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 담양 소쇄원 답사를 마치고/안성환
이곳에 세번째 찾아간다.
전라도 담양 땅에는 정자와 원림이 유별나게 많다. 이 말은 선비가 많다는 의미이고 선비가 많다는 말은 명현들이 많이 배출되었다고 할 수도 있다. 즉 선비란 마음이 넓고 쾌활하여 아무 거리낌이 없는 인품을 비유적으로 말하기도 하고 도의에 뿌리를 박고 공명정대하여 조금도 부끄러울 바 없는 도덕적 용기를 가진 사람을 일컫기도 한다. 그리고 학식은 있지만 벼슬하지 않았거나 하였다 해도 세속이 혼탁하면 속세를 떠나 초야에 묻혀 학문을 닦으며 후학을 양성하는데 혼을 넣은 사람을 말한다. 어쩌면 어질고 순하여 현실에 어두운 사람을 말할 수도 있겠지만 마냥 어두운 사람을 선비라 하지는 않는다. 굴원이 어부사에 나오는 구절처럼 《창랑이 물이 맑으면 갓끈을 빨고 창랑이 물이 흐리면 발을 씻으리라》라는 말처럼 세상에 큰일을 해야 할 사람은 일찍 목숨을 내어주면 안 된다는 의미도 함축되어 있다고 본다..
우선 소쇄원이란 뜻과 누가 언제 지었으며 소쇄원을 지은 속뜻은 무엇이었으며 그리고 소쇄원을 보고 이 시대에 우리가 생각해야 할 점은 무엇인지 고민해 볼 수 있다. 소쇄원은 사적이다. 국가나 법적으로 지정한 문화재란 뜻이다. 소쇄(瀟 맑을 소. 灑 깨끗한 쇄)라는 뜻은 맑고 깨끗하다는 그런 한자어 말이다. 좀 쉽게 설명하면 숨어 사는 선비는 마음과 몸이 물로 씻은 듯, 비가 오다가 갠 하늘처럼 깨끗해야 한다는 뜻으로 고결한 인품을 의미한다. 기록에 의하면 소쇄원은 양산보가 지었는데 정암 조광조의 제자이다. 선생의 나이 15세 때 아버지 따라 서울로 올라가 조광조의 문하생이 되었다. 2년 뒤 1519년 스승 조광조가 대사헌으로 있을 때 양산보도 이때 급제하였다. 정암 선생의 포부는 이 땅에 도학 정치를 실현하여 지치주의, 즉 다스리지 않아도 저절로 다스려지는 정치를 하고 싶어 했다. 그것이 조금 급진적이고 개혁성향이 너무 강하여 물의를 일으킨 것이다. 여기서 정암 조광조 선생의 죽음을 보고 제자였던 양산보는 “이 시대의 깨끗한 선비도 저렇게 정치의 희생이 되는데” 하며 벼슬을 버리고 전남 담양으로 내려와 소쇄원을 짓게 된다.
소쇄원 입구에는 선생을 닮은 대나무가 숲을 이루어 작은 바람에도 댓잎 부딪히는 소리를 내며 손님을 맞이한다. 입구를 걷다가 잠시 걸음을 멈추면 그 소리가 마치 어여쁜 여인의 옷고름이 바람에 휘날리며 저고리에 부딪히는 소리와 흡사했다. 100m 정도 올라가면 제일 먼저 초가로 만든 작은 정자가 하나 나온다. 이것이 대봉대(待鳳臺)이다. 봉황을 기다리는 집이라는 뜻이다. 소쇄원을 찾는 손님은 제일 먼저 이곳에서 맞이한다. 여기서 봉황은 나를 찾아오는 손님 혹은 훌륭한 지도자가 될 인물이란 뜻도 함축되어 있다. 옛말에 봉황은 오동나무에 둥지를 틀고 대나무 열매를 먹고, 대나무 잎에 내린 이슬을 마시며 산다고 한다. 그래서 상상의 새다. 대봉대에서 조금 올라가면 ‘오곡문’이라는 곳이 나온다. 오곡문 뒤를 후원이라 하고 오곡문 안을 전원이라 한다. 후원에는 오곡, 육곡, 칠곡, 팔곡, 구곡이 있다는 의미다. 이것은 주자에 ‘무위구곡’을 연상하게 한다. 주자가 무위산에서 구곡을 생각하며 지냈듯이 양산보도 돌아가신 스승을 생각하며 선생을 닮고자 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오곡문을 지나면 ‘제월당’과 마주하게 된다. ‘제월당’은 양산보선생의 은밀한 공간이다. 나는 제월당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이유는 소쇄원의 미학은 제월당에 있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제월당은 팔작지붕(위 절반은 박공지붕으로 되어있고 아래 절반은 네모꼴로 된 지붕)이다. 지붕의 처마(지붕의 도리 밖으로 내민 부분)의 아름다운 곡선과 추녀(네모지고 끝이 번쩍 들린, 처마의 네 귀에 있는 큰 서까래)의 곡선은 정말 기가 막힐 정도로 아름답다. 특히 추녀의 곡선은 여자 버선의 코곡선 아니면 저고리의 소매 곡선을 본뜬다고 한다. 어쩜 저렇게도 미학적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생각했다. 제월당의 추녀의 아름다운 곡선은 그야말로 우리나라 한옥의 상징적 아이콘이라 할 수 있다. 그 만큼 추녀는 한국다움과 전통다움이 그만큼 강하다는 뜻이다. 제월당의 처마는 직선도 곡선도 아닌데도 아름다운 선의 미학을 선보이고 있다. 그런데 왜 한국은 지붕에 선의 미학을 강조할까? 임석재 건축학자의 말을 잠시 빌리면 《주역의 기본 원리인 음양의 조화와 순환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 원리는 결국 태극문양에 잘 나타나 있는데 한국의 지붕도 같은 원리를 추구했다》라고 했다. 아름다운 곡선은 그 결과를 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결과적으로 제월당의 지붕은 수평과 수직이 섞이면서 안정적이면서도 역동적인 양면성이 느껴진다. 양면성은 갈등하거나 충돌하지 않는다. 공존하고 섞인다는 것이다. 결과는 가변성이다. 이런 미학은 제월당뿐만 아니라 한국의 한옥은 모두 포함되겠다고 할 수 있다. 소쇄원의 핵심은 ‘제월당’이다. 제월당만 보고 와도 본전 뽑고도 남는다. 바로 아래 광풍각(光風閣) 있다. 맑게 갠 날씨에 부는 바람이란 뜻이다. 즉 봄날에 따사롭게 부는 바람이라 할 수도 있다. 이곳에서 온화한 마음으로 손님을 접대한다는 뜻이다. 생각만 해도 기분이 상쾌하다.
소쇄원을 나오며.
이곳은 지금도 건축학자, 국문학자, 조경학자, 역사학자들이 관심을 보인다고 한다. 오늘도 건축, 조경 분야 젊은 학생들이 다녀가고 있었다. 그런데 양산보선생은 소쇄원의 발상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선생은 건축가도 아니고 그렇다고 조원 설계사도 아니다. 그런데 탁월한 구상과 섬세한 디자인을 보여준 슬기와 힘이 어디에서 나왔을까? 이 시대의 건축가와 역사학자 조경학자들이 미치도록 왜 이곳을 연구대상으로 삼을까? 참 신기했다. 아마 내 생각에는 조선 시대 사대부 문화의 위대한 장점이 아닐까라고 생각한다. 그들이 지향하는 총체적인 지식인으로 문사철(文史哲) 즉 인문학을 겸비한 사람들이며 그 지식으로 세상을 경륜하고 그 안목으로 시를 짓고 거문고를 뜯고 글씨를 쓰고 집을 짓고 사랑방을 디자인하였던 것 같다. 우리시대의 지식인들이 잃어버린 바로 그 총체성을 나는 이곳 소쇄원에서 배워간다.
소쇄원의 겨울은 앙상한 속살까지 모두 보여주니 더 이상 논할 것이 없었다. 그래서 더 좋았다. 답사를 다녀 보면 사람마다 제각기 환경의 차이에서 일으키는 문화적 반응의 편차에는 많은 차이가 있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다. 경험에 기초하지 않은 상상력은 보잘것없다는 것도 또 한 번 느끼고 왔다.
2025년 2월 16일 안성환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