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6월 3일 - D-1 ‘소유’ 보다 ‘사유’
D-1. 내일이면 출항이다. 세일러들의 무덤답게 떠나고 싶지 않은 마음이 49%다. 가족이 없고, 이곳에서 지낼 비용이 충분하다면 굳이 떠나지 않겠지. 이곳에서 요트를 계류하고, 2~3일에 한 번씩 호텔 식사하고, 일주일에 한번 정도 호텔에 묵고, 한두 달에 한번 태국이나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바다로 항해하며 느긋하게 사는 인생. 생각만 해도 행복하다. 나는 우리 딸 김리나 자라는 것을 돌보아야 하니까 그럴 기회가 없겠지만, 여기서 그렇게 여생을 보내는 선진국의 세일러들을 보니 부럽다. 이들은 몇 세기 전부터 이렇게 살아 온 것 아닌가? 아일랜드 선장 리암은 나와 동갑인데 이미 그렇게 살고 있다.
조식을 마치고 마리나 사무실에 들러 내일 이미그레이션, 하버마스터, 세관이 오전 8시 30분에 시작하고, 마리나 사무실은 오전 8시에 시작하는 것을 확인한다. 이런저런 절차를 다 마치면 10시 이전에 출항 가능 할 것이다. 그러면 세일러들의 무덤, 파라다이스 같은 로열 랑카위 요트 클럽도 안녕이다. 언젠가 다시 올 일이 있기를 소망한다.
폰툰을 걸어오는데 여기저기 마스트에 올라가 있는 세일러들이 많다. 조만간 이곳을 떠나 항해 하는 요티들이 많은가 보다. 어제 임대균 선장 일행에게 큰 소리 쳤다. “제네시스는 계류 줄 3개만 풀면 언제든지 출항이야.” 늘 출항 가능한 세일 요트. 정비완료, 바다로 떠날 준비가 완벽한 선박. 날이 새파랗게 선 환도 같은 배. 나의 보람은 그런 것이었다. 그러나 이번 항해를 통해 조금 달라지고 있다. 언젠가는 나와 내 요트도 계류 줄을 보다 단단히 묶고, 요트 전체를 덮는 덮개도 치고, 몇 달이고 어느 아름다운 항구에 머물 때가 올까? 돌아보면, 늘 너무나 고단했던 내 삶과 젊음이 가여워서 잠시 먼 산을 바라본다.
‘바쁜 게 좋은 거야’ 늘 이런 말을 듣고 살았다. 참 병신 같은 삶을 당연하게 살았다. 여유를 가지고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소유’ 보다는 ‘사유’ 하며 사는 인생.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金銅彌勒菩薩半跏思惟像] 이 떠오른다. 삼국시대 말엽 서기 668년 이전의 예술품이니, 무려 1,350 년 전의 사람들도 사유하며 살았는데, 나는 여태까지 앞만 보고 산 것 아닌가. 이제는 바람 잘 통하는 핫바지처럼, 헐렁하게 한번 살아 보고 싶다. 요트를 너무 늦게 접한 것은 억울하지만, 그래도 이렇게 장거리 항해를 하며 눈을 틔우니 감사한일이다. 나만 너무 편애(?) 하시는 하느님께 감사한다.
다음 항구인 Kuching Marina 또는 Miri Marina 항까지는 7~9일. 항해 물품이 잔뜩 쌓인 선실을 보며 설렘 반 걱정 반이다. 그래도 이곳에서 며칠간 비현실적으로 잘 쉬고 떠나게 되어 너무 다행이다. 배에서 어느 정도 고생해도 로열 랑카위 요트 클럽을 생각하면 후회는 없을 거다.
정오. 바람이 빠르게 불며 동쪽에서 비구름이 몰려온다. 임선장 일행은 오늘 호텔 체크아웃하고 배로 모든 짐을 싣는 다는데, 비 맞는 것 아닌지 모르겠다. 그때 임선장에게 문자가 온다. 라마다 호텔에 방이 하나 남았는데, 스위트룸이란다. 한 방에 4명까지 자고 내일 아침 조식도 제공된다고 한다. 그런데 생각보다 비싸지 않아서 이미 스위트룸을 예약했다고 한다.
“서위트 룸(스위트 룸의 거만 버전)을 예약하니까, 객실 담당 직원 말투가 훨 상냥해지던데? 역시 서위트 룸이야!” 하고 사람이 말투부터 바뀐다. 역시 대한민국은 금본주의 사회. 임선장의 거만하게 들뜬 음성을 들으니 나도 덩달아 기분 좋다. 이번 항해 길에 ‘세일링 서울’ 팀은 정말 다양한 경험을 한다. 나도 원님 덕에 나발 분다. 그러나 은근히 걱정이다. 랑카위 라마다 호텔 서위트 룸에 묵는 사진을 공개하면, ‘김선장 저거 없는 돈에 세계일주 항해한다고 가여운 마음에 여러모로 도와줬더니, 감히 랑카위 라마다 호텔 ‘서위트 룸’을 잡아? 이런 고연~‘ 그러나 절대 오해 마세요. 저는 임선장과 그 크루가 총 3명이라 남는 한자리에 꼽사리 꼈습니다. 공짜 숙박으로 잠깐 호사를 누리는 겁니다.
오후 1시. 김석중 선장님께서 무전기 두 개를 주신다. 항해 중에 한 개는 VHF 16번으로 서로 연결하고, 또 하나는 생활 무전기로 69번으로 연락하기로 약속한다. 혹시나 급박한 상황이 생겨도 안심이다.
오후 1시 30분. 랑카위에서 마지막으로 장을 보러 간다. 간 김에 맥도널드에서 햄버거로 점심을 한다. 빵은 좀 작고, 맛은 한국과 비슷하다. 임선장 팀은 야채와 과일, 음료수를 사고 나는 커터 칼과 깡통 따개 등을 산다. 추파춥스도 한 봉지 샀다. 이번에 잡은 서위트 룸에 조리 도구가 있다 하니, 저녁은 서위트 룸에서 다 같이 직접 뭔가 해먹어 볼 계획이란다. 기대해 보자.
오후 3시. 마리나로 돌아와 햄버거 한 개를 김석중 선장님께 전달한다. 김선장님은 워커 메이커 조립 작업을 하고 계신다. 김선장님은 마리나에 있는 내내 뭔가 작업을 하신다. 누가 봐도 딱! 세일러다. 김선장님은 Miri Marina 까지 함께 항해 한 뒤, Miri Marina 에 리치 파라다이스를 두고 한국으로 귀국하셨다가, 9월 쯤 다시 오실 예정이다. 만약 Miri Marina 가 조금 부족하면 코타키나발루에 정박해 두실 수도 있다.
오후 3시 30분. 아무래도 출발 전 스크루를 점검해 두는 것이, <점진적 정신 건강 증진>과 <항구적 마음의 평화 정착>에 도움이 될 것 같아. 핀과 수경, 목장갑과 부엌칼을 챙기고 김선장님을 부른다. 몇 번을 불러도 뭔가 작업에 몰두하시는지 대답이 없다. 일단 단신으로 잠수한다. 학꽁치들이 떼를 지어 다닌다. 상어는 없겠지. 로열 랑카위 요트 클럽 마리나는 시계가 30~50센티다. 바로 앞도 안 보인다. 그런데 오늘은 특별히 더 뿌옇다. 30~40 센티 정도. 어? 스크루가 이렇게 멀리 있었나? 하고 의아해하는데 눈앞에 불쑥 스크루가 나타난다. 깔끔하다. 스크루를 손으로 몇 번 움직여보고 확인한 뒤 물 밖으로 나온다. 스턴 샤워기로 일단 샤워하고, 선실 화장실에서 다시 비누 샤워를 한다. 더러워도 너무 더럽다. 아침에 내가 흘려보낸 분변도 바로 이 바다 아닌가? 에~ 퇘퇘!
스크루가 깔끔한 것을 보고 안심한다. 이제는 정말 출항준비가 100% 완료다. 출항 전날 세일러의 심정은 시위를 잔뜩 당긴 활처럼 팽팽하다. 몸도 마음도 긴장하고 있다.
오후 7시. 제네시스에서 두 번째 단체 식사를 한다. 토마토계란탕, 닭볶음탕과 오이 당근 + 쌈장. 훌륭하다. 조상욱 크루의 요리에 식사가 기다려지겠다. 김석중 선장님까지 5명이 맛있게 저녁을 먹고, 물품을 대략 정리한다. 비가 내려 해치들을 모두 닫으니 선실이 사우나탕이 된다. 항해 중 야채를 잘 관리해야 하는데... 나도 모르게 또 걱정하고 있다. 버릇이다.
오후 8시. 라마다 호텔로 돌아온다. 돌아오는 길, 호텔 수영장 주변과 찰리스 플레이스에 헐벗은 젊은 처자들이 시끄러운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춘다. 뭔가 관광객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파티가 아니라, ‘관계자’들끼리 전문 댄서들을 불러 만든 파티같다. 부자연스럽고 어색하다. 음악도 내 취향이 아니고, 헐벗은 처자들도 낯 설다. 우리는 서둘러 호텔 룸으로 올라간다.
무려 ‘서위트 룸’ 멋지다. 넓고 쾌적하다. 가족들이 한 번에 쉴 수 있는 공간이다. 방음이 잘되어 바깥쪽 광란의 파티 음악이 들리지 않아 더욱 좋다. 임대균 선장이 애호하는 ‘백건우’의 파아노 연주를 들으면 출발 전야의 밤을 마무리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