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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2일(목요일) 맑음. 오전 7시 30분, 예전처럼 식당에 세 사람이 모였다. 황 성규 옹, 권영국 씨, 그리고 필자. 어제 지낸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화제가 되었다. 여행을 마다하고 하루 동안에 4회 대국을 하는 하드코어 토너먼트에 참가했던 황옹께서는 성적이 별로 좋지 않았던 것 같다. 깊은 말씀은 없고 듣기만 하신다.
게티스버그 국립공원에 다녀온 권영국 씨는 남북전쟁 때 미국의 운명을 가른 게티스버그 전투에 대해서 심각하게 설명했다. 미국의 남북전쟁은 1861년부터 5년간 계속되었으며 북군의 승리로 끝났으나 전쟁 기간 중 60만 명이 사망하고 300만 명이 부상을 입었다고 기록되었다. 오늘의 미국을 창조하기 위한 걸림돌이 되는 잔재들을 여한 없이 불태워 버린 전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전쟁기간 중 가장 치열하고 미국 역사의 흐름을 바꾸어 놓은 전투가 바로 펜실베니아 주 게티스버그 전투였다고 한다. 1863년 7월 1일 게티스버그 공동묘지 언덕을 사이에 두고 메드 사령관이 이끄는 북군 9만 명과 리 사령관이 이끄는 남군 7만 5천 명이 대치했다. 대치한 지 3일째 되는 날, 남군은 2시간 동안 북군이 진을 치고 있는 언덕을 향하여 포격을 가하였다. 적진이 조용하자 남군의 리 장군은 보병 150명을 일렬 횡대로 전진시켰다. 그러나 북군의 집중 총격으로 이들은 삽시간에 전멸하고 말았다. 그러나 리 장군은 개의치 않고 계속해서 같은 방법으로 보병을 전진시켰다. 그러나 이 작전이 남군의 돌이킬 수 없는 패전이 되고 말았다.
결국 북군의 강력한 역습으로 후퇴하는 동안 7천 명의 전사자를 냈다. 그 이전까지는 남군이 여러 곳에서 연전연승하고 있던 상황이어서 이번 전투의 실패는 대단한 충격이었다. 남군의 전의를 상실 시키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때부터 승기는 북군에게 돌아갔다. 종전을 재촉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같은 해 11월 16대 대통령 에이브라함 링컨 대통령은 이곳을 찾아 전사자 추모식에서 그 유명한 게티스버그 연설을 했다.
that this nation, under God, shall have a new birth of freedom – and that Government 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 shall not perish from the earth." "(최후의 봉사수단으로 이루어진 고귀한 죽음에 대하여) 우리는 그 죽음이 결코 헛된 죽음이 아님을 천명하는 바이며, 신의 가호 아래 이 나라는 자유의 새로운 탄생을 이룩할 것이다. 또한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는 이 땅에서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필자의 필라델피아 헌법기념관 탐방에 대해서는 식사가 끝난 후에도 이야기가 계속되었다. 두 사람 모두 놀라워 했다. 미국에 몇 십년 살았어도 헌법기념관 이야기는 처음 들어 본다고 했다. 오전 9시 30분, 대국장 안은 벌써 많은 인파로 법석이고 있었다. 여기저기 바둑판이 벌어져 있다. 크고 작은 사람, 뚱뚱이와 홀쭉이, 동양인과 서양인, 늙은이와 젊은이, 마치 인종 시장 같다. 대회 진행자인 피터 박사가 오늘의 일정, 공지사항과 주의 사항을 설명하고 곧 이어 대국자와 대국 장소를 알리는 영상물이 무대 화면에 천천히 떠올랐다. <== 중반을 넘긴 대국장 전경. 대국개시 후 1시간이 지나면 경기장은 산만해진다. > 이번 상대도 챙 후(Zhang Hugh) 중국계다. 이 친구는 참가자 명단에도 없는 인물이다. 기회를 엿보다 마감 막판에 신청을 하였음에 틀림없다. 나중에 확인된 사실이지만, 대부분의 중국계가 대회에 참가신청을 내면서 자기의 실력을 한 단계 아래로 신고하기 일쑤라고 한다. 우승이 목표이기 때문이다. 미국 바둑 협회도 자진신고에 대해서는 관대하다. 필자의 집흑으로 시작된 대국은 초반부터 유리하게 끌어가다 중반에 덜컥수로 비세였으나 상대방의 실수로 종반 역전승을 거두었다. 반면 9집을 남겨 덤 7집 반을 공제하고 1집반 승. 아슬아슬한 승리였다. 어제의 헌법기념관 관광이 기분 전환의 계기가 된 것 같다. 시종일관 차분한 기분으로 바둑을 둘 수 있었다. <== 김명완 사범의 다면기. 8 인을 상대로 한 다면기는 매일 오후 계속되었다. 오후에는 김명완 사범이 지도기를 두어 주었다. 주위에는 즉시 많은 관전자들이 모여 들었다. 프로들이 아마추어들에게 베풀어 줄 수 있는 호의는 지도기이다. 프로를 만나 친절을 베풀면 즉시 돌아오는 반대급부가 지도기임을 여러 번 경험한 바 있다. 치수는4점, 3점으로도 가능하나 예의(?)를 차려 4점. 결과는 필자 승. 국후 간단한 복기와 함께 급소를 빨리 찾아내는 능력이 있다는 과분한 평가를 들었다. 김사범이 자리를 뜬 후 노랑머리 아마 4단들을 상대로 바둑을 두었다. 지도기를 두는 심정으로. 대부분의 서양인들은 정석에 어둡다. 종국 후 정석 풀이를 해 주면 "땡큐! 땡큐!"를 연발한다. 그러다 보면 금방 친구가 된다. 이른 저녁, 일정을 마친 권영국 씨가 저녁식사에 초대했다. 미국인 친구가 일러준다. 캠퍼스에서 2마일 정도 벗어나면 훌륭한 일본 식당이 있다는 것이다. 미국인이 어제 경험한 바에 의하면 값도 싸고 음식 맛이 일품이고 분위기도 아주 좋았다고 했다. 서양인들은 자기가 경험한 동양 풍물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는 다소 과장된 표현을 곧잘 쓴다. "원더풀" 대신 "판타스틱"이다. 상대방의 눈동자를 빨아들일 듯이 응시하며 "판"이란 바람 섞인 발음을 강하게 할 때면 이 친구가 얼마나 자기가 경험한 사실에 매료되어 있는가를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친구는 한 술 더 뜬다. "언 빌리버블(Unbelievable )"이다. 필자가 물었다. 누구와 같이 갔느냐고. 여자 친구와 같이 갔다고 한다. 그러면 그렇지! 이 친구, 여자 친구로부터 키스 세례라도 받은 모양이다. 흥겨운 와인 한잔에 흐릿한 조명도 달빛처럼 보이고 여자친구의 얼굴이 선녀처럼 보이고 스테인리스 수저가 금도끼로 보이고. 아무리 찾아도 황성규 옹도 안 보이고, 김사범도 안 보인다. 권영국 씨와 둘이만 가기로 했다. 권영국 씨가 차로 안내한다. 벤츠350 에스 등급이다. 좋은 차를 타고 캠퍼스를 벗어나니 기분이 한결 가벼워 진다. 상가지역 한 모퉁이에 보이는 일본 음식점은 대부분의 일본 음식점이 그렇듯이 입구가 단조롭고 창살문이 작고 아담해 보인다. 안으로 들어서니 조명이 침침하고 어딘가 일본집 분위기와 달라 보인다. 이 집이 일본식과 중국식의 혼합 식당이라는 것을 메뉴를 보고 알았다. 작은 마을에 일본 식당 따로, 중국 식당 따로 하다 보면 제한된 손님 수에 채산이 맞지 않을 것 같아 한 곳에서 독점적으로 하는 것 같다. 와인 한 병에 생선회를 곁들인 새우튀김 세트 메뉴를 시켜 즐거운 식사를 했다. 여자 친구와 같이 왔던 미국 친구는 어디쯤 앉았었을까? 불빛이 희미한 저쪽 구석쯤에 앉았었겠지. 8월 3일(금요일) 맑음. 오전 10시 넘어 시작된 프로암 오픈전 5일째 되는 날이다. 모든 대국자들이 대국에 열중하고 있다. 벽에는 그 동안의 대전 성적표가 옆으로 길게 붙여져 있다. 오늘의 상대도 역시 중국계 하이틴이다. 아마 5단 정도의 실력도 서양인들 중에는 드물다. 중국계와 대국하는 기회가 많아 질 수밖에 없다. 우세하던 판을 속기로 두다 덜컥수로 망쳐 버리고 말았다. 요행인가? 일찍 끝난 덕분에 어느 곳 취재를 할까 망설이고 있는데 40대 중반 여성이 다가오며 일본말로 말을 걸어온다. 일본사람으로 잘 못 본 모양이다. 자기의 이름표를 보이며 한 수 하자는 의사 표시다. 기력은 아마 4단. 필자의 이름표를 눈여겨보았던 모양이다. 한국 사람이라고 소개하고 곧 대국에 들어갔다. 여러 가지 질문을 하였으나 말이 안 통한다. 많은 대화를 나누고 싶은데 말이 통하지 않으니 안타까울 뿐이다. 예리한 착점이 필자를 긴장시키기도 하였으나 역시 한 수 아래다. 여유 있게 판을 마무리 했다. 한 판을 두고 나서 깍듯이 머리 숙여 인사 하고는 복기를 청한다. 역시 절도 있는 일본 여자임을 새삼 느끼게 한다. 한 판 더 두기를 청했다. 순순히 응한다. 이번에도 역시 필자의 승리다.
영어로 초반 포석단계의 완급을 지적하며 설명을 하였다. 이해를 한다는 듯이 머리를 까딱이며 "하이, 하이!" 한다. 그 이후로는 멀리서 보아도 머리 숙여 깍듯이 인사한다. 말문만 통하면 좋은 기회인데…쩝! ^^;; 권영국 씨와 점심 식사를 마치고 나오다 펑윈(豊雲) 9단과 쉐펜린 초단을 만났다. 한국에서 왔음을 소개하고 어제 두 사람의 대국을 감명 깊게 관전했다고 말문을 열자 수줍은 듯 웃는다. 이들은 중국계 여자 프로들로 대회 기간 동안 아름다운 미모로 선망의 대상이 되었던 여성들이다. 실제 나이는 펑윈 9단은 41세, 쉐펜린은 34세이나 곱게 한 화장 때문인가? 10년씩은 더 젊어 보인다. 어제까지만 해도 두 사람은 바둑판을 사이에 두고 4시간 동안 혈전을 벌였었다. 펑윈 9단의 승리로 끝나고 두 사람은 곧 이어 복기에 들어가는 장면을 카메라에 담았었다. <== 펑윈 9단과 쉐펜린 초단을 만나 기념촬영을 요청하자 기꺼이 응해 준다. 맨오른쪽이 필자.> 펑윈 9단은 2~3년 전만해도 세계 여성 프로 중 루나웨이 다음의 2인자였다. 국제 여성 기전에서 최종 결승전은 흔히 루나웨이와 펑윈의 대결로 이어지곤 했다. 1966년 생으로 중국 하남성에서 출생하여 1979년 13세에 프로가 되고, 1982년 16세에 국가대표팀에 발탁, 그 다음 해인 1983년에는 중국 여자바둑대회 우승자가 되었다. 1997년에는 루나웨이에 이어 두번째로 세계 여자 프로 9단이 되었다. 현재는 뉴저지에서 펑윈 바둑학교를 운영하고 있다. 매년 미국바둑협회 초청 케이스로 참가하여 지도기를 두는 한편 미주 잉 마스터즈 토너먼트에는 선수로 참가하고 있다. 이번에도 남자 프로들을 제치고 결승까지 올라 오늘 저녁 6시 부터 장밍주 프로 7단과 결승 대국을 두도록 되어 있다. 2007 미주 잉 마스터즈 토너먼트의 최종 결승전은 오후 6시 부터 다른 사람의 출입이 금지된 특별대국실에서 펑윈 여성 프로 9단과 장 밍주 남자 프로 7단 사이에 이루어졌다. 두 사람 다 뭇 강호들을 물리치고 최종 결승에 입성한 기사들이기에 우열을 가늠하기 어렵다. 주최측인 잉창기 바둑교육재단에서는 매년 성적이 우수한 16명의 기사들을 초청하여 예선전을 치른다. 예선전을 통과한 8명과 전년도 시드 8명이 4일 동안 매일 1국씩 두어 준준결승과 준결승을 거쳐 결승 진출자를 선발한다. 이들 두 사람이 이 과정을 거쳐 온 사람들이다. 대국시간은 각자 90 분, 초 읽기 1분 5회, 덤 8집, 우승상금 미화 일만 불. 규칙은 잉씨 룰 적용. 펑윈 9단의 집흑으로 시작된 대국은 두터운 흑세 속에 백이 때이르게 침입하여 시종일관 흑의 추격과 백의 탈출로 이어졌다. 추격전은 아슬아슬하여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손에 땀을 쥐게 하는 대목이 많았다. 그러나 흑이 과욕을 부려 끝까지 백을 잡으러 가다가 흑진이 침해 당하는 결과가 되어 역전패하고 말았다. 반면으로 6집을 남겼으나 덤 8집 공제 후 2집 부족. 유리한 선에서 타협하여 흑집을 지켰으면 충분히 이길 수 있는 바둑이었는데, 과욕이 바둑을 망치고 말았다. 두 사람 모두 시간에 쫓겨 계가할 시간이 없었던 것 같다. 낮에 잠시 면담한 인연 때문인가? 내심 펑윈 9단의 승리를 염원하고 있던 필자는 아쉬움을 달래는 데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어느새 그녀의 팬이 되어 있었다. 별도로 준비된 공개 홀에서는 김명완 8단이 교포2세 데이빗의 도움을 받으며 공개해설을 진행했다. 300석 정도되는 공개 홀에서 진행하는 김사범의 해설은 뒷면에 마련한 프로젝트 화면을 통하여 크게 상영되었다. 미국 제일의 바둑 축제에서 가장 큰 관심의 초점국을 한국인이 공개해설한다는 사실에 대하여 굉장한 자부심이 느껴졌다. 시작 전에 사회자가 김사범이 한국기원에서 온 프로라고 설명한 바 있으나, 여기저기 옮겨다니며 옆 사람에게 해설자가 한국 프로임을 거듭 설명하고 다녔다. 그때마다 그들도 시선을 맞추며 고개를 끄덕여 준다. 김사범이 대국 진행에 따라 대세 판단, 완착과 실수, 중복수를 날카롭게 지적할 때마다 관중석에서는 가는 신음 소리가 들렸다. 불꽃 튀는 대국 진행에 따라 공개해설장의 열기도 점점 더해져 여름밤이 깊어가는 줄도 몰랐다. ( 10회에 계속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