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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유럽 기행 [제11부] 아름다운 체코 프라하
우리가 탑승한 차량이 체코 프라하로 가기 위해 고속도로로 접어들었다.
매번 언급하지만 이곳 10월 하순의 날씨는 우리나라의 12월 초순과도 같은 것 같다.
어스름하게 해가 지기 시작하면 추위가 삭풍을 타고 뼈 속까지 파고드는 것 같이 으슬으슬 떨리고 콧물이 난다.
이곳에 오기 전 아내와 나는 감기에 걸려서 왔다.
아내는 나보다 일주일 전 쯤 걸려서 한동안 고생 좀 하였고 나는 삼일전 쯤 걸려서 인후(목)가 붓고 밤이면 마른기침에 열도 있었다,
우리부부를 진찰하였던 의사선생님의 말씀이 한동안 따뜻한 곳에서 무리하지 말고 따뜻한 음식을 섭취하며 쉬면 좋다고 했다. 그런 말을 하는 의사선생에게 몇일 뒤 해외여행을 나간다고 했더니 의사양반이 정색을 하면서, 해외여행은 커녕 국내의 여행도 꿈도 꾸지 말라고 했다.
그런 의사양반 말씀에 마누라와 나는 여행을 떠나기가 약간은 겁이 난것도 사실이었으나,
어쩌랴 여행비는 이미 지불하였고 비행기 티케팅도 끝이 난지라 어쩔수 없이 약간은 무리해서라도 다녀 올것을 둘이서 손잡고 맹세를 하였으니 여기와서 기침하고 열나고 아픈 것을 누구에게 탓하랴.
우리 일행들이 목이 쇄도록 기침하는 마누라를 동정하는 눈빛으로 볼 때 겁이 나기도 하고, 타온 감기약을 잘 복용하고 나기를 비는수 밖에.....
온몸을 목도리로 칭칭 감고 옷을 한겹 더 껴입어도 춥긴 춥다.
마누라의 옷깃과 목도리을 한번더 여며 준다.
우리 일행들은 이곳 날씨에 적응이 잘 않되어 저녁이면 욕조에 뜨끈뜨끈한 물 받아서 반신욕을 즐기는 수 밖에 없었다.
오늘 저녁에도 호텔에 투숙하면 욕조에 따듯한 물을 받아 놓고 감기몸살인 몸뚱이를 물속에 담그는 생각뿐이다.
어슴푸레 해가지는 고속도로를 달려 도착한곳은 황홀하게 아름답다는 프라하....
밤의 야경이 무척이나 아름답다.
도착한 첫날 늦게 도착하는바람에 피곤이 겹쳐서 건성건성 본것이 다였는데 오늘 다시 돌아와서 보니 경치가 참아름답다.
우리 일행은 저녁식사가 예약된 차이니스 레스토랑(중국집- 자장면은 물론 없다)으로 행했다.
계란처럼보이는 스푸가 나오고 메뉴는 하얀 쌀밥에 김치 중국식 닭요리 탕수육, 깐풍기,깐풍새우등이 회전식탁에 차려졌다.
흰쌀밥에 김치를 보니 식욕이 돋아 일행들은 밥한그릇을 다비웠다.
후식은 과일이 나오고...
식사를 든든히한 우리일행은 프라하의 야경을 구경하기위해 가이드를 따라 프라하 시내로 걸어들어 갔다.
[ 식사전에 계란탕같은 스프- 맛이 좋았다]
체코에 다시 왔으니 이곳을 다시한번 소개해야 될것 같아서 1편에서 올린 글과 같이 소게 하고 넘어간다.
이 곳 체코는 유럽 중부에 위치한 내륙국으로, 제2차 세계대전 후 독일로부터 독립하였다. 체코인과 슬로바키아인이 인위적으로 합쳐진 체코슬로바키아는 1990년 국명을 체코슬로바키아 연방공화국으로 고치고 1993년 1월 1일 평화적으로 체코와 슬로바키아의 2개 공화국으로 서로 분리·독립하여 오늘에 이른다.
정식명칭은 체코공화국(The Czech Republic)이다.
북쪽으로 독일·폴란드, 서쪽으로 독일, 남쪽으로 오스트리아, 동쪽으로는 슬로바키아와 국경을 접한다.
체코슬로바키아는 동유럽 공산주의 국가 중 최고의 생활수준과 높은 문화를 유지한 공업국가이었다. 체코인과 슬로바키아인의 민족적·언어적·문화적 이질감과 경제적 차이를 해소하기 위하여 1990년 슬로바키아공화국과 연방제를 구성하였다가 평화적으로 분리·독립하여 체코공화국이 되었다.
행정구역은 13개주,1개의 특별시로 되어 있다고 한다.
체코의 역사를 살펴보면
슬라브족(族)은 5~7세기에 현재의 체코·슬로바키아 지역으로 이주하여 정착하였다. 체크슬라브족(族)은 보헤미아와 모라비아 지방에, 슬로바크슬라브족(族)은 슬로바키아 지역에 각각 정착하였다. 이 두 종족은 A.D. 833년 일종의 연방국인 대(大)모라비아왕국을 세웠다. 모라비아왕국은 번창하여 그 판도가 보헤미아로부터 슬로바키아를 거쳐 헝가리 서부, 폴란드에 이르렀다.
3편인가 4편에서 헝가리를 소개할때 말했던 그 마자르족,
그 헝가리의 마자르족이 A.D.906년 모라비아왕국을 침략하여 슬로바키아를 점령한 이후, 슬로바키아 지역은 1000여 년 동안 체코와 분리된 채로 헝가리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되었다. 이에 대하여 체코인들은 모라비아제국이 쇠락하기 시작한 9세기 말(895) 즈음 프르셰미슬 제후 밑에 결집하여 프라하를 중심으로 한 보헤미아·모라비아·루테니아·슐레지엔을 포함하는 지역에 독자적인 국가, 즉 보헤미아왕국을 세웠다.
프르셰미슬가(家)의 군주들이 독일의 동방 진출에 대한 방어와 군주제 확립을 위해 신성로마 황제를 추앙하는 동시에 적극적으로 그리스도교 도입에 노력한 결과, 1158년 체코 군주는 황제로부터 왕조 세습을 승인받고, 1204년에는 왕국의 독립도 인정받게 되었다. 보헤미아왕국은 프르셰미슬 오타카르 2세 치하에서 번성하여 당시 영토가 오데르강(江)으로부터 아드리아해(海)까지 확대되기도 하였다. 1307년 바츨라프 3세가 사망함으로써 프르셰미슬왕조의 지배가 끝나고, 룩셈부르크왕조의 지배가 시작되었다.
제2대 왕 카를 4세는 뛰어난 통치능력으로 1346년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선출됨과 함께 프라하를 신성로마제국의 수도에 걸맞은 도시로 건설하여 당시의 체코, 즉 보헤미아는 정치적·문화적으로 크게 번창하였다. 15세기 중엽, 비잔틴제국을 섬멸한 오스만투르크제국이 헝가리 동쪽 지역까지 진출하게 되자 이에 대항하여 1526년에는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가의 페르디난트 1세가 체코인(人) 헝가리 국왕을 겸임하게 되었다. 이후에도 독일인(人) 제왕의 통치가 계속되어 결국 체코의 전 영토가 1918년까지 300여 년간 합스부르크왕가의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속령이 되었다.
1915~1916년 민족지도자 마사리크(Masaryk)와 그 제자인 베네시는 파리에서 ‘체코슬로바키아 국민회의"를 결성하고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의 종결과 베르사유조약에 따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붕괴하자, 체코슬로바키아는 같은 해 10월 28일 독립을 선포하고 공화국이 되었다. 1938년에는 영국·프랑스·독일·이탈리아가 체결한 ‘뮌헨 협정’에 의거하여 수데텐란트 지역이 독일에 넘겨주게 되고 게다가 소수민족 자결권을 주장하는 폴란드와 헝가리에도 많은 땅을 빼앗겨 체코슬로바키아의 면적과 인구는 1/3로 줄어들었다.
1939년에 독일군(軍)의 침공을 받은 체코슬로바키아는 독일의 통치를 받게 되자 1940년 베네시 대통령은 런던에 망명정부를 수립하고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2차대전이 한참 진행중이던 1943년, 연합군이던 소련과의 동맹조약을 체결하였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이 패망하고 프라하가 연합군인 소련군에 의해 해방되자, 체코슬로바키아는 루테니아 지역을 소련에 건네준 채 다시 독립하게 되었고, 공산당과 비공산주의자 간의 연립정부가 구성되었다.
체코는 위에서 소개한 바와 같이 유럽내에서 가장 공업이 발달한 나라이기에 체코를 넘보는 세력들이 많았다.
특히 히틀러는 체코를 침공하는 가장 큰 이유가 중공업과 경공업 그리고 세밀한 무기를 제조할 수 있는 기술력과 노하우가 축척된 인력을 보유했기 때문 이라고 했다.
그러기에 체코를 침공할때 가장 많은 신경을 쓸 정도 였다고 한다.
(공장과 인력을 확보하기 위해서 침공시에 피해를 줄이기 위해 최단시간내에 점령을 목표)
그건 그렇고 세계2차대전 종전 후 1946년을 전후하여 최초의 자유총선이 실시되어 공산당이 37.9%의 득표율로 제1당이 되었다. 공산당 주도의 연립내각이 성립되었으며, 2년 후 공산당은 무혈쿠데타로 1당독재의 권력을 장악하였다. 1960년에는 사회주의 헌법이 채택되었고 국명도 ‘체코슬로바키아 사회주의공화국’으로 개칭되었다. 1968년 8월 공산당 제1서기 둡체크에 의해 ‘프라하의 봄’이라 불리는 자유화개혁운동이 추진되었으나 소련(소련의 위성국에게 체코를 침공토록 사주)에 의해 좌절되었다.
그동안 내부적으로 커다란 문제였던 체코와 슬로바키아 간의 불평등한 관계가 청산되기 위한 첫번째 시도로서 1969년 1월 체코사회주의공화국과 슬로바키아사회주의공화국으로 구성된 연방제 국가가 새 출발을 하게 되고, 1977년 1월에는 극작가 바츨라프 하벨 등이 중심이 된 반체제 지식인들이 체코공산당의 인권 억압에 저항하여 ‘77헌장’을 선언하였다.
1988년 고르바초프에 의한 구소련의 개혁 바람이 동구권에 불어닥치자, 체코슬로바키아 내에서도 같은 해 11월 민주세력 ‘시민포럼’이 중심이 된 시민들의 민주화개혁 요구 시위가 대규모로 발생함에 따라 12월에 공산정권이 퇴진하고, 1989년 시민포럼의 지도자 바츨라프 하벨이 체코슬로바키아 41년 역사상 처음으로 비공산주의자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1990년 3월에 체코슬로바키아 의회는 국명을 ‘체코슬로바키아 연방공화국’으로 변경하였으며, 1990년 6월에는 신헌법에 따라 자유총선을 실시하여 새로운 민주정부를 구성하였다. 1992년 6월 자유총선을 실시하였고 같은 해 12월 16일 자유민주주의 국가체제를 지향하는 신헌법을 채택하였다. 1993년 1월 1일 체코슬로바키아 연방공화국은 1992년의 연방의회 승인에 따라 체코와 슬로바키아 2개의 공화국으로 분리되어 오늘에 이른다고 한다.
우리일행은 서둘러서 야경의 프라하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맨 처음 소개 된곳이 시민회관이다.
[ 시민회관-1918년 10월 28일 체코슬로바키아의 독립을 선포한곳이라고 한다.]
위 사진에 보이는 것이 시민회관인데 이곳은 보헤미아 왕조의 궁궐이었던 기존의 건물을 헐어내고 그 자리에 1905년부터 1911년에 걸쳐 현재의 건물을 신축하였다. 이 건물을 신축 당시 체코의 최고 미술가들인 알폰스 무하, 카렐 슈필라, 얀 프라이슬러 등이 참여하여 외관은 네오바로크풍으로 내부는 아르누보 양식으로 완성하였다고 한다.
이곳은 연주회장과 전시장, 레스토랑 등을 포함하여 500여실의 공간으로 이루어진 복합 문화시설이며, 건물에서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장소는 체코의 음악축제‘프라하의 봄’의 개막과 폐막 공연장으로 유명한 스메타나 홀이라고 한다.
축제의 첫날인 매년 5월 12일 저녁에 음악가'스메타나’의 교향시 [나의 조국]의 연주와 함께 개막 공연이 시작된다.
또한 이곳은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1918년 10월 28일, 체코슬로바키아의 독립을 선포하였는데 바로 이곳에서 선포하였다고 한다.
또한 이곳은 현재 프라하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주무대로 이용되며, 음악회 외에도 연극, 발레, 오페라 등을 공연하고 있다고 한다.
[야경의 시민회관과 그 옆에 붙은 화약탑의 모습, 화약탑아래는 성문으로 우리일행이 구시가지로 진입한 곳이다.]
시민회관 옆에는 높이 65m의 고딕식 건축물이 있다. 이곳은 1475년에 세워진 고딕양식의 건축물로 원래 대포를 보관하던 대포의 요새로 지어졌다가 루돌프 2세때는 연금술사의 연구실과 화약창고로 쓰였으며, 1960년대 이후에는 종주조와 연금술에 관련한 기구들을 전시하는 박물관으로 사용되었다.
화약탑이라는 이름도 17세기에 화약창고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으로, 그 옆의 화려한 아르누보 양식의 시민회관과는 대조적으로 화약탑이라는 이름이 어울릴만큼 칙칙하고 어두운 느낌이 든다. 18세기 중반에 전쟁으로 파손되었다가 19세기 말에 현재의 모습으로 복구된 것이다.
탑 아래 반원모양으로 뚫려 있어서 사람들의 통로로 이용되며, 총 높이나 65m로 현재 내부가 미술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또한 이곳은 프라하의 구시가지와 신시가지가 나뉘는 지점이라고 하며,
1475년 건축될 당시에는 구시가지를 지키는 13개 성문 가운데 하나이라고 한다. 이후 총기 제작공이자 종(鐘) 주조공인 토마스 야로스의 거처 겸 작업실로 개축되었다가,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1576~1612 재위) 루돌프 2세 때인 17세기 초에 연금술사들의 화약창고 겸 연구실로 쓰이면서 화약탑으로 불리게 되었다.
루돌프 2세는 병약하고 백성들로부터 민심을 잃은 것은 물론 종교적 충돌을 막지 못하여 30년 전쟁(1618~48)이 발발 하게되는 단초를 제공하게 되고 이것이 큰 혼란기를 가져오게 된다.
그러나 그는 예술과 건축에 많은 관심을 가져 당대의 뛰어난 예술품들을 수집하고 유명한 미술가인 '쥬세페 아르침볼도'를 궁정 화가로 고용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의 수집품들의 대부분은 30년 전쟁중인 1648년 프라하의 서부가 스웨덴군에 함락된 후 전리품으로 빼앗겼지만, 워낙 예술과 건축, 과학에 많은 관심을 쏟아 오늘날 이곳 프라하에 많은 유산을 남기게 된다.
맨 위에서 체코의 역사를 소개하는 중에 30년 전쟁에 대한 이야기가 종종 나오는데 이것은 체코의 운명이 좌우될 이야기가 많다. 그래서 이글 나중에 소개 하고자 한다.
우리 일행들은 가이드의 종종걸음을 따라 화약탑 밑에 뚫린 성문을 통해서 구 시가지로 진입하였다.
[아름다운 카페]
광장을 빙 돌며 카프카가 태어난 생가로부터 다니던 학교. 살던 집 등 6 곳에 그의 41년 일생과
관련된 건물들이 있으며 내 아내 뒤로 사진에 제일 높은 건물은 카프카가 32살부터 3년간 살던 집이라고 한다.
사진뒤로 보이는것이 틴 성모교회이다.
프라하 구 시가지를 대표하는 고딕양식의 교회로 현재의 건물은 1365년경에 건축되었다 하며, 하늘을 찌를 듯한 80m 높이의 쌍둥이 첨탑은 밤에 조명을 받아 더욱 웅장하고 아름다움이 더한다.
외관은 고딕양식이나 내부는 바로크 양식이 가미되었다고 하며, 제단은 로코코양식으로 지어졌다고 한다.
나중에 다시 안급하겠지만 14~15세기는 후스파의 종교개혁의 거점으로 사용되었으며, 그 당시 만들었던 황금 성배를 후에 카톨릭 세력이 녹여서 황금 성모마리아상을 만들어 탑 중앙에 올렸다 한다.
이 시계는 매시 정각이 되면 종소리와 함께 작은 창문이 열리면서 그리스도 열두제자 인형이 창 안쪽으로 빙빙 돌며 나타났다 사라지는데, 정각쯤 되면 이 광경을 보려고 관광객들이 모여든다.
아울러 광장을 둘러싸고 있는 노천카페의 흥겨운 분위기와 은은한 조명으로 운치를 더해주는 광장의 야경 역시 환상적이다.
프라하의 마리오네트(나무인형: 인형극을 할때 사용한다)를 판매하는 매장 앞에서- 내 어깨뒤로 조
그마하게 보이는 이쁜아가씨가 자꾸말을 걸어온다. 자기에게 관심이 있냐고 물어 온다. 나는 당신이
관심이 있기 보다는 인형들이 신기하고 이뻐서 보는것이며, 당신의 생긴 모습이 아름다워서 우리
일행들이 처다 보고 있다고 대답했더니 깔깔대며 웃는다.
그래서 당신은 장사를 잘할 것 같다고 칭찬했더니 얼굴이 빨게지며 어느나라에서 오셨느냐고 묻는다.
마리오네트라고 불리는 이 인형은 인형극을 할때 사용되며 가격은 최소 우리나라돈으로 따지면
46,000원 부터 최고로 비산것은 몇백만원이 호가하는 것도 있으며, 특히 중세시대에 제작된 인형
은 수억을 호가하는것도 있다고 한다.
[광장의 아름다운 밤거리 풍경- 내일 다시온다고 하여 자세한 소개의 글은 뒤에서 소개해 올리겠다]
프라하가 '백탑의 도시'란 말에 걸맞게 구시가지 광장은 각 시대의 다양한 건축 양식을 동원해서건립된 탑들로 구성된 건축물 모두를 볼 수 있다.
원래 이 광장은 10세기 부터 상업과 무역의 중심지였으나 1338년 시청이 이곳에 들어서면서 프라하의 심장부로서의 역할을 하며 체코 역사의 영광과 아픔을 함께 한 상징적인 장소가 되었다.
구 시가지광장은 언제나 여행객들로 가득하다.
체코인들의 삶과 역사에서 가장중요한 장소이기도 한 이 곳은 11세기 이래 시장이 들어서면서 프라하 시민의 삶의 중심이자, 종교개혁가 얀후스의 화형, 프라하 시민운동 등 역사적인 사건이 일어났던 곳이다.
1621년에는 합스부르크에 대해 반기를 들었던 27명의 프로테스탄트 체코인 귀족들이 처형당했던 치욕의장소이기도 하다.
광장주변에는 구시청사와 천문시계, 얀후스동상, 틴성당 성미쿨라쉬 교회 그리고 킨스키 궁전등 중세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아름다운 건축물들이 많다. 구시가지 광장을 중심으로 한바퀴 돌면 로마네스크 양식에서 아르누보 양식까지 모든 건축양식을 한자리에서 볼 수 있다
특히 광장한 복판에 자리한 얀후스 동상은 만남의 장소로도 유명하다 천문시계로 유명한 구시시청사건물 앞은 매시정각마다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룬다.
[체코 프라하의 명물 천문시계앞에서]
[뒤로 보이는 프라하성의 야경이 매우 아름답다]
[프라하의 마지막밤 가져간 소주와 이곳 상점에서 구입한 맥주들- - 내일이면 떠나야 하기에 전부를 마셔야 했다]
동유럽 기행의 마지막 밤이 되었다.
2010년10월16일에 인천을 떠나 벌써 오늘이 10월22일. 여행7일째의 날이 저물어 어느새 새벽으로 향한다.
너무나 시간이 빨리 가는 것 같다.
10월16일 체코 프라하 국제공항에 도착했을 때가 어제 같았는데 벌써 8일이 지난 나 보다.
그 동안 이곳 체코를 비롯한 폴란드, 헝가리, 슬로바키아, 오스트리아를 채바퀴 처럼 한바퀴 돌아서 다시 이곳으로 왔다.
오늘 숙소인 이곳 호텔은 ‘호텔 프라하’ 특급호텔로 예전에는 공산당 간부급 이상만 투숙하던 곳이란다.
객실이 굉장히 넓고 화장실 욕실 등이 분리되어 있고,
바지를 걸어놓으면 다려지는 시설도 되어 있어 신기하기만 하였다.
오늘도 투숙하자마자 여느때와 마찬가지로 따수운 물을 받아놓고 감기로 찌들은 몸을 쭉 풀었다.
몸이 좀 풀리자 일행들은 한방에 모여 코리아 위스키(쇠주) 파티를 열었다.
내일이면 다시 우리나라로 돌아간다는 기쁨도 있지만
서로 한 식구처럼 매일 붙어 다니며 낄낄대고 장난도 치던 어린 친구들처럼 지냈었는데,
또 이런 여행을 언제 다시 해 볼까하는 아쉬움에 밤잠도 있은 채 가지고간 모든 술을 다 내어놓고 마시며 시간가는 줄 모르고 밤의 끝자락을 붙잡은 채 이런 이야기 저런이야기로 꽃피우며 지세우고 있었다.
마지막날 아침
그러니까 2010년10월23일 토요일
프라하에서의 마지막밤을 지세우고
우리일행은 숙취에 띵한 머리와 쓰린 속을 개운한 커피와 요거트로 달랜다.
프라하 호텔의 아침식사는 아메리칸조식이다.
우리가 묶은 모든 호텔의 서비스는 ‘의식주’ 중, 식과 주를 포함하고 있다. 편히 잘 수 있는 객실뿐만 아니라 맛있는 식사 또한 호텔의 서비스의 중요한 요소 중 하나로, 잠자리가 조금 불편했어도 조식이 맛있으면 어느 정도 용서가 된다.
나는 관광분야에 관심이 많아 이번여행이 상당히 유익했다.
그리고 호텔경영학에 관심있는 나는 책에서 본 힐튼이나 하얏트 같이 세계적인 호텔 체인이 호텔 운영시 위탁 경영을 하고 있는데,
이때 체인본사에서 총지배인과 함께 직접 파견시키는 인물이 바로 식음료부장(F&B Director)이라고 한다.
이는 호텔에서 얼마나 ‘식사’를 중요시 생각하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라고 하겠다. 즉, “식사가 맛없는 호텔”이란 소문은 호텔의 이미지에 치명적이며,
특히 조식은 고객이 호텔을 평가하는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오늘은 ‘조식’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호텔 조식의 종류는 크게 컨티넨탈(Continental Breakfast)과 아메리칸(American Breakfast)으로 나뉜다.
이는 어디서 유래한 것일까?
컨티넨탈과 아메리칸 조식의 유래는 기후 등 환경적 요인에 의한 민족성의 차이까지 살펴보아야 한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민족을 조기(早起)민족, 늦게 일어나는 민족을 만기(晩起)민족이라고 하는데, 영국과 독일 같은 국가의 사람들은 아침이 빠른 조기민족이고, 프랑스, 이태리, 스페인 등의 국가들은 아침이 늦은 만기민족이다.
스페인과 같은 남부유럽의 라틴족들은 지중해의 따뜻한 기후 덕분에 성격이 낙천적이며, 음주가무를 즐기면서 저녁 늦게까지 즐기다가 잠자리에 들어가기 때문에 아침에 일찍 일어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밤새 부어 대다보니 아침은 입맛이 없는 것이 당연하다.
그래서 간단하게 빵과 커피 한잔이 조식의 전부다.
반면에 영국을 포함한 북유럽인들은 날씨가 춥고 겨울이 길어 외부생활 보다는 집에 일찍 들어와 잠자리에 들게 되는데, 이에 따라 아침 기상 시간이 빠르며 따뜻한 음식(hot meal)을 포함한 푸짐한 아침식사를 하게 되는 것이다. Break(깨다)+fast(기근, 배고픔) 라는 의미의 ‘Breakfast’가 아침 일찍 일어나 배가 고픈 것을 푸짐한 음식으로 깬다는 뜻에서 나온 것이니, 단어에서도 영국인들의 조식이 예로부터 푸짐했음을 짐작 할 수 있다.
그래서 호텔 조식에 대한 기준은 영국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간단한 아침식사를 컨티넨탈식 이라고 하는 것도 조기 민족인 영국인이 바라보는 남부 유럽대륙의 조촐한 아침 메뉴에서 유래 한 것이다.
또한 ‘아메리칸’이란 본디 영국인을 의미하고 있으므로, 앞서 설명한 것과 같이 빵과 커피는 물론 따뜻한 요리가 포함된 푸짐한 스타일인 것이다.
유럽의 호텔에 묵을 때 간혹 심하게 조촐한 조식에 실망을 하는 경우도 많지만,
이런 조식의 유래를 알고 나면 조금은 이해해 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앞으로 호텔을 투숙하게 될 때, 조식을 주의 깊게 살펴보자.
단순한 조식 속에 숨겨진 여행지의 민족성까지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세계어디를 가든 조식은 관광 상품에 비싼 것은 아침에 푸짐한 아메리칸식을 주고, 거저 갈려고 싼 것을 예약하면 커피 한잔에 딱딱빵을 먹을 수 밖에,
그리고 아메리칸식은 반드시 계란요리가 나온다.
오늘도 따끈하게 찐 계란과 방금 구워낸 호밀빵, 소세지, 베이컨, 구운닭다리, 신선한 채소와 과일들을 먹었는데 아침 메뉴가 참 맛있었다.
동유럽에서 현지식은 대부분 돼지고기인데 요리마다 짜고, 냄새가 참을 수 없는 수준이라 상당히 힘들었다.
[프라하성- 대통령궁으로 사용되는곳이기에 경비병의 모습이 사뭇 비장하다]
식사를 마치고 방으로 올라와 이제 국내로 들어가야 하기때문에 짐들을 정리를 하고 가방을 다시 한번 더 점검했다.
선물들이 있어서 그런지 가방의 부피가 더 되어 보인다.
친구들의 방문을 두드려 로비로 함께내려가 가방을 버스짐칸에 챙겨넣고,
빠진것들이 없냐고 되뭇고 떠나기가 서운해서 얼굴만 바라보며 웃는다.
가이드의 재촉이는 눈빛으로 버스가 프라하 성으로 떠난다.
대통령궁으로 일부가 사용되고 있는 프라하 성
그 성으로 입장하려면 위 사진과 같이 이렇게 근위병이 서있는데 움직이지 않고 인형처럼 서있다.
우리나라 청와대를 비교하면 너무 형식적인 것 같다.
가이드의 말에 의하면 원래 이나라 대통령은 경호도 받지 않고 그냥 일반 공무원과 같이 출근해서 사무를 처리하고 퇴근한다고 한다.
그러던것을 다른나라와 비교하여 너무 대통령의 의전이 소홀하다고 하여 국빈이 방문할 때에는 관례상 경호를 한다고 한다.
또한 대통령 궁 앞에도 근위병이 없었으나 관광객의 관광용으로 세워 놓았다고 한다.
우리나라와 같으면 어림도 없는 이야기일 것이다.
북한과 대치하는 우리나라나, 전 세계의 경찰이라는 미국의 대통령은 상당히 중요하기 때문에 의전도 의전이지만 대통령의 안위가 나라의 안보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것이 현실이다.
우리와 비교 할 때에 평안한 것이 그저 부러울 따름이다.
[뒤로 보이는곳이 대통령 집무실 - 국기가 계양되면 대통령이 집무실에 계시다고 하며 대통령 부재시에는 국기가 내려진다.]
대통령 집무실 앞의 전경이다.
뒤에보이는 건물 옥상에 국기가 걸려있으면 대통령이 출근해서 일을 보는중이라고 하는데 이 나라
의 대통령은 상당히 소박한 모양이다.
[성당안의 모자이크는 20세기 초에 활동한 체코의 아르 누보 예술가 '알폰스 무하(Alfons Mucha)'의 작품]
['바츨라프'대왕은 11세기경 체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으로 꼽히는 왕인데 왕을 시기하던 이복동생들에 의해 살해를
당했다고 한다. 왕이 자객을 피해 도망을 하다가 이 성당앞에 이르렀으나 안타깝게도 성당의 문이 끔적도 하지않아 피하지
못하고 결국 성당의 문고리를 잡은 채 살해 되었다고 한다. '바츨라프'왕을 기리기 위해 성당입구 청동문에 그의 일대기를
조각 해놓았다]
'성 비타성당 '은 프라하 성 내 안뜰의 거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거대한 성당으로, 보헤미아 지방의 통치자였던 '바츨라프' 대왕의 명에 따라 925년에 처음 건설되었고, 1929년에 이르러 비로소 완성되었다. 처음 지어졌을 때부터 계산하면 1,000년이 넘게 걸린 셈이다. 성당 내부는 길이 124m, 폭 60m, 높이 96.5m로 매우 거대하다. 안으로 들어가면 화려한 색채의 스테인드글라스가 눈길을 끄는데, 특히 성당 왼쪽 바로 앞의 스테인드글라스는 20세기 초에 활동한 체코의 아르 누보 예술가이며, 앞에 서두에 소개한 시민회관의 내부 건축을 주도 했던 '알폰스 무하(Alfons Mucha)'의 작품으로, 이 성당에서 가장 인기 있는 볼거리 중 하나다.
성당의 벽을 따라 늘어선 21개의 작은 예배당에는 옛 보헤미아 왕들의 묘나 이 성당을 거쳐 간 주교들의 묘가 있다.
그 중에서도 12세기 말에서 13세기 초까지 동유럽의 거대한 영토를 다스렸던 '바츨라프 대왕'의 묘가 있는 '바츨라프 예배당'이 가장 화려하게 꾸며져 있다. 하지만 '성 비타 성당' 안에 있는 모든 무덤들 가운데 14기 때 사제였던 '성 네포묵'의 무덤만큼 화려한 묘는 없다.
중앙 제단 뒤편에 있는 그의 묘는 순은 3톤을 녹여 만든 체코에서 가장 큰 '보석'으로, 정신이 없을 정도로 눈이 부시다. 중앙 제단 오른편에 있는 작은 문으로 들어가면 성당의 높다란 첨탑 위로 올라가는 좁다란 나선형 계단이 나온다고 한다. 탑에 올라 탑에서 내려다보는 시내 전경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아름답지만, 우리 일행은 시간 관계상 올라가지 않고 대통령궁 정문 쪽으로 이동하였다.
이 성당에는 '바츨라프 4세'왕의 이야기와 '네포묵 신부' 이야기 이 두가지의 비극적인 사연이 전해져 온다고 한다
'바츨라프'대왕은 11세기경 체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으로 꼽히는 왕인데 왕을 시기하던 이복동생들에 의해 살해를 당했다고 한다. 왕이 자객을 피해 도망을 하다가 이 성당앞에 이르렀으나 안타깝게도 성당의 문이 끔적도 하지않아 피하지 못하고 결국 성당의 문고리를 잡은 채 살해 되었다고 한다. '바츨라프'왕을 기리기 위해 성당입구 청동문에 그의 일대기를 조각 해놓았다.
어릴 때 교육받는 광경에서 장군복장에 투구를 쓰고 말을 타고 있는 모습과 왕을 시기하는 이복동생들의 칼에 맞아 이 성당의 앞에서 살해당하기 직전 문고리를 잡고 있는 모습 등을 새겨놓았다. 성당 외부에는 예수와 성직자들의 일대기, '바출라프' 왕이 살해 당하는 장면등 여러사연을 간직한 조각과 그림들로 장식되어 있다.
나중에 카를교를 지날때 또 소개하겠지만 12세기 경 '바츨라프4세'왕은 자신의 포악함으로 많은 정적들이 주위에 있음을 알고 항상 주의하고 있었는데 하루는 왕비가 '요한 네포묵'신부를 찾아가 고해성사를 하였다는 사실을 알게된다.
의심이 들었던 왕은 왕비가 무엇을 말했는지 '요한 네포묵'신부에게 캐묻기 시작했지만 '요한 네포묵'신부는 고해성사의 내용은 하느님과의 약속으로서 남에서 누설할 수 없으며, 설사 왕의 자격이라 할 지라도 밝힐 수 없다고 대답을 거절하였다.
'바츨라프 4세'왕은 네포묵 신부를 회유 협박으로 캐내려 하지만 대답을 거절하자 '요한 네포묵'신부의 혀를 잘라버리고 돌로 묶어 '블타바강' 위의 '카를교'위에서 물에 던져 수장해 버렸다. 후손들이 이 '요한 네포묵'신부를 성인으로 추대하고 카를교위에 동상을 만들어 세웠으며 그의 시신은 은관에다 봉하여 이곳'성비타 성당'에 안치하게 된 것이라고 한다.그런데 여기에 전해 내려오는 정설은 따로 있다.
위 네포묵신부의 이야기는 카를교에서 다시 야설과 정설로 다시 한번 올리려한다.
[대통령궁 앞의 군사박물관- 지금은 수리중이라서 관람객을 받지 않는다고 함]
[대통령궁 앞의 군사박물관과 내 뒤로 보이는 건물이 슈바르첸베르크궁이라고 하는데 그 사이를 흐라드차니 광장이라고 한다]
[위 사진은 대통령궁 앞의 대주교관이 있는데 바로크양식으로 건축되었다고 한다]
[지금은 대통령궁으로 사용되는 프라하성 정문 - 뒤로보이는 구조물은 사람을 잡아 패고 있다는것이 살벌하다]
[마리아 테레지아의 통치권에대해 반기를든다면 이렇게 혼네주겠다고한다.치욕스런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다]
[마리아 테레지아의 통치권에대해 반기를든다면 이렇게 혼네주겠다고한다.치욕스런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다]
[정문 장식 구조물을 잘 살펴보면 정 가운데 MTJ라는 글자가 있다. 이는 바로 보헤미아의 여왕 마리아 테레지아의 약자]
프라하의 가장 큰 볼거리중 하나인 프라하 성. 프라하성과 함께 성비타 성당, 구왕궁, 그리고
황금소로 이렇게 4가지 정도로 크게 나눠볼 수 있다고 한다.
우리는 시간관계상 황금소로는 다녀볼 수 없었고 프라하성, 성비타 성당만 구경할 수 있었다.
프라하성은 체코를 대표하는 국가적 상징물이자, 유럽에서도 손꼽히는 거대한 성이다. 비타성당을 올릴때 설명한 것과 같이 9세기 말부터 건설되기 시작해 카를 4세 때인 14세기에 지금과 비슷한 모습을 갖추었고, 18세기 말에야 현재와 같은 모습이 되었으니, 시작에서 완성될 때까지 1000년이나 걸렸다고 한다.
이 성은 프라하 구시가지의 블타바강(江) 맞은편 언덕에 자리잡고 있다.
길이는 570m, 너비는 128m이며, 9세기 이후 통치자들의 궁전으로 사용된 로브코위츠 궁전 외에 먼저 소개한 성(聖)비타대성당· 성조지바실리카· 성십자가 교회 등 3개의 교회와 성조지수도원 등 다양한 부속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1918년부터는 대통령 관저로 사용되면서 내부 장식과 정원이 새롭게 정비되었다. 왕궁뿐 아니라 성 안에 있는 모든 건축물들이 정교한 조각과 높이 솟은 첨탑, 화려하고 다채로운 장식으로 꾸며져 있어 유럽에서도 중요한 역사 유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우리나라를 비롯 전세계로 부터 수많은 관광객들이 몰려와 이 성은 하루종일 붐비고 있다.
정문에 보면 무시무시한 조각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합스부르크의 통치하에 있는 보헤미아를 상징하는데 꽤나 살벌하다.
정문 장식 구조물을 잘 살펴보면 정 가운데 MTJ라는 글자가 있다.
이는 바로 보헤미아의 여왕 마리아 테레지아의 약자로 통치권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말을 듣지 않는다면 혼내주겠다는 뜻으로 구조물을 세웠다고 하니 얼마나 굴욕적인 처사인가.
우리가 5편과 6편 7편에서 다루었던 마리아 테레지아는 슬하에 5남 11녀를 두었다. 그녀는 자녀들을 강대국의 황실과 혼인을 하게함으로 커다란 영토를 손에 넣게 된다.
[이곳은 흐라드차니 광장중에서 데운포도주(원명은 기억이 않남)를 파는 상점 내부이며, 이곳의 명물이라고도 한다. 한잔에 3.5유로 꾀 비싼편이다]
[데운포도주를 낵잔을 사서 부부끼리 나눠서 마셨는데, 그 맛은 코구멍에 알콜냄새가 확 쏟아져 들어와서 기침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 나는 데운 술을 좋아하기 때문에 요령이 있어, 마시는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으나, 그 맛이 시큼
하고 약간은 떨은맛이 있어 썩 좋다고 할 수 는 없다. 아내가 입을 데어보더니 인상을 찌푸린다. ㅎ ㅎ 비추~~]
우리에게 '프라하의 봄'으로 기억되는 이 광장은 체코의 근세기 역사적사건과 함께하는 상징적인 거리로 체코에 민주화가 진행되자 이를 반대한 소련군이 1968년 무력침공을 하게 되며, 이에 맞서 비폭력 항거하던 프라하의 시민들이 이 광장에서 소련군의 탱크 앞에 무참히 쓰러져 갔고 결국 민주화(프라하의 봄)는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던 사건이다.
그러나 체코는 1989년 무혈혁명인 '벨벳 혁명' 에 의해 그토록 바라던 민주화를 이룩한다.
사진에서 보이는 광장 북쪽 끝에는 체코 국립박물관이 자리하고 있고 그 앞에는 바츨라프 1세 기마상이 있다.
프라하성의 성비타성당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바츨라프 1세는 체코민족의 수호성인으로서 10세기초 보헤미아의 왕이었으며 그리스도교를 보헤미아에 정착시키기 위해 노력하다 이교도의 사주에 의해 그의 동생에게 암살을 당하고 만다. 그의 유해는 성 비타 교회에 안치되었고 이후 중요한 순례지가 되었다. 그 후부터 체코에 국난이 닥치면 동굴에 잠들어 있는 보헤미안 기사들을 깨워 적군을 물리치고 나라를 구한다는 전설이 있다.
여기서 바츨라프1세에 대해서 설명들은것을 옮겨보면
바츨라프 1세 (성 바츨라프 907~929 또는 935)는 열 세살 때 아버지 브라티슬라브 1세가 사망하자 독실한 그리스도교 신자인 할머니 성 루드밀라에 의해 그리스도교도로 성장했다.
할머니 루드밀라는 이교도인 며느리에게 장치 이나라를 통치할 손주를 훈육한다는것은 용남할 수 가 없어 본인이 직접 키운다.
아들을 시어머니에게 빼았긴 바츨라프1세의 어머니 드라호미라는 시어머니에게서 아들을 되찾기위해 별별 음모을 다 꾸며 보지만 마음데로 되지 않자.
심야의 시간에 시어머니 침실로 잠입하여 '루드밀라'를 목졸라 살해한다.
실권을 장악한 그녀는 아들을 옛날의 이교도로 개종시키려했다.
그러나 바츨라프는 18세 때인 924/925년에 실권을 되찾고 할머니를 살해한 어머니 드라호미라를 성밖으로 추방하게 된다.
그런 그는 왕권의 장악후 그리스도교를 전파하는데 힘쓰고 신성로마제국과 우호관계를 유지하게 되는데,
신성로마제국과의 우호관계는 이교도였던 어머니 드라호미라와 동생 볼레슬라브 그리고 보헤미아의 귀족들에게 큰 위협거리였다.
이를 불안하게 여긴 동생과 귀족들이 결탁하여 935년에 왕을 암살한다.
교회에서는 그의 죽음 이후에 일어난 기적들로 인해 성인으로 추대되었으며 백성들은 그를 체코의 수호성인이라고 받든다. 그리하여 2000년부터 그의 순교일인 9월 28일을 국가기념일로 정하고 공휴일로 내려온다고 한다.
사진에서 보이는것 처럼 그냥 거리가 넓은 광폭인 것인데 이것을 광장이라 부른다.
[바출라프광장]
[바출라프광장]
[프라하 국립박물관에서 구시청사 광장으로 이어지는 기다란 길을 신시가지라고 하며, 이 신시가지의 바츨라프 기마상이 서 있는 곳을 바츨라프 광장이라 부른다. 바츨라프는 체코의 영웅으로 칭송되는 인물로, 10세기경 보헤미안 기사들과 함께 적군을 물리치고 체코의 국난을 극복했다고 한다.]
[바츨라프광장 북측에 위치한 곳 -체코 최초의 트램- 약100년이 넘었다고하며 노상 카페로 이용한다]
[하벨스카 재래시장]
[하벨스카 재래시장]
하벨스카 재래시장을 관광하며 맛나는 과일을 살까 했는데 점원들이 시큰둥해하여 사는것을 포기했다.
나중에 가이드에게 여기사람들은 다 저러냐고 물어 봤더니,
여기사람들이 아직 사회주의물이 덜빠져서 그렇다고한다.
시장을나온 우리는 돼지등갈비 정식을 준다는 식당으로 향했다.
이제 여기서 점심을 먹으면 비행기에 올라서 저녁을 먹는다며 많이 먹을것을 권유한다.
식당에 도착해서 나온 음식은 등갈비였으나 돼지냄새가 너무 코를 찔러 일행들은 거의 먹지를 못한다.
포크를내려놓고 찬물을 한컵다 비우고 나왔다.
[보얀 후스(Jan Hus)의 동상]
점심식사를 마친 우리는 다시 프라하 구시가 광장으로 향했다.
어제 저녁에 프라하 야경을 구경하면서 왔었는데 그렇게 사람이 많지않았으나 오늘은 발딛을 틈도 없다.
곳곳에 예쁘고 하얀천막이 자리잡고 가운데 무대가 설치되었다.
축제와 같은 분위기다.
세계 어딜 가나 축제는 단연코 먹거리가 있어야 하듯이 이곳도 예외는 아닌것 같다.
천막 곳곳이 먹음직한 요리와 시원한 맥주를 파는곳이 즐비하고 불피우는 참나무 향의 연기와 요리냄새가 그윽하다.
위 사진의 천문시계는 완벽하게 작동하는 시계로는 가장 오래된 것이라고 한다.
맨처음 도시가 형성될 당시는 천문시계를 만들지 않았고 현제위치에 1층의 집이 있었는데 그 집을 볼핀의 집이라고 했었다고 한다.
세월이 지나면서 왼쪽으로 4개의 집들이 시청으로 만들어지고 나중에 시청사탑(1381년)을 건립했다고 한다.
그 후에 시청사의 천문시계는 전면에 4층으로 구성하여 축조하게 되는데,
4층으로 구성하는 이유는 오래전부터 연금술사, 천문학자, 마법사가 우주를 구성하는 4대 원소가 흙, 물, 공기, 불을 의미하여 천문시계가 작은 우주임을 상징했다고 한다.
시청건물은 제2차 세계대전으로 폭격을 당해 사라져 그 흔적만 벽에 남아 현재의 모습에 이르게 되는데 이천문시계가 화를 당하지 않은 것이 천만 다행이다.
그 당시의 폭격을 한 것은 미국공군으로 체코에 주둔한 독일군 사령부를 폭격한다는 것이 오폭으로 세계적인 문화재를 날릴 뻔했다고 한다.
구 시청사의 뛰어난 절정기 고딕양식의 모습들은 카를교를 설계한 당대 최고의 천재 건축가 피터 팔러에 의해 만들어진 소중한 문화유산이기도 하다고 하는데, 그는 체코인이 아니라 아이러니하게도 독일인이었다고 한다.
천문시계의 제작년도는 대략 1410년에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1421년에 보헤미아의 위대한 종교개혁자 얀후스를 따르는 무리들이 일으킨 종교전쟁 후스전쟁이 이곳에서 시작되었다.
그러기에 체코 사학자들은 천문시계의 제작년도를 1410-1421년 사이라고 추정한다고 하며, 프라하에 있는 카를교는 1357-1406년 이 천문시계보다 더 이른 시점에서 완성되었다고 한다.
이 천문시계는 시계 제작의 거장이었던 미쿨라슈가 1410년에 만들었다는 것과 15세기경 프라하의 천문학자이자 수학교수였던 하누슈가 만들었다는 두가지 설이 있다.
이 시계는 천동설을 기초한 두 개의 원이 나란히 돌아간다. 하단 원은 12달을 나타내고, 상단 원은 해와 달과 천체를 표시하며 시간을 나타낸다.
매 시각마다 정시가 되면 맨 위에 황금색 닭이울고
그리고 오른쪽 해골 인형이 줄 을 당기면 정복욕을 상징하는 터키인 이 음악을 울린다.
아래 창문이 열리면서 12제자가 나타나기 시작하여 다시 창문으로 사라지는데,
좌우 창문에서 12제자 가 번갈아 나타나는 데, 왼쪽의 바울은 칼과 책 을 들고 나오며. 오른쪽의 베드로는 천국을 상징하는 열쇠를 들고 나타난다,
이때 밑에 서있는 4개의 인형도 움직이는데 자칫 한눈을 팔면 놓칠 수 있다.
허영을 상징하는 거울을 보는 사람(왼쪽)과 돈 자루를 거머쥔 유태인(오른쪽)이다.
마지막으로 해골이 종을 울리면 끝난다. 이것은 때가되면 아름다움도 돈도 즐거움도 다 소용없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하는데, 인생무상을 뜻한다고 한다.
이 광경을 지켜보기 위해 늘 이곳은 관광객들로 붐빈다.
이 시계는 1410년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래서 우리가 오기 바로전 10월 9일 600주년을 맞아 성대한 기념행사가 열렸다고 한다. 이날 저녁 천문시계를 배경으로 2D와 3D애니메이션이 상영되었다고 하는데 우리가 1주일만 빨리 왔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천문시계를 자세하게 설명하자면 좀 길다.
그러나 천문시계를 보았으면 어떻게 읽는지를 알아야 여기에 온의미가 있지않을까?
다시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중앙의 시계판은 중세당시의 우주관을 보여주는 천체의라고 한다
원형의 이 부분은 몇 가지 의미를 가진 문자판과 지시침 등으로 되어있다.
고정되어있는 문자판의 배경중 중앙에 있는 푸른원은 지구를 나타낸 것을 의미하며
지구외곽의 푸른색으로 된 윗부분은 지평선 위쪽의 보이는 하늘을 나타낸다고 한다.
아래쪽의 붉은부분과 검은부분은 지평선아래 하늘이라고 한다.
태양은 낮에는 푸른색 하늘에 위치하며, 반에는 검은부분 그리고 여명과 황혼때에는 붉은부분에 위치한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우리가 이 사진을 찍을 때 낮에 위치한 것을 볼 수 있다.
동쪽(왼쪽) 지평선에는 라틴어로 새벽을 의미하는 aurora와 일출을 의미하는 ortus를 써놓았다.
서쪽(오른쪽)에는 일몰 occasus, 황혼 crepusculum이 써져있으며,
푸른원 가에 써있는 로마숫자는 24시간표시의 프라하 현지시각, 즉 중앙유럽의 표준시각을 나타내고
푸른색 낮부분을 12개의 부분(아라비아 숫자부분)으로 나누는 황금색의 호부분은 하절기의 시간보정(unequal time)을 표시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12궁의 기호가 써있는 내부의 작은 원은 움직이는 부분으로 태양의 황도상의 위치를 나타낸다고 하며
12궁의 기호는 시계반대방향으로 되어 있고 황금색의 작은 별은 춘분점의 위치를 표시한다고 한다.
그리고 검은색큰원의 밖에 있는 황금색의 로마숫자로부터 항성시를 읽어낼수 있다고 한다.
여기서 항성시란 우리가 사용하는 시각이 아니라 태양시를 나타낸 것을 24시각으로 나눠분할하는 기준시를 나타낸 것이다.(이렇게 설명하면 알아들을까?) 그건 그렇다고 치고..
가장외곽의 검은배경의 원에 황금색으로 슈바바허문자(옛날 독일 문자체)로 쓰여진 숫자는 옛날 체코의 시간을 나타낸다고 하는데
옛 체코시간이 쓰여진 원은 일몰시간이 1시로 되어 연간 항상 일몰시간이 1시가 되도록 원이 움직이도록 되어있다고 한다.
태양을 나타내는 바늘의 끝에는 황금색의 손모양이 붙어 있다.
위에서 설명한대로 황금손이 로마자를 가리키는 것이 프라하 현지시간이고 황금의 호를 가리키는 것이 하절기 보정시간
가장외곽의 독일문자체를 가리키는 것이 옛 체코시간이다.
그리고 문자판의 중앙에서 태양까지의 거리는 일출,일몰시간을 나타낸다고 한다.
아래 사진을 설명하자면,
달도 태양과 마찬가지로 황도상을 움직이지만 속도는 훨씬더 빠르다.
달력의 그림은 1년 12달과 12궁이다.
이 그림은 1805년에 요셉 마네스에 의해 다시 그려졌다고 하며, 이 그림은 현재 프라하 역사박물관의 계단옆에서 볼 수 있게 해놓았다고 한다.
달력의 좌우에는 4개의 인형이 있는데, 왼쪽은 책과 펜을든 연대기의 기록자와 창과 방패를든 천사가 자리잡고 있으며, 오른쪽에는 망원경을든 천문학자와 책을 펼쳐들고 있는 철학자라고 한다.
그리고 위사진에서
시간이되면 천문시계 오른쪽에 있는 해골인형이 종의 줄을 당긴다.
해골인형을 자세히 보면 다른손에는 물시계를 들고 있다.
동시에 오른쪽의 터번을 쓴 터키인이 음악을 연주하고,
상단에 있는 두개의 창문이 열리면서 예수님의 12제자가 차례로 나왔다가 들어간다.
천문시계 왼쪽에 위치한 허무를 상징하는 거울을 보는 인형과 탐욕을 상징하는 금주머니를 든 유태인 구두쇠인형이 동시에 움직인다.
그리고 시계상단의 닭이 우는 것으로 짧은 공연이 끝이 난다.
구시가광장 서쪽에 자리잡은 성 니콜라스 교회의 모습이 사진뒤(왼쪽)로 보인다.
흰색벽에 옥색의 박공지붕의 모습이 햇살에 노출되어 매우 아름답다.
이교회는 12세기부터 이 자리에 있었다고 하며 12세기 후반에 베네딕트 수도원의 일부가 되었는데
현재의 모습은 1735년경 당대 최고의 건축가인 킬리안 이그나즈 딘첸호퍼의 설계로 완공되었다고 하며,
장엄한 돔 천장에는 성 니콜라스와 베네딕트의 생애를 그린 프레스코화로 장식되어 있다고 하는데,
우리일행은 광장을 쏘아다녀 교회내부를 구경할 여가가 없었다.
[맛있게생긴 돼지뒷다리인가 앞다리가 참나무로 불을뗀 가마속에 빙글빙글돌아간다.입에 침이 가득고인다]
[숫불에 소시지가 맛나게 구워지고 있다. 이것도 입에 침이 가득고인다]
[뱃속에서 무어라도 들어오라고 난리여서 맥주와 안주인 소시지, 그리고 야채와 감자를 범벅을한것을 구입해서 일행들과 나눠먹었다.참~ 맛있다!]
[감자와 쇠고기를 함께 복은것으로 맛나게 보인다]
[갖가지 색의 초콜릿, 잴리, 과자, 사탕등을 진열한 간이 상점- 한봉지 구입해서 일행들과 맛을 보았다.]
구시가지 광장은 10세기 이래 늘 프라하의 심장부와 같았던 곳으로 무역과 상업의 중심지이자 고딕, 르네상스, 바로크 등 각종 건축양식들이 잘 보존되어 있는 장이기도 하다. 이 곳은 특히 낮과 밤 가릴 것없이 계속되는 활기찬 분위기와 프라하 역사에 길이 남을 주요사건들의 발생지로써 더욱 잘 알려져 있다. 1422년에 행해진 후스파의 설교자였던 얀 젤리브스키의 처형 장소이자, 1621년에는 합스부르크에 대해 반기를 들었던 27명의 프로테스탄트 체코인 귀족들이 처형당했던 치욕의 장소이기도 하다.
또한1918년 민족 해방을 위한 투쟁 등을 벌인 체코국민들에게는 애환이 깃든 곳이기 때문이다.
집들에 반쯤 가려 광장 쪽을 바라보고 있는 건물이 구시가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틴 교회이다.
또한 광장의 중앙에는 보헤미아 독립운동의 투사인 보얀 후스(Jan Hus)의 동상이 서 있는데 동상에는 독일 나치가 침공했을 때 침략자에 의해 만자 십자상이 새겨졌다고 한다.
얀 후스(1372년 ~ 1415년7월 6일)는 체코의 신학자이자 종교개혁자이다.
그 는 프라하 대학을 수학한 신학자로 이후 프라하 대학 총장이었으며, 당시 성직자의 부도덕성과 타락을 비난하며
'교회의 머리는 교황이 아니라 그리스도' 라고 말했다고 한다.
또한 '성서에 순종하지 않는 교황에게는 순종할 필요가 없다' 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는 존 위클리프의 예정구원설을 기반으로 성서를 그리스도교 믿음의 유일한 권위로 인정할 것을 강조하는 복음주의적 입장을 보였으며, 교황 등 로마 가톨릭 교회 지도자들의 부패를 비판하다가 1411년 대립교황 요한 23세에 의해 교회로부터 파문당했으며 콘스탄츠 공의회의 결정에 따라 1415년화형에 처해졌다.
후스의 처형 뒤 후스의 신학사상과 뜻을 이어받은 강력한 개신교 공동체인 보헤미안 공동체가 형성되었다고 하며,
1415년 그가 죽은 뒤 많은 보헤미아 기사들과 귀족들은 공식 항의서를 발행하고 신앙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을 보호했다고 한다.
여기서 대립교황이란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 합법적으로 선출된 로마 교황을 반대하고, 교황권을 얻으려고 노력하여 어느 정도 물리적으로 성공한 사람을 말하는데, 일종의 종교적 구테타라고 할 수 있다.
[프라하 광장의 틴 성당]
[황금성배를 녹여 만들어 붙였다는 성모 마리아상]
위 사진에 보이는 아름다운 탑을 지닌 건물은 프라하 구 시가지를 대표하는 상징적인 교회로, 1365년에 건립되었다. 그러나 이후에도 계속 변형을 가해 17세기까지 다양한 건물 양식이 가미되었다. 외관은 고딕 양식으로 지어져 정교하면서도 화려하고, 80m 높이까지 치솟은 2개의 첨탑은 이 교회의 상징으로 멀리서도 볼 수 있다. 내부는 바로크양식으로 되어 있어 어두운 느낌을 준다고 한다.(어제 야경을 구경할때 일부를 소개하였음)
이 틴 성당은 프라하 구시가지의 시청사 동쪽 맞은편, 골즈 킨스키 궁전 바로 옆에 위치하고 있으며, 북쪽 벽에 있는 로코코 양식의 제단과 아름다운 동북쪽 출입문이 유명하며,
위 사진에서 보듯이 황금 성배(聖杯)를 녹여 부착한 첨탑의 성모마리아상(像), 고딕양식으로 조각된 실내의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그리스도상, 백랍으로 만든 세례 받침 등도 성당의 명물로 꼽힌다고 한다.
황금 성배를 녹여 붙인 성모마리아 상에 대해서 설명하자면,
이 교회는 14~15세기 후스파의 종교개혁의 거점으로 사용되었으며, 위의 사진과 설명한 바와 같이 종교개혁에 의해 만들었던 황금 성배를 후에 가톨릭 세력이 다시 장악하자 성배를 녹여서 황금 성모마리아상을 만들어 탑 중앙에 올렸다 한다.
교회 안에는 루돌프 2세를 위해 일했던 덴마크의 천문학자 브라헤(Tycho Brahe)가 묻혀 있다. 이 곳에서 클래식 연주회가 열리기도 하며, 교회 바로 옆에는 '성(城)'의 작가 카프카(Franz Kafka)의 생가가 있다.
오늘은 광장에 시장이 섰나보다 무대에서는 공연이 이루어지고 그 앞에는 포장마차에 고기를 굽고 감자를 복는다. 맥주와 소시지를 구어서 팔고, 별난 음식들이 요리되어 먹음직하다.
우리일행은 맥주와 안주를 구입해서 먹었다. 완전 축제의 분위기다.
맥주한잔에 2유로 안주는 소시지와 여러가지 야채를 썰어넣은 샌드위치같이 생긴것을 구매하여 나누어 먹었다.
맥주를 한잔 손에 받처들고 광장의 이곳 저곳을 자유롭게 활보했다. 축제의 분위기가 물씬베어나온다.
[카를교 입구에서있는 카를4세의 동상- 체코인으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된 인물로 체코에서 존경받는 황제이라고 한다]
카를교는 프라하의 블타바강(Vltava River)을 가로질러 동쪽의 프라하 구시가지와 서쪽의 프라하 성 지역을 이어주는 다리이다.
최초에는 다리를 나무로 지어졌으나 홍수로 붕괴되어 없어졌고, 다시 한 번 돌로 지어졌으나 또 홍수로 파괴되었다.
홍수로 인하여 다리가 붕괴되자 1357년 카를 4세는 새로운 다리를 착공하여 1402년에 완공하였는데 이 다리가 지금 우리가 건너게될 카를교이다.
설계는 체코인이 아닌 독일인 건축가 피터 팔러(Peter Parler)가 하였다고 하는데, 구시가 광장의 아름답게 건축한 사람을 소개하였는데 그가 바로 이 사람이다.
이 다리는 1905년 5월 15일 까지는 마차가 이 다리를 건너 다녔었고 그 후 에도 전기 트램과 버스가 다녔었다.
하지만 다리가 사암으로 이루어져 물 아래 잠긴 기반 부분이 물에 부식되는 것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큰 홍수가 나면 붕괴될 우려가 있어 체코 정부에서는 1965년~1978년까지 대대적 보수공사를 하였고, 이후 차량의 통행이 전면금지되고 보행자 전용다리가 되었다.
카를교는 길이 516m 폭 10m에 16개의 기둥, 3개의 탑이 있는대 한개는 구시가지쪽에 나머지 두개는 말라스트라나쪽에 위치하고 있다. 그리고 1683년부터 1928년에 이르기까지 30개의 바로크 양식 조각상이 세워졌다.
카를교 양쪽으로 늘어서 있는 바로 이 조각상들이 카를교를 더욱 유명하게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이 다리는 ‘미션임파서블1(Mission Impossible1)’이라는 영화에 소개되어 더욱 유명해졌는데 주인공인 '톰 크루즈'가 블타바 강 속으로 뛰어 드는 장면이 여기서 촬영된 곳이다.
[‘미션임파서블1(Mission Impossible1)에서 주인공 톰 크루즈가 뒤어든 곳]
1683년 세워진 체코의 성인으로 불리는 성 네포묵의 동상이다. 카를교에서 가장 오래된 동상이기도 하다.
성 네포묵 동상위에 있는 5개의 별은 순교 당시 블타바 강위로 다섯개의 별이 떠올랐는데 그리하여 저 머리위의 5개의 별이 성 네포묵의 상징이 된 것이다.
대부분의 관광객은 바로 이 자리에서 소원을 빈다. 하지만 정작 이 자리는 소원을 비는 자리가 아니라 좀더가면 있다고 한다.
여기의 동상밑에 있는 부조를 자세히 살펴보면 양쪽 부조 모두 윤이 반짝반짝한대 사람들이 하도 만지면서 소원을 빌어서 그렇다.
사실 소원이 이루어지기 보다는 저 부조를 만지면 행운이 찾아오고 다시 프라하를 방문하게 된다는 전설인지 상술인지가 있어서 저렇게 됐다고하는데,
바츨라프4세와 성네포묵의 이야기를 정리하여 올려보면 다음과 같다.
12세기경에 보헤미아의 왕 바츨라프 4세(카를 4세의 아들)는 그리스도교 신자였지만 종교와는 거의 담을 쌓고 사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매일을 격무에 시달리던 그는 사냥을 즐겨 해서 성을 비우는 일이 잦았다고 한다. 그는 정치적으로 적들이 많아 항상 경호시종들을 대동하고 다녔다고 한다.
그러다보니 항상 조심스럽게 행동하였고 그탓에 신경이 날카로와 항시 인상이 않좋았던같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포악하고 괴팍한 성격의 소유자로 읽혀졌을 것이다.
그의 왕비는 요안나라고 하는데 매일 사냥을 나가서 몇일씩 묶고 돌아오는 왕을 독수공방으로 보내던 중 왕비를 경호하는 왕비 경호장과 그만 바람이 나고 말았다.
왕비 요안나는 원래 성격이 착하고 온순하며 오로지 종교에만 낙을 붙이고 사는 부인이었다고 한다. 그런 그녀가 바람이 난 것을 괴로워하다가 왕비의 고해신부로 지정된 신부를 찾아가 고해를 하게 되는데, 여기서 고해신부로 지정된 신부님이 성 네포묵이었다.
왕비는 네포묵 신부에게 고해성사를 하게 되는데 왕비의 구구절절한 눈물의 회개고백에 신부님도 눈물을 머금었다고 한다.
이런 모습을 몰래 지켜보는 사람이 있었다.
왕에게는 왕비를 사찰하는 아첨꾼이 있었는데, 그는 왕비가 고해 성사 하는 것까지 몰래 사찰을 했었다.
이런 사실을 듣게 된 바츨라프 4세는 네포묵 신부를 불러 고백 내용을 말하라고 다그쳤다.
도대체 무슨 내용의 고해성사를 하였기에 눈물을 흘렸는지 이실직고하라고 명했다.
그 말을 들은 네포묵은 아무말을 할 수 가 없었다.
바츨라프 4세는 네포묵 신부가 다른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말을 안 하는지 알고 신부에게 물러가라고 명한다.
바츨라프 4세는 해가지고 저녁이 되자 네포묵을 은밀하게 불렀다.
바츨라프 4세는 다른 사람들을 모두 내보내고서 "이제 사람들이 없는 곳이니, 어서 말하라"고 했다.
네포묵 신부는 고해성사의 내용은 하느님과의 약속으로서 남에서 누설할 수 없으며, 설사 왕의 자격이라 할 지라도 밝힐 수 없다고 대답을 거절하였다 네포묵은 신부로서 고해성사 내용을 밝힐 수 없음을 계속해서 말하게 되고, 바츨라프4세는 계속 위협을 가했다.
네포묵은 계속 반복되는 위협에 정색을 하면서 “성스러운 고해의 비밀을 누설한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엄히 금하시는 것이니. 모처럼 명하신 것을 순종치 못하는 것을 이해하여 주십시요.”라고 말했다.
이렇게 두 사람이 설왕설래 하던 중에 네포묵 신부는 “이 방에 있는 오로지 한 영혼에게만 말할 수 있습니다”라고 하자.
바츨라프 4세는 그 영혼이 당연히 자기인줄 알았는데, 신부는 그 방에 있던 사냥개를 가리켰다고 한다.
그것은 개에게만 말할 수 있다고 한 것은 바츨라프4세가 개만도 못하다는 은유였다고 한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바츨라프 4세는 신부에게 갖가지 고문을 가하게 하고 자기가 직접 불에 달은 쇠로 신부의 옆구리를 지져서 거의 온전한 데가 없을 만큼 그의 몸을 상하게 했으나 네포묵은 처음부터 끝까지 입을 굳게 다문 채 견뎌내고 있었다.
바츨라프 4세는 그래도 말을 듣지 않자 네포묵의 혀를 자르게하고 손을 뒤로 결박한 다음 몸을 가재처럼 구부려서 발을 머리에 잡아매어 블타바 강에 돌을 매달아 던져버렸다고 한다. 신부가 살해당한 다음 날, 한 어부가 새벽에 고기를 잡으러 나갔다가 별이 다섯 개가 떠 있어 이상하게 여겨 별이 떠 있는 곳에 그물을 던져 끌어올렸는데.
그물에 걸린 것은 혀가 잘린 채 죽은 요한 네포묵 신부의 시신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놀라운것은 시신은 조금도 상하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고 한다.
어부는 시신을 수습하여 본당의 신부에게 가져가자 본당의 신부는 그를 성당 마당에 안치하였다고 한다.
본당 신부는 왕의 짓인지 알았지만 사람들에게 알리지는 않았고 한다.
그런데 밤마다 별 다섯 개가 네포묵 신부가 안치된 곳을 비추자.
그 사실이 입소문을 타고 전해지면서 온 국민들이 알게 되었다고 한다.
네포묵 신부가 성인품에 오른 것은 1729년 3월 19일 교황 베네딕토 13세의 시대였다고 한다. 그 당시에 시성 조사(시성조사란 성덕이 높은 사람이 죽었을 때나 순교자에게 신앙의 모범을 본받고 공경을 바칠 수 있도록, 복자(福者)나 성인(聖人)의 품위에 올리는 예식을 말한다)가 행해지던 때에 그의 무덤을 열어 시체를 검사하니 3백년 이상이나 경과되어 전신은 모조리 다 썩어있었지만 혀만은 마른채로 그대로 남아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혀가 잘렸다고 하는데 그 혀가 다시 자란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든다.
가토릭 신자들은 이것이 고해의 비밀을 지킨 성인의 충실함에 대한 하느님의 존귀한 보수의 표시라고 기뻐하며 정성스럽게 모셔 성당의 보물로서 영구히 보존한다. 그것이 비타성당에 있는 성 네포묵 신부의 은으로 된 무덤이다.
또한 네포묵은 다리 위에서 물속에 던져져 순교한 점에서 다리의 성인이라 칭하고 수많은 다리 위에 그의 초상을 모신다고 한다.
그런데 그왕비는 어떻게 되었을까?
화가 머리끝까지난 바츨라프4세는 왕비를 옥에 가두고 고심하다가
굶주린 사냥개에게 왕비를 던져버렸다고한다. 좀 끔직한 애기가 아닐 수 없다.
여기까지가 야사이고 정사는 따로 있다.
[이곳의 십자가에 손을 언고 소원을 빌어야 행운이 따른다고 한다]
소원을 비는 장소이다.
첫번째는 십자가 위에 왼손을 얹고
두번째는 오른쪽 발 밑을 보면 못이 하나 박혀있는데 이 못을 오른 발로 밟는다.
세번째 성 네포묵이 순교한 블타바강을 내려다보면서 소원을 빌면 행운이 따른다고 한다.
이제 위에서 이야기한 네포묵신부에 관한 정사를 올리려한다.
위에 올린글은 일반적으로 네포묵 신부에 대한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를 전해들은 것이다.
그런데 그 이야기와는 반대되는 이야기가 있어서 서술해본다.
역사란 승리자의 관점에서 재조명되고 그 입맛에 맞게 왜곡되기도 한다.
여기서 바츨라프 4세가 왜 네포묵을 그렇게 처참하게 살해하였을까?
분명한 것은 사람들은 이유 있는 행동을 하게 마련이다.
바츨라프 4세가 네포묵 신부를 위에서언급한바와 같이 참혹하고 비겁하게 죽였다는 것은 그가 제왕으로서 그런 이유 하나만으로 온 백성 앞에서 드러 내 놓고 신부를 죽이는 어리석음을 범한다는 것은 정치적으로 큰 실기일 것이다.
그렇다면 아마 틀림없이 정치적 권력이 관계되는 배경이 있지 않을까 해서 여러 군데를 뒤적뒤적 해보았다.
이번여행을 계획하면서 여행 전 약간의 서적을 이용하게 되었는데,
이런것들이 서양의 역사가 쉽게 이해되 상당히 유익한 면이 많았다.
역사란 쓰는 자 즉 승리자의 기록이다.
여러 군데를 찾아본 결과
체코의 전성기를 이끌던 성군 카를 4세(카를교 입구에 서있는 육중한 동상)가 1378년 사망하자 아들 '벤첸'이 바츨라프 4세가 되고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를 이어가게 된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는 합스부르크가 등극하기 전에는 형식상이나마 교황이 지명하였다고 하며, 이후에는 합스부르크가의 협의체로 선출한다. 그런데 바츨라프 4세는 그렇게 하지 않았기 때문에 로마 교황청과 사이가 좋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전편에서 올린 것과 같이 야사와 정사의 이야기를 구분해서 올린다고 했기에 이번에는 역사적인 배경 즉 정사에 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위의 역사적인 배경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전개하면 이곳 프라하에 로마교황청으로 부터 새 주교로 임명되어 체코로 오게 된 옌슈타인얀 대주교와 바츨라프 4세는 교황청의 정책과 끊임없이 대립하게 된다.
바츨라프 4세는 정치적으로 충돌이 격화되자 대주교인 옌슈타인얀과 대리신부인 네포묵을 잡아들이라 명하게 된다. 이것을 눈치첸 대주교는 도망을가고 네포묵만 체포되어 고문 끝이 사망에 이르게 된다.
그의 시체 또한 카를교에서 블타바강으로 버려지게 된다.
그 후 종교전쟁으로 번진 30년 전쟁에서 승리하게 된 가톨릭 집단들은 희생양이 된 네포묵을 성인의 반열로 우상화하게 된다.
후스파의 영향력아래 그리스도교(신교)로 종교를 갖고 정책을 펴던 체코는 30년 전쟁에서 패한 후 다시 가톨릭으로 종교가 바뀌는 아픔을 격어야 했다.
승리자가된 가톨릭집단은 이 이야기를 이슈화하여 정치적으로 이용하기위해 바츨라프를 악의 축으로 몰아넣고 그 에게 희생당한 네포묵신부를 가엾은 희생의 대표적 인물로 묘사했다.
바츨라프가 카를 4세처럼 성군은 아니였지만, 종교개혁에 앞장 섯기에 그를 짖발음으로 더이상 교회의 권위에 도전하지 못하도록 시범적으로 철저하게 유린하였다.
바츨라프 4세는 폐위되어 정신분열증과 알코올 중독으로 고생하다가 자기가 좋아하는 사냥에 나섰다가 심장마비로 사망하였다고 한다.
바츨라프 4세가 폐위되고 뒤를 이어 등극한 지그스문트 황제시절 얀후스를 처형하고 콘스탄트 공의회를 만들어 교회가 더 이상 개혁되는 것을 금지시키는 제도를 만들었다. 이것은 결국 후스파의 종교전쟁을 일으키는 계기가 된다.
하지만 지그스문트가 죽은 후 왕가의 양위는 단절되고 왕가의 영지는 사위인 합스부르크가의 알프레드 2세의 소유로 넘어가가 된다.
종교전쟁으로 시작한 30년 전쟁을 합스부르크가가 유럽전역을 제패야욕으로 이용하면서 철저하게 패했던 체코의 후스파 세력들은 화형을 당하거나 추방당하면서 체코의 왕가는 물론 귀족과 전 지배층이 몰락하게 되면서 합스부르크가의 지배를 받는다.
합스부르크가는 체코를 가톨릭화 하기위해 바로크양식을 들여와 성당과 각종건축물에 이용하게 되고, 후스파가 주창하던 엄격한 절재와 검소에 따르는 소박함은 없어지게 된다.
각종건물이나 공공의 구조물은 모두 바로크양식으로 변화하기 시작하여 크게 번성하게 된다. 그래서 프라하의 바로크라는 용어가지 생겨나게 됐다고 한다.
그래서 체코를 사랑하는 애국 지식인들은 바로크양식으로 지어진 건물에 기거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이 건물들을 바라보는 것 조차도 몹시 싫어했다고 하는데,
지금은 바로크의 프라하를 관광 차 오는 이들의 수입으로 이 체코를 먹여 살린다고 하니 이것이 아이러니라고 하면 정말 아이러니라 할 수 있겠다.
[프라하 구시가를 관통하는 전차-트림]
[프라하의 모든일정을 끝내고 우리의 버스로 이동하기위해 트림을 탑승했다]
여행의 마지막
공항 탑승구에 도착하여 무거운 윗옷을 벗고 한가하게 망중한을 즐긴다.
여행의 끝에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아쉬움이 많이 남는 것을 느낀다.
이번의 여행은 시간과 금전의 한계로 패키지로 찍고 다니는 것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다.
다음에 여기 올 때에는 꼭 자유여행으로 보고 싶은 것 다보고 하고 싶은 것 다하고 가고 싶다.
언제나 자유로운 여행자가 되고 싶다.
[우리를 고국까지 안전하게 대려다줄 대한항공 KE 936편 인천공항까지 10시간20분이 소요되는데 30분 일찍 도착했다.]
우리는 오후4시가 안되어 공항에 도착했다.
짐을 부치고 수속마치고 탑승구에 도착했으나 비행기가 연착이란다.
6시가 훌쩍 넘어 식권이 나왔는데, 1인당 35불에 해당하는 식권이 나왔다.
식당을 찾아 돌아다니다가 맥도날드 햄버거집으로 들어가 햄버거를 먹었는데,
나도 영어를 잘 할줄 모르지만 이곳사람들도 서구권에 개방이 아직은 많이 안되서 그런지 영어가 서투르다.
1인당 30불에 해당하는 햄버거를 구매했는데 5불을 안내어준다.
그래서 만국 공통어인 바디로 소통한 결과 식권으로 교환되고 남은돈은 환전이 안된다고 한다. 그래서 닭튀김으로 받아서 잘 먹었다.
6:55분발 비행기가 8:55분에서야 탑승구가 열린다.
이제 집으로 돌아간다.
여기에 언제 다시올 계획은 없지만 내 생애에 꼭 다시 한번 더 오고 싶은 곳이다.
이 다음에 손주 녀석들 앞세우고 마누라랑 다시 올 수 있을까?
매번 여행에서 느끼는 것이지만,
이곳을 떠나면서 또다른 나를 보고간다.
매번 약속을 하는것 말이다. 그 약속을 꼭 지키겠다고....
제 11부 끝.
제 12부 기행문을 마치며 편 계속
첫댓글 참 멋드러진 기행문입니다. 여행보다 더 긴 시간을 탐구하시고 글 쓰신것이 느껴집니다.
단 하나 아쉬운 것은 사모님은 여행이 즐거우시지 않으셨는지요? 활짝 웃으시는 모습을 찾기 힘드네요.. 항상 엄하신가요?? ㅎㅎㅎ 농담입니다. 담의 기행문엔 많이 웃으시는 모습을...
읽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마눌이 사진기만 들이대면 얼굴이 굳는 사진알러지가 있어서 그만...,ㅎ ㅎ ㅎ ㅎ
담의 행선지는 정해지진 않았습니다. 이번여름 불발되서 계획이 엉켜버렸습니다.
둘째가 손녀를 맡기고 비행다니는 바람에 약간은 차질이 있습니다.
원래 10월중순에 계획한번 세우려 했는데, 좀 늦게 다녀올 계획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