거죠.
그러면 ‘이 세상이 전쟁과 기근과 지진으로 시작된 재난을 통해서 언젠가는 반드시 심판으로 끝이 날 것이다, 이 세상의 종말이 있을 것이다’라는 것이 주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이 세상에서 독사에게 내린 저주를 유전자로 물려받아서 이 세상 것으로 배불리려 하며 살고 있는데, 우리가 그렇게 먹고 싶어 하고 있는 이 세상의 근본적인 속성, 그것은 바로 끝이다’라는 겁니다.
전쟁과 지진과 기근으로 표현되어지는 속성들이 우리가 그렇게 갖고 싶어 하는 이 세상의 것들이라 이겁니다.
배를 채우고 싶어 하는 이 세상의 대상들의 속성이 그런 것들이라는 거예요.
마귀에게 저주가 내려진 것은 ‘이 세상으로 배를 채워라, 그런데 세상은 끝이 있다’, 다시 말하면 세상이 멸망할 때 같이 멸망하도록 묶여있는 겁니다, 마귀의 운명이.
그런데 그 마귀에게서 그대로 받아가지고 멸망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이 운명 지어진 이 세상에 있는 것들로 배를 채우려고 하고 있다는 것이에요.
그러므로 사업가가 사업이 잘되는 것으로 기뻐하고 있잖아요? 그게 저주받은 거예요.
베드로가 변화산에서 본 그 하나님으로 그 천국으로 배불러야 될 마음이 이 세상에서 돈 잘 벌었다고 기뻐하게 되는 것은 아프리카의 어린이들이 굶주림을 못 이겨서 위와 심장, 그리고 실명의 위험까지 가져다 줄 수 있는 독초를 먹으며 배를 채우는 것과 같다 이겁니다.
세상에서 일류대학에 들어가서 기뻐하려고 하는 것은 저주받은 인생의 특징이고 마귀에게 내린 저주가 내게서 활성화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마귀의 유전자, 뱀인 사탄의 유전자가 나한테서 활성화되어 일어나고 나타나고 있다는 얘기에요.
새해인사가 바로 저주를 담고 있는 겁니다.
그 영화로운 하나님으로 기뻐해야 될 사람들이 이 세상의 것들로 배불리려 하고 있다는 것이에요.
그러면 새해인사를 하시려면 ‘하나님으로 배부르세요!’ 이렇게 인사를 하세요.
‘변화산에서 베드로가 만났던 그 주님을 반드시 만나세요!’ 이렇게 인사를 하자는 겁니다.
주님의 십자가가 죄 사함의 역사예요, 우리가 태어나서 지금까지 지은, 아담에 의해서 유전적으로 내려온 죄 값을 사해주시는 역사입니다.
그런데 거기서 끝나면 안 됩니다.
사도바울은 그 십자가의 사건을 과거에 대한 죄 사함의 문제뿐만 아니라 앞으로 살아가야 될 이 세상의 삶에서 세상에 대해 죽는 것이라고 말을 합니다.
세상에 대해 죽는다는 건 뭡니까?
마귀에게 내린 저주로부터 우리가 해방되는 겁니다.
마귀에게 내린 저주가 마귀에게 지배를 받으면서 우리에게 유전자처럼 내려와 있는데, 그 저주로부터 해방되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세상에 대해 죽는다는 것은 자식이라고 하는 풀을 내게 독이 됨에도 불구하고 뜯어먹으려고 하고, 돈이라고 하는 독을 뜯어먹으려 하고, 이러한 저주받은 유전형질로부터 자유로워진다는 겁니다.
이 세상에서 잘되려 하고 이 세상에서 기뻐하려 하고 이 세상에서 행복하려 하지요?
이게 바로 저주받은 인생의 특징이라는 거예요.
주님의 십자가는 이 저주로부터 우리를 풀려나게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 세상에서 사업하는 것, 가정을 꾸리고 사는 것, 이건 다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하나님으로 기뻐하게 된 자들이 가정에서, 사업장에서, 직장에서 살 때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장소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수단이요, 매개물인 그것을 내 마음에 담으려고 할 때 그것이 독초로 작용한다는 겁니다.
변화산에서 보여 졌던 그 하나님으로 우리의 마음은 배가 불러져야 유일하게 배부를 수 있는 길을 찾아들어가는 것입니다.
그 이외에는, 뱀에게 분명히 하나님께서 저주로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평생 배로 땅을 기어 다닐 것이다’, 다시 말해서 허기진 배를 이 땅에 붙이고 땅의 것을 먹으면서 배를 채우려 하는 것, 이 지구에 있는 것으로 기쁨을 얻으려 하는 것, 이게 사탄에게 내린 저주인데, 그 사탄에게 지배받는 우리의 특징이 이 땅에 있는 무엇으로 기쁨을 얻으려고 하는 것으로 활성화되어 나타나는 것이고, 그렇게 먹고 싶어 하는 이 세상이라는 것은 종말이 있고, 전쟁과 기근과 지진으로 특징지어지는 속성을 갖고 있는 것이라서 결코 먹어서 배부를 수가 없고, 먹어서 안정될 수도 없고, 먹어서 행복할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새해인사 속에 담긴 저주, 그 의미를 생각하면서 이 뜻 깊은 설날을 보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뱀에게 내린 저주를 미화하는 자들이 거짓 그리스도요 거짓 선지자이며 또한 거짓 교인임을 우리가 명심하게 하여 주셔서, 십자가를 통하여 뱀에게 내린 저주로부터 온전히 풀려나올 수 있게 하여 주시고, 오직 성령의 역사를 힘입어 베드로가 변화산에서 만났던 그 예수님, 그런 하나님아버지로만 내 배가 채워질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