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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산 주교좌성당 - 대구 최초의 서양식 고딕 성당 |
계산 성당의 설립
대구시 중구 계산동 2가 71-1 ( 대구광역시 중구 서성로 10)
박해시대가 끝나고 신앙의 자유가 불완전하게나마 허용된 때는 1882년 한미통상조약, 1986년 한불수호조약을 맺은 이후였다. 당시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로베르(Robert, 金保祿) 신부는 1877년에 입국하여 1882년 지역 순회 전담 신부로 임명을 받아 충청, 경기, 강원 등지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1885년 조선대목구 7대 교구장이었던 블랑(Blane, 白圭三) 주교에 의해 영남 지역 최초로 대구 본당(현 계산 성당)이 설립이 되었고, 이듬해 초대 주임으로 로베르 신부를 임명했다. 로베르 신부는 아직은 박해의 여파가 남아 있어 바로 대구로 들어오지 못하고 경상도 칠곡(漆谷)의 신나무골[칠곡군 지천면(枝川面) 연화리(蓮花里)]에 정착했다. 이곳은 1830년대부터 박해를 피해온 신자들이 모여 살던 교우촌이었다. 그는 이곳을 거처로 삼아 3년간 은신하면서 사목했다. 이로 인해 신나무 교우촌은 경상도 지역에 파견되는 선교사들의 거점이 되었다.
1888년 대구 시내로 진출하기 위해 보두네(Baudounet, 尹沙勿) 보좌신부에게 신나무골을 맡기고, 로비르 신부 자신은 새방골(新坊谷, 현 대구시 서구 죽전동 · 상리동)의 죽밭골[竹田]로 거처를 옮겼다. 이 무렵 대구의 공소는 가장 큰 남산(南山) 공소를 비롯하여 모두 6개였고, 신자 수는 273명이었다.
1890년 말과 1891년 초에는 대구 교안(敎案)으로 불리는 ‘로베르 신부 축출 사건’이 발생했으나 뮈텔 주교에 의해 잘 마무리되었다.
성전 건립 및 수축 과정
1891년 대구 교안(敎案,개화기 때 정부와 교회 사이의 분쟁) 후 다시 대구로 돌아온 로베르 신부는 성밖 대어벌(현 대구시 원대동) 승지 정규옥의 집을 임시 성당으로 삼아 7년 동안 거처하면서 사목 활동을 한 끝에 1997년에는 성당 건립을 위한 부지를 매입하였다.
당시 현재의 계산동 성당 자리와 그 서편에 있는 동산동 고지대 두 곳을 후보지로 하여 그중 동산동 지역의 땅을 매입하려 했으나 신자들 특히 노인층 신자들의 의견에 따라 현 계산 성당 자리로 바꾸었다. 당시 동산동은 허허벌판이었으며 높은 구릉지대여서 성전 자리로는 부적절하다는 의견이었다. 사실 전국 어느 곳을 막론하고 성당의 위치는 대개 높은 지대에 있어 마을이나 시가지에서 내려다본다. 그런데 대구 계산 성당의 경우는 시내에서도 제일 저지대인 평지에 위치하게 된 이유는 여기에 있다.
△십자형 한옥 성전
로베르 신부는 성전 건축 과정에서 보여준 신자들의 한결 같은 열망을 바탕으로 부지 마련 후 2년 만인 1899년 이른 봄 한옥(韓屋) 양식으로 지은 십자형 기와집 성전과 주교관 사랑채와 신자 교육관 해성재(海星齋)를 건축했다. 사랑채는 2층으로 지었으며, 채색을 잘하는 스님 5명을 고용하여 성당과 사제관을 화려하게 단청(丹靑)하였다.
서울에 세워진 약현 성당(현 중림동 성당, 1892), 종현 성당(현 명동 성당, 1898), 인천 답동 성당(1896) 등은 모두 서양식 건물인데 반해 우리나라에서 네 번째로 세워진 대구성당은 순수한 한옥이었다. 1899년 12월 25일 예수성탄 대축일에 루르드의 성모 마리아를 주보로 삼아 축성식을 성대히 거행하였다.
전통적인 목조 한옥에 팔각 기와지붕을 이은 스위스식 십자형(가로, 세로 길이가 같십자가)으로 한국 성당 건축사에서도 유일한 양식이었기에 구경꾼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렇게 열성을 들여 지은 성전 건물은 1901년 2월 4일 밤 8시경에 지진이 원인으로 추정되는 불이 나서 십자형 성당을 모두 태워 버렸다. 당시 로베르 신부와 교우들의 실망은 얼마나 컸겠는가? 그때의 화제 상황을 파리외방전교회에 보고했던 로베르(김보록) 신부의 서한은 다음과 같다.
지난 2월 4일, 5일 밤 사이 나는 이상한 소리에 놀라 잠이 깨었다. 즉시 일어나서 문을 열어 보니까 한국식 십자형 성당이 온통 불길에 휩싸여 있었다. 얼른 뛰어가 성당 옆문을 박차고 성가대석으로 뛰어 들어가려 했지만, 발을 들여놓자 불길이 번져 황급히 물러나 마당 밖으로 나와 쓰러졌다. 얼굴은 반쯤 화상을 입은 채 몸을 일으켜 종이 있는 곳으로 달려가 위급함을 알렸다. 잠시 후 신자들과 지역 주민들이 사방에서 모여들었고 조선 군대와 일본 군대도 달려왔다. 그렇지만 너무 늦었다.
건물 내부가 온통 화염에 휩싸여 창문과 출입문 등으로 불길이 솟아 나오고 있었다. 가까이 간다는 것이 불가능하였다. 근처에 있는 집은 보호하자면 이미 불이 붙은 성전은 포기 할 수밖에 없었다. 불길이 서쪽으로 14m 떨어져 있는 해성재를 위협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성수가 가득 담긴 병과 루르드의 물병을 들고 나와 불 속에 던졌다. 그러자 놀랍게도 화염이 건물 안으로 몰려들더니, 이웃 초가집들은 손상을 입히지 않고 사그러들었다.
화재는 지진 때문에 발생한 것 같다. 지난 2월 4일 오후 8시에 대구에서는 매우 강력한 지진의 진동을 느낄 수 있었다. 그때 제대 위에 세워 둔 촛대가 지진의 진동으로 넘어져 제대 보와 양탄자 등에 불이 옮겨 붙은 것이다.
25년 전 교난에 휩싸인 조선에 들어왔을 때 나에게는 작지만 아담한 성당이라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 나에게는 제의도 일상복도 생활필수품도 없으며, 고해를 듣기 위한 영대와 중백의(中白衣, 간단한 사제복) 조차도 없다. 1천명이 넘는 신자들이 주일날 미사에 참석하는 데 바람막이조차 없었다. 성모 마리아께서 두 번째 성당을 짓기 위한 건립 기금을 마련해 주실 때까지 가건물이라도 세워야겠다. 한국식 십자형 성당은 이미 너무 협소해서 더 크게 석재로 지을 것이다. 신자들의 기도와 성모 마리아께 대한 믿음에 자비를 구하면서 나는 다시 성전건립 기금을 모금하는 사제가 되어야겠다.
△고딕형 벽돌 성전
본당 설립 후 14년 만에 어렵게 건립된 십자형 성당이 이렇게 화재로 소실되자 모든 신자들은 큰 충격을 받고 허탈감에 빠졌다. 그러나 로베르 신부는 절망하지 않고 오히려 더 큰 은혜를 주시고자 하는 하느님의 뜻으로 받아들이고 화재가 발생 한지 1주일이 지난 1901년 2월 10일자로 새로운 성전을 다시 건축하기 위한 호소문을 발표했다.
천주께서 하시는 일은 놀랍고 두렵고 거룩하신데, 이는 우리의 신덕을 시험하시고 더 큰 은혜를 주시고자 하심인 줄로 받아들이고, 다시 성당을 더욱 잘 짓기로 한 마음으로 협력합시다.
이때 의견은 목조 성당은 또 언제 화재가 날지 모르니 장기적으로는 불에 강한 벽돌 성당을 짓는 것이었다. 이때 대구의 신자 중 서상돈(徐相燉), 김종학(金鍾學), 정규옥(鄭圭鈺) 등이 많은 노력을 했다. 로베르 신부는 교우들과의 협력으로 내화 벽돌로 성당 재건계획을 세우고 손수 설계하여 1901년에 착공했다. 당시 우리나라에는 고딕식 양옥 축조의 경험자가 없었으므로 중국에서 벽돌공과 미장이, 목수를 데려 와서 일을 시켰다.
12사도의 스테인드 글라스와 함석류, 창호철물 등 국내에서 구할 수 없는 각종 자재는 프랑스에서 주문하여, 착공한지 1년만인 1902년 5월에 2개의 종탑을 갖춘 라틴 십자가형(새로가 길고 가로가 짧은 십자가) 정면 쌍탑식 고딕 성당을 준공하였다. 대구 최초의 서양식 건물이었다. 1903년 11월 1일, 모든 성인의 날 대축일에 뮈텔(Mutel, 閔德孝) 주교의 집전으로 성대한 축성식이 거행되었다.
세부구조는 로마네스크 양식(둥근 아치, 튼튼한 기둥, 두꺼운 벽, 작은 창문 등)에 가깝다고 하겠으나 평면 구성은 전형적인 고딕양식(직사각형 평면, 높은 첨탑 등)이다. 평면은 라틴 십자형 3랑식 열주(列柱)의 아케이드(Aceade, 아치형 회랑)를 이루고 천정에 의해 네이브(Nave, 열주와 열주 사이 넓은 회랑)와 아일 (Aisle, 벽과 열주 사이의 좁은 회랑)의 구획이 뚜렷이 되어 있다. 주현관은 서쪽 정면의 나르텍스(narthex, 정면 현관)의 좌우 아일부에 2개의 동일한 종탑이 차지하고 있다.
전체 성당은 화강석 기초 위에 붉은 벽돌과 회색 벽돌을 쌓았는데, 회색 이형벽돌의 사용은 버트레스(Buttress, 벽 바깥에 붙인 띠벽, 付壁)와 정면 출입구 및 창 둘레, 그리고 내부 열주와 천정 리브(rib, 부재를 보강하는 뼈대)에 집중하여 구조체와 장식을 겸하도록 하고 있다. 특히 정면 중앙에 있는 박공부분의 큰 장미창과 좌우 익랑 박공부문의 장미창은 이 건물을 한층 화려하고 또한 엄숙하게 하고 있다.
건물 축성과 함께 종탑에 달 종 축성도 있었다. 종은 서상돈 아우구스띠노와 정규옥의 부인 김 젤마나가 기증했으므로 종의 명칭도 이름을 따서 아우구스띠노 젤마나로 명명되었다. 이렇게 해서 영남 지방에서는 최초의 웅장한 고딕식 건물의 성전이 세워졌다.
△증축 성전
1911년 6월, 서울대목구에 분리되어 대구대목구가 설립되고 대구대목구의 초대 교구장으로 드망즈(Demange, 安世華) 주교가 임명되면서 계산 성당은 주교좌성당으로 승격되어 대구, 경부 지역 신앙의 요람으로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그동안 신자수가 급격히 늘어나서 주일과 교구의 모든 전례 행사 때마다 큰 불편을 겪었다. 그리하여 1911년 7월 2일 초대 대목구장 드망즈 주교가 본당의 루르드 성모상 앞에서 대목구를 봉헌하는 허원식을 거행할 때도 신학교 설립, 수녀원 건립, 주교관 건립과 함께 주교좌 성당의 증축을 소원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김종학 베드로와 한윤화 야고보가 총 경비 2만여 원의 거액을 자진 분담하여 증축 공사에 들어갔다. 로베르 신부는 신축을 위해 전주 전동 성당의 설계도를 입수하고, 색유리와 철물 등 공사 자재는 프랑스와 홍콩 등지에 주문한 뒤 서울 명동 성당을 건축했던 벽돌공, 석공, 목수 등 중국인 기술자를 데려와 공사를 진척시켰다. 종탑 지붕을 배로 높이고, 성당 뒤편을 물려서 동남북으로 날개를 달아 증축했다. 그리하여 1918년 12월 24일 준공하였다. 새 성전의 축성식은 1919년 5월 11일 성대히 거행되었다.
△재보수 공사
계산 성당은 서울과 평양에 이어 세 번째로 세워진 고딕 양식 성당이며 대구에 현존하는 1900년대 유일한 성당 건축물로 그 문화적 가치를 인정받아 1981년 9월 25일 국가지정문화재 사적 제290호로 지정되었다.
1991년 성당 건립 후 처음으로 대대적인 보수공사를 통해 새롭게 태어났다. 벽돌로 이뤄진 성당 외벽은 물론 성당 내부 바닥의 부식이 심각했기 때문이다. 성당 설립 당시 흙모래 석회를 섞어 깔아놓은 차가운 바닥에 앉아 미사를 보는 신자들을 고려해 바닥 위에 마루를 깔았으나 마루 밑의 환기 공간 부족으로 부식이 심화됐고, 이를 막기 위해 설치한 비닐 장판마저 썩어들어 갔다.
또한 세파에 시달려 상한 벽돌을 빼내고 대구 남산동에 있는 옛 유스티노 신학교 건물 보수 현장에서 나온 벽돌을 가져와 복원했다. 1914년 세워진 유스티노 신학교 의 벽돌이 계산 성당 벽돌과 가장 흡사했기 때문이다.
1992년 8월 14일에 완료하고 이튿날인 8월 15일 성모 승천 대축일에 준공 기념 미사가 있었다. 이 공사를 통하여 지붕은 함석을 해체하고 동판으로, 바닥은 목재 대신 대리석으로, 그리고 창호, 스테인드글라스, 전기 공사가 이루어졌다.
성당의 안정과 발전
1911년 계산 성당이 주교좌로 설정된 후 신자들의 활동은 더욱 활발해졌다. 우선 명도회의 창립과 명도회관의 건립, 해성 체육단(청년회) 발족, 인애회 · 친애회 · 성모회연령회(위령회)의 조직 활동 등이 이루어지게 되었고, 교육 사업으로는 1899년에 설립된 해성재(海星齋)가 성립학교(聖立學校)로, 다시 해성학교(海星學校, 1930년대 폐교)로 개칭되면서 발전하였으며, 1926년에는 성모 유치원이 설립되었다. 그중 해성 청년회와 명도회는 1924년 조선 남방 천주 공교 청년회로 통합 발족된 후 대구 지역 평신도들의 중심 단체로 성장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1927년에는 “천주교회보”(현 가톨릭신문의 전신)를 창간하여 교회 소식의 대변자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이처럼 계산 성당은 1910년대 이후 안정을 추구하게 되었지만, 한편으로는 일제의 탄압으로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특히 일제의 책동으로 1942년에는 제2대 교구장 무세(Mousset, 文濟萬) 주교가 교구장직을 사임하고, 일본인인 하야사까(早坂久兵衛) 주교가 제3대 교구장에 착좌한 일도 있었다. 이러한 상황 아래서도 본당 신자들은 개인적으로 3·1 운동에 참여하거나 신사참배(神社參拜) 거부 운동에 가담했고, 1930년대에는 순교자 현양 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해 나갔으며, 꾸준히 전교 활동을 펴나갔다. 하지만 서양 선교사가 중심이 된 교구 지도부에서는 교회의 존속과 발전, 신자의 보호를 위해 일면 친일적인 성향을 보여주기도 했다. 3.1운동 당시 각 종교가 망라된 민족대표에 천주교다 참여하지 못한 점은 어떤 사정이었는지 모르겠으나 아쉬움을 준다.
계산 성당의 신자들이 새로운 성장을 모색하게 된 것은 해방과 6·25 동란을 겪은 뒤부터였다. 이때부터 우선 본당의 평신도 단체 조직을 강화하는 한편 새 단체들을 설립하거나 그 활동을 활성화하는 데 노력했다.
제10대 서정길(徐正吉, 요한) 주임신부 재임 때인 1952년에는 대성당 낙성 50주년 행사를 성대히 개최했으며, 제12대 최재선(崔再善, 요한) 신부 때는 계산 문화관 부지를 조성하고 제14대 김영환(金榮煥, 베네딕토) 신부 재임 때인 1973년에 개관했다.
또 계산 본당은 본당 설립 100주년을 맞은 지난 1986년 성당 마당 한 편에 자그마한 공원을 조성하고 계산 성당을 지은 초대 주임 로베르 신부의 동상을 세웠다. 한국식 목조 성당을 건립했지만 3년 만에 예기치 않은 화재로 성당을 잃고도 좌절하지 않은 채 다시 오늘날의 아름다운 성당을 짓고, 대구 경북 지역 복음화에 헌신한 고인의 넋을 기리기 위해서이다.
2016년에는 본당 설립 120주년을 맞아 계산성당 역사관을 개관하였다. 이곳에는 대어벌 임시성당에서부터 현 성당의 모습을 담은 사진들과 오래된 성물, 초대 주임 로베르 신부의 영호남 지방 각 성당 제단체 명부 등 500여 점의 중요한 사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한편 대구시에서는 추진 중인 근대문화거리 조성사업의 하나로 성당 외벽 조명을 설치하고 성당 마당을 공원으로 조성해 열린 공간으로 변화를 꾀하고 있다.
식사 후 3시 10분 계산 성당에 도착. 비가 내리고 있다. 계산 성당의 상징 뾰족 쌍첨탑 앞에는 대형 십자가가 솟아 있고 쌍탑 사이 박공엔 커다란 아름다운 장미창이 건물의 품격을 더해주고 있다. 흔히 계산성당(1902년)은 서울 명동성당(1898년), 전주 전동성당(1914년)과 더불어 우리나라 아름다운 3대 성당의 하나로 꼽힌다. 계산성당이 다른 성당과 다른 점은 우리나라 최초로 쌍탑을 세운 성당이라는 점이다.
성전의 우측 측면 문을 통해 먼저 성전에 들어갔다.
성전 내부
널찍한 공간엔 회색 벽돌로 된 아치형 열주가 두 줄로 나있고 전면에는 제대가 있다. 원래 성당 설립 당시 사용되던 제대는 1913년 제단 증축 공사를 하면서 걷어내 현재 관덕정 순교자기념관에 보존되어 있다고 한다.
지금 보이는 제대는 두 개인데 현재 사용하고 있는 앞쪽(신자석 쪽)의 나무제대와 그 뒤편 후벽을 향한 트리엔트식 제대로 이는 1913년부터 1960년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직후까지 사용되던 제대이다. 이 제대의 하단부 중앙에는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유해(팔)가 안치되어 있다.
제대 뒤편 벽에는 5개의 아치형 스테인드 글라스로 만든 창문이 있다. 보통 제대 후면에는 십자가 고상이 있는 것이 통례이지만 계산 성당은 이처럼 십자고상 대신 다섯 개의 유리화 창문의 성인상을 모시고 있다. 이중 가장 작은 가운데 창문에 루르드의 성모상을 모시고 있다. 이는 1899년 본당 초대 주임이었던 로베르 신부가 첫번째 성당을 지을 때 본당 주보로 루르드의 성모 마리아를 모신 역사적 사실을 말해준다. 첫 성당은 불행히도 1901년 소실되었지만 본당 주보성인의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 이처럼 제대 앞(지금은 제대 뒤가 됨) 중앙 창문에 루르드의 성모상을 모신 것이다.
성모상을 중심으로 좌우에 각각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와 예수님, 성모 마리아, 성 요셉 유리화가 배치되어 있는데, 이들 조각상은 1902년 두 번째 성당이 지어질 당시 프랑스에서 제작해 설치된 것으로 100년 이상 오색 찬연한 빛을 여전히 발하고 있다.
제대 양쪽 측면에 공관복음을 상징하는 네 개의 유리화와 성당 정문 상단을 장식하고 있는 장미 문양의 대형 창문도 성당 건립 당시 그대로이다. 제대 양측 감실과 측랑벽에 세워져 있는 성녀 소화 데레사 · 성 안토니오 · 예수성심 · 성 요셉상도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신자석 양옆의 창문을 장식하고 있는 유리화도 1991년 대대적인 보수공사를 하면서 새로 만들어진 것이다. 본래는 단순한 색유리만으로 이루어진 창이었으나 대구대교구의 제2 주보성인인 이윤일 요한을 비롯한 10명의 한국 성인상을 덧붙였다. 측랑 옆 벽에는 십자가의 길 14처 액자가 걸려 있다.
출입구 성수대 위에는 1984년 5월5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 이 성당을 방문하시어 어린이를 위해 축복하셨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주교좌 계산성당 역사관
2016년 9월에 계산성당 역사관은 계산성당 내 계산문화관 1층에 있다. 1798년 경상도에 천주교 신앙이 형성된 시기부터, 1885년 로베르 신부의 대구 부임 및 대구본당의 경상도 신나무골 정착, 1899년 한옥식 계산성당(1901년 지진으로 인한 화재로 소실) 건축, 1902년 현재의 벽돌식 계산성당 건축 등을 거치며 지금까지 계산성당을 중심으로 교세를 확장해나간 대구대교구의 역사를 상세히 알려준다. 그리고 계산성당 초대 주임신부인 로베르(김보록, 1853~1922) 신부에 대한 설명과 계산본당 옛 신자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여러 유물을 살펴볼 수 있다.
특히 김수환 추기경 유물실이 눈길을 끈다. 1951년 계산성당에서 사제품을 받은 김수환(1922~2009) 추기경의 생애에 대해 한눈에 알 수 있으며 김 추기경의 사진과 의복 등 유품도 볼 수 있다.
김 추기경 유물관 양 옆에는 계산성당의 옛 모습을 동영상으로 관람할 수 있는 영상관과 신자 및 순례객 등을 위한 기도실이 마련돼 있다.
성당 바깥 마당에도 유서 깊은 유물이 많다. 성당 정문 앞마당 한가운데 있는 대형 십자가는 대구대교구 초대 교구장 드망즈 주교(재임 1911-1938)가 교구장 부임 25주년을 기념해 세운 것이다.
초대 신부 로베르의 흉상은 작은 쉼터 속에 있다.
쉼터를 빙 둘러가며 지나간 역사의 자취들이 사진으로 전시되어 있다. 성당 건물의 변천과 활동 상황 등 다들 참고할 만한 가치를 보유하고 있다. 특이하게도 박정희 대통령의 결혼사진도 있다. 그때 주례신부는 신랑, 신부를 소개할 때 “육영수 군과 박정희 양은…”이라고 했다는 일화가 있다.
뜰에 2개의 종이 전시되어 있다. 하나는 1902년 고딕식 성당이 완공되던 때에 제작 축성된 것으로 서상돈 아우구스띠노와 정규옥의 부인 김 젤마나가 봉헌했으므로 종의 명칭도 봉헌자의 이름을 따서 아우구스띠노 젤마나 종으로 명명되었다. 다른 하나는 레오 아폴로니아 종인데 1908년에 제작되어 이듬해 축성되었다.
건축 모형이 하나 전시되어 있다. 제2대 주임 베르모렐 신부가 부임하자 이전의 사제관이 너무 낡아 1929년초에 자비로 공사를 착공하여 그해 7월에 완공했다. 1995년 화재로 건물이 철거되었고 2007년이 실물 모형을 제작하여 세운 것이다.
이제 마지막 코스인 경상감영 공원으로 향했다. 이미 오후 4시를 훌쩍 넘겨 하루도 마감이 되려는 시간이다.
경상감영과 옥터 - 경상도 일대의 순교자들의 신앙 증거 터 |
■경상감영 - 조선시대 지역 행정의 중심지이자 천주교 박해의 진원지
주소는 대구광역시 중구 포정동 21(도로명 주소는 중구 포정동 경상감영길 99)
감영은 조선시대 8도를 다스리던 관찰사가 거처하는 관청이다. 지금의 도청에 해당된다. 일명 감사(監司)라고도 하는 종2품 관찰사는 행정뿐만 아니라 교육, 사법, 군사를 총괄하였다.
경상감영은 조선 초기에는 경주에 있다가 상주에 옮겨졌으며 경주부윤과 상주목사가 관찰사의 임무를 겸직했다. 임진왜란 시 잠시 안동부에 존치했다가 임진왜란 직후인 1601년(선조 34년)에 대구부에 정착되었다. 이는 대구가 임진왜란을 통해 군사적 위치의 중요성을 인정받았다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이유다. 또 지리적 위치가 경상도의 중앙이어서 경상도 전체를 통할하는 데 이로운 입지 조건이라는 점도 꼽을 수 있다.
고종 33년(1896년) 지방 행정을 13도제로 개편된 후는 경상북도의 중심지 역할로 축소되었다. 1965년까지 경상북도 청사로 사용하였다가 청사가 다른 장소로 이전되고 난 후인 1970년 중앙공원으로 개장하였다. 이후 1997년 도시 미관을 해치는 담장을 허물고 공원 전체를 재조성함과 아울러, 대구의 역사와 관련된 문화유산을 교육의 장으로 활용하고 이를 널리 알리고 보존하기 위해 경상감영공원으로 명칭을 변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지금 남은 건물은 관찰사의 집무실인 선화당(宣化堂, 유형문화재 제1호)과 관찰사의 처소로 사용한 징청각 (澄淸閣, 유형문화재 제2호) 그리고 관찰사의 치적이 담긴 선정비 등 대구의 역사와 관련된 문화유산이 존재한다.
관찰사가 사법과 군사를 담당했기에 박해시대 때 경상감영은 많은 천주교 신자가 체포, 국문을 받은 곳이다. 그 과정이 혹독했기에 많은 옥사 순교자가 나왔고, 또한 많은 신자가 재판 후에 처형되었다. 처형장으로서는 훈련장이 있던 관덕정, 군대 장대(將臺)가 있던 용두방천 부근(봉덕동), 그리고 날뫼(비산동)가 있으며, 이밖에 지역민의 구전으로는 서문 밖 말전 골목의 오일장이 열렸던 오리정(五里亭) 마당(현 시장북로)에서도 많은 신자들이 처형되었다고도 하나 아직 학계의 고증은 거치지 못했다.
비가 내리는 가운데 공원 주차장을 찾지 못하여 사설 주차장에 추차를 하고 울타리도 없이 개방된 경상감영 공원에 들어갔다. 가까이 대구근대역사관도 있다. 경상감영과 관련된 안내판이 여러 개 있다. 다들 400여년 동안 경상감영이 이 자리에 위치하였기에 조선 후기의 관아의 격식과 구성을 잘 보여주고 있어 학술적 문화적 가치가 높다고 소개되어 있다.
경상감영의 중심은 선화당(宣化堂, 대구유형문화재 1호)이다. 선화당은 관찰사가 업무를 보던 정청(政廳)이다. 선화(宣化)란 "임금의 덕을 베풂으써 백성을 교화한다(宣上德而化下民)"는 뜻이다. 정면 6칸, 측면 4칸의 단층 팔작 기와집으로 주심포 양식과 익공식의 절충형 공포를 이루고 있다. 601년(선조 34년)에 지어진 건물로 그 후 수차 중수했다.
선화당 앞에는 하마비(下馬碑)가 있다. 관찰사의 권위를 높이려는 의도로 세웠다고 볼 수 있다. 원래는 감영의 정문인 관풍루 앞에 있던 것을 이곳으로 옮겼다. 兵馬節度使以下皆下馬(병마절도사 이하 개하마)라고 새겨져 있다. 병마절도사 이하의 사람은 다 말에서 내려서 들어오라는 뜻이다. 병마절도사는 육군 무관 종2품 관직으로 관찰사와 동급이나 통상 문관보다 낮은 대우를 받는다.
다음은 징청각(澄淸閣, 대구유형문화재 2호)이다. 관찰사가 평소 주거하는 처소로 일종의 살림집이다. 선화당과 같은 시기에 건립되었으나 그 후 여러 번 불탄 것을 순조7년(1807년), 그리고 1970년에 중수했다. 징칭(澄淸)은 맑은 정치를 뜻한다.
관리사무소 옆에 선정비(善政碑)가 있다. 일명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라고도 한다.역대 관찰사와 판관들의 선정비로 원래 대구향교 등 곳곳에 산재해 있던 것을 여기에 모았다. 모두 29기로 관직과 성명 그리고 재임기간을 밝혔다. 대체로 1-2년이나 개중에는 짧게는 4개월, 7개월도 있다. 이 짧은 기간에 무슨 영세불망의 업적을 남겼가? 따라서 이임시에 의례적으로 행하던 통과의례라고 보는 것이 맞을 것 같다.
그밖에 조각품 시민의 나무, 그리고 측우대 등이 있다. 특히 측우대는 제작연대가 확인된 유일한 것으로 국보 330호로 지정되었으며 지금은 기상청에 옮겨지고 여기의 것은 그 모형이다.
■경상감영 감옥터 - 가혹한 박해의 현장
경상감영의 옥터는 옛 경상감영의 서북편 대구시 중구 서내동 8-1 일대이며 이곳을 옥골 또는 옥마당이라고 구전되어 왔다. 1815년 을해박해 때 청송 노래산, 진보 머루산, 영양 일월산 등지에서 교우들이 안동과 경주 진영에서 국문을 받은 후 끝내 배교하지 않은 33명이 경상감영으로 이송되었는데 이중 14명은 감옥에서 옥사했으며 나머지 7명은 1816년 11월1일 대구 관덕정 형장에서 참수 치명하였다. 그리고 1927년 정해박해 때에는 상주지역 교우 31명이 체포되어 25명은 석방이 되고 3명은 옥사했으며 나머지 3명은 1839년 4월14일 관덕정 형장에서 순교하였다.
기록에 의하면 순교자들은 고문과 옥살이의 고통 속에서도 형제애를 나누고 기쁨의 기도생활을 하여 간수와 주변 사람들에 감동을 주어 천주교가 진리라는 것을 증명하였다고 한다. 알려진 옥사자들 명단은 다음과 같다.
△을해박해 - 최봉한(프란치스코), 김시우(알렉시오), 서석봉(안드레아), 김윤덕(아가 타 막달레나), 김홍금, 김장복, 안치룡,
△정해박해 - 박보록(바오로), 안군심(리카르도), 김세박(암브로시오)
△병인박해 - 서인순(시몬) 송이야기 (밑줄 친 부분은 시복된 순교자임)
옥사자들 중 복자 지위에 오른 순교자 7명의 약전은 다음과 같다.
▲복자 최봉한崔奉漢) 프란치스코 ( ? ∼1815년)
최봉한 프란치스코는 충청도 홍주 다래골(현 충남 청양군 화성면 농암리)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부터 부친에게서 천주교 교리를 배워 신앙생활을 하였다. 1815-1816년 대구에서 순교한 서석봉(徐碩奉, ?~1815, 안드레아)과 구성열(具性悅, ?~1816, 바르바라) 부부는 그의 장인과 장모였다. 그는 이후 공주 무성산으로 이주해 살던 중 주문모 신부가 입국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모친과 누이와 함께 상경하였다. 그의 부친은 이 무렵에 사망하였다. 주문모 신부에게 성사를 받고, 정약종의 집에 살면서 황사영(알렉시오), 최필공(토마스) 등과 가깝게 지냈다. 그는 동정을 지키며 살 생각을 갖고 있었는데, 친척들의 권유로 마음을 바꾸어 서석봉의 딸과 혼인하게 되었다.
그 후 프란치스코는 가족들을 데리고 장인 부부와 함께 경상도 청송의 노래산(현 경북 청송군 안덕면 노래2동)을 찾아가 그곳 교우들과 함께 생활하였다. 그러던 중 1815년의 부활 대축일에 밀고자를 앞세우고 노래산을 습격한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경주로 압송되었다. 경주 감옥에 갇혀 있을 때, 그는 장모 구성열의 마음이 약해지는 것을 보고는 끊임없이 그녀를 권면하였다. 대구로 이송된 후 ‘천주교의 우두머리’로 지목되어 혹독한 형벌을 받아야만 하였다. 결국 계속되는 형벌을 이겨내지 못하고 1815년 5월경(음력) 옥중에서 순교하고 말았다. 그의 나이는 30세가 갓 넘었었다.
▲복자 김시우(金時佑) 알렉시오 (1782∼1815년)
김시우 알렉시오는 1782년 충청도 청양의 양반 출신이며 성품이 착하고 어느 정도 학식도 있었다. 그러나 반신불수인 탓에 결혼도 못하고 가난하게 생활해야만 하였다. 그는 교우들에게 교리를 설명해 주거나 복음을 전하는 데 노력하였다. 그러나 가난하였으므로 교우들을 찾아다니며 애긍이나, 왼손으로 교회 서적을 필사하여 약간의 돈을 얻기도 하였다.
그 후 진보 머루산 교우촌(현 경북 영양군 석보면 포산동)으로 이주하였다. 1815년 초에 일어난 을해박해 때 포졸들이 교우들을 체포하자 자원하여 천주교 신자임을 밝혔다. 안동으로 끌려갔다가 대구로 압송되었다. 옥에서 그는 다른 죄수들처럼 음식과 바꿀 짚신을 삼을 수 없어 음식을 먹을 수도 없었고, 구할 수도 없었다. 대구로 이송되어 온 지 약 2개월 만에 굶주림과 형벌로 인한 상처 때문에 옥사하였다. 1815년 5월 혹은 6월 경이었다. 당시 그의 나이는 34세였다.
▲복자 서석봉 안드레아( ? ∼1815년)
서석봉 안드레아는 1816년 대구에서 순교한 구성열(바르바라)의 남편이며, 1815년 대구에서 옥사로 순교한 최봉한(프란치스코)의 장인이다. 훗날 신자들 사이에서는 그가 ‘손골(현 경기도 용인시 수지면 동천리) 박씨(朴氏)의 외조부’라고 전해져 왔다. 과부 바르바라와 혼인한 그는 그 후 사위 프란치스코 부부와 함께 경상도 청송의 노래산(현 경북 창송군 안덕면 노래2동) 교우촌으로 이주하였다.
1815년의 부활 대축일에 체포되어 경주로 압송되어 문초와 형벌을 받고 아내와 사위 등과 함께 대구 감영으로 이송되었다. 이후 그는 동료들과 함께 1815년 11월 18일(음력 10월 18일)에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러나 그는 형벌로 인해 쇠약해진 탓에 옥에서 사형 집행을 기다리던 중에 순교하고 말았다.
▲복자 김윤덕 아가타 막달레나( ? ∼1815년)
경상도 상주의 은재(현 경북 상주군 이안면 저음리 돌마래미)에서 태어난 김윤덕 아가타 막달레나는, 장성한 뒤 고향 인근에 전파된 복음을 전해 듣고 입교하였다. 그리고 노래산 교우촌(현 경북 청송군 안덕면 노래2동)으로 이주하여 그곳 교우들과 함께 생활하였다. 1815년 2월 22일경, 교우들과 함께 부활 대축일을 지내던 중에 체포되어 경주로 압송되어 문초와 형벌을 받고 대구로 이송되었다. 그러나 이곳에서 다시 혹독한 형벌을 받던 중에 마음이 약해져 신앙을 포기하고 배교하여 석방되었다
그녀가 막 감영의 문을 나가려던 차에 안동에서 이송되어 온 김종한 안드레아를 만나게 되었다. 이때 안드레아는 한숨을 내쉬면서 ‘이처럼 좋은 기회를 놓치지 말라’고 힘써 권면하자 신앙은 다시 살아나기 시작하였다.
다시 감영으로 들어간 그녀는 포졸들을 밀치고는 서슴없이 관장 앞으로 나아가 소리 질러 배교를 뉘우쳤다. 관장은 화가 나서 심하게 매질을 하도록 하였다. 심한 매질로 뼈가 허옇게 드러나게 되었다. 의식을 잃은 채 옥으로 들어가자마자 숨을 거두고 말았다. 이때가 1815년 4월 말 혹은 5월 초로, 당시 그녀의 나이는 50세 가량이었다.
▲복자 박경화 바오로(1757∼1827년)
박경화 바오로[朴甫祿]는, 충청도 홍주의 양반 집안 출신으로 33살 무렵 입교하였다. 1839년 대구에서 순교한 박사의(안드레아)는 그의 아들이다. 그는 입교한 지 얼마 후에 일어난 박해로 체포되었으나, 마음이 약해져 석방되고 말았다. 이때의 배교는 오히려 열심을 배가하는 기회가 되었고 신앙생활을 위해 고향을 떠나 산중으로 이주하기까지 하였다.
60세가 지나서 바오로는 가족들과 충청도 단양의 가마기로 이주하여 살다가 1827년의 정해박해 소식을 듣고 경상도 상주의 멍에목으로 이주하였다. 교우들과 함께 주님 승천 대축일을 지내다가 체포되어 대구 감영에서 형벌을 받아 노령으로 감내하지 못하고 1827년 11월 15일(음력 9월 27일)로 순교하였다. 그의 나이는 71세였다. 그가 순교한 뒤 5개월 후 그의 시신을 다른 곳으로 이장하기 위해 발굴하였는데, 그때까지도 그의 모습이 평소같이 평온해 보였다고 한다.
▲복자 김세박(金世博) 암브로시오 (1761∼1828년)
김세박 암브로시오는 1761년 한양의 역관 집 출신으로 한국 천주교회 초기에 신앙을 받아들였다. 김범우(토마스)는 그의 먼 친척이었다.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인 후 그는 아내와 자식들에게도 열심히 교리를 가르쳤으나 성격이 포악한 아내는 그의 신앙생활을 오히려 심하게 방해하였다. 이에 그는 가족과 이별한 뒤, 교우들을 찾아다니면서 교리를 가르쳐 주거나 교회 서적을 필사하면서 살아나갔다.
1827년의 정해박해가 일어났을 때, 그는 상주 멍에목에서 직접 안동 관아로 가서 천주교 신자임을 자백하였다. 한 달 후 대구로 이송되어 이곳에서 이재행(안드레아), 김사건(안드레아), 박사의(안드레아) 등을 만나 서로 권면하면서 신앙을 지켜나갔다. 그는 형벌과 대재로 쇠약해진 탓에 동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1828년 12월 3일(음력 10월 27일)에 옥사하고 말았으니, 당시 그의 나이는 68세였다.
▲복자 안군심 리카르도 (1774∼1835년)
충청도 보령에서 태어난 안군심 리카르도는 청년 시절에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였다. 이후 그는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 가족들과 함께 고향을 떠나 경상도로 이주하였으며, 가족들의 생계를 위해 교회 서적을 베끼는 일에 몰두하면서 살았다.
1827년 정해박해가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은 리카르도는, 언젠가 자신도 체포될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 동안 교우들에게 나누어준 서적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에 그는 얼마 동안 숨어 지내면서 순교할 준비를 하였는데, 상주 멍에목에서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대구로 이송되어 혹독한 형벌을 받아야만 하였다. 8년 동안 옥에서 고통을 받다가 1835년 이질에 걸려 사망하였으니, 당시 그의 나이는 62세였다
경상감영 감옥터의 위치는 현 대구 서내동에 있는 대구 제일성결교회 터라고 추정하는데 바로 옆의 성당이 대안성당이다. 그래서 대안성당에 옥터 입간판이 설치되어 있다.
오후 5시가 넘어 날이 어둑하여 대안 성당에는 불이 밝혀져 있다. 바깥 성모정원에는 성모님이 아기예수님을 안고 들여다보는 상이 서 있는데 아래에는 사슴이 뛰놀고 있다. 순교복자 비석, 그리고 형구 항쇄돌, 감옥터 안내판이 서 있다.
신부님을 만나 말씀 드리고 미사 시간이 아니어서 불 꺼진 성전 안에 들어가서 전등 스위치를 올렸다. 제대 좌우엔 성모상과 성요셉 부자상이 있고 제대 후면 벽에는 특이하게도 고상 대신 최후의 만찬 그림이 있다.
대안 성당을 끝으로 오늘의 순례 일정을 마친다. 가까이 두고도 거의 순례하지 못했던 대구 시내의 성지들을 순례가 참 유익하고 많은 것을 느끼게 했다. 비산 성당과 복자 성당을 다음 기회로 넘긴다. 아직 대구대교구 관할 성지는 두 번은 더 다녀야 한다. 함께 해준 형제님들께 감사드린다. (김연호 요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