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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시간 후미에 이어진….
"어, 이집트를 떠날 때 이집트 사람들이 줬어." 그것이 문학적으로 여기에서 준비되어있다. 라고 설명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몇가지 생각해 볼것들이 있습니다.
첫번째로 지금까지 아홉번째 어둠까지,
이집트의 강이 핏물로 변하는 첫째 재앙에서 아홉째 재앙까지 하느님은 파라오와 또 이집트의 신들과 대결 하고 있습니다.
이 마지막 열번째 재앙에서는 그 이집트의 모든 신들과 한꺼번에 싸우고 있는 야훼의 모습을 우리가 행간에서 읽어야 합니다.
왜냐? 신과 인간의 관계는,
인간은 신을 위해 제사를 드리고 신은 인간을 보호해 줘야 합니다.
그런데 그 보호받는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예나 지금이나 그 사람의 재산입니다.
그럼 고대인들에게 재산 목록 1호는 뭘까요? 그것은 아이들입니다.
아이들은 자신들의 군대이기도 하고 노동력이기도 하고 ...
오늘날 신자분들에게도 가장 소중한 존재는 누굽니까?
가끔 어떤분이 남편이라는 말씀을 하셔서..신부님께서도 몇분 그런분들을 만나셨다고 합니다.
따라서 신들은 인간을 보호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에게도 하느님이 땅만 약속하신게 아니라 자손들을 약속하십니다.(자손들이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알 처럼, 땅의 먼지처럼 많게..)
그런데 이집트의 신들이 이집트인들의 그 맏이들을 지켜내지 못한 것은 하느님의 승리!!
창세기 49,3 : " 맏아들"
º 르우벤아, 너는 나의 맏아들, 나의 힘, 내 정력의 첫 열매. 너는 영광이 넘치고 힘이 넘친다.
신명 21,15-17
맏아들의 권리를 법적해석을 통해 설명
- 그 장자 맏이가 갖는 특별함을 설명합니다. 야곱의 열두 아들 중에 르우벤이 첫째 아들입니다.
신명 21,15-17
이런 법규가 있었다는 것, 이런 규정이 이 법전에 나와 있다는 것은,
실제로 그런일이 있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비슷한 얘기가 야곱이 아내가 둘 있었는데, 라헬은 좋아했고 라반의 계략에 의해서 결혼한 레아는 정략적인 결혼이기 때문에 ..ㅜ
하지만 나중에 그 열두 아들에게서는 그 목록이 다 들어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곱은 라헬의 아들 요셉을 편애합니다.
그와 같은 이야기 안에 사회적인 현상이 들어가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우리나라 조선 왕조에서도 자주 볼수 있는 그런...)
시편 135,8 ; 136,10 에서는 야훼를 기억하면서
"이집트의 맏배들을 치신 분"으로 야훼를 찬양하고 있고, 더 재밌는 것은 히브리서에서도 보면은
히브 11,28
믿음으로써, 모세는 파스카 축제를 지내고 피를 뿌려,
맏아들과 맏배의 파괴자가
그들을 건드리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라고 이야기하는데 다른 아홉가지 재앙에 관해서는 큰 관심이 없고 열번째 재앙에 관해서만 관심이 있습니다.
탈출기 12,1-28절은,
파스카와 무교절에 대한 제의적인 명령이었는데, 전체 이야기에서 보면은 그런 파스카와 무교절에 대한 제의적인 명령은 이야기의 흐름을 끊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함께 읽는 탈출 12,29부터 이야기기가 본래의 흐름으로 돌아와 있고, 모세가 파라오에게 경고한11장 4절이하의 내용이 맏이의 죽음이 실현됩니다.
맏이에 대해서는 이미 탈출4장부터 예고되었고, 11장에서 예고된 대로 이집트인 모든 계층에 대한 재앙으로서 이집트의 맏이들이 죽게됩니다.
그 전까지의 재앙에서는 상류 계층은 사실 문제가 없었습니다. 하류 계층, 중상층 이하만(당시에는 중상층이라는 개념이 없었을 테지만)
왕과 귀족들은 영향을 안받는, 밑에 있는 사람들만 고생하는 그와 같은 내용이었는데 맏이들의 죽음에 있어서는 왕과 귀족도 가리지 않고 모든 사람에게 재앙이 닥치는 내용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관점에서,
이 하느님을 우리가 좋아하기는 좀 어려울것 같습니다. 애들을 죽이다니..ㅠㅠ
이런 것들에 대한 생각을 해볼 수가 있을 것 같습니다. 단지 구약 신학적인 관점에서는, 구약 신학은 나중에 탈출기 20장부터 시작되는 계약의 책에서도 그와 같은 내용이 발견됩니다만,
구약신학적인 관점에서는 동태 복수(同態復讐)법이 정의(正義)로운 법입니다.
따라서 열번째 재앙인 맏이의 죽음은 ㅡ 파라오가 이스라엘에 아이들을 죽인 것처럼, 야훼도 이집트의 아이들을 죽인다는 동태복수적 의미로서 열번째 재앙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고,
탈출기 저자의 입장에서는 신학적인 변명으로 할 수 있는 첫번째 변명이 될 것이고,
두번째 변명은 야훼로서도 최선을 다했다. 앞에서 이런 재앙도 내리고 저런 재앙도 내려 봤는데, 그 아홉가지 재앙이 진행되어 올동안 파라오는 꿈적도 안했다.
따라서 열번째 극단적인 마지막 선택에 이를수 밖에 없었다.라는 신학적 변명에 이 두가지 내적 논리를 우리가 이해할 수 있을것 같습니다.
파라오에 그런 완고함, 완강함 때문에 결국 인간이 죽게되는, 그 중에서도 아이들이 죽게되는 엄청난 결과를 우리가 탈출기 텍스트 안에서 읽어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안에서도 마찬가지 입니다.
지금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수십년 전부터 생태적인 재앙에 관해서 경고해 왔습니다.
이렇게 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우리 주위에 있는 생태계와 공존해야지 이렇게 파괴하고 착취하고 개발하고 하는 것들은 인간에게 있어서 나중에 커다란 재앙이 될 것이다. 특히 우리 다음 세대들에게 ....
일본에서 후쿠시마 방사능 문제가 생겼을 때, 가장 큰 피해를 받는게 바로 아이들입니다. 아이들의 암, 발병률이 굉장히 높아지기 시작했다는, 특히 후쿠시마를 중심으로 해서 그와 같은 이야기들을 듣게 됩니다.
전 세계적으로도 아동의 많은 환경적인 질병에 관해서 이야기를 듣기 시작합니다. 무엇 때문에? 그 궁극적인 출발은 뭡니까??
인간의 욕심 때문에, 우리들의 탐욕스러움들 때문에 결국 누가 피해를 받느냐? 우리가 가장 사랑하고 가장 아끼는 그 다음 세대가 받는 벌에 관해서 우리들이 조금은,
근본적인 문제에 관해서 이 이집트에 있었던 파라오의 열가지 재앙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안에서 계속해서 진행되고 있는 그 문맥을 읽어 내는 것이 중요하겠습니다.
세상이 신부님께서 말하는 말씀을 좀 귀를 기울여 주셨으면 좋겠다고 하시며....
신부님은 자식도 없는데 돌아다니면서 강의하면서 이 이야기를 하는데, 자식있는 분들은 조금은 덤덤하게 그런 이야기들을 들으시는 것 같다고 하시며....
마지막으로 굉장히 재미있는 내용인데요,
히브리어에서는 축복하다(ברך)와 저주하다는 것이 단어가 왔다갔다 쓰입니다. 그래서 신부님께서 아담과 하와가 낙원에서 쫓겨나면서 하느님으로부터 벌을 받는데, 그게 정말 벌입니까? 아닙니까? 라는 말씀을 하셨었는데..
아담은 땀을 흘려서 노동을 해야하고, 하와는 아이를 낳아야 하는 그게 에덴 동산에서 쫓겨나면서 그들이 받은 벌인데,
일년 동안 열심히 일해서 소출을 얻는다는 것? 아니면 여자가 임신해서 아이를 낳는다는것? 물론 힘든 일이지만, 그것이 정말로 저주입니까? 축복입니까? 라고 생각을 했을 때,
우리들이 그것을 좀 다른 관점에서 볼수 있다는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어에서 '축복하다' 는 '저주하다' 의 완곡어법으로 자주 쓰입니다.
그래서 가장 대표적인게 욥기입니다.
축복과 저주 - 욥 2,9
욥이 2장에서 보면은 피부병이 나서 막 고통스러워 합니다. 그 다음 1장에서 보면 자식과 재산을 다 잃어 버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욥이 하느님을 계속해서 찬미하는 것을 멈추지 않자,
욥의 아내가 조금은 좋지 않은 소리를 합니다. 마치 하와가 아담을 유혹했듯이 그 아내가 욥에게 뭐라고 말하냐면? 욥2,9의 내용
하느님을 저주하고 죽어버려요. 라고 우리말로는 번역이 되어있지만,
히브리 말 성경에서는
욥 2,9 히브리말 성경 본문
"하느님을 저주하고 죽어버려요."
축복하고
따라서 직역하자면, 하느님을 축복하고 죽어버려요. 라는 말이 써있는데 그것은 왜냐? 히브리 사람에 관념으로는 "하느님을 저주한다" 라는 말을 전하고 싶더라도 그런 글을 차마 쓸수가 없는 겁니다.
그러니까 거기다가 '축복한다' 라는 동사를 쓴겁니다. '저주한다' 대신에
하지만 내용은 축복하는 게 아니라 하느님을 원망하고 저주하고 죽어버리는 그러나 하느님은 결코 저주받아서는 안되는 존재이기 때문에 히브리 사람들은 텍스트를 쓰면서 감히 그 단어를 쓰지 못하고 거기다가 축복한다.를
하지만 성경을 번역하는 사람들은 용감하게 뭐라고 번역했느냐??
저주한다. 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히브리 사람들 관념으로는 이 말을 도저히 쓸수가 없는 겁니다.
그리하여 그들이 이집트에서 나옵니다. 이집트 탈출,
그러면서 신부님이 의문 부호와 함께 다음과 같이 세 단어를 쓰셨습니다.
나온거냐? 아니면 떠난거냐? 아니면 쫓겨난 거냐? 내용을 읽으면서 분별해 보도록 합니다.
탈출 12,37
마침내 이스라엘 자손들은 라메세스를 떠나 수콧으로 향하였다. 아이들을 빼고, 걸어서 행진하는 장정만도 육십만가량이나 되었다.
그러면서 지금까지는 있지 않았던 여러가지 정보들이 등장합니다.
정보
º 라메세스(רעמסס)- 수콧(סכת)
º 60만
º 430년
라메세스, 수콧, 이집트를 떠나는게 장정만 60만 이었다.
그 다음에 시간 430년 이라는 시간이 등장합니다.(조금뒤에 등장)
하지만 우리에게는 도움이 안됩니다.
왜냐?
라메세스가 어딘지? 수콧이 어딘지? 모릅니다..
두번째 60만이 떠났다고 하는데?
이게 대단한 숫자입니다.
60만이 시나이 광야에서 40년을 지낼 수가 없습니다. 시나이 광야가 그렇게 넓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들, 60만이 그곳을 떠돌았다는 것은 생각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따라서 오늘날 사람들은 이 숫자를 믿지 않는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숫자를 보면 60만이라고 나오는데 ,
탈출 12,38
그 밖에도 많은 이국인들이 그들과 함께 올라가고, 양과 소 등 수많은 가축 떼도 올라갔다.
따라서 이국인들은 60만에 포함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면 점점 숫자는 늘어날 것입니다.
장정만 60만이라면, 전체 인구는 얼마가 될까요? 전체 인구는 최소한 이백만 이상
한 가구당 아이들을 서넛? 그러면 최소 이백만은 생각하게 되는 숫자입니다.
그런데 이 이백만이 시나이 광야에서 떠돌았다는 것을 어떻게 믿어야 될까?
민수기 11,21에서도 60만이라는 숫자가 나옵니다.
60만 - 민수 11,21
민수기 11장의 내용은 백성들이 먹을 것을 가지고 불평을 하니까, 야훼가 "너희한테 내가 고기를 먹게 해 주겠다." 라고 얘기를 합니다.
모세가 하느님을 잘 믿었었는데, 여기서는 "그건 좀 어렵지 않을까요?" 라고 얘기하는 겁니다. 모세가 하느님께 의심을 제기하는 장면으로, 점점 모세가 이러다가 약속의 땅에 본인도 못들어 갑니다.
그렇게 해서 60만 이라는 단어가 나왔는데, 여기서 등장하는 숫자는?
600의 1000, 이렇게 해서 60만이 계산이 되는 것입니다.
60만 이라는 단위가 우리나라에서도 "십" 자가 있고 "만" 자가 있는데 십자에 만자를 곱해서 60만 이라는
히브리 단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먼저 1000 단위 그다음에 다시 천 단위가 나오면서 백만을 얘기하게 되는데,
여기서는 육백 천 이라는 단어입니다. 그 천에 해당하는 , 엘에프(אלף)는 그것을 우리가 1000이라 부르지 말고 가문, 혹은 부대로 볼수 있지 않느냐…
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어떻게 번역하느냐면? 약 600 부대에 보병들이 이집트를 떠났다.
라고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해석이 어디서 무너지냐면 민수기 11장으로 얘기하는데, 이것도 우리가 600부대로 할수 도 있는데,
그런데 정말 문제가 탈출 38장에 가면 아예,
육십만 삼천오백오십명, 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탈출기의 저자에게는 60만,이 중요한 겁니다. 그때 나올때 60만이었다. 60만을 12지파로 계산하면, 지파당 5만 입니다.
그 다음에도 또 문제가 생깁니다. 그밖에도 많은 이국인들이 그들과 함께 올라가고,
이 이국인들이란 단어에 어감에는 어떤 뜻이 있냐면은? 섞였다. 라는 뜻이 있습니다. 우리말로 따진다면 순수한 의미로서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아니지만, 무언가 피가 섞여 있는 사람들로서 그런 어감을 갖고 있습니다.
"그 밖에도 많은 이국인들이" - 유다인과 다른 민족과의 혼혈계
똑같은 단어가,
이국인들(ערב 에렙)
º 예레 50,37 : 칼이 바빌론의 말과 병거들에게, 그곳에 함께 사는 모든 혼합 종족에게 떨어지니 그들이 여자처럼 된다. 칼이 그곳 보물 창고에 떨어지니 보물이 약탈을 당한다.
따라서 여기서는 바빌론에 가서 보니까 그곳에는 순수한 단일 민족도 있고 민족들 사이에 섞여 있는 민족들도 있더라. 라는 그 민족에게도 칼이 떨어지니까 벌을 받는 겁니다.
º 느헤 13,3 : 백성은 이 율법을 들고 이스라엘에서 모든 이방 무리를 분리시켰다.
에즈라와 느헤미야는 굉장히 혈통 중심에 신학을 보여줍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스라엘 사람과 결혼해야만 하는 이민족과 결혼하는 것을 금지하는 강한 경향을 갖고 있습니다.
따라서 여기서는 이방 무리라고 하는데 그게 뭐냐? 이스라엘 사람과 좀 섞여 있는 그와 같은 사람들을 따로 분리하는,
또는 이스라엘 사람들과 함께 살고 있지만, 이스라엘 민족과는 혈연관계가 없는 사람들을 함께 얘기합니다.
예레 25장, 예제 30장에서도 이 단어가 등장하는데 아마 이방 용병들을 염두해 둔, 그와 같은 표현인 것 같습니다.
무언가 순수하지 않은, 이스라엘 사람들로만 순수한 사람들이 아닌 다른 사람들도 이스라엘과 함께 이집트에서 나왔다. 라는 약간은 어렴풋하게 이해할 수 있는 표현입니다.
이게 얼마나 법적인 문제가 되는지 다음 단락에 가면은 이 문제를 아주 깊이 다룹니다.
탈출 12,39
그들은 이집트에서 가지고 나온 반죽으로 누룩 없는 과자를 구웠다. 반죽이 부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집트에서 쫓겨 나오느라 머뭇거릴 수가 없어서, 여행 양식도 장만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반죽 얘기는 정말 계속해서 나옵니다.
이 부분을 직역하자면, 다음과 같은 의미입니다.
신부님은 띄어 읽기를 다르게 하시고 읽으셔서,
이집트에서 쫓겨나오면서 가져온 아직 누룩을 넣지 않은 반죽(בצק)으로 과자(עגת)를 구울 수 밖에 없었다.(내지는 누룩 없는 반죽으로)
이제 테마가 약간 다른 시간적인 테마로
탈출 12,40
이스라엘 자손들이 이집트에서 산 기간은 사백 삼십 년이다.
사백삼십 년이 끝나는 바로 그날, 주님의 모든 부대가 이집트 땅에서 나왔다.
이것은 성경에서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산 기간은 400년이다. 라고 주장하는 장면(창세 15,13) 이 있습니다. 그것을 교정하고 있습니다.
그 숫자를 바꾼다는 것에는 분명히 의도가 있을 겁니다. 아무튼 시간적인 정확성을 강조하고 그것은 성경의 다른 부분에서도 반복이 됩니다.
이 구절에 내용은 탈출 12,17에 상응합니다. 단지 조금 다른 표현이 있다면 탈출 12,17절에서는 "너희 부대" 라고 이야기 하는 반면,
여기서는 야훼의 모든 부대, 라는 조금은 다른 표현이 쓰입니다.
그런데 이 야훼의 모든 부대,라는 표현은 탈출기에서 여기서만 등장하는 표현입니다.
탈출 12,42
그날 밤, 주님께서 그들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시려고 밤을 새우셨으므로, 이스라엘의 모든 자손도 대대로 주님을 위하여 이 밤을 새우게 되었다.
다시 한번 밤이 강조됩니다.
따라서 파스카 규정 중에, 우리 파스카 규정에는 정확히 그 대목이 아주 중요하게 등장하지는 않습니다만, 파스카 밤에 유다 사람들은 잠이 들어서는 안됩니다.
그래서 요즘에도 파스카를 유대인들이 지내는데, 유다인들이 어떤 것을 지내냐면 누룩 없는 빵을 파스카 예절을 하면서 다 먹지를 않습니다.
반만 먹습니다. 그리고 그 나머지 반을 집안 곳곳에다가 숨겨둡니다. 그러면 아이들이 그것을 찾아여. 그걸 찾아가지고 오면은
어른들이 선물을 줍니다. 근데 그 놀이에 목적이 무엇인가??
애들이 잠들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아이들은 밤새서 빵을 찾아야 합니다.
그게 서양 풍습에는 그걸로 남아 있습니다. 부활 달걀이 그런 역할을 합니다. 우리는 성당에서 이쁘게 해가지고 신자들끼리 서로 나눕니다.
본래 서양에 천주교 마을이 있다면은, 천주교 마을에서 신부님이랑 마을의 사목위원들이 그 부활 달걀을 곳곳에다 숨겨둡니다.
그럼 아이들이 부활절날 그것을 찾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신부님에게 가져오면은 신부님들이 거기에 대해 상을 주시는 거로 남아 있습니다.
그렇게 밤을 새우셨으므로, 이 밤은 잠들어서는 안된다. 라는 겁니다. 우리도 그렇게 잠들지 않아야 되는 날이 있습니다.
설입니다. 설되는 날 자면은 눈썹이 하얗게 쉰다...
생각해 볼 것들이 몇가지 있습니다.
앞서 말씀해 주신 대로 37절에서는 라메세스와 수콧이라는 장소가 언급이 되는데, 오늘날 어떤 장소인지는 모르겠습니다.
단지 창세 33장에 보면, 야곱이 에사우와 헤어진후 수콧에 가서 초막을 만들었다고 전해지는데, 그 장소가 탈출기에서 나온 장소와 같은지 아닌것 같습니다. 야곱과 에사우가 헤어진 곳이 가나안 근처니까.
수콧
야곱이 에사우과 헤어진 후 가서
초막을 만든 수콧은 가나안 근처 (창세 33,17)
수콧
이집트를 나온 이스라엘이
향한 곳 수콧은 이집트 땅 근처 (탈출 12,37)
다른 장소인데 두 장소가 동일한 이름을 갖고 있는 거로.
문제는?
수콧(סכת)은 수카(סכה)의 복수형인데, 수카가 초막을 뜻합니다. 따라서 초막과 관계되어 있는 장소의 이름은 언제나 수콧이라고 불리는 것 같습니다.
또한 나중에 이집트인들이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40년을 지낸 것을 기념하는 축제도 역시 수콧이란 이름으로 불립니다.
왜냐? 광야에서 40년을 있으면서 초막을 짓고 이동하면서 살았으니까. 그래서 초막절 이라고 부르는데, 우리가 얘기하고 있는 무교절 또는 파스카가 3월 보리 축제와 연결되어 있다면은 이 초막절은 9월 밀축제와 연결되있습니다.
따라서 봄을 시작하면서 파스카과 무교절과 같은 축제들이 추수한 보리와 함께 시작하는 그와 같은 축제라면,
초막절은 9월, 가을이 시작하면서 밀축제와 연관되어 있는 축제입니다.
그 모든 바탕에는 수카, 수콧, 초막들 이라는 표현이 숨어있고 또 그 어근은 사캌(סכך)이라는 어근을 갖고 있는데, 사칵의 의미는 무언가를 덮는다. 라는 의미입니다.
60만 이라는 숫자는?
60만 탈출 12,37
다소 과장된 숫자로 다윗과 솔로몬 시대 싸울 수 있는 사람 수로 추측
그래서 몇몇 학자들은 이 60만이 탈출기에 인구수가 아니라 왕정시대(다윗과 솔로몬 시대)에 싸울 수 있는 사람들의 숫자.
대단한 겁니다. 우리나라 군대가 아마 60만 아닌가요? 우리나라 군대가 60만 입니다. 아마 군사협정으로인해 그 숫자가 넘지는 않을 겁니다.
이미 60만 대군을 갖고 있는 겁니다.
탈출 12,38절?
앞서 말씀하신대로, 이국인들이라고 얘기하는 것이 정확하게 그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에 관해서 문제가 생기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다음 paragraph(단락)으로 가면은 이국인들과 비슷한 하지만 다른? 조금은 법률적인 전문적인 용어들이 생깁니다.
이국인들 탈출 12,38
- 외국인, 거류민, 이방인들
과 같이 법률적으로 구분하는 용어들이 생깁니다.(자세한 것은 다음 단락에서 설명)
마지막으로 이젠 재밌는? 과연 400년이냐??사백 삼십 년 이냐?
이것에 대한 이야기를 좀 부연해서 설명해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두둥~!!)
첫째 창세 15,13은 400년을 얘기합니다.
창세 15,13
"너희 후손은 남의 나라에서 나그네살이하며
사백 년 동안 그들의 종살이를 하고 학대를 받을 것이다.
탈출 12,40은 430년을 애기합니다.
탈출 12,40
이스라엘 자손들이 이집트에서
산 기간은 사백삼십 년이다.
창세 15,16 에서 구약에서 한 세대는 100년으로 계산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15,16에서 가나안 땅으로 돌아오는 네째 세대에 관해서 언급하는데,
창세 15,16
그리고 그들은 사 대째가 되어서야
여기로 돌아올 것이다.
첫번째,
따라서 사백년을 얘기하고 네째 세대를 얘기하니까 사백년을 얘기하는 게 아닌가? 그리고 나서 생각해 보니까 그와 연관된 사건이 하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아들을 낳았는데 백살에 이사악을 낳았습니다.(창세 21,5) 그러니까 한 세대를 백 살로 보는 그와 같은 틀이 여기 있었던 것이 아니냐!? 라는 의견이 있습니다.
사백년
한 세대를 백 살로 보고 4세대 사백 년!
두번째는,
세대로 번역되는 히브리어 단어는 도르(דור)가 있습니다. 한 세대, 두 세대..
그런데 창세 6,3 노아의 이야기와 함께 하느님께서 인간을 보니까 자꾸 악해 지더
라...그러니까 오래 살게 하면 안되겠다.
그러면서 한 세대를(한 사람의 수명을) 백이십 년으로 규정(창세6,3)
그 백이십 년을 사는게 모세입니다.
사백년
그런 과정안에서 네째 세대란? 앞선 세대를 360년으로 생각하고(120× 3)
광야에서의 40년을 포함 사백 년!
라고 숫자를 맞추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세번째로는,
탈출 6,14-27 모세와 아론의 족보가 나옵니다. 거기에서 보면,
탈출 6,16 에서 레위가 산 햇수는 "백삼십칠 년"
탈출 6,18 에서 크핫이 산 햇수는 "백삼십삼 년"
탈출 6,20 에서 아브람이 산 햇수는 "백삼십칠 년"
사백년
- 이 셋의 수명을 더하면(레위 + 크핫 + 아브람의 수명) 사백칠 년!
거의 사백이라는 숫자가 맞쳐 집니다. 이것도 사백? 430과 연관시켜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그와 같은 질문들..
네번째로는,
이정도 되면은 굉장히 집요한겁니다.
창세기에서 성조사들의 등장하는 숫자를 더하면 215년이 나옵니다. 그것에 2를 곱하면 (215×2= 430) 사백삼십 년!
이것을 바탕으로 몇몇 유다 전통은 성조사 기간(215년)과 이집트의 종살이 기간을 합해 사백삼십 년!
따라서 성조사가 215, 이집트 종살이 기간을( 아브라함도 이집트에 한 번 갔으니까) 사백삼십 년!
라는 유다 전통이 있습니다. 이게 왜 그러냐하면, 나중에 유다인들이 약속의 땅에서 쫓겨나서 유럽으로 건너와서 삽니다.
그 지역이 두 지역으로 나뉩니다.
독일과 동유럽 지역(아슈케나짐)과 그다음에 스페인 지역(세파르딤)으로
독일과 동유럽 지역에서 사는 유다인들을 아슈케나짐, 이라 불리고 스페인 지역은 세파르딤, 이라고 불리는데 독일과 동유럽 쪽에 살고 있던 아슈케나짐은 우리가 알고 있는 약간 철학적인(랍비 전통인 아주 철학적인) 유다주의가 거기에서 발전해 자리잡습니다.
그래서 조직적인 유다 전통주의가 발전을 합니다.
세파르딤 지역에서는 신비주의적인 유다주의가 발전합니다.
그래서 한번 쯤 들어봤을 법한 ...숫자 가지고 이렇게 하고, 몇번째 나오는 글자마다 더하니까 어떤 단어가 되고..이러한 세파르딤 전통에서 등장하는 카발라, 라는 유다신비주의자들이 합니다.
그래서 오늘날까지도 그런 유다신비주의자들에 어떤 전통이 정해지면서 어떤 어떤 것을 풀어보니까, 몇째줄 몇째줄에 몇번째 단어를 보니까 히틀러의 이름이 나오더라, 뭐가 나오더라...하면서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과 구약성경 이런식의 신비주의 적인 해석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아무튼 그런 전통과 맞닿아 있는 전통안에서는 215년+215년 해가지고 430년을 얘기하는 그런 해석을 하기도 합니다.
오늘날 현대 성서학자 중에 카슈토(Cassuto)라는 사람은 430 라는 숫자를 60×6+70 = 430로 이해하고 , 플라스타리스(Plastaras)라는 사람은 40× 12- 50= 430로 해석을 합니다.
여기서 -50은 광야생활 40년과 가나안 정복 10년을 더한 숫자라고 이분은 이야기를 하는데, 가나안 정복의 기간이 10년이었다는 것은 성서적인 근거가 있는 기록이 아닙니다.
430은 예제키엘 예언서에서도 의미있는 숫자로 등장합니다.
예제 4,5-6에서 예언자는 왼쪽으로 삼백구십 일, 오른쪽으로 사십일을 누워있어야 합니다. 하느님이 이것을 예언적 징표로 예언자에게 명령을 합니다.
굉장히 고통스러웠을 것 같습니다. 합치면 430일 입니다.
왜? 430일이냐?
왜냐하면 솔로몬부터 치드키야의 시간이 430년입니다. 어떤 뜻이냐 하면?
성전을 짓고, 그 성전이 무너질 때까지의 기간이 430년 입니다.
따라서 430년 이라는 그 숫자가 하느님 성전의 시간이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유다인들에게 굉장히 의미있는 숫자가 되었을 것이고 그 430 이라는 숫자가 이집트에 노예생활에 숫자로 역으로 반영되었을 수도 있겠다. 라는 그와 같은 해석이 가능합니다.
그리고 유배 생활은 모두 50년입니다. 430+50= 480,
480은 열두 지파가 40년, 광야에서 있었던 40년의 시간을 열두지파로 곱해서 계산해 보면 480년의 시간이 나옵니다(12×40= 480)
이런것은 밤세고도 하실 수 있으십니다(!!) 여기까지만 하고 참으시겠습니다.^^
1열왕 6,1따르면 솔로몬 통치 4년에 라고 얘기하면서,
1열왕 6,1
이스라엘 자손들이 이집트 땅에서 나온 지 사백팔십 년, 솔로몬이 이스라엘을 다스린 지 사년째 되던 해 지우 달, 곧 둘째 달에 솔로몬은 주님의 집을 짓기 시작하였다.
숫자로 계산해 보면,
솔로몬의 왕위 등극은 주전 960년 경이라고 생각하니까 그때부터, 이집트 탈출은 주전 1436년이 됩니다.
하지만 그것을 오늘날 주석학자들은,
따라서 그때에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탈출했다.라고 계산하는 사람들은 별로 없습니다.
오히려 람세스2세의 시대로 계산하는 경우가 많고 이 사백팔십이라는 숫자는 약간은 신학적인 숫자로,
사백팔십 년
40× 12지파=480의 숫자로 신학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일반적인 경향입니다.
그 모든 숫자를 다 더해보니까 창세기에서 나오는 숫자들(누구는 몇살을 살고....)을 다 더해 보니까?
아담부터 쭈우욱 계산해본 탈출 사건의 기원은 창조후 2666년 이더라는 숫자의 계산이 나옵니다.
이런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지구 종말에 관해 계산이 나오겠지만...2000, 2000,2000 해서 6000년? 아니면 8000년 이렇게 해서 종말론을 전개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단지? 그런것에 대해서?
우리들이 "야! 뭐?!! 그렇겠구나..!" 라는 믿음을 가지실 필요는 없을것 같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렇게 숫자를 가지고 계속해서 얘기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세상을 세우신 계획, 그 질서에 맞춰 세상이 하느님의 뜻에 따라 움직이고 있다. 하느님의 뜻에 따라 그들의 역사 안에서 하느님이 원하시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라는 것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들이 생각해야 할 것은?
양적인 의미에서의 숫자(시간)가 아니라, 질적인 의미에서의 시간인 것 같습니다. 배가 고프니까 밥먹을 시간이 됐고, 피곤하니까 잠잘 시간이 되었다. 또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을 보니까 이젠 인류가 회개하고 , 지금까지 살았던 것들처럼 살지 않고 우리 주위에 있는 생태계와 함께 사는, 또 그렇게 마음을 쓸 그와 같은 시간이 되었다.
우리 교회의 모습을 보고, 우리 교회에 지금있는 그와 같은 전체적인 흐름을 보니까 이제는 교회가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쇄신할 시간이 되었다.
나 자신의 삶을 되돌아 보니까, 내게 이제는 회개할 시간이 되었다. 이러한 질적인 의미에서의 우리들 자신의 삶과 그런 실존적인 삶과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 공동체에 역사 안에서 하느님의 시간을 발견할 수 있는 그 지혜를 깨닫는 것 !!
그것이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우리들의 올바한 태도가 되지 않을 까? 라고 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히브리어는 최승정신부님의 탈출기I 참조하였습니다 ^^
삭제된 댓글 입니다.
네^^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