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종사 시화록(時化錄) 2--절대 자리에는 약자가 없다.
박용덕 교무(가수교당) 원광 2003년 2월호
절대 자리에는 약자가 있을 수 없다.
상대적인 입장에서는 약자와 강자의 구별이 있다.
약자가 절대 강자(영원한 강자)가 되는 법은,
소태산이 대각하고 1개월 뒤에 <사회를 본 첫 감상>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다.
이는 뒷날(시창13년 음력 2월) 서울 계동 이공주의 집에서 최초로 성문화된 법설
<약자가 강자되는 법>에서 잘 드러나 있다.
소태산은 약자를 갑동네, 강자를 을동네라 대칭하여 예를 들었다.
1910년-40년대의 강약의 대립은 일제와 조선을 들 수 있겠고,
현재는 한미 관계 또는 남북 관계를 들 수 있을 것이다.
네가 맞은 것이 아니라 내가 두드려 맞았다.
총부 구내 사가(현 재정부 사무실 자리)에
전주에서 대서방을 하는 이만영의 아내 박해원옥이 살았다.
하루는 그녀가 등화관제를 시행하지 않았다는 건으로 적발되어,
북일주재소에 불려가 ‘이년 저년’ ‘가시내’ 등 온갖 쌍욕에다 매를 맞고
봉변을 당하고 집에 와서 분해 울었다
이를 보고 소태산은 처연한 어조로 당부하였다.
“네가 맞은 것이 아니라 내가 맞았다.
내가 맞은 것이 아니라 우리 불법연구회가 맞은 것이다.
이런 비상시국일수록 우리는 더욱 자중하여 그들의 마수에 걸리지 않도록 하자.”
소태산은 일제하 피지배 민족으로서 강자로 진화進化하는 법을 이렇게 설하였다.
“우리들은 약자로서의 분수를 지켜야 한다.
아무리 일제가 압제를 가한다 해도 대항하지 말며
군소리 없이 종노릇을 잘하여 줄 것이며, 이유 없이 매를 때린다 하더라도 맞아주어라.
우리들은 약자의 분수를 지켜 겉으로는 어리석고 못난 체 강자를 안심시키는 한편,
속으로는 이를 악물고 돈벌기를 주장하고 또 배우기를 주장하며,
한마음으로 단합하기를 주장하라.
그리하여 넉넉하게 자본금을 마련하여 학교를 세우고 서로 가르치며 서로 배우기에 노력하라.
그러면 머잖아 그들이 고개를 숙이고 우리에게 와서 잘못을 빌고 도움을 청할 날이 올 것이다.”
(월말통신 창간호 법설)
일제는 번번이 소태산을 찾아와 시국 강연에 동참할 것을 강요하였다.
그때마다 소태산은 말을 못 알아듣는 것처럼 어눌하게 자꾸
“그저 지도만 잘해 주세요. 우리가 무얼 압네까.
우리는 시키는 대로 하겠습네다.”
이 말 반복하기를 세 번이나 하고 세 번 절하였다.
일경은 이 사람이 풍채가 그럴듯하고 인품은 좋아 뵈는데 통 말을 못 알아들으니
촌 농판이라 여기고 상대가 안된다 싶었든지 웃으며 돌아가 버렸다.
뜻이 있게 하고보면 천하농판 아닐런가
소태산의 법설 중에 이런 노래가 있다.
집에 들면 노복 같고
들에 나면 농부 같고
산에 가면 목동 같고
길에 나면 古老 같이
그렁저렁 공부하여
천하 농판되어 보소
뜻이 있게 하고 보면
천하 제일 아닐런가
소태산은 제자들에게
‘나한테 한번 둘린 셈 잡고 농판처럼 살아라’는 말을 곧잘 하였다.
전북 지방 시속 말로 ‘농판이 참판보다 낫다. 농판이 정승이다’라는 말이 있으니
‘갑동네 사람처럼 농판같이 살라’는 것이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물같이 지조가 없는 듯하지만
그 바탕에는 변함이 없는 무서운 저력을 감추고 사는
속뜻을 가지고 사는 농판이라야 천하제일인 것이다.
‘농판’이란 전라북도 사투리로 둘러먹기 좋은 시골에 사는 어수룩한 농투성이를 말한다.
진안 출신 대산(원불교 3대 종법사)은 이를 두고
‘알고도 모른 체하면 성인이요 모르고 속으면 농판이다’ 하였다.
일경들은 소태산을 ‘농판’으로 보았지만
아무도 모르게 그들의 머리 훨씬 위에 천하를 다 아는 농판이었으니,
그 그릇이 아니고는 어떻게 재어보지 못할 기국이었다.
<천하 농판> 노래와 유사한 소태산 신년 법문 <난세에 무사히 살아가는 비결>이 있는데
이에서도 농판의 심법을 읽을 수 있다.
그것은 조선의 후기의 성리학자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1798-1879)의 좌우명으로
이를 강증산이 소개한 것이다.
處世柔爲貴 剛强是禍基
發言常欲訥 臨事當如痴
急地常思緩 安時不忘危
一生從此計 眞個好男子
‘일 당하면 바보인 듯 삼가 행하라(臨事當如痴)’는 바로 농판의 심법이다.
증산은 노사의 좌우명을 그의 첫 번째 제자 김형렬에게 ‘농판으로 행세하라’고 일렀다.
“이 시대를 지내려면 남에게 폭을 잡히지 아니하여야 하니
너는 미친놈이 되지 못하니 농판으로 행세하라”(대순전경 3-39)
증산의 말을 들어 소태산은 말하였다.
“사람을 쓸 때에 ‘농판’ ‘천진’ ‘고진’이라고 평판을 받는 자를 써라.
남의 말을 듣고 좀 빤득빤득하는 자는 다 하나도 쓰지 못한다.
너희들이 두고 보라.”(원광55호 이호춘 <수도수기>)
증산을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그를 두고 광인이라 하였다.
“전일에 거짓말로 행세할 때에는 신인神人이라고 하더니,
이제 참말로 하는 때에는 도리어 광인으로 아는구나.
광인은 입경立經도 못하고 건사建事도 못하니
후일에는 광인이라고 부르는 자가 광인이란 말을 듣는 자에게 절할 날이 있으리라.”
사람들은 증산을 광인으로 알았지
“진실로 그 폭을 잡기가 어렵다” 하였다.
이 말을 듣고 증산은 말하였다.
“사람이 마땅히 폭 잡기가 어려워야 할지니,
만일 폭을 잡히면 범속에 지나지 못하느니라.”
일제는 소태산을 농판으로 알았지 ‘천하 농판’인 줄은 몰랐다.
그들에게 폭을 잡히지 않았다.
살얼음 밟듯 하루하루 살기가 위태한 일제 치하에서 잘 사는 비결이란
‘갑동네 사람처럼 농판같이 살라’는 것이었다.
뜻이 있게 하고보면 농판이 천하제일인 것이다.
처세에 유한 것이 제일 귀하고 강강함은 재앙의 근본이니라.
말하기는 어눌한 듯 조심히 하고 일당하면 바보인 듯 삼가 행하라.
급할수록 그 마음을 더욱 늦추고 편안할 때 위태할 것 잊지 말아라.
일생을 이 글대로 살아간다면 그 사람이 참으로 대장부니라.
이 글대로 행하는 이는 늘 안락하리라.
노사(蘆沙) 의 좌우명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 류팽로柳彭老의 시문집 <월파집月坡集>에 수록되어 있는 글귀이다.
월파(月坡)는 문과에 급제하였어도 벼슬에 나가지 아니하고
옥과에서 지내던 선비로 임진왜란이 나자 동지들과 의병을 일으켰으며,
고경명을 의병장으로 추대하고,
자신은 그의 종사관이 되어 금산에서 왜적과 맞서 싸우다가 전사한 숨은 의인이다.
벼슬을 하고 남의 앞장에 섰다 하여 참 대장부가 아니다.
농판(바보)이라 손가락질 당해도 폭을 잡을 수 없는 경륜을 가지고
위태할 때 세상 사람을 위해 뜻이 있게 살고 간 자가 진실로 대장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