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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조주가 선물한 세상 원문보기 글쓴이: 박종태목사
야베스목사/담대하게 기도하는 성도! (요일 5;14-15)
오늘은 우리나라 역사에 아주 중요한 3/1절입니다.
1919년 3월 1일 우리 민족이 일제의 압제에 항거하면서 독립운동을 일으켰는데 그 중심에는 예수님을 믿는 신앙인들이었습니다.
독립운동에 참여한 사람들 중에 불교신자, 천도교 신자, 일반 국민들이 많았지만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인 중에 2/3정도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당시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이 많지 않았습니다.
성도들은 적은 숫자였지만 사회 곳곳에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는데 독립운동을 주도한 세력이 되었습니다.
이 운동으로 인하여 세계의 정치계가 우리나라를 주목하게 되었습니다.
대한제국이라는 나라를 해방시켜야 된다는 의식이 전 세계 정치계에 돋아나기 시작했습니다.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 등등의 나라에서 대한제국을 주목하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독립운동을 주도한 신앙인들은 독립운동을 주도하면서 얼마나 많이 기도했을까요?
1945년8월15일에 해방되기 까지 예수님을 믿는 신앙의 선배님들은 끊임없이 독립운동을 주도하면서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이분들은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했던 분들입니다.
오늘이라는 시간을 살아가는 우리들도 신앙의 선배님들이 어려움 중에서도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했듯이 우리들도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2009년 우리 산성교회의 표어인 “기본이 튼튼하고 견고하여 성장하는 교회와 성도”가 되려면 지난달에는 말씀을, 성경을 사랑하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제 두 번째 시간이 됩니다. 두 번째는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에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기도는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하기만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은 요한일서 5;14-15절의 말씀을 묵상하려고 합니다.
“그를 향하여 우리가 가진 바 담대함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
이 말씀을 의지하여 기도에 대하여 몇 가지를 생각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하려고 합니다.
1. 기도는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담대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기도할 수 있는 특권, 권세가 있다면 우리들이 잘나서 그런 특권을 가진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이 좋은 조건을 지닌 사람이기 때문에 기도할 수 있는 특권을 부여받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은 하나님 앞에서 내세울 수 있는 조건이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단 하나의 조건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예수그리스도를 믿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조건입니다.
이 조건보다 더 뛰어나거나 탁월한 능력을 지닌 조건은 없습니다.
우리가 기도할 수 있는 조건은 오직 우리들을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나의 구주요 구세주로 믿는 믿음 하나뿐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없으면 기도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새벽마다 정화수 떠놓고 비는 것이나 불상 앞에서 아니면 산에 가서 촛불을 켜놓고 100일 정성, 1000일 정성을 드리는 것은 기도가 아닙니다.
그야말로 그들이 말하는 데로 정성을 드리는 것에 불과합니다.
기도는 죄인인 인간이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 아버지께 말씀을 올리는 것을 기도라고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께 우리의 소원, 우리의 처지, 우리의 여건을 말씀 드리는 것을 기도라고 합니다.
마치 자식이 자신에 대해서 부모님에게 말씀을 드리면서 이야기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기도할 때 기죽지 않고 담대하게, 당당하게 기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부모님이 무서운 분이면 자식이 제대로 자신의 처지를 말씀 드리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부모님이 무서운 분에게서 태어나서 자란 사람들은 하나님 아버지도 무서운 분으로 생각이 되어서 제대로 자신의 처지를 올려드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 심판의 하나님, 죄를 범하면 곧바로 징계하시는 하나님으로만 알고 있으면 제대로 기도하지 못합니다.
물론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 심판의 하나님, 징계하시는 하나님이심에 틀림이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 은혜의 하나님, 용서의 하나님, 자비의 하나님, 넘치게 부어주시는 넉넉한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간혹 실수하더라도 눈감아 주시는 분입니다.
알면서도 솟아주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자식들이 간혹 부모님을 속일 때 속이는 줄을 다 알면서도 속아주기도 합니다.
야곱이 형을 대신하여 축복을 받으려고 할 때 아버지 이삭은 눈이 침침해서 몰랐다고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자식이 여러 명이 있는 것도 아니고 단 둘밖에 없는데, 에서 모르고, 야곱 모르겠습니까?
아닙니다. 다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삭이 뭐라고 합니까?
네 음성은 야곱인데 몸은 에서구나 하면서 속아주면서 축복해주는 것입니다.
평생 양털을 깎은 사람인데 양털 모르고, 사람 털 모르겠습니까?
뻔히 야곱의 몸에는 사람의 털이 아닌 양의 털을 붙이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속아주면서 축복하는 것입니다.
이게 부모입니다. 이게 하나님이십니다.
사실 우리들이 얼마나 많이 하나님을 속여 왔습니까?
저 자신이 목사이지만 저 자신을 가만히 돌아보면 얼마나 많이, 수도 없이 하나님을 속여 왔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을 속이고 또 속이면서 이번에는 안속일 겁니다. 하면서 또 속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저에게 매번 속으면서도 또 속아주시고 있습니다.
이게 부모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니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믿음 하나만 제대로 있으면 얼마든지 당당하게 담대하게 기도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정말로 예수님을 믿고 있다면, 예수님이 우리의 구주요 우리들의 삶의 모든 것들을 주관하시는 주님으로, 하나님으로 믿고 있다면 기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기도할 수 있는 특권, 자격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기도할 수 있는 특권을 주셨기 때문에 그 특권을 최대한으로 활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2. 무엇이든지 구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기도의 제목이나 내용에는 제한이 없습니다.
단지, 지옥에 가는 죄악을 위해서 사용하려는 기도제목은 안 됩니다.
죄도 지옥에 가는 죄가 있구요, 지옥에 가지 않는 죄가 있습니다.
여러분. 요한일서 5;16-17절을 보세요.
“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 그리하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범죄자들을 위하여 그에게 생명을 주시리라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니 이에 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 않노라 모든 불의가 죄로되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도 있도다”라고 말씀하세요.
사망에 이르는 죄는 지옥에 가는 죄를 가리킵니다.
지옥에 가는 죄는 어떤 죄일까요?
예수님을 믿지 않는 불신의 죄입니다.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을 섬기는 우상숭배의 죄입니다.
이런 죄는 용서받을 수 없고, 지옥에 가야 되는 죄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하나님께서 하셨다고 인정하지 않고 귀신이 했다고 하면, 그러면서 귀신이 하나님보다 더 뛰어난 능력을 가졌다고 하면 그 죄는 용서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을 때,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을 때, 성령님을 인정하지 않을 때,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인정하지 않을 때, 이런 죄는 용서받을 수 없습니다.
이런 죄는 용서받을 수 없기 때문에 지옥에 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인정하지 않고, 천주교에서 내세우는 위경이나 몰몬교에서 내세우는 몰몬경이나 통일교에서 내세우는 원리강론 같은 것을 더 앞세우면 하나님 앞에서 용서받을 길이 없습니다. 당연히 지옥에 가야 됩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기도할 수 있는 것은 죽음으로 가는 죄, 지옥으로 가는 죄를 위한 기도제목 외에 다른 것들은 다 기도제목이 될 수 있습니다.
돈이 없으면 돈을 달라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명예를 얻고 싶으면 명예를 달라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애인이 없으면 애인을 만나게 해 달라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공부하는 학생들은 공부 잘 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시험을 봐야 되는 학생은 시험 잘 볼 수 있도록 지혜와 은혜를 달라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공부는 하지 않고 컨닝 잘 할 수 있도록 밝은 눈 달라고, 공부 잘 하는 친구 옆에 앉게 해 달라고 하는 기도는 안 됩니다.
왜요. 그 기도는 생명을 살리는 기도가 아니라 생명을 죽이는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장사하는 사람은 장사 잘 하게 해 달라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사업하는 사람은 사업 잘 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돈을 벌기 위해서 사기를 치거나 공갈을 하거나 폭력을 행할 수 있도록 해 달라는 기도는 안 되는 것입니다.
생명을 살리는 기도가 아니라 죽이는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목사로서 우리 성도들의 믿음이 자라기를 위해서 기도합니다.
교회의 부흥과 성장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이미 세상에는 교회가 많은데도 불구하고 우리 산성교회를 세워졌다면 교회가 교회다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저 사람들만 왔다갔다하는 교회로 끝나버린다면 산성교회는 존재할 필요가 없습니다.
산성교회의 문을 닫아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산성교회가 존재해야 된다면 교회가 교회다워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산성교회를 세워주신 그 목적, 그 이유를 제대로 깨달아서 그 목적과 이유에 합당한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 성도님들의 가정에 말씀과 기도와 성령의 충만한 성도님들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건강과 물질의 축복을 달라고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건강해야 하고, 물질의 축복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좋은 사람들을 만나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때를 돕는 사람들을 만나야 합니다.
우리들의 삶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이루어지는 일들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때를 따라 좋은 사람들을 예비해 놓으시고 그 사람들을 만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형통함의 복을 달라고 기도합니다.
요셉에 가는 길에 하나님께서 함께 동행해 주심으로 형통케 되었다고 합니다.
형통케 되었다고 해서 종살이 안 한 것도 아니고, 모함을 받지 않은 것도 아니고 감옥살이를 안 한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동행하심으로 형통케 되었지만 종살이도 하고, 모함도 받았고, 감옥살이도 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으로 형통케 되었다고 합니다.
2009년에는 우리 교회와 가정과 생업터전과 직장과 일터에 좋은 것으로, 기쁘고 즐겁고 행복산 것들로 풍족하게 채워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어떤 것이든, 무엇이든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기도할 수 있습니다. 담대하게 기도해야 합니다.
3. 기도한 것은 얻은 줄로 알고 믿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곧 기도응답의 확신을 가지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응답이 될는지, 안 될는지 모르면서 기도하는 것은 기도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기도하는 시뇽만 내는 것이지 실제로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기도응답의 맛을 알아야 합니다.
음식 맛을 알아야 그 음식을 먹으러 그 식당으로 가는 것입니다.
어제 세미나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어느 목사님을 태우고 오게 되었습니다.
거의 다 왔는데 한 목사님께서 가방을 안 가져왔다는 것입니다.
할 수 없이 다시 돌아가서 그 분의 가방을 가져오게 되었는데 이 분이 미안한 마음도 들고, 시간은 점심시간이 되어서 점심을 살테니 점심을 먹고 가자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좋은 데 있으면 가자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가 간혹 손님이 오시면 모시고 가는 식당으로 갔습니다.
유천동에 있는 “영빈”이라는 돌솥밥집으로 가면서 3인분 식사준비를 해달라고 전화로 예약을 하고 갔습니다.
이 식당은 우리 성도님들을 모시고 가보지는 않았습니다만 조망간에 모시고 가서 먹고 싶은 식당입니다.
음식 맛도 좋고, 반찬도 많이 나오고 값도 저렴해서 좋습니다.
점심을 먹으면서 자신의 입에 딱 맞는 음식을 먹었다고 하면서 좋아들 합니다.
저가 왜 그 식당으로 목사님들을 모시고 갔겠습니까?
그 식당의 음식 맛을 알기 때문에 가는 것입니다.
그 식당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고, 음식 맛도 어떤지 모르고 반찬이 어떻게 나오는 지도 모르면 그 식당을 찾아갈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면 어떤 맛이 있다라는 것을 알아야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면 반드시 응답하시고 은혜를 주실 것을 알고 믿어야 기도하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11;2-24절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을 믿으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을 믿고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 약속은 반드시 응답하시는 “엘 샤다이 하나님”이십니다.
엘 샤다이라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 말씀하신 것은 반드시 지키신다는 말씀입니다.
사람들은 약속을 아주 쉽게 깨뜨려버립니다.
손가락을 걸어서 맹세를 하고, 머리 숙여서 절을 하고, 두 손을 싹싹 비벼가면서 잘못했다고 하면서 별 짓을 다 하면서 약속을 해도 아주 쉽게, 그야말로 손바닥 뒤집듯이 약속을 지키지 않습니다.
사람은 기도해 놓고서도 잊어버릴 수 있습니다.
열왕기하에 보면 엘리사 선지자와 수넴 여인의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엘리사 선지자는 수넴 여인의 환대를 받으면서 사역할 수 있었습니다.
여인의 환대를 받은 엘리사는 여인에게 보답해 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엘리사는 여인을 불러서 부탁할 소원이 있으면 말해보라고 합니다.
그러면 자신이 최대한으로 도와주겠노라고 합니다.
여인은 아무 소원도 없다고 합니다.
그럴 때 엘리사의 종 게하시가 여인에게 자녀가 없다는 소식을 전합니다.
엘리사는 여인에게 내년 이암 때에는 자식을 품에 안을 것이라고 하면서 축복합니다.
그런데요 여인은 이미 나이가 많이 들었습니다.
이미 출산할 능력은 사라진 지 오랩니다.
젊어서 결혼했을 때는 자녀를 달라고 수없이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는 자녀를 주시지 않았습니다.
세월이 흘러도 자녀를 낳지 못한 여인은 자식을 포기했습니다.
잊어버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람을 만나서 옛날 젊었을 때 기도한 그 기도를 기억해 냅니다.
그리고 이미 포기한 상태에서 아들을 출산하는 영광과 기쁨을 누리게 합니다.
이처럼 사람은 잊어버리고 포기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잊어버리거나 포기하지 않습니다.
반드시 응답해 주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엘 샤다이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할 때 반드시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이라는 고백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경우에도 자신의 약속을 깨뜨려버리지 않고 지켜내시는 분입니다.
그런 분을 우리의 하나님으로 믿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기도하는 것은 살아 있다는 증거입니다. 기도는 영적인 호흡이라, 영혼의 숨쉬기 운동이라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기도하는 것은 살아 있다는 증거입니다.
죽은 사람은 숨을 쉬지 않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기도하지 않는 것은 영혼이 죽었다는 증거가 됩니다.
우리 산성교회는 기도에 매진하여 살아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기도는 시간을 정해놓지 않고 무시로, 항상, 어떤 일을 하든지 기도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일정한 시간이나 기간을 정해놓고 규칙적으로 기도할 때도 있습니다.
특별새벽작정기도, 금식기도와 같이 일정한 기간이나 시간을 정해놓고 반드시 해결해야 될 문제들을 집중적으로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응답은 그 만큼 빨라집니다.
우리가 기도함으로 요한삼서1;2절의 말씀처럼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되었으면 합니다.
우리가 기도함으로 우리의 영혼이 잘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기도함으로 우리가 하는 모든 일, 범사에 하나님의 은혜로 잘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기도함으로 영육간에 강건해져야 합니다.
2009년에 우리가 기도에 매진하여 응답받는 축복으로 가득 채워져야 합니다.
기도에 도전하고,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증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들에게 한없는 능력과 은혜와 자비와 긍휼을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이심을 믿고 헌신하는 축복을 받아야 합니다.
저가 말에는 능력이 있다고 누누이 말씀 드렸습니다.
우리가 말로 기도하고, 말로 축복하고, 말로 은혜를 나누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입술로 선포되어진 말에 힘을 실어주시고 응답해 주실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반드시 기도할 때 입술을 열어서 말을 하면서 기도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야말로 아무 말없이 묵상 기도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반드시 말을 하면서 기도하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말을 해야 하나님은 그 말에 책임을 져 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저가 예배를 마치면서 축도하기 전에 반드시 읽고 축도하는 말씀이 있는데 어디에 있는 말씀인지 아십니까?
다같이 민6;22-27의 말씀을 찾아 읽겠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이렇게 축복하여 이르되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
그들은 이같이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할지니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
이 말씀은 이스라엘의 대제사장을 비롯하여 모든 제사장들이 아침 번제를 드린 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날마다 이 말씀으로 축복합니다.
그러면 그 축복을 하나님께서 책임지고 복을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저도 우리 산성교회의 제사장의 사명을 가지고 주일 낮 예배에서 만큼은 이 말씀을 읽은 후에 축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한 상원 이라는 목사는 별 볼 일 없습니다.
한목사는 별 볼 일 없는 사람이지만 하나님은 위대하신 분입니다.
위대하신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말씀대로 성도들에게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 역대상 4;10의 말씀을 읽겠습니다.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어 이르되 주께서 내게 복을 주시려거든 나의 지역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내게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하나님이 그가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들에게 복을 주시기를 원합니다.
지역을 넓혀주시고 주님의 손으로 도와주시고 환난에서 건져내 주시고 근심이 없게 하시는 축복을 주시길 소망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하게 기도하는 성도가 되어서 영혼이 잘 되고, 범사에 형통하고, 육신도 강건해지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