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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3회 판관기 10장-15장
판관 10,1-2 판관 톨라
“아비멜렉 다음에는 이사카르 사람으로서, 도도의 손자이며 푸아의 아들인 톨라가 일어나 이스라엘을 구원하였다. 그는 에프라임의 산악 지방에 있는 사미르에 살았다”(1).
푸아의 아들 톨라가 이스라엘을 구원하였다. '푸아'는 '입', '말'이란 뜻이다. 그리고 '톨라'는 ‘곤충’,'벌레'란 뜻이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소판관(小士師)인 '톨라'(tola)와 그의 아비 '부아'(Puah)의 행적에 대하여서는 성경에 달리 언급된 것이 없다. 다만 알 수 있는 사항은 '푸아'와 '톨라'라는 이름은 '아사카르'가 낳은 두 아들의 이름과 같다는 점이다(창세 46,13). 이와 같은 현상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자기 자식들의 이름을 이미 족보에 실려 있는 선조의 이름을 따라 지어 주던 풍습에서 기인된 것이다(루카 1,61). 톨라가 이스라엘의 판관이 되어 어떤 대적으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했는지 본절에는 아무 언급이 없다. 아마 아비멜렉으로 인한 종족끼리의 분쟁이든지 아니면 사소한 국지전(局地戰)이었을 것이다.
톨라는 이사카르 지파에 속해 있으면서 에프라임 지파의 땅에 살았다. 톨라가 왜 자기의 기업을 떠났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혹자는 미디안인들의 압제로 인해 그와 그의 가족들이 에프라임 산지로 이주한 것으로 추정하지만 확실치 않은 주장이다. 한편 '사미르'는 '사마레이아'로 변역되어 잇는 점에 비추어 볼 때 후대의 '사마리아'(Samaria)와 동일 지역이 아닌가 추정된다.
툴라는 23년동안 이스라엘의 판관으로 일하다가 사미르에 묻혔다고 간략하게 서술된다. 이처럼 톨라의 업적이 지극히 간략하게 소개된 후 곧바로 그의 죽음이 언급되고 있는 까닭은 저자가 구속사의 흐름에 있어서 그다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지 않는 사건들은 과감하게 생략하고 있기 때문이다.
판관 10,3-5 판관 야이르
“그 다음에 길앗 사람 야이르가 일어나 스물두 해 동안 이스라엘의 판관으로 일하였다”(3). “그 다음에” 해당하는 원어 '아하라이우'는 '그 사람 다음에'란 의미이다. 따라서 이는 '톨라를 이어서'로 해석될 수 있다. 그러나 이 한 단어만으로 톨라가 죽자 곧바로 야이르가 판관이 되었는지의 여부를 파악 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이 말이 시간적인 연속을 나타내기 보다는 계승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길앗 사람 야이르에서 '길앗'은 요르단 동편 지역의 영토, 혹은 거기에 거주하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이 지역은 이스라엘이 시혼과의 전투에서 승리한 후 르우벤, 가드, 므나쎄 반 지파에게 분배되었다(여호 32,33-42). 그러나 성경에서 '길앗 가족'(민수 26,29)의 후손을 가리킨다. 따라서 톨라를 이은 판관 야이르는 길앗 원주민이 아니라 므나쎄 지파 출신이다. 한편 야이르 역시 톨라와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의 '소판관'으로 그의 행적에 대한 별다른 성경적 기록이 없다. 다만 그의 이름의 뜻은 '비추는 자', 깨우치는 자'이다.
고대 근동 지방에서 어떤 사람이 나귀를 탄다는 것은 그 사람의 지위가 매우 높다는 것을 암시한다(5,10; 12,14). 따라서 야이르의 아들 30명이 각기 자기 소유의 어린 나귀를 타고 다녔다는 사실은 당시 야이르가 판관으로서 이스라엘 가운데서 부와 명예를 얻었음을 보여 준다. 이러한 사실은 그가 성읍 삼십을 소유하고 있었다는 것으로도 더욱 입증된다.
판관 10,6-17 암몬인들의 침입
“이스라엘 자손들이 다시 주님의 눈에 거슬리는 악한 짓을 저질렀다. 그들은 바알들과 아스타롯, 아람의 신들, 시돈의 신들, 모압의 신들, 암몬 자손들의 신들, 필리스티아인들의 신들을 섬겼다. 그들은 이렇게 주님을 저버리고 그분을 섬기지 않았다”(6).
이는 곧 이스라엘 백성이 죄의 악순환을 반복하면서 점점 더 거역해져 갔음을 의미한다. 이는 판관 시대의 시대적 정황(情況)이 어떠하였는지를 여실히 증거해 준다. 그리고 판관 야이르가 죽은 후 그의 뒤를 잇는 판관이 나오지 않으므로 인해 이스라엘 백성들이 또다시 종교적 타락의 길을 걷게 되었음도 보여 준다. 바알들과 아스타롯은 가나안 지방의 대표적인 신들이다. 즉 '바알'들은 가나안 당의 남성 신을 가르키며, '아스타롯'은 여성 신을 대표적으로 가리킨다.
아람의 신들이란 메소포타미아와 시리아의 영토 전역에 걸쳐 살고 있었던 셈족의 한 부류인 아람족과 그들의 영토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나 대개는 좁은 의미로 시리아 지역과 그곳에 거주하던 주민들을 가리킨다. 이 아람 사람들은 대체로 가나안의 헷족이 섬기던 신들을 섬기었다. 그 대표적인 신들로는 폭풍신 '아닷'과 '테슛, 그리고 태양여신 '아린나' 등이 있다.
시돈의 신들에서 시돈은 티로와 함께 지중해 연안의 항구 도시이다. 이곳 사람들은 주로 '아스타롯'과 '에쉬문'을 섬겼었다. 그런데 이중 '에쉬문'은 두로의 '멜카르트'와 더불어 근동 지방에서 많이 숭배되던 '풍요의 신'이었다. 모압의 신들은 전쟁의 신인 '그모스'가 유명하다(민수 21,29).
암몬의 국가 신은 '몰록'으로, 일명 '말캄'또는 '밀콤'으로도 불리웠다(1열왕 11,5,7,33). 몰록에게는 사람을 바치는 예식을 하여 유대인들은 이를 엄격히 하지 않도록 하였다. 필리스티아 사람의 신으로 성경에 언급된 것은 '다곤'이다(16,23; 1사무 5,2-7).
지금까지 주님께서 이스라엘을 징계하시기 위하여 들어 쓰신 여러 나라는 주로 필리스티아 북방 지역의 민족이었다. 때문에 지금까지는 주로 이스라엘 백성 중 북쪽 지역 사람들이, 곧 납탈리, 아세르, 즈불론, 이사카르, 므나쎄 지파가 고통을 당했었다. 그러나 이제는 필리스티아과 암몬 같은 필리스티아 남방지역의 민족들을 들어 쓰고 계시는데, 이로 인해 이제는 주로 남쪽 지역에 사는 지파 곧 유다와 베냐민 그리고 에프라임 지파가 압제를 당하게 되었다(9절). 특히 암몬 사람들은 이전에 모압 왕 에글론 및 아말렉 사람들과 더불어 이스라엘을 공격하여 압제한 적이 있었다(3,13). 그리고 필리스티아는 이제부터 지속적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괴롭히는 나라로 등장한다. “암몬 자손들은 또 요르단을 건너 유다와 벤야민과 에프라임 집안도 공격하였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심한 곤경에 빠졌다”(9).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들은 계속 주님께 아뢰었다. ‘저희가 죄를 지었습니다. 당신께서 보시기에 좋으실 대로 저희에게 하십시오. 그러나 오늘만은 저희를 구해 주십시오”(15). 이러한 고백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들의 죄악을 깊이 깨닫고 있음과 자기들의 힘으로는 주님의 뜻을 바꿀 수 없다는 사싶을 깊이 인지하였음을 보여 준다. 즉 이제 그들이 이처럼 주님의 뜻에 순종하려 한 자세는 때늦은 감이 있지만, 그래도 그들이 진정한 회개의 마음을 갖게 되었음을 증거해 준다.
주님의 어떠한 처벌이든지 달게 받겠다고 고백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제는 적의 압제로부터 자신들을 구원해 달라고 주님께 간구한 것은 조금 모순되어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주님의 선민(選民)인 자신들이 이방인들에게 압제를 당하면 주님 주님의 이름이 욕을 당한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따라서 단순히 이스라엘 백성들이 원수의 압제에서 벗어나게 해달라는 간구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대신 이는 자신들을 원수의 압제에서 벗어나게 하시어 자신들의 범죄로 말미암아 더럽혀진 주님의 이름이 다시 영광 받게 해달라는 간구인 것으로 이해하여야 한다.
지금까지의 이스라엘 백성의 회개 과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은 주님께 자기들의 죄를 고백했다(10절). 그것도 죄를 고백하되 아주 구체적으로 고백했다. 그들은 주님의 뜻에 복종할 마음의 준비를 했다(15절). 그리고 죄의 고백과 더불어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신들이 고백한 그 죄로부터 떠났다. 따라서 이러한 과정을 거친 그들의 회개는 진정한 회개임을 알 수 있다.
암몬 자손이 이스라엘 땅으로 다시 와서 전쟁 준비를 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18년 동안 암몬 사람들에게 복종하며 그들을 섬기다가(8,9절) 이제 반역했기 때문일 것이다. 역사상으로도 피정복민들이 정복 군주에게 조공 바치기를 거부하면 그 군주는 군사를 이끌고 와서 피정복민들을 재차 공격하는 것이 보편적으로 나타난다(2열왕 17,3-6).
미츠바는 성경에는 지명은 동일하나 전혀 다른 곳을 가리키는 '미츠바'가 대여섯 군데나 있다(여호 11,3.8;1사무 22,3). 그런데 10장에 언급된 '미츠바'는 판관 입타가 거주하던 곳이다(11,34). 이곳의 정확한 위치는 분명치 않으나 야뽁 강 북쪽에 있었던 듯하다. 그렇다면 이곳은 과거 야곱이 그의 외삼촌 라반과의 계약을 기념하여 '증거비'를 세웠던 곳인 '미츠바'와 동일지일 가능성이 크다(창세 31,49).
암몬 사람들과 대치 상태에 들어갔으나 길앗에 사는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는 막상 선두에 나서서 그들과 싸울 만한 인물이 없었다. 고대 전쟁에서는 선두에서 백성들에게 싸울 용기를 북돋아 주는 장군이 반드시 요청되었다. 그리고 그 장군이 전쟁 중 죽게 되면 병사들은 사기가 떨어져 도망하게 된다(1사무 17,50-52). 이러한 이유로 길앗 백성들은 암몬 사람과 제일 먼저 나가서 싸움을 시작할 만한 인물을 찾았던 것이다.
판관 11,1-33 판관 입타
“길앗 사람 입타는 창녀의 아들이었는데 힘센 용사였다. 길앗이 이 입타를 낳았다”(1). 길앗은 대부분의 경우 요르단 동쪽 지역을 기리키는 지명으로 나온다. 그러나 5,17에서는 분명히 한 지파를 뜻한다. 여기에서는 이 길앗이 인명으로, 곧 이 지방 모든 주민의 선조 이름으로 쓰인다. 입타가 아버지를 모르는 사생아였기 때문에 길앗이 입타를 낳다고 말하는 것이다. 판관 가운데 가장 불운한 운명을 갖고 태어난 사람은 입타이다. 입타는 아버지가 누구인지 모르며, 몸을 파는 여인에게서 태어났다. 그리고 형제들이 있어도 형제들과 함께 살 수 없고, 재산 상속권도 없다. 그러나 그는 힘이 센 용사였다. 길앗 사람들은 암몬의 침략이 심하여 살기가 너무 힘들었다. 길앗의 원로들이 입타가 사는 ‘톱’으로 가서 그에게 말하였다. “입타에게 말하였다. ‘와서 우리의 지휘관이 되어 주시오. 그래야 우리가 암몬 자손들과 싸울 수 있겠소.’ 그러나 입타는 길앗의 원로들에게 말하였다. ‘나를 미워하여 내 아버지의 집에서 쫓아낸 것이 바로 여러분이 아닙니까? 그런데 이제 여러분이 곤경에 빠졌으면 빠졌지, 나를 찾아온 이유가 무엇입니까?”(6-7).
암몬 족의 침략을 대항하기 위하여 "길앗 원로들" "입타"를 그들의 곧 통치자로 세우고자 하였다. 여기 이른 바 "원로"는 인도자를 가리켰을 것이다. 입타는 주님께 믿음으로 기도하는 신실한 사람이었다(11절 하반). 신실한 신자가 사람들에게 천대와 멸시를 받고 고독한 중에 신앙을 지켜 나아가면 주님께서 그를 높여 주시는 한 때가 오는 법이다. 그를 박대하던 자들이 그에게 절하게도 된다. 요셉을 이방인들에게 팔아버린 그 형들은 마침내 그에게 찾아와서 그에게 은혜를 구하기 위하여 무릎을 꿇었다(창세 37,27-28). 입타는 모든 일에 신중을 기하였다. 그는 길앗 원로들의 약속을 신중히 취급하며 그들의 진실성을 검토하였다. 그는 말하기를, "나를 미워하여 내 아버지의 집에서 쫓아낸 것이 바로 여러분이 아닙니까? 그런데 이제 여러분이 곤경에 빠졌으면 빠졌지, 나를 찾아온 이유가 무엇입니까?”라고 하였다(7절). 그 원로들은 길앗의 정치적 지도자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일찌기 입타의 형제들이 그를 내어 쫓는 불의한 처사를 알고도 그대로 방임, 혹은 찬동하였던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그들이 이제 그 사건에 대한 책임을 면할 수 없게 되었다. 이 책임을 추궁하는 입타의 말을 그대로 받아 들인다는 의미에서 그들은 입타를 저희의 최고 지도자로 삼겠다고 다시 약속한 것이다(8절). 그들은 변동 없이 끝까지 입타를 최고 지도자로 삼을 것을 주님 앞에 맹세하였다(10절). 그는 "힘센 용사"였으나 자기 힘으로 승리할 수 있다고 장담하지 않고 주님만 의지하였다. 그는 믿음으로 말하기를, "주님께서 그들을 나에게 넘겨주시면" 이라고 강력히 주장하였다(9절 하반). 이 말은, 그가 "전쟁은 주님께 속한 것"이라고 믿은 증거이다. 입타는 암몬 족과 전쟁 할 책임을 지고 주님께 그의 사정을 고하며 기도하였다. 그는 구원이 주님께만 있음을 믿고 그렇게 기도한 것이다. 그는 암몬 자손을 반격하기 전에 먼저 평화적으로 일을 해결하고자 하여 암몬 왕에게 사신(使臣)을 보냈다(12-27). 입타는 신앙이 진실할 뿐 아니라 지혜롭고 앞을 내다보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입타는 암몬 왕에게 사자를 보내어 전쟁 없이 외교(外交)에 의하여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암몬 왕은 "아르논에서 야뽁까지, 또 요르단까지"의 영토를 이스라엘에게 빼앗겼다고 하면서 그땅을 반환하라고 주장하였다(13절). 그 때에 입타는 이스라엘이 그 땅을 차지한 것은 "주님께서" 주셨기 때문이라고 길게 변론하였다. 이스라엘은 언제나 다른 민족들을 침략한 적이 없다고 함(16-18). 이스라엘이 일찌기 광야를 통과하던 때에도 에돔에게나 모압에게나 평화스럽게 행진했다고 하였다(민수 20,14-22) "헤스본 왕 곧 아모리 왕 시혼"과도 이스라엘은 전쟁하기를 원치 않았으나 그가 선제공격(先制攻擊)으로 이스라엘을 침해하였다는 것을 말한다(19-22). 그때 전쟁의 책임은 헤스본 왕 시혼에게 있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이스라엘로 하여금 전쟁하여 시혼왕의 땅(아르논에서 야뽁, 요르단까지)을 취하도록 해 주셨던 것이다. 그러니 결국 그 땅은 암몬 족의 소유가 아니라 이스라엘의 소유라고 설명하였다(23-27).
“나는 그대에게 잘못한 것이 없소. 그런데도 그대는 나를 공격하여 나에게 악한 행동을 하고 있소. 그러니 판관이신 주님께서 오늘 이스라엘 자손들과 암몬 자손들 사이에 판결을 내려 주실 것이오.’ 그러나 암몬 자손들의 임금은 입타가 보낸 전갈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27-28).
“제가 암몬 자손들을 이기고 무사히 돌아갈 때, 저를 맞으러 제 집 문을 처음 나오는 사람은 주님의 것이 될 것입니다. 그 사람을 제가 번제물로 바치겠습니다”(31).
이것은 입타가 서원(誓願)하는 말이다. 그는 암몬 족과 전쟁하기에 앞서 주님께 이와 같은 서원을 올렸다. 주님께서 이번 전쟁에 승리케 해주시면 집에 돌아가서 가장 먼저 영접 나온 자를 주님께 "번제"로 드리겠다는 것이다. 여기 이른 자 "번제"는 반드시 불에 태워서 바치는 제물만을 의미하지 않고, 여기서는 그저 바쳐 올리우는 제물(ascending offering)을 의미한 것이다. 사람을 태워 바치는 제물로 사용하는 것은 율법에 금지되었다(레위 18,21; 신명 12,31). 입타는 이 율법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당시 암몬 족이 몰록 우상(혹은 "밀콤"이라고도 함, 1열왕 11,5,33)을 섬겼는데(1열왕 11,7), 저희 자녀를 불살라 그 우상에게 바치는 악한 미신(迷信)에 젖어 있었다. 그 때에 입타가 암몬을 대적하면서 저런 미신도 미워하였을 것은 물론이다.
“입타가 미츠파에 있는 자기 집으로 돌아가는데, 그의 딸이 손북을 들고 춤을 추면서 그를 맞으러 나오는 것이었다. 그는 하나밖에 없는 자식이었다. 입타에게 그 아이 말고는 아들도 딸도 없었다”(34).
입타가 승전하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에 그의 외동 딸 무남독녀가 누구부다도 먼저 나와서 아버지를 영접했다. 이때에 입타는 그의 서원한 것 때문에 걱정하였다. “자기 딸을 본 순간 입타는 제 옷을 찢으며 말하였다. ‘아, 내 딸아! 네가 나를 짓눌러 버리는구나. 바로 네가 나를 비탄에 빠뜨리다니! 내가 주님께 내 입으로 약속했는데, 그것을 돌이킬 수는 없단다”(35). 입타의 걱정은 그 딸이 죽임이 될 지경의 불행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니다. 입타의 걱정은, 그 딸이 결혼하지 못하고 독신으로 성전 봉사에 평생 바침이 되어 입타의 기업이 계승되지 못하게 됨을 그 중점으로 하였을 것이다.
입타의 딸은 아버지의 서원을 받아들이고 처녀의 몸으로 성전에서 봉사하면서 평생 살기로 마음을 먹는다. 입타의 딸은 아버지께 한 가지를 청한다. “그러고 나서 딸은 아버지에게 청하였다. ‘이 한 가지만 저에게 허락해 주십시오. 두 달 동안 말미를 주십시오. 동무들과 함께 길을 떠나 산으로 가서 처녀로 죽는 이 몸을 두고 곡을 하렵니다”(37). 옛날에는 시집을 가지 못한다는 사실, 특별히 아이를 낳지 못한다는 사실은 여자에게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후손을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축복으로 생각하였던 것이다. 입타는 두 달 후 딸이 돌아오자 딸을 성전에 바쳤다.
판관 12,1-7 입타와 에프라임 지파
“에프라임 사람들이 동원되었다. 그들은 차폰으로 건너가서 입타에게 말하였다. ‘너는 왜 암몬 자손들과 싸우러 건너갈 때에, 같이 가자고 우리를 부르지 않았느냐? 네 집을 너와 함께 불태워 버리겠다”(1).
에프라임 사람들은 판관 기드온에게 했던대로 압제자를 쫓아낸 입타에게도 시비를 걸어왔다(8,1). 여기서 에프라임 사람들은 입타의 승리와 온 길앗의 머리로서(11,11) 받는 그의 명성을 시기했다. 다시 말해 그들은 기드온의 경우에서와 같이 이스라엘 사회에서 주도권을 행사하고자하는 욕망에서 그에게 시비를 걸었던 것이다.
에프라임 사람들이 입타와 싸워 그가 길앗의 우두머리로 군림하지 못하도록 멸하겠다는 의미이다. 특히 '불'이란 말은 기드온의 막내 아들 요탐의 우화에서도 '싸움'의 의미로 사용되었으며(9,15), 성경 전체에서는 종종 '징계'의 의미로 사용되었다(1,8; 여수 6,24). 당시 에프라임 지파의 타락된 모습을 잘 드러내 주고 있다. 그들은 마치 대적을 진멸하려고 나서는 원정군인양 무리를 지어 먼 길을 행군해 왔을 뿐 아니라 입타에게 다짜고짜로 잔혹한 협박을 가하였던 것이다.
11장에서는 입타가 암몬 자손과 싸우기 전 에프라임 지파를 소집했다는 말이 없다. 그렇지만 이에 대해 에프라임 지파가 암몬과의 싸움에 소집통고를 받았으나 입타가 전군대의 지휘관이 되었으므로 이에 협조하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한다. 항상 이스라엘 모든 지파 가운데 주도권을 잡고자 했던 에프라임 지파의 성격으로 보아 이러한 해석은 어느 정도 근거가 있는 주장이다.
사실상 입타는 에프라임 사람들에게 이러한 변명을 할 필요가 없었다. 그 이유는 암몬 자손과의 싸움은 암몬 자손에게 가장 많은 피해를 받고 있던 요르단 동편 지파들에 의해 주도되어야 했으며, 반드시 입타가 에프라임 지파에게 도움을 호소하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입타는 에프라임 사람들의 잘못을 확실하게 지적해 주기 위해서 본절과 같이 말했던 것이다.
입타와 암몬족 간의 전쟁이 매우 치열했었음을 보여주는 말이다. 이처럼 입타는 여유있게 전쟁을 수행할 수가 없었다. 대신 그는 사력(死力)을 다해 싸워야만 했다. 따라서 그가 얻은 승리와 영예는 고된 싸움 끝에 얻는 정말로 값진 것이었다. 그런데도 입타는 겸손히 그 영광을 주님께로 돌렸다. 이는 손끝하나 움직이지 않고서도 입타의 영광을 시기한 에프라임 지파와는 좋은 대조를 이룬다.
입타는 그의 승리에 대한 근본 원인을 주님 주님께 돌림으로써 에프라임 사람들의 질투심이 주님께 대항하는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이 말은 입타가 그들의 입을 막는 최후의 진술로서 매우 적절했다. 아마도 길앗 사람들은 암몬족과의 전쟁이 끝난 직후 제각기 고향으로 흩어졌을 것이다(11,32-34). 따라서 입타가 에프라임 지파의 도전을 응징하기 위해서는 다시금 그들을 소집하는 일이 필요하였을 것이다. 입타는 길앗 사람들을 모두 모아 에프라임 사람들과 싸웠다. 입타는 에프라임과의 전투에서 승리하였고, 응징의 태도를 보였다. “그리고 길앗인들은 에프라임으로 가는 요르단 건널목들을 점령하였다. 도망가는 에프라임인들이 ‘강을 건너게 해 주시오.’ 하면, 길앗 사람들은 그에게 “너는 에프라임인이냐?’ 하고 물었다. 그가 ‘아니요.’ 하고 대답하면, 그에게 ‘쉬뽈렛’ 하고 말해 봐.’하였다. 그 사람이 제대로 발음하지 못하여 ‘시뽈렛’이라고 하면, 그를 붙들어 그 요르단 건널목에서 죽였다. 이렇게 하여 그때에 에프라임에서 사만 이천 명이 죽었다”(5-6).
'쉬뽈레'은 '시나이' 또는 '곡식 이삭'을 의미한다. 여기서는 요르단 강의 여울목에서 발생된 사건과 관련이 있으므로 '시나이'란 의미로 사용되었을 것이다. 이에 해당하는 원어 '시뽈렛'은 특정한 의미가 없다. 혹자는 이것이 '무거운 짐'을 뜻할 것으로 추정하기도 하나 분명치 않다. 여기서는 단지 에프라임 사람들이 시나이의 의미인 쉬뽈렛'을 발음할 때 '쉬'을 발음하지 못하고 '시'으로 발음한 것일 뿐이다. 이와 같은 동일어에 대한 발음상의 차이는 이스라엘의 경우에서 뿐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도 발견된다. 이것은 각 지방의 특징적인 발음이 전통적으로 굳어졌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우리 나라에서도 표준말 '의'가 어떤지방에서는 '어'로, 또 어떤 지방에서는 '으이'로 발음되어지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요르단 나루턱에서 이 정도의 에프라임 사람들이 죽임을 당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흘렀을 것이며 여러 차례의 간헐적(間歇的)인 혈전도 있었을 것이다. 한편 이스라엘의 이집트 탈출 당시 첫번째 인구 조사에서 에프라임 지파의 장정 수는 45,000명이었다(민수 1,33). 그리고 2차 조사에서는 그보다 줄어든 32,500명이었다(민수 26,37). 따라서 그 이후부터 입타 당시까지 300여년이 흐르는 동안(11,26) 각 지파마다 인구가 많이 증가했을 것을 충분히 감안하더라도 에프라임의 장정 42,000명이 한꺼번에 죽임을 당했다는 것은 에프라임 지파에 있어서는 거의 전멸이 되었던 것이다. 입타는 6년 동안 이스라엘 판관으로 일하다가 길앗에 있는 자기 성읍에 묻혔다.
퐌관 12,8-10 판관 입찬
“그 뒤로 베들레헴 출신 입찬이 이스라엘의 판관으로 일하였다. 그에게는 아들 서른 명과 딸 서른 명이 있었는데, 딸들도 일가 밖으로 시집보내고 며느리들도 일가 밖에서 데려왔다. 그는 일곱 해 동안 이스라엘의 판관으로 일하였다”(8-9).
베들레헴이라는 지명은 유다 지파의 베들레헴과 즈불론 지파의 베들레헴이 있으므로(여호 19,5) 어떤 지파의 성읍을 가리키는지 분명치 않다.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는 본절의 베들레헴을 유다 지파의 베들레헴으로 주장하지만 특별한 근거가 없다. 일반적으로 유다 지파의 베들레헴은 '유다 베들레헴‘(17,9) 또는 '베들레헴 에프라타'(미카 5,1)로 불리웠다. 그리고 이스라엘 판관 대부분은 북부 지파의 출신들이었다. 이로 미루어 보아 베들레헴은 즈불론 지파에 속한 베들레헴으로 추정된다. 이곳은 므깃도에서 약 18km정도 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입찬은 입타의 경우와는 대조적으로(11,34) 기드온이나(8,30-31) 야이르와 같이(10,4) 자녀를 많이 두었다. 이것은 입찬이 누리는 부와 권세를 상징해 준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자식을 주님께서 주신 기업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시편 127,3). 입찬은 이스라엘의 판관으로 7년간 일하다가 베들레헴에서 죽었다.
판관 12,11-12 판관 엘론
“그 뒤로 즈불룬 사람 엘론이 이스라엘의 판관으로 일하였다. 그는 열 해 동안 이스라엘의 판관으로 일하였다”(11). 즈불룬 사람 엘론에 대한 기록은 판관들의 사적(事蹟) 중 가장 간단하다. 아마 판관 입타 이후에서 판관 압돈까지(13절) 이스라엘에는 특별히 큰 대적이 없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러한 때에도 판관들은 이스라엘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했으며, 그 때문에 이스라엘 사회에서 야훼 종교가 계속적으로 유지되었던 것 같다.
판관 12,13-15 판관 압돈
“그 뒤로 피르아톤 사람 힐렐의 아들 압돈이 이스라엘의 판관으로 일하였다. 그에게는 아들 마흔 명과 손자 서른 명이 있었는데, 그들은 저마다 나귀를 타고 다녔다. 그는 여덟 해 동안 이스라엘의 판관으로 일하였다”(13-14). 피르아톤은 스켐 남서쪽 약 12킬로미터 지점에 있던 곳이다. 이곳은 에프라임 지파의 땅 중 아말렉 산지에 위치하고 있다. 압돈이 판관으로서 누린 부와 권위는 '아들 사십과 손자 삼십' 그리고 '어린 나귀 칠십 필'이란 내용 속에 잘 암시되어 있다. 왜냐하면 어린 나귀를 탄다는 것은 이스라엘 사회에서 높은 지위와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판관 13,1-24 삼손이 태어나다
판관 13-16장은 삼손의 행적을 전한다. 삼손의 힘과 여자에 대한 그의 나약함이 대비된다. 대중적이면서 흥미로운 이 이야기에는 이스라엘의 적 필리스티아인들에 대한 반어와 풍자도 들어있다. 또한 종교적인 면도 잘 드러나 있다. 삼손의 힘은 하느님에게서 주어진 것이며, 그의 탄생 자체가 하느님의 선물인 것이다.
“그때에 초르아 출신으로 단 씨족에 속한 사람이 하나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마노아였다. 그의 아내는 임신할 수 없는 몸이어서 자식을 낳지 못하였다. 그런데 주님의 천사가 그 여자에게 나타나서 말하였다. “보라, 너는 임신할 수 없는 몸이어서 자식을 낳지 못하였지만, 이제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다”(2-3).
이스라엘 백성들이 주님 앞에서 눈에 거슬리는 악한 일을 하였다. 주님께서 가장 가증히 여기는 우상 숭배 죄를 범했음에 분명하다. 일찍이 주님께서는 그 같은 죄에 대하여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 사대까지'(탈출 20,5)에게 징벌하리라고 경고하셨다. 필리스티아이 일시적으로 이스라엘을 괴롭혔던 것은 이미 이전에도 있던 일이다(3,31; 10,7). 그러나 주님께서 이스라엘을 필리스티아의 손에 붙이시사 본격적으로 고통당하게 하신 것은 이때부터이다. 한편 필리스티아인은 지중해를 중심으로 해적 생활과 중계 무역을 하던 사람들이다. 더욱이 이들은 사람을 잡아 주로 이집트에 노예로 팔기도 했던 악랄한 집단이었다. 그러다가 점차 이들은 크레테(Crete)와 에게해의 섬들로부터 남부 필리스티아 해안 지대로 이주해 와서는 '가나안의 후기 원주민'으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따라서 이러한 필리스티아 사람들이 이스라엘을 압제한 40년 동안 이스라엘은 다른 여느 때보다 더 심한 고통을 받았을 것이다. 한편 필리스티아가 이스라엘을 압제한 6년 기간은 정확히 언제부터 어느 때까지를 가리키는지 알 수 없다. 왜냐하면 삼손이 태어나기 이전부터 이미 이스라엘은 필리스티아로부터 괴롭힘 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5절). 그리고 필리스티아 치하에서 삼손이 판관으로 활동한 기간은 불과 20년 밖에 안 되며(15,20) 삼손 이후에도 필리스티아은 끊임없이 이스라엘을 괴롭혔기 때문이다(1사무 4장; 17,1-5 2사무 5,17-25). 그러나 사무엘의 통치 말엽 경에 필리스티아의 압제가 일시 소강 상태를 이루었던 점으로 보아 이때까지의 기간을 대략40년으로 볼 수 있다. 아무튼 이후 이스라엘의 왕정 시대에도 필리스티아는 계속적으로 이스라엘을 괴롭혔는데 다윗 왕이 필리스티아를 정복함으로서(2사무 8,1) 마침내 필리스티아의 압제는 끝이 난다.
초아르는 단 자파에 속한 지역이다. 그러나 단인들은 북쪽으로 이주한 다음에는(판관 17-18) 유다 지파의 영토에 속하게 된다(여호 15,33). 본문에는 마노아와 그의 아내가 늙었다는 언급은 없다. 다만 3절에 의거할 때 마노아의 아내는 처음부터 불임(不姙)여성이었던 것 같다. 따라서 마노아 부부는 일찍부터 자녀를 생산하는 것에 대한 소망을 단념하였을 것이다. 또한 그들은 자식이 없었으므로 큰 수치와 슬픔 가운데 살았을 것이다(1사무 1,5). 그러나 그러한 때 주님께서는 초자연적 힘으로 마노아 아내의 태(胎)를 열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판관 시대에는 주로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 주님의 뜻을 전달했지만(2,1-5; 6,11-24) 예언자가 나타날 때도 있었다(4,4; 6,8). 이러한 현상은 판관시대가 신현현(theophany) 시대에서 예언자 시대로 넘어가는 과도기적인 상태에 놓여 있음을 보여 준다. 그러나 왕정 시대를 지나면서부터는 주님께서 주로 예언자들을 통하여 당신의 뜻을 전달했는 바 예언자들은 '주님의 천사'로서의 역할을 담당했다.
“이제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다” 이러한 수태 고지(受胎告知)는 삼손의 경우 외에 성경에서 4 번 더 있었다. 곧 그것은 아브라함과 사라(창세 17,19), 한나(1사무1,17), 엘리사벳(루카 1,13),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루카 1,31)에게 주어졌다. 여기서 우리는 주님의 천사를 통한 수태 고지는 구속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사건들과 연관되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즉 주님께서는 이러한 수태 고지를 통해 당신이 몸소 장차 태어날 아이의 출생을 관장하시며, 특별히 그 아이를 주님의 종으로 사용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하고 계시는 것이다.
“네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기의 머리에 면도칼을 대어서는 안 된다. 그 아이는 모태에서부터 이미 하느님께 바쳐진 나지르인이 될 것이다. 그가 이스라엘을 필리스티아인들의 손에서 구원해 내기 시작할 것이다”(5).
마노아의 아내는 나지르인이 아니다. 다만 그녀에게서 태어날 삼손만 나지르인이다(5절). 그런데도 그녀에게 삼손에게 요구되는 것과 꼭 같은 규례가 요구된 것은 태아에게 미칠 영향력을 고려해서이다. 또한 그녀 역시 주님의 구속(救贖) 계획을 이루는 한 도구로 성별되었음을 각성시키기 위함이다. 나지르인은 머리를 자르지 않고,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 않으며, 부정한 것을 먹어서는 안된다.
포도주와 독주는 모든 '술'을 대표한 용어이다. 그러나 굳이 구별하자만 '포도주'에 해당하는 '야인’은 발효된 포도즙을 가리키는 상용어이다(레위 10,9; 이사 22,13). 그리고 '독주'에 해당하는 '쉐칼'은 과실주나 곡주(穀酒)는 물론사람을 취하게 하는 도수 높은 술을 의미한다. 부정한 것이란 주님께서 이스라엘 벡성에게 먹지도 만지지도 못하게 규정하신 부정한 짐승(레 11장)이나 시체 등을 가리킨다. 따라서 나지르인 역시 이러한 부정한 것들을 접하지 못하도록 엄히 규제되는 것은 당연한 조처였다(민수 6장).
어떤 사람이 일정 기간 동안 나지르인으로 지내려면 그 기간 동안 머리를 깎을 수 없었다(민수 6,5). 그러나 그가 다시금 일반인의 신분으로 되돌아갔을 때에는 머리를 깎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와 달리 태중에서부터 나지르인으로 구별된 자는 일평생 동안 머리털을 밀 수 없었는데 그는 죽을 때까지 '영원한 나지르인'으로 지내야 했기 때문이다. 삼손은 죽는 날까지 하느님께 바쳐질 '영원한 나지르인'이 될 것이다. 삼손 외에도 요한(루카 1,13-17)이 더 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필리스티아을 완전히 물리친 것은 다윗 왕이 필리스티아의 모성(母城) 메텍 암마를 쳐서 빼앗았을 때에야 비로소 이루어졌다(2사무 8,1). 따라서 삼손의 등장은 이스라엘이 필리스티아으로부터 완전히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의 서막에 불과했다. 한편 필리스티아가 이스라엘을 압제한 기간인 40년의 마지막은 다윗 때가 아니라 사무엘 때였다(1사무 7,12-14).
마노아 아내는 남편 마노아에게 달려가 주님의 천사가 알려준 수태고지에 대해 말하였다. 마노아는 주님께 기도하였다. “주님, 외람된 말씀입니다만, 당신께서 보내신 하느님의 사람이 저희에게 다시 와서, 태어날 아이에게 저희가 어떻게 해야 할지를 가르치게 해 주십시오”(8). 마노아의 말을 들으신 하느님은 다시 주님의 천사를 보내어 마노아의 궁금증을 풀게 하였다. 마노아는 주님의 천사를 만나고도 그가 주님의 천사라는 사실을 몰랐다. 그래서 “마노아가 다시 주님의 천사에게, ‘당신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그래야 당신의 말씀이 이루어지면, 저희가 당신을 공경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그러나 주님의 천사는, ‘내 이름은 무엇 때문에 물어보느냐? 그것은 신비한 것이다.’ 하고 대답하였다”(17-18).
마노아가 자기 앞에 서있는 사람의 신분을 알고 싶어 그의 이름을 물어보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말은 마노아가 주님의 천사가 지닌 신분을 물은 것이 아니라 단순히 그의 이름만을 물은 것이다. 즉 마노아는 아직까지 주님의 천사를 예언자 정도로 생각하여 그의 예언이 이루어질 때 그를 찾을 수 있거나 그에게 예물을 드리고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 가운데 빛나게 하기 위해서 이름을 물었을 뿐이다.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 이름은 곧 그 대상의 본질이나 특성을 드러내 주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런데 주님의 천사는 이름을 '신비'라고 대답했다. 여기서 '신비'에 해당하는 '필리'는 '신비자에 해당하는 '펠레'의 형용사형으로 '이해를 초월한' 또는 '놀라운'이란 의미이다. 이것은 인간이 도무지 생각할 수 없는 기이한 일을 행하시는 주님의 속성을 나타낸다. 그리고 이 용어는 구약에서 메시야 탄생 예언과 관련하여 메시야의 속성을 묘사하는 말로도 사용되었다(이사 9,6).
“그 여자는 아들을 낳고 이름을 삼손이라고 하였다”(24). 삼손은 ‘태양’을 뜻하는 히브리 말에서 나온 이름이다. 삼손의 고향 초르야에서 멀지 않은 곳에 ‘태양의 집’(태양신의 신전)을 뜻하는 벳 세메스 성읍이 있었다. 그래서 삼손이라는 이름이 고대 근동에서처럼 이 지방에서는 흔한 것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판관 14,1-19 삼손의 혼인하다
“삼손은 팀나로 내려갔다가 그곳에서 필리스티아 여자 하나를 보고서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있는 곳으로 올라가서 청하였다. “팀나에서 필리스티아 여자 하나를 보았습니다. 그러니 이제 그 여자를 제 아내로 맞아들여 주십시오”(1-2).
팀나는 본래 단 지파에게 할당된 기업이었으나(여호 19,34) 단 지파가 아모리 족에게 쫓겨난 이후부터 필리스티아에게 복속된 것 같다. 팀나는 해발 약 250m에 불과하나 삼손의 고향 초르아는 해발 약 350m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삼손이 자기 고향 땅에서 팀나로 간 것은 자연히 '내려간' 것일 수밖에 없다. 2절의 '올라와서'란 말 역시 이러한 고도(高度)의 차이를 반영한 표현으로 볼 수 있다.
삼손은 자신의 혼인 문제를 부모님과 상의했다. 나지르인으로 주님에 대한 신앙 가운데서 자란 삼손이 이처럼 자기의 결혼 문제를 두고 부모와 상의했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특히 이스라엘사회에서는 신부를 데려오기 위해서 결혼 지참금이 필요했다. 이 결혼 지참금은 신랑될 사람의 아버지의 손을 통해서 나와야 했으므로 그 당시 아들이 결혼 문제로 부모와 상의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한편 삼손이 필리스티아 땅 팀나를 자유스럽게 왕래할 수 있었으며 그곳의 처녀와 결혼까지 할 수 있었던 점으로 미루어 보아 당시 필리스티아가 이스라엘을 압제했으나 인간적인 교류를 막지는 않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삼손의 부모는 삼손이 필리스티아 여인과 결혼하는 것을 반대했다. 왜냐하면 이는 모세의 율법이 엄격히 금지하는 조항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과거 이스라엘의 선조들 역시 동족끼리의 결혼을 바람직하게 생각했으며 또 그렇게 시행하여 왔기 때문이다. 특히 삼손의 부모는 삼손이 나지르인이기에 이방 여인과 결혼하는 것을 더욱 반대했을 것이다.
삼손은 필리스티아 여인의 신앙 상태에 대해서는 아랑곳하지 않고 안목과 육신의 정욕을 충족시켜 줄 만한 그 여인의 외모에만 매료당하여 결혼을 고집하였던 것 같다. 이는 결혼의 심오한 의의를 무시하는 지극히 경솔한 행위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4절에 의거할 때 삼손이 이처럼 경박하게 행동한 데에는 그 나름대로의 목적이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것은 곧 그 여자를 통해 필리스티아을 칠 틈을 노리는 것이다.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이 일이 주님께서 하시는 것인 줄 몰랐다. 그분께서는 필리스티아인들을 치실 구실을 찾고 계셨던 것이다. 그때에는 필리스티아인들이 이스라엘을 지배하고 있었다”(4).
삼손은 필리스티아 여인과 결혼하여 필리스티아와 화친한 것처럼 위장해 그들을 칠 기회를 엿보고자 의도한 것 같다. 이러한 삼손의 의도는 이어지는 사건들을 통해 명백히 드러나고 있다(12,19절). 그런데 우리는 이 같은 본문의 사건을 통해 두 가지 사실을 깊이 생각해 볼 수 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초자연적 권능으로 필리스티아를 순식간에 진멸시킬 수 있으심에도 불구하고 허물 많은 삼손에게 그 일을 맡기셨다. 이는 당신의 뜻을 실행하는 일에 인간을 동참시키고자 하시는 놀라운 계획으로 말미암은 것이다(로마 13,6). 그러나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 할 수 없다. 필리스티아를 격퇴코자 한 목적은 주님께로부터 나온 계획이었으나 삼손이 굳이 이방 여인과 불순한 혼인을 하면서까지 그 일을 도모할 필요는 없었다. 결국 삼손은 자신이 사용했던 불순한 방법으로 말미암아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되었다(16,21).
사실 삼손이 필리스티아 여인과 결혼하고자 의도했던 바가 바람직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의도가 주님에게서 비롯되었다고 한 것은 상호 모순되어 보인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결국 잘못된 방법을 사용하여 선한 목적을 추구하는 분으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는 본 절을 잘 이해함으로써 해결될 수 있다. 즉 본 절은 앞에서 전개되는 이야기의 연속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본서 저자의 설명에 불과하다. 삼손이 필리스티아 여인과 결혼하고자 의도한 사실과 그것을 이용하여 필리스티아를 치고자 한 점 등을 순전히 삼손의 의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다만 주님께서는 그것을 이용하여 필리스티아를 치려 하셨던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저자는 삼손의 결혼 그 자체까지 주님으로부터 말미암은 것처럼 묘사했던 것이다.
구약 시대에는 필리스티아 지역에 사자가 자주 출몰했던 것 같다(1사무 17,34). 특히 삼손이 팀나의 포도원에서 사자를 만난 것은 그 사자가 포도원에 굴을 파고 사는 여우를 쫓고 있을 때일 것이다. 삼손이 백수(百獸)의 왕이라 할 만한 사자를 맨 손으로 찢어 죽인 사건은, 장차 필리스티아인들을 크게 패망시킬 것을 암시하는 전조(前兆)로 보인다. 삼손의 엄청난 힘은 태어날 때부터 자연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주님의 특별 은사로 주어진 것이다(13,25). 주님께서는 당신의 일을 수행할 일꾼들에게 각종 은사를 부여하시는데(1코린 12,4) 특별히 삼손에게는 어마어마한 완력을 허락하셨다.
삼손은 팀나에 가서 이방 여인을 자기의 아내로 맞이하려는 마음을 가졌다. 사자의 시체에 벌이 모여 들었다는 사실에 근거해 삼손은 팀나에 오래 동안 머물렀다고 추정할 수 있다. 즉 부패된 상태의 사자 시체에는 결코 집을 짓지 않는 것이 벌의 생리이다. 따라서 상당한 기간이 경과하여 가죽과 뼈가 바싹 마른 사자의 주검에 그 벌들이 집을 짓고 서식했을 것이다. 그리고 벌이 그곳에다 꿀을 모아 나르는 데에도 상당 시간이 요구되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삼손이 그 여인을 취하기 위해 팀나로 다시 간 것은 꽤 오랜 기간이 경과되었을 것이다. 삼손이 부모와 함께 처음 팀나로 내려 갔던 것(5절)은 약혼을 위한 것으로 추정되다. 따라서 이번에는 정식으로 아내로 맞아들이기 위해 다시 팀나로 내려갔을 것이다.
“삼손이 그들에게 말하였다. ‘먹는 자에게서 먹는 것이 나오고 힘센 자에게서 단것이 나왔다.’ 그들은 사흘이 지나도록 이 수수께끼를 풀지 못하였다”(14).
삼손의 아버지가 삼손의 결혼을 위해 팀나로 내려간 것은 그의 결혼식이 이스라엘의 풍습에 따른 것이 아니라 필리스티아의 풍습을 따른 것인 듯하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녀의 결혼을 위해 신랑의 부모가 신부의 부모에게 결혼 지참금을 지불한 후 대개 신부를 데려와서 결혼식을 올리기 때문이다.
필리스티아인들이 신부 집에 30명의 젊은 사람들을 청해 삼손의 친구가 되게 한 것을 가리킨다. 이것은 그들이 삼손을 경계해서라기 보다는 신랑된 삼손을 즐겁게 해주기 위한 것으로 이해된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신랑의 친구로 초대되어 7일간의 잔치에 참석했던 점으로 미루어 보아 신부측은 필리스티아에서 매우 영향력 있는 가문이었던 것 같다. 한편 삼손에게 이토록 많은 친구들이 제공된 것은 삼손이 필리스티아 땅에 자기 친구들을 데리고 오지 않았다는 것을 암시한다. 아마도 필리스티아 사람들은 삼손이 많은 친구들을 데리고 오게 되면 그들에게 골치 아픈 일이 발생할 것을 염려하여 미리 삼손에게 조치를 취했던 것 같다.
삼손은 혼인잔치를 준비하는 기간 중에 수수께끼를 내었다. 이는 연회의 흥을 더욱 돋우기 위해 제출된 '수수께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고대 근동 뿐 아니라 그리스에서는 연회 때 수수께끼를 제출하여 연회의 흥을 돋우는 풍습이 있었다. 삼손은 이제 이러한 관습을 이용하여 필리스티아을 칠 기회를 찾았던 듯하다. 필리스티아 사람들은 30명이 함께 머리를 짜내면 충분히 그 수수께끼를 풀 수 있으리라 확신했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삼손의 제안은 국가적인 자존심의 문제이므로 그들이 그 제안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삼손은 바로 이 점을 노려 수수께끼 게임을 제안했음이 분명하다.
삼손이 제출한 수수께끼의 내용은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한 것이기에, 필리스티아 청년들이 그 내용을 안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한편 삼손의 수수께끼는 일반적인 히브리 시(詩)의 형태로서 평행법에 의한 것이다. 즉 '먹는 자'와 '힘센 자'는 같은 것을 지칭하면서 동시에 서로의 내용을 보충하는 것이고, '먹는 것'과 '단것'도 같은 의미이면서 서로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밝혀 주고 있다. 따라서 이를 도표화해서 기호로 풀면 그 해답이 쉽게 드러나게 된다. 즉 다른 짐승을 잡아먹는 동물 중에서 강한 동물은 무엇이며, 먹는 식물(食物) 중에서 가장 단 음식은 무엇이냐는 문제였던 것이다(18절).
해석하기에 상당히 어려운 난해 구절이다. 왜냐하면 삼손이 아내의 간청에 못 이겨 그녀에게 수수께끼의 의미를 풀어 준 것이 제 7일이므로(17절) 본절에서 필리스티아 사람들이 삼손의 아내를 협박하여 그 수수께끼의 의미를 알아내고자 한 시점은 7일이 꽉찬 상태였다. 필리스티아 사람들은 매우 비겁하고 간교한 방법을 동원하여 삼손이 내놓은 수수께끼의 의미를 알고자 했다. 즉 필리스티아 여인의의 집을 멸망시키겠다는 필리스티아 사람들의 협박은 여자로서 도저히 견딜 수 없는 것이었다. 그들은 이런 여인의 약점을 이용할 뿐만 아니라 아내의 말에 약한 남자의 약점을 동시에 이용하고자 했다.
“그래서 삼손의 아내는 그의 곁에서 울며 졸랐다. ‘당신은 나를 미워하기만 하지, 사랑하지는 않아요. 그러니까 당신이 내 동포들에게 수수께끼를 내놓고도, 나에게 풀이해 주지 않았지요.’ 그러자 삼손이 말하였다. ‘이봐요, 내 아버지와 어머니께도 알려 드리지 않았는데, 어찌 당신이라고 알려 주겠소?”(16). ‘ ‘당신은 나를 미워하기만 하지, 사랑하지는 않아요’ 여기서 '미워하다'와 '사랑하지 아니하다'는 말은 똑같은 의미의 말을 긍정과 부정의 형식으로 되풀이 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는 말의 강도를 한층 더 높여 주는 강조 효과를 지닌다. 따라서 본절을 의역한다면 당신이 내게 수수께끼의 뜻을 알려 주지 않는 것으로 보아 '당신이 나를 무척 미워하고 있다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어요'가 된다. 이처럼 필리스티아 여인은 삼손이 수수께끼의 뜻을 알려 주지 않는 것이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증거라고 공박함으로써 삼손을 난처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결국 수수께끼의 답을 아내에게 가르쳐 준다. “무엇이 꿀보다 더 달며 무엇이 사자보다 더 강하랴?”(18)라는 답을 필리스티아 사람들이 말하였다.
삼손은 필리스티아인들이 수수께끼의 해석을 자기 아내의 입을 통해서 알게 되었음을 간파했다. 왜냐하면 그 수수께끼의 의미를 알고 있는 사람은 자신과 그의 아내 뿐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 동안 수수께끼릍 풀지 못했던 자들이 그의 아내에게 수수께끼의 의미를 알려 준 이후에 나타나 그 수수께끼를 풀이했기 때문이다. 이에 삼손은 그들의 간교한 술책을 비유로 비꼬았다. “그대들이 내 암송아지로 밭을 갈지 않았더라면 내 수수께끼의 답을 찾지 못하였을 것이오”(18).
'내 암송아지'란 분명 삼손이 자기의 아내를 비유적으로 일컬은 말이다. '암소'는 흔히 생식, 노동, 복종 등의 이미지로 부각된다(신명 28,2; 욥 21,10). 그리고 당시 히브리인들의 여성관에 의하면 여자는 마땅히 결혼하여 자녀를 낳고 집안 일을 잘 돌보며 남자에게 철저히 순종하여야 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삼손이 자기 아내를 '암송아지'로 비유한 것은 매우 자연스럽다 할 수 있다.
삼손은 아스클론으로 간다. '아스클론'은 필리스티아의 중요한 다섯 성읍 가운데 하나이다. 이곳은 팀나(1절) 남서쪽 그리고 가드(Gath) 서남쪽 해변가 곧 지중해에서 약 40Km정도 떨어진 지점에 위치하였으므로 필리스티아의 땅 중 가장 깊숙한 성읍이다. 따라서 삼손이 홀로 이곳까지 내려가서 서른 명을 죽이고 예복을 빼앗아 수수께끼를 푼 사람들에게 주었다.
삼손은 예복을 주고 나서 화가 난 상태가 되어 자기 아버지 집으로 올라가 버렸다. 그러자 삼손의 아내는 삼손과 사귀었던 30명(11절) 중 한 사람에게 다시 시집을 갔다. 즉 장인 되는 사람은 삼손이 화가 나서 자기의 고향으로 돌아간 것을 보고 다시 돌아오지 않으리라고 판단하여 자기 딸을 다른 사람에게 주었다. 이로 말미암아 삼손을 다시금 격분하였는데, 이는 곧 삼손이 재차 필리스티아를 칠 빌미로 작용하였다(15,3-5절).
판관 15,1-8 삼손이 필리스티아인들에게 복수하다
“얼마 뒤 밀 수확기에, 삼손은 새끼 염소 한 마리를 끌고 아내를 찾아가서 장인에게, ‘제 아내 방으로 들어가고 싶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장인은 들어가지 못하게 하면서, 그를 타일렀다. ‘나는 자네가 틀림없이 그 애를 미워한다고 생각하였네. 그래서 그 애를 자네 동료에게 주어 버렸네. 그 애보다는 동생이 더 예쁘지 않나? 동생을 대신 아내로 삼게나”(1-2).
필리스티아 지방의 밀 추수는 대개 양력 5월 경에 있지만 지역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다. 한편 이스라엘의 추수 시기는 크게 세 단계로 구분되는데 보리는 과월절(양력3,4월)에, 밀은 오순절(양력 5,6월)에, 그리고 무화과나, 포도, 올리브 등은 장막절(양력 9,10월)에 거두어 들인다. 그러므로 삼손이 다시 그의 아내와 살기 위해 아버지의 초르아 땅에서 팀나로 갔다. 그는 귀한 염소를 끌고 장인에게 간 것이다. 염소는 유목민들에게 있어서 귀한 재산이었다. 때문에 이는 화해의 예물이나, 약조물(約條物) 또는 처가에 찾아갈 때의 선물 등으로 곧잘 이용되었다(창세 38,17). 삼손이 그의 아내와 화해하고 다시 살기 위해 귀한 선물인 염소를 가지고 처가를 방문한 것을 볼 수 있다. 한편 이로 볼 때 삼손의 결혼은 사디카 결혼이었던 것 같다. 사디카 결혼이란 우리 나라의 데릴 사위제도와 비슷한 것으로, 고대 근동에서 유행되었던 가모장적(家母長的) 혼인의 한 형태이다. 삼손은 아내에 대한 연모의 정으로 과거 그녀와 동족들이 저지른 잘못(14,15-18)을 용서하고 아내와 더불어 새로운 삶을 살려한 것 같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계획과 호의(好意)는 곧 그의 장인에 의해 산산이 부수어지고 만다.
삼손의 장인이 삼손의 아내를 다른 사람에게 주었기 때문에 그 동생을 아내로 취할 것을 권고한다. 이러한 장인의 행동은 삼손의 급한 성격 때문에 임시 조치로 급하게 제시된 방안이거나, 아니면 삼손으로부터 다시 혼수감을 받기 위한 그의 탐욕에 기인한 잔꾀에 불과한 것이었다. 이로 인하여 삼손의 마음은 필리스티아 사람 전체에 대한 증오심으로 재차 불타게 된 것이다.
“그러고 나서 삼손은 밖으로 나가 여우 삼백 마리를 사로잡고 홰도 마련한 다음, 꼬리를 서로 비끄러매고서는 그 두 꼬리 사이에 홰를 하나씩 매달았다”(4). 삼손은 여우 300마리를 붙잡아 꼬리에 홰를 매달아 불을 지펴 곡식밭으로 보냈다. 여기서 '여우'로 번역된 '슈알'은 '승냥이'(jackal)를 가리키고 있음이 틀림없다. 왜냐하면 여우는 보통 집다으로 다니지 않고 단독으로 다니며, 곤충, 과일, 작은 동물들을 잡아먹는 반면 승냥이는 무리를 지어 다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단독 생활을 하는 여우를 300마리나 잡는다는 것은 예사로운 일이 아닌 것이다. 이것만 보더라도 삼손이 잡은 300마리 짐승은 승냥이임에 분명하다. 여기서 '홰'란 흡수력이 강한 나무 막대기에 기름을 듬뿍 묻혀서 불에 잘 타게끔 만들어 놓은 막대를 가리킨다. 그런데 전체 여우 수가 300마리였으니 여우 2마리씩을 연결한 후 한 개의 채를 꽂았다 해도 최소한 150개의 채가 필요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와같이 곡식단을 불사르는 방법은 고대 농경 사회에는 흔히 있던 보복 방법이었는데, 이러한 보복 행위는 그 지역의 한 해 경제를 송두리째 파괴하는 것으로 매우 치명적이다.
““누가 이 짓을 했느냐?” 하고 필리스티아인들이 묻자, 사람들이 “팀나 사람의 사위 삼손이오. 삼손의 아내를 그의 동료에게 주어 버렸기 때문이오.” 하고 대답하였다. 그리하여 필리스티아인들이 올라가서 그 여자와 아버지를 불태워 버렸다”(6).
팀나 주민은 물론 그밖의 다른 지역에 거하던 필리스티아인들을 모두 포함하는 말일 것이다. 왜냐하면 만약 팀나 주민들만이 삼손을 응징하려 들었다면 그들이 삼손의 장인을 가리켜 굳이 '팀나 사람'이라고 표현치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삼손의 보복 행위로 말미암아 한 해 수확물을 몽땅 소실(燒失)당한 필리스티아인들은 극도로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지만 필리스티아 사람들이 정작 삼손을 잡아 처벌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신 그의 처가 식구들을 처벌하는 것이 쉬웠으므로, 이에 그들은 삼손의 장인과 그의 아내를 잡아 불로 태워 죽였던 것이다.
아무튼 삼손의 아내와 장인은 자기 동족들의 손에 의해 이처럼 끔찍한 죽임을 당하였다. 특히 삼손의 아내는 필리스티아 청년들의 협박을 두려워하여 남편을 배신하고 동족의 편에 붙기까지 하였지만 결국 그 협박의 내용대로 죽임당하고 말았다. 삼손은 분노의 화신이 되어 다치는 대로 필리스티아인들을 쳐 주이고 유다 지파의 영역에 있는 매우 가파른 곳인 에탐 바위로 가서 그 바위틈에 머물렀다.
판관 15,9-20 삼손이 당나귀 턱뼈로 필리스티아인들을 쳐부수다
“필리스티아인들이 올라와서 유다에 진을 치고 르히를 습격하였다. 유다 사람들이 ‘어째서 우리에게 올라왔소?’ 하고 묻자, 그들은 ‘삼손을 묶어 그자가 우리에게 한 그대로 해 주려고 올라왔소.’ 하고 대답하였다”(9-10). 필리스티아 사람들은 삼손에게 당한 일(8절)에 대하여 보복하기 위하여 삼손이 숨어 있는 유다 지역을 칠 작정으로 르히에 진을 쳤다. 유다 사람들은 그들에게 왜 자신들에게 왔는지에 대해 묻는다. 우리는 필리스티아의 압제하에서 그들의 눈치만 살피며 삼손의 모험의 결과들을 두려워하는 비참한 유다인들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과거 칼렙을 필두로 하여 가나안 정착 초기에 보여준 유다 지파의 용맹성에 비해 볼 때(1장) 삼손을 묶어 자신들에게 넘기라는 말을 받아들이는 유다 지파의 모습은 가히 주님을 떠난 백성들이 갖는 전형적인 실태라고 볼 수 있다.
당시 필리스티아 군대는 약 1천명 정도였던 것 같다. 그런데 유다 백성들은 그보다 세 배나 더 많은 삼천 명이 동원되어 삼손을 잡으러 나섰다. 이는 당시 삼손의 힘이 어느 정도로 세었는지를 잘 시사해 준다. 한편 여기서 우리는 당시 유다 지파가 얼마나 노예적 근성에 사로잡혀 있었는가를 가히 짐작할 수있다. 만일 유다 사람들이 삼손과 힘을 합쳐 필리스티아에 대항했더라면 필리스티아으로부터 독립할수 있는 좋은 계기를 마련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오히려 삼손을 잡아 원수들에게 내어주는 어처구니 없는 짓을 범하고 만다. 이처럼 주님을 떠난 자들은 단지 미온적이고 소극적인 상태로 머물러 있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적극적으로 주님을 거스리는 배반 행위까지도 종종 범하게 된다.
당시 대부분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필리스티아의 압제를 받고 있긴 했으나 굳이 저항할 의사가 없었다. 그들은 현실 안주내지는 무사 안일(無事安逸)을 지향하여 주님께로부터 받은 제사장 나라로서의 위대한 사명을 망각해 버렸던 것이다(탈출 19,6). 이는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해서 진취적으로 나아가기 보다는 이집트에서의 종살이를 그리워했던 광야 여정의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과 흡사하다(탈출 16,2). 따라서 주님의 계약 백성으로서의 위치를 자각하고 노예적 굴종을 벗어 던지고자 했던 삼손의 궐기(蹶起)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는 오히려 성가신 만용 정도로 여겨졌던 것이다. 유다인들이 삼손을 다그치는 것도 곧 '왜 쓸데없이 부스럼을 긁어 상처를 크게 만드느냐'는 무사 안일적 힐난이었다.
“그들이 삼손에게 말하였다. ‘우리는 자네를 묶어 필리스티아인들의 손에 넘기려고 내려왔네.’ 삼손이 그들에게 ‘그러면 나를 때려죽이지 않겠다고 맹세해 주시오.’ 하고 말하였다”(12). 이처럼 이제 삼손이 동족들의 손에 묶임을 당해 이방 대적에게 넘기어지게 된 것은 가장 수치스러운 장면이다. 여기서 우리는 민족을 사랑하는 삼손의 위대한 정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는 비열한 유다 사람들의 태도에 대해서 분노하며 책망했을 법도 하다. 그러나 삼손은 오히려 그 마음을 필리스티아에게로 돌려 자신의 동족으로 하여금 그토록 비굴해지도록 만든 필리스티아에 대한 증오심을 더욱 불태웠다. 그래서 삼손은 동족의 손에 순순히 이끌리어 필리스티아인들에게 넘기어진 후 주님께서 주신 강한 힘으로 필리스티아인들을 쳐부수기로 마음먹고 이와 같은 맹세를 유다 사람들에게 촉구한 것이다.
그토록 엄청난 힘을 소유한 삼손은 마치 어린 양처럼 순순히 동족에게 포박되어 필리스티아 사람들 앞에까지 끌려 간다. 이는 곧 그가 대적할 대상이 동족이 아닌 필리스티아 사람들임을 분명히 자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필리스티아 사람들이 삼손이 결박된 채 오는 모습을 보고선 기뻐 어쩔 줄을 몰라 하였다. 즉 그들은 이제까지 겪어 본 중에 가장 힘센 사람이므로 어떻게 손 써 볼 수 없었던 삼손이 꽁꽁 묶여서 오는 모습을 보자 그의 주변으로 몰려 들며 환호성을 지른 것이다. “이렇게 하여 삼손이 르히까지 가자, 필리스티아인들이 소리를 지르며 그에게 마주 왔다. 그때에 주님의 영이 삼손에게 들이닥쳤다. 그러자 그의 팔을 동여맨 밧줄들이 불에 탄 아마포처럼 되었다. 그래서 그를 묶은 그 포승이 녹아내리듯 그의 손에서 떨어져 나갔다. 삼손은 싱싱한 당나귀 턱뼈 하나를 발견하고 손을 내밀어 그것을 잡아, 그 턱뼈로 천 명을 쳐 죽였다”(14-15).
여기서 '주님의 영'은 곧 성령을 가리킨다. 즉 원수 필리스티아 사람들이 포박된 삼손을 보고 승리의 환호성을 지를 때 삼손에게 성령의 권능이 임하였고, 포박된 줄은 불탄 아마포과 같이 끊어지고 만 것이다. 여기서 '싱싱한 당나귀 턱뻐'라는 것은 죽은 지 얼마 안 된 당나귀의 턱뼈를 가리킨다. 이것은 오래되고 마른 턱뼈보다 더 단단하여 부서지지 않으므로 당시의 위급한 상황에서 무기로 사용하기에는 안성 마춤이었다. 그 턱뼈로 천 명을 쳐 죽이는 피 튀기는 대학살이 행해졌음에도 불구하고 불과 단 한 줄로 요약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필리스티아 사람들이 포박된 삼손을 보고서 환호하며 뛰어오던 모습(14절)과 극적인 대조를 이룬다. 즉 승리의 환호성을 지르며 달려오던 대적들은 순식간에 고통의 절규를 부르짖으며 죽어갔던 것이다.
“삼손이 몹시 목말라 주님께 부르짖었다”(18) 이로 볼 때 삼손이 필리스티아 일천 명과 대항하여 싸울 때(15절)에 유다 사람들 중에는 아무도 도와주는 사람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삼손이 싸우는 동안 모두 도망가 버렸음이 분명하다. 그러기에 일천명과 상대하여 싸운 삼손은 이제 지치고 갈증이 나서 기진 맥진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이렇게 갈증으로 인하여 죽음 직전에 이른 삼손은, 자칫 교만해지기 쉬운 상황에서 오직 주님께 의지하는 자만이 참 삶을 얻는다는 진리를 더욱 뼈저리게 느꼈을 것이다.
“삼손은 필리스티아인들의 시대에 스무 해 동안 이스라엘의 판관으로 일하였다”(20). '르히'에서 필리스티아족을 격멸한 일로 인하여 비로소 이스라엘의 판관으로 정식 인정받은 삼손이 이후 20년 동안 판관으로서의 공적 활동을 하였다. 그러나 20년간은 필리스티아의 이스라엘 압제 기간 40년(13,1)의 절반 밖에 못 미치는 기간이므로 삼손이 필리스티아의 압제에서 이스라엘을 완전히 구원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