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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마태복음 12장 31-37절
성령을 모독하는 죄
예수님께서 귀신 들려 눈 멀고 말 못하는 사람의 병을 고쳐주셨을 때 무리들의 반응은 놀라면서 “다윗의 자손이 아니냐?”라고 했던 반면, 종교지도자라 할 수 있는 바리새인들은 그 일이 귀신의 왕을 힘입어 된 일이라고 은밀하게 비방을 하였습니다. 그들은 분명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행하실 일 가운데 많은 기적이 있을 것을 알고 있었지만, 소위 예수님의 가르침과 그들의 가르침이 달랐기 때문에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배척했고 비방했고 심지어 죽이고자 하는 마음까지 가질 정도였습니다. 이런 그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마12:30)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지 않으려고 하는 자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모으려 하지 않는 자들이란 것입니다. 함께 하지 않기 때문에 반대하는 자요, 함께 모으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헤치려고 하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으로 오시면 바리새인들에 대하여 어떤 말씀까지 하시느냐? 31절과 32절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에 대한 모든 죄와 모독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소위 성령훼방죄라고 말하는 부분인데, 지금 바리새인들은 성령을 모독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난번에 살핀 말씀과 다시 연결해서 생각해 보자면 예수님께서 병을 고치시되 귀신 들려 눈 멀고 말 못하는 사람을 고치신 것은 단지 병을 고치는 정도만이 아니라 사단의 권세를 제어하시고 멸하신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들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느냐? 귀신을 힘입어 쫓아낸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에 대하여 정죄할 뿐이요, 전혀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조금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예수님과 함께 하려고 하지 않았으며, 예수님과 함께 모으려고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반대를 위한 반대일 뿐이었습니다. 이런 저들에게 말씀하신 것 중에 하나가 이런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마12:28) 즉 나는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지만, 너희는 그것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다.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라는 것을 받아들인다면 하나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너희는 받아들이고 있지 않기 때문에, 아니 그것을 고의적으로 악용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의 원수와 같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지금 너희들은 성령을 모독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내용입니다.
본문에 대하여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면, 우선 본문은 사람에 대한 모든 죄와 모독은 사하심을 얻을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쉽게 말하자면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짓는 모든 죄와 모독에 대하여 용서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한 예로 이사야 1장 18절에 보면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고 말씀하시는데, 아무리 죄가 심각할지라도, 아담의 타락 이후 모든 인류가 원죄와 더불어 자범죄를 저지르고 있는데 그렇게 많은 죄를 짓더라도, 심지어 죄의 크기가 아무리 클지라도, 죄의 무게가 아무리 무거울지라도, 죄의 높이가 아무리 높을지라도 하나님의 용서는 그런 모든 죄보다 크고 높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용서로서 못 덮을 죄가 있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용서가 어디에 제시되어 있느냐? 복음 안에 제시가 되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대신하여 죽으신 대속죽음을 믿을 때, 믿음으로 회개하여 돌이킬 때 하나님께서는 어떠한 죄라도 용서해 주신다는 겁니다.
심지어 오늘 본문에서는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받는다고도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인자’란 사람의 아들이라는 뜻으로 예수님 자신을 일컫는 표현입니다. 그러니까 말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거역하는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조차 예수님께서는 사함을 받을 수 있다고 말씀하고 계시다는 겁니다. 그러나 결코 사하심을 얻지 못하는 죄가 있는데, 그것이 뭐냐? 성령을 모독하는 것, 말로서 성령을 거역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얼핏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사함을 받을 수 있다고 말하는 반면, 성령에 대해서는 사함을 받지 못한다고 말하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보다 성령의 사역이 더 중요한 것처럼, 혹은 예수 그리스도보다 성령이 더 우월한 것처럼 비춰지기 쉽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과 성령의 사역은 결코 분리되지 않으며, 본질에 있어서 다르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실제로 인성을 취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복음을 증거 하심으로 믿는 자들을 부르신다면, 성령께서는 믿음 없는 자들에게 믿음을 주시고 복음의 부름 앞에 효력이 있도록 역사하시는 분이십니다. 왜 예수님께서 인성을 취하시고 난 뒤 성령을 햔량없이 받으셨는가? 성령으로 사역하시고 그 성령을 자기 백성들에게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성령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도록 역사하십니다. 따라서 성령을 거부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한다는 것이요,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한다는 것은 성령을 거부하는 것과 같습니다.
여러분, 성경이 알려주고 있는 삼위일체 하나님은 본질상 동일하시며 권능과 영광이 동등하신 한 분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신성 안에 성부 성자 성령, 세 위격이 계시지만 성부가 가장 높은 분, 그 다음이 성자, 그 다음이 성령이라는 이런 개념은 아닙니다. 물론 성경 계시를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은 전 신성의 근원으로서 성부, 성부로부터 나신 바 된 성자, 그리고 성부와 성자로부터 보내심을 받는 성령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표현이 있다고 해서 더 높다, 더 낮다는 개념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럼 왜 이렇게 말씀하시는가? 왜 분리할 수도 없고 본질에 있어 동일한 사역에 대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모독하는 것은 사하심을 받되,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사하심을 받지 못한다고 하는가? 조금 전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예수님께서 성육신 하시면서 성령을 한량없이 받으셨습니다. 계시의 말씀을 통해 알리신바 위격 상호간의 관계를 따라서는 성자께서 성령을 보내시는 분으로 계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을 받으신 것은 무엇 때문인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성을 취하셨기 때문입니다. 즉 예수님은 하나님으로서는 성령을 보내시는 분으로 계시지만, 사람으로서는 성령을 받으시는 분으로 계신다는 것입니다.
이런 이해를 통해 보자면 지금 예수님께서 말씀하고 계신 내용은 특별히 인성을 취하신 것과 관련 있다 할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기 때문에, 그만큼 낮아지셔서 오셨기 때문에 당장 예수님을 믿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고, 또 예수님께서 행하신 모든 사역에 대하여 의구심을 가질 수 있습니다. 무리들이 말한 것처럼 “다윗의 자손이 아니냐?”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윗의 자손인 것 같지만 분명한 확신 가운데 있지 못할 수도 있으며, 때로는 말로서 예수를 배척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함을 받는다는 것은 용서가 있다는 것이요, 용서가 있기 위해서는 회개가 있다는 것이며, 회개는 결국 말씀에 대한 성령의 내적 조명을 통해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비록 인성을 취하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는 배척한 자로 있을 수 있지만 이후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회개하여 돌이킨다면 사함을 받지 못할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참고로 매튜 풀 주석의 내용을 보면 이렇게 주석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무지해서 그리스도를 단순히 일개 사람에 불과한 존재로 생각하고서, 그리스도를 모독하였다면, 나중에 그가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믿게 되면, 그 죄는 사하심을 받을 수 있다.” 그러니까 단지 예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사람일 뿐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지 않고 모독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 대상에 대해서는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믿음으로 회개하기만 하면 사하심을 얻을 수 있습니다. 다만 이때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일이 있다면, 그것도 끝까지 믿지 않는다면 이 말씀과는 전혀 상관없는 자로 있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정리하자면 한시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그리스도로 여기지 않고, 단지 인간으로 생각하여 배척하였다가 나중에 그리스도인 줄 깨닫고 회개하는 마음으로 돌이킨다면 분명 사함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을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럼 성령을 모독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일단 매튜 풀 주석에 보면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하시기 위해서 그들 가운데로 오셔서, 단지 말씀만 전하신 것이 아니라, 자기가 하나님의 능력과 성령을 힘입어 행하고 있음을 확증해 주기에 충분할 정도로 수많은 이적들을 행하셨다. 그런데도 그들은 그가 메시야로서 말씀을 전하고 행하신다는 것을 믿기는커녕 인정조차 하지 않았고, 한 술 더 떠서 그의 역사들을 마귀의 역사로 돌렸으며, 그가 귀신이 들여서, 마귀가 주는 능력으로 그런 이적들을 행한 것이라고 말하였다. 이것은 그들 자신의 양심의 확증을 거스르고서 악의적으로 성령을 최고로 모독한 것으로서 성령을 거역한 죄임에 틀림없었다.”
칼빈 역시 다르지 않아 보이는 내용으로 주석하고 있는데, 몇몇 부분만 읽어드리면 “일단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면 그리스도를 배척하는 자들은 자신들의 무지를 근거삼아 핑계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성령의 빛을 맛보지 못한 자들은 아무리 성령의 영광을 훼손한다 하더라도 이 죄를 범했다고 볼 수 없다.”고 말하며, “우리가 우리들 중에 내재하시는 성령을 소멸하고자 고의적으로 행동할 때만 그같은 불경죄를 범하게 된다.”고 말합니다.
마가복음에 보면 성령을 모독하는 것과 관련해 직접적으로 이렇게 말씀하시는 구절이 있습니다. “누구든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사하심을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가 되느니라 하시니 이는 그들이 말하기를 더러운 귀신이 들렸다 함이러라”(막3:29-30) 따라서 예수님께서 저들에 대하여 성령을 모독하였다고 말한 것은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에 대하여 ‘불결한 영의 힘을 받았다고 말함으로써 고의적이고 악의적으로 빛을 어두움으로 바꾸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칼빈).
이런 자들, 즉 성령을 모독하는 자들에 대하여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는 말씀을 하고 있는데, 요한일서 말씀에 의하면 사망에 이르는 죄요(요일5:16) 용서 받지 못할 죄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성령을 모독하는 죄는 결코 용서 받지 못한다고 말씀하고 계신 겁니다.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생각해 볼 것이 있는데, 만약 칼빈이나 매튜 풀 주석의 내용을 따른다면 “오늘날 성령을 모독하는 죄가 있다고 할 수 있는가?”의 질문이 생기게 됩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그런 기적은 더 이상 없기 때문입니다. 지난 시간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기록된 말씀으로서 성경이 완성되었다는 것과 그 완전함, 충분함으로 계시라는 차원에서 기적은 멈추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을 모독하는 바리새인과 같은 일이 오늘날에 있다고 할 수 있는가? 이 부분이 어려운데, 매튜 풀 주석에 보면 이러한 질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답합니다. “이 문제에 대하여 단정적으로 말씀해 주는 본문들은 없지만, 사도는 히브리서 6:4-6; 10:26-27; 요한일서 5:16에서 ”사망에 이르는 죄“에 대하여 언급하면서,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죄를 범한 자를 사해 달라는 기도를 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바리새인들의 경우에는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계셔서 그들의 눈 앞에서 이적들을 행하시는 것을 보았지만, 지금 우리에게는 그러한 기회가 주어져 있지 않기 때문에, 오늘날의 사람들은 그러한 죄를 범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하고 싶지만, 우리가 앞서 언급한 본문들은 오늘날의 사람들도 그러한 죄를 범할 가능성이 있음을 분명하게 보여 준다.” 이런 면에서 성령을 모독하는 죄에 대해서 다소 어렵다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방금 언급한 구절들 가운데 한 부분을 통해 우리가 좀 더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있는데, 우선 히브리서 6장에 있는 말씀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히6:4-6) 여기 보면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가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타락한 자들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더구나 그렇게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할 수 없다, 오늘 본문으로 말하자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빛을 받는다는 것은 간단히 말해 복음의 빛 혹은 예수 그리스도를 빛이라 말씀하시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빛을 받는 것에 대하여 하늘의 은사를 맛보는 것이라고 말하며, 특별히 성령에 참여 한 바 되었다고 말하는데 이것은 성령이 아니고서는 이 빛을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12장 3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우리 마음의 눈을 여시고 우리에게 하나님의 비밀을 밝혀주시는데, 그런 이유에서 하나님의 선한 말씀을 맛보았다고 말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은 결국 이 땅에서의 삶이 아니라 내세를 보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내세의 능력을 맛보았다고 말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지금 성경이 이런 경험 가운데 있는 자가 타락할 수 있다는 것으로 말씀하고 있고, 또 타락한 자들은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다고 말씀하시는데,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을 해 볼 수 있습니다. “과연 참된 신자에서 타락하는 것이 가능한가?” 물론 이 때 타락을 완전한 타락으로 볼 것이냐, 아니면 죄를 짓게 되는 그런 타락이냐에 대한 질문도 있을 수 있지만, 본문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완전히 타락하여 돌이킬 수 없을 정도가 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을 따라 우리가 고백하는 내용에 따르면 참된 신자, 다시 말해 근원적으로 볼 때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백성들은 결코 완전히 타락하여 돌이키지 못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칼빈의 주석을 보면 본문과 관련하여 이렇게 말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주께서는 택함을 받은 자들만을 효과적으로 부르신다. 그리하여 바울은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롬8:14)고 증언한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어떤 사람을 그의 성령에 참예하도록 만든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양자로 삼으신 확실한 보증임을 가르쳐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택함을 받은 자들은 치명적인 타락의 위험이 면제되어 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에게 맡기신 이는 누구보다도 위대하신 분이시므로 그는 택한 자들을 한 사람도 멸망시키지 않도록 하시겠다(요17:12)는 약속을 지키셨다.
반면에 버림받은 자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하나님이 버림받은 자들을 하나님의 은혜로 맛보도록 거절하였다는 이유에서, 그리고 그들의 정신을 하나님의 빛의 조명이 미미하다는 이유에서, 또한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그들에게 어떤 결과를 초래했다고 해서, 또는 그들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말씀을 어느 정도 새겨 넣었다고 해서 그들이 엄청난 감동을 받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버림받은 자들 안에도 얼마간의 지식은 있는 것이지만 마땅히 필요한 만큼의 깊은 뿌리를 박고 있지는 못하기 때문에, 그리고 결국 그들의 지식은 시들어버리기 때문에 나중에는 소멸되어 버린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6장은 참된 신자, 즉 하나님의 택한 백성도 타락할 수 있다는 의미의 본문은 아닙니다. 우리와 교리를 달리 하는 사람들은 이런 구절들을 통해 택자도 타락할 수 있다고 말할지 몰라도 전 성경을 통해 보자면 그렇게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히브리서 6장은 유기자들도 한 번 빛을 받을 수 있고, 하늘의 은사를 맛볼 수 있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될 수 있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인 사울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의 인생을 놓고 볼 때 우리는 그가 유기자임을 말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베푼 은총을 빼앗으셨다고 말함으로 마치 그를 버리신 것처럼 말씀하고 계시지만, 은총을 빼앗는다는 것이 선택하셨다가 버리신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영원 전에 작정하신 바를 반드시 하나의 오차도 없이 실행하십니다. 선택하셨다면 버리시는 일이 없으시며 유기하셨다면 유기하신 것을 거두시고 다시금 선택하시는 일이 없으십니다. 때문에 사울은 그 결과로서 드러난 바가 유기자임을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유기자임에도 불구하고 어떤 일까지 경험했느냐 하면 예언을 하는 일까지 있었습니다. 사무엘상 10장 12절에 보면 사울의 예언을 통하여 당시 어떤 말까지 있었느냐 하면 “...그러므로 속담이 되어 이르되 사울도 선지자들 중에 있느냐 하더라”는 말까지 생기게 되었습니다. 어떤 면에서 히브리서 6장의 말씀이 사울에게 있었다고 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한 번 빛을 받았고, 하늘의 은사도 맛봤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었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도 맛보았다고 할 수 있는 그런 내용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일시적이라는 것을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달리 말하면 믿음을 가질 수 있으나 그 믿음은 참된 믿음이 아니라 일시적인 믿음 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억해야 할 것은 지금 히브리서 6장에 나오는 내용들, 즉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도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도 맛보는 것들은 결코 내적인 것으로 있지 않다는 것도 중요합니다. 외적인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울의 예언과 같은 내용들에 대하여 어떤 말을 사용하느냐 하면 성령의 내적인 역사가 아니라 ‘외적 충동’이라는 말을 사용한다고 합니다.
다시 오늘 본문으로 오시면, 이런 이해가 오늘 본문에도 적용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비록 오늘날 성경이 말하고 있는 기적의 역사는 없지만 방금 살핀 히브리서 6장과 같은 내용이 있다고 할 때 성령을 모독하는 죄에 대하여 오늘날 없다고 말하기보다는, 다시 말해 이적이 없기 때문에 없다고 말하기 보다는 결국 그 죄는 궁극적인 의미에서 유기자들에게 돌려질 수밖에 없는 죄의 일종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그들도 일시적인 믿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외적으로 볼 때 믿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그 믿음을 지키지 못하는 자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견인의 은총을 선물로 받지 못한 자들, 그래서 결국 주를 부인하는 자들이 성령을 모독하는 자들인 것입니다.
그럼 일시적인 믿음이라고 가져야만 하는가? 히브리서 6장에 있는 것처럼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도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도 맛보고 난 뒤 타락해야지만 성령을 모독하는 것이라 할 수 있는가? 개인적인 해석일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로마서 1장 20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그리고 21절에서는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이 말씀은 일반계시의 충분성을 말씀해 주는 내용입니다. 즉 본성(혹은 자연)의 빛과 창조와 섭의 역사들이 하나님의 선하심과 지혜와 능력을 보여주기 때문에 어떤 사람도 하나님을 모른다고 핑계할 수 없다(롬 2:14-15, 1:19-20, 시 19:1-3, 롬 1:32, 2:1)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차원에서 반드시 기적을 맛봐야 되고, 히브리서 6장에 있는 것처럼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도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도 맛보아야 한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이미 우리의 본성은, 그리고 창조와 섭리의 역사는 하나님 자신을 보여주는 충분한 증거와 같습니다. 물론 일반계시의 불충분성도 말합니다. 다시 말해 본성의 빛, 그리고 창조와 섭리의 역사만으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 및 구원에 필수적인 그의 뜻을 아는 지식을 주기에는 충분하지 않습니다(고전 1:21, 2:13-14). 때문에 특별계시인 말씀이 필요할 수밖에 없고, 그 말씀이 증거 되어야만 합니다. 이때 “하나님의 말씀, 즉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것도 끝까지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과연 성령을 모독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묻고 싶습니다. 저는 그것 역시 성령을 모독한 것과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미 본성의 빛이나 창조와 섭리를 통해 하나님을 모른다고 핑계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사실이 복음을 통해 증거 되고 있는데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바리새인들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물론 아셔야 할 것은 앞서 칼빈의 견해와 비교해 보자면 칼빈은 이런 해석에 대하여 거절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매튜 풀 주석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매튜 풀 주석에 보면 성령을 모독하는 죄와 관련해 몇 가지를 말할 수 있다고 하는데, “(1) 무지해서 알지 못하고 범한 모든 죄는 이 죄에 해당될 수 없다.”고 말합니다. “(2) 이 죄는 성령의 역사임을 뻔히 알면서도 성령을 거역하고 모독하는 죄임에 틀림없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3) 이 죄가 되기 위해서는 배교의 요소가 거기에 포함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 등을 말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성령을 모독하는 죄가 있다고 한다면, 다시 말해 히브리서 6장 등의 말씀을 성령을 모독하는 죄와 연관해서 생각할 수 있다면, 비록 기적의 역사는 없을지라도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고, 때문에 하나님을 모른다고 핑계할 수 없으며, 또한 복음의 증거가 있기 때문에 그것을 끝까지 거부한다는 것은 결국 성령을 모독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런 이해가 어거스틴에게 있었다는 말을 들었는데 정확한 출처를 찾지 못했고, 또 어떤 논리로서 말하고 있는지도 모르기 때문에 개인적인 생각이라고 말씀을 드렸지만, 혹 확인이 된다면 기회가 될 때 다시금 말씀드리는 것으로 하겠습니다(기독교강요, 1559, 3권 3장 22 참조).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죄가 무엇인가도 중요하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이런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교훈하시고자 하는 바에 대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얼핏 보면 분명 택자와 관련해서는 오늘 본문이나 히브리서 6장의 말씀이 상관없는 듯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누구에게 하고 계시는가? 바로 교회를 향하여 말씀하고 있다는 것을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말씀하시는 이유 중 한 가지가 이것입니다.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10:12)
여러분, 택자이기 때문에 이 말씀과 상관없는 것이 아닙니다. 왜 이런 말씀까지 우리에게 하시는가? 그만큼 조심해야 한다는 것을 알리시기 위해서입니다. 분명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에게는 견인의 은총이 주어질 것입니다. 우리 자신으로서는 신앙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100% 실패할 수밖에 없지만, 하나님께서 견인의 은총을 선물로 주심으로 말미암아 그 신앙이 유지가 되고 좀 더 나아지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견인의 은총과 더불어 우리 신앙의 유익을 위하여 때로는 어떤 방식을 동원하시는가? 교훈도 하시지만 책망도 하십니다. 때로는 위협도 하십니다. 위협하시되 우리와 상관없는 듯 보이는 그런 말씀도 우리에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경성하도록 하기 위해서, 결코 안일한 마음을 가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인간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분명한 진리 앞에서도 그 진리를 취하지 못하고 오히려 진리를 거짓이라고 말할 수 있는 자들인지를 확인하셔야 합니다. 인간은 매우 부주의하며, 또한 어리석은 존재여서 맹신에 빠지기가 쉽습니다. 옳고 그름에 대한 분별보다는 소위 덮어 놓고 믿는다고 말하는 것처럼 그렇게 믿을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분명한 진리 앞에서도 그러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라면, 그리고 하나님의 택한 백성으로서 진리를 사모하는 자들이라면 진리를 거짓이라고 말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도록 주의하고 또 주의해야 될 뿐만 아니라 참된 진리가 무엇인지를 더욱 배우고 배우셔야 합니다. 성령의 일을 귀신의 일이라고 하지 말아야 하는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우리의 일이라고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 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일이심의 결과라면 우리의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을 인정하셔야 합니다.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냐”(고전4:7) 바로 이것입니다. 당연히 우리는 우리의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에 교만할 수 없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겸손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있어 너무나도 마땅한 모습이 아닐 수 없는 겁니다.
오늘날 은혜, 그것도 ‘오직 은혜’라는 말을 사용하면서도 은혜와 함께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가 아닌 인간의 공로를 말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개혁주의가 상급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상급의 논리가 온통 은혜가 아닌, 공로로서 이해하고 있다는 것이 이런 면을 잘 드러내고 있는 증거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은혜를 말하는 자리에는 결코 인간의 공로라고 할 만한 것이 하나도 들어올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오직 은혜’라는 말은 모든 것에 있어 은혜가 앞선다는 것입니다. 은혜가 앞서는데 어떻게 공로를 내세울 수 있겠습니까? 이 부분을 잘 정리해 두셔야 합니다.
다시 오늘 본문으로 오시면 33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나무도 좋고 열매도 좋다 하든지 나무도 좋지 않고 열매도 좋지 않다 하든지 하라 그 열매로 나무를 아느니라” 마태복음 7장 16절에서 비슷한 내용의 말씀을 살핀 바 있는데, 그때 칼빈의 주석을 근거로 열매란 단순히 그들의 생활보다는 그들의 가르침에 대한 것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물론 가르침만인가 했을 때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닙니다. 생활에 대해서는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서 6장에서 살펴본 것처럼 외적으로, 그리고 일시적으로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도 맛볼 수 있다는 것에 주의하셔야 합니다. 그들에게 소위 이런 외적인 열매가 있다고 해서 그렇기 때문에 좋은 나무라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칼빈이 마태복음 7장에서 해석한 것처럼 그들의 가르침이 무엇인가로 구분을 해야 합니다.
이렇게 볼 때 지금 바리새인들은 어떤 자들이냐?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는 다른 가르침을 소유하고 있는 자들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예수님께서 행하신 역사를 마치 귀신의 역사인 것처럼 말하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의 교리로 보자면 그들은 택자가 아니라 유기자란 것입니다. 당연히 열매가 나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택자들의 열매는 무엇인가? 좋은 나무로부터 나는 좋은 열매일 수밖에 없습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우리 역시 나쁜 나무로부터 나쁜 열매를 맺을 수밖에 없었지만, 우리를 어디에 접붙여 주셨는가? 예수 그리스도라는 나무에 접붙여 주셨습니다. 그래서 말씀하시는 것이 이것입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15:5) 그리스도라는 나무에서 떨어지면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어떤 열매도 맺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면 그리스도께 붙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런 말씀 때문에 우리는 우리 자신을 말씀에 비춰 돌아보는 일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바른 교리 가운데 있는가? 그리고 바른 교리에 근거하여 바른 생활 가운데 있는가? 그리고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모든 것이라고 할 수 있는가? 이 사실이 누누이 확인이 되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장 30절에 있는 말씀처럼 그리스도가 우리의 지혜요, 그리스도가 우리의 의로움이요, 그리스도가 우리의 거룩함이요, 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원함이란 사실! 그분이 우리의 모든 것 되신다는 사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어떤 선한 열매도 없다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34절과 35절을 보시면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에 대하여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부르십니다. 일반 뱀과는 달리 독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위험하며 조심해야 할 뱀이 독사인데, 지금 바리새인들이 그와 같다는 것입니다.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물론 아담의 타락 이후 모든 인류가 악인으로 태어납니다. 그러나 악인 중에서도 구속의 은혜를 입는 자들이 있습니다. 바로 택자들입니다. 비록 그들이 태어날 때는 태중에서부터 악인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인이라 불리게 자들로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그들에 대하여 견인의 은총을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말미암아 자기 백성들을 끝까지 지켜 보호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예수님께서 책망하고 계시는 바리새인들은 그렇지 못한 자들입니다. 그들은 마음에 악이 가득하며, 악이 가득하기 때문에 악한 것만 내 놓을 뿐입니다. 성령의 역사가 분명하지만 그런 성령의 역사에 대하여 귀신의 힘을 의지하여 역사하는 것이라고 말할 정도로 악으로 기울어져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36절과 37절을 보시면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곧 그들의 말이라 할 때 결국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는 것, 아니 성령의 역사를 인정하지 않고 모독하는 것에 대하여 결국 심판 날에 심문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특히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라는 말을 하고 있는데, 성령의 일을 성령의 일이라고 하지 않는 것, 하나님의 일을 하나님의 일로 여기지 않는 것 등이 다 무익한 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전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는 것 역시 무익한 말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말이란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고백이기 때문에 말만이 아니라 그 마음 또한 심판을 받는다는 것도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달리 말하면 외적인 신앙고백만 있으면 괜찮은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외적으로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할 수 있고, 외적으로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낼 수 있으며, 외적으로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도 행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곧 하나님께서 인정할 수 있는 것이냐? 이미 마태복음 7장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외적인 고백이 마음에 근거한 것이라면 의롭다 함을 받겠지만, 마음으로부터 나오지 않는 외적 고백은 결국 정죄를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다만 이때 주의해야 할 것은 의의 근거가 말, 다시 말해 믿음에 대한 고백이라고 할 때 믿음 자체가 의를 준다고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말보다는 마음이 앞서는 것처럼, 마음은 그 마음을 준비하시는 하나님이 앞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빌립보서 2장 13절입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그러니까 이신칭의라고 말하기 때문에 믿음 자체를 칭의의 근거인 것처럼 생각하기 쉽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그렇게 보는 것에 대하여 조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신앙고백으로 고백한 내용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 11장 칭의에 대한 고백이었는데, 1항이 그것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 믿음 자체나 믿음의 행위나 다른 어떤 복음적 순종이 그들의 의로서 그들에게 전가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순종과 속죄를 그들에게 전가함으로 의롭게 해 주신다(롬4:5-8, 고후5:19,21, 롬3:22,24,25,27,28, 딛3:5,7, 엡1:7, 렘23:6, 고전1:30,31, 롬5:17-19).” 조금 전에 고린도전서 1장 30절에 대해서도 말씀을 드렸지만 우리의 의의 근거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에 있습니다. 그분의 순종과 그분의 대속적 죽음!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모든 것을 나의 것으로 여겨주시는 것!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성령을 모독하는 죄와 관련해 한편으로는 칼빈 등의 입장을 소개해 드렸지만 다소 어려운 면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입장이라면 분명 오늘날 성령을 모독하는 죄는 없다고 해야 하지만, 히브리서 6장과 같은 내용이 있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너무 섣부르게 이러한 죄가 성령을 모독하는 죄라고 생각하기 보다는 복음 앞에서 끝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것에 대하여 성령을 모독하는 죄를 저지르고 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경우 바리새인들이 자기 백성이 아님을 분명 아셨습니다. 이미 그들이 어떤 나무인지 아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알지 못한다는 점에서 함부로 판단할 수 없다는 것도 아셔야 합니다. 비록 지금은 좋지 못한 나무의 모습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하나님께서 택하셨다면 분명 그의 인생 가운데 그리스도라는 좋은 나무에 접붙이는 일이 있을 것입니다. 때문에 이것이 성령을 모독하는 것이라고 너무 쉽게 단정지어 말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더불어 이런 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우리 자신 또한 돌아보는 일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성령을 모독한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우리의 일이라고 말함으로서 하나님을 모독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리스도라는 나무에 접붙여진 자로서 과연 우리는 좋은 나무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있는가?
분명한 것은 비록 좋은 나무에 접붙여져 좋은 열매를 맺는 일도 있지만 여전히 점과 흠이 있다는 것 또한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판 날 우리가 하나님 앞에 당당히 설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의의 근거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 즉 그분의 대속죽음과 그분의 순종에 있다는 것을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사실을 믿을 수 있도록 성령께서 우리 마음 가운데 역사하셨고 지금도 역사하고 계시다는 것을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말이 성립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고백은 이런 면에서 결국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