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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으로 난 창窓
박 희 전
나는 막 내린 커피 한 잔을 들고 창가에 앉는다. 향기를 품은 흰 실오라기들이 창을 벗어나 세상으로 흩어져 나간다. 작은 창을 통해 비쳐지는 풍경은 커피의 향을 더욱 짙게 만든다. 나는 한 땀 한 땀 바느질을 놓듯 느린 시선으로 사진을 찍어간다. 늘 바라보는 거리와 건물들. 그러나 누구에게도 지켜지지 못할 시간들 속에 눈꺼풀로 자동셔터를 눌러댄다.
아직 가을이 오기엔 조금 이른 날씨다. 하루 종일 손바닥만 한 표구점에서 에어컨을 틀다보면 여자들이나 겪을 갱년기를 앓는다. 더웠다 추웠다. 그럴 때면 이 작은 창이 유일한 숨구멍이다. 골목으로 난 창은 커피 한 잔을 들고 찾아오는 손님을 외면하지 않는다. 언제나 새로운 풍경을 보여준다. 변함없는 배경 위에 새롭게 그려지는 모습들.
편의점 김 사장이 횡단보도를 걸어온다. 파란색 셔츠에 흰 바지를 입고 한껏 멋을 부렸다. 그의 목적지는 창을 통해 보이는 옆 과일가게다. 거의 매일 거르지 않고 과일가게를 찾는다. 내 시선이 그를 따라 움직인다.
그는 젊은 여사장에게 눈웃음을 건네고 반짝거리는 구두를 또각 거리며 좌판을 둘러본다. 한동안 이것저것 만지작거리며 야한 농담으로 치근대는 소리가 들려온다. 여인은 그의 속내를 아는지 모르는지 손님의 비위를 맞추느라 진땀을 흘린다.
“자 하나 더 넣었으니까 또 오세요.”
“내가 과일 사러 오나? 사장님 보러 오지.”
일 년 전부터 문을 연 과일가게 주인은 서른아홉이라고 했다. 교통사고로 남편과 어린 아들을 잃었고 보험금으로 가게를 차렸다고 했다. 그녀는 젊기도 하지만 나름 예쁘장한 외모와 순진함에 만만히 여기는 동네 남자들의 입요기감이 되곤 했다. 그러나 열심히 살아가는 그녀의 모습에 동네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일부러 찾아주기도 했다.
그녀의 과일가게와 표구점은 골목을 사이에 두고 있다. 골목을 따라가면 곧장 시내로 가는 큰 길을 만난다. 재개발에서 제외된 이쪽은 늘 한산한 모습이다. 도로를 따라 사오십 년은 족히 넘어 보이는 건물들이 서 있고, 그 뒤로 색 바랜 주택들이 빼곡히 웅크리고 있다. 그래도 한 때는 시내 중심가의 상권을 쥐고 흔들었던 사람들이 자리 잡았던 지역이다. 그러나 도시 곳곳이 개발되면서 상권을 쫓아 대부분 떠나간 상황이다.
그 흐름에 편승하지 않고 남아 있는 사람들은 여전히 옛적을 추억하며 목을 세웠다. 그들은 스스로 층을 나눴다. 어려운 형편에 떠밀려 와 구 도시에 자리를 잡은 우리 같은 사람들과는 다르다는 식이다. 그러다보니 이 지역은 여전히 행세 하려는 사람들과 또 그들을 상대로 실속을 얻으려는 사람들의 묘한 갈등이 웅크리고 있다.
나는 하루 종일 열 평 남짓 되는 가게를 지키고 있다. 손님이라고 해야 세 명도 채 되지 않는다. 그것도 뒤적거리다 일만 만들어 놓고 가기가 일쑤였다. 특히 자신이 토박이임을 내세우는 사람들이 동네회관인 양 들러 작품들을 뒤적거리며 입방아를 찧곤 했다. 별로 알고 싶지도 않은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을 늘어놓았다. 특히 옛적을 들먹이며 위세를 떨 때면 뛰쳐나가버리고 싶은 충동이 종종 들었다.
내 가게와 이웃이라는 이유로 과일가게 여사장에 대해 묻기도 하고, 몇몇은 자기들끼리 욕정어린 표현들을 농담처럼 주고받기도 했다.
“아직 한창 땐데 서방이 없어서 외롭겠어.”
“얼굴이 반반한 게 남자들 꽤나 울렸겠네.”
그럴 때면 주둥이를 한 대씩 갈겨주고 싶다. 그러나 그나마 내 가게의 고객이라는 명분이 억지로라도 미소를 띠게 했다.
골목을 지나면서 길이 꺾여 창을 통해 사거리까지 시야에 들어온다. 내가 바라보던 풍경 속에 과일가게 여인의 모습이 그려지고 있다. 나는 지난 일 년 간 종종 그 창문으로 가게 앞 좌판을 가지런하게 정리하는 그녀의 모습을 지켜봐왔다. 은은한 미소가 담긴 표정과 마른 수건으로 일일이 과일을 닦아주는 모습. 그녀의 손길이 닿고 나면 과일들은 반들거리며 윤이 났다. 그런 그녀의 손길을 지켜보고 있으면 가슴이 두근거린다.
“이 사장!”
갑자기 등을 치며 부르는 소리에 가슴을 감싸 쥔다. 고등학교 동창인 현수다. 그는 찻길 건너 언덕에 있는 아파트에 살고 있다. 거의 매일 한 번씩 들르는 편이다.
“야, 인기척 좀 하고 다녀라.”
그가 내 팔을 붙들며 생뚱맞다는 표정을 짓는다.
“너 또 그 여자 바라보고 있냐? 그러다 니 마누라 알면 요절난다. 가뜩이나 이혼하자고 벼르고 있는 사람한테 엉뚱하게 빌미 잡히면 이 가게마저 날린다.”
내 속을 빤히 알고 있는 현수는 설레발을 떨어댄다.
“그만 좀 해라. 남들이 들으면 뭔 일이라도 있는 줄 알겠다.”
아내는 내가 함께 생활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지역개발에 제외되면서 사업은 내리막길을 달렸다. 지역 주민들이 신도시로 이주해가면서 거리마저 한산해져버렸다. 삼 년 전에 가게의 규모를 줄여 이곳으로 이전하면서 아내는 비관적이었다. 인건비조차 나오지 않는다는 이유였다. 그런 아내는 핸드폰 부속을 만드는 회사에 출근했다.
그런데 일 년 전부터 이혼을 요구해 왔다. 그즈음 현수가 내게 전해온 말은 내 아내가 낯선 남자와 함께 있는 것을 봤다는 말이었다. 뭔가로 세게 한 대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나는 며칠 동안 아내를 다그쳤다. 그러자 견디다 못한 아내는 내게 이런 말을 했다.
“우리 이혼하자. 더는 구질구질해서 못 살겠어. 애들은 내가 책임질 테니까.”
난 아내의 말이 전부 맞다고 생각한다. 손바닥만 한 표구점을 바라보고 네 식구가 살기는 막막한 일이었다. 구질구질해 보이는 것도 맞다. 아내의 수입으로 생활을 하지만, 매월 늘어가는 빚은 고스란히 표구점에 쌓이고 있다. 여덟 살이나 연하인 아내가 누군가에게 마음을 주고 있는 것도 이해가 된다. 이 모두가 번듯하게 성공하지 못한 내 책임이다. 난 가방을 싸들고 가게에 딸린 작은 방으로 거처를 옮겼다. 아이들을 위해 이혼만은 하지 말자고 부탁을 하면서....
아내는 이따금씩 예고도 없이 찾아와서 돈을 만들어 내라고 난리 궂을 펴댔다. 이혼하지 않을 거면 생활비를 책임지라는 것이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더욱 움츠러들기만 했다. 현수는 이혼해 버리고 홀가분하게 살라고 말하지만 내게는 아무 의미 없는 말이었다. 아이들의 장래라는 문제가 내 발목을 붙잡고 있었다.
아내도 나를 굴복시킬 약점이 아이들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가정을 꾸릴 능력이 없으면 자신의 행동에 대해 눈 감고, 귀 닫고 조용히 있으라는 뜻이다. 그래서 나는 쇼윈도의 마네킹처럼 의자에 앉아 오늘도 창문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 그러다 문득 다른 남자의 품에 안긴 아내의 모습을 상상할 때마다 불덩이가 치민다. 심장이 두근거리고 호흡이 가빠온다. 그러나 내가 돌보지 못하는 아이들을 위해서 커피의 향과 함께 세상 속으로 흩어버린다. 그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이다.
뜨거운 더위가 조금씩 기울어가면서 아침과 저녁으로는 조금씩 선선해졌다. 나는 부지런하게 움직이는 과일가게 여인을 안쓰럽게 지켜봐왔다. 뭔가 도움이 되고 싶은 마음이었다. 사고로 가족들을 잃고 많이 힘들 텐데 어쩔 수 없이 과일가게를 시작했다는 사실이 안타까웠다. 사람들은 퇴근길에 일부러 들러 과일을 사가기도 했다. 낮 시간은 주로 할 일 없는 사네들이 찾았다. 짓궂은 말로 치근덕거리며 장난질을 쳐댄다. 혼자 사는 여자라는 등급을 매겨 놓고.
나는 오후의 나른함에 정신 줄을 놓은 듯 거리를 내다보고 있다가 과일가게에서 들리는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습관적으로 창문에 다가갔다. 처음 보는 여자 하나가 검정색 비닐봉지를 들고 여인을 향해 소리를 질러대고 있다. 사갔던 과일 중에 흠집 난 게 있었던 것 같다. 여인은 좋은 걸로 바꿔주겠다고 연신 허리를 숙이지만 그 여자는 환불을 요구한다. 어쩔 수 없이 여인이 돈을 내밀자 여자는 검은 비닐봉지를 그녀의 발 앞에 던져버렸다. 봉지에서 쏟아진 사과가 바닥을 뒹굴었다.
“이 여편네야, 마음을 똑바로 써야지!”
그 소리가 들리는 순간 나도 모르게 뛰쳐나갔다. 과일가게 여인이 못들은 척 허리를 숙이고 사과를 줍고 있다. 여자는 여전히 씩씩거리며 분을 삭이지 못하는 모습이다. 그녀가 허리를 구부려 사과를 잡으려면 자꾸 손에서 미끄러지며 굴러간다. 그녀의 손이 떨고 있다. 그런 모습을 지켜보며 가잖다는 듯 내려다보는 여자 앞으로 나는 천천히 다가가 사과를 주워 봉지에 담아준다. 그녀는 여자의 눈치를 보며 그냥 두라는 손짓을 했다. 나는 멈추지 않고 무표정하게 과일을 주워 봉지에 담았다.
“당신 누구야? 왜 나서는 거야?”
건방진 말투. 이 동네의 콧대 높은 여편네들의 말투다. 내가 허리를 펴려고 하자 여인이 내 손목을 잡는다. 나는 천천히 그녀의 손을 떼어놓고 몸을 펴서 여자를 바라봤다. 둥글 넙적한 얼굴에 가자미 같은 눈으로 날 쏘아보고 있다.
“아줌마, 돈 받았잖아?”
내가 가시 돋친 음성으로 맞받아치자 여자가 입에 거품을 물기 시작했다. 팔뚝을 걷어 부치더니 내 어깨를 밀치며 달라 들었다.
“씨발, 왜 나서냐고!”
“씨발? 이 여자 서방이다 왜?”
난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경찰서죠? 어떤 무식한 년이 사업장에 와서 행패를 부리니까 빨리 오세요. 넘 장사하는 데 와서 아내에게 여편네라고 했고, 나한테 씨발이라고 욕했으니까 모욕죄로 잡아가세요.”
여자는 그깟 경찰 얼마든지 부르라고 호기를 부리고 있지만 조금은 기가 죽는 눈치다. 나는 과일가게 여인을 바라봤다. 그녀는 벌어진 상황에 미리 겁부터 먹은 표정이다.
“당신은 안에 들어가 있어.”
순진한 여인이 ‘당신’이라는 호칭에 머뭇거린다. 내가 재차 눈치를 보내자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그 틈에 호기롭던 여자가 혼자 궁시랑 거리다 슬그머니 걸음을 옮기고 있다. 나는 핸드폰을 다시 들었다.
“경찰서죠? 행패 부리던 년이 도망가고 있는데 빨리 안 오고 뭐하는 겁니까?”
물론 처음부터 걸지 않은 전화였다. 여자는 신호가 떨어지기가 무섭게 횡단보도를 건너 부리나케 사라져버렸다.
“장사하다보면 이런 일은 보통 있는 일이에요.”
위로라고 전하는 내 말에 억지로 웃어 보이는 그녀의 왼쪽 눈가에 감추지 못한 눈물이 한 방울 남아 있다. 그 못된 년이 한말에 속이 긁혔나보다.
“그 여편네는 다시는 안 올 거예요.”
애써 못 본 척 위로라고 말해놓고 표구점으로 돌아왔다.
난 작은 창으로 다시 다가갔다. 여인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가게 안에 앉아 있던 그녀의 지친 모습이 떠올랐다.
‘얼른 나와서 과일들을 반들반들하게 닦아주지. 기죽지 말기를. 상처받지 말기를.’
오늘은 문을 열기가 무섭게 아내가 찾아왔다. 무슨 말을 하려는지 의자에 앉아 내 눈치를 본다. 나는 틈을 주지 않으려고 계속해서 분주한척 몸을 움직인다. 결국 돈을 달라고 했다. 매상이 오르지 않아 줄 돈이 없다고 하자 어디서 꿔서라도 달라며 내 허리춤을 잡는다. 나는 놓으라고 강하게 뿌리쳤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아내는 내 행동을 트집 잡고 핸드백에서 고지서들을 꺼내 바닥에 집어던졌다. 그리고 예외 없이 험한 욕들을 뱉어놓는다. 나는 대응하지 않았다. 진열된 작품들의 먼지를 닦으며 외면했다.
그때 뜻밖에 과일가게 여인이 안으로 들어섰다. 손에는 스티로폼의 작은 과일상자가 들려 있었다. 난 무척 당황스러웠다. 어제 일로 고마움을 전하기 위한 행동이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상황이 좋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아내의 얼굴이 흑 빛이 됐다. 과일가게 여인도 뜻밖의 상황에 당황스러운지 말까지 더듬었다. 나는 급하게 그녀를 돌려세웠다.
“다음에....”
어떨 결에 그녀를 돌려보냈지만, 당황한 그녀가 허둥지둥 가게를 빠져나가는 뒷모습에 가슴이 답답해 오고 현기증이 일어난다.
“너네 사귀냐? 그럼 저 년한테라도 좀 빌려 오던가.”
“그 입 닥쳐. 어디서 소리를 지르고 난리야!”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과일가게 여인을 향한 앰한 욕설에 내 속에서 불덩어리가 치밀고 말았다. 아니, 사귀느냐는 말로 빈정거렸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더 이상 아내의 입에서 그 여인을 들먹거리는 것이 듣기 싫었다. 전에 없던 내 행동에 아내가 자못 놀랐는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느닷없이 내 뺨을 후려쳤다. 너무 순간의 일이라 어찌해야할지 판단이 서질 않았다.
“이 미친 새끼가 어디다 대고 소리를 질러. 지랄 그만하고 돈이나 준비해 놔. 아니면 도장 찍던가!”
아내가 문을 박차고 가버렸다.
나는 바닥에 흩어진 고지서들을 주워들고는 의자에 앉았다. 벽에 걸린 거울에 초라한 중년의 한 남자가 비쳤다. 그 남자는 겨울을 맞아 점점 앙상해져가는 가지만 힘들게 쳐들고 있다. 사람들은 바구니를 들고 서 있지만 이미 색 바랜 잎만 자꾸 떨어진다.
아내가 늘 쓰는 방법이다. 돈을 요구하고, 뜻대로 안 되면 트집을 잡아 소리를 지르고. 물론 실상 아내는 돈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이혼합의서에 도장을 찍는 것을 원하고 있다. 그런 그녀의 행동은 끈질기게 그리고 늘 아프게 다가온다. 그러나 오늘만은 이래선 안 되는 일이었다. 과일가게 여인 앞에서 이런 초라한 모습을 보이다니.
나는 천천히 작은 창으로 다가갔다. 과일가게 앞에서 의자에 앉아 우두커니 먼 산을 바라보고 있는 여인의 모습이 보인다. 그녀의 손에는 여전히 흰색 스티로폼의 작은 상자가 들려 있다. 지금 그녀는 뭘 생각하며 앉아 있는 걸까....
‘아! 이런 저런 일들을 싹 날려버릴 시원한 바람이나 좀 불었으면 좋겠다.’
오후에 현수가 찾아왔다. 오전에 있었던 아내와의 일을 듣고는 온갖 욕지거리를 해대며 울분을 토했다.
“야, 니 마누라하고 그 개자식 경찰에 신고해버려. 요즘 어떤 놈이 너같이 사냐? 너 매 맞는 남편이냐? 바람피우는 것도 모자라 뺨을 때려? 너도 참 미친놈이다. 니가 정리 못하고 이러고 사는 게 애들한테는 좋은 모습이겠냐?”
그러고는 갑자기 벌떡 일어났다. 뭐라 말도 없이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현수가 나가고 잠시 허탈한 생각이 들었다.
‘정말 내가 이러고 사는 게 애들 때문인 걸까?’
창으로 현수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나는 습관적으로 창문에 다가갔다. 현수가 과일을 담은 봉지를 건네받으면서 표구점을 향해, 아니 분명 나를 향해 손가락질을 하며 호들갑을 떠는 모습이 보인다. 나는 그 모습을 보자 목이 바짝 말라 침을 삼킬 때마다 식도가 붙었다가 떨어지기를 반복했다. 그런데 돌아오던 현수를 그녀가 다시 불렀다.
‘쟤가 무슨 소리를 했기에....’
여인에게서 자그만 과일상자 하나를 건네받고는 연신 인사를 한 후 가게로 돌아왔다. 무슨 큰 한이라도 풀어준 듯 의기양양하게.
“야. 과일가게 사장이 이거 너 주래. 니 말대로 이웃끼리 감사인사도 못하냐?”
현수가 건넨 스티로폼의 작은 상자 안에는 때 이른 노란 귤이 줄맞춰 나를 바라보며 누워 있었다. 나도 모르게 얼굴에 피가 몰리는 듯 뻣뻣한 느낌이 올라온다.
“이거 아침에 가져 왔던 것 맞지? 이걸 다시 챙겨 준 걸 보면 저 여자도 너한테 관심이 있는 거 맞아. 너만 결정하면 돼. 어차피 니 마누라는 바람났고, 맨날 이혼이나 하자고 지랄 떠는 게 무슨 마누라야. 그러니까 창문으로만 내다보지 말고 일단 만나 봐.”
현수는 한동안 울분을 토하다가 고객과 약속이 있다고 가버렸다.
나는 현수 대신 자리를 지키고 있는 귤 상자를 한참 동안 바라봤다. 그러다 때 이른 하늘색 재킷을 걸치고 가게를 나섰다. 과일가게 반대편 블록 끝에 있는 거피전문점에서 카페라테 두 잔을 사서 들고는 다시 과일가게를 향해 천천히 걸었다. 그런데 표구점을 지나쳐 골목을 지나지 못하고 발걸음이 멈춰졌다. 아침에 보여 준 모습에 그녀를 대할 용기가 나지 않는다.
“사장님.”
뜻밖에 여인은 기다렸다는 듯이 과일가게에서 나와 천천히 내게로 다가왔다. 늘 보던 그의 눈길이지만 왠지 다리에 힘이 풀린다. 그렇다고 이미 돌아설 수도 없는 상황이다. 내 양 손에 들린 테이크아웃 컵을 보고는 빙긋이 웃는다.
“그거 저 주려고 가져오던 것 아녜요?”
여인은 돌아서 걸으며 과일가게로 향했다. 나는 마치 죄인처럼 천천히 그 뒤를 따른다. 여인이 가게 안에 놓인 의자를 손으로 권했다. 내가 의자에 앉자 그녀가 입구를 등지고 마주 앉는다. 내게 빙긋이 웃음을 보이며 잘 마시겠다는 듯 인사를 건네 온다. 그리고 우린 한동안 아무 말도 없었다.
그녀와 자주 인사를 나누고 대화도 주고받았지만 이렇게 마주 앉기는 처음이었다. 나는 연신 과일가게를 두리번거린다. 뭘 살필 것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녀의 얼굴을 마주 볼 자신이 없어서다.
“말 좀 해요. 살다보면 보통 있는 일 아녜요? 그렇다고....”
내가 그녀에게 위로라고 했던 말을 내게 해주고 있다. 나는 그 뒷말이 더 궁금했다. 그러다 내 궁금함에 대답이라도 하려는 듯 그녀의 무릎이 내 무릎에 닿을 정도로 더 바짝 다가왔다.
‘이렇게 바싹 다가앉다니 이거 너무 노골적인 거 아냐? 괜히 말을 더듬거리거나 얼굴이라도 붉어지면 안 돼. 자연스럽게 해야지, 자연스럽게...’
그녀가 무릎 위에 놓인 내 손을 살며시 잡는다. 내가 마른 침만 삼키며 한 동안 말이 없자 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나는 이년 전 사고로 가족들을 잃었어요. 제 전부를 잃었다고 생각했죠. 그런데 과일가게를 시작하면서 사장님과 이웃이 된 걸 너무 감사하고 있어요. 사장님은 정말 좋은 분이에요.”
내가 그에게서 듣고 싶었던 말이었다. 그러나 정작 그의 말에 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다.
“뭐 불편한 것 있어요?”
“네?”
뜻밖의 그녀의 말에 놀라 바닥에 커피를 조금 흘렸다.
“커피가 뜨겁네....”
그런 내 모습에 빙긋이 웃음을 띤다.
그녀가 내 오른 쪽 좌대에 놓인 티슈를 빼려고 손을 내밀어 보지만 손이 닿지 않았다. 이번엔 한 손으로 좌판에 버티며 몸을 들어 내밀었다. 그러다 좌판에 버티던 손목이 움찔하면서 그녀의 가슴이 살짝 내 어깨에 닿았다. 난 굳이 피하지 않았다. 좁은 공간에서의 일이라 그럴 수도 있는 일이다. 자칫 내 작은 행동이 어색한 상황을 만들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허리를 구부려 힘들게 바닥을 닦고 있기에 손에 든 티슈를 달라고 했다. 그녀가 거절하며 내 손목을 잡았다. 그녀의 손길에서 따스한 향기가 전해온다. 늘 작은 일에도 온화한 웃음으로 배려하는 모습. 이 순간 의기양양했던 어제의 나는 표구점에 앉아 작은 창으로 이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 한 손을 턱 밑에 포개고 묘한 웃음으로.
순간, 입구 쪽에서 긴 그림자가 우리를 덮었다. 하필 길 건너 편의점 김 사장이 가게로 들어섰다. 당황해 하는 내 표정을 놓쳤을 리가 없다. 난 괜히 화가 치밀었다.
‘저 자식은 매일 과일만 처먹나? 어제도 뭔가를 사가더니.’
“뭐야? 이 사장 여기 앉아 있었네? 웬일이야? 장사 안 해?”
빈정거리는 그의 말에 나도 모르게 표정이 굳어졌다.
‘저 자식은 나이에 맞지도 않게 아무나 보고 반말이야.’
김 사장의 말은 늘 반 토막이다. 좀 부족하다는 말이 맞는지 사람들이 제 욕하는 것도 모른다.
김 사장이 내 눈치를 보며 과일을 뒤적거린다. 얼마 후 한라봉 한 상자를 가리킨다. 그러고는 나를 흘끗 바라보더니 귤 한 상자를 더 가리키며 배달해 달라고 했다.
‘늑대 같은 놈.’
여인은 형편상 배달을 하지 않지만 노인들이나 몸이 불편한 사람들에게는 어쩔 수 없이 배달을 했다. 문제는 배달해 달라는 저 자식의 의도가 불손해 보인다. 도대체 무슨 짓을 하려고 집으로 부르는 건지 마음이 불안하다.
‘나랑 마주 앉아 커피 마시는 모습에 눈꼴이 신거지. 근데 이 여인은 그걸 아는 거야 모르는 거야.’
난 김 사장이 던진 포석에 밀려 어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선다.
“사장님, 보내 준 과일 잘 먹을게요.”
내가 던진 카운터펀치에 그의 눈 꼬리가 치켜 올라가는 게 보인다. 난 손에 든 커피를 그 자식에게 죄다 끼얹어버리고 싶은 충동을 달래며 가게로 돌아왔다. 그리고 빠르게 작은 창문으로 얼굴을 가져갔다.
잠시 후, 김 사장이 실실거리며 나가고, 얼마 후 여인이 과일상자를 들고 가게를 나선다. 당장이라도 쫓아가서 배달 못한다고 하지 왜 배달을 하느냐고 막아서고 싶다. 여인은 마냥 웃는 표정으로 카터위에 과일상자를 얹고 가게를 나선다. 그녀의 카터가 건물을 돌아가서 보이지 않자 내 심장이 조여 오기 시작한다. 김 사장이 질척거리는 상상들이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
‘안 그래도 스캔들을 줄줄 뿌리고 다니는 놈인데....’
나는 몇 번이나 창문으로 내다봤다.
‘도대체 왜 안 오는 거야? 시간이 이렇게 지났는데.’
그러다 은근 울화가 치밀었다. 뭔 일이야 있겠냐며 머리를 마구 흔들어 댄다. 그러고는 맘대로 해 보라는 듯 창문에서 벗어났다.
“작품들이나 정리해야지.”
며칠 후, 갑자기 아내가 들이닥쳤다. 늘 그랬듯이 돈타령부터 했다. 정말로 아무 것도 없다고 말하자 욕을 해대며 이혼합의서를 들먹인다. 그러다 성이 차지 않는지 빈정거리는 말로 속을 긁어댄다.
“지난 번 보니 그 년하고 잘 되는 것 같던데 만날만 해? 뭔 짓을 하려면 도장부터 찍고 해야지?”
대꾸할 가치가 없어서 입을 다물고 있자, 진짜 그런 것 아니냐고 억지를 부린다. 난 아내의 손을 거절하느라 세게 뿌리쳤다. 그러자 아내의 인상의 일그러지며 여지없이 욕지거리를 하며 소리를 질러댔다.
“제발 그만 좀 하라고!”
내가 강하게 대응하자 예외 없이 아내는 표구된 작품들을 집어던진다. 나는 애써 외면하며 작은 창 쪽으로 다가가 앉았다. 창밖에 과일가게 여인의 얼굴이 보인다. 그녀가 이쪽을 바라보며 기웃거리고 있는 모습에서 아내의 욕지거리를 들었겠다는 생각이 든다.
순간 난 수치심이 치밀어 얼굴이 화끈거리기 시작했다. 아내에게 욕설이나 듣는 세상에서 제일 못난 모습, 남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모습이다. 더구나 그녀에게만큼은.
“그만 하라고 했잖아!”
나도 모르게 아내의 팔뚝을 붙잡고 떠밀었다. 그녀는 힘없이 바닥에 넘어져 버렸다. 순간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하고 말았다는 후회가 밀려들었다. 벌떡 일어난 아내는 내 멱살을 잡고는 차라리 죽이라고 악다구니를 떤다. 난 더 이상 아무 반응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내 모습에 오기가 받쳤는지 뺨을 후려치기 시작했다.
이래서 매 맞는 남편이 있는 건가.... 차라리 맞아주는 것이 훨씬 편하다. 이미 내게서 떠난 그녀의 마음은 오로지 합의이혼뿐이다. 서너 차례 손찌검에도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자 아내는 백을 열고 합의이혼서를 꺼내 테이블위에 던지듯 놓는다.
“도장 찍어놔!”
아내가 가게를 나가버렸다.
나는 옷을 추스르고 맥없이 의자에 앉았다. 창밖 풍경에는 마음이 푸근하고 다정한 한 여인이 그려져 있다. 나를 걱정하는 저 눈빛. 내 어깨를 스치던 그녀의 가슴, 내 손을 잡았던 그녀의 따뜻한 체온이 느껴졌다. 자신의 아픔을 견디고 다른 사람에게 따뜻함을 줄줄 아는 사람. 내 빈 가슴을 파고들어 은은한 미소가 되어주는 사람.
잠시 감상에 빠져 있을 때, 문득 그림 속의 그녀가 나를 향해 살포시 손을 들어 보인다. 착시현상이 아니었다. 순간 난 마주친 눈빛을 외면하며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러다 슬며시 다시 돌아본 창밖에 무겁게 돌아서는 그녀의 모습이 보인다. 가슴이 답답해왔다. 난 다시 머리를 마구 흔들어 댄다.
그 일이 있고 한 동안 과일가게 여인에 대해 신경이 가지 않았다. 내 부끄러운 삶이 발가벗겨졌다는 수치스러움이 그를 향한 내 마음을 다독이고 있었다. 나는 쇼윈도의 작품들을 새로운 것으로 교체하고 내부 배치도 바꿨다. 그렇게 한 주가 금방 지나가버렸다.
아침에 가게의 문을 열고 앞을 쓸다가 과일가게 여인과 눈이 마주쳤다. 난 무안함을 감추려고 일부러 활짝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그녀도 특유의 자상한 웃음으로 손을 흔들어 보인다. 순간 심장에 찌릿한 통증이 가늘게 느껴졌다. 그러나 일부러 모른 척 외면하며 서둘러 청소를 마치고 안으로 들어와 작업 중이던 작품을 꺼냈다.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지만 부지런히 움직여 본다.
정오가 지나면서 과일가게 쪽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도 모르게 작은 창으로 과일가게 쪽을 바라봤다. 사십대 초반으로 보이는 젊은 남자가 가게로 들어가는 모습이 보인다.
‘이 동네 사람은 아니네?’
나는 커피를 한 잔 부어놓고 여전히 작품을 매만졌다. 그러나 점점 내 귀가 창문 쪽으로 나는 소리에 예민해지고 있었다.
‘아까 들어갔던 남자가 벌써 나올 시간이 지난 것 같은데? 과일을 열 번은 샀겠네....’
나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마침 두 사람이 함께 가게에서 나오고 있었다. 여인이 활짝 웃는 얼굴로 자동셔터를 내린다. 그런 후 두 사람은 친숙한 모습으로 시내 쪽을 향했다. 연신 남자의 얼굴을 바라보며 활짝 웃는 그녀의 모습이 왠지 낯설게 다가왔다.
나는 오후 시간이 무척 길게 느껴졌다. 물건을 보러 오는 손님도 없었다. 팔고 싶은 마음도 없다. 이따금씩 창문으로 과일가게를 바라보면서 닫혀 진 셔터에 마음이 불안했다. 가로등이 켜지면서 몇몇 사람들이 과일가게 앞을 서성이다 발걸음을 돌렸다.
“장사하는 사람이 가게 문을 닫다니 도대체 기본이 안 되어있어. 저러다 단골까지 다 놓치겠네.”
안타까운 마음인지 욕을 하고 싶어서인지 점점 신경이 곤두섰다.
저녁 시간이 지나가고 있어도 그녀는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점심도 저녁도 먹지 않았다. 애꿎은 커피만 줄 창 마셔댔다. 속이 씨릿씨릿하다.
‘어차피 가게 문을 닫고 시작한 일이니 저녁시간까지도 그 남자와 함께 보내고 있겠지. 누굴까? 새로 교제하는 남잔가? 혼자 사는 남잘까? 아니면....’
두 사람의 다정했던 모습을 떠올리며 오랜 관계일거라는 생각을 해본다.
깊어가는 저녁. 나는 가게의 문을 닫지 못하고 앉아 있다. 마치 무엇인가 뺏기고 있는 듯 가슴이 두근거린다. 자리에서 일어나 쇼윈도 밖으로 한산해진 도로를 바라본다. 가로등에서 불빛이 새어나오고 있다. 플라타너스 사이로 언뜻언뜻 비치는 빛을 느끼다 문득 바람이 불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출입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아직 낙엽이 질 계절도 아닌데 드문드문 잎이 떨어져 뒹굴고 있다. 여전히 후덥지근한 바람도 불어오고 있다.
거리에 서자 머리카락이 어수선히 날린다. 고개를 이리저리 재껴 봐도 제 멋대로 흩날리며 눈을 찌르고 얼굴을 가렵게 한다. 내 머릿결을 흩어놓는 바람. 늘 움츠리고 있던 내 가슴을 들썩이는 바람. 어디선가 불어오는 이 바람. 이 거리에 서 있는 한 이 바람을 피할 길은 없다. 가게에 앉아 쇼윈도의 마네킹처럼 가만히 앉아 있거나, 문을 꼭꼭 쳐 닫으면 되겠지만. 그러나 난 마네킹이 아닌데, 죽은 것도 아닌데 그럴 수는 없는 일이다.
나는 발자국 소리를 내며 천천히 과일가게 앞으로 다가갔다. 이곳에도 바람이 불고 있다. 굳게 내려져 있는 진녹색 셔터에도 바람이 와서 부딪히고 있다. 내 머리카락을 어수선하게 날리고, 움츠린 내 가슴을 들썩이던 바람이 굳게 닫힌 셔터에 부딪혀 바닥에 떨어지고 있다. 무수히 떨어지고 있다. 셔터를 열어젖히고 과일가게 안을 돌아보고 싶어 안달을 하며 부딪치고 또 부딪쳐 바닥에 떨어지고 있다.
난 가게로 돌아와 다시 커피 잔을 들었다. 뜨거운 커피가 내뿜는 향으로 내 가슴을 다독인다. 어쩔 수 없이 쇼윈도와 큰 전등의 불을 껐다. 저녁 8시면 문을 닫던 가게에 밤 11시가 넘어서까지 불을 켜 놓고 있으니 사람들이 흘끗거린다.
나는 늘 그랬다. 아내가 돌아오지 않을 때도 거실에 앉아 밤새 기다리곤 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욕설을 해와도 관심이라고 생각했다. 짐을 싸서 표구점으로 거처를 옮기면서도 아이들만큼은 잘 돌봐 주리라 생각했다. 시간이 지나면 상황은 좋아질 것이라 생각했다. 그렇게 이 작은 공간에서 이년을 기다렸지만 돌아오는 것은 아내의 무시와 이혼요구 뿐이었다.
자정이 한 참 지나자 바람에 시달리던 플라타너스가 잠이 들었다. 나는 탁자에 팔을 포개고 머리를 댄 채 작은 액자를 바라본다. 행복한 네 가족의 웃는 모습이 보인다. 그런데 먼저 아내가 일어나더니 액자 밖으로 나가버린다. 아직 어린 딸과 아들이 훌쩍거리다 나가버린다. 남자만 남아 있다. 언제든 그들이 다시 돌아오면 사진을 마저 찍으려고 단정한 모습으로, 쇼윈도의 마네킹처럼.
갑자기 들려온 경적에 고개를 들어보니 탁자에 엎드린 채 잠이 들었음을 알았다. 아직은 조금 이른 아침이다. 나는 먼저 작은 창문으로 다가갔다. 여전히 셔터가 내려져 있다.
‘기어코 그 남자하고.... 아니지 저녁에 가게 문을 열 일이 없으니 헤어져 집으로 들어갔겠지. 그러면 집으로 데리고 들어갔을까?’
머리가 복잡하고 온 뼈마디가 뻐근하다. 기왕 가게 문을 열려고 보니 잠그지도 않고 잠이 들었다는 걸 알았다. 나는 러닝차림에 머리를 감고 대충 물기를 닦고는 타월을 목에 걸쳤다. 어제 아침에 먹던 찬밥과 반찬통을 꺼내놓고 밥을 먹기 시작했다. 만 하루 만에 먹는 밥이다. 무김치를 손으로 집어 들고 와삭와삭 씹는다. 가슴이 시원하게 뚫렸다. 어차피 이 시간에 올 사람도 없고 볼 사람도 없으니 밥이라도 좀 편안하게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혼자 뭘 그렇게 맛있게 드세요?”
난 행동을 멈추고 급하게 고개를 돌렸다. 김치냄새가 밸까봐 문을 열어두었는데 과일가게 여인이 소리도 없이 들어온 것이다. 여인의 시선이 차례대로 흐트러진 내 머리와 얼굴, 러닝차림의 가슴을 차례로 훑고 있다.
그녀의 눈길이 멈춘 것을 확인하자 나도 모르게 벌떡 일어났다. 그녀도 민망한지 고개를 돌린다. 나는 숟가락을 들었던 손으로 급하게 셔츠를 손에 들고 주방으로 뛰었다. 내 심장이 잠시 동안 뛰지 않았다. 밤새 어디 가서 무슨 짓을 하다가 느닷없이 나타나 사람을 놀라게 하느냐고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나는 손을 씻고 셔츠를 걸친 후 잠깐 기다리라는 손짓을 하고는 양치질을 했다. 제 발로 들어왔으니 서둘지 않았다. 커피메이커의 스위치를 켜고 뜨겁게 덥힌 후 머그잔에 따라 들고 다가갔다. 여인의 표정은 밝아 보인다. 여전히 포근한 미소를 머금고 있다.
‘왜 왔을까? 할 말이 있는 걸까? 밤새 속을 끓게 하더니 아침 일찍 제 발로 찾아 온 이유는 뭘까?’
한동안 서로 말이 없었다. 얼른 아무 말이라도 하라고 한 대 쥐어박고 싶었다.
“오빠예요.”
오랜 침묵을 깨고 던진 그녀의 말이었다. 무심코 ‘뭐가요?’ 라고 말을 하려다 혀를 깨문다.
‘뭐긴 뭐겠어? 어제 그 젊은 남자가 오빠라는 말이겠지. 왜? 어제는 말도 없이 하하거리며 둘이 나가더니 뭔가 켕기는 게 있나?’
난 뻐근하던 관절들이 곧게 펴졌다. 커피의 매혹적인 향이 내 콧속을 파고들었다. 내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자 여인이 머쓱해 했다. 나는 무관심한 척 한 마디 던진다.
“아, 예. 젊고 멋지던데요?”
오빠가 외국에 살고 있고, 오랜 만에 찾아와서 같이 시간을 보냈다고 했다. 오늘 오전 비행기를 타야 되기 때문에 어제 저녁을 먹고 돌려보냈다고 했다.
‘오빠라며 그 이야기는 왜 하는데? 왜 내가 오해라도 했을까봐? 내가 가게 셔터를 보며 밤새 속이라도 태웠을까봐?’
“그럼 오늘은 저랑 저녁 먹을래요?”
내 입에서 생각에 없던 말이 튀어나왔다. 그러나 어차피 쓸어 담을 수 없을 터. 대수롭지 않은 듯, 무게가 실리지 않은 말인 듯 표정을 지어 보인다. 반면 나는 온갖 촉수를 곤두세우고 여인의 반응을 살폈다. 물티슈 한 장을 꺼내 탁자만 앰하게 닦아댔다. 그런데 뜸만 드릴 뿐 반응이 오지 않는다. 그녀가 잠시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부인이 알면 또 험한 일 당할 텐데요? 부인을 이기지도 못하는 것 같던데요....”
“허참. 뭘 못 이겨요? 그저 참고 받아주는 것뿐이죠. 어차피 정리할거예요.”
그녀와 밥 한 끼 먹자고 둘러대는 말이 아니다. 이제 정리해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난 더 이상 쇼윈도의 마네킹처럼 살고 싶지 않다. 어차피 난 더 이상 아내에게 사랑받을 대상이 아니었다. 아내는 내게 최소한의 인격적인 배려도 없다. 난 그녀에게 있어서 지나가다 마주친 어느 남자만도 못했다.
“그래요? 그러면 우리 조금 일찍 정리하고 저녁 먹으러 갈까요?”
그녀도 만족스런 표정을 지으며 과일가게로 돌아갔다.
오후가 되자 졸음이 쏟아졌다. 과일가게에 사람들이 드나드는 소리가 들려도 창문으로 다가가지 않았다. 몸이 풀린 듯 앉아 시계바늘의 발걸음만 일일이 세고 있다. 아직 더위가 지나가지 않았는데 활짝 열어 둔 문으로 간간히 시원한 바람도 불어온다. 머리카락이 바람을 타고 하늘거린다. 나는 눈꺼풀을 내린 채 가만히 느껴본다. 앞 머리카락들 사이로 살며시 다가온 바람이 내 볼과 귓불을 스치며 간지럽게 속삭인다. 밤새 과일가게에 굳게 닫혔던 진녹색 셔터에 부딪치고 또 부딪치며 쏟아졌던 그 바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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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박작가님 오랜만에 작품 올리셨네요.
반가운 마음으로 즐감할게요.
예, 조금 바쁜 일들이 있어서요... 반갑습니다. ^^*
재밌게 읽었어요.
주인공은 아내의 요구 대로 도장 빨리 찍어 주고 과일 가게 사장님과 새출발해야겠어요~
감사합니다. ^^
문장이 참 깔끔합니다ㆍ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앞으로도 좋은 글 많이 올려주세요 ^^
감사합니다. 늘 노력하겠습니다. ^^
잘 읽었습니다. 재미있고 뒷 얘기가 궁금해 전철 내려서 의자에 앉아 마저 읽었네요.
사랑의 박동이 생생하게 느껴집니다.
회장님의 응원 감사드립니다. ^^
참 표현력이 풍부하시네요. 모처럼 좋은글 봤습니다. 감사합니다. 좋은글 계속 부탁드려요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