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의 원류를 찾아서] 75. 무위 동분마와 쌍두불상, 천제산 석굴
실크로드 달렸던 天馬, 곳곳에 기념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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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제산 석굴 부처님> |
사진설명: 무위 동남쪽 60km 지점에 위치한 천제산 석굴에 있는 높이 28m의 부처님. 천제산 석굴엔 13개의 굴이 있었으나 황양호 공사로 수몰되고 대불만 남았다. |
2002년 10월1일 아침. 무위 천마빈관에서 “실크로드의 상징물은 무엇일까”를 생각해 보았다. 지나온 여정(旅程)을 되짚었다. “불교와 비단과 말이 실크로드 상징물”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장안 - 하서주랑 - 천산남북로 - 페르가나 - 사마르칸드 - 다마스쿠스- 로마, 혹은 장안 - 하서주랑 - 천산남북로 - 페르가나 - 사마르칸드 - 발흐(아프가니스탄) - 바미얀 - 폐샤와르 - 천축에 이르는 루트를 통해 전달되고 전해진 대표적 사상과 물산(物産)이 불교와 비단과 말이었기 때문이다. 다른 많은 문화와 물산도 오갔지만 종교적으로는 불교가, 상품으로는 비단이, 이들을 실어 나른 말이 ‘비단길’을 왕래한 주인공이었음을 부정하긴 힘들다.
말과 비교될 동물로 낙타(사막의 배)가 있긴 하다. 낙타는 타클라마칸 사막 일대에선 유용한 동물임이 틈림없지만, 이외 지역에선 말이 모든 물산을 이동시킨 주인공이었다. 특히 유목민족들이 본격적으로 발호할 시기, 말은 ‘역사의 주역’ 중 하나였다. 때문에 낙타보다는 말을, 비단길을 대표하는 동물로 보는 것이 더 정확할 것 같다.
말(馬)에 대해 본격적으로 이야기하려면 실크로드의 개척자 장건(張騫)을 등장시켜야 한다. 한나라의 대(對)흉노 전쟁에 반드시 필요했던 말을 무제에게 소개한 인물이 장건이었던 것. 때는 전한 무제. 흉노와의 전쟁 준비에 몰두하던 한 무제 유철의 귀에 솔깃한 이야기가 전해졌다. “흉노는 월지의 왕을 격파하고 그 해골에 술을 담아 마시고 있습니다. 도망간 월지 사람들은 흉노를 원수로 여겨 결코 잊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 그들과 한편이 되어 흉노를 칠 나라가 없습니다.” 무제는 즉각 월지(쿠산 왕조)에 보낼 사자를 모집했고, 이 때 장건이 나섰다. 기원전 139년. 장건은 서역 출신의 노예 감부(甘父)를 안내인 삼아, 100여명의 건장한 사내들을 데리고 월지국을 향해 하서주랑으로 나아갔다.
당시 하서주랑 일대는 흉노족들이 차지하고 있었고, 흉노가 무제의 사신을 놓칠 리 없었다. 결국 붙잡혀 10년이나 흉노의 땅에 유배되고 말았다. 장건은 그러나 탈출에 성공해 월지국으로 달려갔다. 월지왕을 만나 흉노를 치자고 설득했으나, 월지왕은 흉노를 공격할 생각이 없었다. 귀국길에 또 다시 흉노에 붙잡혔다. 간신히 빠져나와 13년 만에 장안에 돌아온 사람은 - 동행했던 100여명의 사람들은 다 죽고 - 장건과 흉노족 부인, 그리고 감부뿐이었다.
장건은 서역 사정을 무제에게 자세히 보고했다. 무제의 귀를 특히 자극한 말은 “대원(大宛. 우즈베키스탄 페르가나 지방)에는 포도주가 있고, 좋은 말이 많은데, 말은 피땀을 흘립니다. 그 말의 선조는 천마의 아들입니다”라는 보고였다. 말 다루는 솜씨가 뛰어난 흉노 기병들에 한나라 군대가 시달리고 있었다. 게다가 중국의 말은 체구도 작고 달리는 것도 느려 흉노의 말에 비해 전투능력이 현저하게 뒤쳐졌다. 대원의 천마를 얻는다는 것은 현대식으로 말하면 외국에서 최신 무기를 도입하는 격이었다.
한무제 대원의 천마 얻기위해 원정군 파견
기원전 104년(태초 4). 한 무제는 이사(貳師)장군 이광리(李廣利)를 사령관으로 한 원정군을 파견했다. ‘이사’는 한혈마가 있다는 대원의 성(城) 이름. 1차 원정에 실패한 이광리가 기원전 102년 귀환했을 때, 한 무제는 “말을 가져오지 않고는 옥문관 안으로 들어올 수 없다”며 돌려보냈다. 이광리는 돈황에 머물며 군마를 정돈한 다음 다시 대원으로 출정했다. 명마 획득을 위해 대원과 공방하기 4년. 이광리는 한혈마 3,000마리를 이끌고 장안으로 개선했다. 너무나 기뻐한 무제는 승전환송식에서 ‘서극천마(西極天馬)의 노래’를 불렀다.〈사기〉‘악부시집’에 노래가 전한다.
천마가 오네, 서쪽 땅 끝에서
유사(流沙)를 넘어 구이(九夷)가 복종하네.
천마가 오네, 오아시스를 나와
범의 등 같은 두 색깔, 조화는 귀신과 같네.
한 무제가 ‘천마의 노래’를 부르며 즐거워한 이면엔, 원정에서 돌아오지 못한 무수한 사람들의 피가 있었다. 시대는 한참 뒤이지만, 당나라 이태백(701~762)이 읊은 ‘자야오가(子夜吳歌)에서 저간의 사정을 짐작할 수 있다.
長安一片月(장안일편월) 장안을 비추는 한 조각 달,
萬戶擣衣聲(만호도의성) 집집마다 다듬이 소리 요란하네.
秋風吹不盡(추풍취부진) 가을바람 끝없이 불어오니
總是玉關情(총시옥관정) 옥문관의 님 생각 애닯구나.
何日平胡虜(하일평호로) 언제쯤 오랑캐 무찌르고
良人罷遠征(양인파원정) 그리운 님 원정에서 돌아올까.
어찌됐던, 천마(한혈마)를 획득한 무제는 다시 흉노 총공격에 나서, 하서주랑의 흉노 세력들을 몰아냈다. 거기에 무위·장액·주천·돈황이라는 4군을 설치하고 서역으로 통하는 길을 확보했다. 실크로드는 당나라 때 본격적으로 활성화 되지만, 사실 토대는 한 무제가 만든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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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위 동분마像> |
사진설명: 뇌대에서 출토된 동분마 '마답비연'상. 날아가는 제비를 밟고 있다. |
상념을 접고 무위를 - 한나라 때의 하서4군 가운데 제일 먼저 만들어진 도시 - 대표하는, 아니 실크로드를 상징하는 ‘날아가는 제비를 밟고 있는 말(馬踏飛燕)’이 출토된 뇌대(雷臺)로 갔다. 뇌대공원에 들어가니 온통 ‘마답비연’ 조각뿐이다. 진품은 감숙성 박물관에 전시돼있지만, 마답비연이 이곳에서 출토됐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그렇게 해 놓은 것 같았다.
마답비연이 출토된 경위는 이렇다. 1969년. 중소국경 분쟁이 한창일 때, 중국 전역에서 방공호를 파는 운동이 진행됐다. 무위도 예외는 아니었다. 현지인들이 뇌대 밑에서 방공호를 팠다. 30m 쯤 파고 들어가자, 2000년 전 조성된 전한 시대의 마저자(磨咀者) 무덤으로 통하는 입구가 보였다. 유물은 이미 도굴당하고 없었으나, 세계를 놀라게 한 ‘마답비연’은 거기 있었다.
‘마답비연’은 청동으로 만들어져 ‘동분마(銅奔馬)’라고도 한다. ‘청동으로 만든 뛰어가는 말’ 이란 뜻. 강대한 흉노 세력에 대항하기 위해 한 무제가 그렇게 갖고 싶어 했던 서역의 천마를 모델로 조각한 것이 바로 동분마인지 모른다. 높이 35cm, 길이 40cm의 조그만 동상인데, 머리는 약간 왼쪽으로 돌리고 있다. 꼬리를 나부끼며 질주하는 두 앞발, 한 개의 뒷발은 하늘을 날고, 나머지 뒷발이 날아가는 제비의 등을 밟고 있다. 말발굽에 깔린 제비는 놀란 듯이 말을 쳐다본다. 서역을 분방하게 달리며, 대지를 호령하던 천마의 기상이 그대로 동상에 살아있는 것 같았다.
특이한 쌍두불상 실물 못봐 아쉬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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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하시대 쌍두불상> |
사진설명: 서하의 수도 카라호토(흑수성)에서 발굴된 쌍두불상. 무위 서하박물관엔 사진만 있었다. |
뇌대를 나와 ‘서하박물관’으로 갔다. 서하(西夏)시대 - 1032~1227년 중국 북서 지역, 지금의 감숙성 오르도스 지방에 존속한 탕구트족 국가. 징기스칸에 멸망됨 - 유물들을 모아놓은 박물관이었다. 서하는 주지하다시피 불교의 융성을 도모하여 화상공덕사(和尙功德司)·출가공덕사(出家功德司)라는 관청까지 설치했고, 사찰과 탑을 각지에 세웠다. 티베트풍의 불교회화가 카라호토(흑수성)나 돈황 등지에서 발굴됐으며, 선적(禪籍)들을 포함한 여러 종류의 경전들이 서하어로 번역·출간됐다. 〈송사(宋史)〉 ‘하국전(夏國傳)’ 등에 기록이 보이는데, 서하국 도성이 카라호토. 흑수성 유적은 1902년 3월19일 러시아 코즈로프 대령에 의해 발견돼 세상 밖으로 나왔다.
유물들과 전시관은 깔끔했다. 1·2층을 둘러보고 내려오다 다소 특이한 불상을 만났다. ‘일신쌍두(一身雙頭)’, 하나의 몸에 머리가 둘인 불상이 있었다. 사진만 있고, 실물은 난주 감숙성박물관에 전시돼 있다고 안내판에 적혀 있었다. 하나의 몸에 머리가 둘인 불상은 이 박물관에서 처음 보았다. 1900년대 초 흑수성에서 출토된 유물인데, 실물을 보고 싶은 마음 간절했다.
박물관에서 나와 ‘천제산(天梯山) 석굴’로 달렸다. 무위에서 60km 떨어진 천제산 석굴로 가는 길은 환상적이었다. 계곡과 강을 끼고 굽이굽이 돌고 도니 한 개의 석문(石門)이 나왔다. 석문 안으로 들어가니 갑자기 거대한 호수가 나타났다. 주변 풍경도 일변했다. 마치 ‘무릉도원’에 들어온 듯, 사방이 새롭고, 경치는 선경(仙境)이었다. 호수 이름은 황양호(黃羊湖), 흐르던 황양하를 막아 만든 인공 호수였다. 강과 석문만 막아버리면 - 다른 길이 있는지 모르겠으나 - 밖으로 나갈 길은 없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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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멀리서 본 천제산 석굴과 황양호. 방수벽 있는 곳에 대불이 있다. |
황양호를 끼고 또 다시 구절양장 같은 길을 달렸다. 호수 주변엔 논도 있고, 밭도 있고, 큰 백양나무도 자라고 있었다. 백양나무를 보니, 타클라마칸 사막 일대를 돌던 때가 그리워졌다. 1시간 정도 달리자 저 멀리 절벽 앞에 호수 물을 막아놓은 둑이 보였다. 석굴이 있을 만한 절벽이었다. 바로 천제산 석굴(북량시대 조성)이었다.
한 때 천제산 석굴엔 13개의 굴이 있었다. “황양호를 만든다고, 석굴 속에 있던 모든 불상과 벽화들은 감숙성박물관으로 옮겼다”고 안내인이 설명했다. 박물관으로 옮길 수 없는, 높이 28m의 부처님 상만 그곳에 있다. 큰 부처님을 중심으로 제일 앞에 신장, 가운데 불(佛), 맨 뒤 쪽에 가섭·아난존자가 시봉한 모습이었다. 저수지 물이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한 큰 방수벽이 석굴 앞에 있었다. 계단을 내려가 삼배 드리고 올려다보니 잘 생긴 부처님이 미소 짓고 있었다.
방수벽에 서 황양호 주변을 다시 둘러보니, 과연 선경이었다. 이런 곳에 석굴을 개착하고 수행 정진한 스님들은 어떤 분들이었을까. 멋진 장소를 선택한 스님이 누구인지 정말 궁금했다. 도로변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나니 오후 2시30분. 감숙성 성도(省都)인 난주로 달렸다. 300km가 넘는 거리인데, 도착하니 오후 6시30분. 천마호텔 815호에 짐을 풀었다. 천년고도 장안(서안)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중국 = 조병활 기자. 사진 김형주 기자
[출처 : 불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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