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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양로원 갑천뉴스타트 원문보기 글쓴이: 엘리야
부모 공경/ 신5:16
추석은 오랜만에 멀리 계신 부모님을 찾아 뵙고 위로도 해 드리고 기쁘게 해 드
리는 미풍양속입니다. 이런 분위기에서 우리가 부모 공경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무
엇이라고 말씀하시는 지 검토해 보는 것은 시기 적절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직
부모 밑에서 독립을 못하고 부모의 양육과 보호를 받아야 하는 어린 자녀가 부모님
을 공경하는 문제는 오늘 제가 언급을 하지 않겠습니다. 이미 성인이 되어서 부모
에게서 독립을 하고 또 어떤 면에서는 부모가 더 이상 계시지 않아도 하등 지장을
받지 않을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우리들에게 "부모를 공경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사실 저는 부모 공경에 대한 설교를 잘 하지 않습니다. 부모 공경은 저 역시 자
신이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설교자가 자신이 없다 할지라도 하나
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면 우리는 겸허하게 말씀 앞에 앉아 말씀을 듣고 순종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가끔 보면 "부모 공경"에 관한 이야기를 하기만 하면 '지금이 어떤 세상인데...'
하는 생각에 잔뜩 인상을 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요즈음이 그런 것 가지고 신경
쓰는 시대는 아니지 않은가?'하고 항의하는 것입니다. 더욱이 오늘 우리가 읽은 본
문, 곧 십계명을 가지고 설교할 때는 더더욱 그런 생각을 품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 잘못된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말씀에는 요즘 세상이 어떠니저
떠니하면서 부모 공경을 적당히 해도 된다고 가르치는 내용은 단 한군데도 안 나오
기 때문입니다. 만일 여러분 가운데 '수 천년 전의 고대 사회에나 통하던 이야기를
오늘 현대인들에게 가르치는 것은 무리가 있지 않나' 하고 생각하는 분이 계시다면
하나님께서 잘못된 부분을 시정해 주시기 바랍니다. 또 '그렇지 않아도 부모공경
하라고 하면 늘 마음이 편치 않은데, 왜 이 좋은 명절날 사람 아픈 데를 찌르지?'
하고 생각하는 분이 계실지도 모릅니다. 사실 우리 모두는 부모 공경을 생각하면
늘 마음에 아픔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부모님을 이미 세상을 떠나보내어 공경하
고 싶어도 공경할 수도 없는 안타까운 상황에 있는가 하면, 또 어떤 사람은 과거에
자기가 부모에게 한 일을 떠올리며 가슴 아파합니다. 그러나 마음이 아프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안 들어야 좋다는 법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시간 먼저 우리의 마음 정리부터 합시다. 제가 부모 공경에 대해서
설교를 하기 시작하니까 벌써 굳어 있는 얼굴들이 있습니다. 그래서는 안됩니다.
얼굴을 펴십시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어린아이와 같은 심정이 되어 '하나님 제
가 잘못 생각하는 것이 있으면 이 시간 치료해 주시고, 제가 몰랐던 부분이 있으면
가르쳐 주시고, 부족해서 순종하지 못한 것 있으면 순종할 수 있도록 은혜를 주옵
소서' 하는 마음으로 설교를 들으셔야 합니다.
제 5 계명과 현대인
성경에는 율법에 대한 이름이 세 가지 나옵니다. '하나님의 법'과 '예수님의
법', '모세의 법'이 그것입니다. 율법을 '하나님의 법'이라고 부를 때는 주로 십계
명을 가리킵니다. 십계명에 해당하는 도덕률을 일컬어서 '하나님의 법'이라고 하는
데, 십계명은 창조자 되신 하나님의 의지가 담겨 있는 법입니다. 자녀를 낳으면
'자녀를 이렇게 키우겠다' 하는 부모의 뜻이 있지 않습니까? 마찬가지로 세상을 창
조하시고 인간을 만들어 이 세상에 두신 하나님 역시 '피조물인 인간을 이렇게 가
르치고 싶다' 하는 뜻이 있었습니다. 십계명은 바로 이 뜻을 표현하는 법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 십계명을 주실 때 매우 독특한 방법으로 가르쳐 주셨
습니다. 먼저 하나님은 시내 산에서 모든 백성이 들을 수 있는 큰 우뢰소리와 같은
음성으로 이 법을 선포하셨습니다. 그 다음에 하나님은 두 돌 판에다 이 법을 친필
로 새겨 모세에게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법을 언약 궤에다 넣어서 보관하도록 명
령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직접 선포하셨을 뿐 아니라, 친필로 써서 그것을 언약 궤
에 보관하게 하기까지 하셨다는 것은 하나님이 이 법에 구약의 다른 어떤 율법과는
비교도 안될 만큼 큰 비중을 두고 계시다는 사실을 잘 보여줍니다. 십계명은 그 만
큼 중요한 법인 것입니다.
이렇게 선포된 십계명은 예수를 믿든, 안 믿는 간에 모든 사람의 본성에 각인이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처음 이 법을 주실 때 돌 판에다 새기신 것이 사실이지
만 실제로는 모든 사람들의 양심에다가 새겨 놓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절대로 폐지
될 수 없는 법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십계명을 아예 폐기해 버리셨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의 양심에 있던 도덕적인 인식이 다 없어졌다고 해 봅
시다. 이 세상은 그야말로 무정부 상태가 될 것이고, 정글 법칙만 통하는 그야말로
잔혹한 현실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십계명을 절대 우습게 보면 안
됩니다.
다음으로 '모세의 법'은 주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 적용되는 구약의 율법들을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우리와는 별 관계가 없는 법들입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의
법'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법'을 재해석하고 적용한 것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주신 십계명을 그대로 받아서 순종하셨으며, 그 계명을 완성
하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완성하신 그 계명 똑같이 행하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셨
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이 하나님의 법인 십계명을 받아서 우리에게 그대로 행하
라고 말씀하실 때 우리는 이것을 일컬어 '예수의 법'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하는 제 5계명을 철저하게 순종하신 분입니다. 우
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예수님의 아버지 요셉은 일찍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렇다
보니 예수님은 10대 후반인지 20대 초반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젊은 나이에
어머니를 모시고, 동생을 부양하는 가장의 노릇을 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33년의
전 생애 중 30세가 되기까지의 오랜 세월 동안 그 힘든 목수 일을 하셨습니다. 그
러니까 예수님의 전 생애의 10분의 9는 제 5계명에 순종하는 생이었다고 봐도 과
언이 아닌 것입니다.
예수님의 철저한 순종은 십자가 위에서도 잘 나타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마지막 숨을 거두시는 순간에도 어머니 걱정을 했습니다. 어머니를 혼자 남겨
두고 가는 것이 너무 걱정스러워서 다소 생활의 여유가 있는 그의 제자 요한에게
자기 대신 그 어머니를 부양해 달라고 부탁하신 것입니다(요19:26-7). 예수님은 제
5계명을 그만큼 철저하게 순종하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손에 만들어진 피조물로서 '하나님의 법' 아래 놓여 있으며, 구
원받은 백성으로서 '예수님의 법' 아래 놓여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처럼
순종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명령을 우리는 지켜야 합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는 십
계명을, 특히 제 5계명을 우습게 보면 안됩니다. 우리가 매 주일 예배 드릴 때마다
외웁니다만 '케케묵은 옛날 법인데 뭐' 하고 생각하면 큰 일 납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제 5계명은 시대에 따라 혹은 사람에 따라 변하는 법이 절대 아닙니
다. 시간을 초월하고 세계를 초월해서 영구히 살아있는 하나님의 법입니다. 수 천
년 전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구속력을 가졌던 것처럼 오늘 현대인에게도 동일한
구속력이 있는 하나님의 법인 것입니다.
약속 있는 첫 계명
사실 숨이 막힐 정도로 급하게 돌아가는 현대 사회에서 나이 든 부모를 공경한다
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모릅니다. 저도 팔십이 넘으신 어머니를 모시고 있
고, 또 팔십이 넘으신 장모님을 지척에다 모시고 있기 때문에 부모님을 모신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날마다 곁에 가서 말벗이 되어
주고 싶고, 아프다고 하는 곳이 있으면 주물러 드리고 싶고, 원하시는 것 있으면
무엇이든지 돈 아끼지 않고 다 사다 드리고 싶고, 아침저녁으로 가서 큰절을 올리
며 문안도 드리고 싶고, 할 수만 있으면 아파트에서 제일 쾌적하고 밝고 크고 좋은
방을 드려 거기서 편안히 여생을 보내도록 하고 싶지만 뜻대로 안 되는 것이 사실
입니다. 어머니가 말벗이 필요한 줄 뻔히 알지만 일단 내 몸이 피곤하니까 어머니
곁에 가서 하루종일 있었던 일을 다 이야기해 드리지 못합니다. 마음이야 어머니에
게 쾌적한 방을 드리고 싶지만 실상은 큰방은 우리 부부가 차지하고 앉았고, 그 다
음에 햇살이 들어오고 공부하기 괜찮다 싶은 방은 큰아들에게 돌아가고, 둘째 아들
에게 돌아갑니다. 그러다 보니 어머니는 저 문간방으로 밀려갑니다. "어머니 어쩌
지요? 여기가 조용하기는 하지만 햇빛도 안 들어오고 좀 답답하실 텐데요. 그래도
어머니는 각별히 책을 보시는 것은 아니니까 여기 계셔야 되겠네요." "아이고 이것
만해도 나는 감지덕지(感之德之)다. 괜찮다." 어머니께 제일 좋은 방을 드려도 시
원치 않은데 이런 저런 이유로 그렇게 하기가 쉽지 않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설혹
드린다고 해도 어머니는 한사코 크고 좋은 방을 마다하고 저 문간방으로 가실 것입
니다. 연세 드신 어머니 아버지를 공경하기가 그만큼 쉽지 않은 것입니다.
오늘 조간 신문에는 충격적인 기사 한 토막이 실려 있었습니다. 경남에 있는 어
떤 가정에 70대 초반 정도의 어머니 두 분이 아파트에서 뛰어내려 자살했다는 기사
입니다. 치매 현상이 있던 어머니인데 자녀들이 잠깐 집을 비운 사이에 뛰어내리고
만 것입니다. 아무리 치매에 걸렸다 해도 노인들에게는 눈치가 있습니다. '자녀들
이 자기를 얼마나 불편해 할까?'하는 생각이 뇌리에서 떠나지를 않는 것입니다. 이
따금 자녀들이 그런 내색을 할 때면 모른 척 하고 어쨌든 참아보려 애썼지만 급기
야는 마음속의 고통을 견디다 못해 '차라리 내가 죽자. 내가 죽는 게 자녀를 위하
는 길이다.' 하고는 뛰어내린 것입니다. 그러니 그 누가 나이 드신 부모님을 제대
로 잘 공경한다고 큰소리 칠 수 있겠습니까? 아무도 그럴 수 없는 것이 우리의 솔
직한 현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모 공경에 대한 하나님의 명령은 어떠한 변명의 여지도 남
겨 두지 않고 있습니다. 부모 공경은 하면 좋고, 상황에 따라서는 안 해도 괜찮은
선택사항이 아닙니다. 신명기 5장 16절을 보십시오.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한 대로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나님은 이 명령에 어떠한 조건도 달지 않으셨습
니다. 무조건적인 명령인 것입니다. 심지어 하나님은 이 명령을 어기는 사람에 대
해서 가장 엄중한 벌을 내리시겠노라 선언하셨습니다. 출애굽기 21장 15, 17절을
보십시오. "자기 아비나 어미를 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 "그 아비나 어미를
저주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 돌로 쳐죽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이 제
3계명을 어긴 사람에게 내려지는 바로 그 벌이라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레위기
24장 16절을 보십시오. "여호와의 이름을 훼방하면 그를 반드시 죽일지니 온 회중
이 돌로 그를 칠 것이라."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는 계명을 어기고
하나님을 함부로 모욕하는 사람은 돌로 쳐죽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분명
히 알 수 있는 사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부모를 훼방하고 거역한 죄나 하나
님 자신을 훼방한 죄를 똑같이 다루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이로 볼 때 부모를 공
경하지 않는 것이 얼마나 두려운 일인가 하는 것을 우리가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부모 공경을 부담스러운 명령으로만 알면 안 됩니다. 제 5계명에는 또 다
른 면이 있기 때문입니다. 신명기 5장 16절을 다시 한번 봅시다. "너는 너희 하나
님 여호와의 명한 대로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나님은 우리에게 부모를 공경하라
는 무조건적이고도 엄중한 명령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절대 거기에서 그치시지 않
았습니다. 그 다음을 보십시오. "그리하면 너희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가 생명이 길고 복을 누리리라." 순종하여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놀라운 축복을
약속해 주셨던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제 5계명을 명령과 축복이라는 두 가지 면
에서 살펴보아야 합니다.
감사하라
먼저 "부모를 공경하라"는 명령에 대해서 살펴봅시다. "공경하라"는 말에는 적어
도 세 가지 의미가 들어있습니다. 첫째는, 감사하라는 말입니다. 자녀는 부모한테
이중적으로 빚을 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생명의 빚입니다. 부모가 없었으면 어떻게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날 수 있었겠습니까? 이런 의미에서 우리의 생명은 부모로부
터 갈라져 나온 것입니다. 부모님에게 생명을 빚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나이가 60, 70이 된다 해도 변함이 없는 진리입니다. 그리고 어머니가 90,100세가
된다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생명은 영원히 갚을 수 없는 빚인 것입니다. 따
라서 우리는 우리를 세상에 태어나게 해 주신 어머니, 아버지께 늘 감사해야 합니
다.
우리가 부모에게 지고 있는 또 한가지 빚은 양육 받은 빚입니다. 부모님은 우리
가 스스로 살아갈 수 없는 미성년 기에 수십 년 동안 돌보고 먹이고 가르치고 사랑
해 주셨습니다. 인간은 이 세상에 태어나서 부모로부터 독립하기까지 적어도 20년
이상 부모의 은덕을 입어야 합니다. 동물 가운데서 인간처럼 오랫동안 부모 밑에서
보호를 받는 동물은 없다고 합니다. 20년이 넘는 오랜 세월 동안 부모의 은덕을 입
는 위치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부모를 공경하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
다. 따라서 "공경하라"는 말에는 무엇보다 감사할 줄 알아야 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는 것을 우리가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순종하라
둘째는, 순종하라는 말입니다. 아직 부모 밑에서 배워야 하는 미성년 기에 있는
자녀가 부모에게 순종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여기서 언급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
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여기에 계시는 분은 모두 성인들입니
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성인이 된 다음에도 나이 드신 부모님에게 순종
해야 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요즘처럼 세대 차를 크게 느끼는 세상에서는 구시대
사람처럼 비취는 연로하신 부모에게 더 이상 순종할 필요가 없다는 사고 방식을 갖
게 되기 쉽습니다. 부모님의 말을 체면상 들어주기는 하지만 자기에게 어떤 도움이
될 만한 말로 받아들이지는 않는 것입니다. 사실 어떤 면에서는 자식 입장에서는
부모의 말이 진부하게 들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심지어 우리가 이
런 입장에 있을 때에라도 부모를 순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얼마 전에 매우 흥미로운 데이터를 하나 본 적이 있습니다. 펜실바니아 주
립대학에서 가르치는 워너 샤이 박사가 30년 동안 연구를 한 결과 보고입니다. 30
년 동안 4천명을 대상으로 해서 연구한 결과이나 상당히 신빙성이 있는 자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가 이 연구에서 특별히 관심을 가졌던 것은 나이와 인지능력의
변화의 상관관계였습니다. 쉽게 말해 나이를 먹어 가면서 지능이나 감각 따위가 어
떻게 변하느냐 하는 것을 연구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분이 내 놓은 결론은 참 놀랄만한 것입니다. 특별한 질병이 있어서 신
체가 약해진 사람을 제외하고는 75세까지 인지능력의 변화가 거의 없다는 것입니
다. 다시 말해 75세까지는 머리가 둔해진다든지 말이 어눌해진다든지 하는 그런 일
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75세를 넘어간 사람이라 해도 현저하게 저
하되기 시작하는 것들이라고는 기억력이나 정보처리 능력, 언어감각, 공간감각과
같은 것들뿐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75세가 넘어가도 저하되지 않고 오히려 더 증가
되는 것이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지혜'라는 것입니다. 지혜가 무엇입
니까? 오랜 인생 경험을 통해서 축적된 지식을 이용하여 어떤 사건을 놓고 판단을
내리고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을 말합니다. 나이가 들어도 지혜는 쇄하지 않을 뿐
아니라 사람에 따라서는 오히려 더 발전할 수도 있다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저는 이 데이터를 보면서 '야, 성경 말씀이 얼마나 진리냐?' 하고 다시 한번 무
릎을 치면서 감탄했습니다. 그것이 욥기 12장 12절 말씀과 정확하게 일치하기 때문
입니다. "늙은 자에게는 지혜가 있고 장수하는 자에게는 명철이 있느니라." 과학적
으로 이 말씀이 증명이 된 것입니다. 4천명을 대상으로 30년 동안 연구한 결과라면
증명이 된 것으로 봐도 무방합니다. 나이 드신 어머니, 아버지가 컴맹이고 '인터
넷'이라는 말을 발음도 제대로 못하는 구시대 사람일지는 모르지만 그에게는 지혜
가 있습니다. 그에게는 총명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아무리 첨단의 지식을
가지고 있든, 부모님의 연세가 너무 많으셔서 사리판단 능력이 없다고 생각되든 간
에 마땅히 부모에게 순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번에 박나리 양 유괴 사건의 범인으로 지목되고 있는 어느 자매의 경우를 보십
시오. 그는 아버지가 "너, 그 남자하고 결혼하면 안 된다"고 말할 때, 그것이 아무
리 사랑의 문제여서 자기 맘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해도 인생 경험을 오래
한 부모가 딸을 진정 사랑하는 마음에서 반대할 때는 한번쯤 진지하게 고려했어야
마땅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얼마나 비참한 인생
이 되고 말았습니까? 임신부가 돼서 그와 같이 끔찍한 일을 저질렀다고 생각하니
소름이 끼칩니다. 신세대만 똑똑한 것 아닙니다. 구세대도 똑똑합니다. 따라서 자
식이라면 마땅히 부모에게 순종해야 합니다.
부양하라
셋째는, 부양하라는 말입니다. 부모가 늙어 자립할 능력이 없어지고 육신마저 병
이 들면 자식은 그 부모를 극진히 부양해 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문제가 현대
사회에서는 많은 사람들을 미치게 만드는 주범이 되어 있습니다. 장수 인구는 점점
늘어나는 반면 젊은 사람들은 갈수록 여유가 없어집니다. 결혼하면 부부와 그 사이
에서 태어난 자식들 외에는 그 누구도 뚫고 들어갈 만한 공간이 없습니다. 아무리
집에 80평,100평이라도 남편이나 아내를 위한 공간이나 자녀들을 위한 공간은 있어
도 나이 든 부모를 모실만한 공간은 없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정신적으로 여
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집이 크고 넓어도 모실 만한 공간이 한 군데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할 수 없어 나이 든 부모를 모시게 되면 마치 이빨 사이에 끼
인 무엇처럼 언제든지 불편해하고 못 견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현대 사회
요, 요즈음 젊은이들의 모습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해서라도 오래 살아
보겠다고 아옹다옹하시는 우리 부모님들을 보면 안쓰럽기 그지없습니다.
몇 년 전에 신문에 72살 먹은 아들이 94세 되는 어머니를 목 졸라 죽인 기사가
난 적이 있습니다. 전남 고흥에서 12년 전에 아내를 잃고 혼자 살면서 조그마한 농
토를 가지고 소작을 하면서 그 어머니를 극진하게 섬기던 김 모라던 사람 이야기입
니다. 그는 자식들을 다 떠나 보낸 후 홀로 농사를 지으면서 구순 노모를 얼마나
극진히 섬겼는지 동네에서 효자라고 소문이 났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셋째 아들이
갑자기 교통사고를 당해 죽어버렸습니다. 그래서 그는 홧김에 한동안 술만 퍼 마시
다가 그만 자기 몸을 망가뜨리고 말았습니다. 자기 몸이 말을 안 들으니 90이 넘은
노모를 모신다는 게 얼마나 어렵겠습니까? 그래서 생각다 못해서 자식들에게 좀 신
세나 질까 하고 찾아갔다고 합니다.
먼저 경기도 안산에 있는 큰아들 집을 찾아갔습니다. 큰아들은 아마 막노동을 하
시던 분인 것 같은데, 90이 넘은 할머니와 70을 넘은 아버지가 갑자기 들이닥치자
무척 당황했던 모양입니다. 더군다나 큰아들은 전혀 반기는 기색을 안보였습니다.
그러니 눈치 빠른 노인네들이 이것을 모르겠습니까? 그래서 영등포에서 사진관을
하고 있는 둘째 아들을 불렀습니다. 큰아들 집에 도착한 둘째 아들은 할머니에 아
버지까지 와서 자기를 기다리는 것을 보고는 '이거 큰 일 났구나' 싶은 생각에 "저
는 일이 바빠 그만 가봐야 됩니다." 하고는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셋째 아들은 교통사고로 죽었고, 넷째 아들은 외항선을 타고 있어서 안되고, 그
렇다고 아직 자립도 못하고 있는 다섯째 아들에게 기댈 수도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정말 난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고민 고민하다가 여수에 있는 자기 여
동생 집으로 어머니를 모시고 갔다고 합니다. 거기서 김 노인은 며칠을 먹지도 마
시지도 않은 채 흐느끼기만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새벽 그는 어머니를 모시고
다시 고향으로 발길을 돌렸습니다. 그는 고향으로 가던 길에 자기 부인이 묻혀 있
는 무덤에 잠시 들렀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구순 노모를 목 졸라 숨지게 했습니다.
경찰서에서 그는 "나도 어머니를 따라 죽었어야 했는데... 어머니를 더 이상 고생
시키고 싶지 않아서 저지른 일이지만 천수를 다 못하게 한 죄 무엇으로 갚겠습니
까?" 하고 대성통곡을 했다고 합니다.
현대 사회의 기가 막힌 비극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것은 절대 남의 일이 아닙니
다. 우리 모두의 일 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장차 우리 눈앞에 어떤 일
들이 벌어질지 알 수 없는 삭막하고 무서운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부모 경시 풍조
가 세월이 흐를수록 더 심해지리라는 것은 성경이 이미 예언한 말세의 징조입니다.
디모데후서 3장 1-2절을 보십시오.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 하는 때가 이
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
를 거역하며 ..." 부모를 거역하는 것은 고통 하는 때의 징조들 가운데 하나인 것
입니다. "거역한다"는 말은 "인륜의 정마저도 느끼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그러
니까 자기를 낳고 키워 준 정마저 느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런 현상을 벌써 우
리 주변에서 보고 있지 않습니까? 이럴 때 우리는 "부모를 공경하라"고 하시는 하
나님의 말씀을 다시 한번 두려워 떨면서 깊이 생각하고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우리 사회에는 한 가지 잘못된 통념이 있습니다. 부모를 모실 책임은 오로지 장
자에게만 있다는 이상한 생각입니다. 그래서 많은 자식들이 자기는 장자가 아니니
까 부모를 모실 책임이 없다고 회피합니다. 그러나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옛날 농
경 사회처럼 아버지가 밭 대기나 논 대기를 장자에게 물려주며 "야, 이 논밭을 다
네게 주마. 너 이것 가지고 농사 지으면서 우리 두 사람 나이 들어 힘이 없을 때
책임져야 된다."라고 한다면 장자가 당연히 부모에 대해 책임을 져야할 것입니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서 월급 받아 살면서 자녀를 키우는 부모 중에 "야, 장자야, 이
리 오너라. 너는 대학까지만 가거라. 차자야, 너는 고등학교만 졸업해라. 막내야,
너는 초등학교 다니는 것으로 만족해라."라고 말하며 자기를 평생 책임지라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아들이 셋이면 셋을 놓고 공부시키느라 수십 년 동안
등골이 빠지도록 온 힘을 다해 애쓰지 않습니까? 큰아들이든, 막내아들이든 차별하
지 않고 키웠는데 부모 모시는 책임을 무조건 장자에게만 미루는 것은 있을 수 없
는 일입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장자야,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그런 계명이 어디 있습니까?
제가 볼 때 이러한 현상이 오게 된 데에는 여자들의 책임이 큽니다. 왜 의좋은 형
제들 사이에 끼어 들어 부모를 두고 서로 원수처럼 미워하게 만듭니까? 형제들 사
이의 의가 좋으려면 여자들이 잘해야 됩니다. 이제는 더 이상 장자에게만 부모를
모시는 책임을 미루지 말고, 장자든, 차자든 간에 한 1년씩 부모님을 번갈아 가면
서 모신다든지, 부득이 장자가 모시게 되면 다른 형제들은 부모 모시는 형제를 위
로해주고, 부모에게 필요한 것을 서로가 대 주든지 해야 할 것입니다. 장자만 모셔
야 된다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요즈음 딸애들이 모여 가지고 뭐라고 합니까?
"장자한테 가면 안돼. 망해. 우리 어머니 보니까 안되겠어." 그래서 장자는 지금
장가도 못 갈 판입니다.
물론 부모를 반드시 집에 모시는 것만이 효자는 아닙니다. 부모가 편할 수만 있
다면 괜찮은 양로원에 모실 수도 있습니다. 서로가 함께 살면서 마음 고생 하느니
떨어져 있으면서 편안하게 지내는 것도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 나라가 선진국처럼 양로원 제도가 제자리 매김을 하기까지는 아직도 세월이
많이 필요하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병들고 연약하여 의지할 데 없는 부모
를 양로원으로 내몬다는 것은 천인공노할 죄입니다. 말년에 부모를 슬프게 하면 안
됩니다. 말년에 있는 부모를 슬프게 하고 구박하고 마음으로 괴롭게 하면 그 죄 값
이 전부 자기에게 돌아온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브라질 부에노스아이레스에 가면 자식에게 매를 맞고 사는 부모들이 모이는 클럽
이 있습니다. 자식들에게 매맞고 그 서러움을 감당하기 힘든 처지에 있는 사람들끼
리 모여 서로가 위로도 받고 힘을 얻으려고 모인 것입니다. 어느 대학의 심리학
교수가 이 모임을 지도하고 있는데 그가 매우 뼈아픈 말 한마디를 했습니다. 자식
들한테 매맞고 모이는 부모들은 하나같이 젊었을 때 자기 부모에게 잘 못한 사람들
이라는 것입니다. 자기의 그런 행동을 보고자란 자녀들이 자기에게 똑같이 갚아주
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축복
하나님은 부모 공경하는 자에게 놀라운 축복을 약속하셨습니다. 신명기 5장 16절
을 다시 보십시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가 생명이 길고 복을
누리리라." 옛날 이스라엘 나라에서는 부모를 공경하는 자는 이 말씀 그대로 장수
의 축복을 누렸습니다. 그리고 시어머니를 잘 공경한 룻처럼 하나님께서 굉장한 축
복들을 주신 사례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즘 와서는 축복의 의미가 달라졌
습니다. 주변을 보십시오. 부모를 공경한다고 해서 장수합니까? 부모를 잘 공경하
는 사람이 복을 받습니까? 제가 보기에는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는 것 같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신약시대의 복은 구약시대의 복과는 차원이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구약시대에는 부자가 되고, 건강하고, 오래 살고, 자녀들 많
은 것을 가지고 복이라고 했지만, 신약시대에는 그것보다도 더 높은 경지의 복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므로 저는 하나님께서 생명을 길게 하고 복을 주신다는 것이 어
떤 축복인지 단정지어 말씀드릴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한가지 분명히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하나님께서 부모를 잘 공경하는 사람에게 주시는 특별한 은혜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 축복을 받는 자만이 아는 하나님의 위로와 은혜가 있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에 부모에게 효도하는 장로님과 집사님 여러분을 잘 알고 있습니
다. 어떤 장로님의 경우 둘째 아들인데도 90이 넘은 어머니를 오랫동안 모시고 있
습니다. 저는 그분이 어떻게 어머니를 모시게 되었는지에 대해 들은 적이 있습니
다. 형수 되는 분이 그 장로님의 부인보고 이렇게 말하며 부모님 모시는 책임을 떠
넘겼다고 합니다. "야, 동생. 너는 믿음이 좋으니까 할 수 있잖아. 나는 믿음이 없
어서 못해." 신앙이 좋은 아들, 며느리가 아무래도 부모님에게 잘하게 마련입니다.
또 어머니 역시 장자고 차자고 가릴 것 없이 잘해 주는데 있고 싶은 것이 솔직한
심정입니다. 그래서 다른 자식에게는 가려고 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90이 넘은 어머니를 모시는 것이 어디 쉬운 일입니까? 이따금씩 앞뒤 없
이 소리만 꽥꽥 지르는 때가 있지 않나요? 또 어머니를 돌아보기는 고사하고 자기
몸 하나 가누기조차 힘들 때도 있습니다. 여행을 가려고 해도 어머니 때문에 못 갈
때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장로님 가정을 보면 어머니를 얼마나 잘 모
시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저는 그 가정을 주의해서 보는데, 하나님께서는 그 가정
에 특별한 축복을 주셨습니다. 모든 자녀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넘치게 받은 것입니
다.
어떤 집사님도 넷째 아들인데도 수십 년 동안 90이 넘은 어머니를 모셔오고 있습
니다. 이 집사님 부부 역시 믿음이 좋은 분들인데, 그 부인이 한번은 제게 이런 말
을 했습니다. "아이고, 우리 어머님 때문에 하나님이 약속하신 축복을 받게 돼서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이 얼마나 가슴 뭉클한 말입니까? 부모를 잘 공경하면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이 있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부모님을 잘 공경
하면 나중에 우리 자식으로부터 틀림없이 그와 같은 공경을 받게될 것입니다. 부모
를 경시하는 풍조가 날로 팽배하는 요즈음과 같은 때에 이것만큼 큰 축복이 또 어
디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에게 "부모를 공경하라"고 명령하셨습
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여러 가지 핑계거리들을 내세우지만 그것에 미혹되면 안됩
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이러니까" 하고 따라가야지 "세상이 이러니까" 하
고 따라가면 안됩니다. "세상이 이러니까" 하는 말은 세상 사람들이 하는 말이지
손에 성경을 들고 있는 사람이 할 말이 아닙니다. 손에 성경을 들고 있으면서 "세
상이 이러니까"하고 좇아가는 사람보고 하나님을 섬기는 자녀라 하기는 어려울 것
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말씀대로 순종해야 합니다. 부모를 공경해야 합니다. 감
정으로 순종하려 하지 말고 의지로 해야 합니다. 좋아서 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
지 말고 하나님의 명령으로 알고 순종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 약속하신 놀
라운 축복이 우리 것이 될 것입니다. 부모를 공경함으로 우리 가정에 향기가 넘치
게 될 것입니다. 우리 예수 믿는 가정에서 피어나는 이러한 향기들이 진동할 때 이
더럽고 악취 나는 잔인한 세상도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는 아름다운 곳으로 바뀌게
될 것입니다. 할렐루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